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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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에서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다는 것은 선물이다.



루시 바턴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는 루시가 윌리엄과 함께 뉴욕에서 메인주로 옮겨가 그곳에서 생활하며 겪는 여러 가지 일들과 마음의 깨달음이 담겼다.

팬데믹이 막 시작했을 무렵 윌리엄은 가족들에게 뉴욕을 떠나라 하고 루시를 데리고 메인주로 피신한다.

크리시와 베카는 아빠의 말을 따르지 않고 뉴욕에 머문다.

홀로 텅 빈 아파트에 적응하지 못했던 루시는 윌리엄의 꼬임(?)에 잠시 피난을 가는 거라 생각하고 길을 나선다.

하지만 그 아파트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팬데믹 시절이 언제였는지, 내가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이었다는 걸 벌써 잊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바닷가의 루시>를 읽으며 그때의 광경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아주 먼 시절의 이야기 같았다.

나 역시 루시처럼 그 시절을 관통했는데 어째서 통째로 잊어버린 걸까?

루시 바턴 시리즈를 읽게 하는 힘은 뭘까?

책을 읽으며 나는 이 문장을 자주 떠올렸다.

소설 속 주인공 루시 바턴은 나이 든 작가다.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과 그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족들과 그곳을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한 문체로 적었고, 서로 깊이 통하지만 현실에선 거의 소통이 안 되었던 엄마와의 관계도 담담하게 털어낸다.

그리고 바람둥이 남편을 떠나 두 딸을 남겨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첫 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내며 노년에 들어가면서 그를 점점 이해하며 젊었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잔잔하게 그려낸다.

이제 그녀는 칠십이 넘은 전 남편과 팬데믹 상황으로 복잡한 뉴욕을 떠나 한적한 바닷가 마을로 피신을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년의 두려움과 한순간에 빼앗긴 생활의 모습을 마치 산책자처럼 그려낸다.

산책하며 그려내는 풍경처럼 요란스럽지 않지만 깊게 각인하게 만드는 힘이 담겼다.

그래서 자꾸 읽게 된다.

마치 미래의 나를 그려보듯...





우리 모두 스스로가 큰 무게를 두는 사람들 - 그리고 장소들 - 그리고 사물들 - 과 함께 산다. 하지만 우리는 무게가 없다, 결국에는.




<바닷가의 루시> 안에는 코로나 시국의 미국의 모습이 담겼다.

그런 이야기들이 담담한 노작가의 필력으로 감정적이지 않게 그려져서 오히려 더 와닿았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그 힘. 그것이 바로 스트라우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널린 위험한 죽음.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웃음.

떠나라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결국 피신해야 했던 자식들.

다른 도시 사람에 대한 반감.

아는 이의 죽음.

가족의 죽음.

서로 떨어져서 손끝 하나 스칠 수 없는 안타까움.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

그런 문제들 뒤로

이웃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배려

누군가를 도우려는 친절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결정들이 훈훈하게 가슴을 적신다.

유난히 감탄사 오! 가 많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나 역시 오! 000이라고 외쳤다.

스트라우트 여사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근황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밥 버지스와 루시는 친구가 되었고, 올리브 키터리지가 나와 같이 팬데믹을 함께 겪었다는 생각을 하니 스트라우트 세계의 주인공들과 부쩍 친해진 느낌이 든다.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의 '다름'을 이혼한 후에 알게 되는 과정.

노년에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를 챙겨주다 다시 합치는 과정.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딸과 거부감을 비추는 딸.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의 깨달음을 깨알같이 그려낸 <루시 바턴 시리즈>

<바닷가의 루시>는 이제야 비로소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거리를 두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그 시절에 그녀는 전 남편이자 지금의 남편에게 작업실을 선물받았다.

성공한 작가임에도 자기만의 공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루시.

윌리엄 버전으로 <오, 루시!>가 나오면 어떨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루시가 나올 거 같지만 그럼에도 윌리엄에게 루시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처음부터 품어 준 사람이 루시였으니까.

