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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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시린 표지가 두툼한 시어들을 보듬고 있다.

서슬 퍼런 시어들 사이사이 잔잔한 파도가 인다.

 

박노해 시인의 시들 301편이 담긴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시인의 걸음이 고달파서 그의 시를 읽는 내내 외로웠다...

 

 

 

너무 많아 너무 적다


우린 지금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만 배우기, 생각하기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채우고

너무 적게 느낀다


그만 채우기, 더 느끼기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알리고

너무 적게 살아낸다

 

삶을 살기, 나를 살기

 

 

 

 

요즘을 관통하는 말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삶을 살고 나를 살아야 하는데

그저 보여주고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삶.

가만가만 읊조리다 나를 돌아 보게 되는 시들 앞에서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거 같다.

 

시는

마음 상태에 따라 읽힌다.

사랑이 많은 사람에겐 사랑으로 읽히고

고통이 많은 사람에겐 고통으로 읽히고

이별이 많은 사람에겐 아픔으로 읽힌다.

 

박노해의 시들은

내게 삶으로 읽혔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내가 해 봐서 아는데'

큰소리 치는 사람이 있지


당연히 해 봤겠지

그때 거기서 그들과


오늘 여기는 다르다는 것

이젠 그들도 당신도 다르다는 것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짧은 읽기로 긴 시간을 읊조리며 시어에 담긴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가 살아낸 세월과 내가 살아낸 세월의 간극은 다르지만 같다.

 

인생에서 정말로 좋은 곳은 다 공짜다.

내 인생의 빛나는 것들은 다 공짜다.

 

 

시인의 말에 새삼 주위를 둘러본다.

가장 좋은 것들로 둘러싸인 나는 그것들이 공짜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항상 더 좋은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 좋은 것들이 지천에 있다는 걸 놓치고 살았다.

하늘이, 숲길이, 아이들의 웃음이, 쌓여 있는 책들이, 별들이, 바람이, 내가 좋아하는 비가, 새들의 노래가, 나를 살아있게 하는 숨 쉬는 공기가 모두 공짜라는 걸 잊고 살았다.

 

다수결이 진리가 되었고

좋아요 수가 선이 되었고

빅데이터가 현자가 된 시대

 

 

우리의 시대는 시인의 말처럼 오랜 후에 '영혼 없이 즐거운 시체들의 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뿍 담긴 시들이 내 삶을 다시 돌아 보게 만든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잊고 사는 것들을 깨우쳐 주는 글들이다.

 

단독, 특종, 뉴스 뒤에는

사람, 사람이 있다.

 

 

사건에만 시선이 쏠려서 정작 그 안의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처럼 인생의 모든 감각을 실은 시들을 읽은 적이 없다.

다양한 시들이 주는 영향력이 내 안에서 커져간다.

 

생각하며 살자고 다짐했지만 늘 생각 없이 살고 있고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산다지만 언제나 이익이 우선이었던 아닌지.

열린 마음으로 살자고 해놓고 늘 잣대를 들이대며 내 기준만 앞세웠던 건 아닌지.

환경을 생각하며 살자고 해놓고 당장 편한 것만을 취했던 건 아닌지.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건 아닌지.

사람의 이면을 중하게 생각하자 해놓고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었던 건 아닌지.

 

그대로 두라.

시인의 말처럼 일상을 일상으로

결여를 결여대로

상처는 상처대로 두는 것이 진정 나로 살아가는 것임을 새겨본다.

 

좋은 책은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데

이 시집은 나만 읽고 싶어진다.

그러게 사람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위에서 구구절절 반성했노라 말해놓고 이 시집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는 그저

이런 외계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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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왕 -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후안 고메스 후라도 지음, 김유경 옮김 / 시월이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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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는 실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럽 연합의 각 국가에 있는 중앙 부서 및 특수 단위입니다. 아주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론에 숨겨야 했던 목표들 말이죠."

