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의 뜻을 품고 죽은 사람마냥 공부만 하겠다며 서울에 올라와 놓고선 1, 2월 꼬박 한 달에 20권씩 읽었다. 미친 놈. 광탈의 향기. 그리하여 이를 악물고 3월에는 한 권도 읽지 않았다. 3월 말일, 오늘은 독서기록을 남길 일이 없다는 사실에 정말 뿌듯(?)했다. 나도 한다면 하는군. 의기양양하게 4월을 맞이했다. 그러나 자만은 항상 방심을 낳는 법. 어쩐지 정신을 차려보니 4월에는 44권을 읽고 말았다. 444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으흑, 하다하다 독서 요요라니, 꺼지라 그래, 지옥으로 꺼져버리라 그래..... syo는 역시, 죽으나 사나 한 달 평균 20권은 읽게 만들어져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망할 것이다, 내 인생은.

 

201804 : 44

 


1. 아무튼, 서재

: 책이라는 물건이 사람을 적시면 사람은 각기 다른 색깔로 빛난다. 나는 나와 당신이 얼마나 비슷한 사람들인지 알아채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책을 지목한다. 동시에 나와 당신이 얼마나 제각각의 사람들인지 판별하는 일 앞에서도 책을 제일 먼저 꺼내들 것이다.

 + "일반적인 소설 크기의 책을 간결히 꽂기 위한 칸의 적정 높이는 25m이다."(31) 라는 문장은 롯데월드타워를 한 방에 복층 원룸으로 만들어버린다.

 + "1978년 프랑스 혁명은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71) 라는 문장은, 자유평등박애를 나보다 몇 살 많긴 해도 이야깃거리가 겹쳐 말이 잘 통하는 형 정도로 취급하게 한다.

 

2.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 기승전사랑. 예술도 사랑. 사랑도 사랑. 사는 게 다 사랑. 뭐 그럼 또 어때. 사랑 좋잖아. 좋긴 한데,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말들. 무시로 마음 펄럭거리는 청소년들의 가슴에는 착 들어맞겠으나, 좀 살아보면 알게 되지. 이놈의 세상이 사랑에게 무중력 혹은 무균실은 아니라는 것쯤.

 

3. 번역청을 설립하라

: 핵공감. 진짜. 제발.

 

4.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 낄낄 웃다가 끝났다. 확실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맞춤법 책. 저자의 필력이 예사롭지가 않다. 다른 작품을, 이를 테면 에세이 같은 거, 기대해 본다.

 



5. 신영복 평전

: 신영복 선생님의 높으신 삶에다 나 같은 졸자가 한 마디 더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삼웅 선생님은 물론 평전으로는 독보적인 존재이시지만, 솔직히 글맛이 좀 고루한 데는 있다. 아무래도 슈테판 츠바이크가 되실 수는 없을 것 같다.

 

6.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 시상식장에서 바로 트로피를 경매 붙여 팔아치운 파격에 비하면 조금은 조용한 글들이지만, 파격을 욕심내지 않는 그 태도에서 오히려 그녀의 파격이 연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7. 아무튼, 망원동

: 나보다 딸랑 두 살 많은 저자는 나보다 무려 두 배는 세심하고 다정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자기가 살아온, 자기를 성장시킨 공간에 대해 이만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작가를 꿈꾸면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미 난 포기했지. 후후.

 

8. 신문이 보이고 뉴스가 들리는 시사인문학

: 책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책이 너무 많아서 인문학이란 단어가 도대체 뭘 가리키는 말인지 알아채기란 점점 힘들어진다.




9. 혼자 하는 공부의 정석

: 너무 절박할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이런 책도 보게 되는 건데, 지푸라기가 너무 지푸라기라서 지금 손에 든 이 지푸라기를 어떡해야 하나 모르겠다.....

 

10. 배우는 법을 배우기

: 뭔가 달인, 구루의 포스가 난다. 에빙하우스 곡선 따라 복습 잘 하고 반복 많이 하고 어쩌고 저쩌고 써 있는 그런 책(위의 책....)하고는 클라스가 다른 느낌. 대증요법이 아니라 체질개선으로 질병을 예방하는 방식이랄지. 밑줄 오지게 그었다.

 

11. 이 짧은 시간 동안

: 시는 금방 잊히겠지만 그래도 단 한 줄은 오래 묵혀 두고두고 곱씹겠다. "이제는 아무도 내 눈물로 소금을 만들지 않는다." -

 

12. 축복받은 집

: 대체 뭘 먹고 뭘 읽고 뭘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소담하고 때론 단조롭기까지 한 문체가 날아가 맞히는 자리가 정확하고 적확하여, 특별히 밑줄 하나 그은 것 없어도 감동에 젖는다.




13. 골목 바이 골목

: 장소를 잡아채 이야기로 빚어놓는 능력은 참 부럽다. syo는 사람을 가지고 글을 만들 줄을 겨우 알 뿐이고, 이렇게 공간이 씨앗이 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보면 일단 경탄부터 하고 본다. 그럼에도, 좋은 에세이를 만드는 요소 가운데는 분명히 '읽는 사람의 기분' 같은 것이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하고 시작했는데, 글을 좀 쓰는군, 으로 책을 덮은 것은 아마 내 탓일 거야.

 

14. 만화로 보는 세기의 철학자들 폭력을 말하다

: 이런 만화는 일본에서 잘(그리고 종종) 만드는데. "폭력"이라는 주제를 놓고 몇몇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 일부를 잘라내고 요약하여 그림에 버무린 책. 그러나 이렇게 재미가 없을 거면 뭐하러 굳이 만화로 꾸민 걸까. 요약서나 입문서로써도 그다지 쓸모가 있지 않은 허망한 책.

15. 눈앞에 없는 사람

: 아름답다는 생각은 자주 들었지만 한 권을 다 덮을 때까지도 어쩐지 마음자리는 요동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주파수? 독해력? 어쩌면 읽는 순간의 감정 상태가 문제일수도. 이런 부분이 좋았느니 싫었느니 말할 수 있을 만큼 읽어내질 못했으니 무슨 평이 가능할까. 아니 어쩌면 읽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평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16. 아무튼, 피트니스

: 몸은 언제나 숙제 같다. 마음이라고 그리 멀리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몸과의 거리가 여실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점차 작은 움직임에도 숨이 가쁘다. 그러고 나자, 이렇게는 멀리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몸과 마음이 각각 한 마리의 외발짐승이 아니라, 두 발 달린 짐승의 왼발 오른발이라는 것, 그러니까 지금 나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중이라는 것도.




17. 한 글자 사전

: - 내가 잘 쓰면 어쩐지 웃고 싶어지지만 끝까지 안 웃고, 남이 잘 쓰면 괜히 웃기 싫지만 이내 웃어 본다.

- 나도 두 개 달고 그녀도 두 개 달았는데 보이는 게 세상 다르다.

- 그래서 아무래도 나는 안 되겠다.

 

18. 세상에서 가장 쉬운 회계학

: 책 뒷면에 쓰여 있다. "재무 3표를 전문 용어나 숫자 없이 스토리텔링으로 설명한다!" 이게 곧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이다.

 

19. 직장인이여 회계하라

: 저자가 스스로 회계공부의 레벨 0인 책이라고 밝힌 바, 쉽고 간단하긴 하다. 그러나 그 말은 또한 이 책 한 권만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20. 김상욱의 과학공부

: 그런 카피가 있었다. "과학을 아이들에게 돌려주자." 그러나 이 무지막지한 시대에 과학을 되돌려 받아야 할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이 우리에게 왔다. 저기 골목 모퉁이에, 과학이 수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다. , 이리 와, 같이 놀자.




21. 기억의 몽타주

: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듯, 소설이란 단지 필력만으로 잘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syo가 사랑해마지않는 류동민 선생님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의 번역과 교열을 둘러싼 짧은 회고 소설과 그 소설에 대한 자기 분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는, 마치 현재가 종종 구미에 맞게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게) 기억을 윤색하면서 과거와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듯이, 분석이 소설을 알차게 발라 먹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분석 쓰려고 소설 썼다. 그러나 소설과 분석을 동시에 쓰다 보니 그 둘이 서로를 공격적으로 건드렸을 것이다. 침범했을 것이다. 시작과 끝의 경계를 뭉개는 그 침범이야말로 이 책의 독창성이다.

