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여관 범우희곡선 27
이강백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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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에 국립극단, 오태석 연출로 댤오름극장에서 초연한 작품. 밀레니엄 또는 Y2K로 뭔지 모르게 좀 싱숭생숭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작품 구상을 해 쓰기 시작했지만 몇 년 동안 손을 놓고 살았단다. 드디어 21세기가 도래했으나 자신이 애초에 쓰려고 했던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지금 보면 가장 큰 건 아니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지만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인 “세대 갈등”에 대해 더는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던지 <황색여관>을 썼다. 극작가가 보통 극작가가 아니라서, 우리나라 연극계의 지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라 집필을 마치자마자 그해 당장 무대에 올렸다. 2025년. 현재 우리나라를 보면 이까짓 세대 갈등은 기원 몇 세기 전부터 유구하게,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전통이니 그렇다 치고, 빌어먹을 위정자들이 정치 목적상 국민을 이쪽 저쪽, 쉽게 말해 선한 우리와 악한 너네로 짝, 모세가 염불을 해 홍해 바다를 갈라놓듯 짝, 갈라놓은 것이 훨씬, 훨씬, 그리고 훨씬 더 심각하지 않을까 싶다. 보수 1찍과 수구 2찍의 대결을 설명 목적상 진보와 보수라고도 칭하는 거 같은데, 이거야말로 웃겼다. 웃겨도 보통 웃긴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진보가 있댜? 내 눈엔 이짝은 보수, 저짝은 수구. (앗, 이 독후감 쓰고 사흘 지나 이짝 당 당수가 말한다. “우리 당은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라 중도 보수당”이었다고. 이 자들도 자기들의 정체가 보수인 건 알고 있었군. 흠.) 이것들이 애꿎은 시민들을 선동, 현혹해 심각한 수준으로 갈라놓았다. 세대 갈등보다 이짝, 저짝 갈등이 훨씬 심각하지만, 이강백이 이 희곡을 쓴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이짝, 저짝 갈등이 그리 우려스럽지는 않았던 듯하다. 내가 그때를 돌아봐도 그렇다. 그러나 당시에도 두 짝의 싸움은 사회 밑바닥에 이미 파종되어 있던 것이었으며 그때 벌써 싹을 틔워 적어도 묘목 수준까지 컸었는데 눈이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여간 이강백은 자기 주특기, 현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빗대어 우화화寓話化하는 것. 하기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실제/자연을 모방하여 무대 위에서 그것을 다른 형태로 우화, 은유, 변용시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강백은 유신시대 때부터 독특하고, 과하게 격하지 않고, (유신, 5공 같은 독재자 치하에서 특히 빠지기 쉬운 골짜기인)초현실성/추상성 없이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선다. 이 작품 <황색여관>도 마찬가지다.


  사방 80킬로미터, 그러니까 사방 2백리,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재면 합해서 4백리에 아무것도 없이,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딱 하나 서 있는 건물이 황색여관이다. 벌판도 그냥 벌판이 아니라 사시사철 진한 황사바람이 몰아쳐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과 목에 모래가 끼고, 눈은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따끔거리는 황무지.

  이곳에 딱 하나 서 있어서 지붕 위에 “황색여관”이라고 네온사인 간판이 밤마다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에 나오는 적막한 성 가브리엘 고원은 에덴 동산일 정도이다. 여관은, 21세기 모텔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 생각하기 어려울 터인데, 시멘트를 바른 앞마당을 둘러싸고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방엔 화장실도 샤워실도 없다. 저 대문 옆의 공동 화장실과 찬물만 나오는 공동 샤워실에서 볼 일을 봐야 하고, 간단한 세수 정도는 마당에 놓은 수도꼭지에서 해결해야 한다. 나 대학 다닐 때도 이런 여관이 학교 근방에 있어서 술이 과해 꽐라가 된 아이들이 만날 요와 이불 위에 먹은 걸 퍼질러 토해놓고는 했으며, 아줌마 교양영화 좀 틀어주세요, 지붕이 날아가라 소리를 지르면 3분 뒤에 여관의 중앙관리실에서 송출하는 포르노라고도 부르고 쌕쌕이라고도 불렀던 교양영화가 브라운관 18인치 TV를 통해 흘러나왔으며, 또다시 3분쯤이 더 지나면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주와 막걸리를 시멘트 봉지 가득히 사들고 온 사회학과 다니는 애새끼가 자기 오기도 전에 쌕쌕이 시작했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던 기억 또는 추억. 말이 기억이고 추억이지 당시엔 환장이었던 기억 또는 추억.

