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들러스 타운의 동양 상점
우성준 지음, 송섬별 옮김 / 아토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여기가 좋아?" 누나가 물었다. 여기라는 것이 이 가게를 말하는 건지, 이 나라를 말하는 건지, 이 지구를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물으려다가 어차피 내 대답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이만하면 됐어." 내가 말했다.

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12살 대준이는 엄마와 누나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5년 전 먼저 건너와 자리를 잡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페들러스 타운에 동양 상점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대준에서 데이빗이 된 12살 어른 꼬마의 좌충우돌 이민사! 라고 생각했는데, 읽어가는 내내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까지 아우르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뜨끈해진다.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와 누나의 피아노 소리가 뒤섞이자 이상하게도 노래처럼 들렸다.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았다. 그냥, 우리 가족 같았다.

 

 

한참 사춘기였던 누나는 준이 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외로움을 느꼈다. 자주 싸우는 부모님과 누나의 예민함에 가려져 준이는 어른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마이 굿 선~"

아빠가 이렇게 준이를 부를 때마다 준이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낀다.

아마도 떨어져 있는 동안 상상했던 아빠와 직접 마주한 아빠는 많이 어색하고 달랐다.

그런 아빠가 자신과 어떡하든 친해져 보려는 모습을 대하는 준이의 자세가 상당히 어른스럽다.

준이 눈에 아빠가 자신을 마이 굿 선~ 이라고 부를 때면 뭔가 요구 사항이 있거나, 난처한 사항에 자신을 밀어 넣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준이지만 이 묵묵한 아이는 아빠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가게는 생각 보다 컸고, 영어가 짧은 아빠는 홍씨 아저씨의 도움을 받으며 그래도 장사를 잘 해간다.

준과 수는 학교 외에는 늘 가게에서 아빠와 엄마를 돕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하는 페들러스 타운의 가게 주인들의 시선으로 자신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스피커를 파는 드미트리 포포브. 거울 가게를 하는 테드 맥마너스, 가방 가게를 하는 홍씨 아저씨, 탐정인 밀러씨, 식당 주인 제이크.

이들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곁들여지면서 이 이야기는 한 이민자 가족에서 시작해서 다른 세계로 확대되어 간다.

 

이제는 가족이 다시 함께하게 되었으니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낯선 나라에 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혼자 남겨진 게 아닌데도 여전히 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남편이 변해서인 건지도 몰랐다. 변한 건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라든지 좋아하는 음식처럼 큰 것들이 아니라 자잘한 것들이었데,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별 것 아닌 것들이 사람의 성격에서 그렇게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몰랐다.

 

 

5년이란 세월은 부부 사이에도 넘기 힘든 간극이었다.

게다가 다른 한 사람의 외도는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잦은 부부 싸움에도 그들은 가게에서는 언제나 다정한 가족이어야 했다.

부모의 싸움을 지켜보며 그것에 대처하는 준과 수의 모습.

 

 

솔직히 말하면 최대한 아빠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죄지은 사람과 생활공간을 공유하다는 오명을 안는것도 별로인데다가 엄마에게 내가 아빠 편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수는 엄마와 준은 아빠와 한 방을 쓰게 된다.

물론 준은 아빠 편을 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빠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12살 어린 준에겐 부모님의 이혼이 기정사실화되는 것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일이기에.

 

낯선 곳에서 10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까?

자신들의 고단함보다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급급했던 그들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자꾸만 쓰러지던 크리스마스트리는 그런 그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엄마가 없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빠 없이는 몇 년이나 살아 봤지만, 엄마 없는 세상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요즈음 엄마는 엄마 노릇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없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이민자의 이야기엔 늘 부당함이 첨부되어 있다.

그래서 읽기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이야기엔 그런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래서 훈훈하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하려 하는 마음들이 페들러스 타운엔 존재한다.

준이의 시선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시선에서 가족 각자의 시선으로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서로에 대한 편견이 있더라도 각자의 성격대로 해석되기 때문에 그 객관적인 해석이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아빠가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 지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안다. 그럴 수 있어서였다. 처음으로 미국인을 부릴 기회를 얻은 아빠는 그 권력에 취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미국인 아르바이트생을 쓰면서 장사가 잘 되자 그의 면전에서 그를 물건 파는 기계 취급하며 못생겼다고 한국말로 그의 칭찬 아닌 칭찬을 늘어놓는 아빠의 모습이 어린 준 이에겐 못되게 보였지만 어른이 된 준이는 그때의 아빠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페들타운의 사람들을 이어준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놀랍도록 서로를 이해하는 수준이랄까?

