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것들 네오픽션 ON시리즈 26
기에천 지음 / 네오픽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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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 하나쯤 다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인형들..

<귀여운 것들>은 전혀 귀엽지 않은 이야기다.

한때는 귀여운 토끼 인형이었던 깔랑

팔이 네 개 달린 불량품 그로테

혹이 달린 쥐

사람에게 즙을 내어주기 위해 사육당한 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여자

교복에 몸에 붙어버린 이희지.

종잡을 수 없는 등장인물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잔혹하게 흐른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알 거 같은 이야기다.

주인에게 사랑받다 어느 한순간 버려진 인형들이 겪는 참혹한 일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굴까?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지점토 인형을 매일 부수고 다시 못생기게 만들어서 자신이 아름다움을 빛나게 하는 검은 여자

어떻게 유대감을 쌓는지 배우지 못해서 새로운 인형이 들어올 때마다 조각조각 찢어놓는 지점토 인형의 잔혹함은 의식하지 못한 것이라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이 이야기 어디에도 정상적인 건 없다.

그저 잔혹하고 피 튀기고 삐뚤어진 비정상만 보인다.

정상적이지 않기에 정상이라는 느낌이 어떤 건지를 더 느끼게 해주는 게 장점이라고나 할까?

불타버린 집에서 뼈만 남아버린 쥐처럼

이 이야기에는 '살'이 좀 붙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교함이 빠진 잔혹만 남은 거 같아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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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슐츠 씨 -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박상현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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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버즈피드>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 참가한 남성 네 명의 옷에 달린 주머니를 꿰매어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일상생활을 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본 남자들은 여자가 현대 사회에서 주머니 없이 사는 건 전기가 발명된 세상에서 어둠 속에 사는 거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친애하는 슐츠 씨>를 읽는 동안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있었다.

마치 심봉사가 눈을 떴을 때의 심정이랄까?

남들 다 그러고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고 살아온 느낌 어딘가에 꾹꾹 박아 눌러 놓았던 부당함에 대한 감정들이 샘처럼 솟아났다.

이런 글들을 왜 자주 접하지 못한 걸까?

나는 그렇게 몇 년간 책을 읽었으면서도 어째서 <오토레터>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까?

"사회 변화에 동의하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빨리 변할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지 않은 세력들 때문에 이런 글들이 사람들에게 자주 띄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양한 관점을 어릴 때부터 읽고, 듣고, 보고 자라야 하는 아이들에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책을 읽는 동안 점점 새로운 "앎"이 쏙쏙 채워지는 느낌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옷에 달린 주머니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할 줄 몰랐다.

사실 내 옷에 주머니가 달려있어도 그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고 다니고 싶지 않았던 건 모양새 때문이다.

여성 답지 못한 모양새. 이것 때문에 주머니가 있어도 활용하지 않았고, 주머니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온전한 나의 생각일까?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여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어른들의 관습이 내게도 고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여성 남성 구분하지 않고 모든 옷에 주머니가 올바르게 달려있었다면 여자들은 불편하게 핸드백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군복에도 주머니는 장식용이었고, 여성 군인들에게도 핸드백을 지급했다는 웃기는 얘기는 이 책에서 처음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여군이니까 당연한 복장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또 멋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쓴웃음이 난다.


여자가 마라톤을 뛰면 자궁이 떨어지고 가슴에 털이 자란다고 정말 믿었단 말이지?

간성인은 안드로젠 무감응 증후군을 가진 사람으로 생식기의 종류와 성염색체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다.

남아프리카 육상 선수 세메냐는 간성인이다. 세메냐는 보통 여성들보다 테스토스테론이 더 많이 분비된다. 그래서 테스토스테론을 줄이는 호르몬제를 6개월간 투여해야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

폰트에도 인종차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완톤 폰트는 중국 식당에서 많이 사용해서 잘 알려진 폰트인데 너무 익숙하다 보니 그것이 중국인 나아가 동양을 대표하는 폰트가 되어서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것으로 동양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니 이 뿌리 깊은 차별이 폰트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조니 뎁과 엠버 허드의 이혼 문제는 영국과 미국의 싸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둘 다 영국에서 한 번 미국에서 한 번 승소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소송에서 조니 뎁이 앰버에게 씌운 프레임은 저질이었다.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간과하는 게 있다면 가정폭력을 먼저 시전한 것은 바로 조니 뎁이라는 사실이다.

앰버는 그에 대응했을 뿐이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어 앰버가 소시오패스처럼 생각된다면 먼저 때린 조니 뎁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디즈니가 1938년 메리 V. 포드에게 보낸 거절 편지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그리고 마녀가 그려진 멋진 편지지에 쓰였다.

ㅡ 그 작업은 전적으로 젊은 남성들이 합니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은 연습생으로 받지 않습니다.

ㅡ 여자들의 숫자에 비해 자리는 극히 적기 때문에 그걸 들고 이곳 할리우드까지 오시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 머릿속에 용감한 왕자와 곤경에 처한 어여쁜 공주의 프레임을 씌운 디즈니스러운 불합격 통지서다.

