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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와 숲의 신비한 이야기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9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심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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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이다. 우리말로 번역 출간하는 족족 읽는 편인데, 물론 소설작품에 국한하지만, 웃기게도 최근에 읽은 오에가 데뷔작인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다. 이때 오에의 나이 스물셋. 그동안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작품들만 줄곧 읽는 바람에 오에 겐자부로라고 하면 탄탄한 조형미를 바탕으로 하는 서사의 모범적 건축가로 생각했었는데 데뷔작은 또 얼마나 감각적인 문장으로 메웠는지 깜짝 놀랐다는 거.
그래도 누가 나더러 제일 좋아하는, 또는 오에의 대표작을 꼽으라 하면 생각하고 말고 없이 <만엔 원년의 풋볼>을 고르겠다. <새싹 뽑기…>는 이후 작가가 쌓는 일련의 작품들과 ‘아주’, ‘완전히’ 같은 부사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거리가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60년에 고등학교 친구의 동생 유카리와 결혼을 해서 63년에 첫아들 히카리光을 낳는데 헤르니아hernia, 즉 탈장은 탈장이되 뇌헤르니아, 두개골 일부가 완전하지 않아 밖으로 흘러내려 마치 커다란 혹처럼 불거진 상태로 출생했다. 젊은 오에는 이때의 상황/경험을 토대로 1964년에 <개인적인 체험>을 썼다. 장남 히카리는 이후 오에의 작품에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고기토’라는 이름의 화자 ‘나’와 함께 빈번하게 등장한다. 1960년대 초반의 일본 의술을 생각해도 뇌헤르니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발달장애는 피할 수 없었다. 시력을 잃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정도였으나 성격 까칠한 오에 겐자부로가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면서 주위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했을 지 짐작을 하실 터. 그의 마지막 작품 <만년양식집>을 통해 그리 자세하지도 않고 크게 뉘우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솔직하게 고백하고 죽었다.
그리고 1967년. 오에 겐자부로의 집안 가운데 또 한 명의 Matriarch, 그러나 마지막 여가장, 여부족장, 대빵 가모장, 매이트리아크이며 오에의 작품에는 자주 ‘마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딸이 출생한다. 이해에 출간하는 작품이 <만엔 원년의 풋볼>.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분을 위하여 간략하게 말하자면, ‘만엔 원년의 풋볼’이라 하는 건 현금 만엔¥10,000 내기 축구시합이 아니고, 말기 에도 시대, 메이지 유신이 터지기 바로 직전, 원래 무신정권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던 일왕 고메이가 주제도 모르고 만엔万延이라 연호를 만들어 1년이 채 못되게 사용한 첫 해 1860년이란 거다. 이 시절 앞뒤가 오에의 증조부모, 주로 조부모 때였는데, 시코쿠 숲의 오지 중에서도 오지에 터를 이루어 지세가 험해 어느 번藩(영지)에도 속하지 않아 당연히 세금도 안 내던 자급자족 마을이었다가, 세월이 변해 이웃한 번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지역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사건, 이에 따른 구전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룬 작품이다.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소개하는 사실상의 민란 지도자 가메이 메이스케龜井銘助는 당시 열대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간혹 민란의 지도자로 이런 소년장수가 등장한다. 메이스케는 번의 군사들이 몰려오자 진입하기 어려운 마을의 입구에서 실제 사격이 아니라 허장성세를 위하여 허공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해 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일단 기를 팍 죽인 상태에서 곧바로 이 막강한 세력과 성공적인 교섭을 펼쳐, 주민 가운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상식과 선례에 구애 받지 않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재주 좋은 녀석’을 Trickster라고 한다. 그럼 다 나왔다. 저 위에서 대빵 가모장, 여부족장, 여족장을 뜻하는 Matriarch와 합해서 M/T.
만엔, 1860년의 민란에서 열대여섯 소년장군 메이스케가 T, 그의 어머니 또는 의붓어머니가 M.