  희곡을 읽어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만, 황색여관의 주인이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서 여관은 날이면 날마다 손님이 찼는데, 이들은 숙박료 말고 주인한테 가욋돈을 듬뿍 안겨주는 놀라운 일들을 날이면 날마다, 아니지, 이 여관에는 낮손님이 없으니까, 밤이면 밤마다 이런 일이 생겨, 돈을 함빡 벌었다. 사업이 잘 되면 당연히 투자를 해야 하는 법. 주인은 이 여관 지붕을 뜯어 2층을 올려, 1층에 비하면 뻑적지근한 큰 방, 개별 화장실과 샤워실을 비치한 비싼 방을 들인 후 새로이 지붕을 올려 그곳에 “황색여관” 네온사인을 달았던 거다. 화장실, 샤워실이 있는 넓은 방이니 당연히 숙박료가 1층에 비해 무지막지 했지만, 그래도 손님은 늘 있었다.


  앞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이강백은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세대갈등이라 보았다고 했다. 여관에서 세대갈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1층과 2층이다. 2층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공직 은퇴자(전직 장관), 변호사, 사업가로 사회의 대표적인 나이 많은 부르주아로 생각하면 여지없다. 반면에 1층은 배선공, 배관공, 외판원 등 젊은 무산자계급. 유일하게 있는 집 아들이자 대학생이 1층에 숙박한다. 이 대학생은 계급은 (쁘띠)부르주아의 자제이지만 자기 쓸 돈이 언제나 많지는 않은 “젊은” 계층이다. 2007년이면 지금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후기자본주의. 사실 이 작품에 갈등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자본, 나이가 많고 적고가 아니라, 돈이 있고 없고에 달렸다. 얼핏 보면 부유한 장년/노년과 가난한 청년으로 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면 가난한 노년이 또한 얼마나 많은 지.

