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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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규정해 주면서, 아빠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47살.

은퇴를 앞둔 스파이 내트.

첩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은퇴해서 나머지 여생을 즐기느냐,

아니면 언저리라도 좋으니 사무직으로라도 업계에 계속 남느냐 두 가지 선택지에 놓인 그는 오랜 시간 숨겨온 자신의 직업에 대해 딸에게 고백한다. 은퇴자의 혜택이기도 하다.

 

스파이 하면 007이 떠오르고 연상작용에 따라 멋진 액션들과 최첨단 장비들, 멋진 여자들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떠오른다.

게다가 같은 MI6 소속 아닌가!

 

브렉시트로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영국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리라는 노땅들의 환상 앞에서 갑자기 여지껏 누리고 있던 삶의 혜택을 한꺼번에 빼앗기고 높은 실업률과 함께 서너 배로 뛴 물가를 감당해야 하는 젊은 세대들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잠재해 있다. 게다가 트럼프라는 카드는 여기저기서 경찰이 아닌 깡패 놀음을 하고 있는 상황.

 

이런 사회적인 문제 앞에서 은퇴를 앞둔 스파이의 남은 생명은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다.

가뜩이나 처진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내트에게 유일한 취미는 배드민턴.

클럽 챔피언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생판 모르는 젊은 남자가 도전장을 내민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에드라는 청년의 기세에 내트는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트는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러시아국 분국의 수장 자리도 받아들인다.

내트의 손에 부활하거나 사라질 그곳. 더 이상 가치가 없을 거 같았던 그곳은 폐기처분 될 스파이의 앞날과 비슷한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현장 체질이다. 사무직도 사교직도 딱 질색이다.

 

한 번의 배드민턴 시합은 매주 월요일의 행사로 이어지고, 경기가 끝난 후 에드와 내트는 간단하게 한잔하는 시간을 보낸다.

주로 에드가 내뱉는 말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는 자리지만 내트에게 그 시간은 소중해진다.

이 시점에서 베테랑 스파이의 감이 떨어진건가? 라는 생각이 든다.

클럽 회원도 아닌데 내트와 한판 붙기 위해 일부러 이 사람 저 사람과 시합을 해서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 에드에게 어째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걸까? 스파이도 아닌 나의 오지랖이 촉을 세우게 만든다.

 

에이전트 러너는 비밀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해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확보를 위해 지시와 지원을 하는 고급 요원을 가리킨다.

내트가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시작이 아니다. 끝을 이야기하는 이야기지.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보를 캐는 사람.

보통 사람보다 더 보통으로 살아내는 사람.

그래서 은퇴를 앞둔 스파이의 이야기는 긴장감 없어 보이면서도 긴장되고, 주절주절 불필요한 말들이 많은 거 같은데 핵심을 숨겨두고 있다.

 

내트의 마지막 작전은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정보를 얻고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내트와 카레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다.

현실을 모두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언제나 열심히, 잘, 일하는 사람은 제외되고, 소외된다.

비리와 자기 이익에 눈먼 능력없는 사람들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물들지 않는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소신을 지킨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내트같은 현장 요원들이 점점 사라지고

돔과 브린 같은 인물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좌지우지하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은 갈등하게 될 것이다.

 

냉정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에이전트 러너.

진짜 스파이가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스파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영화가 심어 놓은 환상에 불과했다.

진짜 스파이는 나보다 더 나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진짜를 알고 나면 더 무섭고 소름 끼치게 된다.

그들은 절대 내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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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 지음, 이수영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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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민심이 가는 방향을 따른다. 자유는 서류 더미와 적법성 싸움이 아니라 대중의 반응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지반, 러블리, 체육 선생.

이 세 사람의 입장에서 이어져 가는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다.

가슴 가득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하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작가가 주는 반전은 뻔뻔하고 무심한 현실이다.

 

"경찰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죽는 모습을 그냥 지켜만 본다면, 정부 역시 테러리스트라는 뜻 아닌가요?"

 

 

 

극빈자 가정에서 자란 지반은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고, 중산층이 되는 것이 꿈이다.

어느 날 인근 기차역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구경을 나갔다 온 지반은 흥분한 마음을 페이스북에 담았다.

아비규환의 기차역에서 불길에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도망친 지반은 아무 곳에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고 싶었던 거다.

SNS 팔로워도 몇 명 없는 지반이었지만 자신이 쓴 몇 줄의 글이 그녀의 인생을 빼앗아 갈지를 그때는 몰랐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가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법을 안다. 그래서 나도 되갚아주는 법을 배웠다.

 

 

히즈라인 러블리는 언젠간 유명한 연예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며 살아간다.