그가 루시의 결핍을 품어주었듯이...

서로가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었지만 젊은 날은 젊음을 모르듯 방황하게 마련이다..

나이 들어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 이야기다.

그 사람이 내 가장 아픈 곳을 품어주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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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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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레나는 살해된 동생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강령술로 유명한 보델린의 제자로 들어갑니다.

평소에 강령술에 관심이 많았고, 고집스러웠으며 영혼이 있다는 걸 믿었던 에비에 반해 레나는 과학을 믿었습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인 성격이죠.

에비와 싸운 날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에비와 화해를 하려고 에비를 찾다가 그녀의 죽음과 마주친 레나는 동생 죽음의 배후를 파헤치고자 동생의 스승이었던 보델린을 찾아 프랑스로 가서 보델린의 제자가 됩니다.

강령술.

죽은 영혼을 부루는 의식이죠.

영화 <사랑과 영혼>이 이 강령술을 잘 이해시켜주는 영화랍니다.

죽은 페트릭 스웨이지의 영혼이 깃든 우피 골드버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이 작품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레나의 동생 에비와 런던의 유명한 강령술 협회의 회장 볼크먼이 한 날 한 시에 살해됩니다.

해결되지 않는 사건 때문에 뒤숭숭한 분위기에 협회의 추문을 막기 위해 볼크먼의 죽음을 해결해야 하는 부회장 몰리는 프랑스에 있는 보델린을 불러 볼크먼의 강령회를 열기로 합니다.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먼, 순진한 아이였다고 믿었던 동생을 잃은 일만으로도 더없이 힘들었다. 그런데 에비는 사후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좋게 말하면 사기꾼, 나쁘게 말하면 범죄자였다. 아주 질 나쁜 친구를 사귄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레나와 강령회 협회 부회장 몰리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레나는 동생의 죽음을 캘수록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죠.

몰리는 볼크먼의 죽음을 해결하고 강령회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을 잠재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레나가 에비의 언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죠. 몰리와 에비는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요? 강령회 협회엔 남자들만 회원자격이 있는데 말이죠.



이는 진실과 환상이 충돌하며 사람의 혼을 빼놓는 사업이었다.

영혼은 정말 있는 걸까요?

옛날에 친구들하고 분신사바 같은 걸 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변에서 귀신을 봤다는 사람도 있어서 저에게 귀신이나 영혼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걸로 느껴집니다.

이 세상이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눈에 보이지만 않는다면 저는 공존을 택하겠습니다^^

몰리와 레나의 이야기가 번갈아 이어지면서 강령회를 둘러싼 비밀들이 드러납니다.

게다가 레나에게는 혼자만 간직하는 비밀이 있죠.

그 비밀을 공유할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을 긴박감 있게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좋네요.

그 시대에도 기가 막힌 사기꾼들이 판을 쳤네요.

21세기 사람들도 울고 갈 사기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볼크먼의 강령회에서 레나는 에비의 영혼에 빙의됩니다.

에비의 영혼은 왜 그곳에 나타났을까요?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 궁금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남아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반전이 없을 거 같았던 소설의 반전을 온전히 즐겼습니다.

나쁜 놈은 벌받는다는 권선징악도 철저하게 지킨 이야기 <런던 비밀 강령회>

슬픔과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기 치지 맙시다!

그 벌 고대로 받게 됩니다~

이렇게 끝나는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레나!

아주 끝내주는 죗값을 생각해냈네요.

강령술이 진짜라면 죗값 치르지 않고 편하게 죽은 범죄자들 죄다 불러 모아서 레나에게 벌 주라고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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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중세 유럽 역사
신성출판사 편집부 지음, 야스시 스즈키 그림, 전경아 옮김 / 생각의집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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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하면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기사, 종교전쟁, 교황, 십자군, 흑사병 저는 이런 단어만 떠오릅니다.