  손님이 여관에 들어와 방을 선택할 때부터 계급은 정해진다. 그걸 (학생을 제외한) 무산자 청년들은 차별로 인식한다. 방을 선택하는 일은 돈이 있고 없고 간에 확연히, 그리고 제일 앞서 일어나며, 이 정도는 비행기의 1st 클래스석과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처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나눔으로 인식하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못 말리게 기분 나쁘게 하는 게 ‘먹는 거’다. 손님이 들고, 시간이 조금 지나, 사방 2백리에 아무 시설도 없어서 이 여관에서 주는 밥만 먹어야 하건만, A코스와 B코스의 요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A코스는 각종 기본반찬에 소갈비 찜, 닭고기 볶음, 바닷게와 새우를 섞어 끓인 해물 찌게, 송이버섯 구이가 나오고, B코스는 김치와 간장만 담은 비빔밥이다. 당연히 2층 손님은 자연스럽게 전부 A코스를 선택하고 1층 손님들은 울화를 쏟아내며 B코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이제 여독을 풀기 위해 술 한 잔. 여관에서는 소주, 맥주, 막걸리, 이런 술 따위는 팔지 않는다. 유일하게 위스키. 12년, 17년, 21년 묵은 위스키만 판다. 2층 손님 가운데 사업가는 활수하게 21년 묵은 위스키를 사서 2층 손님들하고 맛나게 홀짝거린다. 1층 손님은 12년 묵은 것도 언감생심, 침만 꿀꺽 삼키기만 할 뿐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이고, 위스키? 5년짜리면 어떻고 8년짜리면 어떠냐. 그냥 술이면 되는 것이지 숙성 햇수가 무슨. 졸리와 피트 부부가 주연한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서 이 부자 부부가 한바탕 쌈박질을 한 다음에 마시는 술도 조니 워커 레드, 10년 미만 숙성시킨, 숙성기간 미표시 위스키인데 우짜 고급 위스키만 그리 좋아들 하는지. 하여간 1층 무산자들이 심통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본격적으로 객고를 풀기 위하여 몸 파는 여자 셋을 데려온다. 늙은 여자, 젊은 여자, 그리고 어린 여자. 이들의 면접을 위하여 다시 식당으로 내려온 윗층 손님들은 아랫층 손님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돈을 주고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 이렇게 둘을 데리고 올라가 3대 2로 쇼를 벌인다. 1층 손님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화딱지가 나서 늙은 여자를 자신과 계급이 다르지만 같은 청년 계층인 학생에게 넘겨주고, 꼭지가 먼저 돈 배선공과 배관공이 먼저 2층에 올라가 사업가를 때려 죽여버린다. 이렇게 살육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늙은 인간들이라 해도 여태 살아온 전력이 있지, 이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1층 젊은이들을 차례차례 죽여버려, 몸 파는 여자들이 혼비백산 도망간 여관에서 살아남은 손님은 하나도 없다. 다 죽었다. 싹 죽어버렸다.

  쇼는 끝났다. 왕서방이 등장해 돈을 버는 시간만 남았다. <황색여관>에서 왕서방은 여관 주인 부부. 이들이 그동안 떼돈을 번 건, 숙박비가 아니라 노인/중년과 청년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은 다음에 이들의 가방과 주머니를 털어 거저 얻은 돈 때문이었다. 이 드런 꼴을 보다 못한 주인의 처제와 주방장은 밤이면 밤마다 쏟아져 나오는 시체들을 더는 견디지 못하여 여관을 나가겠다고 하고, 이들 없이 여관의 운영이 쉽지 않은 주인 부부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설득하다가, 급기야 처제와 주방장이 손님 가운데 한 명만 살릴 수 있다면 이 여관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처제는 과연 이 세대간의 살육전을 멈출 수 있을까? 하다못해 세대갈등의 와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지? 아니라고? 읽어보면 안다.

  아무쪼록 세대갈등이 아니라 202X년의 우리나라에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소위 진영갈등, 모세가 갈라놓은 홍해바다의 좁은 길을 따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얼른, 서둘러 통과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향한 즉시 그랬듯이, 다시 바다는 바다끼리, 바다 속 물고기는 물고기끼리, 바다 포유류는 바다 포유류끼리 얼른얼른, 유사이래 단 한 번도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미워하지 말고, 미워해도 지금처럼 극단적인 미움 말고, 그래도 좀 덜 미워해 가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그런 세상을 202X년에는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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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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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책이 2년만에 출간됐고, 나도 2년만에 그의 새 작품을 읽었다. 내겐 <저항의 멜랑콜리>가 첫 크러스너호르커이였는데, 한 방에 그냥 나가 떨어졌다. 놀라운 문장형식과 집단의 난파현상이라는 독특한 주제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던 거였다. 다음은 <사탄 탱고>. <저항의 멜랑코리>와 유사한 주제이지만 분위기가 다른 무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이야기하자면 카프카를 호출할 수밖에 없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전작 독후감에서 한 번 쓴 것처럼,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특유의 불안, 소외, 불통, 두려움의 골짜기에 발을 딛는 것은 측량사나 K, 그레고르 같은 한 명의 주인공인데 반하여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헝가리 변경의 도시 또는 황야지대의 농장 전체로 확장한다. 오늘 읽은 책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단 한 권의 작품만 쓰고 싶었다고 하면서 <사탄 탱고>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것 한 권 가지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벵크하임…>을 썼다고 했다는데, 하여간 이 두 권과 <저항의 멜랑콜리> 그리고 아직 나오지 않은 <전쟁과 전쟁>을 합해 “크러스너호르커이 4부작”이라 한다고.

