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법정
조광희 지음 / 솔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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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생명체입니다. 안드로이드가 자연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읽은 웹툰 [데이빗]을 읽은 탓에 이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새삼 더 각인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 주변엔 무인 가게가 점점 늘어나고, 로봇이 서빙을 하는 음식점도 생기고 있다.

이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윤리의 잣대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볼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DNA를 복제해서 만든 안드로이드 아오.

그 아오에게 묘한 동질감과 함께 질투와 시기와 경이로움을 같이 느끼는 한시로.

애인과 아로에게 애정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꼈던 한시로는 그 안드로이드에게 살해당한다.

 

한시로가 불법으로 장착한 의식생성기를 단 이후 아로는 몰랐던 감정이 생기고 자신의 처지를 답답해한다.

시로가 없을 때는 수면모드로 있어야 하지만 아로는 깨어나 한시로 몰래 외출도 하면서 인간 세상에 대한 학습을 한다.

그러면서 한순간 자신이 한시로라고 착각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이 일은 누구의 잘못인 걸까?

 

 

인간 세상을 스스로 학습하고

인간의 DNA로 탄생한 안드로이드.

비록 생식기는 없지만 인간의 애정행위까지도 학습하게 된 아오는 어느 날 시로와 미나의 모습을 보고 한순간 분노한다.

자신을 어느덧 한시로와 동일시하게 된 안드로이드 아오는 폐기될 처지에 맞서 변호사 윤표의 도움으로 재판을 신청한다.

 

 

이런 세상이 내 생에 온다면

그래서 내가 이 재판을 직접 보게 된다면

나는 어느 편에 서게 될까?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죽였으니 즉시 폐기처분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안드로이드지만 의식을 가졌고 인간의 DNA로 만들어졌으니 정당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까?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알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고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했던 돼지 데이빗과 아로는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이건 제 일일뿐만 아니라 동물들, 마음을 가진 안드로이드,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 변호사님의 동물과 안드로이드의 해방에 대한 입장에도 공감합니다."

 

 

안드로이들과 동물들을 대변하는 해방전선이 등장하고 그들의 세력에 점점 커가는 상황에서

아로의 재판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재판이 되어가고, 그 결과에 따른 파장이 인간계와 그 외 생물계에 미칠 영향이 클 것을 우려한 목소리들이 있다.

과연 재판은 어떤 판결로 귀결될까?

 

 

미래의 일을 뭐 벌써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다.

어쩜 우리 생애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비단 안드로이드에 대한 SF 소설이 아니다.

인간의 법정은 말 그대로 그저 인간의 법정일 뿐이다.

 

 

인간의 법정에선

인한 대 그 어떤 생물이라도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거 같다.

인간이 만든 법은 언제나 인간이 우선이니까.

AI가 판사가 된 세상에서도 말이다.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참사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인간은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는 걸 그들은 알까?

 

 

지금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것이

그저 반가웠다.

 

 

복잡한 듯 보여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은 저 미래보다는 훨씬 단순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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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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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를 찾아왔지만, 코니는 내게 어머니 대신 자아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주길 바라며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걸 멈춰야 했다. 타인의 삶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걸 멈춰야 했다.

마침내 내 삶이 열리고 있었다.

 

 

엄마와 딸은 비슷한 운명을 가진다는 말을 들었다.

팔자가 같다는 말로 어른들은 걱정과 위로를 함께 말했다.

살면서 보니 엄마와 딸은 비슷한 삶의 궤적을 살아낸다 해도 엄마들 보다 딸들은 항상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세월의 힘일 것이다.

 

 

1980년에서 1982년

2017년에서 2018년

엄마 엘리스 모소와 딸 로즈의 이야기가 번갈아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코니가 있었다.

엘리스와 코니, 로즈와 코니.

 

 





엄마의 연인이자 유명한 소설가 콘스턴스 홀든.

로즈에게 엄마는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손에 자란 로즈는 우수한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 조에게 의지하며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

언젠간 조와 함께 시작할 사업을 위해 잠시 임시직을 거치는 중이었지만 조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만 들먹이며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그런 차에 30년이 넘도록 함구하던 아빠는 콘스턴스의 소설책과 함께 엄마의 비밀을 얘기해 준다.

 

 

 

삼십사 년 동안 나는 세상에 한 가지 모습만 보여주었다. 코니와 단 몇 분 함께 있고 나니 그것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코니가 간직한 엄마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코니의 비서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잠입한 로즈는 로라가 되어 코니의 손이 된다.

