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살아도 괜찮을까
이성진 지음 / 하모니북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체코의 오스트라바(Ostrava)라는 먼 나라의 도시에 와서도 한국이 계속 생각났던 건, 향수보다는 염려에 가까웠다.

거긴 버스정류장에 휠체어를 끌고 온 장애인들이 많이 보였다.

다리가 엄청 굵은 여자들도 당당히 거리를 활보했다. 옷 입는 행색이 초라했던 사람도, 집시라 불리며 누가 봐도 인종이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오스트라바 사람일 뿐이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그들은 보편적인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옆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수군대지 않았으며 당연히 내가 앞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읽고 나서 리뷰가 써지지 않는 글이 있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런 책이다.

얇은 에세이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감상을 적기가 어려운 걸까?

 

제목만으로는 이 이야기는 유럽 각지를 돌며 여기서 한 번쯤 살아봐도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그런 여행 에세이쯤으로 느껴졌다.

제목에 초점을 맞추자면 저자의 결론은 "살아도 괜찮다 " 이다.

 

하지만 바로 내가 옮겨 적은 저 문장들 때문에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늘 남의 눈을 의식하고, 늘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며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사회적 강자에 대한 입맛에만 맞추어 발전해온 이 빨리빨리의 사회에 길들여진 우리가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그러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저 유럽에서 얼마나 잘 살 수 있을까?

 

 

저자는 공공정책과 도시공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유럽에 갔다.

여행 보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유럽의 도시를 돌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보며 우리와의 접점 지대를 살피는 눈길이 이 책에 담겨있다.

 

올여름 잠시 머물다 온 맨체스터에서의 느낌이 그랬다.

뭔가를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

횡단보도가 있건, 없건 언제나 보행자가 우선인 거리.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다니기 편한 거리.

어떤 모습이든, 어떤 모양새든 손가락질 받거나, 수군대거나 하는 거 없이 언제나 당당한 거리.

자신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공공의 질서 앞에서는 자신의 자유도 내려놓는 거리.

사적인 게 우선이긴 하지만 공적인 질서 앞에서는 그 사적임은 잠시 접는 태도.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보이는 그들의 시스템이 참 부러웠다.

 

 

우리가 사는 곳, 그 속도의 변화는 우리가 이끌어 내야만 한다.

 

진정 바꾸고 싶다면 말이다.

부산 지하철에서 뜨개질을 하는 남자.

손재주가 좋아서 무언가를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남자.

세심한 눈길로 미래를 그려보는 그의 마음에 담긴 도시는 어떤 곳일까?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다름 아닌 느림의 미학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서,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는 청년의 마음은 무한대이다.

이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렇다.

무한대의 희망.

 

 

도시계획이라는 게 부동산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기 위함을 애초에 생각도 못 한 우리네 계획은

점점 획일화되고, 점점 각박한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불과 20~30년 사이에 우리의 정서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졌다.

그것이 삶의 터전인 도시 설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20대 청년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미래에 희망을 가져 본다.

그가 더 살기 좋은 도시를 가꾸는데 일조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미래의 일꾼이 자신이 속한 도시의 모습을 걱정하고, 더 나은 도시로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도시는 우리에게,

무정이라는 저주를 내린 게 아니라 자유라는 선물을 준 걸지도 모른다.

 

 

옛 감성이 지금 현대와 맞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일순 거부감이 들다가도 어쩜 맞는 말이라고 끄덕여 본다.

옆집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알고 지냈던 그 옛 감성엔 사생활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치 않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느닷없는 호구조사를 당할 때가 많다.

예전엔 모두가 한 다리만 건너도 아는 처지이기에 그런 게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얻은 게 자유다.

남의 눈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는 것.

경계의 선을 지키는 것.

도시의 삶이 가진 그 나름의 매력이다.

 

 

재밌는 거리, 활기찬 거리는 그 자체로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도시의 중요한 자산이다. 세계도시로 가는 위대한 여정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거리문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다양한 관점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의 문제점과 좋은 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점들에 대해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단순한 여행기겠지. 하는 나의 촉은 무참히 깨졌지만.

그 무참히 깨진 상상에서 뜻밖에 만난 즐거움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앞으로의 사회가 지금보다는 좀 더 여유롭고, 느리고, 배려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지금 내 나이의 어른들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지금 저자 나이의 청년들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이후의 마음이 가벼웠다.

 

 

좀 더 따뜻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아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이코 헌터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카린 지에벨의 단편을 얼마 전 읽었다.