그는 지반에게 영어를 배웠다. 미래를 위해.

그리고 연기 연습을 찍은 동영상이 SNS를 통해 인기를 얻으며 꿈에 그리던 스타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는 무엇을 위해 법정을 출석하며 진실을 위조해왔던가? 무엇을 위해 자비를 비는 남자, 소고기 먹는 자의 유령을 잠자기 직전 떠안게 되었는가?

 

 

체육 선생은 지반을 가르쳤다.

그녀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주면서 그녀가 운동으로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반은 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졸업시험을 치른 후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지반이 테러리스트라는 소식을 뉴스에서 듣는다.

 

세 사람은 각자의 꿈이 있었다.

모두 중산층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다.

한 사람은 지반을 위해 사실을 말했고, 한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위해 사실과 사심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각자의 선택대로 지반을 잊었다.

 

인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이 세 사람과 맞물리며 불편하고 답답한 상황을 이어간다.

정의는 약에 쓰려 해도 없을 거 같은 상황들이 정치와 언론을 끼고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보는 마음은 암담하기만 하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해되는 사람들의 현실과 선택들 앞에서 마음이 자꾸만 오그라든다.

 

나는

러블리와 체육 선생과 뭐가 다른가?

 

다를 것이 없다...

 

지반이 부잣집 딸이었다면 그녀의 한 마디는 사회적 이슈가 되어 정부의 무능함을 다그쳤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

콜카타의 세 사람.

 

대중은 피를 원한다.

언론은 죽음을 원한다.

내 주변의 모두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대중이 그녀를 죽이는 거라고.

 

 

SNS는 누군가에서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희생양의 불씨를 당겨주었다.

정의를 위한 선택의 기로에서 정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임을 이 이야기를 통해 또 깨닫게 되었다.

 

세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끌어가기 보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리뷰를 쓰는 동안 오히려 이런 구성이었기에 각자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정치와 언론은 그들이 경계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테러리스트들과 한치의 어긋남 없이 같은 부류였다.

이들에게 휩쓸리는 눈먼 여론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였다.

 

장막 너머의 진실을 보는 눈을 죽을 때까지 계속 단련해야겠다...

 

나는 삶으로 부터 배운다.

 

 

나는 삶을 이야기로 부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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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융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영성가의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BOOKULOVE(북유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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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의 만남

 

 

헤세는 갸름한 얼굴에 밝고 빛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위아래로 흰옷을 입은 그는 고행자나 고해자처럼 보였다. 백단향의 향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칠레의 작가 겸 외교관인 미구엘 세라노가 헤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다.

그가 표현하는 헤세의 모습은 작가라기보다는 현자의 모습으로 비친다.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헤르만 헤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결코 문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마술적인 만남이었다.

 

 

뭔가 전문적인 글일 거라 짐작했던 이 책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미구엘 세라노의 글엔 경건함과 존경이 묻어 있었다.

매번 그가 헤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선 내 마음마저 경건해졌다.

칠레에선 작가들을 외교관으로 파견하는 사례가 있다던데 그가 인도 외교관으로 발령 난 것이 매우 합당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글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매우 인상적이다.

 

헤세가 융과의 교류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 그 안정이 그의 작품세계에 담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헤세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평소 헤세를 만나고 싶어 했던 아들과 함께 헤세를 찾아가는 그의 설레고 뿌듯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하지만 헤세는 이미 영면에 들었고 존경하던 작가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 들은 미구엘은 그날 헤세가 즐겨 듣던 음반을 사가지고 돌아간다.

 

헤세와 함께 음악을 들을 생각이었다. 헤세에게 내 감각을 빌려주어 음악을 듣도록 해드리고 동시에 그가 내 곁에 있음을 느껴보고자 했다.

 

 

그가 헤세의 죽음을 기리는 장면이 참 아름다우면서도 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헤세, 융, 세라노는 그들의 비밀 클럽에서 서로 연결되었던 영혼들이 아니었을까?



 

융과의 만남





제일 감동받은 것은 그를 에워싼 비밀의, 혹은 신비한 기운이었다. 게다가 이 온화한 인물은 잔인하고 파괴적인 면도 있어서, 불꽃이 여기에 불을 붙이는 경우 예기치 않게 그런 면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었다. 상대방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은 안경 너머를, 어쩌면 시간 너머를 보는 것 같았고, 코는 매부리코였다.

 

 

구스타브 융과의 만남은 내게 좀 어려운 부분이었다.

헤세와의 만남이 경건함과 조심스러움으로 이루어졌다면 융과의 만남은 진지함과 격렬함을 동반한 토론의 시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만 알았던 융의 생각들을 대화체로 읽고 있자니 융이라는 사람이 가진 신비한 매력이 눈에 보이는 거 같다.

