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
에이미 하먼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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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부족의 원주민들은 나를 '두 발'이라고 불렀다. 한쪽 발은 백인의 발, 다른 쪽 발은 포니 족의 발이라는 뜻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 절반으로 쪼개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 두 세계 모두에 걸쳐 있었다. 나는 양쪽 세계 모두에게서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1850년대 서부개척사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프롤로그부터 살육의 현장을 맛보게 한다.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이주하는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얼핏 생각해도 거칠고, 소란스럽고, 고통스럽고, 치열하면서 고단했다.

그 쉽지 않은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굳건한 사랑이 이 모든 척박하고 시끄러운 배경들을 음소거한다.

 

존 라우리와 나오미 메이.

두 사람의 시점에서 번갈아 이야기하는 이주민들의 여정은 정중하면서도 굳건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이 오랜 여정 끝에 피폐해지고 상처받은 영혼들의 모습조차도 아름답다...

 

"고통 말이다. 견딜 가치가 있는 거야.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아픈 법이다. 하지만 견딜 만한 가치가 있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게 바로 사랑이야.

 

 

위니프레드의 행동과 말이 이 거친 이주민들의 삶을 다독이고, 나오미의 결정을 굳건하게 한다.

스무 살에 과부가 된 나오미는 친정식구들, 시댁 식구들과 함께 서부로 가는 이주민이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인디언과 백인의 혼혈 존 라우리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감지한 순간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여정엔 알 수 없는 위험과 인디언들과의 적대감과 전염병들이 언제 그들을 덮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고단한 모습들이 아름다운 문장들로 그려지기에 그들의 거친 삶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을 읽는 동안 아름답지만 척박한 배경 속에 마음을 푹 담가두고 있었다...






나오미와 존의 사랑이 모든 편견을 걷어내고 굳건함으로 이루어지고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대립은 살얼음판을 건너는 것과 같다.

그 사이에 와샤키 추장이 있다.

두 세계의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걸 알고, 백인들에게서 자신의 땅을 얻어냈던 인디언 추장.

<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엔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실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이야기에서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나도 웨브를 사랑해. 모든 민족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는 거야. 인디언들과 이주자들도 다 똑같아."

 

 

존의 말은 이 이야기를 관통한다.

백인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고, 인디언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다.

백인 중에도 위니프레드 같은 사람이 있고, 인디언 중에도 와샤키 추장과 같은 사람이 있다.

서로를 모르기에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해를 끼쳤던 서부개척시대.

존 라우리는 그 두 세계에 발을 디디고 서있던 사람이었다.

양쪽 모두에게 사랑받으면서도 미움받았던 혼혈아 존 라우리.

그를 사랑하고, 남의 시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오미.

두 사람의 사랑을 마주하며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척박하고 거친 시대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중하고 품위 있는 문장으로 표현되는 경이로움이 이 이야기에 담겼다.

 

모처럼 정중한 아름다움을 품은 문장들이 나를 고요하게 만든다.

거칠고 살벌한 서부개척사를 상상했던 내 척박한 상상력이 부끄러워진다.

사람이 살아낸다는 건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가득 받았다.

 

인내는.... 완전히 다른 싸움의 방식인 거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힘든 거라고.

 

 

인내가 또 다른 싸움의 방식이라는 것을 존을 통해 배웠다.

섣부른 행동이나 감정이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 인내를 가지기가 보통 힘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가진 와샤키 추장과 그것을 못 가진 포카텔로의 다른 길이 인내의 싸움을 더욱 값어치 있게 만든다.

 

가치 있는 사랑 이야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신중함과 인내를 이해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제 와서 깨닫는다. 삶은 갈림길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떤 갈림길은 다른 곳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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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중독 - 먹고 싶어서 먹는다는 착각
마이클 모스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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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리 식품기업의 전략을 잘 알아도 애초에 음식에 중독성이 있다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진화는 서서히 느리게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납니다.

몇 천년이나 몇 백만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죠.

그런데 단 40년 만에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먹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인간의 몸은 음식을 원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에 대한 갈망은 인류를 생존하게 했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인간이 그렇게 빠르게 음식을 탐하게 됐을까요?