중증 골관절염으로 손을 쓰지 못하는 코니 대신 집안 일과 함께 은둔 작가였던 코니가 시작한 새 소설의 타이핑을 하는 것이 로라의 일이다.

로라는 그 새 작품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희망에 차있다.

 

 

코니의 단단함에 비해 엘리스와 로즈는 무른 맛이 난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이십대의 엘리스와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기억을 지닌 채 어디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던 로즈.

그들은 코니 앞에서 어른이 되어 갔다.

상처받은 이십대의 엘리스가 보기 좋게 사라졌다면 로즈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아냈다.

엘리스가 찾지 못한 것을 로즈는 찾아냈다.

 

 

이 이야기엔 기막힌 반전이 있다.

이십대의 흔적만 남기로 홀연히 사라진 엘리스에 대한 반전.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만나게 될 엘리스의 모습이 어떨지를.

엘리스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로 여행을 떠났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그 상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감행했던 "도망"은 또 다른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엘리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코니의 굳건함이었다.

사랑의 자존심은 가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있으면서도 반대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그런 해석.

그날 엘리스와 코니가 그랬다.

서로의 말을 모두 오해하고, 고깝게 듣고, 반대로 행동했다.

엘리스는 사라졌다.

남겨진 로즈는 엄마보다 더 완숙한 나이에 코니를 만났다.

코니는 엘리스에게 주지 못 했던 말들을 로즈에게 건넨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 수 있다 했다.

엘리스의 부재는 코니와 로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났다.

더 이상 존재를 알 수 없었기에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이야기.

 

 

로즈와 로라의 이중 삶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던 로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고, 엘리스가 감당하지 못했던 선택을 로즈는 과감히 인생에서 삭제했다.

그래서 제시 버튼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제시 버튼은 언제나 여자들의 진짜 이야기를 할 줄 안다.

 

 

"로즈, 당신이 정말 엘리스를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엄마를 찾고 있었어요."

코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개념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찾고 있었던 거죠."

 

평생 어머니에게 집착했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자가 된 느낌이었다. 내 곁에 있어준 적 없는 사람에게 너무 신경 쓰느라 곁에 있어준 사람에게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다.

 

 

엄마의 흔적을 찾으러 온 로즈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냈다.

오래전 엘리스가 두고 간 자아가 로즈와 함께 자랐다.

이제야 비로소 두 자아는 코니에 의해 완성되었다.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사라진 엘리스의 미완성인 인생이 로즈에 의해 완성되는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사랑이 영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코니와 엘리스의 사랑은 영글지 못한 채 서로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아니, 아니, 또 이럴 수는 없어."

 

 

로즈의 정체를 알게 된 코니의 말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떠난 자리가 채워지고, 지울 수 없을 거 같은 상처는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엘리스의 부재가 주었던 고통의 시간이 로즈와 코니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서로에게 치유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을까?

 

 

미스터리 소설도 아닌데

미스터리하게 읽힌다.

동성애, 불륜, 상실감, 자존심과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가 맛깔스러운 양념처럼 우리 삶에 버무려지는 느낌이다.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가의 필력에 매료된다.

 

 

읽는 순간 보다

읽고 난 후에 더 매료되는 이야기 컨페션.

제시 버튼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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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데이빗 1~2 세트 + 북펀드 굿즈 (<데이빗> 노트 + 마스킹 테이프) - 전2권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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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출간




인생 책은 많아도 인생 웹툰은 처음이라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사람들이 인생 웹툰이라고 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이 물음에서 탄생한 데이빗.

작은 몸으로 태어나 혼자서 어미젖도 물지 못한 데이빗은 농장주의 아들 생일선물이 된다.

돼지우리에서 생을 마감할뻔했던 데이빗은 이름도 얻고 조지와 함께 생활한다.

인간의 말을 하는 돼지.

오지의 농장에서 데이빗은 조지와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점점 성인이 되어가는 조지는 이 적막한 고향이 지루하다.

조지는 데이빗을 설득해서 서커스단을 좇아 대도시로 나간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만 한순간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데이빗.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서면 그들도 그를 동등하게 대접하도록 만들겠다는 조지의 약속이 있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데이빗을 옹호하는 편과 그렇지 않은 편으로 갈라지고 정치인들은 선거전에 데이빗을 이용하려 한다.

 

 

인간은.

인간종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종'을 만나게 되면 일단 배척하고 본다.

아무런 데이터가 없는 색다른 종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감을 주기 때문이다.

데이빗이 그런 존재였다.

