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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ㅣ 문학동네 시인선 183
김상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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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는 말한다.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연애시를 쓴다고.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다는데, 오호, 이름이 난 시인은 그렇구나. 여기에 연애시를 쓰는 팁을 하나 가르쳐준다.
“먼저 짝짓기에 관계되는 모든 낱말을 머리에서 끄집어 쭉 쓴 뒤, 이것들을 연결해 시를 만든다. 이렇게 쓴 긴 시들은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단번에 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연애의 바벨탑이라고 하면 너무 유치해서 짝짓기로 표현했다. 그러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나 동물도 다 속하게 된다.” (세계일보 기사 발췌)
브레인스토밍? 예상 외다. 연애시가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고? 프로세스가 있어서 공정을 따라 가며 완성되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연애시, 적어도 김상미가 쓰는 연애시는 생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맞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생산한 시 한 편을 읽어볼까? 안 된다. 전문을 인용하기에 시가 길다. 이이의 시가 대체적으로 길어 전문을 옮기는 건 짧은 독후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병 속의 편지>에서 조금만 인용해보자.
벌거벗은 마하*야, 젊디젊은 마하야, 인생은 짧다, 한번 보면 모두가 반하는 네 몸, 그 몸으로 계속 사랑을 나누어라, 인생이란 이 끝없는 사막에서 맛보는 오아시스 같은 섹스, 그 사랑을 붙들고 놓지 마라, 네 몸 위에 누웠다 간 썩은 정신이나 영혼 따위는 신경도 쓰지 말고, 네 팽팽한 젖가슴과 네 탄탄한 허벅지에 와 꽂히는 황홀한 시선들을 즐겨라. (부분. p.50 *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그림 제목)
이것이 시의 한 문장이다. 두번째 문장은 위 인용보다 세 배쯤 되는데, 세계일보 기사처럼 “짝짓기애 관련된 단어”는 두번째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에 몽땅 실려 있다. 관련 단어를 연결하는데 그냥 연결하면 당연히 시가 아니니까 여기에 사람 사는 걸 보탠다. 예컨대: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보이고, 결코 모를 것 같던 사람의 마음도 사랑의 행위 중엔 훤히 다 드러나 보이기 마련, 그러니 너에게 공손히 허리 굽혀 장미를 꺾는 이들, 그들이 네 인생도 꺾어버릴까 두려워 마라,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열정의 시작도 그 끝도 사실은 모두 잔혹한 짝짓기에서 이루어지는 것, (후략)” (같은 시. p.50)
읽을 때는 그럴 듯할 지 모르겠지만 정말 시에 쓴 대로 결코 모를 것 같던 사람의 마음을 섹스 중에는 훤히 다 알 수 있을까? 그럼 섹스가 일종의 관심법? 철원에 도읍한 저 태봉국의 황제 궁예가 주특기로 삼던 것 말이지? 에이, 아서라.
1957년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상미는 졸업하고 사상공단의 공장과 작은 사무실의 경리를 거쳐 서울에서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동생과 서울에서 합류한다. 서울에서 작은 회사(들)에 다니는 내내 시를 쓰다가 1990년에 작가세계를 통해 서른일곱 살에 시인으로 데뷔했다. 이후 이 시집까지 모두 다섯 권을 냈으니, 인생의 별의 별 맛은 다 봤다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셈이다.
이 닭띠 시인은 육십대가 되니 시 쓰는 일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이의 다른 시집은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시들이 거의 길다. 무대도 거창하다.
