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
어맨다 고먼 지음, 정은귀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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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사랑하라 / 실패한 것처럼, 쉽게 말하면 / 우리는 지구를 난파시켜왔다는 것 / 대지를 더렵혀왔다는 것 / & 이 땅을 좌초되게 했다는 것.

 

 

최초라는 타이틀을 걸머진 청년 시인 어맨다 고먼의 70편의 시들이 담긴 시집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덕에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마음이 더 와닿았다.

10월에 초겨울 날씨를 접하고 있다 보니 우리가 이 지구를 점점 병들게 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까...

 

이 시집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젊은 시인이 느낀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이다.

 





색다른 편집과 색다른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걸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의 진실은, 우리가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의 교훈은, 우리가 얻은 모든 것

& 우리가 가져온 모든 것이다.

 

 

 

시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하고

문자 주고받기를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이야기 버스킹 같기도 하다.

 

어맨다 고먼이 거리에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그녀의 말이 시가 될 때쯤이면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우리의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들이,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인내가 우리가 지나온 길을 같이 한다.

 

세상은 잠겨 있었고

우리의 자유는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견뎌내고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자유는

자유롭지 못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자유로웠다는 걸 알게 해준다.

팬데믹 이전의 삶은 나와 이미 거리를 두었다.

우리에겐 마스크라는 화장품과 거리 두기라는 외출복이 생겼다.

 

어맨다 고먼은 파릇파릇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신선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보게 한다.

 

 

멋 내지 않은 말들이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살아 있는 시처럼 느껴진다.

세상을 보는 살아 있는 시선.

 

여지껏 내가 읽은 시들은 결국은 사랑에 대한 시였다.

사랑에 대해 새로운 세대는 새롭게 얘기한다.

그들의 사랑은 전체적이고 포괄적이다.

지구를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지구에 뿌리내린 수많은 민족들을

지구에 뿌려진 무수한 문화들을

누군가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 '사랑'

 

그것이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에 담긴 '사랑'이다.

 

내 연인이 아니라

내 조국이 아니라

이 지구를

이 지구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사랑' 하자는 시인의 뜻에

굳어진 마음이 촉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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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식물의 세계 - 끝내 진화하여 살아남고 마는 식물 이야기
김진옥.소지현 지음 / 다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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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식물의 생명력을 깨닫게 된다.

예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이름 모를 꽃들과 풀들이 아주 작은 틈새를 비집고 터를 잡은 모습은 경이롭다.

어쩜 이런 곳에서 잘도 살아남았구나!

산책길에 도저히 식물이 자랄 법 하지 않은 곳에서 위태위태 뿌리를 내린 모습을 볼 때마다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극한 식물의 세계>는 그런 식물의 경이로움과 위대함을 증폭시켜준다.

지구의 주인처럼 군림하고 있는 인간군은 저 식물군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인간의 생명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지만 식물은 인간 보다 유연하고 독하게 자신들을 업그레이드할 줄 알기 때문이다.

 

식물은 본디 천적이 나타났을 때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날카로운 가시나 강력한 독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전략이 효과적일수록 식물의 가시와 독은 더 날카롭고 강력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죠.

 

 

강력한 독을 품고 있는 식물은 위험하면서도 유용하다.

피마자의 씨앗에 들어 있는 독 '리신'은 독성물질로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 피마자는 여러곳에 유용하게 쓰인다.

재배하기도 쉬워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세포가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리신' 보다 더한 독성을 지닌 '아브린'은 홍두의 씨앗이다.

홍두의 빨간 색은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서 점점 선명해졌고, 인간의 눈에 띄어 보석 대신 장신구로도 사용되었다.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악마의 발톱은 오래 전 거대 동물들과 공존했을 때 자신을 보호 하고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서 갈고리 모양으로 진화되었다. 지금은 매머드 같은 동물들이 사라져서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이 악마의 발톱은 관절에 효능이 좋기로 유명하다.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무화과인데 이 무화과의 닉네임은 '교살자'다.

착생식물인 무화과는 다른 식물에 기생해서 뿌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붙어 있는데 뿌리가 땅에 닿으면 달라붙어 있던 식물을 서서히 옥죄어 가다가 결국 죽게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와~ 무화과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거구나! 울 엄마는 무서운 걸 좋아하시네~

 

8년 만에 거대한 꽃을 피우는 시체꽃. 타이탄 아룸.

이 어렵게 핀 꽃이 풍기는 악취는 바로 파리와 딱정벌레를 부르기 위해서다.

그들이 시체에다 알을 까기 때문에 시체 냄새를 풍겨 그들을 부른다. 그들을 부르는 이유는 씨앗을 퍼트리기 위해서다.

 

번식을 위해 일부러 불을 일으키는 식물도 있다.

유칼립투스는 화재에 최적화되어 있는 나무다.