하물며 데이빗을 옹호하던 단체의 리더 캐서린조차도 그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긴 누구라서 데이빗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정말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데이빗은 사람이어야 할까?

인간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동물은 동물일 뿐일까?

그렇다면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데이빗은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종에게 이주해온 이민자다.

 

인생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

그 책임을 온전히 짊어질 수 있어야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야.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거지 네 책임이 아니야.

그러니까 조지.

너는 너의 몫만 짊어지면 돼.

 

 

처음엔 모두 데이빗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데이빗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아는 순간 사람들은 분열된다.

 

처음엔 이민자들은 환영받는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그들이 오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탄탄하게 자리 잡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점점 편협해진다.

저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저들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저들이 저들의 문화를 이곳에 가져오는 게 싫다.

그들과 우리가 섞이는 게 싫다.

 

생각과 현실은 다르다.

데이빗이 실존한다면 나 역시 데이빗을 인간으로 생각할지 동물로 생각할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데이빗은 내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해줬다.

뭔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느낌이다.

마지막 데이빗의 선택이 그래서 가슴 아프다.

 

다르다.

이것은 공포스럽고, 편협해져야 하는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공포와 차별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다르다.

이것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배워야 할 시기가 온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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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댄스
앤 타일러 지음, 장선하 옮김 / 미래지향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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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갑자기 삶의 옆구리를 '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때때로 윌라는 다른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며 반평생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반평생보다 더 많은 날을 그렇게 보낸 것 같았다. 처음엔 데릭이, 다음은 피터가 앞만 보고 돌진하는 동안 윌라는 뒤에서 그들이 벌려 놓은 걸 치우고 사과하고 설명하며 세월을 보냈다.

 

오랜만에 앤 타일러의 글을 읽었다.

아직까지 활동 중이라는 사실에 약간 놀라면서.

 

욱하는 성격의 엄마가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날

그날을 그린 이야기는 윌라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 시절이 향후 윌라의 삶에 어떤 지침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정 반대의 부모 밑에서 아빠가 아닌 엄마 때문에 조마조마한 어린 시절을 보낸 윌라는 아빠의 성격을 물려받은 듯하다.

 

대학생이 된 윌라는 언어학자가 되려는 꿈을 접고 데릭과 결혼한다.

그리고 션과 이언을 낳고 안락한 생활을 하지만 욱하는 데릭의 성격으로 자동차 사고를 당해 혼자가 된다.

 

피터와 재혼한 윌라의 삶은 평온해 보이지만 아무런 쓰임새 없는 인생처럼 느껴진다.

그런 차에 션의 여자친구였던 드니즈가 총을 맞는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드니즈의 딸 셰릴을 돌봐달라는 이웃의 전화를 받는다.

션은 이미 드니즈를 떠났고, 셰릴과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생각에 윌라는 집을 떠난다.

 

잔잔한 이야기 안에서 세상사의 깊은 맛을 보았다.

 

3번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윌라의 모습은 세월을 닮아간다.

윌라의 아버지와 윌라의 모습에서 언뜻 스토너의 모습을 본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늘 자기를 한곳에 놓아두는 삶.

하지만 윌라는 생의 끝자락에서 오롯하게 자신의 삶을 택한다.

 

아니면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걸 시도해 볼 수도 있다.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니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던 사람은 자신이 내어주던 사람들에게서는 아무런 위안을 받지 못한다.

받기만 한 사람은 주는 법을 모르니까.

하지만.

삶은 늘 음지와 양지의 양면을 동전처럼 가지고 다닌다.

윌라가 자신의 가족에게 받지 못했던 위안과 필요는 셰릴을 돌보면서 그 주변의 이웃들에게서 받게 된다.

가진 게 적지만 서로를 돕고,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사람들 곁에서 윌라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직도 '필요한 인생'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이가 들면 모든 삶에서 뒷전으로 쳐지게 마련이다.

젊은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들은 '염두' 에 없는 삶이 된다.

 

가족의 평온은

언제나 누군가의 침묵과 희생과 이해 위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 침묵과 희생과 이해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강제된다.

 

윌라가 자신의 길을 갔다면 동생 일레인과의 사이가 그렇게 멀어지지 않았을까?

어쩜 윌라는 아버지의 길을, 일레인은 어머니의 길을 가는 건지도 모른다.

윌라와 일레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반반 들어 있고,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본인의 자유의지다.

션과 이언이 데릭과 윌라를 닮은 것처럼.