22.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 재미 1도 없다. 다른 나라 말로 쓰인 시의 운과 율을 이야기하는 바가 많아 의미도 별로 없다. 이 책에서 "보르헤스"라는 이름값에 걸맞는 재미나 의미를 찾아내셨다면 덮어놓고 존경합니다. syo의 눈엔, 보르헤스 빠거나 전집 빠가 아니라면 그다지 추천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23. 말하는 보르헤스

: 앞의 녀석에 비하면 얘는 비교적 친근하다. 우선 강연록이라는 점에서 그런데, 다정한 말투는 물론, 강연이 좀 읽는다 하는 사람이라면 대충이라도 알 만한 것들을 다루기 때문이겠다. 아니, 이걸 이렇게 본단 말이야? 과연 보 선생님, 싶은 부분이 드문드문 있다. 드문드문 있는 이유는 90%syo의 역량부족, 나머지 10%쯤은 번역이 지니는 필연적인 특성 때문이지, 보르헤스의 잘못은 1도 없다. 없을 것이다. 구름을 뚫고 서 있는 거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보려면,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라줘야 하는 법이다.

24. 문과형 인간을 위한 처음 배우는 과학

: 문과형 인간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 정도는 학교에서도 얼추 배우므로 "처음" 배우는 과학이라는 말은 좀 그렇다. 확실히 쉽긴 하다. syo같은 이과 출신이야 한번 툭 읽고 지나가면 끝인 정도의 책.




25.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 이야기 참신하고 교훈도 있지만 문장은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순전히 이야기의 힘만으로 몇 권의 책을 이렇게 무리 없이 끌어가는데 소설가로서 다른 게 또 뭐가 더 필요한가 싶다가도,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 비전문가라고 은근히 아래에 놓은 다음 배려하려는 태도는 아닌가 싶기도 하고 복잡하다.

 

26. 13일의 김남우

: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 권쯤 읽다보니 이젠 이 사람이 문장도 참 좋은 것 같다. 간결하고 중언부언도 없고. 늘었어, 늘었어. 물론 기발함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무릎을 탁탁 치다가 무릎이 부었다. 이런 걸 거의 매일 써내다니, 김동식 씨(동갑이네요), 당신은 대체......

 

27. 다정한 호칭

: 허공은 사실 '사이'. 그래서 그 공간을 더듬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 공간을 지나는 바람에 이유가 있고, 그 공간에 박힌 별에 근거가 있다. 허공을 잘 만지는 일, 잘 듣는 일, 만지고 들어 결국 허공의 양끝에 놓인 마음들을 청진하고 촉진하는 일, 그런 일들을 하는 시들을 책에 담았다.

 

28. 이슬의 눈

: 오늘날 시 쓰는 이의 시집 한 권과 20년 전 시 쓰던 이의 시집 한 권을 연달아 읽고 나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놀랄 때가 있다. 혹시 나도 단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불편한 시를 이해하거나 느끼기 위해 아무런 수고도 해 보지 않았으면서, 섣부르게 이건 아름답지 않다, 이건 시가 아니다, 하는 따위 오만이나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90년대 내게 잘 맞으면 그냥 내가 90년대 사람인 거다. 90년대 이후로 시가 다 죽어나자빠진 게 아니라. 내 취향 살리겠다고 멀쩡한 시 죽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 그렇다고 또 이 시집이 나랑 잘 맞다는 건 아닙니다..... 뭐래니 나 지금?




29. 여행의 재료들

: 이만큼 쓸 수 있다면, 그리고 이만큼 쓰기 위하여 이만큼 읽고 노래하고 딱 이만큼만 살 수 있다면, 배부르지 않고 이름 높아지지도 않겠으나 이 정도면 내가 사는 모습으로 적당할 것도, 온당할 것도 같다.

 

30.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의 독서안내

: "지식의 최전선을 5일 만에 탐색한다." 일본은 이런 것 참 좋아한다. 희한할 정도다. 컴팩트하게 필요한(필요하다고 저자가 생각하는) 내용만 압축 제공하는 책들. 나는 썩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책의 가치를 인정하는 독자들에겐 꽤나 유용할 것 같다. 복잡계, 진화론, 게임 이론, 뇌과학, 공리주의라는 다섯 마당의 선택 자체도 기발한데다가, 완전히 겉만 핥고 끝내는 수준도 아니다.

 

31. 인생극장

: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보편성의 그물을 던져 특수성을 낚으려 했던 노명우 선생님의 손길이 깊고 선명해져, 이 책에서는 개인 서사와 영화를 씨실 날실로 엮어 시대가 입을 수 있는 옷을 지었다.

 

32. 곡면의 힘

: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건지 syo는 도대체 모르겠다. , 당신 참 많이 아는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다른 시집이라면 해설이 붙어있을 자리에, 시인이 쓴 ""라는 글이 들었다. 내용도 심오하고 문장도 고급진 가치 충만한 글이긴 한데, 읽고 나면 제일 먼저, 시가 이렇게 높고 고상한 물건이니까 사람들이 시를 안 읽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철학도 남 일이고 시도 남 일인 마당에 철학자의 시는 오죽하리. 9000원짜리 시집을 돈 주고 샀을 때 우리는 최소 9000원만큼의 효용을 기대한다. 이건 미시경제학이다. 전문가들이 매긴 이 시집의 문학적 가치가 설령 9000만원에 달한다고 한들, 내가 이걸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꽂아놓기만 하고 말 일이라면, 9000원 주고 9000만 원짜리를 사놓고도 나는 못마땅한 것이다. 9000원짜리 시집을 9000만 원짜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 역량 갖춘 사람들이 나는 부러울 뿐이다.




33. 리뷰 쓰는 법

: 나는 왜 리뷰를 못 쓰는가, 이건 오래 묵은 고민거리다. 그리고 결론내길, 세상에는 리뷰라는 것을 도대체 써 내지를 못하는 소수의 인간이 존재하는데, syo, 그게 바로 너야. 유익한 책이고 무슨 말인지도 다 알겠는데, 막상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아무리 기다려도 당최 그분이 오시질 않는다......

 

34.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자본론 입문서 같은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자본론 활용서다. 흔한 말로 왼손에는 자본론을, 오른손에는 빵을 들고 이 미친 자본주의와 맞서는 용감한 청년의 분투기인 셈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본론을 공부하기 위해 읽기보다는, 이미 왼손에 자본론을 들고 있는 사람이 오른손에 들 무언가를 찾는 과정에서 들춰보기에 적합하다.

35. 뭐라도 되겠지

: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역시 코드가 맞아야 웃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김중혁이 반드시 "재미있는"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편견일 수도 있겠다.

 

36.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 syo가 추구하는 스타일의 완성형인 것 같다. 웃기기 위해 신랄하고, 신랄하기 위해 웃긴다. 열두 번 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 중 한번 정도는 이지원 선생님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글만 뱉어놓고 가는 것도 심히 보람찰 듯하다.



37.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읽기'를 정의하는 수많은 책 가운데, 가장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라는 느낌. 현란하고 화사하지만 그물코가 촘촘하지는 않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읽고 들은 느낌이지만 결국 나란 인간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책만 탓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하여간 딱 그만큼이다. 열심히 읽고 써도 나쁘지 않겠구나, 딱 그 정도였다.

 

38. 아무튼, 계속

: 일상성을 유지하는 방법도 배울 만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어나가고 싶은 일상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부럽다. 책은 뭐, 그저 그렇습니다. 같은 시리즈들 중에서도 좀 밍밍한 축이네요.

 

39. 그들은 어떻게 임원이 되었을까?

: 함량이야 이런 장르의 책이 통상 가지는 딱 그 정도 수준. 상대적으로 평가하면 딱히 칭찬할 부분도 욕할 부분도 없다. 아무리 이런 책이 붐이었던 2006년이라 해도, 한 주 만에 3쇄가 찍힌 것은 좀 뜨악하다. 3쇄는 독자들의 자연스런 선택이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들", 이런저런 대기업의 25명 임원들이 책을 낸다는 소식에 부하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폭풍구매하여 이룬 것이 아닐까 싶다.....

 

40. 버티는 삶에 관하여

: 글을 빚어서 내 인생도 빚어보겠다는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하던 어린 시절, 허지웅 선생님은 내게 경탄과 좌절을 끝없이 선사하는 웅장한 절벽 같은 존재였다. 매일 그의 블로그를 들락날락하며, 쓰는 삶에 대한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깜냥을 알아가는 경로는 아프면서도 상쾌했다. 결국 오늘의 syo가 되었다.



41.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 서경식 선생님의 글은 묘한 매력이 있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심심하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절묘한 표현이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얕게 졸졸 흐르는 개울 같은 글이라 느낀다. 그러나 그 흐름에 맞춰 나도 담담히 읽다보면 슬며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진짜 고요하게 흐르는 물은 사실 그 바닥이 깊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이 책은 어쩐지 좀 흐릿한 느낌......

 

42. 고로, 철학한다

: '가볍고 유머러스하며 사상적 깊이를 잃지 않은 이 책' 이라는 작가 소개 멘트는 그다지 적확하지 않다. 저자나 번역가 둘 중 최소한 한 사람은 개그 센스가 평균 이하다. 웃기려고 용쓰는 모양이 보이지만, 아쉽네요. 실패입니다. 함량은 같은 장르의 다른 책과 비슷하다.

