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세상에 맞설 때
황종권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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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렇게 벼린 낫이여, 풀을 이기지 못하느니

낫은 매번 이기고, 이겨서 자꾸 지고

언제나 풀은 지면서 이기기 때문이다



마음이 타오르는 시들과 글이 내 마음을 대변해 줘서 좋았다.

낫이 아무리 베어내어도 풀은 지치지 않고 자란다.

힘없는 무리라 생각해서 누르고, 무시하고, 금방 잊어먹을 거라 생각하는 자들이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해도

우리 힘없는 무리들은 늘 밝혀내고, 이겨내고, 밀어내 버렸다.

모든 시대엔 그 시대의 권력에 저항하는 시들이 있다.

<시가 세상에 맞설 때>에 담긴 시들은 모두 한국의 근현대사의 폭력과 권력과 부도덕에 맞서는 시다.

그 시들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담아내는 황종권 시인의 이야기가 현실을 돌아 보게 한다.






우리의 시는 시대가 위독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먼저 사람을 지켰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폭력과 고통에 항거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며, 시로서 맞설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담았다.




그래서인지 본색을 입은 노란 표지 속 금 간 담벼락에 피어난 잎사귀가 온몸으로 부르짖는 거 같다.

이 신선한 봄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이제 그만 물러가라고.

너희가 아무리 승기를 잡은 거처럼 느껴도 우리는 이제 모든 걸 알아버렸다고.

그러니 더 구차해지기 전에 네 발로 그만 가라고..



세상의 모든 총들이 방아쇠가 없다면

탄약 창고엔 탄약 대신 읽어야 할 시집이 가득하다면

행운을 접어놓은 평화가 갑자기 침침해진다면

군인들은 이제 군화를 벗어 던지고

그냥 가거나 오는 것도 없는 국경의 밤을 생각할지도



벌써 3개월이 흘렀다.

계엄령이 무슨 TV 쇼처럼 펼쳐졌다 접힌 게.

기획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고 한 인간은 오로지 마누라한테만 충성질이다.

반성하지 않아도.

1년만 지나면 다 잊어버릴 개, 돼지들이 있기에

저절로 회복된다 믿는 저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너희가 감추었던 민낯이

너무나 낱낱이 드러나서

우리는 지금 어이 상실 중이라고

이제 조금씩 회복되는 중이고, 즐기는 중이라고

그러니 실컷 방심하라

그 방심의 대가는 너희의 상상을 무너뜨릴 것이니...



오로지 계산만을 따지는 욕망처럼 "못 된 것 못 된 것'들이 흉기를 드는 세상이 왔다. 하지만 이 시를 보면 사람의 슬픔이 있는 한, 환한 눈물을 만날 수 있으며 마침내 못을 뽑을 날도 있다는 걸 알겠다.



수많은 슬픔들이 우주에 구멍을 내듯이

사연 없는 시들이 없듯이

시대의 아픔을 시로써 토로하고

시대의 슬픔을 시로써 위로하고

시대의 고독을 시로써 달랬다

무수한 글들 속에서 갑자기 시를 만났을 때

마음이 잠시 글 사이에서 오붓한 오솔길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끔 시를 탐했다.

내가 찾았던 시들은 그저 아름답고

그저 예쁘고

그저 화사했다

교과서에서 만났던 나라 잃은 울분의 시들은 이미 잊힌지 오래였다.

저항시가 있었다는 걸 잊고 산 내 시간은 행복했나?

시대를 품은 시를 그저 사랑시로 잘못 해석하며 살지 않았나?

책도 안 읽는 시절에

시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시들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봄은 왔지만

마음이 춥다.

울컥이는 마음을

시들이 어루만져 준다.

누군가의 아픔이

누군가의 고통이

누군가의 고독이

돌고 돌아

내 안의 감정들을 희석시켜 주었다.

똑똑해져야겠다.

그 나라의 정치는 국민들 수준 이랬지.

이 나라를 저들에게 맡긴 건 슬프지만 우리다.

그러니

이제 잘 수습하자.

우리는 후진 정치를 물려받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런 후진 정치만은 물려주지 말아야지..

