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속의 고양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엮음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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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후 메도우뱅크가 겪게 될 엄청난 문제의 전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혼란, 무질서, 살인 등 메도우뱅크를 지배할 어떤 사건들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라마트의 왕족은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보석을 지니고 다닌다.

알리 유스프 왕자는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라마트에서 탈출 작전을 감행하기 전 자신의 비행사이자 친구인 밥 롤린슨에게 자신의 보석을 맡긴다.

밥은 잠시 휴가차 라마트에 와 있던 누나에게 그 보석을 맡기려고 찾아가지만 누나는 외출 중이었고 혁명은 시시각각 다가올 조짐으로 마음이 급한 그는 보석을 처리하기 위해 고심을 한다.

그리고 몇 달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던 밥과 알리 유스프 왕자가 탄 비행기가 추락한 채 발견되고 암암리에 알고 있던 알리 왕자의 보석을 찾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보석은 찾는 자가 임자였던 것이다.

 

메도우뱅크는 사립 여자 학교로서 세워진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좋은 가문의 여학생들이 다니는 곳으로 점점 입지를 굳혀가는 학교이다.

그곳에 밥 롤린슨의 조카 제니퍼가 입학하고 유스프 왕자의 약혼녀 샤이스타 공주가 입학한다.

그리고 새로 온 선생님과 젊은 정원사가 채용된다.

부산하게 시작하는 학기의 첫날

학생들과 학부모를 맞이하던 교장 불스트로드 선생은 학부형이 한 말 중에서 뭔가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는 의심이 들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새로 지은 스포츠 파빌리언에서 새로 온 체육교사가 총에 맞아 죽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처럼 말이에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우리 모두는 비둘기인데 그 속에 고양이가 하나 있었던 거죠.

하지만 우린 고양이를 못 본 거죠.

 

 

선생들과 학생들은 뭔가 이상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언지는 모르는 상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첫 번째 사건을 해결하기도 전에 연달에 2명의 선생이 목숨을 잃는다.

게다가 샤이스타 공주는 자신을 누가 납치할 거 같다는 얘기를 하고 그것을 무시했던 교장과 경찰 앞에서 보란 듯이 사라지고 만다.

가장 탄탄할 때 학교를 물려주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교장 불스트로드.

불스트로드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고 키워왔으나 차기 교장직에서 제외된 채드윅 선생.

요즘 보기 드문 젊은 정원사로 학교의 이곳저곳에 관심이 많은 아담.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애쓰지만 갈피를 못 잡는 켈시 경감.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밥의 조카 제니퍼와 그녀의 절친 줄리아.

 

모든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요.

왕족의 보석이라는 비밀스럽고도 신비한 요소가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

임자 없는 보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각국의 스파이들.

세 건의 살인과 한 건의 납치.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야 등장하는 에르퀼 푸아로!

 

이 이야기엔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한다.

마지막에 쨘~ 등장해서 사건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해결하는 푸아로의 솜씨를 발견할 수 있는 비둘기 속의 고양이.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고양이 찾기가 어려워진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야기들은 예상치 못한 반전을 지니고 있다.

모든 등장인물의 배경과 인과관계를 읽어가도 사소한 트릭 하나 때문에 범인에서 제외하게 되는데

그렇게 맞이하게 되는 반전이 독자의 마음을 훔치는 크리스티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늘 인상적인 캐릭터가 있는데 이 비둘기 속의 고양이에서는 불스트로드 교장이 바로 그런 캐릭터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고정된 시선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진정한 교육자라는 생각이 든다.

전통을 지키지만 현실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전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뛰고 나는 현재의 추리 소설 보다 은근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은근한 매력 때문에 고전 추리 소설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뼈 때리는 반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읽고 나서 한참 뒤에도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그녀의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거 같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는

혁명, 암살, 살인, 납치, 스파이 그리고 보석.

거기에 양념처럼 곁들여진 인간의 욕망과 신념 등이 잘 버무려진 '맛'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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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난히 좋아지는 어떤 날이 있다
김리하 지음 / SISO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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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인생의 고비들이 내 삶을 휘청거리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온갖 변명을 둘러댔다.

 

요즘 마음 앓이 중인데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심드렁하게 느껴지는 중이다.

자연히 독서도 그렇고 생활 모든 것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하고 지내고 멍 때리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사실 리뷰도 안 써지고 책도 진도가 안 나가서 모든 관계(?)를 중단하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숨어지내고 있는 시간이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시간을 보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그런 시간들에 쉬엄쉬엄 길어 올린 마음들이 담겼다.