 

윌라의 인생을 읽어가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을 그려본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여자의 삶이란 어찌 이리도 닮은 것인지...

 

적어도

인생의 후반부는 온전히 내 의지로 살 수 있음을 깨우쳐준 윌라의 선택이 후련함을 남겨준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어디가 나의 길인 건지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답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어떤 선택도 강요하지 않고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물음표도 없지만

결국 인생은 벌어지는 그대로의 상황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배웠다.

그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모든 선택은 결국 나의 것이기 때문에.

선택엔 언제나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앤 타일러.

노년의 작가에게 배우는 인생의 한 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나의 행복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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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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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

난 지금 독일에 있는 게 아니야.

 

 

세계 1차 대전 참전 용사이자 사업가인 오토 질버만.

그는 유대인이자 독일인이다.

아리아인의 특징을 가진 그는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겉으로는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2차 대전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 와중에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고 있었다.

질버만이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모든 통로가 차단된 이후였다.

 

프랑스에 있는 아들에게 허가증을 구해달라 요구하는 한 편 살고 있는 집을 핀들러에게 팔려고 하지만

시류에 편승한 핀들러는 헐값에 질버만의 집을 사려 한다.

그 와중에 나치당 청년들이 질버만의 집에 들이닥치고 핀들러와 부인이 그들을 맞이하는 사이 질버만은 도망친다.

그리고 끝도 없는 그의 여행이 시작된다.

 

"참 우습네요 우리는 서로 불쌍하다고 하며 상대방이 자기보다 상황이 나쁘다고 믿으려 하니 말입니다. 그게 마치 위로라도 되는 듯이."

 

 

어디에서도 머물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 질버만은 기차를 갈아타면서 나치를 피해 다닌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상황 속에서 친구와 처남의 외면까지 받으며 질버만은 분노했다, 절망하고, 희망을 찾다가 실의에 빠진다.

 

질버만을 따라가는 내 심정도 기차와 함께 덜컹거렸다.

그의 절망과 분노와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와서 마음이 착잡했다.

 

이 책의 저자인 보슈비츠 역시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질버만이 느끼는 감정들이 굉장히 현실감 있게 전개된다.

몇 시간 눈도 제대로 못 붙이고 식사도 못하고 쫓기는 질버만은 점점 광분한 상태로 나아가고

벨기에로 극적인 탈출을 감행했으나 벨기에 경찰에게 붙잡혀 도로 독일 국경으로 넘겨진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질버만의 절박함을 그려내고

그가 가진 전 재산을 잃어버리는 상황에서는 절망감과 허탈감이 나에게도 전해져왔다.

게다가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가 신고를 하는 장면에서는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3만 마르크가 든 서류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고소하려고 여기 온 겁니다."

 

"내 권리 전체를 빼앗은 사람들에게 도난신고를 하려는 게 아마 유대인 농담인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도둑은 찾지 않고, 도둑맞은 사람에게 뻔뻔한 말을 하는 게 독일 현실입니다."

 

 

도망도 못 가고

자살도 못하고

경찰의 손을 빌리려고 했던 질버만은 착한(?) 경찰 덕에 풀려난다.

이제 꼼짝없이 돈도 못 가진 채로 기차로 돌아가야 하는 질버만.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질버만.

유대인이지만 다른 유대인 때문에 자신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하게 된 질버만.

 

이 이야기는 독일어권에서 독일 역사의 어두운 면을 당대에 알린 초기 문학적 증거로 가치가 있다.

질버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절박함과 독일 사회의 분위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모든 독일인이 유대인을 박해한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유대인을 경멸하는 질버만조차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자신이 경멸하는 유대인 방식을 들이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질버만은 심란한 눈길로 카페를 둘러봤다. 나와 당신들이 다른 게 뭔가. 우리는 정말 무서울 만큼 닮지 않았나.

 

 

이야기의 끝에서도 저 문장이 자꾸 되뇌어진다.

나와 당신들이 다른 게 뭔가.

우리는 정말 무서울 만큼 닮지 않았나.

나치가 남긴 상흔은 세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은 끊임없이 그것을 되새길 테니..

 

보슈비츠의 바람처럼 이 이야기는 바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80년이나 묻혀있다가 이제야 세상에 나온 <<여행자>>.

은둔하고 있던 여행자는 이제야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내려 땅을 디뎠다.

보슈비츠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그 시대의 감정은 이제야 여행을 시작했다.

보슈비츠가 남긴 여행자의 여정이 그이 바람대로 날개를 달고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펄럭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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