파리에서
파리에서 닷새를 보냈다 너무나 와보고 싶었던 도시
말도로르의 노래처럼 취해서, 엄청나게 취해서
밤새도록 드럼통 세 개 분량의 피를 빤 빈대처럼* 취해서
격한 파리의 숨결, 파리의 공기, 파리의 장소들에 취해서
오랫동안 사랑했던 이들이 아낌없이 살고, 사랑하다, 죽어 묻힌
몽파르나스 묘지와 페르 라세즈 묘지에 취해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록빛 압생트에 취해서
뜨겁게 뜨겁게 취해서
빅토르 위고의 불멸의 꼽추, 카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위해 울리는
노트르담대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너무나 애절해서
내 곁을 툭 치거나 총총히 사라지는 여인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보바리 부인을 닮아서 (후략. p.60) * 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
파리 관광, 시인이니까 좋게 말해 문학 답사 가서 지은 노래 한 수에 브레인스토밍해서 끄집어낸 숱한 인물들 로트레아몽,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플로베르를 넘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코르타사르가 묻힌 몽파르나스 무덤과 몰리에르, 발자크, 비제 등이 묻힌 페르 라 세즈 묘지까지 총출동시킨다. 앞부분에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저렇게 연 구분도 없이 꼬박 두 페이지 반, 모두 마흔네 행에 이르는 시에 별의 별 문인, 시인, 소설가, 극작가, 셰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스콧 핏제럴드 등 영어로 글을 쓰던 사람들까지, 김상미가 파리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단 나열하고, 이 사람들을 적당하게 연결해서 한 방에 쓴 시로 보인다. 김상미가 말한 것처럼. 긴 시들의 경우에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번에 일필휘지로 쓴다고 시인이 직접 말했듯이 이 시도 그랬을 것이다. 며칠 전에 읽은 시인이자 소설가 임솔아는 시 한 편 쓰는 데 적어도 쉰 번, 50번 이상의 퇴고를 한다고 하는데 아마 두 시인이 다른 과인 모양이다. 아쉽게도 나는 퇴고 열나 하는 쪽이 더 좋다. 좋아도 많이 더 좋다.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단번에” 쓰는 시들의 경우, 아마도 제일 중요한 건 아니더라도 매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시를 읽을 때의 리듬감, 즉 운율일 듯하다. 김상미의 거의 모든 시가 길다. 다 긴 시라서 그의 주장대로 리듬이 끊기지 않게 쓰였고, 그래서 운율은 척척 맞아 들어간다. 마치 가사문학을 읽는 것 같기도 할 정도로. 오해하지 마시라, 가사문학 역시 우리나라의 훌륭한 시 장르라고 나는 주장하니까. 사람들이 이 책에서 많이 인용하는 시 가운데 하나가 <포커 치는 개들>이다. 이 시 역시 길어서 전문을 인용할 수 없어서 앞부분만 조금 따오겠다.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 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 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십오 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 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부분. p.23)
읽으면 읽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면서 리듬을 타는 건 맞는데, 아우, 너무 말이 많다. 여자건 남자건 하여튼 나이 들면 말이 많아져서… 다른 분은 모르겠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 나? 말 많아질까봐 독하게 마음먹고 입 다물고 살려 노력하고 있다.
시인 김상미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오나, 시는 간결한 것이 좋다. 물론 김상미라고 긴 시만 있는 건 아니다. 짧은 시도 있다.
미스터리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 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전문. p.15)
필 때는 신god, 질 때는 인간. 그래서 필 때는 엑스터시, 질 때는 눈물. 일단 신이 황홀이란 건 알겠다. 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새롭게 가톨릭의 임금자리에 오른 레오 14세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다. 신이 사람을 만든 다음에 왜 그렇게 사람을 한시도 쉬지 않고 들들 볶았는지. 잘 익은 사과를 뻔히 보면서도 따먹지 말라고 그런 거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인간은 또 들들 볶여가면서도 신을 그렇게 황홀하다고 찬송을 했고, 지금도 하고, 앞으로는 할지 안 할지 모르는지.
좋다, 그건 나중 일이고, 꽃 질 때는 인간이라서 눈물이 나? 대구counterpoint로 생각하면 황홀의 반대 개념으로 고통? 말 되네. 황홀, 엑스터시 그리고 오르가슴 역시 일종의 통감, 고통의 다른 감각이니까. 아니면 뭐 비슷한 개념으로 사는 일 자체가 눈물이 난다는 건가? 게다가 꽃이 지는 상황이니까. 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 시잖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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