젊은 남성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디즈니 동화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뇌리에 어긋난 이야기들을 심어 두었을까? 그 잘못된 세뇌의 피해자가 바로 나다!

제목 <친애하는 슐츠 씨>의 슐츠는 만화 <피너츠>의 작가다.

그가 <피너츠>에 넣은 흑인 캐릭터 프랭클린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된 직후 해리엇 글릭먼이라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 시대에 이 캐릭터를 만들어 이야기에 등장시킨 슐츠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이 사회의 변화가 빨라지지 않을까?

이 책이 초등학교 필독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차별은 어릴 때부터 알아채야 하니까..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가? 이런 역사를 꾸준히 발굴하고 대중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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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스테르담으로 출근합니다 - 네덜란드로 간 한국인 승무원, 살아 있는 더치 문화를 만나다!
신수정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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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풍차의 나라라는 것과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더 친근감을 찾아보자면 작년에 암스테르담에 다녀온 동생이 사다 준 냉장고 자석과 '진주 귀걸이 소녀' 엽서 정도.

신수정 작가님에게 선물 받은 책 <나는 암스테르담으로 출근합니다>를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팬데믹 이후 한국으로 여행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류의 열풍도 있지만 이미 한국은 첨단의 도시로 알려져서 미래 도시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분명 우리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최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내면과 우리의 관습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들은 관심이 없으면 아예 말하지 않으며, 만약 말한다면 그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진심 어린 의견이라고 말한다.

바다 보다 낮은 땅을 억척스레 일구며 살아낸 그들은 척박한 환경과 맞서 싸우느라 절박한 상황을 자주 겪는 동안 그들만의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격식 따위 던져버리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내비치는 문화가 예의범절 따지는 우리에게는 무척 무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거침없는 속내 표현은 예의범절 따지느라 뭔 말인지 알쏭달쏭 한 우리네와는 결이 다르다.

직선적이지만 상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이다.

입 다물고 있다가 나중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더치페이가 정 없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으로 바뀐지 오래다.

그들은 질문을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는 문화다.

충분한 토론을 거치기에 다소 느린 듯 보여도 결국에는 모두의 마음을 합한 결정이기에 나중에 시끄러운 일도 없고, 문제가 생겨도 모두가 의견을 내어 해결하기에 독단이 없다.

"틀려도 괜찮아."

모든 것에 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저 말이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다.

틀려도 괜찮아, 그러나 그로 인한 문제는 너가 책임져.라는 뉘앙스가 담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모두가 저 말을 달고 산다고 한다. 당연히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틀렸어도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나이와 직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틀려도 괜찮으니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는 사회다.


유연한 근로 시간제로 많은 사람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경력단절 없이 일하고 있다.

정규직과 마찬가지로 승진은 물론 휴가도 똑같이 쓸 수 있다.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몸만 건강하다면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너무 솔깃하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네덜란드에서 결혼은 이제 한물간 제도 같다.

'파트너 등록제'로 동거인을 파트너로 부르며 법적으로 부부관계로 본다.

결혼과 동거는 헤어질 때 절차가 다른데 동거는 시청에 신고만 하면 되지만 결혼은 법원의 판결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신랑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가 턱시도를 입고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참 신박했다.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 격식을 따지지 않는 곳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같다.

네덜란드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1976년 대마를 세계 최초로 허용해 강한 마약의 확산을 막았고, 성매매는 1988년 공식적으로 직업으로 인정하여 음지에서 양지로 드러냈다. 2001년, 동성 결혼을 최초로 인정하고 2002년에는 말기 환자에 대한 안락사를 허용했다.


동물복지도 세계 최고다.

투표권이 없는 동물을 위한 정당과 응급 동물을 위한 구급차와 동물 학대 범죄를 담당하는 경찰도 있단다.

대다수의 상정이나 카페, 레스토랑은 물론 대중교통도 동물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네덜란드가 미래의 인간 사회의 롤 모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꿈꾸는 모든 걸 이미 실천하며 사는 사회가 네덜란드다.

저자 역시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네덜란드 항공사에 취직했다.

우리나라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나라 네덜란드.

여러 가지 절차가 있지만 자기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복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차갑고 냉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고 나니 그들이 수많은 질문과 의견을 내어 고쳐간 문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설화법도,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피드백도 모르는 것을 당당하게 물어보고 질문할 자유를 가진 그들의 삶이 많이 부러워졌다.

개방적이고 열린 문화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우리가 참 많이 갇혀 있는 답답한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네덜란드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국립미술관에 있는 진주 귀걸이 소녀를 직접 보고 싶다.

이제 맥주는 하이네켄만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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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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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인생의 페이지를 내일로 넘겨."




기욤 뮈소의 10여 년 전 작품이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아직 읽지 못했던 <내일>을 읽으며 바로 이 맛이지! 이게 기욤 뮈소지! 했다.