  이이는 참 독특하다. 2년 만에 읽어서 그런지 서문 격인 “경고”를 읽을 때는 크러스너호르커이 특유의 문장, 한도 끝도 없이 마침표 없이 몇 페이지씩이나 계속되는 단 한 문장이 그 새 낯설어져, 속으로는 맞아, 이게 크러스너호르커이야, 하고 반가움의 마음까지 들었지만, 눈은 길고 긴 한 문장의 미궁에서 갈 길을 헤매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마음이 있는 독자들, 그 가운데 이미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본 독자들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 정처없이 길고 긴, 여간해서 마침표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문장이 무려 768페이지까지 연속할지니, 왼쪽 페이지 제일 위쪽 왼편에서, 오른쪽 페이지 제일 아래쪽 오른편까지 빼곡하게 들어찼어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장을 768페이지, 반올림해서 8백페이지까지 읽어야 하는 고문을 견뎌야 당신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위안을 찾을 수 있을 듯한 건, 이미 <사탄 탱고>나 <저항의 멜랑콜리>를 거쳤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어떤 주제로 말하고 있는 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작가를 오해해도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의 오해였을 것이라는 만족감과, 그토록 많은 활자의 미로를 통과해냈다는 뿌듯한 즐거움, 포식 후 깊은 트림을 끄집어 낼 때와 비슷한 포만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내가 그랬으니 당신도 그럴 것이라는 오만과 자뻑을 포함해 말씀드립자면 그렇다는 얘기이니 너무 아니꼬와하지 마시기 바란다, 바라마지 않는다. 아, 먼저 읽은 자의 느긋함과 여유라니!


  한 번 더 말하는데, 이이의 작품을 읽고나서,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지만, 카프카를 떠올리지 않기도 힘들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을 읽는 도중에도 측량사가 성주를 만나지 못했듯이, K가 경찰서장이 됐건 보안대장이 됐건, 아니면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장이 됐건 간에 하여간 우두머리 코빼기도 못 봤듯이, 어쩌면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에서도 벵크하임 남작은 그저 문제적 인간일 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하게 많은 인간들이 남작의 이름만 연호할 뿐이라서 그림자도 비치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것도 일리가 있겠지? 이 책의 본문 1부 제목이 “트르르르…”인데 “트르르르…”는 음악, 아마도 본문 가운데 등장하는 ‘사탄 탱고’의 음률 중 한 소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게 내 의견인 바, 그건 그렇고, 이 “트르르르…”에서의 사실상 주인공은 이끼를 연구하는 식물학 박사이자 헝가리의 대학 교수였으며,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발코니 딸린 상태 좋은 2층짜리 주택을 헐값에, 집값 가운데 150만 포린트를 제외한 잔금은 유로화로 받는 조건으로 팔고, 코트만 걸친 채로 3월 22일, 이날이 춘분이었음을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모른 척 그냥 넘어갔는데, 그래서 날짜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없을까 독자로 하여금 찔끔 찝찝한 마음을 남겨둔 채로, 시내의 악명높은 가시덤불 땅, 완전히 방치되어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도심 속 무주공산을 사서 그곳에 집을 지어, 이를 본 시민들은 교수의 집을 처음엔 돼지우리라고 부르더니, 그래도 이끼 박사인 교수가 서툰 솜씨로 날이면 날마다 집을 조금이라도 집처럼 만들기 위하여 손을 보태, 굴이라고도 불렀다가, 헛간으로도 불렀다가, 판잣집을 거쳐 오두막으로 부르기 시작할 즈음, 세상의 돼지우리, 굴, 헛간에 창문이 있을 턱이 없어서 역시 창문 없이 살았는데, 암만해도 만약 적이나 강도 등의 무리가 집에 침입한다고 가정하면 미리 창을 통해 그들이 집 주변으로 접근을 하는지 아닌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안전상 유리하다고 판단해, 오두막으로 불리고 난 후에 동서로 창까지 냈던 거다.