 

43. 가재미

: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문태준입니다. 문태준이에요. 뭘 더 말할까요, 문태준이라니까요.

 

44. 자본론 이펙트

: 마르크스와 관련해 프랜시스 윈의 책은 입문서건 전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어도 좋은 수준이다. 자본론의 매력을 이만큼 똑똑하게 전파하는 책도 드물다.

 

 

 

이러다 반드시 내년에도 백수가 되는데, 그걸 아는데도, 오히려 그걸 알아서 더 그런가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양심은 있었는지, 고른 책들이 뭐 대단히 심오한 놈들도 아닌지라 나중에 읽어도 되는데, 그걸 아는데도, 오히려 그걸 알아서 더 그런가 이놈의 책들이 손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이러다 굶는데, 그거 아는데도......ㅋㅋㅋㅋㅋㅋㅋ

 

엄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차라리 똥개한테 똥을 끊으라고 해라


아, 모든 게 다 똥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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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4-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공부하라고 귀찮게 안하고 말도 안걸고 있었더니 책 읽고 있었다니.......
오늘부터 말 걸 거예욧!! 귀찮게 할테닷!!

syo 2018-04-30 09: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본인이 바쁘신 거면서?

chaeg 2018-04-3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하셨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는 4 랍니다!

syo 2018-04-30 09:17   좋아요 0 | URL
멋진 취향이시다^-^ 저는 어찌된 일인지 하루 한 번은 4시 44분을 확인하게 되더라구요....

2018-04-30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30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8-04-3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syo님 공부 안 하고 책 읽고 계셨군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러게, 그걸 아직도 몰랐어요?
1년에 책 한 권도 못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달 평균 20권은 읽어야 되는 syo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웰컴 투 더 독서월드^^

syo 2018-04-30 10:04   좋아요 0 | URL
거의 동시에 서로의 글에다 ㅋㅋㅋㅋㅋ 열라 남기고 있었네요. 크로스로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8-04-30 10:1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근데.... 좀 미안하네요.
syo님 글에도 좋아요 하나, 내 글에도 좋아요 하나 하니까요.
저한테 주신 좋아요 7분의 1만 주시고요.
나머지 7분의 6은 다시 가져가세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18-04-30 10:26   좋아요 0 | URL
그냥 다 드세요. 그 정돈 드릴 수 있지 제가 또ㅎ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4-30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많이 읽으시고, 더 많이 공부하시면 되지요^^:) 즐겁게 하는 사람 못 이긴다잖아요.

syo 2018-04-30 12: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 읽는 건 즐거운데 공부만 시작하면 그 즐거움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외관상으로는 이거나 저거나 책 읽는 건데.....

psyche 2018-05-0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요요라니... 그래도 책 44권 읽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으리라 믿쑵니다

라로 2018-05-01 02:44   좋아요 0 | URL
믿쑵니다 2!! ㅎㅎㅎㅎ

유부만두 2018-05-01 09:04   좋아요 0 | URL
저도 믿는다고 쓸게요. ㅎㅎ

syo 2018-05-01 09:08   좋아요 0 | URL
여러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씀이 있었드랬지요. 금쪽같이 소중한 진리입니다......

clavis 2018-05-01 11:26   좋아요 0 | URL
믿쑵니다 3!!!

유부만두 2018-05-0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요요?!!!! 정말 멋진 분이군요, 분노의 syo(쇼?)님. 이런게 망하는 거라면 별로 무섭지않은데요?

syo 2018-05-01 09:10   좋아요 0 | URL
에라이 모르겠다 싶습니다만.....ㅠ

프리즘메이커 2018-05-0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이렇게 책읽고 소일만 하다간 굶어 죽겠구나 위기감이..자꾸 발동하곤합니다..ㅠ

syo 2018-05-01 17:37   좋아요 0 | URL
프메님은 어디서 뭘 하시든 잘 먹고 잘 사실 겁니다

stella.K 2018-05-0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공부는 언제하십니까?
책은 사 보시는 편이신가요? 아님 빌려 읽나요?
책 사면 고시원 방 어디 둘 때는 있나요?

요즘 시이소오님 계속 안 보이시던데
오늘 페이퍼는 그 양반 생각나게 합니다.
잘 계시나 모르겠어요....ㅉ

syo 2018-05-01 17:38   좋아요 0 | URL
대부분 빌려 읽습니다 ㅎㅎ 말씀대로 책 사도 둘 곳이 없을 뿐더러, 사고 싶다고 뻥뻥 살만큼의 돈이 없습니다. 수입이 없으니까요.....

시이소오님의 컴백은 저도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서괭 2018-05-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요요 ㅋㅋ 똥개한테 똥을.. ㅋㅋㅋㅋㅋ 아이고 ㅋㅋ 무리하게 다이어트 하다가 결국 폭식하는 패턴이군요. 차라리 꾸준히 조금씩 읽으시는 게 낫겠어요^^;

syo 2018-05-03 15:04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역시 먹든 끊든 갑자기 하면 안 되는 거라...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네요 정말...

AgalmA 2018-05-0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고선 저 보고 무섭다고 할 자격 &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꽈! ㅋㅋㅋ
보르헤스 논픽션은 1권보다 2, 3권이 더 좋은 듯. 뭐랄까. 아르헨티나적인 것에 엄청난 호감이 있지 않으면 그냥 먼 나라 얘기 같아서ㅎ;;
보르헤스 픽션 전집에서도 가우초들 나오는 소설은 별 재미를 못 느끼겠던 거 같은? ㅎㅎ;;

syo 2018-05-04 19: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가우초 이야기는 읽다가 보르헤스 싫어질 뻔.....

보 선생님 아직도 흠모하긴 하지만 제겐 어쩐지 점점 약발이 떨어지고 있긴 해요. 지난 세대 지식인들 사이에 대유행했던 철 지난 놀이감 같은 느낌....

카알벨루치 2018-12-1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월엔 죽도록 읽으셨네 44!!! 44권 읽은 분에게 44받아야 할텐데 이런 종횡무진의 스피릿! 여긴 눈이 옵니다~~~

syo 2018-12-11 15:43   좋아요 1 | URL
444 44개그에 무릎을 탁 칩니다!!
눈은 여기도 오고 있지요. 사실 여기랑 거기랑 거기가 거기 아닌지요?? ㅎ

카알벨루치 2018-12-11 15:52   좋아요 0 | URL
여긴 내 마음, 거긴 그대 마음...이라믄서~한 시대 지나간 아재 개그...널리 아량을 베푸소서! 쇼군 님ㅋㅋ
 


빗방울처럼 수많은 여름 가운데 당신이 있던 어느 여름

 

비가 많은 여름이었다. 소매를 걷고, 바짓단을 걷고, 당신과 나는 비를 긋고 있었다. 비를 듣고 있었다. 당신 몰래, 나는 비 냄새 맡는 척 킁킁 소리를 내며 당신의 냄새를 맡기도 했다. 빗소리처럼 당신이 말했다. 너무 덥지 않아 참 다행이죠, 올해는. 내가 더위를 끔찍해하는 사람임을 당신이 안 지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다. 비 냄새처럼 내가 대답했다. 잔잔하게만 내려주면 신발 젖을 일 없을 텐데. 신발에 물이 들어차면, 말은 하지 않아도 당신의 두 볼에, 이마에, 불쾌감이 아슴아슴하다는 사실을, 그런 표정을 만나면 어쩐지 나도 저 비가 싫어진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깜짝 놀란 것도 채 한 주가 지나지 않았다. 당신과 나의 그 여름은 그랬다. 어쩌자는 말도 없이 열심히 서로의 주변을 맴돌다 가끔 만나는 해처럼 달처럼, 우리가 그랬다. 비가 우리 두 사람 가운데 온전히 누구의 편은 아니었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누구는 아니었다. 당신은 가끔 내게 누구였다가, 톺아보면 또 누구도 아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들같이, 당신이 내 쪽으로 깃발처럼 강하게 펄럭인다는 느낌에 돌아보면, 당신은 깃대처럼 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당신에게 나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회상하는 마음이 빗소리를 맞아 태어난 젖은 아쉬움일 뿐이고, 어쨌든 그 여름에 당신과 나는, 혹은 최소한 나는,

 

비가 내리면 당신이 있어서 좋았다. 비가 그치면 당신이 있어서 좋았다. 바람이 불면 좋았고, 땀이 흐르면 좋았다. 여름을 사랑하는 방법을 처음 배웠다. 여름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오랫동안 비를 긋고 서 있으면서 조바심 내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함께 비를 듣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많이 그립거나 무언가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 없이, 크게 요동치지 않는 마음으로 그저 아련하게 어떤 장면을 추억하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당신에게 배웠다. 당신이 모두 알려주었다.