시공간을 초월한 로맨스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갈수록 이야기가 스릴러로 전환된다.

바로 기욤 뮈소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뮈소만의 장르였다.

달콤하다가 쌉싸름하면서 떨떠름했다가 마지막 달콤함을 안겨주는 맛.

잊고 있었던 맛이었다.

처음에 <구해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를 읽었을 때의 그 충만함이 되살아났다.

최근작들에 약간 실망했던 터라 더 반가운 작품이었다.

2011년을 사는 남자와

2010년을 사는 여자가 중고 노트북으로 연결된다.

서로 만나기로 했지만 시간대가 영 다른 그들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망한 그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을 이어주는 건 중고 컴퓨터라는 사실.

매튜는 엠마를 이용해 1년 전에 죽은 아내 케이트를 살려보려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아주 파렴치하다.

하버드 철학과 교수가 할 짓은 못되지...

안 그래?




엠마는 와인 감별사다.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고,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다.

자신이 판 적도 없는 노트북을 샀다는 남자에게 메일을 받고 답장을 하다 보니 궁금해졌다.

하버드 철학과 교수라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꽤 멋진 남자였다.

게다가 부인도 없고...

그러나 그 남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맞은 줄 알았는데 서로의 시간대가 달랐을 뿐이었다.

그걸 알고 나자 이 남자가 자기 아내를 구해달라고 한다.

구해줘 말아?


로맨스로 달달했던 마음이 스릴러로 쪼여진다.

사람이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랑'을 위해 어떻게 변질되는지 그 맛을 본 기분이다.

케이트도 매튜도 자신들의 사랑 앞에서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엠마의 정신은 불안정했지만 케이트의 뒤를 쫓으면서 약했던 멘탈이 강해진다.

프랑스 소설이라 그런가?

뭔가 아련미는 없는 거 같다.

달달함 속에 냉철함이 있다.

미래가 바뀐 사람의 기억 속엔 없는 과거의 이야기.

혼자만 바뀐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의 기다림.

다시 시작되는 그들의 시작점에서 과연 이 커플을 응원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예전 같았으면 다시 시작되는 이 로맨스가 아름다웠을 텐데..

지금은 매튜의 만행(?)을 보았기에 그게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차라리 각자의 길을 갔어도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양한 장르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은 분들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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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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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들을 그리로 보내요."

"왜?"

"거기가 더 안전할 것 같아요."

"원 애도..."



6.25 전쟁이 휩쓸고 간 고택의 한 귀퉁이는 허물어져있다.

경아는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산다.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가족이나 애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환쟁이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며 경아는 전쟁의 참상을 잊은 것처럼 산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분주해진 일터에 옥희도라는 사람이 들어오고 경아는 그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철없어 보이는 경아의 일탈은 불안한 시대를 반영한 거 같다.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알 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은 불타버릴 것을 알면서도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을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본심은 아니었을게다.

시대가 그랬으니까.

남편과 아들에게 기대어 사는 삶.

그들의 존재는 삶과 생명이었다.

남편이 죽었어도 엄마는 버틸 수 있었다.

두 아들들이 장승처럼 버티고 있었으니까.

아들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의지처가 사라졌으니까..

정신을 놓아버린 것처럼 보였던 엄마는 여자이기를 포기하면서 진정한 여자가 되었다.

그에겐 경아가 있었으므로 엄마의 회복엔 경아의 활기가 있었다.

이 전쟁통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일선에 나가서 당당하게 돈을 벌어오는 딸 경아가 있었다.

알게 모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 어떤 관습이라는 게 그녀의 마음을 다 놓아주지 못했을 뿐...



그저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던 소녀에서 죄책감을 지닌 어른이 되어야 했던 경아는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놓을 수 없었다.

옥희도 씨로부터 아버지와 오빠들의 부재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싶었다면 그의 아내를 통해 엄마에게 받지 못하는 이해를 얻고자 했다.

갈팡질팡, 오락가락하는 그 마음은 불안한 시간대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봐 응?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용감한 고아가 돼봐."


경아는 용감했다.

자신은 몰랐지만.

그저 굳건한 기둥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태수는 너무 어렸다. 그녀의 그 고뇌를 담아줄 그릇이 아니었다.

꽉 차 있어 넉넉한 마음은 늘 무언가를 품고 있지...

경아도 그 넉넉함에 담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맘때는 늘 어른의 고독 속에 존재하고 싶은 법이니까..

옥희도의 헐벗은 나무가 세월이 흘러 "나목"으로 보일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은 모든 걸 바꿔놨고, 모든 걸 새로이 정립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필요했던 사람들 틈에 경아가 있었다.

혼란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홀로 방황했던 젊음은 엄마의 죽음으로 온전한 어른이 되어 자신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삶.

경아가 독립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는 이 마무리가 평안했을 거 같다.

지금은 마지막 챕터 없이 끝났으면 좋았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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