장편은 어떨까? 싶도록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 [게임 마스터]

이번에 지에벨의 신간 사이코 헌터는 제목처럼 흥미로운 소재이다.

 

바로 '인간사냥' 이라는 주 재료에 집단 폭행이 낳은 살인의 광기가 또 하나의 몰이사냥꾼을 만들어 내는 곁가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제각각 하나의 소설로 완성될 만큼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저 얇은 책에 그 두 가지 요소를 합쳐 놓았는지 읽으면서도 감탄하게 된다.

 

인간 본성에 잠재되어 있는 사냥꾼의 기질.

우린 모두 정착하기 전에 수렵인이었다는 유발 하라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책에는 인간 사냥에 맛 들인 사냥꾼들이 나온다.

 

노숙자 레미는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어떤 남자를 구해준다.

그리고 그 남자는 레미에게 일자리를 제안한다.

자신을 도와준 고마움의 표시로.

 

한 달에 1200유로. 게다가 숙식까지. 그것도 성에서.

 

 

아무 의심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 레미는 그곳이 사냥터라는 걸 모른다.

성으로 가장한 인간 사냥을 위해 마련된 은밀한 사냥터라는걸.

 

 

 

 

 

 

 

디안.

그녀는 사진작가다.

업무차 출장을 온 디안은 새벽부터 바지런하게 움직이다 봐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

마을의 사냥꾼들이 한 남자를 무차별 폭행하다 그를 죽인다.

처음엔 그저 그런 시빗거리로 시작되었지만 그 남자에게서 얼마 전 살해당한 여자의 사진이 나오자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제어할 수 없는 집단적 폭력.

그리고 일어난 죽음.

그리고 완전범죄를 꿈꾸던 그들에게 그녀의 존재가 발각된다.

 

기회가 없어 못했을 뿐, 작은 불씨 하나만 지펴주면 저열하고 비천한 본능을 폭발시키는 게 바로 인간들이다. 하지만 과연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럴까?

 

 

한쪽에서 인간 사냥을 즐기는 자들이 자신들이 섭외한 사람들을 도망치게 풀어놓고 사냥개를 풀어 몰이사냥을 한다.

한쪽에선 살인을 목격한 여자를 4명의 사냥꾼들이 찾기 위해 추격을 한다.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

 

포식자들의 먹잇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노숙자나 불법체류자들이었다.

없어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그런 사람들.

 

시장의 법칙, 그건 바로 수요와 공급이다.

그 수요와 공급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가 상상했던 사냥에 참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꺼이 내놓을 고객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즐겨본 적 없는 최고의 사냥을 위해서.

 

 

레미는 자신처럼 그곳에 붙잡혀 온 불법 체류자들과 함께 생사를 거는 도망자가 된다.

출구 없는 사냥터에서 살기 위해 맹렬하게 도망쳐야 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을 재미 삼아 쫓는 사냥꾼들은 시시각각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노숙자 레미와 말리에서 온 사르한 체첸에서 온 형제는 사력을 다해 도망치지만 도망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음을 피해 낯선 세계로 도망 친 형제는 결국 사지를 벗어나 죽음의 대가를 치르는 곳으로 자진해서 걸어온 셈이다.

그들에겐 이 세상 어디에도 평화로움은 없겠지. 죽음까지도 고통스러웠을 뿐이니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도망치는 모습에서 인간의 다른 본성을 보게 된다.

 

악에 물든 본성과 어떤 식으로든 맺게 되는 끈끈한 결속력.

무전유죄의 법칙과 살아남은 자는 침묵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진실에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사실.

사람들은 허황된 진실보다는 날조된 현실을 더 믿는다.

 

지에벨의 이야기는 인간 본성의 원초적 감정선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그리고 모호하게 끝맺음을 하는 인간관계도 있다.

쥘리라는 여자와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다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가 찜찜하게 남아 있다.

디안은 쥘리와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언급되지 않은 건 잊을밖에.

 

어차피 그들은 아름다운 시월의 어느 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살인자가 되어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재범을 하거나 말거나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끔찍한 '말기' 상태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상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뿐...

 

 

이 희생자들 중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었을까?

오로지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동물이 아닌 같은 종을 살해할 이유가 있을까?

순간의 광기를 거두지 못해 모두 살인자가 된 그들은 어떻게 평생 그 짐을 지고 살아갈까?

그중엔 아무런 짐도 지고 가지 않는 무감각한 사람도 존재한다.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끝없이 쫓기는 기분이 드는 책이다.

