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코스트 마티니클럽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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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은퇴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제 일터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 중에 <죽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라는 작품이 있다.

은퇴한 FBI가 과거에 매듭짓지 못한 사건으로 인해 평화로운 은퇴 이후의 생활을 방해받는 이야기다.

<파과>의 조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주인공 브리짓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던 작품이었다.

돌아온 테스 게리첸의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첫 페이지부터 긴장감을 느껴야 하는 독자는 끝까지 그 긴장을 놓지 못한다.

한적한 메인주의 퓨리티 마을에 정착한 매기는 그곳에 친구들이 있다.

모두 CIA에서 은퇴한 사람들이다.

각자의 비밀을 깊게 감춘 채로 은퇴자의 생활을 조용히 보내고 있는 그들 앞에, 아니 매기 앞에 사건이 찾아온다.

누군가 그녀의 집 앞에 그녀를 찾아왔던 요원의 시체를 놓고 갔다.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시체.

마을 경찰서장 대리 조는 젊은 날의 매기를 빼다 박은 모습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즉석에서 결성된 마티니 클럽 친구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제일 잘하는 일을 해서 매기를 도우려 하지만 조의 의심만 살 뿐이다.

하지만 매기에겐 친구들도 모르는 과거의 비밀이 있었고, 이제 누군가 그 기밀을 빼돌려서 그 작전에 참여했던 요원들을 죽이려 들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악령이 매기를 찾아왔다.

16년 전 그 사건의 전말을 누가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세 명의 늙은 스파이가 아직 자신의 능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만큼이나 슬픈 일도 없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졌던 은퇴자들은 젊었을 때 누리지 못한 평화와 안락함을 가졌지만 끝없이 자신들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

60세 이상의 이 은퇴자들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지만 그들의 명석한 두뇌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미행도 힘들고, 도망치는 건 더 힘들다.

싸움도 그들에게는 힘겨울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베테랑이고 그들에겐 경험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상에서 쓰이지 못하고 감춰야만 하는 기술이다.

스파이라는 직업군 사람들의 노년은 어떤 걸까?

수많은 스릴러 소설 속에서 만난 젊은 그들은 무적이었다.

나는 한 번도 그들의 노년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테스 게리첸이 창조해낸 마티니 클럽의 은퇴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무궁무진한 인생 경험에서 길어올릴 이야기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게리첸은 자신의 새로운 작품의 주인공을 은퇴자들로 정한 게 아닐까?

탄탄한 필력이 뒷받침해 주는 스릴러는 읽는 맛이 남다르다.

과거와 현재가 오고 가는 이야기지만 헷갈림도 지루함도 없다.

오히려 매기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와 스파이로 살게 되면서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갈망이 더 깊게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다.

사실 읽어가면서 범인을 예상했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예상됐지만 그 예상이 맞았어도 전혀 싱겁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반가웠고, 앞으로의 일로 이어질 떡밥을 남겨둔 거 같아서 즐거웠다.

마티니 클럽의 은퇴자들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정말 기대된다.

내가 상상해 본 적 없는 은퇴한 노년의 스파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궁금해서 못 참겠다!

영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드라마로 만날 마티니 클럽 회원들이 기다려진다~

젊지 않아서 더 쫄깃한 스파이 이야기~

<스파이 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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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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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은 본질적으로 집안싸움이죠. 인간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이야기를 읽으며 멍해진다.

이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단요라는 특이한 이름의 작가.

내가 처음 읽는 작가의 글은 초반의 흡입력으로 인해 멋진 사이비 스릴러의 느낌이었다.

도박에 빠져 허우적대는 30대 남자. 최우혁

그를 도박의 세계로 인도한 김 형의 속죄로 우혁은 김 형의 학원에서 잡일을 하며 갱생(?)의 시간을 누리던 찰나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은 우혁을 되살렸던 소년과 마주치게 된다.

세월을 비껴간 소년은 나이 들지 않은 모습으로 우혁의 눈앞에 나타나 자신을 도망시켜달라고 한다.

이상한 집단에 쫓기던 소년이 우혁이 몸담은 지 며칠 안된 학원으로 도망친 건 우연일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학 타임~


소년은 분명 기적을 행할 줄 알았다. 그러나 권능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백치 같은 면모를 보이곤 했다. 초등학생만큼이나 단순한 사고방식과 기묘할 정도의 지혜가 공존한다는 평가가 알맞았다.



이 미지의 소년 이도유는 예수가 맞을까?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닌지라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의 초반까지는 신나게 읽었지만 그 이후로는 이해하며 읽느라 시간이 걸렸다.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깊거나 얕게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그러면서 호기심도 강해졌다. 도대체 어떤 작가이기에 이렇게 심오할 수가 있을까?

