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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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 하지만 울프는 한 사람의 정신에서 다른 사람의 정신으로 경험을 옮기는 방법을 발견한 거야. 그 경험을 새로 전달받은 사람이 마치 경험의 주인이 된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무슨 일이 일어났든, 무슨 일을 했든 그 경험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얘기다. 경험을 보존하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

 

 

경험을 보존하는 기술.

나에 대해 완벽하게 꿰고 있고, 나의 미래에 벌어질 일을 모두 알려주는 책.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파는 경험자들이 세상에 있다면 나는 어떤 경험을 사게 될까?

 

기자라고 하기에는 좀 아쉬운(?) 기자 벤은 어느 날 서점에서 자신의 이름이 쓰인 책을 찾는다.

그리고 그날 그는 기사를 위해 양로원 취재 때 만난 울프에게 위스키 한 병을 유산으로 받게 된다.

책과 위스키.

잘 어울리는 두 가지 소재가 예상치 못한 모험을 가져오는 이야기가 참 흥미롭다.

 




"세상에 진짜 독창성이라는 건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댁이 말하는 것들은 누군가가 이미 말한 것들과 점점 더 비슷해질 겁니다. 아니면 누가 쓴 것이든지. 생각한 것이든지. 인생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인용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생각이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지만,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의 대다수는 다른 어딘가에서 얻은 아이디어에 대한 반응이거나 그 아이디어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해요."

 

 

위스키를 훔치려는 사람. 위험을 경고하는 책.

패배자의 근성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벤에게 닥친 시련.

책을 읽는 내내 기발한 소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경험을 위스키에 담아 파는 세상이 온다면? 당신은 어떤 경험을 사시겠습니까?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리더들의 경험을 모은 칵테일이 있다면?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곁가지가 많았지만 그 곁가지는 이 책의 핵심인 경험을 보존하는 기술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누군가의 경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온갖 경험을 말이 아닌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책 속의 설정이 진짜였으면 했다.

세상의 온갖 경험들을 수돗물에 뿌려 넣으려는 울프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이스라엘 작가의 글엔 오묘함이 담겨 있다.

경험이 보관된 보물 창고는 정말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숨겨져 있을 거 같다.

그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는 정말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가 총을 쏘아대는 머저리들을 모두 박살 내고 싶었다.

저 귀중한 것들을 저렇게 날려 버리다니!

 

기발한 소재의 판타지가 잠시 나에게 쉼을 주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감정이 결여된 사람들이 있어 좋은 것들을 나쁜 것들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다.

좋은 경험이 아닌 끔찍하고 잔인하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

세상을 다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걸 얻으려는 사람들.

그들에 의해 많은 좋은 것들이 사라지는 경우들을 너무 봐서인지 이제는 그 모든 걸 지켜내려는 사람들을 찾고 싶다.

 

인생의 즐거움을 생각만으로 끝내 버리는 벤에게 찾아온 악운이자 행운.

책과 위스키는 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벤 안에 깃든 경험들이 좋은 곳에 쓰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이야기가 좋은 이유는 생각지 못한 소재의 판타지면서도 독자의 예상을 깨는 전개에 있다.

영미소설에 길들여져서 빤한 주인공들의 해피 엔딩을 생각했었는데 그것마저도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게 인상적이었다.

 

특별한 판타지가 필요한 분들에게.

색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찾는 분들에게.

너무 더우니 시원한 곳에서 독서로 더위를 날리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내 마음을 온전히 나누고 싶은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도 좋은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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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세구 : 흙의 장벽 1~2 - 전2권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마리즈 콩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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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이들이 현재 어디 있든지 간에, 그 아이들은 세구로 향하는 길에 오를 겁니다.

 

기존의 세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때의 그 혼란함을 바라보는 것은 참 서글프다.

하나의 문명이 우월감을 가진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참 허무하다.

세구는 아프리카의 한 가문을 통해서 서구 열강들이 어떻게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문화를 파괴했는지를 보여준다.

노예무역, 종교, 가부장, 인종차별, 여성차별이 혼재해 있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임에도 우리의 근대사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세구는 술책이 자라나는 정원이다. 세구는 배신 위에 세워진다 세구 바깥에서 세구에 대해 말하라. 하지만 세구 안에서는 세구에 대해 말하지 마라.

 

세구 왕국.

세력가이긴 하지만 왠지 모를 조롱을 참아내야 하는 두지카.

그의 아들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들을 통해 변화해가는 세구의 모습과 세상을 보여준다.

온몸으로 하나의 세상이 지고 다른 세상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알려주는 트라오레 가문.

그들의 불행 앞에서 나는 역사가 어디에서든 비슷하게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구>는 아프리카의 <토지>다.





불행은 어머니 배 속에 든 아이와 같다. 그 무엇도 그 아이의 탄생을 멈출 수 없다.

 

아프리카 인이었지만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시선으로 깨달은 조국의 모습은 섬세하고 파란만장하다.

