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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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하얀 빛처럼 여겨지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7월 어느 날.

능소화가 피어 있는 마당에서 나오코의 시체가 발견된다.

네 살 아이 나오코는 왜 이모네 집 마당에서 죽음으로 발견됐을까?

 

 

이 집은 배신과 보복의 전쟁터였다.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싸움을 반복하는 전쟁터...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치매 노인과 그 아이의 이모, 이모부, 사촌 언니, 아이의 부모와 엄마의 불륜남이 차례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다.

반전은 반전을 몰고 오고, 각자의 인물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은 그렇게 이타적이지 않다.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삐져 나오는 비밀과 은밀한 살의들은 한 집안의 대를 이은 불륜의 씨앗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느 하나 냉정맞지 않은 이가 없다.

아이들 마저도 냉정하다. 감정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자짓 건조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서늘하다.

게다가 렌조 미키히코의 문장들은 왜이리도 생각을 후벼파는지 모르겠다.

자기 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모두 동조하고 싶게 만드는 타당한 문장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우리 가족과 그 집안을 직접 이어주는 끈은 사토코 씨와 유키코가 자매간이라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우리 집이 그 집안에서 파생된 새끼 가족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우리 결혼 생활의 불행의 이유가 원래 그 집안에 있었던 세균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입다물고 살고 있었지만 모두 힘들게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모두 행복한 듯 무탈하게 살고 있었지만 모두가 불행속에 빠져 있었다.

각자가 비밀을 간직한채로 서로와 마주치며 비극을 키워갔다.

서로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서로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때론 잔혹하고

때론 교활하고

때론 무심하고

때론 헛갈리게 하는 이야기는 모노 드라마를 지켜 보는 거 같다.

혼자서 독백을 하면서 자신의 죄와 타인의 죄를 말하는 배우들처럼 모두가 카메라 앞에서 자기들이 외워 온 대본을 말하는 거 같다.

마치 독자들을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것 처럼.

 

 

 

실제로 내 몸은 모피가 타는 듯한 냄새를 풍겨서 나는 죄라는 건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이구나, 하고 나 스스로도 그 악취에 얼굴을 찡그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은 며느리와 며느리의 동생을 헛갈려 하고

나오코와 전쟁통에 섬에서 자신이 죽인 소녀를 구분하지 못한다.

엄마 유키코에게 나오코는 자신의 삶에 방해꾼일 뿐이었다.

아빠 다케히코는 나오코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모 사토코는 자신의 딸 가요보다 나오코가 사람들에게 이쁨 받는 것이 보기 싫었다.

이모부 류스케는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죄를 떠올리게 하는 나오코가 부담스러웠다.

가요는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는 나오코가 미웠다.

그랬다. 다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다였을까?

 

 

그건 질투였습니다.

 

 

인간이 살의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질투에 있지 않을까?

이 모든일은 어른들의 질투심 때문에 벌어졌지만 그 죄를 감당해야 했던 건 네 살 짜리 나오코였다.

이 묘한 심리극을 보고 있자면 다 범인 같고, 또 아무도 범인이 아닌 거 같다.

 

 

 

"괜찮아, 그렇게 해도. 잘했어..."

 

 

치매 노인의 기억속에서 되풀이 되는 이 말은 인물들이 독자들에게 하는 말 같다.

이 이야기를 어떤식으로 해석해도 괜찮다고. 당신이 어떤 마음이 들던 그렇게 해도 된다고.

 

 

그들 모두가 공범이었다.

각자의 죄를 덜어내기 위해 하나의 원죄를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렌조 미키히코를 각인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마치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건조한듯 습한 문장들의 파편이 곳곳에서 촉수를 뻗어내고 있었다.

끈끈한 짓물을 잔뜩 묻힌 그 촉수들이 생각을 휘어잡아서 마비시키는 느낌.

그래서 범인을 앞에 두고도 내 머릿속엔 그저 "괜찮아"라는 망령의 속삭임만이 남는다.

 

 

전혀 괜찮지 않은 이야기를 괜찮게 써버리는 필력에 매료된 이야기.