12살 소년의 시선으로 보아지는 이야기는 객관적이고 따스하며 유머러스하다.

억지로 웃기려 작정을 한 것 보다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서로의 다름이 빛을 발한다고 할까?

페들러스 타운엔 정스런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거 같다.

서로의 사정을 보살피며, 가끔 서로의 민낯을 보게 되지만 기본적인 존중을 가지고 서로를 대했던 그때 그 사람들.

 

이제 허물어져서 흔적도 남지 않은 곳을 바라보며 어른이 된 준이와 수는 그곳에서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곳은 그들에게 또 다른 고향이었다.

처음 낯선 나라에 발을 디디고 자신들의 터전인 이곳에서 모든 걸 스스로 극복해가야 했던 고달픈 이민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관심과 이해와 존중과 삶을 선사했던 곳 페들러스 타운.

그때 그 어른들은 이제 그곳에 없지만 준이와 수의 마음속엔 살아있으리라 믿는다.

 

모처럼

고달프면서도 서럽고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훈훈하고 따스하게 버무린 이야기로 읽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속에 온기가 퍼지는 느낌이다.

수와 준이 잘 자라주었다는 느낌과 페들러스타운을 다시 찾는 그들의 발걸음에서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소리 없는 따스함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다.

지긋지긋했던 곳이라면 고향이라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을 것이 사람 마음이라.

그곳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발걸음을 한 어른이 된 두 아이의 추억이 그만큼 따스했으리라 믿는다.

 

 

균형 잡힌 이야기들에 마음이 끌린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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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듯 춤을 추듯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7
김재아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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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으로 태어나 보니 서른 살 남자다.

나를 만든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날 화형 당했다.

내 영원한 친구는 협박을 받고 있다.

내 친구 제이슨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내 몸을 기억하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 몸인 박서로는 자꾸만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에게 나란 존재를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내 직장에는 어느 여성이 16년째 갇혀 있다.

16년 동안 매일 죽음과 다투었고, 이제 탈출과 자살을 원한다.

자신과 별 차이 없는 존재이지만 자신과 다른 취급을 받는 내게 도움을 구하고 있다.

나는 해결 방법을 모른다.

 

 

제목처럼 꿈을 꾸듯 춤을 추듯 이야기를 읽었다.

 

 

138억 년의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지구의 역사를 되풀이 학습해온 로봇이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으로 태어났다.

뇌사한 인간의 몸에 이식된 칩으로 인간으로 깨어난 로움은 사륜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태어난 날 자신을 만들고 자신이 인간이 되기를 도와주었던 노아가 화형 당한 사실을 알게 된 사륜.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인간의 신체와 결합된 뇌를 가진 인공지능 인간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급진파들은 급기야 사륜을 만든 노아를 마녀사냥하듯 화형 시켜버린다.

사륜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죽음을 연구하는 연구실에 연구원으로 들어간 사륜은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인간 아닌 인간 엘리야를 만난다.

그녀 역시 죽은 인간의 몸에 뇌가 이식된 마루타였다.

온갖 질병을 감염시켜 그 치료법을 찾아내는 마루타로 사용되는 엘리야.

사륜의 존재를 알아챈 엘리야는 그에게 자신을 탈출시켜 달라 말한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인데 겨우 뇌의 일부가 기계일 뿐인데 네가 왜 기계로 취급받지? 인간들은 왜 당신을 기계라고 말하지? 당신은 아마도 인간과 똑같이 아파했을 테고, 인간과 똑같이 웃었을 테고, 인간과 똑같이 눈물 흘렸을 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인간에겐.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규정해. 그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니까."

 

 

 

 

 

이런 세상이 언젠가는 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토록 아프게 다가올 줄 몰랐다.

서정적인 문체가 기계인지 인간인지 단정할 수 없는 사륜과 엘리야를 너무도 인간답게 그려내기에 나도 모르게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을 반대하는 인간들을 미워하게 된다.

 

 

참 독특하고 아름답게 슬픈 이야기였다.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의 가난한 삶.

일자리는 빼앗겼지만 인간성마저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몸부림.

인간이고 싶었던 로봇이 인간이 되었을 때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아내야 하는 상황.

인간들의 질병 치료제를 찾기 위해 실험실의 동물들 처지가 된 인간 마루타.

