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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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살이었고 더 이상 코트를 벗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나를 몰아간다.

야스는 그날 맛히스 오빠의 죽음을 알게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온다던 오빠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부모에게 자식은 자랑이자 기쁨이다.

사랑스럽고 운동에 재능이 있는 맏이라면 부모에게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하기 힘들다.

엄마는 음식을 먹지 않고 말라가고,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그 사이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자신들의 상실감을 알지 못한 채로 자란다.

 

데뷔작으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자전적 소설인 만큼 그녀의 상실감이 어땠을지 글 속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야스와 하나 그리고 오버.

세 아이들은 불안의 경계에 서서 상실의 바다를 허우적거린다.

 

오빠에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떠나는 게 올바른 방법이냐고 묻고 싶었다.

 

 

책을 받고 바로 읽어지는 책들이 있는 반면 이 책처럼 선뜻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미적이는 책이 있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내내 뇌리 속에서 여러 갈래로 달음박질을 쳤다.

생경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야스의 감정 표현은 그래서 더 마음을 쑤신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른다. 내 마음은 내 코트, 피부, 갈비뼈 안 심장 속에 깊이 숨어 있다.

 

 

슬픔에 빠진 부모는 자신들의 슬픔을 보느라 남은 아이들의 슬픔을 보지 못했다.

방치된 아이는 자신만의 위안을 찾게 된다.

한 겨울의 코트 안에 야스는 자신의 슬픔을 감췄다.

그것이 야스의 방어기재라는 걸 알아보는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다.

오직 동생 하나만이 그 이유를 알았을 뿐이다.

 

열 살.

열 살 아이가 어때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야스는 열 살이기도 했고 그보다 3배는 더 어른이기도 했으니까.

 

슬픔은 자라지 않아. 슬픔이 차지하는 공간만 넓어져.

 

 

성적 충동과 폭력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이 돌보아지지 않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무게는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그건 아마도 야스의 표현들이 평범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여기서 무너지고 있는 사람이 보여? 무너지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어.

 

 

낯선 고장에서의 낯선 슬픔이 낯선 표현으로 상실을 말한다.

그것조차도 낯설어서 미칠 지경이다.

내가 알던 죽음과 그것을 대하는 마음이 이 이야기에는 없다.

그래서 더 슬프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왜 그래야 했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다독여 본다.

이 무섭도록 끔찍한 상실감은 그렇게 묻어 버린 거라고...

 

마리커는 야스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묻어 버렸다.

그랬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감정들을 나조차도 끝내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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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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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히피 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앤과 조지.

그들은 1968년 버나드대에서 룸메이트로 만났다.

부유한 백인 가정의 외동딸로 자란 앤과 구석진 곳에서 탈출하다시피 대학에 온 조지.

그들은 앤이 정한 룸메이트의 규칙에 의해 한 방을 쓰게 된다.

 

그는 자신이 암적인(가끔은 문둥이 같다고 했다) 백인종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고 끔찍하게 여겼다.

 

 

딜레마의 인생을 살았던 앤

 

부유한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걸 수치스러워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던 앤은 오히려 그들에게 배척당한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앤은 환영받지 못한다. 같지만 다른 이유로.

나는 앤이 왜 그런 삶을 선택해가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건 조지의 관점에서 이야기되고 있으니까.

조지는 앤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언제나 두서너 걸음 뒤에서 관찰했다.

그러니 앤에 대해 모든 걸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거 같다.

 





아무도 내게 친구가 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그와의 우정이 필요치 않았다. 그곳에서는 아니었다.

 

 

변두리 마을, 결핍된 가정에서 자란 조지.

대학이라는 탈출구로 빠져나온 뒤 자신을 대학에 발붙이게 한 스승에게조차 연락 한 번도 안한 조지.

앤과 방은 같이 쓰게 되지만 혼자만 아는 자격지심으로 앤에게 거리를 두는 조지.

어쩜 조지는 앤의 모든 행동들을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지에게 앤의 결정과 행동은 모두 가진 자의 특권쯤 되었을 테니까. 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혼자만 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느끼는 감정 한 움큼.

세상으로 가출한 솔랜지만큼의 용기가 없음을 한탄하는 감정 한 움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대책 없는 책임감 한 움큼.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 해야 엄마처럼 살지 않을지를 모르는 마음 한 움큼.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 앞에서 한 선택들은 그녀에게 어떤 자유도 주지 않았다.

