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영원한 우정으로 1~2 세트 - 전2권 스토리콜렉터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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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난 며칠 동안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소식을 전했어." 피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빌어먹을 사건이야. 거짓말과 부작용이 가득해."

 

 

기다리고 있었던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열 번째 이야기 <영원한 우정으로>.

이번에도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야기로 이틀을 숨가쁘게 읽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촘촘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인간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밝혀지는 범인들은 의외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언제나 눈앞에서 알짱거리지만 절대 마지막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타우누스 시리즈의 잔혹한 범인들은 언제나 그렇게 보통 사람으로 숨어 있는 자다.

 

현실에서 범인은 희생자의 주변 인물일 때가 많았고 살인 동기 역시 복수나 부러움, 질투와 탐욕 또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언제나 놀랄 만큼 일상적이었다.

 

 

두 번째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보덴슈타인.

전 남편 헤닝이 스릴러 작가로 데뷔하면서 피아와 주변인들은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있다.

헤닝의 작품 제목이 <타우누스 시리즈>인 것이 은근한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은 오래된 가족 경영 출판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헤닝의 에이전트인 마리아 하우실트의 친구 하이케 베르시가 며칠째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살펴보러 간 피아는 하이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강력사건이 없어서 늘 연수만 받으러 다니던 강력 11반엔 활기가 돌고 사라진 하이케 베르시가 출판계에선 유명한 독설가로 이름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녀가 일으킨 평지풍파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하루아침에 표절 작가로 전락시키고, 그녀가 30년 동안 몸담았던 빈터샤이트 출판사는 회사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갓 취임한 카를 빈터샤이트는 흔들림 없이 회사를 지키며 하이케를 해고해 버린다.

 

구세력과 신세력의 힘겨루기,

달라진 독자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하는 실세들과 새로운 독자층을 겨냥한 젊은 사장의 기싸움은 여러 방향에서 어두운 과거를 불러온다.

 

거짓말은 암이 자라는 것과 같아요. 자라고 또 자라서 전이되고, 계속 자라서 모든 걸 독살해요. 간단하게 없앨 수가 없어요.

 

하이케의 시신이 발견되고 실종에서 살인 사건으로 바뀌면서 하이케를 둘러싼 주변인들에 대한 탐사가 이어진다.

영원한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30년 넘게 이어져온 그들은 각자 익명의 편지를 받는다.

 

나는 네가 1983년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너도 그걸 알고.

 

이렇게 시작되는 익명의 편지를 받은 그들의 과거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입막음을 했던 진실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러도 그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겉껍질을 아무리 포장해도 언젠가는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영원한 우정으로>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상에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입을 닫아도, 비밀은 언제나 새어나갈 구멍을 찾는 법이니까.

 

집단의 힘을 그저 심리적 현상이라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힘은 '나'라는 감정을 '우리'라는 감정으로 변하게 하므로 한 개인을 책임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단결하게 만든다. 이제 더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타우누스 시리즈를 읽다 보면 범인의 의외성에 놀랄 때가 많다.

욕심과 질투, 욕망과 비밀이 밝혀질 때쯤 독자들이 예상하고 증거가 알려주는 범인은 결코 범인인 적이 없다.

그리고 범인의 동기는 언제나 단순한 것이다.

그런 사실이 더 소름 돋게 한다. 왜냐하면 현실도 마찬가지니까.

 

정다운 이웃

친절한 사람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한 사람이 그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놀라움의 강도가 더해진다.

<영원한 우정으로>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게 되어 있는 거 같다.

아무리 속이고, 비밀을 지켜내려 해도, 정의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피아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보덴슈타인을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점점 나이 들어간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두 사람의 수사 방식이 좋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가족이라고 해도 강력 범죄 앞에 항시 노출되어 있는 이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이 감싸지 못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동료의식이 좋다.

서로의 미비한 점을 보완해 주고, 서로의 감정을 덜어주는 동료애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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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진 리더들의 전쟁사 - 고민하는 리더를 위한
존 M. 제닝스 외 지음, 곽지원 옮김 / 레드리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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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사기꾼, 멍청이, 정치꾼, 덜렁이라는 5개의 키워드로 만나보는 세계 전쟁사에 이름을 올린 리더들.