그저 전쟁의 연속이었다는 느낌과 마녀사냥으로 기억하는 중세 유럽의 역사!

이 책은 일본 신성출판사의 편집부에서 만든 책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만든 책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일러스트 삽화와 사진을 곁들인 책은 다양한 중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중세의 영웅들, 신화와 전승, 농촌의 모습, 도시의 모습, 기독교회, 국왕과 영주, 환상 속 동물과 괴물 등을 짤막하게 요약한 책입니다.

중세의 영웅들은 이름만 들어도 익히 우리가 아는 분들이지만 저는 엘 시드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어딘가에서 들어 본 이름인 엘 시드는 스페인의 영웅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려 했죠. 카스티야 왕국 산초 2세의 시동이었던 엘 시드는 수많은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지만 산초 2세 사후에 즉위한 알폰소 6세 때 간신들의 모략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추방됩니다.

그래도 무어인을 공격해서 얻은 전리품을 왕에게 계속 보냈네요.

그렇게 힘을 비축한 시드는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비로소 알폰소 6세와 화해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도로 데려옵니다.

시드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대항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중세의 물레방앗간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영주가 물레방앗간을 만들어 놓고 농민들에게 사용하게 하고 사용료를 받았지요.

맷돌이 있어도 물레방앗간을 사용해야 하는 그 느낌 아시죠?

이런 제도를 바날리테라고 합니다.

좋은 제도를 이렇게 강압적으로 사용하니 농민들이 눈물을 흘릴밖에요 ㅠ.ㅠ






중세 사람들의 의복은 영화를 통해서 많이 봤는데 중세 의복의 기본은 튜닉입니다.

저도 한때 튜닉풍의 옷을 자주 입고 다녔는데 레깅스 위에 입어서 민망함을 감추는 용도로 자주 입었습니다^^

이 튜닉이 중세의 기본 의복이었다니 역사가 꽤 오래됐네요.

중세에 최초로 상인 길드가 생겼습니다. 좋은 거 같은데 독점이었네요~

하지만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고, 도로와 시문의 장비 비용을 기출하고 도시 경비 등의 역할을 도맡아 했으니 길드가 하나의 자치단체라고 봐야겠네요.

14세기에 들어서면서 푸줏간 주인이 우체부를 겸비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중세의 형벌은 참 잔인했는데 보이기식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라네요 ㅠ.ㅠ

마녀사냥만 봐도 살아있는 여자를 불태워 버렸으니 그 잔혹함은 말해 뭐 하겠어요..

간통한 남자는 거세를 했데요~

상해죄를 지은 사람은 손과 발을 절단했고, 가벼운 절도죄는 손가락을 절단했고, 돈을 위조한 사람은 얼굴에 낙인을 찍었다고 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은 바로 중세의 환상 속 동물과 괴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나 소설 속의 판타지 한 동물이나 괴물은 거의 중세 시대에 많이 알려진 존재들입니다.

용, 가고일, 크라켄, 골렘, 바실리스크 등등 영화나 판타지 소설 속 괴물들이 모두 중세의 환상 속에서 나왔네요.

근데 유니콘은 실존했던 동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유니콘 뿔에 해독 효과가 있다고 해서 그 뿔로 만든 잔을 원한 권력자들이 많았답니다.

아마도 그래서 멸종한 거 같아요~

유니콘은 순결한 처녀를 보면 넋을 잃고 다가가 무릎에 머리를 맡기고 잠든답니다.

그래서 처녀들이 유니콘을 잡는 미끼로 많이 쓰였데요.

그 외에 많은 괴물들과 전설의 동물들이 담겨있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중세에 대한 지식을 짧고 쉽게 알려주는 <그림으로 보는 중세 유럽 역사>

복잡한 설명 없이 간결하게 필요한 이야기만 간추려놓은 책입니다.

중세의 모든 면모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책을 읽는 동안 중세에 대해 몰랐던 게 많았다는 걸 깨달았네요.