그 강렬한 흰 빛에 눈이 멀어버리는.

백광은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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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의 세계사 - 왜 우리는 작은 천 조각에 목숨을 바치는가
팀 마샬 지음, 김승욱 옮김 / 푸른숲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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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이라는 단어를 보면 휘날리다, 펄럭이다, 상징하다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자동 생성된다.

그리고 운동회 때 운동장을 장식했던 만국기들이 생각난다.

깃발에는 그리움도 담겨 있다. 누군가를 향해 한없이 휘날리며 굳건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나에게 깃발은 그런 것이었다.

 

팀 마샬은 깃발을 통해 세계사를 짚었다.

 

한 나라의 역사, 지리, 국민, 가치관, 이 모든 것이 그 천조각의 형태와 색깔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각자 생각하는 의미가 다를지라도, 그 깃발에 의미를 띠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한다.

그 나라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국기에 담아낸다.

다른 나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국기도 있고, 종교적 의미가 담긴 국기도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국기가 문양도 뜻도 누구나 그리기도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격하지 않고,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지도 않은 태극기가 전 세계의 어떤 국기 보다 가장 멋진 국기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총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통해 가장 흥미로웠던 장은 제5장 공포의 깃발 편이다.

검은색의 깃발 하면 해적이 떠오른다.

검은색 바탕에 해골 그림이 그려진 깃발은 해적의 전유물로 뇌리에 박혀있다.

이 검은 깃발을 흔드는 집단이 중동에 밀집해있다.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자행하는 일들로 인해 그들에게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깃발이 상징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왜 그런 집단이 생겨났는지 그들이 행하는 방법들이 왜 그렇게 잔인한 건지를 이 책을 통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취재하고 방송했던 경력이 있는 기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의 글에 공포감이 묻어난다.

그들의 깃발에 새겨진 글은 같은 글이다.

같은 이념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방식은 더 잔인하냐와 덜 잔인하냐의 차이뿐이다.

 

깃발을 맨 처음 사용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용한 게 아닌가 한다.

다만 수많은 깃발을 앞세워 전쟁을 치렀던 나라였지만 현대에 들어 국기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도 중국이다.

그래서 그들의 국기는 생각보다 늦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깃발의 모양은 거의 직사각형 모향이지만 네팔의 국기만은 두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팔의 주요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히말라야산맥을 상징한다.

 

졸리 로저라고 불리는 해적의 깃발은 검을 바탕의 천에 교차시킨 뼈 두 개와 두개골이 그려져 있다. 이 깃발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템플기사단이다.

적십자의 깃발이 최근에 바뀌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얀 바탕에 적십자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다이아몬드 모양이 그려져 있다.

유럽의 깃발엔 평등, 자유와 같은 색을 넣은 국기가 많고, 중동과 아시아를 거치면서 이슬람의 색이 들어간 국기가 많다.

 

깃발에 담긴 의미들과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공포와 갈등을 조장하는 깃발은 다양하게 만들어내고 자주 사용하는 데 평화를 위한 깃발은 거의 없고, 많이 사용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깃발 아래 모여 사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라면 나는 평화로운 깃발 아래 살고 싶다.

누군가의 충동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위한 깃발 아래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통한 세계사에 익숙해져서 그들에 대한 것들은 잘 알지만 그 외의 나머지 대륙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걸 놓치고 사는 거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아시아 대륙의 깃발과 국기와 그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아서 아쉬웠다.

우리에게도 우리 시각으로 보는 세계사와 깃발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깃발 아래 안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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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힌 자리엔
홍우림(젤리빈) 지음 / 흐름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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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아이들을 겁줄 때 말을 듣지 않으면 괴물이 잡아갈것이라고 하지. 그런데 말이야. 진짜로 있어. 나쁜 아이들을 잡아가는 귀신이. 그것은 사람들의 염원을 듣고 와.

귀신 좋자고 잡아가지. 왜냐하면 그런 아이들은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으니까.

 

 

경성에 있는 오월중개소는 연극배우로 이름난 바지 사장과 실질적으로 그곳을 운영하는 최두겸과 잡일을 거드는 호가 있다.