무모함이란 조지 인생에는 없는 것이니까.

조지에게 무모함의 대리만족을 주는 사람은 앤과 솔랜지였다.

 

소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신 있게 사는 사람들은 이기적일 뿐이다.

앤이 이기적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60년대와 70년대 미국은 혼란의 극치를 달렸던 모양이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흔들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성립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 시절.

앤은 온몸을 다해 시대를 불살랐고, 조지는 안락함을 추구했다.

그 안락함 조차도 지켜내지 못했지만.

 

어쩜 앤과 솔랜지가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인생을 살았다면

조지는 숨어서 그 흉내를 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녀 자신도 극심한 시대의 갈등을 견뎌냈을 것이다.

 

어떤 인생을 답이라고 정할 수 없듯이 앤과 조지의 인생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다.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은 자신만의 치유법을 안다.

조지는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사랑도, 우정도, 삶도.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야기는 감정이 손에 잡히듯 몰입감이 커서 읽는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

어떻게 지내요 보다 이 이야기의 밀도가 내겐 더 크다.

그 시대의 마지막 부류.

원제가 <<The last of her kind>> 이다.

 

앤과 조지 세대 이후의 그녀들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들 보다 자유롭고, 그녀들 보다 동등해졌고, 그녀들 보다 평화로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앤과 조지 세대가 힘겹게 관통한 시절의 덕이다.

하나의 세대와 하나의 세대를 연결하는 과도기 세대.

그 시절을 다양한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경험하게 해준 시그리드 누네즈.

 

 

미국과 다르면서도 같았던 우리의 70~80년대

우리에게도 앤과 조지와 솔랜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온몸으로 관통한 시절 덕분에 그 이후의 그녀들은 조금 더 많은 걸 누리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그녀들을 알게 되었다.

어떤 관습적인 것을 끊어내기 전 온몸으로 거부하고, 질주하고, 노력했던 그 시절의 마지막 부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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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않는 여자, 애디 라뤼 뒤란에서 소설 읽기 2
V. E. 슈와브 지음, 황성연 옮김 / 뒤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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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절망스럽거나 암울하다 해도 어둠이 내린 뒤에 응답하는 신들에게는 절대 소원을 빌어서는 안 돼."

 

 

프랑스 비용이란 작은 마을에 살던 아들린 라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자유롭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날 숲으로 도망쳐 절대 소원을 빌어서는 안되는 어둠에게 소원을 빈다.

어둠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녀가 원하는 때에 그녀의 영혼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신비로운 일엔 언제나 대가를 지불해야 하니까.

 

세상에서 지워진 여자.

그 누구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 여자.

그러나 수많은 예술가들의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여자.

애디 라뤼.

 

인간도, 신도 아닌 불멸의 존재.

스스로 자신을 유령이라고 말하는 존재.

300년을 살지만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

오로지 기억만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

불멸이지만 불멸스럽지 않은 존재.

애디 라뤼.

 

이 이야기를 읽어가는 시간 동안 존재의 의미를 생각했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불멸의 존재를 그렸고

존재감 없었던 존재를 마주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상실감은 그 어떤 작품 속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생생함이었다.





모든 불멸의 존재들은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수족을 거느린다.

하지만 애디는 아무것도 없고, 그 누구도 곁에 둘 수 없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순간 그녀는 잊히는 존재가 되니까...

 

어둠.

그녀는 그 어둠에게 뤽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아니.

어둠 자체가 그녀가 그린 이미지의 형상이다.

어둠이 애디를 쫓았나, 애디가 어둠을 쫓았나?

 

난 악마와 거래를 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봐.

 

 

헨리는 사랑받기를 원했다.

하나의 사랑에 버림받고, 모두의 사랑을 갈구했다.

어둠은 그에게 '모두의 사랑'을 주었고, 그의 '시간'을 가져갔다.

그리고 헨리에게 애디를 기억하는 '행운'을 주었다.

어둠에겐 '악취미'였지만.

 

"예술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생각은 기억보다 생명력이 질기죠. 그것들은 잡초와 같아서 항상 자라는 법을 찾아내요."

 

 

생각을 심어 두는 법을 배우는 애디.

자신을 기록하는 법을 알게 된 애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애디.

이 모든 것이 어둠의 시나리오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모든 판은 짜여 있었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말에 불과했던 애디.

