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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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연이 아닌 거 같은데요."

"이봐,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




다카야나기 발레단 사무실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사무실에 무단 침입한 남자를 꽃병으로 머리를 쳐서 숨지게 한 발레리나 하루코.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친구인 미오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젊은 경찰의 안내를 받는다.

 

 

 

1년 전 가가는 선을 본 여자와 함게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감상했다.

그리고 흑조로 변신해 춤을 추던 미오를 보고 감동을 받는다.

그렇게 미오와 가가는 살인사건을 통해 실제적 만남을 갖는다.

 

 

 

신원 파악이 힘든 강도는 왜 발레 사무실에 침입했을까?

 

 

 

신원 파악에 애를 먹던 침입자의 애인에게 연락이 오고 경찰은 그가 사건이 나기 전에 이미 뉴욕으로 가려고 비행기 표와 여행 준비를 끝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죽은 남자와 뉴욕과 발레단은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좋아했다기보다 그게 세련된 육체의 상징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여성 본래의 곡선을 가진 통통한 몸은 그에게는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어요. 가느다란 몸이 좀 더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는 이론도 신봉했던 것 같고.




발레를 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독이 원하는 몸매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없이 굶고, 다이어트를 해야 했던 무용수들.

변변치 않은 수입에도 오로지 춤을 위한 열정만으로 젊음을 불사르는 영혼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소수의 몇 명만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조명이 그들이 꾸는 꿈이었으니까.

 

 

 

단순한 강도 침입으로 생각했던 사건은 발레단 감독 가지타가 무대 총연습 중에 사망하고, 뒤를 이어 발레리나가 자살을 하는 사건이 연달아 터진다.

그 와중에 가가는 사건도 해결하면서 미오와의 연애도 챙기는 일석이조(?)의 행운을 누린다.

 

 

 

아직까지 가가의 매력은 뿜어 나오지 않고, 미오에게 한때 교사였다는 말을 흘림으로써 가가에게 많은 변화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려 줄 뿐이다.

이 가가 형사 액션미 넘치는 형사는 아니다. 오히려 차분하고 냉철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편이다.

모든 사건의 단서들을 머릿속에 담아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번득이는' 영감을 얻는 캐릭터다.

이 사건에서도 흩어져 있던 단서들을 한데 그러모아 퍼즐을 맞춘 덕에 사건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래, 당신만을 위해, 나는 얼마든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사랑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무용수의 꿈은 이루어졌으나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다.

발레리나의 모습은 겉만 아름다울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전쟁보다 더한 전쟁이다.

무대 위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한 게 죄가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그래서 얻는 건 뭐가 있지?

사랑을 갈라놓은 그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겠지...

 

 

 

우아함의 탈을 뒤집어쓰고 인생의 모든 것을 저당 잡혔던 영혼의 부르짖음이라고 느꼈다.

너무나 고요하게 마무리를 지어서 아직 게이고의 글맛이 영글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지금 게이고가 이 작품을 다시 쓴다면 더 풍부한 감정들을 담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건조미가 어울리는 가가와 미오 커플에게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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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 센스 - 지식의 경계를 누비는 경이로운 비행 인문학
김동현 지음 / 웨일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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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의 역량은 항공사의 신뢰도와 직결되는 문제다. 조종사들의 숨은 역량의 차이는 비상상황에서 드러나며 그 비상상황을 다루는 핵심은 조종사의 침착한 자세다.

 

 

비행 인문학.

이 생소한 말이 이 책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고 또 다른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다.

나에겐 흥미를 유발했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이 불가능을 가능함으로 실현시킬 수 있었던 건 비행기의 발명과 비행의 기술 때문이다.

항공 산업의 발전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발전했고,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항공 산업은 군용이 아닌 민간 항공기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인간을 먼 거리를 빠른 속도로 왕래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큰 희생이 따라야 했다.

 

이 역사소설 같은 책에서는 비행기 사고를 통해 세계의 흐름과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이야기들이 배경으로 스며있다.