이 복잡한 이야기를 차분하고 정감있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

꿈처럼, 춤처럼 흘러가는 이야기에 홀린 느낌이 든다.

 

 

 

 

 

 

 

 

 

 

 

"죽지 못 해 살아가죠, 이제 인간은."

 

 

수명이 130년으로 늘고, 과학의 발달로 공기의 질이 좋아지고, 인공 몸으로 대체하여 장애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일자리가 없다. 기계가 온갖 일자리를 다 차지했고, 그 기계가 내는 세금으로 인간은 연명하며 살아간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로 남을까?

 

 

 

인간은 감각이다. 감각하는 동물이다.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감각하는 동물이다. 생각하는 능력은 AI가 더 뛰어나니 인간의 특징은 감각이다. 생생한 감각을 가진 동물이다. 그러나 앞으로 감각마저 AI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사륜의 시선을 통해 이어지는 미래의 이야기는 다정하다.

신랄하지도, 무능하지도, 폭력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글 사이사이에서 느껴지는 자잘한 변화들이 사륜을 점점 인간으로 만들어 간다.

로움이었다가 박서로의 몸으로 사륜이 된 AI.

그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까?

노아가 남기고 간 '영원한 친구' 몽이를 어떻게 지켜낼까?

 

 

이 이야기가 아름답게 슬픈 이유는 마지막에 있다.

몽이를 지켜내기 위해 사륜이 내린 결정.

엘리야를 지키기 위해 사륜이 내린 결정.

 

 

인간과 AI의 차이가 뭘까?

이 이야기대로라면 어떤 차이도 알아 내기 힘들 거 같다.

몸의 절반이 기계화되더라도 살수만 있다면 행복할까?

직업없이 그저 나라의 보조금으로 산다면 행복할까?

모든 게 기계화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신인 작가의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 속의 딜레마를 내가 겪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는 나 자신을 본다.

저 멀리 외계에서 온 연락은 인간에게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주었다.

이 지구를 기계와 외계인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쩜 인간보다 더 오래 지구에서 살아낸 모든 생물체들에게 인간이 기계일 수 있다.

인간으로 인해서 지구에서 멸종된 생물체에게 인간이 외계인일 수 있다.

편의에 의해서 공존보다는 멸종을 선택한 인간의 의지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계들에 의해서 스스로의 멸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책은

나를 저 멀리 닿을 수 없는 세상으로 데려갔다가

겁이 나도록 또렷한 현실로 뚝 떨어뜨려 놓았다.

꿈을 꾸듯, 춤을 추듯. 그렇게...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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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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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그 이후 그녀들의 이야기는 달라진 게 있을까?

페미니즘.

우리가 늘 쓰고 있지만 정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지 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책엔 6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새벽의 방문자들 - 장류진

룰루와 랄라 ㅡ 하유지

베이비 그루피 ㅡ 정지향

예의 바른 악당 ㅡ 박민정

유미의 기분 ㅡ 김 현

누구세요? ㅡ 김현진

새벽마다 초인종을 누르는 낯선 남자들.

그 남자들의 사진을 찍어 벽에 붙여 놓고 간략한 인상과 점수를 매겨 넣는 여자.

그녀 혼자 사는 오피스텔은 예전에 누가 살았는지 모를 사람들의 흔적이 새벽에 초인종을 누른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 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새벽에 잠들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그녀의 밤은 늘 조마조마하다.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호기심이 관찰로 변했던 그 좁은 공간.

다른 동 같은 호수의 그녀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그녀는 알게 된다.

그리고 헤어졌던 그 남자도 새벽에 초인종을 울린다.

섹스를 돈으로 사는 남자들의 머그샷을 두고 그녀는 이사를 간다.

룰루가 손으로 가리킨 그곳엔 금연 푯말이 있었다.

무신경한 흡연자에게 향한 룰루의 가냘픈 손짓엔 말보다 더한 감정이 흐른다.

버스 정류장에서 두 여자는 친구가 되었다.

오며 가며 마주치던 시선이 하필 버스 정류장에서 이야기를 하게 됐을까?

떠나고, 돌아오는 곳. 버스 정류장.

어느 버스를 타게 될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알 수 없는 그곳.

마음의 고달픔을 털어내고 서로의 기억이 되어 주었던 그곳에 룰루와 함께 랄라를 기억하는 그녀가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P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섹스를 한 뒤 슬며시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한 번도 콘돔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사이 내 24인치 캐리어에는 임신테스트기가 늘어갔다.

