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집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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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 집의 이상한 점을 알겠는가.

아마 얼핏 봐서는 아주 흔한 가정집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주의 깊게 구석구석 살펴보면, 집 안 여기저기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리라. 그 위화감이 겹치고 겹쳐, 마침내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너무나도 무서워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책을 펴고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계속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건축 도면에서 발견하는 미스터리.

신선하면서도 이게 얘기가 될까? 했던 기우를 몽땅 날려버리는 이야기 <이상한 집>

 

일상에서 보기 힘들지만 봐도 잘 모르는 소재는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건축 도면은 구조가 대충 어떻다는 것만 알뿐 전문가가 아닌 이상은 도면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 내기는 어렵다.

이야기 속 화자인 필자는 지인으로부터 이사 갈 집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는다.

필자도 잘 모르는 집 도면 때문에 필자는 또 다른 지인인 구리하라 씨에게 도면을 보내어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구리하라 씨로부터 이 이야기의 오싹한 부분이 시작된다.

 

구리하라 씨의 상상력이 도가(?) 지나쳐서

이 사람이 범인인가? 싶었다.

다 읽고 나서 얼마나 나 자신이 우스워졌는지!





필자와 구리하라 씨의 추리를 열심히 읽어가면서 나 역시 뭔가 소름 돋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의 묘미가 바로 '이것이다'

독자 스스로 끔찍한 상황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이상한 집>의 특징

 

 

첫째. 끔찍한 사건 현장이 없다. (모든 건 그런 거 아닐까요? 라는 상상력일 뿐)

둘째.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필수로 등장하는 시체가 없다. (물론 신문기사에서 언급되는 시체는 있다.)

셋째. 모든 것이 상상이나, 모든 것이 또 진짜이다.

 

짧은 분량의 단막극을 본 기분이다.

눈에 보이는 시체도 끔찍한 사건 현장 없이도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이상한 집>의 최대 장점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 때로는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방향을 나아갈 때 의도치 않은 피해자를 양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뭐 좀 신선한 거 없나? 하는 분.

짧은 시간에 몰입해서 책 한 권 읽고 싶은 분.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 묘사는 싫지만 미스터리는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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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워프 시리즈 2
알렉산더 케이 지음, 박중서 옮김 / 허블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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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 이제 나 같은 늙은이의 말을 들을 사람은 어린아이 빼고는 없단다. 청년은 달라. 청년은 오로지 청년의 말을 듣게 마련일 거고, 그것도 가장 힘이 센 청년의 말을 듣게 될 거다."

 

어릴 때 <미래 소년 코난>을 만화로 보았다.

나중에 커서야 그 만화가 일본 만화라는 것을 알았고,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나고 나는 <미래 소년 코난>의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알렉산더 케이는 아버지가 KKK단에 의해 화형 당하고, 어머니가 의문사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고통을 SF 소설로 승화시킨 작가다.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은 제목에서조차 불안감과 부담감이 느껴진다.

 

세상은 신무기 사용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대홍수로 인해 물에 잠겼다.

코난은 스승님을 따라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홀로 표류하다 무인도에 정착한다.

5년이란 시간을 홀로 살아남은 소년. 코난.

그러나 그에게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가 위험에 처해있을 때마다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목소리.

그리고 라나가 있다. 코난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는 라나.

그 라나가 보내준 갈매기들이 코난의 친구다.

그리고 코난이 믿고 의지하는 스승님이 어딘가에 살아계시다.

그것이 코난이 살아남은 이유다.

그리고 언젠가는 라나가 있는 하이하버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코난 앞에 어느 날 수색정이 나타난다.

 

신체제가 장악하고 있는 인더스트리아로 끌려간 코난은 그곳에서 이마에 낙인이 찍힌다.

노예처럼 이마에 찍힌 낙인은 인너스트리아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다.

튼튼한 육체를 가진 코난에겐 보트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라는 결정이 내려지고, 그곳의 책임자 패치 영감은 괴팍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하이하버로 가서 라나를 만나야 하는 코난은 인터스트리아의 노예로 잡히고 말았다.

대홍수로 인해 사라진 대륙.

겨우 남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

인더스트리아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다.

신체제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계급을 나누어 지배한다.

 

하이하버는 아이들의 나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아이들 중에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자신만의 무리를 지어 식량을 빼앗고, 권력을 갖기를 바란다.

 

기존의 세상이 멸망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서도 인간의 권력에 대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힘을 합해서 무너진 문명을 재건해야 한다는 코난의 생각을 비웃듯 인더스트리아는 남은 자원을 독차지하고 계급을 나누고 차등을 두기 바쁘다.

하이하버에서는 머리가 큰 소년들이 반란을 꿈꾼다.