하여간 사람들이란. 누구 하나가 잘 나가면 꼭 딴지 거는 인간이 있다. 우리의 T, 메이스케 역시 번의 관료의 지략으로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천성이 낙천적이고 태평한 메이스케를 어렵게 면회한 어머니 또는 의붓어머니는 메이스케가 결국 죽게 될 줄 알고 “괜찮아, 괜찮아, 죽게 되더라도 내가 곧 다시 낳아줄게.”하며 그를 격려한다. 메이스케가 결국 형장에서 사라지고 1년이 흐른 다음에 이 (의붓)어머니는 남자 아이를 출산하고, 6년이 흘러 시코쿠 숲에 “혈세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흔연히 봉기에 참여해 또다른 가메이 메이스케 혹은 ‘환생동자’라 불리며 활약한다. 중요한 결정 사안이 있을 경우, 동자는 잠깐 넋을 잃었다가 ‘메이스케가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하며 봉기군이 해야 할 작전을 지시하고, 이 작전마다 전부 귀신처럼 들어 맞았다. 혈세농민봉기가 마감한 다음에 환생 동자는 어머니 앞에서 다다미 위에 누운 상태로 몸을 점점 부양하더니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더 빨리 회전하며 허공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 경우에 오리지널 메이스케와 환생 동자가 T, (의붓)어머니와 생모가 M. M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일 수 있고, 어떨 때는 T를 지혜롭게 돕는다. 그리하여 M과 T의 효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함수값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엔 원년의 풋볼>에 나온다고? 아니다. 전적으로 <M/T와 숲의 신비한 이야기> 줄거리이면서 <만엔 원년의 풋볼> 내용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앞에서 <개인적인 체험>과 <만엔 원년의 풋볼>을 거론했다. 이 두 작품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에 겐자부로를 읽으면 조금 헷갈릴 수 있다. 완전히 헝클어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선 독서가 있으면 순조롭게 즐기며 읽을 수 있는 것에 괜히 뇌세포 고생시킬 수 있다는 정도. 데뷔작인 <새싹 뽑기…>을 제외하고 내가 읽은 모든 오에 겐자부로의 책이 다 그렇다. SF 작품으로 볼 수도 있는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역시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과 핵셀터에 들어가 겪는 일이 벌어지며, 셀터가 있는 지형도 시코쿠 숲을 묘사한 동네와 도로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새싹 뽑기…>에서 청소년들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 동네도 오에의 고향집 근방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발달장애 아들이 출연하느냐고? 그렇다. 마지막 5장 “숲의 신비의 음악”에 중요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M/T…>에서는 K로, 다른 책에서는 대개 ‘고기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오에 겐자부로. 책을 읽어보고 내가 느낀 오에 겐자부로는 막강한 필력으로 한 시대의 거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면서, 스스로도 자신이 거장 가운데 일족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악마처럼 거만하다. 특히 뇌 사용 방면으로. 고기토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을까?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일본문학 그리고 세계문학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차지할 문학적 영웅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본인은, 다만 이 책 <M/T…>를 읽어본 소감에 입각해 말하자면, 스스로를 트릭스터, 재주좋은 녀석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떡잎을 알아본 작가의 할머니는 유독 ‘나’, K를 불러 시코쿠 숲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억하고 (똑 부러지게 이렇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록으로 남기기 바랐다. 그리하여 K겐자부로에게 M은 할머니가 될 수 있다.
훗날 오에 겐자부로가 쓸 장편소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는 (다른 작품 속에서 K의 할아버지가 조성한) 시코쿠 숲에 ‘고기이’라고 하는 소년이 살고 있다. 이 고기이 소년이 바로 동자. 메이스케가 환생해 혈세 농민봉기를 성공으로 이끌고 다음 해에 홀연히 공중부양해 사라져 숲의 정령이 된 인격이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는데, 이 동자가 20세기 말에 K의 아들 히카리(<우울한…>에서는 ‘아카리’)를 통하여 환생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서로 영혼의 교환이 가능하다. K가 T이니 K의 아들이며, 발달장애를 갖고 있지만 절대음감을 가진 작곡가로도 이름을 낸 히카리 역시 T가 아닐 이유는 없으니까. 맞지? 맞다.
그러면 히카리의 M은 누구? 히카리의 할머니, K의 어머니이다. 히카리가 태어나 1차 수술로 뇌헤르니아를 원래 위치로 집어넣고, 2차 수술로 없는 두개골을 플라스틱으로 대체할 때, 2차 수술 당시 잠깐 보고 20년 동안 얼굴도 본 적 없는 청년 손자. 할머니는 성인이 된 히카리에게 역시 시코쿠 숲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이것을 문자로 기록할 능력이 없는 손자는 문자 대신 피아노곡으로 남겨 제목을 <Kowasuhito: 파괴자>라고 한다. 파괴자? 파괴자에 관한 이야기는 유일하게 <M/T…>에 나오는 것으로 어떻게 시코쿠 섬의 두메산골에 마을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
번의 무사계급으로 지체 높은 가문의 청년이 번의 책임자 가운데 한 명인 큰형의 아내, 그러니까 형수와 함께 도망쳐 숲 속 마을을 창건했는데 당시 형수 ‘오바’가 청년보다 열 살 위였다. 청년은 25명의 젊은이와 함께 바닷가에 도착했고, 지역 최대 해적 가문의 딸이었던 오바는 미리 바닷가에 배 한 척과 25명의 해적 집안 처녀를 대기시켜 능숙하게 시코쿠 섬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이러니 숲 속 마을이 오랜 세월 산과 골짜기 속에 거의 은신 수준으로 세상과 격리시켜 산 내역을 아실 듯. 처음에 마을을 찾아 내륙으로 들어갈 당시 커다란 암벽 장애물이 앞을 막아 더 이상 진입이 불가능했을 때, 청년이 가져온 폭탄을 터뜨려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깊숙한 분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이름이 “파괴자”.
근데 웃기는 건, 이 분지 사람들이 말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과 전쟁을 벌여 마구 난도질을 감행할 당시 중국과 조선의 독립군과 연대하여 대 일본군국주의 무장항쟁을 벌이는 장면이 4부 주요 스토리로 나오는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정말 웃겼고, 정말로 도서관 열람실에서, 키득키득 웃었다는 건 사족蛇足. 하여간 오에 겐자부로가 악마처럼 거만한 건 맞는 거 같다.
악마처럼 거만해도, 제2의 메피스토펠레스라도 어쨌든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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