바람 잘 날 없는 봄날

시들이 소리 없이 외치는 봄날

내 마음도 소리 없이 외쳐댔다

이렇게 살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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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
장인용 지음 / 그래도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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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는 '집터가 있던 자취'를 말한다. 그런 자취조차 없으니 거기에 집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제목이 참 사연 있어 보여서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다양한 단어에 담긴 뜻과 그 단어가 만들어진 어원을 찾아보는 시간이었다.

읽으면서 중국과 일본과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력을 수시로 깨닫게 된다.

아름다운 우리 고유어는 한자어와 일본어와 영어에 밀려서 이제는 쓰이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단어들도 많다.

독보적이어서 그 단어 외에는 그 어떤 단어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어들의 존재는 경이롭다.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말도 있지만 변하는 말뜻도 있다. 언어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도구를 다른 용도로 쓴다고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는 오징어는 원래 꼴뚜기의 한 종류라고 한다.

정말 오징어는 '갑오징어'이다. 꼴뚜기의 한 종류가 오징어가 되는 바람에 진짜 오징어는 '갑'이라는 말을 앞에 달아야 한다.

'복숭아'는 왠지 한자어 같은데 순 토박이 우리말이다.

우리말 같은 앵두와 자두는 한자어란다. 그러고 보니 잘못 알 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수박도 우리말이란다.

이름 유래에 애매함이 남아 한자어에서는 벗어났다고 한다. 중국에서 수박은 서쪽에서 온 과일이라 해서 서과(西瓜)라고 한다.

그럼 쓸쓸하다, 흐지부지, 으레, 나중, 잠깐, 조용히는 순우리말일까?

외상, 자작나무, 흉, 어음, 수월하다는 한자어일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에서 한자어를 무시할 수 없다. 아주 오랫동안 한자를 써왔기에 거기에서 파생된 말들이 아직까지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동안 한자를 가르치지 않아서 요즘 들어 한자어를 못 알아보고 실수하는 예들이 짤로 돌아다니는 걸 보게 된다.

같은 언어로 소통되지 않을 때 사회는 더 혼란해질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이기에 불교 용어에서 나온 말들도 상당하다.

읽으면서도 참 놀라웠다.

얼추, 단박에, 시달리다, 아사리판, 노파심, 타계, 명복 등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들이다.

한자어나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예배, 설교, 찬송, 기도, 신앙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모두 불교에서 유래했다. 놀랍다!

재미, 맛, 멋이 모두 같은 의미였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렇게 알고 보니 그 뜻들이 다 연관 있어 보인다.

그저 무심코 썼을 뿐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우리말.

그저 미루어 짐작했을 뿐 그 유래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못 했던 내가 쓰는 말들.

언어의 변천도, 원래의 유래도,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달라진 말들을 마주하는 시간이 좋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책을 읽는 동안 자꾸 뇌리를 스쳤다.

자꾸 배워야 함을 깨우쳐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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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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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슬픔은 우주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



아주 긴 제목이 너무 시적이라서 제목만 몇 번을 읊조렸다.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은 <포털>이란 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사람들의 슬픔이 우주에 구멍을 내어 포털이 생겨난다.

아이 잃은 집 마당의 타이어 그네에도 포털이 생겼다.

숲속에 생긴 포털을 통해 아버지를 어루만질 수 있었던 형제.

수영장 필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것을 조사하던 경관은 그 포털 속에서 엄마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나는 사랑했던 콜렛을 만나고 싶다.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첫사랑 콜렛.

커밍아웃 할 수 없었던 시대에 홀로 가슴 앓이 했던 소녀는 콜렛을 만나기 위해 숲에 있는 포털을 찾는다.

그곳에서 소녀가 만난 건 무엇일까?



아버님은 노년에서 중년까지 젊어질 겁니다. 그런 뒤 청년기로, 십 대로, 그러다가 아이가 되고, 어린 나이로 죽어요. 일반적인 사인은 폐 미발달이 됩니다.



<역노화> 는 죽음을 택할 수 있는 방식 중에 하나다.

점점 어려지다 갓난아이가 되어 죽는 방식이다.

이 방법을 택하면 역노화의 진행을 지켜볼 사람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역노화를 지켜보는 딸과 점점 어려지는 아버지는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게 될까?