사냥꾼들이 모두 살아남아서 그런 거 같다.

어떤 처벌도 없는 이 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는 나 자신을 본다.

어쩜 지에벨의 세계는 현실과 가장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잘한 죄들은 무거운 벌을 받지만

커다란 죄들은 단죄하지 않는 이 현실의 세상이 사이코 헌터들이 사는 지에벨의 세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위험을 건너뛰면 곧바로 다른 위험이 닥쳐 오는 세상.

지에벨이 말하고자 하는 세상이 아닐까?

 

오늘 밤은 무작정 도망 다니는 꿈을 꾸게 될 거 같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여느 날과 똑같은 하루가.

대수로울 것 없는 하루가.

양심의 가책을 벗어던진 살인범은 무고한 시민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1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1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빠르게, 테오는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표정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최대한 아껴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 경계선으로 나뉜 두 진영에서 침묵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최고의 방책이다.

 

누군가는 위험을 감지하는 눈을 가졌다.

그건 마음의 눈이다.

고통을 겪은 사람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하지만 규칙과 사회적 관습과, 방어하는 마음과 방심하는 마음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마음들에 의해 종종 묵살되고 만다.

그리고 정말 어찌 손을 쓸 수 없을 때에 가서야 우왕좌왕 책임질 사람을 갈구할 뿐이다.

 

 

12살. 이제 곧 13살이 되는 테오에겐 이혼 한 엄마와 아빠가 있다.

일주일씩 번갈아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내야 하는 어린 테오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감정의 시작 지대에서 어설픈 눈치만 늘어간다.

눈치는 침묵의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저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둘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이니까.

 

어른들은 자신들의 고통 때문에 아이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없다.

아이는. 아이니까 잊어버릴 거라 생각한다.

아이의 마음이 어떤지 다정하게 물어보는 부모는 없다.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외로운지...

 

엘렌은 교사로서 그리고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로 인해 테오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직감으로 느낀다.

하지만 표면상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저 좀 신경을 써서 지켜보라는 말 이외엔 그들도 딱히 나서서 문제를 드러나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린 테오는 마티스라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 어린 친구가 그의 고통을 덜어 줄 순 없었다.

곁을 주지 않는 엄마와 점점 무너져가는 아빠 사이에서 테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 말이 복선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학대만 학대가 아니다.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함도 학대일 수 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도.

 

충실한 마음.

가족에게 가져야 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무엇인데 스스로 침묵하게 하고, 외면하게 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할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마음이

결국은 해친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게 누군가일 수도 있고, 그게 나일 수도 있다.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을 학대하는 사람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쓴 글자에 피멍이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또한 가슴에 묻어 버린다.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결국 그들을 죽음의 강 위로 던져 버린다.

 

어떻게 해야 옳은 걸까?

 

나는 충실한 사람일까?

내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한 말이 충실하다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한 행동이 충실하다 할 수 있을까?

충실한 마음의 가닥을 아직 다 모르겠다.

내가 충실한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델핀 드 비강의 이야기는 처음이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답은 우리 각자가 각각의 영역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충실하되

감각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일곱 번째 시리즈는 바로 문학이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

영미문학에만 치중해 있던 우리나라에 라틴 문학은 극소수 작가들의 작품만 번역되어 있었다.

그것도 거의 중역이었다.

그래서 난생처음 접한 라틴 문학의 손꼽히는 작품 '백년의 고독' 을 읽다가 던져버렸던 슬픈 시간이 생각난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당시 나는 그 책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환경에서 라틴 문학을 접하고 있지만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백년의 고독'은 내게 늘 고독하게 남아있을 거 같다.

어쨌든 요즘은 문학도 한곳에 치중하는 것이 아닌 글로벌하게 접할 수 있어서 나름 다양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이번 서강명강 시리즈가 라틴 문학을 다루고 있어서 기대가 되었다. 

이 책에선 5명의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들의 시인, 루벤 다리오.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파블로 네루다.

영혼을 위무하는 시인, 세사르 바예호.

 

신성한 전통에 총구를 겨눈 반시인, 니카노르 파라.

파블로 네루다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로 알게 된 시인이다.

그의 감성적인 시를 영화를 통해 만났지만 제대로 아는 건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시인인 네루다.

그래서 그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하지만 네루다 보다 더 내 맘을 끌었던 시인은 파라다.

반시인 파라.

 

 

좋다, 밤은 길다

스스로 잘났다고 믿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사전을 지녀야 한다,

 

 

안티 정신으로 무장한 이 시인의 시는 재기 넘치고 오늘날 유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통쾌하다.