 

이 비가 지금 거기에도 내릴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 적당한 거리인지 모르겠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 그가 만들어둔 그만의 공간인지를 모르겠다그 거리를 모르겠는 건내가 그 사람에게 가고싶은 욕망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그래서 내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경독서공감사람을 읽다

 

  오후까지 어둡게 막아놓고 산중에 가는 비 내린다

  한세상 사는 것도 그저 어수룩한 속셈이 좋을까.

  짐작할 만하다가 고개 잠시 돌리면 방향도 안 보이고

  어느 때는 동행까지 축축하게 젖어서 지워지고 마는

  미끄러운 바위만만한 틈에서만 다치는 어리석음.

  옷 벗은 네 몸 보기는 처음이다.

  젖어서 편안해 보인다.

  산정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계곡을 길삼아 내려온다.

  떠나지 못한 바람 몇 개숲속에 숨어 낯을 가린다.

마종기山行 3

 

  "제가 탈 기차는 좀 나중에 떠납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걱정 마세요." 그가 말했다. "제 시간에 차장이 와서 깨울 겁니다오늘 우리가 만났던 이런 식으로우리의 이 가방들을 들고서다시 만날 기회는 없겠지요여행 잘 하시길 바랍니다."

안토니오 타부키인도 야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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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4-24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로 인해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 아름다워요^^

syo 2018-04-24 13:51   좋아요 0 | URL
항상 든든한 syo의 무츨방지위원 독서괭님^-^

chaeg 2018-04-25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와 당신‘이라는 곡이 생각나네요 :)

syo 2018-04-25 13:1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그러네요 정말.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

AgalmA 2018-04-29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소리처럼 말하는 당신이라니! 여름의 사랑맛이란 게 있죠...아, 나 넘 늙은이 같은 말했어ㅜㅜ...어쩔 수 없지. 췟.

syo 2018-04-30 07:4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여름의 사랑맛이라니, 전 도저히 짐작도 못하겠어요 어려서 그런갘ㅋㅋㅋㅋㅋㅋㅋ

2022-03-01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02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왕십리 개차반들은 장유유서도 모르지


아마 서역 상인들이 벽란도에 몰려와 인솸은 코려인솸!을 외치던 시절쯤이었을 것이다. syo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버스가 도착한다는 곳에 줄을 서 있었다. 바로 옆에는 얜 마음만 먹으면 기린 턱수염에 빗질도 할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길고 멀건 놈이 하나 말없이 서서 syo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 놈의 거대한 그림자 안에 쏙 들어가 있자니 빙하타고 내려온 아기공룡 둘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호이! 이 뵈기 싫은 백색 장대 놈도 나랑 같은 신입생인가 본데, 그렇다고 먼저 말 붙이고 싶은 의욕은 멍게 눈알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syo는 항상 큰 놈들이 미웠다. 네놈들이 불필요하게 크는 바람에 나는 필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했잖아, 하는 삐뚤어진 마음, 논리는 없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그 마음, 참 슬픈 마음,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오래 묵은 피부염처럼 눌어붙어 있었는데, , 큰 놈들은 그걸 자꾸 긁잖아. 내 정수리를 함부로 조감하지 말란 말이야 이 독수리 같은 놈들아. 물론 이런 말들은 뇌 속으로만 크게 외쳤으므로 세상은 항상 조용했다. syo는 몹시 조용한 아이였다.

 

그렇게 20분이 흘렀지만 장대와 syo는 의례적인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장대는 길게 syo는 짧게, 그냥 서 있었다. 먼 데를 바라보거나 발끝으로 땅바닥이나 툭툭 차면서. 스마트폰 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랬냐고요? 벽란도에서 인삼 거래하던 시절이라니까요. 그 때의 학생들에게 물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스마트폰? 그게 뭐죠? 스마트는 학생복인데..... ? , 그럼요, 인삼은 고려인삼이 트렌드죠. 그런 와중에 버스가 도착하고 신입생들은 하나둘 버스에 올랐다. 장대가 먼저 올라탔다. , 나도 단 한 번만 저 장대 놈처럼 버스 안에서 자리 찾아가는 동안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불편한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하여간 일거수일투족이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대가 어느 창가 쪽 좌석에 앉자, syo는 굳이 장대의 옆자리에 앉았다. 입에 단내 나게 조용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20분을 옆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떡하니 딴 자리 잡고 앉으면 내가 저를 싫어해서 피했다고 생각할까봐. 아무래도 동기고 앞으로 계속 봐야할 사이 같은데 그럼 불편해질까봐. 작은 키만큼 작은 이 마음.

 

버스는 달렸다. 선배라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고 잠시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전달한 후, 본격적인 장기자랑 시간이 시작되었다. 랜덤으로 좌석번호를 부르면 나와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 필살의 재롱을 부리는 것인데, 모두들 고만고만해서 재미가 없었고, 누가 노래를 부르건 말건 학생들은 자기 옆에 앉은 이와 말이나 트자는 분위기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쪽도 통성명으로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거짓말들이다. 별로 안녕한 느낌 아니었다.) 저는 이번에 전자과에 들어온..... , 저도.....(이 멍청이들아, 여긴 OT 버스야....) 제 이름은 syo입니다. , 저는 장대예요(그리고 그 이후 어색한 긴 침묵) 경상도 사투리 쓰시는 것 같은데, 혹시..... , 네 저는 대구...... ! 저도 대구..... , 그러시구나...... , ...... 허허. 허허허. 이런 머저리 통신 같은 대화가 이어지는데, 갑자기 뒷자리에서 강렬한, 그러니까 경상도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syo조차 몇번 들어보지 못한 슈퍼파워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뒷 분도 경상도 분인가 봐요. , ..... 저 정도면 경남사투리 62년식은 되겠는데요? 그러네요. 정말 엄청나요. 근데, 우리 어차피 동긴데, 말 놔야 되겠죠? 하하, 그렇겠죠? , 아마 그렇겠죠? 그렇겠죠. 그렇겠네요..... 우린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먼저 말을 놓으시라구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뭐지, 이 큰 키에 작은 마음은...... , 젠장, 고려인삼 이야기라도 해볼까, 하는 찰나, 마이크를 쥔 진행자 선배가 좌석 번호를 불렀는데, 그게 syo의 번호였다. 신난다! 이 그렇겠네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니! 만세! 할렐루야! 평소 그렇게 장기자랑을 혐오하던 syo였지만 이번만큼은 춤을 추듯 흥겹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자기 소개하시구요. , 안녕하세요, 행복하세요, 여러분, syo입니다. 여자 친구 있습니까? , 있습니다. , 정말요? 정말이냐니, 그게 웬 말인가요, 선배님. 하하, 농담이구요. 그렇다면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습니까? 진도요? , 진도요. 하나, 첫 연애였고 아무것도 몰랐다. , 장대와의 속 터지는 대화가 끝났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다. ,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 엊그제 설왕설래를 마쳤습니다.(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망측끈적한 사자성어가 왜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부터 OT가 끝난 36시간 뒤까지, 사랑하는 syo의 동기들은 누구도 syosyo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이, 설왕설래, 한 잔 해. , 설왕설래, 거기 잔 좀 줘. 이봐, 설왕설래. 설왕설래. 설왕설래는 남행열차를 불렀던 것 같다. 평소 슬픈 이별노래를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라서 그런 자리에서 부를만한 곡이라고는 그거 딱 하나 알았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왔더니, 장대가 말했다. 이야, 설왕설래, 노래 잘 하네? 아니, 이 장대가 갑자기 말을 놓네? 이렇게 쉬울 걸, 왜 그렇게 그렇겠네요 표창만 죽자고 던져댄 것일까. 장대의 뇌하수체에 호기로움을 주입한 것이 설왕설래였을까, 남행열차였을까?