  이 일대에 대한 주민들의 여론을 보자면, 잠재적 범죄행위에 걸맞은, 마침맞은, 빼박 현장일 법한 곳으로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아무도 관심이 없는 지역이라, 때가 되면, 날이 더워지면이라는 뜻인 바와 같이, 알바니아에서 출발해 높은 위도를 따라 올라온 집시무리가 텐트를 치고 살기도 했던 장소로, 즉, 지금은 집시는 출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건만, 소설을 시작하는 이 날은 늘 익숙한 조용함, 적요, 적막 대신 적지 않은 군중들과, 야당신문 기자들과 지방 TV 진행자와 사진사, 촬영기사가 모여 있는 가운데, 열아홉 살 먹은, 자신이 교수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애가 저녁 다섯시 삼분에, 오두막에서 스물다섯 내지 서른 발짝 떨어진 곳에서 메가폰을 들고 “내가 당신 딸이야, 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족제비 같으니”라고 악을, 악을 썼으며, “이젠 빚을 갚으시지”라고 쓰인 팻말을 든 채였는데, 교수가 얼핏 보기에 기억이 나지 않거나 잊었거나 한 여자가 낳았을 지도 모르는 혼외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다.

  이 족제비, 이끼 전공 전직 대학 교수는 만일 정말 여자애가 자기 딸이라는 전제로,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는 게 문제였는데, 교수한테 딸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도 모르던 지난 19년 동안 당연히 한 번도 지급하지 않은 수만에 이르는 양육비를 한 번에 달라는 뜻인지, 아니면 자기한테 이런 것하고 영 다른 형태, 형식의 보상 혹은 이제 족제비한테 의지하며 살고 싶다는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거다. 치렁치렁한 금발과 사람을 홀릴 것 같은 푸른 눈, 양귀비 꽃처럼 붉은 립스틱을 바른 통통한 입술로 자칭 아빠를 찾아 가시덤불 땅 속 오두막에, 지역 최강의 매스컴(이 장면을 묘사한 “트르르르…” 이후에 아무 생각 없이 수도 페스트에서 보도된 내용을 Ctrl+C 하여 지역사회 신문 방송에 그대로 옮기는 바람에 난리법석을 치루고 결국 도시민 대부분, 대부분을 넘어 모두에게 끔찍한 두려움을 심은 결과 결국 도시 전체를 폭망하게 만든 막강한 권력을 지닌 매스컴)까지 동원해 쳐들어 온 것이 마땅하지 못해, 결국 이끼 전공 박사이자 전직 교수이며 어쩌면 양귀비 꽃처럼 붉은 립스틱을 칠한 여자애의 아빠인지도 모르는 집 주인은, 그와 유일하게 말,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말까지도 아니더라도 적어도 단어 몇 개는 나누고 사는 농부한테, 이 농부의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에 진주했던 병사들로부터 구입해 땅에 묻어두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헝가리제 소총 AMD-65에 탄창을 걸고 무려 다섯 개의 탄창이 빌 때까지 허공을 향해 천둥이 떨어질 듯 쏘아 갈겨버려, 결국 시위를 끝내게 만든다. 이끼를 전공했다더니 이거 완전히 동물성, 육식성 아냐?