다신교를 믿는 나라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대표자 티에코로, 티에코로를 따라 나서지만 상인의 삶을 택하는 배다른 형제 시가.

단 한 번의 일탈로 노예로 끌려가는 나바, 실질적으로 가문을 지켜내는 니아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말로발리 역시 세구를 떠나 용병의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을 통해 격동의 아프리카의 역사를 그려낸 마리즈 콩데.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서양의 시선으로 밖에 만난 적이 없었던 나에게 마리즈 콩데의 이야기는 내가 몰랐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오던 그들에게도 빛나는 문화가 있었고, 그들만의 종교와 문명과 문화와 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여성들의 삶은 억울함 그 자체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나에게 세구의 여자들은 너무 가슴아픈 사연들이었다.

 

원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원하지 않게 자신들의 나라를 떠나 타지에서의 삶을 산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게 만드는 새로운 문명은 그들에서 행복과 안정보다는 두려움과 울분을 주었다.

마리즈 콩데가 비교적 안락한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가 보이는 작품이다.

 

수많은 티에코로와 시가, 그리고 나바와 말로발리들이 세구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떠나온 곳은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은 돌아가지 못해도 그들의 자손은 그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구는 그들이 돌아가야 할 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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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 그녀가 사라진 밤
리사 주얼 지음, 이경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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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다음 순간 뭔가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이 모습을 예전에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울타리에 못으로 박아둔 마분지 표지판. 검은색 매직을 쓴 '이곳을 파보시오'라는 글귀, 아래를 향한 화살표. 분명히 똑같은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이곳을 파보시오'

 

보통 이런 문구와 마주치면 거의가 시체와 마주칠 각오를 해야 한다.

아니면 보물이거나.

 

서른아홉에 할머니가 된 킴.

십 대에 아이를 낳은 탈룰라.

추리소설 작가 소피.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하는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면서 은근하게 읽는 사람을 담근질한다.

 

하룻밤 데이트를 위해 외출했던 십 대 부모는 돌아오지 않는다.

15개월을 딸을 기다리며 손자를 키우고 자신의 삶을 잃어가고 있는 킴.

남자친구가 교장으로 부임한 학교 사택에서 함께 살기 위해 런던의 삶을 접고 시골로 내려온 추리소설 작가 소피.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즐겁다.

마지막까지도 독자들은 누군가를 계속 의심하게 된다.





내가 한 짓이 미심쩍게 보일지라도 너를 속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어. 나는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못해. 그게 내 가장 큰 문제점이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

하지만 진실을 위해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조정하는 사람.

강압적이고 자주 분노하지만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

지금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

이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늘 다음으로 미루는 사람.

마음이 약한 게 아니라 우유부단한 사람.

그래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

 

 

어쩜 먹잇감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자기 뜻이 아니라 늘 상황에, 사람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그 성격을 알아 본 포식자들에게 탈룰라는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물론 탈룰라에겐 사랑이었지만.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는 한 완전범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람의 선한 부분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사람의 악한 부분을 이용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교활함과 악랄함을 교묘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빛을 발한다.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진리를 또 한 번 알게 해준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범죄 앞에서 무감각한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두려운 것임을 알려 준 다크 플레이스의 비밀.

섬세한 심리묘사와 상황 설정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모두가 의심스럽고, 모두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이야기였다.

 

정신을 지배당한다는 게 어떤 건지 간접 체험한 기분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조종되지 않겠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에서 가장 불쌍한 건 소리 없이 사라진 남자들뿐.

리사 주얼의 작품은 처음인데 상당한 흡인력이 있는 작가다.

여름에 만나기 좋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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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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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지. 모르는 일은 모르는 법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지. 그래도 꾹 참으면 그 사건은 언젠가 우리 안에서 통증을 날리고 복구할 수 없는 상태로 묻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비취 같은 보석이 된다.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해도 우리의 분단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건 안다.

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피난 온 국민당 정부.

그들을 따라 대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할아버지 세대.

중국 본토에서 그들은 전쟁을 치렀다.

일본과 싸우고 공산당과 싸운 사람들, 언젠간 고향 땅을 밟을 날만 기다린 그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죄는 정의로 포장했다.


한마을을 몰살시킨 할아버지는 이십여 년이 지나 대만 자신의 가게에서 살해된다.

할아버지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손자 치우성의 시선으로 말해지는 이야기는 내가 몰랐던 대만의 근대사와 그들의 상처를 예씨 집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살인범을 찾으려는 예치우성의 성장기와 그 시대의 향수들이 글 곳곳을 채우고 있다.

스릴러라기보다는 역사소설 같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서는 혼란스럽다.


이 책을 읽는 시간 동안 우리의 한국전쟁 시절이 오버랩 되었다.

이 땅에서 밤에는 공산당이 낮에는 국군이 저질렀던 일들이 중국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런 일들에서 얻어지는 상처와 고통은 고스란히 민초들의 몫이었다.