그래서 비행사와 현대사를 한 번에 공부한 느낌이다.

이 많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 사건 사고의 자료를 모아 온 걸까?

 

나는 지난 20여 년간 에어라인 역사에서 이슈가 된 사건들의 공식 사고 조사보고서를 꼼꼼히 읽어 왔다. 그리고 관련 지역을 비행할 때마다 다양한 소스를 통해 각각의 이슈와 관련된 인무들과 그 사회의 문하적, 시대적 배경까지 탐구해 들어갔다. 비행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의 꿈과 좌절, 열정과 경쟁, 도전과 노력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경이로운 감동이었다.

 

 

하이재킹이 비행기 납치를 의미하기 전에 서부시대에 도둑들이 달리는 마차를 좇아가며 마부에게 던진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비행기가 납치되었을 때 조종사는 영웅 노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승객과 비행기의 안전을 위해 조종사가 명심해야 할 가장 기본 원칙이다.

 

랜딩기어베이에 기어 올라가 밀항을 시도하는 행위는 자살행위이다.

 

 

 

 

 

기내에서 가장 위험한 사고는 화재이다.

예전엔 담배 때문에 종종 기내 화재가 났었고 결국 큰 희생을 치르고서야 기내 흡연은 금지되었다.

화재가 발생하면 비행기는 가장 가까운 곳에 비상착륙해야 한다. 그 긴박한 결정은 17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조건 빨리 마스크를 잡아당겨 코와 입에 대야 한다. 승무원이 산소마스크를 벗고 객식을 돌아다니며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반드시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 위급상황에서는 우왕좌왕하게 마련이다.

혹시 비행기를 타고 여행 중에 비상 마스크가 떨어진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쓰고 보자!

 

 

 

 

 

비행기 사고는 거의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비행 중 사고를 감지했을 때 조종사의 판단이 비행기와 승객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즘처럼 '돈'이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항공사의 이익을 생각해서 머뭇거리거나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대형사고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리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실수를 범한다. 조종사는 항상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실수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수정하는 것이다.

 

 

에어버스 매뉴얼에 실린 이 말은 로저 베테유의 말이다.

보잉이 조종사가 명령하는 그대로 반응하는 비행기를 추구했다면 에어버스는 어떻게 하면 조종석에서 조종사의 실수를 줄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이 차이는 많은 걸 담고 있다.

어떤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느냐는 저마다의 성향이겠지만 이것이 기업의 가치가 되면 실제적으로 따라오는 모든 문제는 곧 사회와 국가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더 많이 생각한 에어버스의 방침에 점수를 주고 싶다.

플레인 센스.

비행 인문학.

이 책을 받았을 때 단순하게 비행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비행 전반에 대한 조종사로서 갖는 생각 같은 단순한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책의 깊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비행기의 역사와 비행기 사건 사고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였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내고 얻은 것들은 결코 비행기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 사회의 변화, 세계 흐름의 변화에 따라 항공산업은 개편되어 왔다.

이제까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현대사회를 이해하게 만드는 책을 만나 본 기억이 없기에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걸 배운 느낌이 든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진실은 누군가가 처음으로 넌지시 얘기해 준 기분이랄까?

색다른 책에서 지식을 쌓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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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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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미치광이 짓을 한 거야. 어느 누구도 아이들을 납치해 사랑해달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어.

사람은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거야.

 

 

영국 북부의 항구 도시 스카보로.

3년 전 아버지가 살해되고, 그 후 집을 세 놨지만 세입자들은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졌다.

케이트는 휴가를 내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을 치우고, 수리를 해서 팔아버릴 계획으로.

 

케이트는 전작 [속삭임]에서 나왔던 케이트 린빌이다.