  그런데 다음날 오전 11시 15분, 헝가리 폭주족이자, 네오 나치 비슷하면서도 이 북방의 작은 도시에서 향토방위군을 자칭하는, 큰 덩치에 징을 박은 검은색 가죽바지와 징을 박은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무리들이 오두막에 찾아와, 어제 오후 다섯시 삼분 이후에 전직 교수가 시위군중과 신문기자와 TV 진행자 무리를 향하여, 실제로는 허공을 향했지만 향토방위군을 자임하는 이들이 말하길 그들을 향하여 기총소사를 갈긴 일을 치하하며, 어제 오후의 일로 존경심이 북받쳤고, 개인적으로 교수가 좋아져,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교수가 추구하는 가치가 같다는 것을 확신해 자신들이 ‘교수보호협회’를 결성해 더욱 좋아하리라 기대하겠다는 거였다. 대장의 진짜 이름은 요슈커이고, 그냥 킹콩이라 부르는데, 이 킹콩이 총대장은 아니어서 위로 대가리가 두 개 더 있었으니, 하나는 이들 무리 말고 몇 개를 더 거느리고 있는 총두목이요, 다른 하나는 도시의 치안을 총괄하는 경찰서장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교수는 자세히 쓰기엔 분량이 많은 이유 때문에 이들과 척이 쳐, 결국 이 무리의 2번인 ‘저녁별’을 총으로 쏴 죽이고는 죽어라 도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지만, 그의 품 속에는 어쩔 수 없이 향토방위군이자 교수보호협회에 반납할 수밖에 없었던 AMD-65 대신 받은 간단한 소총과, 그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현금, 그것도 포린트가 아닌 유로화, 빠닥빠닥한 유로화가 뭉치로 있었던 거였다.


  이런 내용이 1부 격인 “트르르르…”의 주요 스토리라서 어찌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에 벵크하임 남작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걸? 하고 혼자 배시시 웃으며 속으로는 기고만장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결국 코 깨졌지만.

  2부 “럼”에 들어가면, 여기서 “럼”은 저 카리브해 근처의 백성들이 즐기던 독한 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사탄 탱고의 한 선율 같은데, 그저 짐작일 뿐 정확한 건 아니다. 하여간 “럼”에 들어가면 이제, 드디어 벵크하임 남작이 등장한다. 벵크하임 벨러 남작은 아마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제3차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이 헝가리를 적화하자 여태 호의호식했지만 이제 숙청당할 일만 남은 남작 일가가 아르헨티나로 멀고 먼 항해를 떠날 때 아동이었던 마지막 남작인데, 이젠 온몸이 비쩍 마른 늙은이 신세로 떨어진 인물이다. 망명을 떠날 당시에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를 지니고 갔는지, 어린 벨러는 자라면서, 대가리 다 커서도 돈 쓰는 데 머뭇거림이나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사는 데 늦바람이 무서운 거라더니, 다 늙어서 도박에 맛이 들어 그 많고 많던 재산을 몽땅 카지노에 가져다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제3 금융권, 다른 말로 해서 조폭이 운영하는 사채업자에게 거액을 빌려 그것도 몽땅 날려버려, 날이면 날마다 폭행, 린치(같은 말인가?), 신체훼손, 살인의 위협을 받다가 그래도 원금회수가 불가능할 것 같아서 그나마 그간 갚아온 이자만 해도 원금의 서너배가 되어 어느 마음 좋은 조폭 두목께서 넓은 마음으로 처단하지 아니하고 감방에 쳐 넣어버렸던 인물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신, 우리 가문에 저 따위 수치스런 오물 하나가 생겼으니 가문의 명예에 스크래치 가는 것을 볼 수 없는, 헝가리의 벵크하임 남작 가문이 아니라 이 집안의 큰아버지 격인 오스트리아의 백작 가문에서 아르헨티나에 수감되어 있는 벨러를 석방시켜 오스트리아로 오게 하고, 대단한 호텔 양복점에 특별 주문해 수트와 코트, 와이셔츠, 내복, 양말 등등을 에르메스 여행가방 여섯 개에 담아, 당연히 유로화로 아껴 쓰면 꽤 오래 쓸 수 있는 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거라고 하며 지갑에 담아 주머니에 넣어주고 헝가리행 열차에 실어 보낸다. 그러니까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에서는 정말로 벵크하임 남작이 헝가리로 귀향을 한다.