 

인간은 놀랍게도 달고 열량이 높은 음식만이 아니라 편리하고 다양하며 생각하는 데 비용(노력)이 적게 드는 음식을 찾아 나서도록 진화되었다.

 

문제는 음식에 중독성이 있다기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먹는 것에 끌리는데 기업들이 음식을 바꿔 놓았다는 데 있다. 또 음식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에도 있다.

 

 

단짠단짠의 맛이 사람들을 홀립니다.

수많은 먹방이 인기를 얻고, 하루에 수십 개의 프로그램에서 먹는 것을 다룹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식당들도 장을 담갔습니다. 그래서 음식들이 개성이 있었죠.

똑같은 된장찌개 레시피여도 집집마다 담그는 장맛이 달랐기에 된장찌개 맛은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집에서도 식당에서도 식품업체가 만든 된장을 씁니다. 그러니 모두 맛이 똑같습니다.

우리는 그 맛을 표준으로 삼게 됐죠.

그 장에는 분명 설탕이 첨가되었을 테고, 우리의 뇌는 설탕이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을 지나 모든 것이 풍족해진 요즘

전보다 움직임은 덜해졌지만 먹는 양은 늘었죠.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위는 열량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뇌에 유익한 음식이라는 신호를 보내죠. 그러면 뇌는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음식을 먹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음식을 먹게 만드는 힘은 위에 있는 걸까요, 뇌에 있는 걸까요?

 

우리에게 음식을 탐하게 만드는 결정권은 '뇌'에 있습니다.

 

우리가 중독될 수 있는 모든 물질 가운데 뇌를 자극하는 데 음식 보다 빠른 것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종류의 음식이 그렇다.

가공식품이 거둔 경이로운 성공은 모든 면에서 드러나는 빠른 속도가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속도는 중독성이 강합니다.

패스트푸드가 중독성 있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빠르고, 간편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 바로 뇌가 좋아하는 보상입니다.

설탕과 소금은 뇌에 도달하는 속도에서 담배나 마약을 능가합니다.

미뢰가 설탕과 소금을 감지하여 뇌에 전달하는 속도는 순식간입니다.

이 순간 뇌가 깨어나며 먹고 싶은 마음을 자극합니다.

우리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이런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식품업체들은 어떤 전략을 쓸까요?

더 간편하게~

더 빠르게~

더 맛있게(소금, 설탕 듬뿍!)~

아주 익숙한 이 문구가 바로 식품가공업체들의 영업 비밀입니다.

가공식품들은 뇌에 신호를 보내는 속도를 점점 높여왔고 그것은 사람들을 음식에 중독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책임지고 싶진 않지만 돈을 벌고 싶은 그들의 행위에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식 중독>을 읽으며 이 먹이사슬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모두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손에 손잡고 빠르지만 간편하고 맛있는 그러기 위해서 설탕과 소금을 단짠단짠의 묘미라고 속이고 듬뿍~ 넣는 것입니다.

 

음식은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기르고, 수확하고, 요리하는 이 시간이 무시된 음식은 인간의 몸에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중독 상태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도 먹기 바쁩니다.

빠르고, 간편하게 나오는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방식.

이것이 음식 중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가장 강렬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이 낳은 식습관은 반복되는 노출에 기인한다. 누군가의 즐거움은 다른 누군가의 불쾌함이 될 수 있으며, 이 스펙트럼은 익숙한 습관에서 멀어질수록 더 큰 폭으로 변화한다.

 

뇌는 가장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음식에 가장 크게 자극된다.

 

우리의 식습관이 기업들에게 넘어가고 과식하는 사람과 비만인들이 늘어갑니다.

기업들은 오늘도 감성적인 광고와 맛깔스러운 음식 사진과 거기에 저마다의 추억을 양념처럼 뿌려서 내보냅니다.

길들여진 사람들은 오늘도 잘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린 잘 먹은 게 맞을까요?