런던 경찰국 소속인 그녀는 인근 숙박업소를 빌려 고향집이 수리될 때까지 머물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민박집 부부의 딸 아멜리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이진다. 그리고 그날 공교롭게도 실종되었던 다른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나 캐스웰, 사스키아 모리스, 아멜리 골즈비는 비슷한 나이에 납치됐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직감력이 뛰어난 케이트는 일련의 납치 사건을 한 명의 범인 소행으로 보지만 스카보로 경찰 반장 케일럽은 생각이 다르다.

과연 이 아이들은 각각 다른 사람에게 납치된 걸까? 아니면 한 사람에게 납치된 걸까?

 

사춘기 호르몬이 들끓는 시절의 10대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를 탁구공 같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을 우선에 두기 쉬운 아이들에게 주변 어른들의 모습은 본받고 싶지 않은 삶이다.

설사 그것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부모라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중간중간 범인의 독백이 나온다.

링크 여사의 오래된 수법이다.

범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뿐 독자에게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범인의 독백은 긴장감만 고조시킬 뿐이다.

 

고원지대 살인마라는 별명이 붙은 범인은 단서 하나 없고, 실종 일주일 만에 아멜리는 극적으로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아멜리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는 영웅으로 거듭나고 그걸 미끼로 진드기처럼 아멜리의 부모에게 들러붙어 버린다.

케일럽은 아멜리의 목숨을 구해준 알렉스를 의심하고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확고하고 아멜리는 납치되었던 상황에 대한 기억을 잃었는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엄마와 문제가 있던 맨디는 엄마가 화가 나서 끓는 물을 팔에 부어버리자 집을 뛰쳐나와 방황한다.

그리고 타서는 안되는 차에 올라타고 만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링크 여사의 솜씨는 치밀하게 발전했다.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모양새를 엮어 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이 작품에서 링크는 십 대 여자아이의 반항심을 그려냈다.

누가 아이들을 순진하다고 했던가!

 

무모하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아이들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다.

어른들은 몰라주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다 컸다고, 세상을 안다고 생각한다.

품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겁을 먹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코 소용없는 짓이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눈동자. 케이트는 이전에도 감정이 부재한 범죄자를 체포한 적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감능력이 부재해 타인과의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존재. 그는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무감했다.

 

 

갇혀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회에 나오게 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채울 수 없는 갈증과 같다.

사랑을 강요하는 사람은 남의 사랑도 아무렇지 않게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더 이상 자신에게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면 가장 쉬운 방법은 잊는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 돌봐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에게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니까.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아이들은 굶어 죽었다.

외딴곳에 갇혀서 살기 위해 변기 속 물과 자신의 오줌까지 마셔가며 버티다 결국 맞이 한 건 죽음이었다.

 

근무지가 달라 사건에 개입할 수 없었던 케이트는 프리랜서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사건을 혼자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발품은 자그마한 단서로 연결되고 케이트는 범인에서 성큼 다가간다.

이 부분에서 케이트가 너무 어이없이 당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긴. 모든 주인공이 완벽하게 똑똑할 순 없지!

 

정작 범인은 활개치고 다니게 놔두고 나처럼 힘없는 사람만 줄기차게 따라다녔으니 실패할 수 밖에요. 반장님은 완벽하게 범인을 헛짚었어요. 만약 내가 당신이라면 당장 술을 한잔 따라 마실 거예요. 당신은 술을 마셔야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수사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술에서 모두 나온다고요.

 

 

케일럽은 알코올 문제가 있고, 케이트는 매사 자신감 부족이다.

게다가 연애 전선에도 빨간 불이 켜진 이 두 사람.

서로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두 사람이 스카보로에 둥지를 틀고 서로를 아끼며 사건을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이 수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링크 여사의 큰 그림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두 사람의 캐미가 다음 편에서는 더 진하게 발휘되기를 기대해본다.

 

꽤 두께를 자랑하는 책이지만 읽기 시작하면 시간 순삭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은근한 스릴을 즐기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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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 7년간 100여 명의 치매 환자를 떠나보내며 생의 끝에서 배운 것들
고재욱 지음, 박정은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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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의 밤은 낮과 다르다. 낮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혼란스러운 시간이라면, 밤은 뒤죽박죽이 된 어지러운 기억을 달래는 위로의 시간이다.

