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 - 문학×커피 더 깊고 진한 일상의 맛
권영민 지음 / &(앤드)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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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효능이 알려지고 커피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즐길 수 있게 되자, 커피는 이슬람의 강력한 종교적 보호를 받았다. 아라비아 지역에만 한정해서 커피가 재배되고, 다른 지역으로 커피의 종자가 나가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되었다.

 

 

커피의 원산지 에디오피아 케파.

이곳 염소지기는 염소들이 키 작은 상록수에 열려 있는 빨간 열매를 먹고 흥분하는 걸 보고 직접 따 먹어 본다.

이 열매를 먹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걸 느낀 염소지기는 이슬람 사원의 수도승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커피는 수도생활에 도움을 주는 신비한 열매로 알려지며 수도원을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유럽에 커피가 처음 알려진 건 십자군 전쟁 때다.

그 이후로 유럽으로 커피는 퍼져 나갔고 아라비아 상인들은 모카 지역을 커피 수출항으로 한정하고 커피의 반출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러나 규제한다고 규제가 되는 것이 어디 있던가!

 

그럼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커피를 알게 됐을까?

저자가 찾아 본 기록에는 1895년 간행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있다.

거기에 처음으로 '가비'라는 말로 소개만 되고 맛, 향에 대한 내용은 없고 서양음식편에 우리나라의 숭늉과 냉수처럼 마신다는 뜻으로 써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알려진 커피 마니아는 바로 고종황제다.

사약 같은 비주얼의 커피에 살짝 뭘 넣어도 모르겠기에 독살 당할 뻔한 일화는 매번 들어도 끔찍하다.

 

커피 한잔이라는 펄 시스터즈의 노래로 커피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하는 권영민 작가는 <커피 칸타타>를 조수미 버전으로 듣기로 권한다.

커피는 맛도 맛이지만 그 분위기와 결합되었을 때 얻는 시너지를 무시할 수 없다.

장소와 음악과 마주 앉은 사람이 주는 느낌이 오롯이 커피 한잔에 담긴다.






우리의 현대문학 속에 담긴 커피와 커피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밤 풍경이 매혹적인 버클리대학의 카페 스트라다에서 밤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

저자는 대학로의 <학림 다방>을 언급하셨지만 대학로에서 쭉~ 자라난 나는 <상파울로>라는 카페가 기억에 남는다.

90년대 그곳은 그 당시에도 지금도 찾아보기 힘든 분위기의 카페였다.

갖가지 종류의 커피가 메뉴판을 가득 채웠고, 친구들과 나는 갈 때마다 다른 커피 맛을 보는 재미를 누렸다.

지금도 그곳의 분위기가 그립다. 가끔 그곳에 들어서면 그윽하게 나를 홀리던 커피향과 함께 자욱한 담배연기의 맛이 어우러지던 그 향이 코끝에 맴돌 때가 있다. 넓은 평수의 카페여서 수많은 사람들로 웅성웅성거리며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잔상으로 남아있다.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이든 다 좋다.

이 커피 한잔에 담긴 이야기들이 더 좋은 이유를 찾자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들에 대한 얘기라서 더 좋다.

30~40년대의 커피 문화는 문학 속에서 70년대의 커피 문화는 본인의 경험에서 엿들을 수 있다.

 

커피 한잔을 읽으면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내가 모르던 시대의 낭만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마시는 나는

이 책에서 다양한 커피향을 맡았다.

진한 이탈리아 에스프레소를 마셔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하와이에서 코나 커피의 마지막 단맛을 느껴보고 싶고.

브라질에서 카페지뉴의 진짜 맛을 느껴보고 싶다.

그렇지만 루왁 커피는 사양하겠다!

 

예전엔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셨고

모카 포트로 뽑은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마셨고

그러다가 반자동 머신으로 뽑아 마셨고

그러다 캡슐커피를 마시게 됐다.

 

점점 기계화되어 버린 나의 커피.