남의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진 마음 다독임을 읽으며 나를 다독이는 시간을 갖는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우연하게 내 상황에 알맞은 책들이 저절로 내게 오는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런다.

나도 모르겠는 나의 마음.

자꾸 미워지는 나 자신.

자꾸 하게 되는 후회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

그저 무기력하고,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인데 이 책에 담긴 글들이 내 마음을 읽는 거 같았다.

 

 

물욕이 사라진 마음인데도 문구류 앞에서만은 그 마음이 무너지는 모습.

내가 아는 것을 상대방도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하는 지식의 저주.

혼자 독서하다가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쁨.

무심하게 흘려보낸 일상들에서 문득문득 깨닫게 되는 삶의 의미들.

이 책엔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내 안에서 꺼내 쓰는 수밖에 없다. 틀리든 맞든 내가 아는 바를 있는 그대로 기술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에게 맞는 내 답안지를 작성하다가 그 안에서 갈팡질팡, 우물쭈물하는 모든 순간이 실은 나에게 가장 알맞은 답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그렇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또 다른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뭐 좀 알만한 이 나이에 걸맞게 살아가자고 마음먹어본다.

인생의 답은 내 안 깊은 곳에 있는데 자꾸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니 답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 글을 읽는 시간 동안 찾아왔다.

다들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슷한 것들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공유하며 살아가게 된다.

 

 

내가 유난히 좋아지는 어떤 날이 있다.

이날은 내가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잠깐 찾아낸 날이 아닐까 싶다.

세상사에 가려져 저 아래 깊이 묻어 두었던 나.

이제 그 자아가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꽃 피고 싶어서 나를 침잠시키는 거 아닐까?

 

 

좋은 책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를 깨닫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게는 답답한 마음 한켠이 조금 덜어내지는 그런 글들이었다.

 

 

봄날.

마음이 맥없이 쳐져 있었는데

나보다 앞서 걷는 이의 글이 다독다독거려준다.

이제 마음에 아지랑이를 피우고 꽃처럼 기지개를 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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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이야기
메이 싱클레어 지음, 송예슬 옮김 / 만복당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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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오스카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남자로 인해 지루함을 느꼈다. 오스카 역시 헤리엇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로 인해 지루함을 느꼈다. 막힌 공간 안에서, 매일매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실로 대단한 지루함을 안겨주었다.

 

7개의 단편이 모두 기이한 현상을 이야기한다.

사후세계, 죽은 자의 영혼, 초자연적인 힘, 유령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로테스크한 그림들과 함께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하게 만든다.

 

상당히 철학적인 느낌을 받은 <절대적 세계의 발견>은 죽은 스폴딩씨가 자신을 마중 나온 아내와 친구를 보며 그곳을 지옥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불륜을 저지르고도 천국에 있었다. 스폴딩은 자신이 지옥이 아닌 천국에 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들이 천국에 온 까닭은 "아름다움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천국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꾸밀 수 있었고, 우리가 지옥으로 알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이후의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을 거 같아서 흥미롭게 읽혔다.

 

<희생자>는 21세기 범죄소설의 원조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약혼자가 떠난 이유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노신사의 조언 때문이라 생각한 스티븐은 그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자신의 범죄를 감쪽같이 은폐한다.

교살한 것도 모자라 목을 그어 피를 뺀 후 토막을 내어 채석장 굴에 버린다.

이 끔찍한 살해 이후 모든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꾸민 후에 그는 자신의 살인을 점점 잊어간다.

그가 보통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던 중 노인의 유령이 그를 찾아오는데...

 

<증거의 본질>

사랑하는 아내의 사후 재혼을 한 마스턴은 죽은 아내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 하는 걸 본다.

죽은 아내는 참한 여자와 결혼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와 결혼하면 그 반대가 될 거라고 생전에 말했다.

마스턴은 그저 육체적인 용도(?)로 결혼을 했고 그러자 그때부터 죽은 아내의 유령이 출몰하여 그들의 합방을 방해한다.

그러길래 괜찮은 여자를 골랐어야지. 마스턴!

 





그동안 애거사는 가엾은 밀리를 탓했었다. 하지만 밀리의 간섭과 하딩의 집요함을 극도로 위험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애거사 자신의 결점이었다. 결점만 없었어도 그들이 애거사 내면의 가장 깊은 평온까지 침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비한 힘이 그들을 막아주었을지도 모른다.