 

그날 이후 장대와, 우리 뒷자리에 앉았던 개화기시절 경상도 사투리 기능 보유자 CuFe(알고 보니 이 친구도 대구)syo와 함께 일당 '왕십리 개차반들'을 조직하여 종횡무진 꼴통 같은 대학생활을 만들어나갔다. syo는 재수 했고 CuFe는 평범했고 장대는 빠른 자였기에 실제로 우리 셋은 동기였지만 어느 둘도 동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은 우리가 위장 속 내용물로 왕십리 골목골목을 꼼꼼하게 덥혀(더럽혀)가며 청춘을 허망하게 탕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셋이 뭉쳐 다니면 세상 무엇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 학점 빼고. 대학 친구는 다 가짜라는 세상의 험악한 말들을 우린 개 무시했고, 장대가 자퇴 후 의대로 전향하고 CuFe가 군대를 가면서 서로의 생활에 아무런 매듭이 엮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꾸준히 만나 밥과 술을 소비했다. 서로를 위해 해 준 것도 많다. 예컨대, 재작년 장대가 장가를 가면서 syoCuFe가 축가를 불렀는데 그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시원하게 망했다. 장대의 장모님은, 이 서방, 그 사람(CuFe를 말합니다. 나 아님)은 돈 주고 섭외했어? 너무 웃기더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장대 장모님, 한 번 뿐인 따님 결혼식에서 물의를 빚어놓고 이제 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뭣하지만, 저흰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가끔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같이 결혼식 녹화 테이프를 본다는 장대와 장대 와이프, 그 어떤 밉고 서운한 감정도 축가 부분이 끝날 때쯤엔 마그마에 눈 녹듯 사라지고 가정은 온통 웃음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 너희라도 행복하니 됐다. 나 하나 영원히 고통 받으면 되지 뭐.

 

그리고 오늘, CuFe77일로 결혼 날을 잡았다고 알려왔다. , 어찌 된 게 우리는 나이 역순으로 장가를 가네. syo가 말했다. 그러자 CuFe, , 오는 덴 순서 있어도 가는 덴 순서 없는 법이예요. 그러자 듣고 있던 장대 왈, 그리고 오는 덴 순서 있어도 갔다 오는 덴 순서 없는 법이지. 장대 너, 설마..... 모쪼록 깊이 생각하고, 정 힘이 들면 결혼식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돌려 보시기를. 그래도 못 버티겠으면 CuFe가 자기 결혼식에 스스로 축가를 한다고 하니, 그 영상을 통해 가정의 화목을 유지하시길. 알잖아, 그 친구는..... 정말, 정말 프로야.


온 누리에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축가로 부부싸움을 지우는 기적의 남자, 웃음 마그마 syo 올림.





외부의 자유는 재산으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자유는 다른 재간, 바로 웃음으로 얻을 수 있다. 웃음은 자유이다. 억지로,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물건을 팔기 위해서 웃는 웃음은 마음의 자유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_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웃음을 멈출 수는 없다그러면 더 큰 죄를 짓는 거다다음 세대에게다른 건 몰라도웃음은 전해주어야 한다얼마나 오래 기다려 이렇게 열심히 웃고 있는지 모른다대신 왜 웃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혹시 울어야 할 일은 아닌지비웃기 전에 혹시 정색해야 할 일은 아닌지 누군가를 조롱하기 전에 내가 정확히 누구를 조롱하려는 것인지알아야 한다그래야 무기력해지지 않는다그래야 우리가 시시해지지 않는다.

김중혁뭐라도 되겠지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힘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아닐까요? 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

_ 정혜윤, 나를 바꾸는 책읽기

  

사람은 자신과 같은 결점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으면 확실히 마음이 편하지그러나 그건 싸움에 져서 상처 난 곳을 서로 핥아주는 개와 같은 거란다진정한 친구란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주면서 우정을 키워나가는 거지그리고 너에겐 그런 친구가 많이 있잖니.

마쿠라 쇼오카노 타케시지옥선생 누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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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2018-04-2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쇼님:) 친구분 결혼 축하드립니다. ‘왕십리 개차반들’ 모임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나요?ㅎㅎ

syo 2018-04-22 10:17   좋아요 1 | URL
시원하고 쾌적한 주말입니다 유나님 ㅎㅎㅎ
제가 축하받을 일인가 싶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왕십리는 떠났지만 저 개차반들이 여전히 개차반들이라 아직도 모임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8-04-22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웃겨. 끝까지 웃게 해주셔서 감사요ㅋㅋ 정수리 조감ㅋㅋ 그렇겠네요 지옥 탈출ㅋㅋ
과 ot 때 syo님과 장대처럼 저도 그런 친구가 옆자리에 앉아서 저는 대차게 쏴 줬죠. 나 너 별로거든. 그러니 우리 말 섞지 말자고ㅋㅋ 그런데 지금 제일 친한 친구임ㅋㅋ 이 친구가 자기 소개 때 자기는 쾌락주의자라고 했다가(에피쿠로스의 그 쾌락주의란 말이야!) 그러나 듣는 사람 맘대로 곧잘 해석되듯이 그 쾌락은 육체 쾌락으로 해석돼 학기 초 음흉한 쾌락주의자로 곤욕을ㅋㅋ

syo 2018-04-22 12:08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은 정말 대쪽같으셨군요. 멋있으시다.

syo는 작은 키 작은 마음이라 그러지 못하고 ˝☞☜ 그렇겠네요˝만 반복했습니다.....

친구분은 일견 곤욕을 치를만 하셨네요. OT때 자기를 쾌락주의자라고 소개하다니, 정말 엄청난 쾌락주의자가 아니시고서 어떻게 그런......

단발머리 2018-04-22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왕설래님~~
역시나 오늘도!!! 설왕설래님 덕분에 한껏 읽고 웃고 즐기다 갑니다.
저희 가정도 웃음으로 충만해지고 싶어요.
장대님 결혼식 축가 파일 올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syo 2018-04-22 22:0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그 영상은 저한테 없습니다. 폐기를 요청했으나 장대 부부가 내부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지요 ㅎㅎㅎ

살다보면 제가 부른 노래를 단발님이 들을 날 있겠지요. 언젠가는요 ㅋㅋㅋ

라로 2018-04-22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대님 결혼식 축가 파일 올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2
웃음의 마그마 토비 syo 님이 그러니까 글도 잘 쓰시는데 노래도 잘 하신다는 거죠!!! ㅎㅎㅎㅎ (저번 글에도 축가 부르실거라고 쓰셨죠??)
암튼 구철(?) 씨가 자축가를 부른다니 정말 대단한 친구를 두셨어요!! 왕십리는 저에게도 추억이 많은 동네랍니다! ㅎㅎㅎㅎ

syo 2018-04-22 22:06   좋아요 0 | URL
잘하는 건 모르겠고 잘 웃겼다는 평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요 ㅋㅋㅋㅋ

라로 2018-04-23 02:44   좋아요 0 | URL
🤪

다락방 2018-04-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왕설래...라니요....
아 어쩐지 슬퍼지는 오전이다.......흙흙

7월7일, 제 가까운 사람도 그 날 결혼하는데, 우리 둘 다 그 날 예식장에 있겠네요. 서로 다른 포지션이지만요. 하하하핫.
건배...(댓글이 메롱이라 미안해요..)

syo 2018-04-23 12:58   좋아요 0 | URL
그랬는데 식장에서 떡 만나면 웃기겠어요 ㅋㅋㅋㅋㅋ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러면서.

설왕설래라니 21살짜리가 까져가지고..

독서괭 2018-04-2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정수리를 함부로 조감하지 말란 말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넘 웃겼습니다. 왕십리개차반들 영원하라!!

syo 2018-04-24 01:1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제 세 명의 나이를 합치면 100에 달하는 마당인데, 개차반은 관둘 때가 되긴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영원하라!!!! ㅋㅋㅋㅋㅋ

psyche 2018-04-24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왕설래라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 풋했네요. ㅎ
부부싸움을 지우는 기적의 축가라니 저도 꼭 들어보고싶어요 ㅎㅎ

syo 2018-04-24 01:20   좋아요 0 | URL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치만 전 안 웃겼거든요.....

clavis 2018-04-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왕십리,하고 나오는데 자동적으로 욕이 나오는건 왜죠? 138계단때매 제 종아리님이 피해를 많이 봐서겠지요..만나서 반갑습니다ㅠ♡

syo 2018-04-28 22:2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같은 워터파크를 경험했겠군요. 반갑습니다^-^
 
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누가 뭐래도 노태우는 좋은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다섯 살은 노태우가 성군인 이유 따윈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나이였다. 정작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사내놈이 분명한 내가 뽀미 '누나''뽀미 누나'라 부르지 못하고 '뽀미 언니'라 불러야 하는 까닭이었는데, 그 건에 대해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대신 노태우가 좋은 대통령인 이유를 알려 주었다. 길고 긴 설명이었지만 한 마디로 줄여보면 결국 노태우가 대구 출신이기 때문에 우린 이제 노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소한 콩고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질 예정인 축복받은 계시의 땅, 대구로 가야만 한다고 아버지가 강변했다. 우리 가족은 당시 대구가 아니라 청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저놈의 대처 성애는 불치였고, 가족력이라 나도 물려받았다. 하여간,

 

인간이야 됐건 말건 동향이면 장땡이고 한 번 정해지면 군소리 없이 누나를 언니라 불러야만 하는 그런 맹목적인 시절이었다. 맹목적인 아버지였고, 수동적이었지만 역시 맹목적인 어머니였다.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아 귀찮은 아이였겠지만 아버지는 귀찮은 기색 없이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말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알고 싶은 것은 하나도 모르는 마당에 모르고 싶은 것들만 자꾸 알게 되다보니 나는 별수 없이,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사뭇 자발적으로 독서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노태우와 언니에게 이 영광을.

