우리 아이 똘똘했던 거 모르는 사람 없게 해 주세요
대뜸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뭣한 감은 있지만, 애기 syo는 참, 똘똘하고 귀여운데 심지어 착하기까지 한 무진장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그랬던 녀석을 도대체 어떻게 오늘날 이토록 멍청하고 지저분한데 맙소사, 성격까지 드러운 빨강이놈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이것 참,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리 승냥이 같은 미제 자본주의 앞잡이들의 음산한 손길이 이랬어! 이 사회가 날 망쳐 놨다고! 으앙, 이생망......
실컷 울었으니 다시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면, 애기 syo는 똘똘이도 그런 똘똘이가 없다싶을 만큼의 트루똘똘이였다. ‘사과 세 개를 먹고 두 개를 다시 사 왔더니 네 개가 남았다면 원래 사과는 몇 개였는지 물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사과의 개수를 x로 놓는 미취학 아동’이 송파구 인근에 득시글거리는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 사는 어린이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겠지만, 그때는 국민 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떼지 못한 아이가 절반은 되는 시절이었다!!
그런 옛날 옛날 한 옛날에, 경상도 어느 시골 마을에 syo라는 다섯 살짜리 아이가 살았어요. 하루는, 엄마가 syo에게 한글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엄마는 syo의 손을 잡고 장날 읍내로 나가, 한글 가나다라마바사가 칸칸이 들어있는 커다란 포스터를 샀어요. 이걸 이용해서 syo에게 한글을 가르쳐야지. 엄마는 의욕에 가득 차, 다시 syo와 함께 집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이를 어째, 정말 근래 보기 드문 의지박약에 저질 체력까지 갖췄던 엄마는 먼 길을 걸어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세상 귀찮았어요. 어떤 엄마는 불 꺼놓고 애는 글쓰기 시키고 자기는 떡을 썰었다는데, 아놔, 난 나야. 석봉맘이야 어쨌건 내가 알게 뭐람. 엄마는 그 포스터를 방문에 띡 붙여놓고는 주방으로 가서 사과 주스나 벌컥벌컥 마셨어요. 그때, syo가 엄마를 불렀어요. 엄마, 이거 사자지? syo는 포스터에 있는 사자 그림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맞아, 사자야. 엄마, 이건 사과지? 그래, 그건 사과야. syo야 말 나온 김에 사과 주스 마실래?
그렇게 엄마는 언젠가 좋은 날 오면 한글도 가르치고 그러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을 보냈어요. 그리고 다음 장날이 왔지요. 엄마는 syo의 손을 잡고 장터로 향했어요. 그런데, 장터로 가는 길목에서 syo가 갑자기 외쳤어요. 청도사과! 우리 syo 사과 먹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봐봐, 청도사과! 엄마가 고개를 들자, 전봇대 사이에 걸린 현수막에 커다랗게 ‘청도사과’라고 쓰인 게 아니었겠어요? 아니, 지금 저걸 읽은 거야? 어떻게?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어요. syo는 어머님, 지금 되게 아마추어 같은 거 아십니까. 아, 이것 참 이러시면 제가 곤란하죠.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지요. 청도사과, 맞아, 아냐?
어떻게 혼자 한글을 뗐는지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지만, 이 차는 소나타인데 ‘SONATA’ 라고 돼 있는 걸 보니, S O N A T A가 차례대로 ㅅ ㅗ ㄴ ㅏ ㅌ ㅏ 인가 보군, 하는 식으로 동네 마실 다니면서 혼자 알파벳 발음을 익혔던 열 살 때 경험으로 미루어 추측건대, 아마 한글도 그런 식으로 익혔던 것 같다. 그리하여, 우연히 발견한 다 낡아 비틀어진 노트의 맨 앞장에는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syo가 낑낑대며 그렸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들만 놓고 봤을 때, 아마도 syo가 세상에 내 놓은 것 중에 가장 오래 된 문장일 바로 그 한 줄을 여기 옮긴다.
“나무를 많이 심어야지”
난 저 문장이 왜 이렇게 착하고 귀엽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식목일이었던 거야? 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예전에 걸음마를 어떻게 배웠는지를 몽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이제 걸을 수 있을 뿐, 더 이상 걷기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아무튼 산다는 건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일과 비슷한 것인다. 떼어내어 다시 붙이려다가는 못 쓰게 된다. 먼지가 들어갔으면 들어간 대로, 기포가 남았으면 남은 대로 결과물을 인내하고 상기할 수밖에 없다.
_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우리가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착하게 살았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인생을 망친 장본인을 찾아 종종걸음을 칠 때도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그저 담담히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발견해 주기만을 바라면서, 우리가 그 순간에 머물러 주기를 기대하면서.
_ 한수희,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_ 김중혁, 『뭐라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