두겸에겐 인간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것들을 보고 듣는 재주가 있다.

그로 인해 그를 찾아오는 이들은 사람 외에도 귀신과 원혼과 신들과 영물과 짐승등이 갖가지 사연을 들고 온다.

 

반골의 상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24년간 여자로 살아야 했던 고오.

부처의 목을 날려버린 담비 동자

잠시 인간의 삶을 엿보고 싶었지만 사랑에 빠진 샘물신

사람들의 염원을 듣고 찾아와 나쁜 아이를 잡아가는 신

두겸에게 자신의 영물 조각 하나를 보은으로 주어 두겸이 평범한 삶을 살수 없게 한 치조.

 

어째서 매번 폭력과 혐오를 저지르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삶을 망가뜨리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버리는가?

 

 

치조는 용이 될 영물 뱀이었는데 어느 비구니가 인간들을 위해 우물에 봉인해서 인간을 잡아먹는 다려가귀라는 악귀를 잡아먹게 만든다. 몇 백 년을 우물에서 인간이 던진 영혼을 잡아먹고살았던 치조는 영물에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두겸이 그 우물에 던져지기 전까지..

두겸으로 인해 봉인된 우물에서 해방된 치조는 이제 여자가 되어 두겸을 찾아왔다.

인간의 몸이 된 치조는 자신의 조각들을 찾을 때까지만 두겸의 신세를 지려한다.

하지만 벼락을 맞고 사방으로 흩어진 치조의 조각 중엔 사악한 기운을 가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나머지 조각들을 모아서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두겸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선 사악한 조각이 두겸을 납치한다.

 

이상해요.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 이유로 상처받곤 한다는 것이요.

 

이 전통 판타지를 읽으며 나는 사라져가는 세상과 시대를 느꼈다.

지금 내가 알던 세상과 시대도 빠르게 미래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기에 그것을 깨달아 가는 치조의 마음이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190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오월중개소라는 골동품 거래소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갖가지 생물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현대인에게 무슨 감정을 주었을까?

왜 이 이야기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을까?

 

외래종 판타지만 읽다가 우리 것을 읽으니 마음도 눈도 뇌도 편안하다.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이야기들 앞에서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것들을 한꺼번에 보게 된다.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이 확실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 그런 것일 뿐.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억울한 죽음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만들어 내는 원혼들을 어찌 편히 보낼 수 있을까...

어째서 타인의 불행을 외면한 사람 보다 외면하지 않은 사람에게 불똥이 튀는 걸까?

알 수 없는 인간의 삶과 행동과 말들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영물, 신, 원혼들에 의해서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

어둠이 걷힌 자리엔...

 

제목이 내용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의 의미를 조금은 알 거 같다.

어둠이 걷힌 자리엔 새롭고, 맑고, 밝은 것들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어둠을 걷히기 위해서 노력한 수많은 생명체의 결정들이 허투루 되지 않게..

 

우리에게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미신으로, 헛짓거리로 사장되고 말았다.

그것이 공존하는 곳 오월상담소.

현실에도 오월상담소가 있어서 억울한 죽음들이 편히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희가 더 이상 신비가 아닌 법칙과 이해의 영역에 있게 된다는 뜻인가보다. 인간과 우리의 관계는 빠르게 새로워지는 중이구나.

 

변해 가는 세상을 가늠하게 된 치조의 모습이 씁쓸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각종 영물과 신들이 사라져 가는 이 땅에서 잠시 인간으로 머물기를 선택한 치조가 두겸과 함께 어떤 일들을 해결해낼지 다음 편이 빠르게 나와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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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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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은 상상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장악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상상이다."

 

18세기 걷기는 '도박'이 원동력이었다.

정해진 시간과 거리를 걸어서 판돈을 받는 걷기 도박은 기록 경신을 이어갔다.

걷기는 신사 남자들에게는 취미이자 인정받는 것이었지만 노동자에게는 고단한 여정이었

 

 

산책, 여가활동, 독방, 취미, 회복, 외로움, 당신

이렇게 7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낭만적 은둔의 역사.