 

 

영미 스릴러와 북유럽 스릴러에 길들여진 내 눈에 스페인 스릴러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묘한 흥분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사족 같은 디테일한 설명들이 불필요한 거 같으면서도 전체를 위한 이야기여서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다만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과 간혹 보이는 오타가 글의 흐름을 깎아 먹었다는 게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는 사람.

 

제목 붉은 여왕이 뜻하는 것은 숨겨진 비밀단체다.

각국의 정보국보다 더 위급의 숨겨진 단체.

그들은 전 세계 상위 몇 프로에게만 의뢰를 받는 기관이다.

천재적인 두뇌와 특출한 기억력으로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퍼즐 조각들을 꿰어 맞추는 안토니아 스콧.

그녀가 스페인의 붉은 여왕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로 인해 습격을 받은 그날 안토니아의 남편은 코마에 빠졌고, 그녀는 그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존 구티에레스.

포주의 손에서 한 소녀의 인생을 구해주기 위해 그가 벌인 일은 그를 구렁텅이로 빠뜨렸고, 그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정직당한 경찰이었다.

그런 그에게 안토니아를 차에 태우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그녀를 차에 태우기만 하면 그의 불명예 기록은 삭제될 것이다.

 

유능한 주인공들이지만 저마다 짊어진 짐들이 많다.

그래서 이들을 계속 관찰할 수밖에 없다. 범인 보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이 두 사람 안토니아와 존.

사건을 해결해 가는 와중에 서로의 아픔을 이해해가면서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두 사람의 캐미가 계속되길 바라게 된다.

 

 

몸속의 피를 몽땅 빼버린 소년의 시체.

납치된 대 부호의 딸.

서로 다를 거 같은 사건이지만 같은 자에 의한 범행. 그걸 아는 단 한 사람 안토니아.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두 사람을 쫓는 이제는 한 물 간 기자.

 

한차례 그녀를 휩쓸고 간 폭풍은 끝나지 않았다.

돈을 노린 납치라고 생각했던 납치극은 부모의 원죄를 묻는 사이코패스가 일으킨 사건이었고, 광적인 사이코패스의 범죄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는 이제 안토니아를 노린 이야기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에요, 존. 악마 같은 인간. 내가 그자를 잡는 걸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이름이 뭐죠?"

"진짜 이름은 몰라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스스로 미스터 화이트라고 하더군요."

 

 

세계 어느 기관에서도 얼굴을 알 수 없는 킬러.

미스터 화이트가 노리는 건 무엇일까?

그저 안토니아의 목숨뿐일까? 아니면 안토니아가 알고 있는 어떤 것?

궁금증만을 남긴 채 끝나 버린 1권.

 

이 이야기는 3부작으로 <붉은 여왕>, <검은 늑대>, <화이트 킹>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토니아와 존.

이 두 사람이 겪을 위험천만한 여정이 이제 시작되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이번 편에서 벌어진 일들보다 더 심각하고, 더 역겨우며, 더 악랄할 거 같다.

 

낯선 문화가 주는 스릴러의 맛이 쌉싸름하다.

익히 아는 맛이라서 덥석 입에 넣었다가 알 수 없는 맛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범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 같다.

숨겨진 이야기로 다가갈수록 독자를 더 괴롭힐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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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가능성 -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림 독서 여정
조민진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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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지극히 나의 기분과 상황, 주관에 따라 고른 서른두 권의 책과 서른일곱 점의 그림이 각각 짝을 이뤄 담겨 있다. 책과 그림을 내 이야기와 조합해 엮었다.

 

JTBC 기자였던 작가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바탕이 되어 준 책과 그림들에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글들이다.

어찌 보면 한창 정점의 시기에 퇴사를 결정했던 건 진정 "우아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빗대어 내 상황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내일의 가능성을 읽는 시간은.





나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의 자기 성찰은 곧 나의 성찰이기도 하다.

