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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침묵 ㅣ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4월
평점 :
"왜 그런 사람들이 멋대로 행동하며 살 수 있는 거죠?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태어나는 건가요? 뭐가 그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거죠? 왜 그 사람은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짐승처럼 행동하나요? 아이들을 때리고 욕하고, 죽고 싶을 만큼 나를 두드려 패고...."
생일파티에 동생을 데리러 간 의대생은 그 집 아기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이 장난감이 아니라 사람의 뼈라는 걸 알아본다.
생일을 맞은 아이가 근처 공사장에서 돌인 줄 알고 주워온 건 사람의 뼈였다.
에를렌뒤르가 현장에 출동하고, 휴가를 간 법의학자 대신 고고학자가 혹시 유물일지도 모를 뼈를 발굴한다.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뼈는 한 쪽 손을 위로 치켜든 모습었다.
70~80년 되어 보이는 유골이 왜 거기 묻혀있는지, 사인이 뭔지, 유골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과거를 추적하는 형사들.
에를렌뒤르 형사는 백골로 발견된 유골이 생매장 당한 거라는 걸 직감으로 느낀다.
그래서 그 사건을 해결하고 싶고, 부하들은 오래된 사건이니 유골을 발굴하는 걸로 사건을 종결하고 싶어 한다.
그 와중에 임신 중이었던 딸에게 '살려달라'는 전화가 오고 딸을 찾아 나선 에를렌뒤르는 조산원 근처에서 피에 젖은 딸을 찾지만 아기는 죽고 딸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이 복잡한 현재의 이야기와 함께 과거 1940년대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과거의 이야기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처음엔 그 한 번의 폭력이 실수였을 거라 생각하는 여자가 있다.
남편이 홧김에 그런 거라고.. 분명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거라고.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폭력의 수위는 점점 심화되어 가고, 커가는 아들은 엄마를 지키고 싶어 하고, 몸이 불편한 딸은 말 한마디 못하고 오직 의붓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단란한 가정이지만 아버지만 등장하면 모두가 불행했던 한 가족의 폭력의 역사가 읽는 내내 나를 괴롭힌다.
"가정 폭력이란 영혼 살해에 붙는 편리한 이름이죠. 그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순화시킨 용어예요. 평생토록 끝없는 공포 속에 사는 느낌을 아시나요?"
<무덤의 침묵>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의 이야기와 현재 에를렌뒤르에게 닥친 시련과 과거 에를렌뒤르가 잊지 못하는 동생의 죽음까지 그동안 에를렌뒤르의 감춰졌던 고통들이 유골 발굴처럼 천천히 고통스럽게 밝혀진다.
폭력과 욕설이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그려지고, 과거를 파헤치는 형사들의 끈질김과 에를렌뒤르의 과거사와 현재까지가 촘촘하게 맞물려 이어진다.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3번째 읽는 중인데 이 작가의 이야기를 꾸려가는 솜씨가 너무 단단하고 촘촘해서 정말 푹 빠져서 읽게 된다.
책으로 읽었지만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
아이슬란드와 우리도 가정사에 관해서는 대하는 시선이 비슷하구나.
가정 폭력은 영혼 살해라는 미켈리나의 말이 마음에 깊이 박힌다.
'구타는 결국 사디즘으로 변한다'는 말도 마음에 박힌다.
그 모든 고통의 끝이 예상치를 넘는 결말이기에 어떤 작가가 이야기를 이렇게 잔혹하면서도 모든 인물들이 다 안쓰럽게 느껴지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 수사물이지만 가볍지 않고, 액션이 하나도 없지만 긴장되고,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인드리다손의 작품들이 모두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무덤의 침묵>은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엔 영림카디널에서 출간되었다 절판되고 엘릭시르에서 재출간되었다.
이 두 출판사가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데 인물들과 작가의 이름이 약씩이 다르게 표기되어서 아쉽니다.
출판사가 다르고 번역자가 다르더라도 인물들과 작가의 이름은 통일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영림카디널에서 개정판으로 나온 <저주받은 피>와 <목소리>를 읽었는데 <무덤의 침묵>은 두 작품 사이에 낀 작품이다.
현재 출간된 책 중에 <저체온증> 한 권이 남아있다.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는데 그 북유럽 작품들 보다 한층 깊은 어둠을 담고 있는 아이슬란드의 인드리다손 작가의 작품들은 아주 인상적이다.
뒤늦게 만났지만 인생의 가장 깊고, 고통스럽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앞에서 인간의 깊은 민낯을 만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