이번에 바꾼 커피 기계가 수명을 다하게 되면 손수 내리는 커피로 바꿀까 한다.

커피 내리는 과정까지도 즐길 줄 아는 것도 커피에 대한 예의니까.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커피에 대한 추억 여행이었다.

다른 사람의 추억을 빌어다 내 추억을 쌓았다.

알지 못했던 지식과 함께 아련한 향수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커피 한 잔과 함께 커피 한잔을 읽어 보는 시간을 누려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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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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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빛나는 옷을 걸쳤어도, 높은 곳에 앉았어도 인간은 혼자만의 밤에는 모두 상처 입은 존재인 것이다.

 

 

미술학도의 꿈을 안고서 사제가 된 사람.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대학에서 그리스도교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저자 장동훈.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조금 가볍게 읽었는데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미술을 평하는 글도 가볍게 읽을 글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글은 더더욱 아니다.

 

그림에 담긴 시대적 역사와 종교적 관점과 함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감상이 함께 공존한다.

많이 봤던 그림도 있고, 생소한 그림들도 있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반드시 진실과 부합하진 않는다. 현실의 요구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타협할 수 없는 신념, 닿을 수 없는 이상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의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화가다.

프리다에 심취해서 리베라가 어떤 화가였는지 보다는 프리다에게 상처를 준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다시 들여다본다.

 

현실을 그린 리베라의 그림은 민족 해방을 모토로 삶은 오브레곤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프리다를 떠올렸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다는 느낌이 든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겐 프리다의 강렬함에 압도되어 디에고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정교하다.

질서정연한 느낌 아래 복잡하고 거칠고 힘겨운 삶들이 담겼다.

언뜻 정돈된 그림인데 그 안에는 온갖 혼잡함이 넘쳐난다.

리베라는 현실을 살짝 넘어선 미래를 그렸다.


 

오윤은 요절했고 민중미술은 '15년'안에 갇혀버렸다. 무릇 미술은 현실의 총체적 반영으로 현실 변혁의 동반자여야 한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된 이들의 현실과의 대화는 이렇게 영영 끝나버린 것일까. 그러나 교회가 시작한 세상과의 대화는 애초에 끝마쳐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던가.

 

 

 

 

 

우리의 미술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나는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오윤이라는 작가의 작품과 그의 일갈도.

암담한 시대를 표현한 그림들은 그 시대에는 시대를 반영해서 빛을 보지 못했고

이후에는 시대와 맞지 않아서 빛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남의 나라 미술은 무엇이든 가져다 포장과 가꿈을 통해 빛을 내게 만들면서

우리의 미술은 어째서 포장도 가꿈도 하지 못하고 있는지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그분들에게 빛을 비춰주었으면 좋겠다.

 

미술학도를 꿈꾸던 사람의 시선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의 시선으로

종교인의 시선으로

그리고 작가적 시선으로 기존의 미술 관련 에세이들과는 결이 다른 글들을 마주했다.

 

그림은

화가나 그림을 평가하는 사람이나 그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는 평론가의 말보다

직접 그림을 마주하고 느끼는 사람의 온전함이 바로 그 그림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사람이 그 앞에 서서 느끼느냐에 따라 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네 가지 색으로 읽히는 끝낼 수 없는 대화...

정말 제목처럼 이 이야기들은 끝낼 수 없는 대화다...

언제고, 어디서 건 계속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가 되어야 하니까.

 

세상도 교회도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 앞에 서 있다.

팬데믹 선언 직후 곳곳에서 피어나던 인문학적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전염병의 '종식'과 '박멸'만이 모든 담론을 집어삼킨 듯하다. '어떻게'라는 방법이 '어떤 세상'이라는 철학을 압도한 모양새다.