 

 

저자 고재욱은 강원도 한 요양원에서 치매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기억을 잃은 분들과의 기억을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박정은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이 곳곳에 사진처럼 담긴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부처님께 108배를 무사히 마친 할머니의 얼굴이 한결 평온해졌다. 노신부님의 말처럼 '그거면 됐다' 싶다. 할머니께서 뭘 비셨는지 짐작은 가지만 나 역시 말하지 않겠다. 부정 타면 안 되니까.

 

 

 

기억을 잃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르신들과 겪는 하루는 조용한 듯 보여도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와 같다.

홀연 사라져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되시기도 하고, 늘 같은 이야기를 매일 새롭게 하시는 분들도 있다.

자기 자식들은 못 알아봐도 과거의 기억은 또렷하기만 하다.

 

따스한 온기가 베어 있는 글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므로.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요양원이라는 말의 의미도 치매라는 병명도 늙는다는 것도 알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 감정들을 이 책을 읽는 동안 느껴봤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삶이 어떤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어머님이 계셨던 요양원 병동엔 치매에 걸린 어르신이 계셨다.

매일 새롭게 그곳에 있는 동안 계속 나를 알려드려야 했다.

그래도 아들과 딸들은 알아보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분 생각이 났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매번 "넌 누구냐?" 하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죽음에 대해 겉모습만 알고 있던 사람과 죽음의 과정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의 마지막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전자가 자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두려움에 떨었다면,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때가 되자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고 삶이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노인이라고 해서 죽음에 초연해지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의 죽음 앞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제부터 내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끝없는 숙제라는걸.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나 자신도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야기엔 많은 분들의 추억이 담겼다.

그분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글쓴이는 기억하는 추억들.

웃음 짓다가 뭉클하고, 간혹 숭고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전쟁세대의 기억은 많이 아프다.

치매는 현재의 기억은 지우고 과거는 또렷이 되살려 놓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달력이 6월에 멈춰진 분도 계신다. 

 

 

 

 

 

 

전쟁을 끝없이 소환하는 할아버지의 치매는 악몽 같은 기억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도돌이표였다.

짐승도 아는 도리를 인간은 알지 못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역사의 기록 같았다.

 

 

상대방의 의견은 묻지 않고 으레 그러려니 판단하는 독단적인 이해가 이들에게만은 유독 당연시된다. 기억을 잃었다고 감정까지 잃은 것이 아닌데,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하고 싶은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데.

 

 

일선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분의 글을 통해 내가 가진 편견을 벗겨낸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대충 대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내가 그 자리에 선다면 나는 어떤 대우를 받고 싶을까?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집을 부리고, 같은 말을 계속하고, 별안간 화를 내는 그 모든 것에 한 인간의 자존감이 담겨 있는 거라면?

 

미래를 여행하고 온 기분이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 순간이 올 때 내 곁에도 이런 분이 계셔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음식을 먹여주고, 몸을 씻겨주고, 자리를 봐주는 일도 중요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마음을 읽어주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면

자신을 잃어가는 분들에게 더 많은 의지가 되지 않을까...

끝으로 어느 할머니의 말씀을 잘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30년도 금방이야. 허투루 살지 말어. 그래야 잘 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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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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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과거의 메어리이자 반복이다. 슬픔도 없다. 순전히 죽음을 앞둔 아주 작고 마른 고양이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 외로움, 배신감 속에서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던 오래전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경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도리스 레싱의 고양이에 대하여는 1967년, 1989년, 2000년에 발표한 에세이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19호실로 가다로 많이 알려진 도리스 레싱이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들을 관찰하고 쓴 에세이다.

[특히 고양이는]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살던 시절에 온 집안을 점령했던 고양이들을 처리했던 이야기들이 인상적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고양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어머니.