 

 

약간 정신과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 <크리스탈의 결점> 꽤 긴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쩜 애거사는 21세기에선 정신과 의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와 그들의 정신을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으로.

신비한 힘으로 표현된 그것은 순수한 크리스탈이어야만 품을 수 있었는데 애거사에겐 결점이 있었다.

약간의 사이코적 공포감과 함께 정신 분석학적인 이야기가 마치 미스터리 드라마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이 단편들을 읽으며 죽음 이후의 세계와 유령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찌감치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던 메이 싱클레어의 솜씨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분은 어떤 세계에서 사셨길래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처음엔 쉽게 몰입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길게 풀어 하는 이야기가 짧게 끊어가는 이야기에 길들여진 내 눈에 조금 늘어지는 감을 주었다.

하지만 읽어가다 보면 그런 이야기 방식이 이미지를 더 극대화하고 상상력을 더 자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좀 더 풍부하게 싱클레어가 그린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고전적인 색다름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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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서가명강 시리즈 15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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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작들은 각기 자신의 시대에 중요했던 사회문화적 이슈들을 그 시대에 재미있다고 여겨졌던 방식에 따라 풀어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명작들은 그 재미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일찍 문학의 '맛'을 알았다.

내가 섭렵했던 고전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영양분으로 내 무의식에 남아 있다.

고전을 어렵다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자극적이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지금

간간이 재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고전들이 있다.

이 책은 데미안, 변신,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통해 독일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데미안은 오래전에 읽었고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작년에 재독을 했고

카프카의 글들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헤세가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보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인간관과 세계관, 가치체계가 붕괴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 가치체계가 자리를 잡지 못한 혼돈 상태가 이어졌다. 개인의 삶으로 비유하자면 교육을 통해 배운 부모 세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유 없이 거부하지만, 아직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현대 유럽 문명의 '사춘기'와도 같은 시기가 바로 유럽의 세기전환기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난 <<데미안>>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지금도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막연한 동경과 설레임을 느낀다.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데미안을 세상에 내보낸 헤세는 전쟁으로 그전의 가치관이 무너진 세상에 나름의 처방전을 썼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길을 찾으라는 헤세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깃발을 꽂았다.

 

독일 문학은 괴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한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내게 낯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더 익숙하고 더 시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진짜를 알고 나면 슬픔과 고통 사이에 느껴지는 간극이 크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오래전에 읽었고, 얼마 전 재독 한 베르터는 내게 다르게 읽혔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나서 베르터의 고통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대 상황과 그 나라의 문화를 알아야 고전이 제대로 읽힌다는 걸 또 한 번 배웠다.

 

내가 실패한 고전 중에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있다.

읽다가 끝도 없이 중복되는 이름들 때문에 포기했는데 그 이유를 오랜 세월이 흘러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모르면 그 나라의 문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미문학은 잘 읽을 수 있지만 그 외의 나라들의 작품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그 나라들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요전에 카프카 전집을 읽으면서 참 많이 갑갑했었다.

내가 읽고 느끼는 것들이 제대로 읽고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리뷰를 쓰면서도 나는 나를 믿지 못했었다.


 

개인적으로 카프카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설명할 때 보통 이렇게 이야기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입구도 여러 개이고, 출구도 여러 개인 미로와 같다."



이 문장이 위로가 되었다.

카프카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답은 각자의 느낌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는 접해보지 못한 작품이고 작가였다.

책은 책으로 이어진다.

내게 호프만스탈을 만나야 할 숙제가 주어졌다.

 

어렵고, 고리타분하고, 예전에 읽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미뤄두었던 고전 읽기가

지금 이 시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새로운 환경 안에서 1년을 지낸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위한 가치관 정립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 것에서 새것을 찾아야 하는 이 시기에 고전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가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싱클레어들에게 고전은 진정한 데미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고전을 느리게 읽으며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면

지금 방황하고 있는 싱클레어같은 마음이 카프카의 혼돈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 고통을 감수해낼지도 모르겠다.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고전은 우리가 그들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이제는 그들의 지혜를 이해해야 하는 시간이니까...

 

 

 

* 21세기북스의 협찬을 받았으나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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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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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자키에게서 북유럽의 향기가 난다!

 

 

 

 

 

의뢰인 모치즈키 고이치를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하라 료.

나에게는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었던 작가다.

왠지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이 느와르풍이라서 기억에 남았던 하라 료의 작품을 나는 이제야 읽었다.

<<지금부터의 내일>>은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의 두 번째 작품이다.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와자키.

