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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향거리
찬 쉐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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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찬쉐 다섯 권을 다 읽었다. 한 권은 읽지 않은 상태로 두는 것이 좋다는 주의라서 여태 서고를 지날 때마다 못 본 척 슬쩍 지나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어 들었다. 중국의 선봉파 기수답게 찬쉐는 쉽지 않다. 그 가운데 <오향거리>가 제일 읽기 힘들지 않았나 싶다. 나는 다행히 다른 작품을 모두 읽어 <오향거리>에서 묘사하고 있는 오향가五香街가 어떤 커뮤니티를 말하는지 그나마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있었다”가 아니라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쓴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오향거리가 애초 찬쉐가 묘사한 찬쉐의 오향거리는 아닐지언정 내가 ‘독자인 나’를 이해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10리, 4킬로미터로 뻗은 직선 스트리트인 오향거리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의 집합인지 기회가 생겨 찬쉐에게 직접 묻는다 해도, 아마 찬쉐는 “거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특유의 눈웃음을 지을 뿐 절대로 자신의 오향거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 같다. 이것도 그냥 짐작이다. 짐작이라는 전제로 조금 덧붙이자면, 이 오향거리는 바야흐로 21세기에 접어든 새 중화인민공화국일 수도 있고, 유사이래 처음으로 내놓고 혼외 연애를 즐기기 시작한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집단일 수도 있으며,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할 것 같으면, 찬쉐가 속한 중국 현대 문학 종사자, 조금 범위를 넓히면 중국 현대 예술 종사자들의 커뮤니티일 수도 있다.
찬쉐의 작품 중에서 1990년 작인 <오향거리>, 2005년의 <마지막 연인> 그리고 2013년 <신세기 러브 스토리>를 “욕망의 철학 3부작”이라 한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욕망”의 범주에만 가두어 두기에는 2022년 작 <격정세계>의 충격이 컸다. 직업이 소설가이니 당연하겠지만 <격정세계>에서 찬쉐는 중국의 아방가르드 현대문학, 현대소설에 대한 관심을 작가 특유의 격정적인 사랑과 재미있게 버무려냈다. 나도 <격정세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오향거리>를 읽으며, 이건 중국의 현대문학판에서 전위적 작품을 쓰기 시작한 사람과 당시 전위문학을 접하게 된 동료 문학인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고 마음먹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이 ‘전위문학 v.s. 문학판 사람들’의 반응 현상을 찬쉐니까, ‘격정적인 사랑’의 형태로 바꾸어 과감하게 유부녀, 유부남의 사랑에 관한 거리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을까, 찬쉐가 책을 써놓고 모른 척하듯이 나도 여차하면 “아니면 말고” 할 거라는 전제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책을 열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국어판 서문”의 한 구절이었다. 읽어보자.
“제 첫번째 장편소설이지만 열정이 밑받침되었기에 개방적 시선과 세련된 기교, 거침없는 생각을 드러내고 풍부한 유머와 해학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웃기지?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이 작가 시점이기 때문이다. 찬쉐는 한국어 서문마저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 예술가, 그러나 오향거리 사람들한테는 그저 ‘속기사’로 불리기만 하는 자칭 천재인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말한 것이다. 짧은 한국어 서문을 찬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저는 제가 미래형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서 미래의 이상적 삶, 유토피아의 경지를 주장했고요. 저는 우리 인류가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아직은 실현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하소연하며 항상 다른 쪽에서 갈망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니까. 소설가한테 미래의 이상적 삶이라는 건 결국 문학적 삶을 뜻하는 것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경지는 미래형 작가, 미래파가 지향하는 문학/예술의 형태인데,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 말하기는 좀 껄적지근하니 “다른 쪽에서 갈망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가이자 문학인이자 사람들한테 ‘하찮은’ 속기사라 불리는 ‘나’와 같지만 어딜, 작가는 작중 소설가라기보다 작은 견과류 가게에서 누에콩, 땅콩, 해바리기 씨를 튀기거나 볶아서 파는 X여사와 더 가깝다. 그렇다고 찬쉐가 X여사처럼 다른 집 유부남하고 바람을 피웠다는 말은 아니고. 어때? 불륜이라니까 혹하지? 좀 자세하게 알아보자.
X여사와 남편, 이들 사이의 여섯 살 먹은 아들 샤오바오는 외지인이다. 가족이 오향거리로 흘러 들어오기 전엔 폐품을 주워 팔아 호구지책을 삼았다고 말하지만 X의 남편의 친구가 가족들 몰래 방에 들어가 서류를 들여다보니 전직 ‘기관 간부’였다고 해서 주민들의 불안이 고조된 일이 있었다. 선량한 주민한테 전에 국가를 위해 일하고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은 관리였다는데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이 가족에게는 틀림없이 일부러 전에 기관 간부였다는 것을 숨겨야 하는 놀랄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라고 반은 경외, 반은 경계하는 중국 대중의 마음. 이해 가시지?