요즘처럼 절실하게 리더의 자질이 요구되는 시간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참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났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라던데 우리는 여지껏 승리만을 쫓으며 그 승리에서 배워야 할 것들만을 취해왔다.

그래서인지 실패한 리더들에 대한 이야기만 모아 놓은 이 책은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된 책이다.

어떤 사람들이 삐뚤어지고 실패한 리더일까?

 

감리교 목사였던 사람이 군인이 되어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했다.

부하들을 존중하지도,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던 것은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을 위해 무시했기 때문이다.

전투원보다 여성과 아이들이 많았던 부족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군인들은 임신한 여성의 자궁에서 태아를 꺼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정부와 원주민의 협약을 그가 무시하고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원주민들의 보복을 감당해야 했다.

이토록 잔인무도한 짓을 벌인 자는 치빙턴.

자신의 야망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 지침을 거역하고, 부하들의 의견과 항의도 무시한 그의 행동은 인디언의 보복사건으로 이어졌고,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 미군을 좌절시켰다.

 

"아무리 허접한 부대라도 필로가 지키는 참호라면 사정거리 내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모욕적인 말을 적장으로부터 듣는 사람은 누굴까?

기드언 필로는 시민군 전통을 동경하고 존중하는 유력하고 풍족한 가문에서 자랐다.

그런 가문에서 자랐을 뿐 그는 그 어떤 역량도 없었다. 그의 무능함은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뿐이었다.

명성만 있을 뿐 실전에서는 형편없는 그의 무능력은 전장의 사기꾼 소리를 들을만하다.

 

동서양과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이 실패한 리더들의 공통점은 바로 '무능함'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자만심에 쩔어 있었으며 잔인했고, 늘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남의 탓을 했다.

이 책임 회피론자들 중에는 자신을 잘 포장해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 사람도 있고, 타고난 연줄이 좋아서 승진했지만 실전에서 바닥만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감도 없었으며 사죄도 하지 않았다.

 

무지한 자의 신념처럼 무서운 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승리와 성공 사례만을 가르치는 사관학교 수업에 문제점을 느끼고 이 실패한 전쟁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엮어냈다.

그들의 실패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그들의 성향이 어떠했는지를 배움으로써 진정한 리더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영웅은 적고, 승리자도 적다.

다만 실패자는 무수히 많다.

우리는 실패자들의 모습에서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배울 게 있다는 걸 안다.

그건 우리도 살면서 자잘하게 느끼는 실패들 속에서 스스로를 점검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문제점을 알아서 그것을 고쳐 나아가는 사람이 될지, 그 문제점을 외면하고, 남 탓을 하며 자신을 포장해 나아갈지는 스스로의 선택에 있다.

 

우리는 총만 안 들었을 뿐 매일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그 전쟁터에서 작은 승리라도 거두고 싶다면 이 실패한 리더들에게서 배우지 말아야 할 점들을 알아내는 것이 나의 작은 승리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모사꾼이 되어서도 안되며, 능력 밖의 것을 탐하는 것도 안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 앞에서는 주변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한 독불장군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지옥 같은 구렁텅이로 몰아갈 뿐이다.

 

참.

시기적절한 시간대에 읽게 된 책이다.

누군가도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전부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무능함과 잔인함과 교활함을 읽는데 속이 쓰렸다.

참다운 리더를 알아보는 눈을 길러야겠다.

좋은 리더는 바로 그런 리더를 알아보는 수많은 눈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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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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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궁 안에는 구불구불하게 주름진 희뿌연 뇌가 들어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사고를 당한 남편의 몸을 복제할 때까지 그의 뇌를 내 자궁에 넣어서 보존해야 한다면?

그러기 위해 2년간 임신 상태로 있어야 한다면?

그렇게 복제된 남편은 정말 내 남편이 맞을까?

아이 대신 뇌를 임신(?)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면?

이 모든 행위를 필요로 하는 이것은 적절한 사랑일까?

 

나의 증세 대부분은 두골 내의 압력이 높아진 것이 원인이지만, 뇌척수액을 검사해 본 결과 루엔케팔린이라는 물질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루엔케팔린은 신경 펩티드인 엔도르핀의 일종으로 마약성 진정 물질과 결합하는 수용체들과 동일하다.

악성 종양과 함께 나는 루엔케팔린을 얻었다.