제목에 쓰인 '낭만'과 '은둔'이 이 책에 호기심을 갖게 했다.

수 세기에 걸친 인류의 혼자만의 고독을 다양한 시각으로 그려낸 낭만적 은둔의 역사를 읽고 있자니

고독이나 은둔이나 혼자인 시간은 자유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자유 없이 반강제로 고독을 느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능가하는 대외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팬데믹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슬기롭게 견뎌내기 위해 이 책에 담긴 혼자의 역사는 필요한 이야기였다.

 

 






산책은 혼자 하기에 가장 좋은 취미다.

물론 동반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혼자 있기는 아니다.

산책하면서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거나,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떠오르고, 무심코 보낸 눈길에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산책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로 무념무상의 걷기 때문이 아닐까?

목표가 있는 걷기, 그러나 오랜 여정은 신체와 정신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산책이기에 혼자이고 싶은 사람이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 내 단독 여가활동은, 가정생활에 억지로 참여하는 걸 피할 방책이자 다양한 형태의 지성이나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었다.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여성들이 혼자인 것과 정신질환을 동일시하는 시각에 도전하며 생긴 취미들과 단체 활동.

남자 신사들의 단독 여가활동은 우아한 취미로 봐주면서 여성들의 단독 여가활동은 정신질환으로 의심하는 시대에 뜨개질, 수놓기, 독서, 옷 만들기 등이 점차 확대된다. 남자들은 생산성 없이 산책하면서 혼자인 시간을 갖는데 반해 여성들은 혼자인 시간을 갖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했다는 것에 한숨이 나온다.

지금도 여자들은 혼자인 시간을 위해 뭔가 중요한 핑계를 대고 나올 구실을 찾는다.

그래야 단 한두 시간이라도 가정과 육아와 살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독박이다.

 

'외로움'은 혼자 있는 것의 아픔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표현이다. 또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이라는 어휘를 만들었다.

 

 

 

사실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나는 외롭다거나 고독하다거나 하는 말의 의미를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땐 혼자 있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었다.

책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다른 세계에 나를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좋은 도구였고, 그림이나 노래 부르기는 온전히 혼자 있을 경우에 아무런 눈치와 방해를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나만의 것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산책에서 얻는 무념무상과 자연과의 교감은 현시대에서는 찾기 어렵다.

고도로 발전한 사회 유유히 걸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복작이는 공원에서 쳇바퀴 도는 산책을 즐길 뿐이다.

느긋하게 이어온 취미들이 현대사회에서는 재능과 소비로 이어지는 SNS 사회이기도 하다.

각자의 공간이 생겼음에도 우리는 각종 기기를 통해 외부와 접촉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SNS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 인류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그림의 떡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혼자라는 착각이거나.

 

혼자의 시간에 누릴 수 있었던 사치들이 현대에 들어와 각종 매스컴의 프로그램으로 변질되면서 우리는 혼자의 시간에도 혼자 있지 못하는 병에 걸린 거 같다.

나 역시 혼자 있을 때 TV를 틀어 놓는다.

사람의 말소리는 혼자라는 사실을 감춰주니까.

그래서 나는 늘 공허감에 가까운 고독을 느꼈던 거 같다.

온전히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혼자였으니 말이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를 읽으며 나의 혼자 있기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많은 시간을 나는 책을 읽고, 감상을 정리했지만 온전히 혼자 있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덜 숙성된 어른이처럼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어 내면의 나와 마주하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 버려진 시간들을 내가 잘 활용했다면 나의 현재는 더 알차졌을 텐데.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휴대폰을 끄고, TV를 안 튼다면 그 시간에 무얼 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혼자인 시간에 해왔던 일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가장 손쉬운 시간이 아닐까?

그런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가는 생활이 바로 외로움과 고독에서 나를 덜어내는 일인 거 같다.

 

인문서라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시구와 문장들 그리고 18~19세기 영국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영국 사람들의 1980년대에 즐겨 했던 TV 틀어놓기를 지금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서 어떤 격차를 생각해 본다.