전 파트너 와타나베가 죽은 지 오래지만 간판을 바꾸지 않고 탐정 일을 계속하는 중이다.

의뢰건은 늘 시시콜콜한 일들이고 그나마 건수도 별로 없는 어느 날.

'신사'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남자가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방문한다.

근처 밀레니엄 파이낸스 지점장 모치즈키 고이치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어느 요정의 주인 히라오카 시즈코의 신변 조사를 의뢰한다.

 

 

 

의뢰인이 아니다. 그것이 내 첫인상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수입도 많고, 세상 모든 일에서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만 같았다. 탐정 업무라면 내가 더 낫겠지만, 탐정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사람으로 보였다.

 

 

웬만해선 연락하지 말 것.

어쩔 수 없이 연락해야 할 경우 명함 뒤에 있는 집으로 연락 달라는 모치즈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 말고 자리를 뜬다.

맡고 있던 사건이 의외로 일찍 끝나게 되자 사와자키는 모치즈키의 의뢰를 앞당겨 수사한다.

그리고 히라오카 시즈코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치즈키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닿지 않고 하는 수없이 그의 직장으로 찾아가지만 그곳에 2인조 강도가 침입한다.

 

 

의뢰인 모치즈키는 사라지고

2인조 강도는 강도질에 실패하고

사건을 맡은 형사 니시고리는 사와자키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린다.

 

 

뭔가 화끈한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조마조마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홀연히 사라진 모치즈키를 찾는 사와자키는 의문의 미행을 당하고

과거의 무언가가 아직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니시고리는 사와자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동네 폭력배들까지 사와자키를 찾아온다.

게다가 혹시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냐고 사와자키를 떠보는 청년 가이즈와 낡을 대로 낡은 건물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까지.

사와자키의 주변은 어수선하기만 하고 의뢰인은 감감무소식이다.

도대체 모치즈키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드보일드란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문학에서는 '비정. 냉혹'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불필요한 수식 일체를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수법의 하드보일드.

그래서인지 지금부터의 내일을 읽는 내내 뭔가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흑백 영화를 보는 느낌이 점점이 커지면서 읽은 페이지가 쌓일수록 내 방안 가득 담배 연기가 자욱해졌다.

장면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담배연기가 이상하게 감각을 자극해서 나를 이야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사가라 오라버니가 사와자키 씨에게는 허세를 부려도 안 되고, 거래는 더 안 되고, 거짓말은 절대로 안 된다더군요.

 

 

사와자키를 알지 못해도 이 문장 하나로 그가 어떤 탐정인지를 알게 해준다.

발로 뛰고, 화려한 액션과 총질이나 칼부림이 없어도 이 이야기는 자꾸만 손이 간다.

일본 형사물에서 빠질 수 없는 잔혹한 장면이 없어도 자꾸만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사와자키에게서 오슬로의 해리 홀레를 떠올렸다.

어디에 그 두 사람을 엮을 수 있는 게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읽는 중에 계속 홀레가 생각났다.

사와자키는 누군가를 잃지도, 사악한 살인자를 대하지도, 처참한 살인 현장과 맞닥뜨리지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지만

그에게서 홀레의 그림자를 느끼게 되는 이유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유머 코드가 숨겨져 있어서일까? 읽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한 편의 코미디 같아서 어이없고, 유치해서.

 

 

 

거리의 불빛이 어둠과 경쟁하는 탓에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고 없는 것이 보이는 듯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문득 만나게 되는 문장 앞에서 하라 료라는 작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는 14년 동안 이 하나의 작품을 썼다.

아마도 웬만한 장르소설에 닳고 닳은 내 감정이 이 아무런 트릭 없는 무방비 상태의 작품 앞에서 자꾸만 갸웃거리게 되는 이유가 그 세월에 있지 않을까?

14년을 들여 만들어 낸 장면들엔 우리가 무심코 읽어 내려도 온몸에 스밀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담겨 있다.

그것은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의 내일>>은 사와자키의 14년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사와자키를 알고 그를 기다려온 독자들의 시간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이 작품이 하라 료를 읽는 처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에 남는 이유를 그 세월에서 찾고 싶다.

공들인 작품은 그 가치를 독자들이 알게 된다.

오래 기다린 독자들은 물론. 그를 처음 만나는 독자들도 알게 되는 건 바로 세월 속에 묻어 둔 이야기들이 장면마다 점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쓰고 지웠을 그 시간들의 수고로움이 담배 연기처럼 자욱하다...

 

 

하라 료의 이전 이야기들을 찾아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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