 

담이 없던 당시 우리 집의 양 옆과 후방으로는 어린 내 눈에 이런 걸 대초원이라 부르나 보다 싶을 정도로 광활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 5일장이 서는 읍내 쪽으로 뻗은 2차선 도로와 우리 집 마당이 그라데이션처럼 이어져 있다 보니 우리 집의 한계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명색이 도로라고는 하지만 그 위로 지나다니는 차는 놀랍도록 뜸했다. 엄마의 제보에 따르면, 어느 날 하루 종일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도로 쪽을 보던 내가 저녁 식탁에서 그날 도로를 지나간 것들에 대한 통계자료를 발표했다는데, 정확한 수치는 이제 남아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날 우리 집 앞을 지나간 교통수단 중 그 수에서 압도적인 1위는 바로 소였다. 어린 내가 살던 곳은 그런 곳이었다. 바람 좋고 물 맑고 산과 들에는 꽃이 지천이며 이웃 간에는 따뜻한 우리네 정이 넘치면서 책 구하기는 눈물 나게 어려운.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 있는 책들만 읽고 또 읽을 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그게 무슨 책이었는지 다 잊고 말았지만 딱 하나, 삼국지를 30번 넘게 읽었던 것은 아직 기억한다.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 중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이는 손권이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나와 같은 손 씨라서. 사실 이건 뭐, 아버지의 노태우 성군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논리였지만, 이것을 굳이 부전자전이라기보다는 당시 내가 계몽에 필요한 만큼의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슬픈 사실의 방증이라 말하고 싶다.

 

 

 

이러구러 세월은 흐르고 우리 가족은 기어이 대구로 흘러들어왔지만 노태우를 향한 아버지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우리 식구 살림은 여전히 고만고만했고, 노난 놈이라고는 지천에 서점이 깔려 있어 신이 난 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의 독서 동력은 '지식 추구'에서 '칭찬 갈구'로 한두 단계 퇴보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런 기조를 아직까지 채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슬픔 포인트다. 어쨌든, 대처에 나와 보니 책은 많은데 책 읽는 이는 적었다. 따라서 칭찬받는 것은 참 쉬웠다. 어른들은 "너는 책을 참 많이 읽는구나." 라는 다소 긴 찬사보다 "너는 책을 읽는구나."라는 축약된 버전을 선호했는데, 알고 보니 저것이 일 년에 10권이 채 안 된다는 대한민국 성인 평균독서량의 부끄러운 실태를 예언하는 징후였다니! 그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의 성인이 되었을 테니...... "도대체 너희 집에는 왜 책이 없니?" 나는 책이 없어서 어이도 없다는 말투로 친구 녀석을 힐난했다. 그러자 친구는 엄지손가락으로 책상 서랍중 제일 아래쪽 가장 큰 놈을 가리키며 "저기 다 있어, ." 이라고 대답했다. 놀람 반 기대 반으로 서랍을 열었는데, 맙소사, 그 안에 한가득 들어 있었던 은 바로 '구몬수학'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중 몇 안 되는 진심으로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양질이야 어찌됐건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접받는 지상낙원에 살다보니,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하게 읽은 주제에 마치 킹 오브 더 독서라도 된 것 마냥 행동했다. 책을 좋아하는 놈이라는 이미지가 내 머리 위에서 왕관처럼 빛나는 것이 너무도 좋아서, 그저 제목과 작가만 아는 책을 독파한 척 입에 올리고 다녔다. 허세 갑 똥멍청이였던 내게 치료약을 주입해 준 것은 대학이라는 좀 더 넓은 세상이었다. 나와 보니 세상은 정글이었고, 극악무도한 포식자들이 책이란 놈들 눈에 띄는 족족 몽창 다 씹어 먹어 주리라는 기세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는 곳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같은 페이스로 읽어 간다면 1년 뒤쯤에야 띄엄띄엄 소화할 수 있을 만치 어려운 책을 탁 덮으며, ", 오늘로써 이 책은 12번 읽었군. 그리고 내일부터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겠지." 라고 말했던 괴물 같은 남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때부터의 독서는 아마 못난 그간의 자신에 대한 질책과, 남들을 속이면서 스스로 머리에 얹은 짝퉁 왕관을 진짜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하면 적당할 듯하다. 그 과정이 꼭 지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즐거울 때 즐거운 책을 읽고 더욱 즐거워하며 슬플 때 슬픈 책을 읽고 더욱 슬퍼하는 독서에서 시작하였고, 즐거울 때도 슬픈 책을 읽으면 금방 슬퍼할 줄 알고 슬플 때도 즐거운 책을 읽으면 쉬이 즐거워 할 줄 아는 독서로 나아갔다. 책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가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맹목에 가까운 확신을 장착하고. 여전히 노태우의 그림자가?

 

여차저차 서른 해 넘게 살아오면서 독서의 맛을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대부분의, 정말 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고 호언할 수 있는 스스로가 겸연쩍은 마음도 크지 않다. 물론 아직도 이놈의 독서 정글 피라미드에는 내가 올라갈 계단이 별처럼 많고, 층층마다 훌륭한 독서가들이 자리를 선점하여 빛내고 있는지라, 뭐 대단한 진리라도 내놓듯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썩 당당하지는 않지만 정리는 해야 하니까.

 

  

책을 읽는 우리는 우리가 왜 책을 읽는지 때때로 생각해야 한다. 엄밀하게는, '이 책'을 왜 읽는지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책을 '왜 읽는지'를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고 싶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전자의 의문은 보통 책을 읽지 않거나, 읽다가 내던지기에 좋은 핑계거리를 찾는 중에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후자의 질문은 최소한 독서가들에게는 '나는 왜 사는가?'에 필적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독서는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여정이고, 여행자는 지도를 펼쳐들면 언제라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가리킬 줄 알아야 하니까. 백 명의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서로 다른 백 가지 삶의 의미가 있듯이, 천 명의 독서가가 있으면 독서의 의미도 천 개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 말은 곧, 내 인생의 의미는 남이 아닌 내 손으로 만들어가야 하듯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남이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은 차 한 잔 내려, 딱 그 뜨거운 찻물이 선선하게 식을 만큼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동안만 느긋이 앉아, 당신이 당신에게 책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2년 전에 썼던 글인데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싶어서 얼른 지우고 다다다닥 다시 고쳐 썼습니다. 기껏해야 2년 전인데, 뭐 저렇게 못 썼던지......


※ 이전의 글에는 각자의 뽀미 언니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cyrus님과의 훈훈한 댓글대담이 있었습니다. syo의 마지막 뽀미 언니는 얼굴에 점찍고 돌아오는 걸로 이름을 드날린 무시무시한 언니였습니다. 왜 나는 너를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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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2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에 공감됩니다. ^^
제게 독서란... 글쎄요... 뭐랄까...

지금까지 속아 산 삶에 대한 반성...
세상에 눈뜨는 과정...
그렇게 됨으로써 세상에 더욱 무뎌지거나 지나친 현실 적응에서 멀어지는 과정...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책 읽을수록 세상 살기 더 힘들고 어려워진단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ㅠㅠ

syo 2018-04-20 21:51   좋아요 1 | URL
북다님은 알라딘의 글래디에이터 같습니다. 맹렬히 근육 만들며 세상을 뒤집어엎을 날만 노리는.....

북다이제스터 2018-04-20 22:09   좋아요 1 | URL
네, 그러기 위해선 더 빨갱이가 되어야겠죠... ㅎㅎ

몰리 2018-04-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태우, 뽀미언니, 소.
대학과 대학에서 만난 괴물들.

기시감 밀려들던 차
2년 전 읽었던 글이었던 것이었구료. ㅋㅋㅋㅋㅋㅋ

syo 2018-04-20 21:52   좋아요 0 | URL
역시 몰리님. 명불허전....
이런 걸 누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ㅋㅋㅋㅋㅋㅋ
심지어 2년 전 것을 ㅋㅋ

cyrus 2018-04-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능교육을 했어요. 수학, 영어, 한문 학습지를 풀었어요. 한문 공부는 좋았어요. 그때 한문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책 읽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거예요. 정기적으로 재능교육 학습지를 다 풀면 스티커를 받아서 붙이는 보너스(?)가 있었어요. 정해진 스티커를 다 붙이면 재능교육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무료로 받곤 했어요. ^^

syo 2018-04-21 17:28   좋아요 0 | URL
추억의 이름이네요. 재능교육...... 그때부터 이미 독서킹의 떡잎을 내보이셨군요.