유칼립투스의 씨앗은 산불이 지나가고 나면 벌어져서 작은 씨앗들을 세상에 내보낸다.

단열재 역할을 하는 두꺼운 섬유질 껍질이 발달해 있는 줄기를 가진 유칼립투스.

모기와 각종 벌레를 쫓는 효과를 가진 향기를 내는 빠른 성장을 자랑하는 유칼립투스의 반전 매력(?)이다.




식물의 다양한 생태계를 엿볼 수 있는 <극한 식물의 세계>는 다양한 식물 일러스트와 사진이 담겨 있어서 실물로 보기 힘든 식물들을 사진과 일러스트로나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다양한 사진 컷을 좁은 지면에 담다 보니 한눈에 들어오지 못하는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식물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읽었지만 거의 외국 도서였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관찰하고 지은 책이라서 더 좋았다.

세상을 인간종이 모두 독점하다시피 살고 있는데 정작 제일 무섭고, 제일 강한 것은 동물종이 아니라 식물종이었다.

식물은 한 곳에 뿌리내려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과 자손들을 살려내야 하기에 더 유혹적이면서도 더 치명적으로 진화해 왔다.

 

인간의 역사 보다 더 오래 살아낸 나무는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실 므두셀라 보다 더 오래 산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나이를 알기 위해 나이테를 얻으려고 그 나무를 잘라냈다는 사실 앞에서 정말 인간의 무지를 다각도로 경험했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동안 지구상의 동식물의 멸종률이 급격히 많아졌다.

모두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사라졌다.

인간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나, 보기 싫다고 생각했거나,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멸종된 무수히 많은 것들...

어느 척박한 곳이라도 틈새만 있으면 생명의 뿌리를 내리는 식물들조차도 인간의 손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극한 식물의 세계>는 어떤 스릴러 보다 더 스릴 있다.

그들이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 온 모든 경우를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만 읽어도 길 가다 만나는 꽃들이나 식물 줄기와 나무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을 것이다.

 

베란다에서 잘 자라고 있는 나의 식물들이 갑자기 달리 보인다.

나는 저 아이들만큼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까?

몇 해 전 활짝 핀 꽃을 자랑하던 수국이 그 이후로 꽃을 전혀 피우지 않는다.

누군가가 수국을 극한까지 놔두라고 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나면 내년에는 꽃을 피울 거라고.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극한 식물의 세계>를 읽고 나니 왠지 내년엔 수국이를 다시 만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무심히 봤던 세계가 이렇게 거대하고 체계적인 줄 몰랐다.

식물이야말로 정말 소리 없이 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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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웬디 미첼 지음, 조진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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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치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바로 치매가 우리의 먹는 방법은 물론 먹는 음식까지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저자는 영국국민의료보험에서 비임상팀 팀장으로 근무하다 58세에 조기 발병 치매를 진단받았다.

이 책은 그가 자신에게 찾아온 현상들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치매라는 병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정말 없다는 생각을 한 그가 자신의 경험을 적음으로써 이 병에 대한 자료와 자신처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쓴 책이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치매에 대한 지식이 겨우 '기억을 잃어가는 것' 밖에는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외에는 치매가 어떤 병이고,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고, 치매 환자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치매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주는 걸까?

사람마다 다르게 진행되고 그 경중이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환자가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나 자신이나 내 주변에서 이 병을 가진 사람이 생긴다면 그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이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의 눈은 예전처럼 음식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음식과 접시의 색깔 대조가 뚜렷해야 접시에 음식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할 수 있다.

 

치매 환자는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음식이 맛없는지 맛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흰 그릇에 음식이 놓여 있으면 그것을 인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색이 들어간 접시를 선택했다.

음식과 접시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릇도 편편한 접시보다는 오목한 접시를 선택했다. 음식을 흘리지 않고 먹기 위해서다.

 

 

치매 환자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이것이 치매의 증상임을 이해해야 한다. 환자가 무슨 냄새가 난다고 말할 때, 그 순간 그에게는 정말 냄새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안다면, 모두를 위해 치매와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치매에 걸리면 눈은 환각을 본다.

그것이 좋은 기억일 수도 있고, 나쁜 기억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그 순간의 기억이 다르기에 무언가를 보고 무서워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당황하거나 한다면 그건 그의 뇌가 기억의 어느 부분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친구 중에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수없이 '뱀'을 잡았다고 하는 친구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셔서 방에 자꾸 '뱀'이 있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매일 뱀을 잡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는 친구의 말이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그녀의 시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뱀과 마주친 순간이었나 보다.

그녀의 뇌는 자꾸 그 상황을 복기하고 그녀를 계속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나한테 늘 더 필요한 한 가지는 시간이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나한테 가장 나쁜 말은 '빨리 해'다. 이 두 마디를 들으면 돌연 공포와 혼란, 실패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혼자 생활하면 내 시간은 나의 것이다. 내 속도에 맞게 하면 된다.