 

"박사님은 백인들이 머리로 생각한다고 믿으십니까?"

"아뇨, 그들은 그저 혀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저 말로만, 오늘날에는 로고스를 대신하는 말로만 생각합니다...."

 

제가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자아>와 무의식의 사이, 양쪽에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는 이상적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완성 상태, 혹은 전체성의 상태에 있는 개체성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일 겁니다.

 

"정신은 정신을 끌어들입니다. 꼭 만나야 할 사람들만 만납니다. 우리는 무의식에 의해 지시를 받는데, 무의식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인들에게 뭔가 조언을 해야 할 때 잘 해주는 말이 있다.

"너 자신에게 물어봐. 너의 무의식이야말로 너를 가장 잘 아니까. 너에게 가장 최선의 길을 알고 있는 건 바로 너의 무의식이야."

융에 대해 알지 못했어도, 나는 가끔 마음이 하는 소리가 진정한 것임을 깨달은 경험이 몇 번 있다.

이 무의식에 대한 대화를 들으며 융의 생각들 중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뿌듯해졌다.

 

헤세와 융과 세라노는 서로 다른 듯 닮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거 같다.

마치 꼭 만나야 할 사람들처럼.

 

이 책에는 많은 것이 담겼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저 서로 왕래한 유명 인사들의 모습만 볼 수도 있고.

헤세의 사유와 융의 분석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들의 필체를 만나 볼 수도 있고.

그들의 노년의 모습을 그림처럼 엿볼 수도 있고.

그들의 영적인 삶을 가까이 느껴 볼 수도 있고.

말로만 들었던 분들의 생각과 그들의 마지막을 느껴 볼 수도 있다.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는 읽은 자의 몫이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얻었고

융의 무의식에 대한 것을 아주 조금 이해했으며

이들이 보통 인간과는 다른 영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에 경건함을 느꼈다.

 

세 사람 다 <인도>에 매력을 느꼈지만 가본 사람은 융과 세라노뿐이었다.

헤세가 인도에 가봤더라면 어떤 작품이 탄생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뭔가 심오하면서도 아득한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영혼이 이어졌던 헤세와 융은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

그들을 이어갈 '제자'들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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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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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가난을 나누면 된다는데

산다는 것은 남몰래 울어보는 것인지

밤이 오는 서울의 산동네마다

피다 만 오랑캐꽃들이 울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이름을 들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싯구가 있다.

[울지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대표적인 시 '수선화'가 정호승 시인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읽고 난 지금은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

 

 

1973년 [첨성대]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데뷔한 정호승 시인은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

이 책에는 50년간 작품 활동을 해온 정호승 시인의 대표작 275편의 시가 담겨 있다.

총 7부로 나누어진 시집엔 시대적 상황과 함께 개인의 삶이 담겨있는 시대와 인생을 관통하는 시들이 모여있다.

 

 

1부의 시들은 아득한 느낌 속에서 삶의 불공평함이 엿보인다.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이 시어를 통해 그려진다.

산업화 시대에 앞만 보고 달리던 그들의 모습이 애처로운 시선으로 담겼다.

 

 

남들은 다들 배우러 간다는데

원수놈의 돈을 벌어보겠다고

이른 새벽 종짓불 밝혀서 쑥국밥을 먹고

네가 고향을 떠나던 날

웬놈의 진눈깨비는 그렇게 뿌렸는지

마지막 편지

 

 

고향을 떠나 미싱사 보조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딸이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않을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이 마음을 얼얼하게 만든다.

낳은 아이를 키우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 보내야 하는 누이와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별을 나눠주기 위해 구두를 닦듯이 별을 닦는 구두닦이.

전쟁통에 태어난 혼혈아들과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어 버린 맹인 부부. 이들은 모두 과거에 있을 거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시인은 말한다.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2부의 시들에선 최루가스가 날리고 여기저기 죽음이 흩날린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라' 다짐하는 겨울강에서 '내 인생도 곧 끝나는 거 같다'고 편지를 쓴다.

'새벽 술국을 먹으며 사북을 떠난다' 폐광의 설움을 뒤로하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광부의 심정으로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늘과 가까워져 / 이제는 새벽이슬이 내리는 사람' 전태일을 기린다.

'서러운 네 무덤가에도 봄은 오느냐'고 외치는 아들 잃은 어머니의 울부짖음 앞에서 시인은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한다.

 

 

1, 2부가 시대를 관통한 삶을 그렸다면 3부부터는 우리가 익히 안다고 생각하는 정호승 표 시들이 담겨있다.

그동안 정호승 시인의 삶과 사랑에 관한 주제들의 시들만 읽다가 이렇듯 시대를 이야기하는 시들을 대하니 절로 마음이 다잡아진다.