"그럼 또 뭐가 있겠소? 우리 각자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면의 귀를 가지고 있는 거요.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말이오. 만약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가 결국 그 귀를 들리지 않게 방치했기 때문일 거요."

 

 

신의 목소리는 곧 내면의 목소리다.

인간의 DNA에 탑재되어 있는 초능력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는 법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도록 배웠기에 사용할 수 없다.

스승님으로 불리는 브라이악 로아는 신을 빗대어 말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신이란 인간의 능력 중에 하나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아서 사장된 능력.

 

작가 알렉산더 케이는 결코 환상을 심어주지 않았다.

어찌어찌 하이하버에 도착한 코난이지만 그를 맞이한 건 쓰나미였다.

덮쳐오는 쓰나미 이후에 세상은, 코난은, 라나는, 하이하버의 반란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결말도 남겨두지 않은 결말이 싱그롭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 결말도 달라질 테니...

 

이 책에 나온 내용은 이전에도 분명 일어났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단지 공상인지, 아니면 예언인지는 오로지 우리가 앞으로 하기에 달렸을 것이다.

 

 

공상이었던 이야기가

이제는 점점 예언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선택지에서 생겨난 결과일 테지..

 

어릴 때 봤던 만화 영화가 대책 없이 희망적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원작의 깊이는 읽어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미래 소년 코난> 보다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이 훨씬 현실적이고 상상할 수 있는 결말이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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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포인트 그림감상 - 원 포인트로 시작하는 초간단 그림감상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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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있지만 크게 주목하지 않은 부분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그만큼 작품과 자신의 생을 깊고 넓게 해주는 일, 그것이 '원 포인트 그림감상'이자 '원 포인트 글쓰기'다. 그리고 '원 포인트 그림감상'과 '원 포인트 글쓰기'는 '슬로 라이프'다.

 

 

4개의 장으로 나누어 60점의 작품들에 대한 감상 포인트를 말해주는 <원 포인트 그림 감상>

그림 앞에 서면 좋은 느낌과 함께 막막한 기분을 느끼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떻게 앞에 놓인 그림을 알아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런 거 같다.

그림은 그저 보이고 느껴지는 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보고 느끼는 것도 뭔가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은 어디에 포인트를 두어야 할까?

그저 벌거벗고 울고 있는 거 같은 여인을 보며 그 사정을 헤아려 보는 게 다였는데 저자는 그녀의 새끼발가락을 주목했다.

생기다 만 거 같은 작은 발가락이 그녀를 더 애처롭고 슬퍼 보이게 만든단다.

게다가 고흐가 '친일파'라서 이 그림에 전혀 필요 없을 거 같은 벚꽃나무가 그려진 풍경 때문에 더 슬프다고 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대목이겠지만 이런 사실을 몰랐다면 그저 생뚱맞지만 고흐니까!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신윤복은 고민 끝에 묘책을 짜낸다. 신체를 분산 배치하는 전략으로, 외설성을 기막히게 피해 간다. 그러면서도 춘화처럼 그림에 표현할 것은 다 했다. 외설과 예술의 차이는 은밀한 부위를 한꺼번에 보여 주느냐, 분산해서 보여 주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윤복의 뛰어난 점은 이런 연출의 묘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

그림은 많이 보았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단오의 풍경을 그린 해학적인 그림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신 스틸러'라는 제목을 붙인 신윤복의 '단오풍정'의 포인트를 알고 나니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이러니 그림은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 책의 표지에 쓰인 그림은 강형구의 <푸른색의 빈센트 반 고흐>다.

이 그림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는 얼굴의 절단 효과다.

대형 캔버스를 꽉 채운 얼굴이지만 대부분은 절단되고 얼굴의 일부만 보인다.

그리고 그 일부 중 눈빛이 보는 사람의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푸르게 빛난다.

마치 고흐가 나를 뚫어지게 째려보는 느낌이다.

지은 죄도 없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든다.

강형구 작가가 느끼는 고흐가 그 그림 안에 담겨 있다.

 




마음의 번역기를 통해, '청각의 시각화'는 자연스럽게 '시각의 청각화'로 전환된다. 이로써 감상자는 선인들이 들었던 박연폭포 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다.

[박연폭포]는 소리를 '보여 주는' 빼어난 공감각적 그림이다.

 

 

정선의 <박연 폭포>는 직접 폭포를 보고 그린 게 아니다.

정신적 스승인 농암 김창협의 글을 토대로 그렸다.

본 적도 없는 폭포를 글을 통해 접하고 그린 그림이라 실제와 차이가 있다.

실제보다 더 우렁찬 폭포소리가 들릴 듯이 그렸다.

이렇듯 그림엔 작가의 마음이 담기고 감상자의 마음도 담긴다.