책 한 권, 그림 한 점에 담긴 저자의 생각과 느낌들을 오롯이 받아들여 내 것으로 흡수하는 시간이었다.

서점에서 얻는 위안.

읽은 책 보다 사둔 책들이 많지만 또 책을 사는 이유

오래 묵혀 두었던 책을 비로소 읽게 되는 타이밍

재독으로 다르게 보이는 의미 등

책과 그림, 영화를 통해 삶을 충전해 온 저자의 이야기가 오롯이 들려왔다.






세계를 건너가는 일은 이렇듯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그 세계에 맞게 자신을 재정비해야 한다. 늑대도, 인간도 아니었던 모글리는 정글에서든 마을에서든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었다.

 

 

책과 그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건너간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고,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순간을 엿본다.

그 모든 경험들 중에서 같이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나만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아직 머릿속 뜬구름에 지나지 않지만 언젠간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세상은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해질 수 있는 세상이니까.

 

자유를 누리면서도 우아해지지 못한 나 자신을 반성하고

앞으로 좀 더 내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누군가가 열심히 쌓은 시간 속을 여행하면서 나를 반성하는 시간이 좋다.

알았던 것들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었던 시간. 내일의 가능성.

제목처럼 <내일의 가능성>이 "내 일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길 소망해 본다.

 

나를 찾고 싶은 사람

조용해지고 싶은 사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읽어줄 당신에게, 내가 고른 책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내가 선택한 그림이 마치 책처럼 읽힌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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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죽음에 네가 들어왔다
세이카 료겐 지음, 김윤경 옮김 / 모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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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을 해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자살을 생각하던 사람에게 어느 날 사신이 나타나 은시계를 주며 수명을 팔라고 한다.

3년 후에 무조건 죽는다는 생각으로 은시계를 받아든 아이바.

그가 받아 든 은시계는 '우르보로스'(자신의 꼬리를 물어 원 모양을 한 뱀이나 용을 가리키며 무한대, 영원, 불멸을 상징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였다.

최대 24시간 전까지 되돌릴 수 있고, 한 번 사용하면 36시간 동안은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릴 때 소유주의 피부에 닿아 있던 사람도 예외적으로 기억을 이어갈 수 있다.

 

아이바는 시간을 되돌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주식으로 돈을 모아 양부모 집에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최대 위안이었다.

자기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아이바에게 가장 큰 삶의 의미였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건너던 중 한 소녀의 자살 소식을 알게 된다.

왠지 그 소녀를 살려내는 것이 자신이 죽기 전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소녀를 구했지만 아이바의 생각과는 달리 소녀는 계속 자살 시도를 한다.

그리고 아이바는 계속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구한다.

그들의 죽고 되살리는 이 게임에는 끝이란 게 있을까?

 

 





자살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의도가 절박해 보였다.

아이바도 이치노세도 자신이 삶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는 설정도 썩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숨겨진 이야기들이 드러나면서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외시키는 방법 밖에는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고독해 보여서 마음이 아프다.

 

어쩜 우르보로스를 주었던 사신은 자살을 생각했던 그들에겐 사신으로 보였겠지만

그들을 살리고자 했던 착한 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르보로스의 시간 여행은 아이바와 이치노세라는 외로운 영혼을 서로 묶어 주었다.

 

"나는 이치노세를 만나서 정말 기뻐. 만약 이치노세가 학교에 잘 다니고 가족과도 사이가 좋았다면 분명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거야."

 

 

둘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잘 살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운명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구원투수가 되어 주었다.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고, 서로를 보듬어 주었다.

어린 소녀에서 점점 성장하는 이치노세 곁에 아이바가 있었기에 그들의 다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었다.

 

죽음을 생각했던 작가가 지인의 죽고 싶다는 말에 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상을 받아서 책으로 출간되면 그녀에게 읽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죠.

 

사연 있는 글이어서 그렇게 수없이 죽음을 되풀이하고, 되살아나길 반복했나 봅니다.