 

식품 기업들이 소비자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마지막 작전은 바로 소비자들을 여전히 자기 제품에 탐닉하게 하면서도 기존에 휘두르던 무기를 일부 치워 버림으로써 신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요즘 설탕은 아닌데 설탕보다 단 맛을 내는 것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미뢰를 교란시키는 인공감미료를 초파리로 실험해 보았는데 그 결과가 인간에게 미친다면 끔찍할 거 같습니다.

무칼로리 감미료를 먹은 초파리는 잠을 못 자고, 허기진 듯 계속 먹어댑니다. 그러나 살은 찌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초파리가 계속해서 날고 또 날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공 감미료를 먹은 인간들이 잠도 못 자고, 계속 먹어대면서 계속 움직인다고...

좀비가 따로 없을 거 같습니다.

 

요즘 과일도 기존의 맛을 배제하고 단맛으로만 가득한 과일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샤인머스켓은 포도의 새콤달콤함을 앗아가버렸고, 스테비아 토마토 역시 토마토가 가진 여러 가지 맛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모두 맛있다고 먹는데 저는 기존의 과일 맛이 더 좋습니다.

 

<음식 중독>을 읽으며 음식에 대한 생각을 바꿔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가공식품 말고, 귀찮아도 손수 해먹는 음식을 늘려야겠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으로 요리를 해야겠어요.

너무 빠르고 간편한 것은 처음에는 좋아 보여도 결국에는 나 자신을 좀먹는 것임을 또 깨달았습니다.

 

마이클 모스 같은 기자가 우리에게도 있어서 우리나라의 식습관을 바꾼 것이 무엇인지 파헤쳐 봤으면 좋겠습니다.

좀 덜 맛있는 거에 길들여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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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음, 오숙은 옮김 / 반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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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인용된 문학작품 속 눈멂 들을 읽어가는 시간은 이미 읽었던 내용이지만 다르게 느껴진다.
저자 리오나 고댕은 비시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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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음, 오숙은 옮김 / 반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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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깐 눈멂을 암흑 또는 검은색과 동일시하는 해묵은 경향은 대체로 시각장애인의 경험과는 같지 않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거기 눈을 심어라>를 쓴 작가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아니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명으로 시각을 잃기 시작했다.

 

보이는 눈에서 보이지 않는 눈을 갖게 된 저자는 해박한 문학적 견해로 눈멂이란 어떤 것이가에서부터

비시각장애인들의 세상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거기 눈을 심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시각장애에 대한 풍부한 문학적 예를 들며 그 알 수 없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비시각장애인들의 고정관념들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의 생각마저도 비시각장애인들에게 맞춰야 하는 현실에 대한 것을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어떤 것'이 정말 제대로 된 '어떤 것'이 맞는지를 곱씹어 보게 된다.

 

시작장애는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들의 세계는 다르다.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지 모르지만 그 차이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광학 유리'가 없다면 인간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신은 무슨 목적으로 창조했단 말인가? 태초 이래 인가의 시각이 신의 창조물 중에 일부만을 인지할 수 있었다면, 그 많은 여분의 것들(자연의 시야 너머에 있는 그 많은 것들)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걸까?

눈으로 보이는 것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와 현미경이나 광학 유리로 보는 세계는 다르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은 더 많은 감각으로 세상을 '본다'

그저 눈으로만 보고 마는 비시각장애인들보다 시각장애인들이 더 많은 걸 느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1차원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을 그들은 3차원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누가 더 많이 볼 수 있는 걸까?

 

비시각장애인의 고정관념들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의 생각과 느낌마저도 비시각장애인들에게 맞춰야 한다.

모든 표현이 비시각장애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그저 무시되기 일쑤니까.

 

'눈멂' 그리고 '봄'

이 책에 인용된 문학작품 속 눈멂 들을 읽어가는 시간은 이미 읽었던 내용이지만 다르게 느껴진다.

저자 리오나 고댕은 비시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비시각장애인들이 가진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시점인 거 같다.

우리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온 감각으로 느끼는' 그들보다 우리가 더 우월할 수 있을까?

 

눈은 다치기 쉽다.

그리고 눈은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다.

좌우 1.2의 시력으로 세상을 보다 이제는 흐릿하고 뿌옇게 번지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말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단지 본다는 그 이유로 그 너머의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온 감각으로,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거기 눈을 심어라>라는 제목은 내겐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의 마음에, 고정관념에, 진부한 표현들에 '보는 눈을 심으라'고...