사회 부적응자이자 도박 중독자인 우혁을 통해서 사이비 종교와 세상의 종말을 논하고, 그를 도박의 세계로 이끈 김 형을 통해 의리와 속죄와 책임감과 돌봄(?)을 추구하다니 도대체 이 작가의 정체는 뭘까?





나는 인간에게 풍요와 자유를 안겨다 줬다 ㅡ 심지어 나를 욕보일 자유마저도.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끊임없이 불행해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를까?



두 번의 기적을 겪은 우혁.

두 번 부활한 우혁은 세상의 멸망을 환각을 통해 본다.

1999년 12월 31일은 멸망의 날이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가 2000을 인식하지 못해서 세상이 멈출 거라 했다.

다양한 방식의 종말론이 판치던 세기말.

그 당시 벌어졌던 집단 자살 사건이 이 이야기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치 작가가 그 이야기의 목격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님 잠입 취재를 했나?

빈틈을 찾으려야 찾기 힘들었다.

어쩜 내가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못 찾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우혁과 조강현의 대화에서, 우혁과 김 형의 대화에서 다뤄지는 신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같이 읽고 토론하면 수많은 의견들이 오고 갈 거 같다.

우혁에게 기적을 일으킨 소년 이도유.

그를 쫓는 조강현과 새천년파.

그 사이에 낀 우혁은 소년 이도유의 탈출을 돕는다.

우혁은 이 세상의 종말을 멈출 수 있을까?


나는 대신 세상에 기대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 이 세상이 정말로 고통뿐이라 해도, 그 고통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우혁은 김 형의 학원에서 전임강사를 맡는다.

예수님과 종종 대화를 하게 된 우혁은 이 세상의 새로운 감독이 된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집안싸움에서 비롯된다면 아이들의 유년기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진정하고 싶은 말일 거라고 짐작해 본다.

정신의 세계 어딘가에 있는 심오한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이것이 소설임에도 어딘가 감독이 존재할 거 같다.

어쩌면 우리 사이에 섞여서 작은 기적을 일으키며 사람들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하늘의 눈이 된 우혁은 잠시 멈춰둔 종말의 시계를 다시 감아버릴 수도 있다.

나는 종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걸 막고 싶은 사람일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라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답답한 세상이 계속된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겠지.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몰아가는 거 같아서 걱정스럽지만, <피와 기름>처럼 분명 세상의 멸망을 지켜내는 이가 있을 거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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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늘
고광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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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을 당할 때마다 궁형 다리 밑에서는 비명과 통곡과 절규 속에서 수십 구의 시신이 발생했다. 개울은 시신에서 나온 선지피로 더욱 검붉게 변했다. 걸쭉해진 핏물은 흐르지 못하고 고여 굳어졌다.

피난민들은 시신을 방패 삼았다. 죽은 자의 시신을 끌어다가 자신의 몸뚱이를 덮거나 쌍굴 입구 쪽으로 밀어놓았다. 부모들은 각자의 어린 자식들을 감싸 안고 자신들의 등을 입구 쪽으로 돌린 채 웅크리거나 엎드렸다.



노근리 사건.

역사 교과서 근현대사에 한 줄 정도 적혀있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 4.3 사건을 <순이 삼촌>과 <작별하지 않는다>로 배워야 한다면 노근리 사건은 바로 <붉은 그늘>로 배워야 한다.

부끄러운 현대사를 나라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작가들의 이야기로라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쌍굴다리 학살 만행은 26일 정오부터 29일 새벽까지 사흘에 거쳐 60시간 동안 자행됐다. 60여 시간 동안 쌍굴다리를 앞뒤로 포위한 채 500여 명의 갇힌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단 한 명이라도 살아서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붉은 그늘>은 그 시대를 관통해온 한국인과 미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통해 우리의 역사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사실들과 실존했을 거 같은 살아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양민 학살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미군 하지스와 바커를 통해 미군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베테랑 군인들을 모두 제대 시키고 초짜들로 일본에 머물며 승리국으로서의 자유를 누리다 벼락같이 터진 한국전쟁에 참여했지만 전투 경험도 별로 없는 군인들과 급하게 투여한 자격 없는 군인들로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북한군을 맞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피난민들을 앞세워 남쪽으로 밀리다 결국은 자신들로 인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난 대열에 합류했던 대다수 일반인들 사이에 빨갱이가 섞여있다는 소문만으로 피난민들을 무차별 살상한 사건을 보여준다.

그것뿐이면 좋으련만 그 와중에 한국의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던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이미 일제에 의해 모진 수탈을 당한 이 땅에서 아군이라 믿었던 미군에 의해 또 한 번 약탈을 당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울분이 마음에서 들끓어 오른다.

도완구라는 인물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에 밀정으로 활약하다 일본이 망하자 그들의 금괴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왔으나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니 금괴를 숨기고 피난길에서 미군을 만나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보물지도를 그려주고 살아난 이 쓰레기 같은 작자가 휴전 이후 독립유공자로 탈바꿈한 억장이 무너지는 꼴을 보게 된다.