다락방 2018-04-23 11:01   좋아요 0 | URL
저는 에이플러스요..... (밀려서 처박아 숨겨두었지만...)

독서괭 2018-04-2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쵸?? 저도 읽으면서 응? 노태우 뽀미언니 집앞 도로 교통통계 발표 대학괴물 등 분명 봤었는데 syo님이 소재가 떨어지셔서 재탕을?? 하고 생각했는데요 ㅋㅋㅋ

syo 2018-04-21 21:09   좋아요 0 | URL
사실입니다..... 소재가 떨어져서 재탕.....
근데 이 탕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이야ㅋㅋㅋㅋㅋㅋㅋ
 


syo크라테스의 변명

 

5년 전 철원이었다. 북한군이 철책을 넘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 부대로 무전을 날리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때를 대비하여 지루하게 생긴 무전기를 지루한 표정으로 쳐다봐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 죽이며 지루할 수밖에 없는 임무를 물샐 틈 없이 지루하게 수행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후임이 입을 열었다. “syo 병장님, 전 왜 이렇게 못 생기고, 키도 작고, 머리도 나쁘고, 집안도 후지고, 돈도 없고, 여자도 없는지 모르겠어요. 조물주 놈은 왜 저한테만 이렇게 박하게 굴었을까요? 불공평하게.”(물론 말투는 다나까 체였습니다만) 뭐지, 이 지루한 질문은? syo가 대답했다. “대신 그분이 너한테 그걸 줬네.” “뭘요?”(물론 말투는 다나까 체였겠습니다만) “니 코 옆에 붙은 그 점 큰 거.” “병장님, 전 진지하게 여쭤본 건데, 너무하시네요. , 나 욕 칠 뻔.”(물론 말투는 다나까 체일 수밖에 없었겠습니다만) 후임은 티 나게 삐져 홱 돌아앉았다. , 인마, 아무리 그래도 무전기는 쳐다봐야지. 일인데. 공과 사는 구분하자. 우리는 지루해야 돼. 그게 우리 임무야. 얼른 다시 입 집어넣고 눈에 초점 풀고, 지루한 표정으로 복귀 안할래?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개새끼는 아니었습니다만)

 

실은 그게, 뭐 저런 질문을 가지고 걸맞지 않게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육박해 오는지, 그 모양이 퍽 귀여워서 놀려주려다 그만 나도 몰래 아무말 큰잔치의 입구를 개방하고 만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일단 뱉은 말을 절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이 이 잔치의 암묵적인 룰이다 보니, 남은 선택지는 오로지 데코레이션과 패키징뿐이었다. , 들어 봐.

 

 “너는 신이 있다고 믿니?”

 “잘 모르겠는데요.”

 “만약, 신이 있다면 도대체 왜 악이 있는 걸까? 신이 전지전능한데, 왜 착한 사람들은 고통 받고 나쁜 짓 하는 놈들은 떵떵거리는 불합리한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걸까?”

 “그러니까요.”

 “사실 이건, 신의 눈으로 보기에 이 구도 자체가 선한 상태거나 혹은 완벽한 선을 위한 합리적 포석인 게 아닐까?”

 “?”

 “자기 힘으로 아등바등 노력하고 법 없이도 살만큼 착한 사람이 보상받고, 야비한 술책으로 남의 것을 훔쳐 자기 배를 불리는 인간이 벌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 그건 인간 기준에서 그런 거잖아? 절대적으로 전지전능한 신이, 한낱 인간의 기준 같은 걸 따라야 되겠어?”

 “그건 그렇지만......”

 “아빠 바퀴벌레 한 마리가 가족 먹이겠다고 먹거리를 구하러 생활관에 나타났어. 우리 생활관에는 온통 과자부스러기니까. 제발 우리, 청소 좀 하고 살자? 하여튼, 과자부스러기를 발견하고 열심히 기어가고 있었어. 그걸 본 내가 외치는 거지, , 대박, 하다하다 이제 바퀴벌레가 다 나오네, 이것들아? 그러면 니가 잽싸게 쓰레빠를 들고 뛰어가 그 벌레를 패겠지? 그럼 찍 하고 바퀴벌레는 죽겠지? 사실 그때, 바퀴벌레 소굴에서는 덩치 크고 몸통이랑 날개에 큼지막하게 LOVE&PEACE 타투를 새긴 건달 바퀴벌레가 그 아빠 바퀴벌레 집에 쳐들어가서 걔가 겨우내 모아 놓은 한 줌도 안 되는 과자 부스러기를 약탈하는 중인 거라. 애기 바퀴벌레들은 오들오들 떨며 속수무책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겠지만, 그때 걔네 아빠는 너땜에 이미 떡이 된 채 휴지에 쌓여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지. 그래, 걔네는 이제 다신 아빠를 볼 수 없을 거야, 이 험한 세상에. 그러나 건달 바퀴벌레는 안전한 소굴에서 신나게 과자 부스러기를 처먹으며, 아 세상 열라 살기 쉬워, 그러고 있을 거란 말이지.”

 “.”

 “그럼, 이 모든 사정을 다 알고 났다 치면, 니가 성실한 가장 바퀴벌레를 때려죽인 거, 악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돼?”

 “아무래도 그렇다고 하긴 힘들겠는데요. 그리고 제가 이런 이유로 벌레를 안 잡겠다고 했으면 병장님이 절 잡았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신이 뭐 하러 착한 인간 사정을 봐줘야겠어. 착해봐야 그건 인간의 사정이지 신의 사정이 아닌데.”

 “그럴까요?”

 “인간의 눈에 선해 보이는 것이 신의 눈에도 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야. 인간하고 신을 지금 동급에 놓은 거잖아. 한치 앞도 모르는 것들이 어디 전지전능한 척.”

 “그것도 그러네요.”

 “마찬가지야. 너한테는 장난처럼 들렸는지 몰라도, 어쩌면 그게 진실일 수 있지. 잘 생긴 얼굴, 큰 키, , , 뭐 이런 것들이 가치 있다는 건 우리 관점이잖아. 심지어 지금, 여기에서의 관점이지. 생각 해 봐. 메시나 호날두 이런 애들이 요즘에야 발 잘 놀려서 수백 수천억 벌지, 20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호날두는 공장에서 하루 16시간씩 방직기 돌리고, 메시는 낮이면 뙤약볕에서 옥수수 따고 밤에는 탱고나 실컷 추며 살다 이름 없이 죽었을 걸? 다 그런 거야. 코 옆에 점이야 웃자고 한 말이지만, 실제로 니가 스스로 하찮게 생각게 생각하는 소소한 특징이 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거 하나면 큰 축복이다 싶을 정도의 절묘한 한 수였을지도 모르잖아. 실제로 우리는 모두 신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저마다 가치 있고 공평하게 태어난 것인데, 단지 이놈의 자본주의 외모지향주의 사회가 몇몇 특성들만을 심하게 부각시켜서 대다수의 사람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고 있는 것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니 눈에,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니가 좀 후지고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렇거나, 절대적인 기준에서 그런 건 아니라고.”


아무말을 아무말로 끝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syo의 필사적인 노력이 보이시는지. 쉽게 짐작하시겠지만 저건 2할이 농담이고 3할이 헛소리며 또 4할이 개소리였다. 그냥 후임의 삐진 맘도 달래고, 지루한 근무시간 하하호호 웃으며 보내 보자고 한 말이었는데 아 글쎄, 후임 놈 말하길, “, syo병장님,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아요.” ? 잠깐만, 알겠다고? , 알 리가 없는데, 알면 안 되는 건데. 지금 나도 당최 모르겠는데 니가 어떻게 알아. 모르는 거야, 너 그거 아는 거 아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살려구요.” , 안 돼,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말 마음에 새기고 살고 그러는 거 아냐. 하지 마. 눈 초롱초롱해지지 말라고.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만 둬, 제발.......

 

우리는 플라톤이 남긴 여러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순박한 사람들 놀려먹는 장면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 굳이 이런 추억을 떠올린 이유는, 요즘 좀 궁금해서다. syo는 왜 이렇게 뭐 하나 제대로 가진 게 없는 걸까, 불공평하게. 왜냐고? 그걸 모르겠어? , 들어 봐.......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다른 이름으로 정의하자면아마도 상상력일 것이다세상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존재하며답을 알 수 없으므로 하나의 질문에 무수히 많은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존재하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 세상을 아주 자세히 관찰하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답이 생겨나게 된다.