점점 어려지는 부모를 지켜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 이야기를 읽으며 잠시 내 엄마가 어려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엄마와 내 나이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엄마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내 부모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거친 인간화의 과정을 내 부모가 먼저 겪었다는걸.

자란 시대가 달랐을 뿐 그들도 나와 같은 감정으로 살았음을..

나는 많은 부분을 그들에게서 물려받았음을 깨치며 읽게 됐다...

갓난 아기가 된 아빠를 품에 안고 뛰어가는 딸의 마음이 어떤 건지 짐작도 못하겠다...



*초판 한정 '문장 책갈피' (랜덤 1종 증정)



바쁜 나를 대신할 봇 <버전들>

이 버전들이 결혼식장에서 만났을 때 봇들끼리 감정이 생길 수 있을까?

아트리스와 벤은 한 결혼식에 초대를 받는다. 그곳이 그들이 마주친 첫 결혼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빠서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그들의 버전을 대신 보낸다.

옆자리에 앉게 된 버전들은 그들이 가진 단순한 언어로 소통을 하게 되는데...

미래를 잠시 보고 온 느낌이다.

버전들과 죽은 사람들의 홀로그램이 참석하는 결혼식.

버전들의 주인들이 직접 참석했다면 마음이 통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한정되게 입력된 언어들로 자신들의 감정을 나누는 버전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소름도 끼친다.

감정이 생기는 로봇이라니... 내가 바라는 상황은 아니다.




몇 년 전 거대 테크기업과 사이버 보안을 겨냥한 통합법안이 통과되면서 재수 없는 연애 상대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모든 앱에 의무화되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을 가려내기 위한 연애 신용점수 같은 것이 고안되어 일괄 적용된 것이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는 재수 없는 연애 상대로 찍힌 사람들이 데이트 앱에서 영구 퇴출 되는 세상이다.

와! 신박하다!

현실에도 이 제도가 생긴다면 데이트 폭력이 줄어들까?

하지만 이것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런 여자다.

퇴출된 사람들을 지지하는 모임에서조차 자신의 희생양을 찾는.

그런데 어딘지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모임에 참석했다. 여자는 그 남자를 살며시 꼬셔서 자신들의 연애 신용점수를 높이고자 한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 과연 잘 될까?



"나는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생각해. 발로 차고 고함지르고 슬픔과 공포를 느끼면서, 표면 아래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도하는 거라고."



친구들과 휴가를 간 버몬트의 한 저택. 그곳 게임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각자의 어린 시절에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게임.

봉인되었던 끔찍한 기억으로 들어가는 게임룸... <내가 그린 그림>

15편의 단편들은 뛰어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 드라마 블랙미러를 글로 읽는 느낌이다.

모든 이야기가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서 그런 미래가 곧 도달할 거 같다.

특히 가스라이터는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조만간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면 어쩌지?

묘하게 아름답지만 한편으로 아주 끔찍한 느낌을 동시에 받게 되는 이야기의 집합체였다.

이 책에서 현실화되는 소재는 몇 개나 될까?

세상이 지금처럼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린다면 한두 개 정도는 현실화가 될 거 같다.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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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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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가죽 위로 피가 맺힌다. 그가 내게서 멀어지고 내가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수록 우리는 각자 스스로를 되찾는다. 그는 나 없이, 나는 그 없이, 서로의 몸 안에 잃어버린 것을 견디며 살아남는다. 남겨진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인류학자 나스타샤 마르탱은 캄차카 화산 지대에서 곰의 습격을 받는다.

그녀는 용감하게 싸웠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곰은 그녀를 먹지 않고 떠났다.

얼굴 전체와 오른쪽 다리가 찢기고 턱 일부는 곰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무참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나스타샤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지만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책은 살아남은 그녀의 기록이다.

변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에서 탈피하고자 그녀는 다시 캄차카로 돌아간다.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 여자애들 앞에서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이렇게까지 무기력했던 적이 없는데. 알몸으로 묶인 채 누군가가 주는 밥을 먹으며 나는 인간성의 경계에,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의 끄트머리에 선다.



나라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나라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질문했다.

그녀의 고통이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기에.

손끝에 조그만 가시만 박혀도 아픔을 못 참는데 곰의 이빨에 난도질당한 채로 살아남은 사람의 그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컸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너는 이제 미에드카(에벤어로 곰과의 조우에서 살아남은, 곰의 표식을 받은 사람을 지칭. 이 이름을 가진 자가 이제 반은 인간이고 반은 곰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야, 서로 다른 세상의 경계에서 사는 자.