 

 

베이비 그루피.

무책임한 남자. 가 아닌 어른.

초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내뱉은 그날에야 비로소 서로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어린 마음을 후려친 그 남자 어른들은 '내 친구들도 그렇게 해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그 일에 대해 일말의 양심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보라는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누가 예의 바른 악당일까?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기의 핵심을 알지 못하겠다. 진심으로.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는 인간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진지한 유미.

자신은 공정한 선생이라는 명제가 머릿속에 박힌 형석에게 사과란 왜?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문제다.

그가 위키디피아까지 들먹여 가며 내뱉은 사과에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학교에서 무분별하게 가해지는 성희롱과 언어폭력.

너무나 일반화되어서 그게 문제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선생들과 남학생들.

여학생들은 그저 그렇게 웃고 넘겨야만 할까?

유미처럼 웃지 않고 손을 들어 한마디를 하면 안 되는 걸까?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이 입담들 앞에서 유미의 기분이 온전히 느껴져서 형석의 웃고픈 사과까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이 마음이 비단 나뿐일까?

누구세요?

묻고 싶다.

익히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주변의 남자들에게 누구냐고.

나라고 알고 있던 나에게 묻고 싶다.

넌 정말 너로 살고 있냐고.

마지막 이야기 누구세요? 는

남자와 여자가 잠시 바뀌었을 뿐이다.

근데 왜 이리 자극적인 걸까?

왜 이리 통쾌한 걸까?

왜 이리 웃음이 나는 걸까?

그리고 왜 죄지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걸까?

6편의 이야기는 한숨을 쉬게 한다.

매 이야기마다 새로운 주인공을 만나게 되지만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현남 오빠에게.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는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도 이 짧은 단편들을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여기엔 우리가 일상에서 스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심코. 늘 그래왔듯이. 언제나처럼. 무분별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그게 왜? 어때서? 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누군가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후벼 판 일이기도 하다는걸.

누군가에게 마구잡이로 상처를 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걸.

배워가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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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칸트인가 - 인류 정신사를 완전히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서가명강 시리즈 5
김상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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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식의 발생 조건을 주체의 내면에서 찾았고, 마음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수립하여 근대 과학에 부합하는 인식론을 구축했다.

칸트가 제시한 모델은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설정하는 인지 모델과 매우 흡사하여 놀라움을 준다.

 

 

 

이번 서가명강 5번째 주제는 칸트이다.

서울대 김상환 교수의 강의노트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서울대 강의를 눈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칸트.

독일 철학자.

순수이성비판.

이것이 내가 칸트라는 이름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 책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서 겁먹은 건 사실이다.

무슨 뜻인지 다시 새기느라 앞 페이지로 되돌아간 적도 많다.

솔직히 이 책을 읽었다고 칸트의 사상을 잘 알게 됐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워낙 철학에는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딱지를 붙여 놓고 있지만, 사실 산다는 것 자체에서 철학을 빼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다.

 


대상 중심의 인식론 -> 주체 중심의 인식론

(대상이 주체 안의 선점적 원리에 의해 발생한다는 관점)

 

선 중심의 윤리학 -> 법 중심의 윤리학

(도덕 법칙을 기준으로 선을 정의하는 관점)

 

양심의 힘 = 자유


 

 

왜 칸트인가의 앞부분을 나를 위해 정리해 보았다.

뒷부분은 요약이 쉽지 않다. 그 부분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인 거 같다.

철학을 머리로만 논한다면 그것은 그저 탁상공론일 뿐이다.

철학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칸트는 그런 시선을 가진 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한 번 더 이해한 칸트의 사상이 미래를 예견한 건 어쩜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매번 쉬운 이야기만 읽다가 어려운 철학서를 읽은 기분은 험난한 산을 오르는 기분이랄까.

왜 칸트인가를 읽은 내 느낌은

어려웠으나 어렴풋하게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칸트는 근대화된 사회에서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들을 정확하게 정식화했고, 그렇게 정식화된 물음들에 일종의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철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칸트에 대해서는 한 번쯤 읽고 가야 할 거 같다.

그의 생각들이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에 걸쳐 응용되는 건 그만큼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가치를 지닌 것은 겉만 훑더라도 외면치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해당 도서는 서가명강 프로 서포터스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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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라
L.S. 힐턴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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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냉정을 되찾고, 신속하게 움직이게 해주며 당신을 외롭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먼저 고독해 봐야 한다.