동물을 죽이는 일이 집안일을 맡았던 어머니에게 주어지고, 어머니는 결국 어느 주말 자신의 짐을 남편에게 맡기로 집을 비운다.

고양이들을 방에 가두고 그곳에서 들리는 총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우던 풍경.

그런 야생의 땅에서 문명의 도시로 돌아온 그에게 도시의 고양이들은 색다름이었다.

 

누군가 키우다 버린 고양이

주인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고양이

자연 속에서 제멋대로 야생을 탐하던 고양이들만 보다 도시 속에서 사람에게 길들여진 고양이들은 왠지 서글픔을 주었다.

인간의 편의에 의해 거세당한 고양이들.

그러고 싶지 않지만 도시에서 고양이를 키우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세심한 관찰력으로 고양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것을 글로 써 내려간 레싱의 글들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고양이에 대한 경이로움을 주기 충분하다.

레싱의 글로 남겨진 고양이들은 도도하고 우아하며 말끔하고 영리하다.

유일하게 인간을 집사로 만들어 버리는 동물. 고양이.

 

나는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서워한다.

앙칼진 울음과 사악미가 느껴지는 모습 때문에 나는 그냥 냥이가 무섭다.

레싱의 글에서 냥이는 다 생각이 있다.

쳐다보는 눈빛, 가르랑 거리는 소리, 스치는 몸짓에서도 다 자신만의 의사 표시가 있다.

레싱의 고양이들을 본 적 없지만 그 고양이들의 모습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같이 움직인다.

 

이런 것이구나. 레싱을 읽는다는 건.

 

[살아남은 자 루퍼스]

 

길고양이었는지, 버림받은 고양이었는지 분명치 않았던 루퍼스.

아프고 노쇠한 몸으로 레싱의 집을 찾아와 갈증을 채웠던 루퍼스가 결국 레싱의 부엌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레싱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끝없이 다른 고양이들과 대치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된 곳은 부엌, 그중에서도 주로 녀석의 의자 위였다. 녀석은 그 의자를 떠나는 것을 무서워했다. 작지만 녀석만의 장소. 녀석이 매달릴 수 있는 삶의 발판.

 

 

 

 

 

지능적인 루퍼스의 행동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언제든 쫓겨 날 수 있는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근성이 루퍼스라는 고양이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계획을 세우고 계산적인 행동을 하는 법을 어떻게 터득했을까? 어떻게 해서 이처럼 생각하는 고양이가 되었을까?




루퍼스는 떠돌이 고양이었다가 레싱의 집으로 들어온 지 몇 주 만에 응접실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고양이가 된다.

원래 있던 부치킨과 찰스를 제치고.

고양이 세계에서의 묘한 알력을 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 루퍼스에게 나는 자꾸 마음이 갔다.

생존법을 터득한 이 녀석이 불쌍하고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다.

 

[엘 마니피코의 노년]

 

부치킨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부치킨은 어깨뼈에 암에 걸려서 앞다리 전체를 제거해야 했다.

세발의 부치킨.

이 녀석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연한 자태를 보며 고양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

자신의 남은 다리로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다.

 


녀석은 얌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니, 녀석이 세 다리로 균형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린 채 생전 들어 보지 못한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일부러 연극하듯 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다리를 잃고 대변을 보고 나서 흔적을 지우려고 애쓰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원래 어깨가 있던 자리의 근육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자신의 뒤처리를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된 고양이의 당황한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고양이에 대하여.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길러 본적도 없지만 이웃집에서 잠시 빌려왔던 고양이와 아무런 경고 없이 집에서 마주쳤던 순간의 오싹함이 아직도 남아있다.

검은 고양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부엌 한켠의 창고.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고양이와 마주치고 기겁을 하게 놀라서 소리를 지르던 그때의 기억이 내게 있는 고양이의 기억이다.

 

내 기억은 공포로 얼룩졌지만

그 기억에 대한 위안을 이 책을 읽으며 받았다.

나만큼 그 검은 고양이도 놀랐을 것이라고 레싱이 내게 말해주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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