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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이런 책이 연이어 걸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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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니체의 인간학>이라는 책에서였다. 그 책은 정말, 이제껏 syo가 읽은 모든 니체 관련 책 가운데 단연 손에 꼽는 쓰레기였다. 그 책은 니체의 인간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한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인간학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옳은 인간이라 생각하는 인간상을 강요(진짜 거의 강요 수준이었다)하기 위해 니체의 권위를 빌려온 것이다. 그가 니체에게서 훔쳐온 것은 그 유명한 ‘르상티망’인데, 그 이야기를 니체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무릎을 탁 치며 개안의 느낌을 받았던 syo가, 이 양반의 책을 읽고 있자니 이젠 니체조차 싫어질 지경이었다. 와, 이 사람, 살짝 관종 각인데, 하며 책을 덮었던 기억이다. 관종은 항상 독특한 견해를 세게 말함으로써, 참신함을 훌륭함으로 착각하는 소수의 지지를 받아 먹으며 자신의 에고를 배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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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16페이지인데, 저자가 벌써 사고를 친다. 이렇게.
차별 문제는 언제나 ‘역차별’ 이라는 새로운 차별을 대동한다. 일례를 들어보겠다. 2008년 11월 8일자 조간 아사히신문에 62세 남성 독자가 투고한 <휴대전화 주의 줬다가 치한 누명>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어린 아가씨’가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어서) 나와 동년배로 보이는 남성이 아가씨의 왼쪽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끊어.” 하고 말했다. 뒤돌아 본 아가씨는 “치한이야!” 하고 소리쳤다. 남성이 “치한이라니. 전화 좀 끊으라고.” 하자 아가씨는 “어깨 만졌잖아요.” 하고 대꾸했다. (후략)
그녀가 조금만 더 공격적이었다면 그를 정말 치한으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긴 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을 수도 있다. 여성에게 자행되는 명백한 치한 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은 모조리 벌하려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다. 이를 일종의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16)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지점에서 벌써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야 하나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우선 지엽적인 부분부터 쳐내자면, ‘아가씨’가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한 것은 공중도덕에 비추어 비난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뜸 “끊어.”라고 말하는 ‘62세 남성’ 독자님의 태도 역시 무례하기로 보자면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나보다. 우리가 ‘62세’, ‘남성’이라는 딱 두 개의 정보만 가지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특정 이미지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못 가슴 아픈 지점이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다.
논점은 도대체 저 여자가 남성을 진짜 치한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치한으로 ‘몰았다'고 볼 근거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그건 그저 여성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은 여성에게 자행되는 ‘명백한’ 치한 행위가 아니라는 ‘62세 남성’으로서의 본인 판단일 뿐이다. 당사자는 전화 통화중에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만지는 감각을 느꼈고, 뒤를 돌아봤더니 무섭게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가 있어서 정말 치한으로 생각하고 크게 놀랐을 수도 있다. 당신이 ‘엉덩이 쯤 만져 줘야 치한이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당신은 치한 행위의 피해자인 여성도 아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은 모조리 벌하려는 상황’이라는 말은 얼토당토않다. 여성은 ‘치한이 내 어깨를 만졌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저 글을 쓴 사람은 여성이 ‘이 사람이 내 어깨를 만졌어, 이걸로는 아직 치한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깨를 만졌으면 곧 엉덩이도 만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조금쯤은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벌하자.’ 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세상에 역차별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저런 상황을 역차별로 생각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사실 syo는 역차별이라는 말도 진짜 조심히 사용하려고 애쓴다. 차별받는다는 주장이 때로 역차별을 낳듯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이 ‘역역차별’을 낳을 수 있다. 그러면 한쪽이 역차별로 한 대 얻어맞는 동안, 반대쪽은 원래의 차별과 역역차별로 두 대 얻어터지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산술적으로 따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렇게 소심하게 괄호에 한번 넣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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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명하고 깔끔한 이미지의 교수가 여고생 치마 속을 엿보려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일이 있었나 보다. 그 사건을 접하고 저자는 아사히신문에 이런 내용의 칼럼을 싣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은, 이렇게 성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의심할 여지없는 끔찍하고, ‘이상한’ 행동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목욕탕을 엿보거나 술에 취해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동이, 하나의 생명체로만 사람을 보자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행동을 사회는 규제하면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난을 더한다. ‘제도’가 당연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 그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저 옳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이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오랫동안 자행되어온 폭력이다.
그러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싫으면 남들과 입을 맞춰 “변태!”라고 외치며 일단 성범죄자로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위험해진다. 마치 마녀재판에서 “마녀”라고 외치며 침을 뱉지 않는 사람이 어느새 마녀로 몰리는 것처럼. (17 18)
도대체 어디부터 까야 되는지 답이 안 나오는 글이다.
하나. “목욕탕을 엿보거나 술에 취해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동이, 하나의 생명체로만 보자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는 것은 순수한 당신의 의견이다. 나는 그걸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 지금.
둘. 설령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해서 곧바로 옳은 행동인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철학 공부한 배운 분께서 ‘자연주의의 오류’ 모르시나? 이런 것조차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좋다. 그렇다면, syo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언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명치를 세게 때리는 것이 ‘하나의 생명체로만 사람을 보자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자, 이제 와서 명치 한 번 대 보시죠.