은둔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고 수백 년 뒤 21세기 인류의 은둔은 각종 스마트 기기를 끄는대서 왔다고 적힐지 모르겠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

제목은 낭만적이었지만 그 안에 스며있는 차별적 은둔의 역사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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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대 패싱 - 튀고 싶지만 튀지 못하는 소심한 반항아들
윤석만.천하람 지음 / 가디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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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논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사회적 현상으로 '낀대'가 가진 실체와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말미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핵심 갈등의 축을 분석해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세대를 아우르는 이해와 공감의 틀을 넓혀 우리 사회의 정확한 갈등과 균열의 지점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다.

 

 

낀대 패싱의 주제는 586과 90년대 생 사이에 낀 세대들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자는 취지였다고 생각한다.

현 사회의 주축이 되는 3040 세대를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세대 간의 간극을 좁힐 방법을 제안했는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낀대는 '튀고 싶지만 튀면 죽는다는 생각'을 의식 저변에 안고 살아간다. 스스로 개성이 있다고 판단하지만, 세대 바깥에서 보면 몰개성이라고 느낄 만큼 집단적이다.

 

 

7080년 생들이 주축이 되는 낀대는 대한민국의 발전 이전과 발전과정과 그 이후를 두루 경험하고 있는 세대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새 시대의 유행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팬덤의 세계를 구축해온 세대다.

하지만 그들 앞엔 586이라는 거대 집단이 버티고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있고.

밑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세대였던 90년대 생들이 몰려오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사이가 현재라면

낀대들은 이 현재를 담당하는 세대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부분은 바로 대중문화계라고 이 책은 얘기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의 중추이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소극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소극적 사실은 커다란 무형의 힘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필들이가 간과하고 있는 거 같다.

 

 

반골 기질을 갖고 있어도 티내지 못하고, 비판적 사회의식이 있어도 행동을 주저한다.

 

 

이 말은 맞다.

그리고 이 말은 틀리다.

 

3040이라는 시간대를 관통하는 자들은 모든 면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자유 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시간대에 살고 있다.

회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사회의식이 있어도 행동을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원대한 사명을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육아의 시간을 모두 끝내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586과

가정이라는 무게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20대의 목소리 내기에 비례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릇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소신보다는 가족이 먼저니까.

586은 그런 시간을 지나갔고, 20대는 아직 그 시간에 도래하지 않았다.

 

이 책이 말하는 낀대에 대한 이야기는 소재에서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렸지만

그걸 소화해 내는 과정에서 쓸데없는 정치 편견을 양념으로 버무려서 불편하다.

갈등의 균열을 찾아낸 건 좋지만 그 갈등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는 글을 아꼈다.

글을 쓴 작가 본인들도 낀대인데 말이다.

아마도 작가분들의 이력이 비교적 안온함에서 이루어졌기에 남을 향한 비판은 칼날같이 하면서 같은 부류에 대한 비판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거 같다.

이것 역시도 나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그 외 다양한 분야에 걸친 세대 간의 생각 차를 다룬 것은 참고할만하다.

각 세대별로 자신이 속한 세대를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고, 다른 세대의 문제점과 그들이 사회에 바라는 바를 알게 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낀대는 우리 민족이 어느 정도 중흥된 상황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성과를 낼 기회는 적었다. 하지만 반대로 거대 담론에 가려져서는 안되는 '개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직시한 세대이기도 하다.

 

 

나는 항상 우리를 과도기 세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가난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와 발전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고 살아왔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걸 직관하고 살아온 세대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시대를 눈으로 보고 자란 세대다.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 사이에서 그 두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낀대들.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다 해서 내 자리가 위태한 것이 아니다.

이 자리는 언제든 새로이 바뀌게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잠시 안주하는 것은 지켜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그 드러나지 않는 것들의 힘에 의해 변화하고 달라진다.

우리는 그 변화와 달라짐에 과감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낀대들이여~ 주눅 들지 말고 살자!

 

천하람 저자의 말처럼 낀대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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