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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그 애가 내게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30년 동안 계속되어 나는 그 미소 한 귀퉁이에 매달려서 수많은 심연을 건너왔다.
마치 숨겨져있던 오래된 고전소설을 읽은 기분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 아주 먼 시대의 이야기.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가 배경으로 흐르고 있다.
주인공 미모의 목소리로, 그를 지켜보았던 또 다른 시선의 목소리로.
수도원 지하에 숨겨진 조각상과 함께 스스로를 유폐한 한 남자의 죽음 앞에서의 회상은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함께 묶어 두었다.
왜소증으로 태어난 미모.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그저 여자로 태어난 비올라 오르시니.
조각가의 재능을 타고난 미모와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인 비올라.
두 비범한 영혼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피에트라달바에서 '우주적 쌍둥이'로 만난다.
1910대~1940년대 그 사이에 존재했던 두 영혼의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시대상과 맞물려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간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내 머리엔 "아름답다"라는 말만 새겨졌다...
비올라는 후작의 외동딸이지만 단지 그저 여자였을 뿐이었고
미모는 왜소증을 가진 난쟁이였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오르시니 가문의 비호 아래 부를 쌓아가고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를 알아보고 그를 공부시키고 단련시켰던 비올라와 미모의 인생은 세월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미친 영향력이 역전되기도 하고, 비등해지기도 하고, 균등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넘나든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비올라.
신념도 굳건했던 비올라.
자신의 오빠들보다 더 역량 있었던 비올라는 그저 가문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이 안타까운 영혼에 빙의된 수많은 여성들의 비애를 느끼자니 이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깊게 새겨진다.


사실과 허구가 교묘하게 교차된 이야기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묘한 긴장감이 이 이야기의 매력이다.
이탈리아 어느 곳을 가면 미모 비탈리아니의 조각을 볼 수 있을 거 같고, 비올라와 함께 누웠던 톰 마소의 무덤이 존재할 거 같다.
구구절절하지 않아서 구구절절하게 느껴지고, 신파가 아니라서 더 가슴 조이게 만든다.
두 번의 전쟁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그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가치관, 사상, 생각, 민중의 마음.
그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려는 세력들의 물밑 작업들이 세밀하게 독자에게 전해진다.
미모의 손에서 태어난 피에타.
세상에 잠시 나왔다 사라진 미모의 피에타.
우리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하는 겁니다.
사제는 그녀를 거기에 가둬 둔 자들은 스스로를, 그들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마치 멸망처럼 찾아온 그 재앙이 모든 걸 사라지게 했고, 사라졌던 재능을 다시 되살렸다.
신의 계시처럼...
진중한 이야기로 표현되는 격렬하지만 격렬하지 않고, 잠잠해 보이지만 잠잠하지 않은 사랑이자 우정인 우주적 쌍둥이의 이야기.
곧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놓지 못하는 미모의 애잔함.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 곁에 머물렀던 한 남자의 순애보.
그 마음을 아는지라 떠나지 못하고 그의 피조물에 안착한 날고 싶었던 귀한 영혼.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믿었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냈다는 죄.
작가의 시대에 대한 통찰력으로 인해 미모와 비올라가 살았던 그 시대의 혼란함이 그 어떤 역사책 보다 진실되게 보였고
자신들의 세상에서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 했던 두 사람의 삶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에 허무함도 느꼈다.
그 어떤 전쟁도 자연을 이기지 못하지...
얼마나 많은 인생이
얼마나 많은 권력과 정치와 이익 앞에서 허물어졌을까.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나는 당신들 만큼 귀하다."
비올라의 외침이 바람이 되어 귓전을 때린다.
그렇게 울부짖었던 마음이 깎여갔던 시간 동안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재가 되었을까..
미모의 시점에서 보는 비올라에 대한 모든 것이 저 문장으로 대체되는 시점이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이 아닐까.
또 한 번 내 마음에 숙제를 내준 이야기다.
시대에 편승해서 살 것이냐
내 생각대로 살 것이냐.
답은 비올라의 외침에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