어느 시대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있는 건데 그저 기사도와 종교전쟁만을 생각해왔던 저의 무지를 일깨워 준 교과서 같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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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 - 이소플라본 연작 기담집 구구단편서가 13
이소플라본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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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처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나무와 같은 몸이 좋을테지. 오백 년 후에 들을 네 답을 기다리겠다.



오컬트 전문 심부름센터엔 키 190이 넘은 장승같은 사장 혜호와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처리하는 승환이 있다.

그리고 사무실엔 거의 들리지 않고 밖에서 사장의 일을 돕는 철규와 신묘한 신기와 영험함을 지닌 부적을 쓰는 신녀가 있다.

이 네 사람이 꾸려가는 오컬트 전문 심부름센터엔 다양한 사람들이 황당하거나, 괴이한 사연을 들고 찾아온다.

사람을 주술로 묶어 영원히 일하게 하는 마을

자식의 죽음을 미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 어미.

아이 못 낳는다고 구박받던 며느리는 도깨비의 자식을 납치하고,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아를 데려다 신내리를 시킨 무가 등등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을 겪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황금가지 브릿 G에서 전자책으로 나온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은 연작 기담집이다.

16편의 이야기가 담긴 이 작품의 작가는 이소플라본. 데뷔작인데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선보인다.

<신은 인간을 사랑할까?>

온갖 신들이 주는 잡다한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오컬트 심부름센터.

저주에 걸리고, 주문에 걸리고, 신의 노여움에 걸린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을 괴롭히는 '뭔가'를 찾아 사건을 해결하는 이 심부름센터의 하루하루는 바람 잘 날 없다.

우리의 민속신앙과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을 엮어 기이하지만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소플라본 작가는 우리나라 오컬트 장르의 대가 박해로의 뒤를 잇는 작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심부름센터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가는 것도 재밌지만 이 심부름센터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마주하는 일이 더 재밌다.

각자의 사연들이 밝혀지는 지점에 이르면 이들과 헤어지기 싫어질 정도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연작 시리즈를 관통하는 건 신이 과연 인간을 사랑하는가?이다.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째서 신은 인간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는가?

어째서 인간을 시련에 들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고, 그리고 벌을 주는가?




소원을 다오.

내게 소원을 빌어 주겠느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 어딘지 달라 보이는 특이한 돌, 좋은 소식을 물고 온다는 새, 맑고 투명한 샘물 등등 뭔가 특별해 보이는 자연에 대해 소원을 빈다.

그 소원으로 태어난 신들은 소원을 먹고 산다.

그러나 인간들은 점점 자연에 소원을 빌지 않는다.

인간의 염원으로 신이 되었으나 점점 굶주리는 신들은 그 굶주림을 참지 못해 점점 사특해진다.

두억시니, 어둑시니, 금란장, 바리데기, 동수자, 영노 등등

들어는 봤지만 어떤 존재인지 몰랐던 이름과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주는 효과가 아주 탁월한 이야기였다.

오컬트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이들의 사연이 의뢰인들보다 강렬했고, 인간의 소원을 구걸하는 작은 신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연휴 동안 짬짬이 읽었던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은 나에게 새로운 장르의 문을 열어 준 거 같다.

해외 오컬트가 어딘지 모르게 공포를 조장하는 이야기라면 우리 오컬트는 어딘지 모를 짠함과 인간미와 다정함을 곁들인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으려 500년을 인간 세상에서 보냈던 이보다

그의 곁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이에게서 듣고 싶은 답을 들은 신의 웃음.

죄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게 마련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벌이 없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신은 절대 죄악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신들의 꽃밭에도 악의 꽃은 핀다.

모든 악은 그렇게 숨어서 피어난다.

그러니 신조차도 그것을 다 막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무기인 것이다.

모든 게 우리의 선택이다.

어떤 걸 선택하든 우리에겐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 선택권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그것은 그 어떤 신도 막을 수 없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 듯..