누군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 주었다면, 조금만 그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면 달라졌을 사람들...

짧은 기사 한 줄로 그 사람의 죽음을 접하면 "그 길밖에는 없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그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이 이야기가 조금은 알게 해주었네요.

 

<어느 날, 내 죽음에 네가 들어왔다.>

일본에서 제8회 인터넷소설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대상을 받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아이바와 이치노세의 입장이 되어 봤던 시간이었네요.

내가 가보지 못한 길 위에서 안타까웠다가 안도했다가 짠했다가 뭉클했습니다.

 

단 한 사람의 관심이 어떻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후배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후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며 나약해서 그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내 시간에 치여 곁을 내주어야 하는 사람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해준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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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렌지
후지오카 요코 지음, 박우주 옮김 / 달로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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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당연해 보이는 네 가족. 하지만 저마다 당연하지 않은 마음을 지니고 한 지붕 아래 살아왔다.

 

 

열다섯 살 설산에서 조난당한 두 형제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어제의 오렌지.

읽으면서 점점 눈물이 많아졌다.

료가의 상황이 지금 내 엄마를 떠올리게 해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료가에게 위암 판정이 내려진다.

고향을 떠나 도쿄 레스토랑 점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료가에겐 교헤이라는 동생이 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11개월.

 

가족의 비밀이 있고

주인공이 암에 걸려서

이 이야기는 꽤나 예상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로와의 책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 고개를 갸웃 거리며 슴슴하지만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읽어갔다.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 야다는 간호사가 되어 료가를 담당하고 홀로 죽음의 무게를 짊어진 료가에게 야다는 든든한 어깨가 되어준다.

료가가 첫사랑이었던 야다.

굳건하고 밝은 에너지의 소유자 교헤이.

열심히, 성실히 살아가는 엄마.

어릴 때부터 살뜰히 손자들을 챙긴 할머니.

기회를 준 료가에게 보답하고자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다카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성실하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인물들까지도.

 

료가의 몸 안에 있는 모래시계는 지금까지 이상의 속도로 남은 시간을 떨어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담담한 인물들이 소화해 내는 격한 감정들이 잔잔하게 흐르는 이야기. 어제의 오렌지.

서른 어느 날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걸 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료가의 모습은 평생 누군가에게 든든한 사람이었던 그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저릿저릿하다.

 

간호사인 작가답게 료가를 통해서 죽어가는 환자의 내면을

야다를 통해 그런 환자들의 곁에서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려냈다.

 

조난 당했던 산에서 열다섯 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함으로 자신과 동생의 목숨까지 지켜냈던 료가는 태산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라는 생각 앞에서 인생의 뜻을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다.

 

나에겐

료가와 엄마가 겹쳐 보여서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를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는 이야기였다.

 

"엄마, 나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

료가는 그렇게 혼잣말하곤, 울음을 터뜨린 엄마를 힘껏, 아주 힘껏 끌어안았다.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료가.

료가를 보면서 참 많은 울림을 받았다.

고요한 태산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료가.

 

누군가 이 길을 걸어왔다. 자신은 그 뒤를 쫓고 있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 그리고 죽는 것과 닮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은 계속해서 삶을 걷다가 이윽고 어딘가에서 그 걸음을 멈추는 것이다. 조금도 대수로울 것 없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엔 허세도, 장황함도, 멋짐도, 신선함도 없다.

다만 고요한 삶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진중한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한 에너지가 막강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이야기 어제의 오렌지.

 

료가가 기억하는 인생의 특별한 순간엔 오렌지빛이 담겼다.

내 인생의 특별한 순간엔 어떤 색의 빛이 담겼을까?

 

담담한 문체에서 폭발하는 감정의 힘을 느끼게 되었던 건 나의 개인적인 마음이 담겼기 때문인 거 같다.

그럼에도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미리 생각해 보고 남겨질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려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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