현실을 그렇게 풍자적으로 비꼰 시들은 현대시의 시조라고 할 만한다.

전통의 기법들을 새로운 기법으로 갈아치웠다고나 할까?

 

 

 

파라의 거의 모든 시를 관통하는 시적 장치는 바로 유머와 아이러니,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유머는 블랙 유머인 경우가 많고, 패러디는 과거의 전통을 전유하여 다시 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가 된다.

 

신랄한 유머.

재기 넘치는 은유.

정곡을 찌르는 시어들이 그의 매력을 가중시킨다.

 

어린 시절의 추억:

나무들은 아직 가구의 형태를 갖지 않았고

통닭은 산 채로 풍경 속을 돌아다녔지

기쁜 소식:

백만 년 뒤에

지구가 회복된단다

그런데 사라지는 건 바로 우리들

 

 

이 시를 읽는 데 뒷덜미에서 찬바람이 분다.

자연은 회복해도 인간은 사라지는 이 세상.

시인의 날카로운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다.

이토록 공허한 느낌이라니.

 

칠레에서는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백만장자들이 지배한다.

닭장은 여우에게 맡겨져 있다.

여러분에게 청하건대

어느 나라에서 인권이 존중되는지 알려 달라.

 

이 시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본다.

파라가 젊었을 때 보다 많은 발전을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유가 없고, 인권이 없으며 지배당하고 있다.

100세를 넘게 장수한 시인 니카노르 파라.

거침없이 내지른 시들이 그의 장수의 비결은 아니었을까?

 

파라가 신선한 자극제였다면 고통을 짊어진 시인이 있었다.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 라고 말하는 시인 세사르 바예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데 계속 가슴이 아프다.

아주 쉬운 말로 절절함을 적어가는 시인의 말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식탁에 앉아 쓰라림을 삼켰다. 배가 고파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우는 아이처럼...

 

평생 가난 때문에 고통받은 시인은 그럼에도 타인에게 용서를 빈다.

그들의 배고픔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배고팠던 자만이 배고픈 자를 이해하는 아이러니.

파라와는 다르게 단명했던 바예흐의 고단한 삶이 가슴 아프다.

 

라틴 아메리카.

무언가를 빼앗겨 본 사람들의 정서는 통하는 게 있다.

그래서 영미문학 보다 라틴 문학에 우리와 더 일맥상통하는 느낌이 있는 거 같다.

이 시인들은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많은 뮤즈를 거느린 바람둥이였다.

정열의 라틴 문화 속에서 자란 시인들답다.

 

생소함이 익숙함으로 자리 잡기에 좋은 시작이다.

서가명강 일곱 번째 이야기는 낯선 문화가 조금씩 익숙해지는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하다가도.

자신의 삶에 온기가 없던 남자는 마지막에 온기를 쥐어짜서 따뜻하게 멀리 갔을 거라 생각해본다.

짧은 이야기에 담긴 묵직함이 오래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

프레드릭 배크만의 일생일대의 거래.

잠시 끝도 없는 먹먹함 속으로 빠져든다.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암 선고를 받은 남자는 부유하지만 정작 소중한 것은 잃고 살아왔다.

돈과 명예와 바쁘게 사는 인생 안엔 가족이 없었다.

그에게 가족은 시간을 내어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자의 시간은 늘 남의 것이었으니까.

암 병동의 한 소녀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아이는 사람들이 없을 때 의자에 빨간색으로 색칠을 한다.

그 두 사람은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를 본다.

가까이해서 이로울 것이 없는 여자다.

그게 전부라면, 그게 당신의 전부라면 누굴 위해 당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잠든 가족을 보며 이 이야기를 생각했다는 배크만의 마음이 느껴진다.

가장 행복할 때 가장 불행한 일을 생각하게 되는 순간.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순간.

 

 

아들에게 내어주지 못했던 곁.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사랑.

아들에게 건네지 못했던 온기.

그것들은 끝내 전해지지 못하겠지.

그렇기에 그는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동화처럼 예쁜 책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이 짧은 이야기에 간결하게 담긴 삶의 모순.

어떤 선택을 해도 상처는 남는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고 오로지 소비자로서 지구상에 존재한다. 나와 다르게.

 

 

나는

가족에게 얼마나 시간을 내어 주고 살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내 시간을 덜어 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나?

나는.

행복한가?

그의 거래가

자꾸만 마음에 남는다.

나는 사라지고 싶지 않나 보다.

아직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