 

 

램브란트의 [작업실의 화가]

이 그림을 보면서 압도적인 캔버스의 모습이 놀라웠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램브란트 본인의 모습이 그림자에 가려져 더 희미하게 보인다.

아마도 램브란트에게 작업실이란 자기 자신마저도 부속품처럼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장소였나 보다.

작업실의 주인공은 램브란트가 아니라 캔버스다.

 

 

작품을 감상할 때 중점적으로 하나에 집중하면서 감상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갖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할 거 같다.

전시회를 다니며 이 책에서 배운 것들을 실습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감상 포인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저자는 전시회의 그림을 선입견 없이 먼저 보고 도록이나 팜플렛을 챙겨서 다시 천천히 음미한다고 한다. 그러다 다시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전시회를 가서 또 본다고 한다.

나도 이 방법을 실천해 봐야겠다. 먼저 선입견 없이 보고 나서 팜플렛을 통해 작품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를 통해 나만의 원 포인트 감상법으로 다시 작품을 본다면 그저 쓱~ 보고 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 같다.

 

 

가끔 전시회나 미술관을 가게 되면 그저 그림이나 작품을 훑어보고만 왔는데 이제는 방법을 배웠으니 감상 포인트를 잊지 말아야겠다.

동서양의 작품들을 모아 감상 포인트를 짚어 주어서 적어도 이 책에 담긴 60점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보고, 어디에 초점을 주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림에 관한 책을 읽고 나면 항상 이 말이 떠오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무런 지식 없이 보면서 스스로 뭔가를 느끼는 것도 좋지만,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보는 것은 다른 느낌을 준다.

이 책에 언급된 작가들의 이야기 역시 나는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안만큼 그들의 작품을 보는 눈도 달라졌으리가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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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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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은 감각을 긍정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미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보는 이에게 즉각적인 호소력을 갖고 다가오는 미술입니다.

 

17년간 저자가 한 강연들을 모은 책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저자는 서양미술을 3가지 측면으로 나누었다.

 

인간 중심

 

서양의 투시원근법은 내가 만물의 척도이자 우주의 중심임을 나타내는 표현 양식입니다. 반면 동양의 원근법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고, 자연은 인간보다 크고 광활한 전체이지요.

 

서양의 미술은 인간 중심이다.

그래서 모든 그림에 사람이 주가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미술은 자연중심이다.

그래서 산수화가 주가 된 그림이 많다. 그곳에 인간은 거의 풍경처럼 그려져 있다.

서양 그림에 있는 그림자가 우리나라 그림에는 없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 비교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동양화에서 사람은 작게 그려서 하나의 풍경을 이루거나 최소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서양 그림처럼 인간의 모습이 주가 되어 자세하고 밀접하게 그려진 게 없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은 그냥 봤다면 어떤 것을 표현했는지 몰라서 조각상들이 모두 우울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 담긴 그 당시 6인이 느꼈던 비장한 감정을 잘 표현해낸 로댕은 19세가 최고의 심리학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말이지 칼레의 시민 조각상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사진을 다시 보니 6명의 모습을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칼레 시민을 대표해서 사지로 끌려가는 사람의 심리를 다르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했다. 로댕이 정말 대단한 조각가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실 중심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미술의 사실주의는 논리를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중시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가진 그리스 문화의 사실주의는 중세 때 잠시 사라졌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부활한다.

대리석에 새겨진 조각상들의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의 [검투사]는 헬레니즘 시기의 그리스 조각이지만 주름 하나까지도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상이다.

사진으로 보고 있음에도 그 정교함이 금방이라도 살아날 거 같다.

마치 재생 멈춤을 한 느낌의 조각상이 버튼만 누르면 다시 움직일 것만 같다.

이런 생동감이 서양미술의 오랜 근원이다.

 

측면을 정면 못지않게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초상화를 그릴 때 얼굴 측면을 그리는 장르가 따로 발달했는데, 그것을 일러 '프로파일'이라고 합니다. 프로파일이라면 옆얼굴이라는 뜻 외에 신문 등에 나오는, 특정 인물에 대한 단평이라는 뜻도 있지요. 이처럼 서양인들에게 한 사람을 요약해 보여 주는 것은 그의 얼굴이 정면이 아니라 옆얼굴인 것입니다.

 

감각 중심

 

 

서양미술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미술입니다. 의도적으로 보는 이의 시각을 자극하고, 시각적 쾌감에 기초해 다른 감각적인 즐거움까지 공감각으로 확장해 느끼도록 발달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서양화엔 누드화가 많다.

고대 아르카익기와 고전기 그리스에는 대부분 남성 누드를 대상으로 했다.

그 이유는 세계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존재가 성인 남자라고 생각해서라니 이 부분은 좀 실망스럽다.