 

한 사람의 성찰이 여러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장동훈 작가님의 말들이 점점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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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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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것이 휴대폰 밖의 우연과 방해, 뜻밖의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계론적 세계관이 없애려 하는 '비작동 시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휴대폰 없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휴대폰은 하나의 작지만 큰 세상이자 나를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고,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현실의 초라한 나조차도 휴대폰 안에 있는 온라인 세상에서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며 좀 더 편한 업무 환경 속에서 빠른 일처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를 주는 거 같으면서도 사람을 더 옥죄고 있다.

문명의 발달은 사람들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으니까.

 

24시간 영업.

메신저와 메일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은 직장의 연장선이 되고

일을 꼭 회사에서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운 출근 규정은 오히려 쉬는 시간을 없애 버리고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왠지 디지털 조삼모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업 문화와 광활한 산맥 사이에 사는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실제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디지털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빨라지고 바빠지는 세상

e-편리한 세상은 e- 살벌한 세상이 되었다.

잠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세상이니까.

잠들기 전 잠시만 보자고 한 유튜브는 보다 보면 날 새는 광경을 같이 보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

 

랑님과 연해할 때 스마트폰이 생긴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둘 다 2G폰을 쓰고 있었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보면 그가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있거나 내가 오는 방향을 목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가 어느 날 다른 모습을 보았다.

그날은 그가 전화기를 바꿨다고 했다. 스마트폰으로.

약속 장소로 가던 나는 맞은편에서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오는 랑님을 보았다.

기쁜 마음으로 손 흔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손에 든 무언가를 보며 길을 걷고 있었다. 바야흐로 디지털 유목민이 된 인간을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유목민은 집에서도 유목민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나 역시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로는 그 자그마한 사각형 세상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내 손에서 스마트폰이 사라지는 적은 거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목만 보고도 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현타가 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 때문에...

 

생산성을 거부하고 멈춰 서서 귀 기울인다는 의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인종적. 환경적. 경제적 불평등을 찾아내고 실질적 변화를 불러오는 적극적 듣기를 수반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재교육 장치로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감각들을 되찾게 된다.

그것들은 비대면의 세상인 온라인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할 때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상대방의 몸짓이나 말투, 행동, 눈빛, 표정 등 말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신호들이 함께 한다.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해 느끼면서 상대를 파악하게 된다. 온라인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쉬지 못하는 인간은 바쁘게 살면서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단순히 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쉼을 통해 잊고 있었던 감각들을 일깨우고, 무관심했던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소홀했던 문제들에 시선을 두라는 의미다.

 

한때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에 코 박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을 쳐다보지 않고 스마트폰의 사각형만을 바라보며 살아서 다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저 사각형 밖에는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도 없고, 알 생각도 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다운 법을 잊고 산 거 같다.

인간은 기계 속에 묻혀서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었다.

움직이고, 생각하고, 인지하고, 느끼며 사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생산적이냐 아니냐로 판단하고, 남보다 더 빨리,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성장해야 한다는 부담을 목표로 살고 있다.

 

이제 디지털 옷을 잠시 벗고

나 자신과 내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기계 속에 묻혀서 기계의 무덤 속 하나의 부품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생각해 내자.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당신의 결핍이, 공허가, 있는 줄도 몰랐던 감각이 채워질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땐 '밤'이 되면 모두가 집에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집에 없고, 집에 있어도 다른 세상을 산다.

내가 어렸을 때의 그 '밤'들이 그리워졌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시절의 '쉼'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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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피싱
나오미 크리처 지음, 신해경 옮김 / 허블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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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넷 친구들이 진짜 내 친구들이다. 나와 가까운 친구들. 정말로 나를 아는 사람들. 내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 써주는 사람들. 내가 내 얘기를 하는 사람들 말이다.

 

 

매번 자그마한 문제로도 이사를 해버리는 엄마와 함께 사는 스테프.

폭력적이고 방화까지 저지른 아버지를 피해서 도망치는 삶을 산다.

프로그래머인 엄마는 언제나 안전에 집착하지만 엄마는 늘 불안정하다.

그래서 스테프에겐 친구가 없다.