과격하지도 울분으로 가득한 시가 아님에도 그래서 더 절절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해주는 시어들이 슬프게 아름답다.

 

 

시를 자주 읽는 편이 아니지만

가끔 일부러라도 찾아 읽는 시 앞에서 나는 복잡한 그 무언가가 스스로 정리되는 기분을 느낀다.

함축된 시어들 사이에서 복잡한 말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그 순간이 좋아서 시를 읽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누군가의 50년 세월을 함께 살아낸 기분이다.

인간사와 사랑과 종교와 생활이 모두 함께 담겨 있는 이 함축적인 인생은 시어가 그려내는 풍경 앞에서 그 세월을 음미하게 만든다.

고요하면서도 서정적인 말들은 잊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되살려 낸다.

날선 글과 직설적인 언어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서 잔잔하게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추는 물그림자 같은 시어들이 나를 다독여 준다.

 

 

좋은 글은

사람들에게 더 나아진 기분을 같게 한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내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아진 어른이 된 거 같다.

8월이 그렇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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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미세스 - 정유정 작가 강력 추천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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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도 몇 번이나 든 생각이었지만, 이사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까 불안해졌다. 지금까지는 윌이 말했던 산뜻한 새 출발과는 분명 달랐다.

 

 

대도시 시카고에 살다가 인구 1000명의 섬으로 이사를 온 세이디네 가족.

세이디는 이곳에 오는 걸 반대했지만 모든 상황이 이곳으로 오게끔 만들었다.

겨울 잿빛이 만연한 섬. 그 언덕 위의 집.

자살한 시누이는 그 집과 조카딸 이모젠을 남동생에게 남겼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적막한 이곳에서 온몸으로 그들을 거부하는 이모젠의 어두운 모습은 막 도착한 세이디의 마음을 할퀴어 놓는다.

 

여름 한때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섬.

섬이란 자체가 고립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세이디는 하나밖에 없는 진료소에서 의사로 근무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아들 오토와 자신의 실수는 아니었지만 자기가 맡아야 하는 수술을 맡지 않음으로써 대신 수술을 한 레지던트의 실수로 환자가 죽게 되자 세이디는 병원 응급실을 그만둔 터였다. 게다가 윌의 외도로 인해 그들의 가정은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았던 그들은 최선의 선택지로 윌의 누나가 남겨준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적응하기는 힘들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날씨.

직장이건 이웃이건 모두 세이디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모젠은 극도의 반항을 하는 중이고 아들 오토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윌은 육아와 살림을 책임지면서 학부모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러던 중 이웃 중 한 명인 모건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잘한 범죄는 있었어도 살인은 없었던 이 섬에 세이디네가 이사 오자마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세이디는 경찰이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상황일까?

 

이 이야기의 화자는 4명이다.

세이디, 카밀, 마우스, 윌.

카밀은 세이디가 윌을 만나기 전 윌을 먼저 만난 사이지만 세이디에게 윌을 빼앗기고 그녀를 질투하며 윌의 주변을 맴돈다.

마우스는 어린 소녀로 어느 날 새엄마가 나타나면서 인생이 꼬인다.

 

세 여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물론 어느 정도 읽게 되면 트릭을 알게 되고, 그래서 쉽게 단정하게 된다. 범인을.

그러다가 뒤통수 맞게 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매력이다.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어디를 가든 불행이 쫓아오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불행을 키우는 건 세이디가 아닐까.

늘 불안불안하고 자신감 없어 보이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세이디가 답답하고

너무 나대는 카밀은 뻔뻔해서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고

마우스는 너무 가엽다가도 이 아이가 새엄마를 죽이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앞선다.

윌은 자신의 외도를 용서받기 위해 애쓰는 중이지만 그게 그리 오래갈 거 같지는 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다.

결혼으로 묶여서 가족을 이루어도 부부는 무촌이다.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자식이라도 다 알 수 없고,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부모라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웃은 말해 뭐 하겠는가.

 

누군가 내 가정을 파괴하려 하고, 촘촘하게 그물을 치고 조금씩 그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사람 안에 수많은 나도 모르는 내가 존재하고 그것은 저마다 모습을 바꾸어 나를 만들어 낸다.

그저 범죄 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묘한 감상이 남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의 학대는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가 어떻게 진화되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극복하며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극복> 이란 것도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는 법이다.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되고, 행복해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지켜주지 못할 바에는 아이들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옳은 거 같다.

 

사랑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마음이 남긴 미래의 일들은 누구의 책임일까?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결코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시간이 미움받는 것들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탈바꿈시켜 준다면, 그건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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