김중혁뭐라도 되겠지

 

  언젠가는 손바닥보다 더 큰둥글둥글하게 잘생긴 돌을 주워 온 적이 있었다엄마는 그 돌을 깨끗이 씻어 장독 속에 장아찌를 눌러놓는 용도로 사용했다나는 그 돌을 책을 펼쳐놓고 종이를 눌러놓는 문진으로 사용했다구멍이 뚫린 돌은 가죽끈으로 매달아 목걸이를 만들었고움푹 파인 돌은 작은 수생식물을 담아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주워 온 돌 하나아무것도 아닌 것 하나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쓸데가 없다그저 돌멩이 하나다쓸데가 없어서 돌은 이모저모로 쓸데를 만드는 사물이기도하다어떻게 사용할지는 돌의 주인에게 달렸다돌의 용도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김소연한 글자 사전 

 

  자기 안에 있는 힘으로 자라고강한 생명력을 가진 작물은 발효를 하게 된다생명력이 강한 것들은 균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명력을 유지하여 생명을 키우는 힘을 그대로 남겨둔다그래서 식품으로서도 적합하다.

  반대로 외부에서 비료를 받아 억지로 살이 오른생명력이 부족한 것들은 부패로 방향을 잡는다생명력이 약한 것들은 균의 분해 과정에서 생명력을 잃는다그래서 음식으로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와타나베 이타루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세계를 파악하지 못한다세계에 대한 해석은 주변이라는 망을 통해 걸러지기 마련이다.

노명우인생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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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1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시오님인 줄 알았는데요, 쇼님이셨군요. 쇼크라테스님...^^
저와 같은 보통 사람은 자신 의지로 절대 세계를 파악하기 어렵죠. 책의 도움 없으면...ㅎㅎ

syo 2018-04-19 22:16   좋아요 0 | URL
제가 syo로 시작되는 아이디를 처음 만들었을 때, 실제로 저는 이걸 ‘시오‘라고 읽었습니다. 근데 알라딘 세상에서는 다들 ‘쇼‘라고 읽어주시더라구요. 이웃분들이 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syo는 이웃분들에게로 가서 쇼가 된 것이죠.
그래도 저는 몇 년을 ‘시오‘라고 읽었던 가락이 있어서 ‘쇼‘라고 쓰지 않고 굳이 syo라고 표기합니다 ㅎㅎㅎㅎ

저랑 똑같이 읽다니, 역시 북다님은 저하고 잘 맞는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oren 2018-04-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임과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주제(?)인 용모에 관한 얘기를 읽으니 문득 ‘미모는 공개 추천장‘이라고 말했던 syo펜하우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 철학자는 이것을 적절히 뒷받침하기 위해 아주 그럴듯한 시인의 싯구까지도 덧붙여 놓았더라고요.(‘신의 영역‘에 관해서라면 아무래도 호메로스를 뺴놓을 순 없을 테니까요.)

신들의 이렇듯 푸짐한 선물을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는 것은 신들의 손길, 아무나 마음대로 잡을 수 없나니.

- <일리아스>

그런데 쇼펜하우어 님은 사람마다 타고나는 ‘용모‘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타고나는 ‘기분의 차이‘도 몹시 중요하다면서, 그걸 또 셰익스피어의 시로 교묘하게 뒷받침하고 있더라고요.

자연은 기이한 자들을 만들어냈다. 옛날부터 어떤 자는 눈알을
굴리며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앵무새처럼 곧잘 웃는다.
그런가 하면, 얼굴을 찌푸린 자들은 공연히 새침해서 웃기는커녕
흰 이빨도 보이지 않는다. 네스토르 왕이 싱글벙글하여도.

- <베니스의 상인>, 제1막 제1장

『인생 극장』에서 인용하신 ‘세계에 대한 해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미 댓글이 한참이나 길어졌지만) 새삼 쇼펜하우어 선생님의 ‘의지의 형이상학‘으로 바라 본 ‘세계 해석‘도 기어이 마저 덧붙이고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렵네요. 이게 다 syo 라는 세 글자에서 우연히 떠오른 생각들이라니, 조금 희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살아서 인식하고 있는 모든 존재에 해당하는 진리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반성하고 추상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인간이 실제로 그렇게 의식할 때에 인간의 철학적인 사유가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태양을 알고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양을 보는 눈이 있고, 대지를 느끼는 손이 있음에 불과하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자기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고 하는 표상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 만약 선험적 진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진리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1. 세계와 나>

syo 2018-04-19 22:46   좋아요 1 | URL
굉장히 어렵네요..... 쇼펜하우어 선생님 세계해석 말씀이요.

쇼펜하우어는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만 들었을 때, ˝다시 말해서 세계는 자기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고 하는 표상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관계‘ 부분이요. 지금까지는 굉장히 일방적인 말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어차피 다 ‘나의‘ 표상일 뿐이라니...... 태양과 대지처럼 다른 인간 역시 뭐 별 특별할 것 없는 나의 표상일 뿐이다, 뭐 이런 말이라고만 넘겨짚고 있었는데 oren님이 인용하신 부분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나 봅니다.

이런 잡글에 너무 고퀄의 댓글을 달아주셔서 안절부절못하는 중입니다.

oren 2018-04-19 23:38   좋아요 1 | URL
쇼펜하우어 철학만큼 심오한 세계도 드물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 유명한 말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의 본문 ‘맨 첫머리‘에 나오는데, 저는 저 문장 하나를 만나기 위해 쇼펜하우어의 다른 책들을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헤매고 다녔었답니다. 그런데 저 유명한 문장도 사실 곧바로 만나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그 책의 맨 앞에 놓인 게 ‘역자의 작품 해설‘이고, 그 다음에 놓인 게 <초판 머리글_1818년 8월>이고, 그 다음에 놓인 게 <제2판 머리글_1844년 2월>이고, 그 다음에 놓인 게 <제3판 머리글_1859년 9월>인데, 그 글들이 하나같이 꽤나 심오하고도 어려우니 말입니다. 아무튼 저 문장을 맨 처음 읽고 제가 받았던 충격은 정말로 엄청난 거였습니다. 띵~ 하는 충격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질 정도니까요. 그런데 저 문장은 사실 ‘쇼펜하우어의 세계 해석‘이라는 웅대한 전체 건축물에 비한다면, 그 건축물의 맨 밑바닥에 놓이는 거대한 주춧돌 정도밖에 안 되더군요. 나중에 제가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었던 ‘보르헤스가 이 책을 두고 했던 말‘도 덧붙여 봅니다.^^ http://blog.aladin.co.kr/oren/6545208
* * *
······ 나는 스위스에서 머물던 시절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했다. 만일 나에게 한 명의 철학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만일 우주의 수수께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언어가 그의 책 속에 쓰여져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책을 독일어로 읽었고 나중에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도 읽고 또 읽었다. ······

syo 2018-04-19 23:31   좋아요 1 | URL
저는 입문서 마니아라서, 쇼펜하우어를 읽겠다고 마음을 먹는 일이 생기면 또 입문서부터 디립다 보다가 정작 쇼펜하우어는 못 읽고 흥미가 떨어지는 사태가 또 발생하겠지만, oren님 말씀이 어쩐지 가슴에 불을 당기네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러니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읽는 거였나 보네요. 그간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인 줄만...... 무식했네요.

독서괭 2018-04-20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말대잔치도 고퀄, 댓글도 고퀄, syo님의 유머는 더 고퀄이네요. 건달 바퀴벌레.. 빵 터짐.. ㅋㅋㅋㅋ 글만 잘 쓰시는 게 아니고 말도 잘하시나 봅니다^^

syo 2018-04-20 08:43   좋아요 0 | URL
실제로 말은 저 정도로 능청맞지는 않았던 기억입니다. 어떻게든 얘 마음에 상처는 안 줘야겠다 싶어서 쩔쩔맸던 것 같아요 ㅋㅋㅋㅋ

2018-04-20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8-04-2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이야기는 다 이렇게 재미있는 거예요?
아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님의 군대 이야기라서 재미있는 거죠? ^^

syo 2018-04-20 11:01   좋아요 0 | URL
군대 이야기가 다 재미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군대 이야기는 ˝내 군대 이야기˝라는 건데ㅋㅋㅋㅋㅋㅋㅋ

전 군대를 늦게 가서 군생활도 재밌었고 기억에 남는 장면도 되게 많아요. 자꾸 쓰게 됩니다.

stella.K 2018-04-24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요 아닙니까? 보통 yo를 요로 읽지 않나요?
저도 어쩌다 syo님이 쇼님이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본인도 모르신다고 하니 가끔 스요님이라 불러도...ㅋㅋ

syo 2018-04-24 14:3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저인줄 아니까 괜찮습니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ㅋㅋ

어떻게 ‘쇼‘가 된 건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최초로 쇼라고 불러주신 분은 곰발님이십니다. 곰발님의 댓글을 보면서, 그러고보니 저렇게 읽힐 수도 있구나, 하고 처음 생각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