그녀는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간다.

자신만만한 어둠의 신이 미처 간과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의지, 인간의 인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마음이다.

 

애디가 사랑을 위해 희생한 걸까?

애디 자신의 기록을 위해 희생한 걸까?

사랑을 꿈꾸는 자에게는 사랑의 희생일 뿐이겠지만

300년을 외롭게 살아 낸 인간의 의지는 고작 사랑 따위로 자신을 희생하진 않을 것이다.

어쩜 애디는 그 두 가지를 다 가졌을지도 모르지...

 

헨리였던 뤽이였던

애디는 사랑을 남기고, 자취를 남겼다.

 

신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면서 신을 속였다.

그것은 언제나 게임이니까.

게임은 규칙을 정할 줄 아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다. 항상.

 

기억되지 않는 여자, 애디 라뤼.

이젠 모두가 애디 라뤼를 기억할 것이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를 만났다.

언제가 애디는 뤽에게서 탈출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불멸의 탄생을 보았다.

애디 라뤼는 존재하는 유령으로 우리들 사이에 남을 것이다.

처음 보았는데 왠지 어디서 본 거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그녀는 바로 애디 라뤼일 것이다.

 

7개의 별을 지닌 불멸의 존재.

애디 라뤼.

그녀를 읽는 시간은 죽어있던 감각들을 깨어나게 하는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문장들 사이로 흩어졌던 애디 라뤼.

이제 우리에겐 또 다른 불멸의 지혜로운 자가 생겼다.

어디선가 애디 라뤼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쩜 우리가 그였거나 그녀를 이미 만났을지도 모른다.

만났다는 기억을 못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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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를 매혹한 불멸의 빛 해시태그 아트북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지음, 고선일 옮김 / 미술문화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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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은 추할 때조차 아름다움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니콜라 부알로라는 프랑스 시인의 말이다.

 

<<금>>

금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금속이다.

사람에게도 인생의 '황금기'라는 말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화려했던 시절을 묘사할 때 쓰인다.

이 책을 읽기까지 금을 한 번도 금속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게 금은 보석류에 속했다. 금속이 아니라.

 

이 책에는 꼭 봐야 할 작품들과 예상치 못했던 작품들이 담겼다.

모두 금과 관계된 작품들이다.

그림, 조각상, 건물, 물건 등등

금이 사람들 뇌리에서 움직이는 방식대로 표현되어 있다.

영원성과 찬란함과 굳건함과 힘으로...






복합적인 광채를 내는 순수한 금은 노란색을 띠고 아주 무르다.

금세공업자들은 다른 금속과 혼합하여 경도를 높인다. 캐럿은 금의 순도를 측정하는 단위다. 이러한 합금 과정을 거쳐 다양한 색조의 금이 탄생한다.

 

 

캐럿을 다이아몬드의 단위로만 생각했었는데 금의 단위로도 캐럿을 쓴다.

금은 부와 권력을 상징해서 21세기에도 통용되고 있다.

화폐를 대신할 수 있는 건 금뿐이다.

금이 무르다고 하니 생각나는 기억이 있는데 오래전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을 하시면서 내게도 금반지 하나를 선물해 주셨다.

반지를 끼기에는 어린 나이라서 성인이 되면 껴야지 하고 반지함에 넣어서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 두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더니 동생이 "언니 반지 빨리 확인해 봐! 아까 할머니가 언니 반지 깨물었어!" 그런다.

보니 매끈한 반지의 링이 살짝 찌그러져있다.

할머니 왈. <진짠지 확인해 보려고 그랬다!>

아직고 그 반지를 가지고 있다.

껴보지도 못하고 나하고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가면은 어린 나이의 투탕카멘이 죽자 미리 만들어 놓은 여자의 관을 고쳐 썼을 거라 추정된다.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논란이 있는 가면이다.

가면의 측정 연대가 최근에 가깝고 그것으로 인해 진위 논란이 있어 실험을 해서 진실을 밝혔지만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으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것으로 루이 14세의 통치를 찬양하기 위해 개조되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 놓은 세상처럼 보이는 거울의 방은 357개의 거울과 금동 조각 장식과 샹들리에로 치장되어 있다.

정말 화려함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이것이야말로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장소가 아닐까?