인간의 세상이 변해가면 옳고 그름도 달라진다는 걸 신들은 알고 있음이다.

그것이 그들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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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일 - 매일 색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컬러 시리즈
로라 페리먼 지음, 서미나 옮김 / 윌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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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집에서 칩거만 하고 있었더니 모든 감각이 둔해졌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였다.

외출할 때 입는 옷부터 시작해서 화장법까지 다 까먹은지라 외출할 때가 되면 초 초해졌다.

색 매치도 어렵고, 내가 지니고 있던 감각도 사용하지 않으니 사장된 느낌이었다.

주변에 그림 그리는 친구와 동생들이 있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색에 대한 무지하다는 걸 느꼈다.

같은 것도 어떻게 매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내가 제일 잘 사용하는 기능이 '책 사진' 찍는 기능(?)인데 이것도 초반에 열정이 넘칠 때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매일 어떡하면 새로운 사진을 찍을까를 연구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시들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색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와 동생은 색을 잘 다룬다.

그들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비슷한 그림들과 비교했을 때 색감이 다르다.

같은 재료를 써도 그들이 표현해 내는 색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좀 더 고급스럽고, 안정적이면서 세련된 느낌.

그건 바로 색을 잘 다루는 그들의 솜씨에 있었다.






윌북에서 출간된 <컬러의 일>의 저자 로라 페리먼은 세계적인 컬러 브랜딩 전문가다.

그가 말해주는 100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색에 대한 감각을 키워본다.

초반부는 색에 대한 기초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기초지식 뒤에 오는 이야기가 맘에 들었다.

100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 색에 대한 이야기였다.

말하고자 하는 색과 매치되는 그림이나 사진과 함께 과거에서의 쓰임과 현재의 쓰임을 비교해두었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짧은 코멘트가 달려있다.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색상 코드다.

색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색을 써보고 싶은데 눈으로 보면 그 색이 그 색 같다.

조금 다른 차이는 있지만 그걸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 책엔 100가지 색의 색상 코드가 담겨 있다.

즉 색상 코드를 알면 컴퓨터 화면으로 그 색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색이라도 미묘하게 다른 색으로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색.

그 색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섞이는 색.

그 다름에서 개성이 돋보이게 되는 색.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도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색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

몸에 지닌 소품의 색 하나로 돋보임을 만들어 낼 줄 안다면 진정한 멋쟁이가 되는 것이다.

컬러를 공부하면서 잊고 있었던 감각을 깨우는 느낌이 들었다.

색마다에 담긴 고유의 이야기를 읽으며 비슷한 색들을 모두 한 가지 색으로 퉁쳤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지금 글을 쓰며 내가 내다보고 있는 창밖엔 한 그루 나무가 있다.

그 나무에 달린 수많은 잎은 똑같은 색으로 보이지만 서로 다 다르다.

이젠 그걸 알 거 같다.

그림을 그릴 때도 나는 단순하게 나뭇잎은 초록색 한 가지만 썼었다.

내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들 때문에 색을 섞는다는 생각을 못 했었다.

이젠 다양하게 섞어 볼 수 있을 거 같다.

색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색은 자유롭게 섞일 수 있다.

어떤 색으로 섞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색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도 색처럼 변화무쌍하게 변할 수 있다.

어떤 색이 어떤 감정이나 심리를 담고 있다고 고정하고 싶지 않다.

내게 안정을 주고, 내 심리를 다독이는 나만의 색을 만나면 그게 곧 나의 색이 될 거니까.

한때 나는 빨강을 나의 색이라고 생각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빨강 립스틱으로 화장한 티를 냈었다.

이젠 그 빨강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더 이상 빨강이 어울리지 않는 나에게 어떤 색이 어울릴지 찾아봐야겠다.

옷도, 립스틱도 어색한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색을 찾아봐야겠다.

시행착오를 거쳐야겠지만 그 시간은 분명 즐거운 시간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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