 

 

치매에 걸리고 나서 맛을 잊어버리고, 과거가 눈앞에서 재생되며, 환청이 들린다고 한다.

소리에 민감해서 보통 때라면 그저 스치고 지나칠 백색 소음조차 증폭되어 들려서 신경을 괴롭힌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들리기에 예민해지고,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기에 '또 시작했군' 이라고 생각하며 환자를 진정시키려고만 할 뿐이다.

 

저자는 혼자서 생활한다.

요리하는 걸 좋아했지만 이제는 요리를 하는 대신 간편 요리를 사서 쟁여 놓고 먹는다.

먹는다기보다는 몸에 영양분을 공급할 따름이다. 늘 똑같은 음식을 한 달 내내 먹어도 치매 환자에게는 늘 새로운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정말 서글프다...

 

치매 진단을 받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거 같다.

치매 환자는 현실을 산다는 저자의 말이 참 심오하게 들린다.

지금 현재 보이고, 들리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충실한 삶.

저자는 그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아마도 병증이 더 심해지면 그녀는 더 많은 걸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하루하루는 늘 새로울 것이다.

 

치매란

인간이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인 거 같다.

예전에 스핑크스가 자신을 통과 하기를 원하는 인간들에게 던진 질문이 있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무엇이냐?"

나이 들면 점점 어린애로 변한다고 한 옛말은 치매의 옛 버전이 아닐까?

 

저자가 자신이 음식을 먹을 때 자신의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와 비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치매를 말하는 좋은 예가 되는 거 같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치매 환자의 시간도 거꾸로 흐른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치매가 나에겐 두려움을 주는 병중에 하나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 병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모든 병에는 그것을 극복해 내는 사람들이 있다.

치매라는 병에는 치료 약도 회복될 경우도 지금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 저자처럼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조건 병에 걸렸다고 억압하거나, 무조건 일상에서 제외하기보다는 같이 일상을 이어갈 수 있게 많은 돌봄이 필요할 거 같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치매'에 대해서만은 아는 게 힘이라고 해야겠다.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은 얼마 전 읽은 <돌봄이 돌보는 세계>와도 맥락이 닿는 책이다.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비해야 할 거 같다.

이 책의 저자처럼 치매에 걸렸어도 혼자서 생활이 가능하게 하려면 주위의 돌봄과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짐스러워 할 게 아니라 서로가 품앗이를 하는 세상이 온다면 정말 좋겠다..

 

나와 내 주변을 위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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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다크 버네사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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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이겠지." 그는 말했다. "마침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열다섯 살이라니."

 

 

촘촘하다.

그가 버네사에게 다가가는 모든 상황이.

한 올 한 올 뿜어내는 거미줄같이.

얼마나 많은 버네사들이 그 거미줄에 걸려들었을까?

 

버네사는 호텔 프런트에서 일한다.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그녀의 인생은 온통 스트레인의 거미줄에 매여 있다.

지금 그는 어린 학생이 고발에 학교로부터 심사를 받는 중이다.

버네사는 그 학생의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는 걸 멈출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퍼나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가 버네사의 최대 관심사다. 그리고 스트레인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해서 그의 상태를 알아보는 것에 그녀의 하루를 다 쓴다.

그럼에도 그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스트레인과 있었던 일은 모두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마이 다크 버네사>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은 견디다 못해 세상을 버렸고, 한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썼지만 대중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한 사람은 누군가 용기를 내어 그를 박살 내주기를 바라지만 자신은 나서지 않는다.

자기는 다른 경우니까...





어린 소녀에게 마수를 뻗치는 자는 그 소녀에게 힘을 준다.

마치 모든 게 그 아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 아이가 원한 것이고, 그 아이가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열다섯의 아이는 스스로 롤리타가 되어 자신이 그를 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영리하지만 외로웠던 아이에게 그의 관심은 스스로를 어른처럼 여기게 만든다.

교묘하고 촘촘하게 스트레인은 버네사를 가뒀다. 열다섯이라는 나이 안에.

 

버네사를 만나는 동안 내내 조마조마했다.

버네사가 수렁의 늪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서서히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이상한 소문들에 대해서 들었으면서도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

 

진실은 숨을 곳을 주지 않는다.

 

 

서른이 넘었지만 버네사는 스트레인 때문에 그 나이를 살지 못한다.

여전히 그와 연결되어 있고, 그로 인해 다른 관계들조차 엉망이 된다.

상담을 받고 있지만 그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지 그녀와 스트레인의 관계 때문은 아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기는 싫다. 그것은 그녀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성적인 대상이 된다는 것.

