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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네 번째, 전쟁 속으로 ㅣ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E. M. 델라필드 지음, 박아람 옮김 / 이터널북스 / 2025년 6월
평점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생각하면 일상의 사건을 기록한 일기가 후대에게 굉장한 역사적 가치를 갖지 않겠냐고 남편 로버트에게 물어본다. 그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네 번째 전쟁 속으로>
제목처럼 영국이 독일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때의 일기다.
집집마다 방독면이 지급되고 등화관제가 실시된다.
바야흐로 가짜 전쟁의 시기다.
주인공의 집에도 방독면이 도착하고 가장인 로버트는 집안사람들 얼굴 크기에 맞게 방독면을 세팅해둔다.
집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잘 채비가 되었는지 살펴보는 치밀함(?)도 보여주는 로버트다.
전쟁이 나면 피난을 가는 건 옛말인데 나는 보따리 보따리 싸서 한없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는 피난민의 모습을 기억했다.
영국은 시골의 각 가정에 도시의 피난민을 묶을 수 있게 했나 보다.
나라에서 연결해 주는 대로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론 이기적인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집을 내어놓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도시로 가서 전시에 보탬이 되고자 정보부 자리에 지원을 한다.

계속해서 그녀는 어차피 자기는 무얼 하든 상관없다고 한다. 여기든 저기든 어디든 일손을 보태고 그러면서도 모두를 즐겁게 해주면 그만이죠.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늘 베풀기만 하면 몸이 상한다고 걱정하지만 그때마다 난 이렇게 말한답니다. 그럼 좀 어때? 누가 신경이나 쓰나?
지원자는 많으나 할 일이 없는 상황.
주인공은 도시로 왔지만 아직 맡은 일이 없다.
이 일기를 읽고 있으면 긴박한데 터무니없이 한가로워 보이는 전쟁의 또 다른 면들이 보인다.
도망가기 바쁜 사람들 보다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 넘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피난처를 찾아 시골로 달려가는 도시인들과 반대로 전쟁 속에서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늘 긴장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일상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웃음을 잃지 않는 이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위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가짜 전쟁은 영국이 전쟁 선포를 하고 본격적인 런던 공습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기다.
이 이야기는 그 시기의 런던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직 2차대전의 참상이 벌어지기 전의 시간대라 전쟁을 대비하면서도 어딘지 전쟁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들이 엿보인다.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전쟁 전의 소란스러움과 긴장감 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변화들이 담겨있다.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자원봉사 자리라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쓰럽다.
곧 있으면 전쟁 속에서 허우적댈 텐데...
전쟁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그 참혹함이 아니라 후방에서 전쟁을 대비하는 전쟁 전의 모습들.. 그 모습들이 더 마음을 아리게 한다.
곧 닥칠 전쟁의 포화를 모르는 이들의 천진함이 이미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순진한 우리 주인공이 무슨 일이라도 얻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이 보통의 일상을 흩트려 놓는 전쟁의 무서움 앞에서 위트 있게 표현되고 있었다.
글 쓰는 일을 맡아 달라는 통지를 받고 어느 때보다도 놀란다. 심지어 외국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전쟁이,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적인 의미의 전쟁이 마침내 시작되는 걸까 자문해 본다.
우리의 주인공이 해외 파견이라도 되는 걸까?
궁금증만 남긴 채 일기는 끝난다.
이후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진짜 전쟁 속의 이야기가 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