어쨌든 누드화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에스라인이 아니라 '에스커브'라고 표현한다.

 

이런 누드화의 발달은 멋진 몸매에 대한 서양인들의 열망을 추동해왔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그들의 몸매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엄마들이 태교의 일환으로 미인과 미남의 얼굴을 자주 보려고 하는 것도 분명 타당한 이유가 될 거 같다^^

 

이처럼 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인체의 비례와 형태에도 영향을 줍니다. 누드 미술을 발달시킨 서양미술은 감각을 긍정함으로써 욕망을 긍정하고,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의 몸조차 적극적으로 욕망의 대상으로 표현하게 된 미술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욕망의 주체로 하여금 신체 비례상의 변화까지 경험하게 한, 매우 감각적인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감각 중심의 서양문화를 가장 잘 반영한 것이 바로 인상파 미술이다.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한 미술인 인상파 미술은 많은 인상파 작가들을 탄생시켰다.

그들을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자연스레 본 것 이외에 자신의 느낌을 화폭에 담았다.

이런 감각적인 작품들은 감상자들의 잠재력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학생 때 미술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듯이 정리해 보았다.

미술 특강을 들으면서 역사 수업도 함께한 기분이다.

그림에 담긴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알고 나면 그림이 달라 보인다.

<이주헌의 서양미술특강>속에서 나는 로댕에 대한 또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횡재한 기분이다.

 

<여기, 까미유 끌로델>을 읽으며 로댕에 대한 분노를 느꼈었는데 <칼레의 시민>조각상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로댕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생겼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런 거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모르니만 못하다는 것.

 

이렇게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미술 특강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렵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미술 소양을 쌓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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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사라지다 - 삶과 죽음으로 보는 우리 미술
임희숙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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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러 장태 풍습 중에서도 조선 완실의 장태 풍습은 체계적으로 계승되어 500여 년 동안이나 독창적인 태실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삶과 죽음으로 보는 우리 미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살다 사라지다>

태어나고 죽는 과정 즉 삶과 죽음을 미술로 되새겨 보는 책이다.

우리에겐 태어날 때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끊어지는 것이 있다.

탯줄.

우리 조상들은 이 탯줄을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었다고 한다.

태어나는 순간 10개월 동안 생명을 지탱해 준 끈과 모체로부터의 이별이다.

아마도 이 장태 풍습은 그 10개월간의 시간이 끝났음을 애도하고 앞으로의 삶이 순탄하기를 기리는 조상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접하지 못했던 탯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살다 사라지다>는 그 시작처럼 우리 미술을 보는 시각을 다르게 설명한다.

 

 

한 시대의 미술품에는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무의식적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술적 표현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 새겨진 상징적인 기록이다.

 

2부 소멸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평양성의 의로운 기녀 계월향 편이 인상적이었다.





죽은 지 200년이 지나서 겨우 초상화가 만들어진 계월향.

상상으로 만들어진 초상화가 죽은 그녀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구전으로 전해진 그녀의 의기가 시간이 지나서도 잊히지 않고 남았던 것은 그녀의 의기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의로운 기녀들이 몇 있지만 계월향은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임진왜란 당시에 평양성의 기생이었다.

그녀는 조방장 김응서와 공모해 왜장을 죽였으나 김응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계월향이 김응서를 몰래 성에 잠입시켜 막사에서 잠든 왜장을 죽였으나 도망치던 중에 둘 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김응서가 계월향을 칼로 베고 혼자 빠져나왔다고 한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라서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논개는 적장을 품고 강물에 뛰어들어 그 이름을 길이 남겼는데 계월향은 적장을 죽일 수 있게 도움을 주고도 같은 편의 칼에 죽임을 당했으니 그녀가 원한 일인지 김응서의 판단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용기만큼은 잊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계월향의 안타까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맺혔나 보다.

구전으로 전해져 200년 뒤에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까지 남겨질 정도로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은 계월향.

그녀의 죽음은 21세기에도 이렇게 책에 담겨 그녀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나에게도 닿았다.

그녀는 세상에 없지만 기억으로 남아 21세기 이후까지도 살아갈 것이다.

 

시인이자 미술사 연구자인 저자의 글들은 섬세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이나 미술품을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더 애달프면서도 고요하다.

전문적인 지식을 마치 역사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살다 사라지다>

그저 보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이렇게 색다른 감성으로 알아가는 기분이 또 다른 호기심으로 연결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책에 담긴 그림, 도자기, 조각들을 그동안 무심히 보았다면 이 책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사라진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음미하며 본다면 아주 다른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문서적이라 생각해서 좀 어려울 거 같이 느껴졌는데 마치 역사의 뒷얘기를 읽는 거 같아서 재밌었다.

우리 미술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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