 

 




블루코란은 금색 글씨로 적은 금니서chrysography다. 금색 잉크를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금박을 분쇄하여 미세한 분말로 만든 다음, 아라비아 고무액 또는 꿀과 섞는다. 이것을 체에 걸러내고 아교와 혼합하면 완성이다.

 

 

이슬람의 경전 코란.

블루코란은 10세기에 제작된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코란으로 세로 30센티미터, 가로 40센티미터 크기의 양피지 600여 장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짙푸른 색에 금색 잉크로 쓰인 경전이라니 정말 화려하면서도 신성한 기분이 절로 들 거 같다.

현재는 100장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 이 경전의 수난이 짐작된다.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4대 원소와 사계절을 묘사한 연작들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 <불>을 보고 있자니 활활 타오르는 불빛의 황금색이 생각난다.

이 시기에는 연금술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모든 금속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꿈꾼 사람들의 심정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서구 미술과 일본 전통 양식의 결합을 꿈꾼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불사조도 참 매력적이다.

서로 다른 세 가지 색조의 금색으로 이루어진 배경에 그려진 불사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환영>이라는 그림이다.

귀스타브 모로의 1876년 작품이다.

이 그림 속에 담긴 금빛은 각기 다른 빛으로 시선을 유혹한다.

엽기적인 그림 속에 담긴 아름다움은 극명한 대비가 된다.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클림트의 <팔라스 아테나>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테나의 갑옷을 묘사한 부분을 참조하여 그렸다고 한다.

가슴에 있는 장식은 고르고노스이다.

신성함과 강렬함 그리고 당당함이 공존해 있는 이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자신감이 생성되게 하는 기운이 넘친다.

 

예술가를 매혹한 불멸의 빛이라는 부제처럼

금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작품을 돋보이고 값있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생활에서 금은 부와, 권력을 상징했지만 예술 속에서 금은 사치와 어리석음과 악과의 대결을 상징한다.

다이아몬드가 영롱한 빛으로 영원을 상징한다 해도 금이 주는 아우라에 못 미치는 거 같다.

다이아몬드에게는 없는 친화력이 "금"에는 있기 때문이다.

 

보는 내내 눈이 황홀했던 책이었다.

이 책에 담긴 것들을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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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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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잃다>>

 

일주일 만에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을 전염병으로 읽은 토마스.

그는 그 뒤로 거꾸로 걷는다.

뒤통수를 보며 걷던 그의 발걸음은 뒤에서 오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걷게 된다.

삶에 대한 반항, 거부, 분노 등의 감정이 뒤로 걷기에 담겼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에 적힌 신부의 마지막 역작이자 기독교의 역사를 바꿀만한 십자고상을 찾기 위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

 

<<집으로>>

 

에우제비우와 두 명의 마리아.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야기들 속에서 예수의 살해 장면을 찾아내는 마리아는 에우제비우의 아내다.

또 다른 마리아는 여행 가방에 남편의 시체를 담아 온다.

한 명의 마리아는 다리에서 뛰어내렸고, 또 한 명의 마리아는 남편의 몸속으로 봉합되었다.

<<집>>

 

피터는 캐나다 상원 의원이다. 평생을 사랑해온 아내를 잃은지 얼마 되지 않는다.

피터는 미국의 영장류 연구소를 방문했다가 침팬지 '오도'를 만난다.

그리고 오도와 함께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

 





그들은 왜 모두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났을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만만하게 읽다가 그 심오함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서로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표현할 길이 없는 길이다.

시간을 건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의 발자국은 서로 겹치게 된다.

 

뒤로 걷기는 어느새 상실의 고통을 위로하는 관습이 되어 버렸고

세상에서 처음 보는 자동차에 희생된 소년은 빛나는 가경자가 되어가는 중이고

율리우스 신분의 조각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도를 닮았다.

 

다들 마음에 깃발처럼 꽂아 둔 안식처가 있다.

그 안식처의 다른 이름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면 다들 그곳을 찾아 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그 여정에서 실수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여정에서 그동안의 삶을 잊을 것이다.

 

미로 같은 마음이 생겼다.

인연에 대해 이렇게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집을 잃고, 집으로 향하다, 집에 도착한 그들.

상실의 의미를 이야기 내내 경험해야 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상실의 집이다.

그곳을 찾아가면서 겪게 되고, 느끼게 되는 모든 것의 집합장소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마음에 담아 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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