행복감을 표시하는 주요 수단인 루엔케팔린.

하지만 악성 종양을 없애자 사라진 루엔케팔린으로 인해 나는 끔찍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행복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는 의뇌를 이식하기로 한다.

20~30대 남성 4000명분의 기록이 담긴 의뇌.

감정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뇌를 가진 '나'가 느끼는 행복은 진짜일까?

 

11편의 단편은 나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들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보거나 읽은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한층 심오하고 한층 과학적이다.

그래서 이해하는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뭔가 알 거 같은데 '감'이 잡히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렉 이건이 보여주는 세계는 그동안 SF 소설들을 통해서 알아온 세계와 조금 결이 다른 거 같다.

좀 더 과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내게 과학적 지식이 좀 더 있었다면 완벽하게 이해했을 거 같은 이야기들이 앞에서 좀 아쉬웠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뜻은 아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그렉 이건의 세계는 이제까지의 SF 소설들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테드 창이 철학적인 SF의 세계를 펼친다면 그렉 이건은 독특한 상상력이 실현 가능한 과학기술의 세계를 선사한다.

그렇기에 마주치는 단편적 이야기들 앞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내가 그렉 이건의 SF 세상에서 이런 일들을 겪는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과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지식을 맘껏 펼쳐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이야기.

과학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자체를 알게 되어서 좋은 이야기.

<내가 행복한 이유>

 

독특한 이야기들을 읽는 것만으로 마치 미래를 다녀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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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이 돌보는 세계 - 취약함을 가능성으로, 공존을 향한 새로운 질서
김창엽 외 지음, 다른몸들 기획 / 동아시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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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지 비명밖에 기록할 수 없다고 해도,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조직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환자들의 이야기들이 모이고, 우리 사회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의료의 주체인 질환자, 돌봄 당사자, 의료 종사자 간에 더 건강한 관계가 정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취약함을 가능성으로, 공존을 향한 새로운 질서라는 부제가 붙은 <돌봄이 돌보는 세계>

그동안 개선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관심을 갖지 못했던 '돌봄'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은 질병, 장애, 권리, 노동, 의료, 교육, 젠더, 혁명, 이주, 탈성장이라는 열 개의 키워드로 열한 분의 글들이 실려 있다.

그들의 글을 통해서 곁에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수많은 돌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적극적으로 의존하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몸을 무능력과 수치로만 여기는 사회에서, 그런 '수치스러운 몸'이 된다는 공포는 죽음보다 삶을 두렵게 만들고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질병이나 죽음과 자주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본다.

 

한 달 반이 넘는 시간 동안 다리 수술을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동생을 돌보며 난생처음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서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정말 <<불편한 세상>>이라는 걸 느꼈다.

고르지 못한 보도블록, 버튼을 눌러야만 열리는 자동문,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화장실, 휠체어로 이동하기 어려운 대중교통.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담긴 분들의 경험들이 남에 일 같지가 않았다.





자신에게 맞는 의존의 선택지가 적을수록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 제한을 겪고 '약자화'된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자연 그 사람을 돌보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다.

불문율처럼 당연한 이야기였다.

처음엔 경제력의 유무에 달렸다고 생각했지만 똑같이 경제활동을 해도 환자는 거의 여성의 몫이었다.

병원 다니기와, 간호와 자잘한 병수발 모두가 여성의 몫이 가장 컸다.

그리고 그 돌봄은 당연시되었을 뿐 그 무엇으로도 환산되지 않았다.

그들의 노고와 그들의 시간은 그저 당연함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맞는 것일까?

 

문제는 의존하고 돌봄 받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돌봄을 둘러싼 권력과 통제권이 그 핵심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경우를 이입해 본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내 동생은 혼자 휠체어를 타고서 카페에 갈 수 있었을까?

카페에 갔다고 해도 셀프서비스와 키오스크가 대세인 세상에서 주문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걸어다는 사람들에게 맞춰서 설치되어 있는 키오스크는 휠체어를 사용하거나 키 작은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높다.

셀프서비스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편하게 변해가는 거 같으면서도 점점 더 불편한 거 같은 이유는 뭘까?

그건 '사람'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장애인들을 위한, 그중에서도 가장 최신의 정보나 기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집과 동네만 어슬렁거리던 나의 세상에서 잠시 외유를 했던 세상은 모든 게 애플리케이션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되었다.