하봉자는 그 시대를 관통해온 가진 건 몸 하나뿐인 여자로서 부잣집 하녀에서 해방 후 양공주로 살다 노년에도 미군 기지에서 장사를 하며 여전히 미군을 상대하고 있다. 그녀에겐 혼혈 아들이 한 명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하지스였다.

하남득 하봉자와 하지스 사이의 혼혈아로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있다. 그는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 영수를 키우며 음악 학원을 겨우 운영하며 살고 있다. 혼혈이라 한국 사회 어디에서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다 58년 만에 만난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체포된다.

고노 마쓰오는 일본인으로 한국전쟁 때 미군의 통역병으로 일했다. 한국에서 살았던 그는 일어와 한국어, 영어가 가능했다. 미군은 그가 한국 실정을 잘 알기에 그의 말을 믿었고, 그는 바커와 하지스가 도완구에게 받은 보물지도로 금괴를 찾을 때도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미군이 떠난 한국에서 주인 잃은 금괴는 고노의 차지가 되었고 그는 그 돈으로 부산을 근거지로 대통령 박정희의 전폭 지지를 얻어 사업가로 변신 IMF를 지나며 대부 업체를 저축은행으로 바꾸어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이 등장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대한민국의 흑역사를 들여다본다.

일제 청산이 되기 전에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고 그 혼란을 틈타 일제의 앞잡이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서민들이 아닌 상위 1%를 위한 정치를 한 이 부끄러운 현대사는 그래서 역사 시간에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모양이다.

노근리

그 쌍굴다리 아래에서 사흘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시체로 벽을 쌓아 목숨을 구하려 했던 피난민들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줄까?

우리는 알고 있다.

잘 만든 영화, 드라마가

잘 쓴 문학작품이 그 어떤 도구 보다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피난가라는 미군들 등쌀에 하루아침에 터전을 버리고 남하하던 사람들이 이승만에게 속아 죽고, 미군에게 속아 죽었다.

그 죽음들은 적들에 의한 죽임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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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아드 - 황제의 딸이 남긴 위대하고 매혹적인 중세의 일대기
안나 콤니니 지음, 장인식 외 옮김 / 히스토리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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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로마 제국의 제위에 열망을 가진 국외의 많은 이를 계속해서 자극한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운명은 이 불나방들에게 낫지 않는 고통과 치유될 수 없는 불치병 같은 제국을 떠맡겼다. 횡포한 성격으로 유명한 허풍쟁이 로베르가 바로 후자에 속했다. 노르망디가 그를 탄생시켰지만, 그를 진정 양육하고 길러낸 것은 순수한 사악함이었다. 로마 제국은 이 이질적이고 야만적인 인종과 국혼을 제안하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쳐들어올 침략전쟁의 구실을 제공하고 말았다.



동로마 제국.

세계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남성 중심의 역사서만 읽다가 황제의 딸이자 역사에 조예가 깊은 여성의 손으로 기록한 역사를 읽자니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일대기를 다룬 소설을 읽는 거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다가도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안나 콤니니.

황제의 첫 딸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왕권을 남동생에게 빼앗기고 수두원에 갇혀서 사랑했던 아버지의 일대기를 적어 내려간 그 시간들.

이 역사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소년으로 동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로베르라는 인물로 인해 한시도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던 알렉시오스 황제.

1081년부터 1118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알렉시오스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던 로베르 덕에 알렉시오스는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긴다.

이미 텅 빈 국고 때문에 용병을 구하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갖은 지혜를 짜내는 어린 황제의 용기와 처세술을 보는 재미도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콤니노스 가문은 제위 계승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 그가 다져놓은 왕권에 대한 입지를 볼 때 간과할 수 없는 왕임은 틀림없다.





한편 황제의 후계자는 이미 몰래 따로 마련한 자신의 집으로 떠나 있었으니



위태로웠던 제국의 기틀을 다 잡느라 한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황제에겐 그를 뒤에서 지지하고 받쳐주는 여인들이 있었다.

어머니, 아내, 딸들.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곁을 지켜낸 이들은 아내와 딸들이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다친 발에서부터 시작된 류머티즘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그 병이 온몸으로 퍼져 결국 죽음으로 이르렀다고 이 이야기에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딸의 심정이 절절하다.

현명한 어머니 역시 남편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그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애쓰는 걸 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실제 했음을 알 수 있다.

황제와 황후의 사랑이 돈독했음을 보건대 그들의 아이들도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거 같다.

안나의 기록을 읽기 전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위해 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했었다.