 

 

캣넷의 채팅방에 있는 친구들이 스테프라 가진 전부다.

자기 사진을 올린 친구도 있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온라인 세상.

그러나 이곳에서만큼은 스테프도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다.

아빠를 피해 도망다는 신세이고, 언제 이사를 갈지 모르고, 이름도 밝힐 수 없고, 어디 사는지도 알려줄 수 없고, 이제껏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았지만 동물 사진은 취미로 찍는 스테프.

 

 

사춘기 소녀의 불안한 마음은 현실에서조차 뿌리 없는 상황으로 인해 더 흔들린다.

스테프에게 아빠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리고 엄마는 다 얘기해 주지 않는다.

뭔가 숨기고 있는 엄마를 언제까지 이해해야 할까?

 

 

영어덜트 소설이라지만 이 이야기에는 모두 드러내지 않은 숨은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이상하게 오싹오싹한 느낌이 든다.

뭔가 새로운 영역에 살짝 발만 담그고 어정쩡하게 끝내버린 느낌이다.

그리고 새롭고 거대한 영역으로 가는 문을 살짝 열어 놓아서 곧 그곳에서부터 들이닥칠 이야기들을 소화해 내기 위해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을 갖고 있는 거 같다.

마지막 페이지 때문에 상상의 끈을 끊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끝이 났는데 당최 이것이 끝이 아닌 거 같은 느낌.

그래서 앞으로 더 나올 이야기가 있을 거 같고 그것은 왠지 더 어둡고 더 오싹할 거 같은 느낌.

이 서막에 불과한 이야기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기대되지만 알고 싶지는 않은 느낌.

이런 느낌들 때문에 읽고 나서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터미네이터 이후로 우리의 미래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 오래다.

어쩜 AI는 인류 이후의 세대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인간이 AI를 통제할 수 있지만 의식이 가미된 AI가 인간을 통제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테프의 엄마가 감추려고 했던 그 기술이 AI와 연결된 것이 못내 찜찜하다.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뇌가 멈추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컴퓨터는 아니야. 수많은 컴퓨터라고 할 수는 있겠지. 나는 육체가 아니라 과학기술에 깃들어 사는 의식이야."

 

스테프 어머니의 열쇠와 인터넷만 있으면 나는 존재하는 모든 문을 열 수 있지. 애넷이 절대 찾지 못할 곳에. 그 시스템의 운영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복사해 옮겨 갈 수 있어.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으로.

 

 

의식이 있고 인격이 있는 AI는 어떤 사이코패스 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AI는 마법의 열쇠를 얻었고, 어딘가에 자신을 숨긴 채로 세상과 연결되었다.

친구들은 친절하게 자신들의 핸드폰과 AI가 연결되게 해두었다.

그래서 AI는 그들과 함께 다니며 세상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부디 AI가 좋은 생각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생각 없이 읽으면 그냥 잠깐 긴장했다 해방되는 이야기일 텐데

조금 생각을 하니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캣피싱은 내겐 호러소설에 속한다.

 

 

과연 속편이 나올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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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살인 2 - 내 안의 살인 파트너
카르스텐 두세 지음, 전은경 옮김 / 세계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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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서의 구조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와 같다. 성인의 정서 인형 내부에서 뭔가 덜거덕거린다면 그 안에는 상처 입은 어린아이의 정서 인형이 들어 있다.

 

 

1편에서 자신의 의뢰인인 조직 보스 드라간을 명상 살인으로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그 자리를 드라간의 손가락 지문 하나로 차지했던 비요른은 마지막 장면에서 드라간의 최대 적수인 보리스를 자기 차의 트렁크에 태우면서 끝냈다.

그래서 명상 살인 2에서의 비요른을 상당히 기대하면서 기다렸다.

 

5살 아이.

내면아이로 불리는 비요른의 살인 파트너는 어린 시절 상처받은 또 다른 자아였다.