30년 차이 나는 사람에게서 남자를 느낀다는 것.

스스로가 아닌 그가 유도하는 바대로 나아가는 버네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스트레인에게 빼앗긴다.

문학을 사랑했던 소녀는 자신만의 시를 썼지만 스트레인에게 매인 소녀는 그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를 쓴다.

자신이 얼마나 어른스러운지를 증명하는 시간들...

 

스트레인 같은 인간은 사라져야 하지만

그는 또 면죄부를 받는다.

하버드를 나온 독신남은 험버트가 되어 롤리타들을 만들어 내지만 그 누구도 그의 죄를 묻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버네사의 이야기는 피해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에서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자신의 삶이 무너졌지만 그것을 다르게 인지하면서 스스로를 그 틀에 놓아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왜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아름답고

영민하고

밝은 삶으로 충만했을 한 소녀의 인생이

거미줄에 걸려서 전시되고 있었다.

 

모두 거미줄을 바라보지만 피할 뿐

거기 매달려 있는 거미의 먹이들에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가끔은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에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볼 뿐

그 덫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는 슬픈 영혼들을 보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버네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당신 인생을 찾아야 한다. 이제라도...

 

스트레인 같은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사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롤리타, 팡쓰치, 버네사는 모두 우리 주변의 소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은 미개한 사회이고 무지한 사회다.

 

작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쓴 글들은 그만한 가치를 얻었다.

읽다 보면 우리는 모두 버네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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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의 신들 네오픽션 ON시리즈 3
박해로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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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시대에는 원래 공포소설이 히트치죠. 겁에 질린 사람들을 양 떼처럼 따르게 하려면 공포를 조장하는 게 좋은 방법이에요. <단죄의 신들>도 공포소설이고."

 

 

사라진 지 18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사촌 누이가 유명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출판사 사람들이 찾아와 마지막 원고를 남겨두고 사라진 누이를 찾게 도와달라고 말할 때 그는 사라진 누이 보다 그 누이가 남길 '돈'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부패 교도관이었고, 그를 이용하면서도 그의 목줄을 잡고 있는 수감자에게 수시로 협박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부모를 죽게 만든 누이 서진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길은 죽음이 난무하는 길이었다.

 




며칠 사이 세 사람이나 죽었다. 죽음을 재촉하는 어떤 기운을 주생은 느꼈다. 그 기운이 출몰한 것은 18년 동안 보지 못했던 사촌누나를 인식하고 나서부터였다.

 

1857년과 2022년의 시점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흐른다.

지옥도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재생한 거 같은 첫 장면부터 독자들을 정신없이 몰입하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단죄의 신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상은 더더욱 지옥스러워졌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대칭적 죽음을 선사하고, 이유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주생은 서진을 찾긴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를 죄어오는 '돈'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녀가 쓴 책이 대박 났고, 서진이 죽었다면 그 돈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니까.

그러나 주생이 가는 곳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죽는다.

 

머리가 돌아가서 죽은 사람

카페로 차가 돌진해서 죽은 사람

만나기로 해 놓고 그가 도착하자 투신해서 죽는 사람

그리고 그를 괴롭히던 죄수마저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18년 동안 연락 없이 살았던 서진은 교도소에 있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주생은 그녀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쓴 책 내용도 이상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러다 주생은 알게 된다. 자기 집안의 비밀을.

자신의 아버지가 밀교의 교주였다는 사실을.

서진은 그 아버지를 피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그리고 마지막 원고가 출판사에 도착한다.

서진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의 집에 무수히 많았던 거울은 무엇을 뜻할까?

 

오성교.

불교를 빙자한 사이비.

인간의 죄를 단죄하기 위해 고문과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비밀단체.

165년마다 부활하는 그들의 신 일선제력과 월선제력.

재림과 환생과 무당과 지옥의 세계가 살인과 함께 현실을 잊게 만든다.

 

박해로 작가의 <단죄의 신들>을 읽으며

지금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된다.

'돈'을 인생의 척도로 삼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마약처럼 모두의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

그들의 허망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종교라는 이름의 지옥은 쉽게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중독시킨다.

 

사람들의 생각을 뺏어가는 세치 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환상.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는 가짜들.

일선제력과 월선제력은 이 세상의 모든 귀와 눈을 가리는 미디어가 아닐까?

 

"마음은 거울이다. 닦지 않으면 더러워진다. 쳐다보기 급급하고 내세우기 급급한 너희들은 거울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너희들에게 깨우침을 주려고 내가 너희들의 거울을 깨버린 것이다. 거울을 깨는 순간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가짜로 세상을 현혹시키려는 그들의 술수에서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그렇게 보고, 믿는 세상은 지옥처럼 두렵고 불편하고 괴롭다.

 

주생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김 전무 같은 사람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그곳에 안착했다.

마치 대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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