손자에게 한없이 자애로웠던 할아버지의 과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고통이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그때는...


복수의 이야기일까?

그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한 걸까?


"우리는 말단이었지. 그 전쟁은 애들 싸움 같았어."

"정말 그랬지. 뭐가 뭔지도 모르는 꼬마들이 총을 들고 서로 쏴됐어."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야."

"응, 다 지나갔지."



왜 그랬을까?

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꼭 그래야만 했을까?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의 놀음에 하수인이 되어 아무런 원한도, 이유도 없이 서로에게 총을 쏴됐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지만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예준린은 누군가에겐 은인이었고, 누군가에겐 살인자였다.

그 시대는 누구나 다 그랬던 걸까?


계속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

예치우성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대만의 모습을 보았다.

가까운 곳에 우리와 같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살아보지 못한 세계로 시간여행을 다녀 온 기분이다.


류(流).

흐르다. 귀양보내다.의 뜻이 있다.

두 가지 뜻을 모두 아우르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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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들의 방 - 우리 내면을 완성하는 기억과 뇌과학의 세계
베로니카 오킨 지음, 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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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적' 감각이든 '진짜' 감각이든, 외부 세계의 무언가에 의해 자극되었든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 또는 외부적 감각 없이 두뇌 혼자서 발화하여 생겼든, 모든 감각은 진짜로 경험된다.

 

세계적인 신경학자 베로니카 오킨의 <오래된 기억들의 방>은 그녀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기억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면서 쓴 글이다.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자신이 기존에 배우고 익혔던 것들에서 탈피 '진짜'를 연구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 다양한 사례들을 읽으며 기억이라는 게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가짜'라는 걸 알지만 진짜처럼 느껴지는 기억들이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사례들은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서 마주친 적 있는 병들이거나 처음 알게 된 증상들도 있다.

인간은 감각 경험의 이해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는 걸 이 책이 알려준다.

뇌 자체가 기억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려주지만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사례들을 통해서 세워진 이론이라서 좀 더 이해하는 바가 다른 책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트라우마가 기억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가 제일 흥미로웠는데 체계적이지 못한 기억 네트워크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어릴 때 바다에 빠진 경험이 있다.

엄마, 아빠가 보는 앞에서 그대로 바다로 빠져서 인지 엄마 아빠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물에 떠있기만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데 나는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면서 엄마랑 아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았다.

"아무도 날 구해주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9살 때의 기억은 그 이후 허리 이하의 물에만 나를 가두었다.

그날 아빠의 친구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날 나는 수영은 못하고 튜브만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튜브는 파도에 쓸려서 점점 바닷가로 밀려갔다.

어제 물에 빠졌던 기억이 남은 나는 내가 바닷가로 밀려간다는 생각은 못 하고 물속에서 무언가가 나를 잡아가려 한다는 생각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인데 저 앞에서 엄마는 동생들을 돌보며 나한테 소리쳤다.

"일어나! 그냥 일어나면 돼!"

내 바로 앞에 있는 아줌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 아줌마의 발목쯤에 물이 차 있었던 게 눈에 보였지만 나는 내 엉덩이가 바닷가에 닿은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튜브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다가와서 튜브에서 나를 들어 올려 내려놓았다.

바닷물은 내 발바닥을 겨우 간지럽히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내가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로 남았고

내 기억은 내가 죽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음으로 남았다.

나는 수영을 배우라는 사람들의 말이 무섭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는 수영을 배우고 싶지 않다.

물은 내게 영원히 무서운 존재니까.

 

우리의 기억에서 장소는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억해 낼 때 언제나 장소를 먼저 떠올린다.

어떤 중요한 일을 떠올릴 때 '그때 내가 어디에 있었지?'라는 그 기억을 되새기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살아 있는 두뇌인 신경의 끊임없이 징징대는 소리에서 기억들이 만들어진다.

 

 

나는 돌잡이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다.

내가 그때 얘기를 하면 모두가 부모님에게 얘기를 들었거나, 비디오를 봤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때의 기억은 영화 필름처럼 내게 각인되어 있다. 마치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영혼이 육체의 행동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처럼.

그리고 꽤 좋은 기억력을 가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은 흐지부지되었다.

그것은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뇌의 속성 때문인 거 같다.

 

누구나 인생의 블랙홀 같은 시점이 있고, 그 기간 우리의 뇌는 기억을 흩트려놓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나, 시간들은 그렇게 통째로 사라지거나, 흐려지거나, 모호해진다.

그래서 기억하기보다는 잊기를 선택하고 그렇게 좋은 기억력은 점점 좋은 잊힘으로 바뀌어가는 거 같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봤던 시간이었다.

내가 가진 트라우마와 기억들을 책에 담긴 사례와 비교해 보며 스스로 정신과 의사 노릇을 해봤다.

쉽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내가 이해한 만큼 유익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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