근데 웃긴 건, 어느 날부터 X여사는 사물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보긴 봤다. 거울을 통해서. 거울? 이런 동요가 있었지? “왼손을 앞에 놓고, 오른손을 앞에 놓고 (가사를 잊었다) …” 거울을 통해 보면 내가 아무리 왼손을 들어도 거울 속 나는 절대로 왼손을 올리지 않는다. 뭔가 왜곡된 상image이다. 이 왜곡한 사물과 사람들을 비치는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다가 결국 눈에 동자가 없어진 X여사. X여사의 남편은 한술 더 떠, 아내에게 현미경을 사 준다. 이제 X여사는 현미경을 통해 뭔가를 보는 것에 취미를 단단히 붙였다. 견과류 가게에서 X여사는 결코 사람들의 눈과 맞추지 않는다. 손님의 머리통 위나 발 아래를 향하게 하고 누에콩 볶을 것을 팔거나 그것도 좀 그러면 아예 창문을 통해 팔만 내밀고 땅콩을 주고 현금을 받는다.
이 장면이 작품의 앞쪽에 나오는데, 처음 읽을 때는 도대체 이것이 어떤 현상의 메타포인지 헷갈리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다가 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을 중국 현대문학판에서 전위적 작가를 연상한 것이라면, 전위 작가 또는 작품이 사물과 사람을 보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겠지? 작가의 방식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향과 굴절율과 망막현상과 같다면 어떻게 전위 문학이나 예술을 만들 수 있겠나. X여사는 애초부터 보는 방식이 오향거리 모든 사람과 달랐다는 거다. 여기에 주민들은 중요한 사건을 덧붙인다.
X여사의 불륜. 상대는 오래도록 건전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던 Q선생. 오향거리 사람 답게 정력 왕성하고 친절하고 상냥해서 만점 남편으로 손색이 없었다가, X여사의 뇌쇄적 외모에 홀랑 빠져 으슥한 창고 건물에서 “문화 여가 활동”을 했다고 딱 찍힌 인물이다. 혹시 모른다. 어쩌면 제일 먼저 거리에 있는 약방 할아범 집의 2층에서 몸의 2층을 쌓았는 지도. 이들의 행태를 놓고 오향거리의 인텔리 A박사, B여사, C교수 등은 토론회를 열어 둘의 “문화 여가 생활”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었을 지에 대한 격렬한 주장을 만장하신 오향거리 주민들을 초빙한 강당에서 펴기도 한다. 거리의 모든 사람은 X여사와 Q선생의 불륜에 쏟아졌지만, X여사는 여전히 견과류 가게에서 해바라기 씨를 파는 반면에 Q선생은 직장에서도 억지로 떨려나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진 것을 보고, 훗날 Q선생 대신 P씨, O씨, N씨 등을 만들어 낸다. 사실 X여사와 Q선생 사이에 정말로 “문화 여가 활동”이 있었는지 아무도 확인한 바 없고, 새카만 밤에 두 유부남녀가 단둘이 음침한 곳에 사소한 터치라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일이 없다.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일 뿐.
이들 외 다른 출연진으로 45세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과부도 있고, X여사 남편의 친구, 스물아홉 살 먹었다고 주장하는 X여사의 여동생, 오래 침대생활을 한 28세의 절름발이 여성, 얼굴이 천산만수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거리의 주민답게 정력 하나는 왕성한 의지가지 없는 독거 노파, X여사를 추앙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쩌다가 독거노파의 침대 파트너가 되어버리는 석탄회사 노동자 총각 등등. 이들 전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오향거리의 시류가 X여사와 Q선생의 혼외 정사를 근거 없이 확정하고, 물론 과거에도 어찌 이런 일이 없었겠느냐마는 X여사와 Q선생처럼, 특히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X여사처럼 불륜을 내놓고 저지르고 사실을 부인하려 하지도 않는 경우가 처음이라, X여사를 독소가 온몸에 침투해 만들 몰인정하고 적의에 가득한 괴물, 즉 일종의 타도 대상으로 여겼다. 그럴 수 있지. 특히 오향거리가 그동안 비교적 폐쇄된 지역이었다면 더욱.
이런 곳에서 X여사처럼 특별하게 이상한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고, 그간 금기였던 혼외정사의 시인, 사실 X여사가 정말 시인할 것이 있었는 지는 다음으로 하고,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가지고도, 굴러온 돌 X여사와 이젠 투명인간처럼 되어버린 Q선생 때문에 곧 오향거리가 폭망할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결국 X여사의 남편과 아들 샤오바오는 작품 끝부분에 가면 어디론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가정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도 거의 폐품 취급을 받아 곧 쫓겨날 거 같은 Q선생이 다시 그나마 정상을 회복해 직장에 복귀하자(Q선생의 사모님은 벌써 친정으로 내뺀 뒤다), 거리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로망일지도 모르는 X여사의 불륜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하여 정말 그러한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로 치고 새로이 P선생, O선생 등을 만들어냈던 거다.
그러나? 세상은 전위가 발전시킨다. 어느새 X여사에게 미래파라는 조류潮流의 계관이 씌워지고, 그저 얼굴마담 역할에 그치기는 하지만 X여사는 오향거리의 대표로 추대받아 경쾌한 걸음으로 오향거리 대로에서 내일을 향해 발을 딛는데, 그래도 뭔가 조금 더 남았겠지? 그렇겠지?
쉽지 않은 책이다. 중반에 속기사, 천재 작가로 등장하는 ‘나’의 X여사에 대한 짧은 기록을 끝으로 독후감을 접는다.
“X여사, 있는 듯 없는 듯한 이 인물은 우리의 역사에 수없이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녀가 실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행위는 절대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 인물의 존재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우듬지는 거대하나 뿌리는 얕아 살짝 흔들기만 해도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 거목처럼 말이다. 확실한 점은 그런 환상이나 영원한 안개, 구름만이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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