 

새로운 시각이란 시각장애인들의 '봄'을 그들만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눈멂'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거기 눈을 심어라>를 읽어 보면 좋겠다.

책을 읽고 나면 제목이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활자가 커서 '노안'에게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 책의 활자 크기도 보는 눈에 대한 배려인 거 같아서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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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마지막 한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2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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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불확실성의 나라다. 기만이고 환상이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읽다 중도 포기한 이후로 그의 작품을 완독한 건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 첫 번째다.

역시나 예상처럼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온갖 은유와 수다스러움이 바스쿠 미란다의 기법처럼 덧칠한 그림들 같다.

 

부와 명성을 하루아침에 거머쥔 다 가마 가문.

그러나 그들 집안의 남자들은 별 쓸모가 없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가문을 이끌었던 이피파니아는 두 아들이 감옥에 간 사이 둘째 며느리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둘째 며느리는 아우로라를 낳는다.

이 이야기의 화자 무어의 어머니이자 탁월한 화가였던 아우로라.

열다섯에 아버지 나이의 유대인 아브라함 조고이비를 유혹해 남편으로 삼았다.

그들 사이엔 3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아름다움으로 이름을 떨친 이나

수녀가 된 미니

변호사가 된 마이나

그리고 넉 달 만에 태어나 보통의 인강보다 2배속으로 살게 되는 무어가 있다.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은 꾸밈없는 진실, 글자 그대로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 모라이시 조고이비, 일명 무어는 -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지은 수많은 죄 때문에, 나의 잘못 때문에, 내가 저지른 중대한 잘못 때문에- 2배속으로 사는 사람이다.

 

 

가끔은 두 분이 내 조막손과 조로증을 당신들의 죗값으로 여겼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 그들에게 나는 깨져버린 사랑에서 태어난 기형아, 온전치 못한 결혼생활이 탄생시킨 반쪽짜리 인생이 아니었을까.

 

 

한 집안의 흥망성쇠는 인도의 역사와 마주한다.

아우로라의 그림 속에는 다 가마 & 조고이비 집안의 역사가 인도의 역사 위에 흐른다.

무어 연작을 그리며 아우로라는 젊음을 불태웠다.

아들의 시각으로 묘사되는 아우로라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 자신의 자아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식들과 남편 아브라함마저 아우로라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조고이비 집안사람들은 모두 각자도생이었다.

 

아내 대신 가문을 책임지며 막대한 부를 일군 아브라함.

아내 대신 수많은 여자들을 품었던 아브라함은 겉으로는 막대한 부를 쌓고, 안으로는 끝없는 지하세계의 왕이 되었다.

무어는 성인의 탈을 쓴 어린아이였지만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홀로 잡다한 지식을 습득했다.

어른의 몸이지만 아이에 불과했던 무어는 일찍 어른들의 세상을 맛보았고, 진실한 사랑인 줄 알았던 우마는 거짓말 투성이었다.

 

인도의 현대사를 관통한 조고이비 가족의 흥망성쇠.

막대한 부를 일군 조고이비 가문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무어는 가까스로 탈출한다.

어머니의 복수를 외쳤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무어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우로라 자체가 인도였다면 아우로라의 죽음은 그 누구의 배신도 아니었다.

 

살만 루슈디의 문체는 화려하기 그지없고

그의 표현들은 방대하기 그지없고

그의 생각들은 걷잡을 수 없이 달려나가기 그지없다.

 

연신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수다를 떠는 기분으로 읽었다.

소란스럽고, 그러면서도 강렬한 향기가 코끝에 넘치는 이야기 <무어의 마지막 한숨>

인도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지만 그 어떤 비천한 신분들 보다 더 비천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

각 종교의 혼혈아들이 펼치는 기괴한 가족사는 분열되고, 정신없고, 아직도 모아지지 않은 인도 그 자체의 모습처럼 보였다.

살만 루슈디의 정체성을 찾아가 가는 이야기

무어는 루슈디 자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고, 그저 경악스러운 진실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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