자신이 일으키려 했던 쿠데타가 실패하고 수도원에 갇혀서 어쩌면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글을 빙자해 자신이 알렉시오스의 딸이며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음을 알림으로써 자식들에게 불이익을 당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나의 의구심이 마지막 몇 장에서 떨궈진다.

동로마 황제라는 지위가 참으로 많은 권력을 쥔 중세 시대의 권력자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고달픔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 나이부터 전쟁터에서 단련된 황제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다.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그의 병에 한몫을 하지 않았다 싶다.

장황한 이야기 때문에 역사서의 느낌 보다 소설의 느낌이 드는 건 역사서로 볼 때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 장황함으로 인해 황실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상황을 판단하는 눈으로 본 사실을 우리가 21세기에도 접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그 당시의 정세와, 황실 사람들의 판단력과 그들의 행실, 그리고 직접 본 그 시대의 중요 인물에 대한 평들이 상당히 주관적이지만 후세들에게는 즐거움으로 그려진다.

역사서의 짧은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는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생각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는 점에서.

주관적이지만 실존 인물을 직접 보고 묘사했다는 점에서.

<알렉시아드>는 그 가치를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가끔 어느 대목에서는 안나 콤니니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이거 실화야? 하는 느낌도 있었지만 전쟁통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뭐든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자신의 핏줄이라면 더 그런 경향이 있다는 생각으로 넘어가졌다.

역사서지만 소설처럼 읽히는 <알렉시아드>

표지는 로맨스 소설처럼 멋진데 너무 촘촘한 편집 때문에 책의 매력이 반감됨이 아쉬워다.

그래서 전자책과 병행해서 읽었다.

호기심에 읽어 보고 싶으신 분들은 전자책을 추천드리고,

눈이 젊은 분들은 종이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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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끝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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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명은 2173년 6월 16일에 종말을 맞는다.



소행성 나이팅게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인류는 핵미사일을 쏘아 소행성을 맞췄으나 그 잔해가 지구로 떨어지면서 지구는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만다.

인류가 이뤄왔던 문명이 파괴되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 일부는 살기 위해 인육을 먹기 시작한다.

백성서파에 몸담고 있던 네이선은 화이트라이더로서 백성서파가 지목하는 이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지만 아내가 목사에 의해 산 채로 불타 살해당한 충격으로 얼이 나간 상태로 10년을 보내다 친구에게 의뢰를 받고 옛날 방식의 '책'을 쓰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네이선이 식인을 긍정하는 새로운 구세주 블랙라이더를 추적하면서 쓴 그의 일대기이자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캔디선 안의 사람들은 식량을 배급받고 비교적 보호받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캔디선 밖의 사람들은 식인을 하며 옛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캔디선 안의 사람들 보다 그들이 좀 더 자유로와 보인다.



블랙라이더란 캔디선 밖에 사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 ㅡ 이를테면 식인하더라도 사람을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족을 지키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기 위해 ㅡ 그들이 새로 쓴 복음의 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라이더 네새니얼 헤일런.

폭력과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

이 소년은 구세계 희대의 식인 살인마 대니 레번워스와 함께 다니며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

네이선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식인을 하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신격화되었는지를 적어간다.

작품속 세상은 끔찍하지만 왠지 있을법한 미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류>에서 이미 아키라의 필력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 거부감 드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그의 묘사와 표현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너새니얼 헤일런이라는 인물을 멸망한 지구의 예수처럼 만들어 내는 솜씨는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오렌지주스를 꺼내면서 생각했다.

텅 빈 세계는 텅 빈 냉장고에서 슬금슬금 시작되고 있다고.



이 표현처럼 앞으로 다가올 지구의 운명을 잘 표현한 게 또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 저주를 걸지. 당신은 앞으로도 사람을 먹을거야.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될 거야."



너새니얼의 이 말은 식인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말과 같다.



어머니를 살해한 한낱 범죄자에 불과한 사람이 어떻게 신격화되었는가. 나는 무엇보다 그것을 해명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캔디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비장한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처럼, 불안정한 상태의 선택이 논란의 여지가 안 되는 시대가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엔 많은 성경 문구와 인용문들이 나온다.

이야기 속의 상황과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실험 결과를 비교한 장면은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캔디선 밖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먹지 않으면 먹힐지 모르는 상황이다.

배고픔 앞에서 식인은 이미 인류의 DNA에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식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 소년의 이야기와 멸망한 지구의 풍경과 그를 쫓던 사람이 나중에 그 소년의 일대기를 적어가는 과정은 그 모든 걸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였다.

네이선의 마지막 글들은 결국 '이해'를 말하고 있다.

다름을 선택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멸망한 세상에서조차 분열된 가치관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포용해가는 것.

그것이 작가가 현실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이야기를 읽을수록 인류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은 인류는 다시 문명을 회복해나갈 것이다.

<죄의 끝>은 멸망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현실이다. 그 현실 속에서 살다간 한 소년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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