그녀는 곰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곰에 속해있고, 곰도 자신에 속해있다는..

꿈에서 그녀는 곰의 공격을 받던 순간을 계속 마주한다.

나라면 미쳐버렸을 거 같다.

그런 장면을 꿈꾸는 것도 무서울 텐데 그건 꿈이 아니라 진짜 일어났던 일을 복기하는 거였으니까...

친구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피해 자신을 되찾기 위해 돌아온 캄차카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그녀를 미에드카라며 꺼린다.

곰이 그녀를 계속 따라다닐 거고 그래서 그녀의 모든것이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녀를 더 힘들게 한다.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고 얇지만 단단한 내공이 담긴 책을 읽으며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

자연에 동화된 사람들은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기때문에 더 생생했다.

소설이라면 정말 맘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테고 주인공의 용기를 맘껏 칭찬할 수 있었겠지만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였기에 한 문장 한 문장이 고통이었고, 용기였으며 존경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태곳적 만남을 따라 끝까지 갔지만 다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 있다. 이종교배가 일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를 닮은 무엇인가에 애니미즘 가면의 특징을 더한 채로 나의 안과 밖은 뒤집혔다.



나는 다짐한다. 언젠가 이 순간을 모두 기록할 거라고.



이 책이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을까?

그랬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고통과 생각과 마음과 감정을 글로 옮기는 동안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녀가 느꼈을 모든것들을 조금씩 나눠가졌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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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소굴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강두식 옮김 / 빛소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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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통하지 않았다. 단지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접근하는 듯하면서, 사실인즉 짓궂게 구부러지곤 했다. 하여튼 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도무지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는 이 길이 틀림없이 성으로 구부러져 들어갈 것이라고 K는 끊임없이 기대했다. 이런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나 지쳤기 때문에 이 길을 단념해 버릴 수 없었다.



이 끝없이 계속되는 <성>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도대체 <성>은 뭘까?

눈에 멀찍이 보이지만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곳.

성을 향해 걷지만 가도 가도 닿지 않는 곳.

그 성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어려운 걸까?

토지측량사 K

성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성에 가지 못하는 K.

<성>을 읽으며 카프카가 말한 <성>은 우리의 꿈, 이상, 허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손에 잡힐 듯 안 잡히는 것.

그것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방해자들이 넘치고 시기와 질투가 따라온다.

그것을 견디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은 닿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을 카프카는 몽환적인 모호함으로 말했을지도 모르다.

나의 이상, 나의 꿈들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있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는 허상일 뿐...





실체 없는 위용을 자랑하는 <성>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열심히 쌓아 올리고 있는 온라인의 공중누각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데이터에 문제가 생기면 몇 년을 꼬박꼬박 기록해 놓은 것들이 싸그리 사라지는 그런 신기루 같은 것.

마을 사람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만 결코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그 신기루.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

그래서 항상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한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가는 이 세상.

카프카의 세상을 몇 번 돌아봤지만 손에 잡힐 듯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건 우리가 열심히 시간을 들여 꾸며대는 이 디지털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이라는 허울 좋은 공중누각을 향해 끝없이 걷고 걷는 디지털 유목민들.

현실에선 아무것도 없지만 그 세상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곳.

이름 없는 K는 자기가 토지측량사라 우기고 그걸 또 <성>에서는 맞다고 해준다.

현실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세상에서는 내가 원하는 가면을 쓰고 내가 원하는 누군가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는 거 같지만 전혀 알 수 없는 가면 쓴 사람들과 가면 쓴 나는 그렇게 <성>을 향해 나아간다.




"당신은 바보 아니면 어린애, 그것도 아니면 지독하게 교활하고 위험한 인간일 거예요."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들.

아마도 카프카는 도달하지 못할 허상을 좇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거 같다.

카프카 자신도 밖에서는 '나 이런 사람이오'라고 말하지만 정작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쥐어뜯은 게 아닐까.

처음에는 <성>이 어떤 모습으로 K를 받아들일까 궁금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성>은 도달할 수 없는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좇다 늙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카프카의 <성>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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