셋. 가장 큰 문제는 이 멍청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데 있다. “제도가 당연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글들은, 앞의 가슴 엉덩이 운운하는 멍청한 글을 쓴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똑똑하고 일리가 있다. 혹시 멍청한 말을 해 놓고, 그 말을 비난하려 하면 그 뒤에 있는 똑똑하고 옳은 말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략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syo가 보건대 그것보다 이 양반은 지금, 자신의 멍청한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깨닫기에는 너무 똑똑한 것이다. 이렇게 똑똑한 내가 어떻게 멍청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은 반쯤은 구제불능이다. 꼭 젠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글을 보면 정말 이런 사람은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싶을 정도다.
담당 편집자가 검토한 후 아슬아슬하지만 ‘괜찮겠다’는 승낙을 얻었음에도, 기사가 나올 예정이었던 전날 밤 늦게 펑크가 났다. 담당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범죄를 정당회하는 기사를 실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화가 났는데, 항상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잃지 않겠다고 공언한 언론이 치한 박멸이라는 현대 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권력’에 무비판적이라는 점, 게다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을 모조리 묵살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 기만과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18)
철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남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하게 하는 권력은 약하다. 더 큰 권력은 남이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게 한다. 당신이 쓴 저런 쓰레기 같은 글을(심지어 편집자의 말마따나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다!) 세상에 떳떳이 토해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얼마 없다. 당신이 무명소졸이었으면 저따위 글은 ‘아슬아슬하지만 괜찮겠다’는 평조차 받지 못하고 바로 나가리였다. 즉, 저 글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권력’이 통하지 않았거나 당신의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아서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또한,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면 그것을 ‘비판’이라고 보지 않고 단지 ‘권력’으로 묵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집자가 충분히 정당한 근거를 내세워 당신의 견해를 거절했는데도.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비판’받을 수 없는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견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중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너무도 옳은 의견을 거절했다면 그것은 힘과 위계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있다. 다수가 주장하는 바가 있으면 그 주장에 동의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나머지 소수의 입장도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면서 스스로를 균형자, 객관성의 지배자로 굳게 착각해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무고죄를 저지른 사람은 자기가 당했다고 거짓말한 그 범죄와 동일한 형량을 매겨야 한다며 목소리를 드높이는 남자들의 대화 자리에 끼면,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진짜 피해를 당한 여성의 인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여성들이 대화하는 자리에 가서는 무고에 희생당하는 남성의 인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양비론적 태도가 도덕적으로 옳은지는 여러 가지를 고찰해봐야 하겠지만 확실히 도덕책적으로는 옳게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전할만큼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없는 존재고, 그러다보니 저런 유형의 인물은 자신의 생각이 모든 자리에서 다 인정받으리라고/인정받아야 한다고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일기에 쓴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편파적이다. 내가 아무리 잘 설명을 해 줘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논리도 없는 것들. 무슨 일이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좋지 않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편파적이다. 그리고 당신도 누구 못지않게 편파적인 세상 사람이다. 설령 객관적/중립적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쳐도, syo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객관적이라고 봐 줄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 양반도 그렇다. 무조건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균형을 잡는 것을 넘어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균형의 꼭지점으로 지정하려 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경사면에 서 있는 반편이로 만든다. 특히 다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군중 심리에 휩쓸려 그저 자기 생각 없이 몰려다니며 다수로서의 횡포나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향이 심해지면 이내 다수 의견이라면 일단 무조건 브레이크를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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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계속 읽어나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또 굉장히 멀쩡하면서도 지혜로운 문장들도 함께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을 다루는 데 있어 최대의 적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차별들이 생각하지 않아서, 즉 사고의 나태함 때문에 발생한다.” 크- 명문이다. 저자한테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차별 문제에 있어서 ‘이는 차별이 아닌 구별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하다’는 말을 인습적/비반성적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기 때문이다” 크-
이 훌륭한 문장들을 자신의 이상한 견해를 뒷받침하는데 쓰지만 않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사회 전체를 한 번에 전면적으로 '올바른 사회'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회가 공정하고 누구에게나 선을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성숙한 어른'의 수를 조금씩 늘려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근현대 일본 사회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_ 우치다 타츠루 외,『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다른 누군가가 분명히 겪은 피해의 경험을 함부로 축소하는 것만으로 이미 그는 한 번의 실질적인 가해를 한 셈입니다. ....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의 토대를 키웠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인 양 가해에 일조해 살아왔거나, 적극적으로 가해했거나, 셋 중 하나입니다.
_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선을 규정함과 동시에 악이 드러난다.
선(善)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이 따먹은 과일이 선과 혹은 악과가 아니라 선악과였음은 지당하다. 선한 것을 규정할 때마다 그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는 악으로 치부된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_ 이지원,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좋은 글, 빼어난 글, 읽을 만한 글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논문(학문?)과 '잡문'의 구별을 지양한다. 그리고 이를 구분하는 사람일수록 그 지성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다. 글은 정치적 입장과 문장력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학문, 잡문, 예술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트로트와 클래식에는 위계가 없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수준이 아니라 기호의 차이다. 이와 달리 글은 질적 차이, 수준의 차이가 크다. 좋은 글은 읽는 이의 정치적 입장이나 기호와 상관없이 합의된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