 

비요른과 사샤는 유치원을 인수해서 한 건물에 같이 살면서 사샤는 유치원 원장으로 비요른은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내어 서로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보리스는 그 유치원 지하실의 숨겨진 공간에 감금되어 있다.

사샤와 비요른은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길 원했고, 두 사람은 두 조직을 손아귀에 쥐고 조직의 보스들을 안전하게 숨겨놓고 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양대 조직을 관리하는 중이다.

 

이제 더 이상 폭력과 살인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비요른.

하지만 비요른은 충동적인 화를 자제하지 못하고 휴가길에 알프스에서 자신의 신경을 거스른 산장 종업원에게 복수를 한다.

사소한 가르침을 주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고 비요른은 또다시 요쉬카 브라이트너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다.

브라이트너는 비요른 안에 숨어 있는 내면아이를 들여다보게 하고 그 내면아이와 공생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릴 때 부모에게 학대를 받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너무 엄격한 통제를 당한 아이들이 입은 내상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상처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아이다. 유년 시절의 모든 상처를 지닌 내면아이는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덜거덕거림을 멈추려면 내면아이를 치유해야 한다.

 

 

명상 살인이라는 제목을 가진 특이한 스릴러로 독자들에게 각인되었던 명상 살인.

전편에서 박진감 넘치고 재기 넘쳤던 비요른이 있었다면 2편에서는 내면아이와 공존하기 위해 애쓰는 비요른이 있다.

그러나 반년간 조용히 감춰두었던 보리스는 누군가가 빼내어 감쪽같이 사라진다.

사라진 보리스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비요른과 사샤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로 인해 전혀 상관없을 거 같았던 사람들이 엮이면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는 무는 격으로 이어진다.

하나를 해결하면 그 해결한 것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고, 그 문제마다 내면아이와 비요른이 원하는 바는 다르다.

그것을 조율해가는 과정에 브라이트너의 가르침이 있다.

 

스릴러를 가장한 심리학!

 

어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해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 명상 살인 2.

그래서 전편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이야기 곳곳에 빈정거리는 위트와 시니컬한 비요른의 모습과 세상을 위한다며 온갖 규제를 요구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 앞에서 얄팍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를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는 명상 살인 2.

 

당신의 신조는 부모님이 작성한 것이다. 당신이 아직 글씨를 쓰지도 못할 때 일이다. 이제 자랐으니 직접 쓸 수 있다. 당신에게 맞지 않는 신조는 다시 써라.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위의 글이다.

그래서 이 비요른이라는 변호사는 변호사답게 간악하다.

처음엔 호감을 가졌었던 주인공에게서 간악함을 발견하는 느낌이 썩 좋지 않다.

주인공에겐 무한 신뢰가 있어야 하는 데 비요른에게는 신뢰를 줄 수 없다.

이유는 조직범죄를 변호하는 변호사답게 자신의 욕망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잘 다듬기 때문이다.

내면아이로 자신을 포장한 비요른은 자신이 저지르는 모든 일들과 계획을 어릴 때 상처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법망을 빠져나가고,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살인을 자행한다.

이토록 교묘한 살인자를 봤나!

 

살면서 처음으로 어떤 어른이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보호하려고 앞에 버티고 섰다. 이 얼마나 엄청난 경험인가. 이 행동을 통해 내 내면아이의 상처가 얼마나 많이 치유됐는지 나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 글이 명상 살인 2를 세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다.

보호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내면아이의 상처가 아무는 상황.

명상 살인 2를 읽으면서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마라."던 어른들 말씀이 생각난다.

무신경한 어른들의 행동과 말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명상 살인 2

 

3편이 남아 있는데

명상 살인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탄생시킨 작가가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진정 궁금하다.

 

명상 살인 3부작은 스릴러 소설이 아니다.

스릴러를 빙자한 심리학 수업이다.

1편에서 스피디하게 독자의 혼을 빼면서 흥미를 유발시켰다면, 2편에서는 심오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3편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진정시키며 마무리할지 카르스텐 두세의 마지막 수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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