앱 없이는 택시도 잡을 수 없고, 앱 없이는 결제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어있었다.

 

돌봄이라고 하면 질병이나 장애에 대한 돌봄을 우선 생각하겠지만 변화하는 세상에 재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돌봄은 필요하다.

급격하게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디지털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 역시나 돌봄의 대상이 된다.

아마도 돌봄이라는 단어에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질병과 노화는 살아가다 보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우리 사회는 급진적 발전으로 인해 그 속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을 갖췄다.

그것이 선진국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그만큼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사회는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그에 따른 법과 사람들의 인식은 미처 못 따라가고 있는 거 같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 속도를 못 따라가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보강되어야 한다.

 

이 책은 여럿이 읽고 생각을 나누고 싶은 책이다.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좋은 의견들이 나와 정말 사회 곳곳에 빛나는 아이디어로 채택되었으면 좋겠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우리에겐 동네 사람, 이웃사촌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서로의 돌봄이었다. 품앗이라는 의미를 아는 세상이었다.

우리는 불과 30~ 40년 만에 그 모든 걸 잃었다.

다시 되찾을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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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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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내 안에 흘러 다니는 모든 말들을 글로 쓸 것이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온 그 말들을 읽을 테고, 결국 여자가 시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덴마크 작가의 글을 몇 권 읽었는데 모두 장르소설 분야였다.

건조함에 살짝 가미된 유머와 그 안에 버무려진 사회성 짙은 이야기에 묘한 매력을 느꼈었다.

덴마크 에세이는 처음인데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독자들의 눈길을 받은 글들이다.

<코펜하겐 삼부작> 중 <어린 시절>은 작가의 어린 시절이 담긴 글이다.

토베의 글을 읽으며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었던 때가 떠올랐다.

박완서 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엔 그분의 어린 시절이 담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어린 시절을 그렇게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가 감탄스러웠다.

토베의 글이 가진 감수성은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워서 아주 작은 소녀의 모습 위로 굳건한 어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어린 시절은 관(棺)처럼 좁고 길어서,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기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모두가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녀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

어느 나라에나, 어느 시대에나 같은 생각들이 공유되었나 보다.

그러나 소녀는 시인이 되었다. 소녀에 마음에 넘쳐나던 많은 이야기들이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까.

 




어린 시절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힌 채 잊혀 버린 작은 동물처럼 언제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상황과 시간과 사람과 감정을 표현하는 글들이 독특하게 생소하다.

글을 따라 낯선 도시를 그리고, 낯선 사람들을 그리고, 낯선 표현들을 음미한다.

그 시대에 살아 보지 않았고, 그 도시를 알지 못해도 토베의 <어린 시절>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와 다를 거 같지만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스테드가데는 내 어린 시절의 거리다. 그곳의 리듬은 언제나 내 핏속에서 세차게 고동칠 것이고, 그곳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게 닿을 것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할 것을 맹세했던 저 먼 옛날처럼 언제나 그대로일 것이다.

 

 

나에게도 이스테드가데가 있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동네와 골목골목들에 담겼던 추억들이 글을 읽는 동안 스쳐간다.

토베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는 그 시절이 내 안에서 요동친다.

토베의 남다름은 언제나 가슴속에 언젠가 쏟아 낼 말들을 품고 살았다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마지막 봄은 춥고 바람이 세게 분다. 먼지 같은 맛이 나고, 고통스러운 출발과 변화의 냄새가 난다.

 

 

열네 살 처음으로 찾아간 출판사에서 토베의 "관능적인 시"들은 거절을 당한다.

조금 더 커서 오라는 편집자의 말을 들은 토베는 실망을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시 노트에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만이 그녀의 슬픔과 갈망을 무디게 만들어 주니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은 못하고 토베는 오페어가 된다.

2년 뒤 다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 잠시 쉬어가는 중이라는 걸 그녀 외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에서 살해당한 소녀는 빛을 내기 시작한다...

 

진중한 글들이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살아 있었던 이야기다.

진정한 에세이스트의 <어린 시절>은 독특한 풍미를 가진 트러플 같다.

모든 재료들의 풍미를 더욱 살려주는 마법의 가루처럼 토베의 글은 새로운 감각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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