앞과 뒤표지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 라는 붉은 딱지가 붙어 있다.

그래서 그 자체로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이야기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도 잔뜩 들어있다.

알지 못했던 세계. 의 이야기. 마에스트라.

평범하게 열심히 언젠간 꿈을 이루리라 희망하며 살아온 주디스는 미술품 경매 회사에 비서로 취직한다.

갖은 잡일을 도맡아 하면서 언젠가는 자신이 상사의 자리에 앉게 되는 꿈을 꾸는 주디스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 해서웨이를 연상시킨다.

주디스는 온갖 잡일에 치이면서도 자신의 안목을 높이려 노력한다.

그림을 보는 안목.

그 그림을 사려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거래하려는 그림이 위작임을 알아챈 주디스는 상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만 오히려 그 일로 해고를 당한다.

부당한 해고였다.

하지만 그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 바닥은 그야말로 손바닥보다 좁았으니까.

내쳐진 안목 있는 여자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보여 주는 이야기다.

물론 야망이 있는 여자의 이야기다.

돈과 섹스와 사기와 살인.

주디스의 무한 변신은 정말이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의 목숨처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그렇게 교묘하고도 완전하게 잡히지 않을 권리가 그녀에게 주어졌을까?


휴~

책을 덮고 나면 저절로 나오는 한숨이다.

안도의 한숨이기도 하고,

부당함에 대한 한숨이기도 하고,

너무 동떨어진 세계를 다녀와서 현실에 안착할 때 나는 한숨이기도 하다.

런던, 파리, 이탈리아를 넘나들며 한바탕 벌이는 사기와 살인과 섹스의 향락은 정신을 쏙~ 빼놓을 줄 안다.

섹스는 올리브의 짭짤한 맛이나 먼지 날리는 길을 한참 걸은 후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오래되고 원초적이면서 단순 명료한 쾌락이 될 수도 있다. 왜 <노>라고 해야 하나? 일부일처제는 못생긴 여자에게나 유리한 제도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 19금 딱지가 붙은 건 단지 에로틱한 상황의 묘사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한 살인의 행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인사이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그것을 쟁취하는 여자의 이야기. 가 뭘 그리 새롭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했던 한 여자가 부당함을 외치지 못하고 살아내기 위해 분노를 가슴에 묻고 살길을 도모하고 있을 때 우연하게 벌어진 하나의 죽음이 그녀의 억세게 좋은 운대와 맞아떨어지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면 그녀의 성공 자체가 바로 그 죽음 위에 세워진 반석이 아닐런지.

그 말은 곧 이 기묘한 신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라면 그 무엇도 놓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그 세상의 연결 부위 어디에 내가 발을 디딜 곳이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비로소 티핑 포인트가 찾아온 것이다. 게임의 전세를 바꿀 기회 말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이 여행의 승객이었다면 앞으로는 이들의 게임에 정당하게 참가한 일원이 될지도 몰랐다.


가진 자들의 빈틈을 노리는 이 영리함으로 주디스는 자신만의 부를 축적해 나아간다.

그리고 자신을 엿 먹인 작자들에게 멋진 복수도 감행한다.

그렇게 감쪽같이 자신을 세탁하던 그녀에게 한 남자가 따라붙는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접근한 남자.

그 남자는 주디스를 이용해 자신의 복수를 하려 하지만 주디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이용당할 여자가 아니었다.

모든 남자들이 간과하는 한 가지.

한 여자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려고 작정한 여자가 어디까지 갈 준비를 끝냈는지를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그 자만심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완벽해질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계기였다.


나는 더 힘든 일들도 극복해 왔다. 지금까지 버틴 내 삶이 그 증거다. 그리고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정말로 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운을 걸어 볼 만했다. 언젠가는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킬링타임용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해석에 따라서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고, 완전범죄가 될 수도 있으며, 세상이 더욱 무서워질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더욱 부실해질 수도 있다.

여러 복합적인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마에스트라.

주인공에 동화되어가다가도 벌을 내리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

안도하고 통쾌하다가도 제 발 저리는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이 성공으로 보이지 않는 이야기다.


어른들의 킬링타임 독서용 이야기.

마에스트라.

자근자근한 스릴과 함께 에로틱한 휴가를 보내고 싶다면 넌즈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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