  벵크하임 남작이 귀향을 하기는 하는데, 겉으로는 번지르르하지만 속을 알고 보면 거렁뱅이 신세인 줄 모르고, 지역의 야당신문과 TV 방송에서는 수도에서 발행한 타블로이드지 “크로넨차이퉁”과 “쿠리어”에서 아무 생각 없이 판매부수만 올리기 위해 실은 기사를 그대로 옮겨버려 이 도시에는 한바탕 난리법석이 일어나는데, 크로넨자이퉁과 쿠리어가 뭐라 했느냐 하면, 헝가리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재산이 많은 것으로 손에 꼽히는 벵크하임 남작이 노년을 맞아 아르헨티나에서 고향 헝가리의 우리 도시로 옮겨와 살기로 했는 바, 자신이 평생 모으고 키운 전 재산을 도시의 발전에 전액 기부할 것임을 발표하였다는 거다. 시장과 경찰서장은 서로 소속당을 달리하는 앙숙이라서 당연히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오해해 그 기사를 토대로 남작이 자기 쪽에게 한푼이라도 더 많은 자금을 기부하게 만들려고 생 쇼를 할 수밖에.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어디?

  결론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벵크하임 남작은 헝가리 북쪽의 크지 않은 마을에 예수로 귀향한 것이 아니라 푸르죽죽한 말을 타고 불의 심판을 하러 온 거였다. 그리하여 이 도시는 조만간에 누가 롯의 아내가 됐건 간에 불의 재앙을 받아 폭삭 무너질 예정이기는 한데,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같은 건 독후감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그걸 미리 아는 것도 무지 재미없는 일이라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근데 정말 벵크하임 남작이 계시록에 나오는 악마처럼 푸르죽죽한 말을 타고 불칼을 휘두르냐고? 에이, 늙은 나이에 옥살이까지 해서 배싹 마른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냥 비유지, 비유.

  하여간 큰 발심을 낼 수 있으면 강추. 다만 읽으면서 화딱지 나더라도 책임 지지 않음.

  책이 재미있으니 독후감도 길어지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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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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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 처음엔 군국주의자라서 미운 털이 조금 박였다가 시절이 그랬으니까, 하고 조금 봐줬다. 탐미적 문장이 색달라 자살을 감행할 당시의 울퉁불퉁한 근육과 조금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근데 점점 정나미가 떨어졌다. 1925년에 태어나 1970년 마흔다섯 살 나이에 스스로 삶을 접은 군국주의자. 당시에 전쟁하기 좋은 나이였던 10대 후반에 징집 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 쪽팔려 더욱 군국주의에 경도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으니까. 그래도 정나미가 떨어진 건 시대가 어느 시대라고 탐미주의 문학을 그리 오래 했는지. 말이 탐미주의이지 미시마의 주요 작품에는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과부 엄마가 선원과 침대에서 벌이는 짓을 훔쳐보고, 예순이 넘은 늙은이의 무릎에 앉아 열아홉 살 먹은 처녀애가 갖은 아양을 떨고, 잘 생긴 청년에게 그 여자애를 꼬드겨 결혼을 하라고 강제하는 등, 마치 위스망스나 폰 카이절링을 읽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한다. 이들보다 욕망과 환상에 더욱 집중해서 변태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사조는 1920년대에 이미 석양을 맞았음에도. 즉 스타일이 뒤져도 많이 뒤졌다는 건데, 그리하여 미시마의 욕망과 성적 환상은 더 역겹다. 게다가….


  에쓰코. 무사 집안의 딸로 도쿄에서 태어난 번듯한 집안 출신의 과부. 이이가 오사카에 있는 한큐 백화점에서 양말 두 켤레를 산다. 지금 있는 곳은 오사카 근방 도요나카의 마이덴 마을. 시아버지 스기모토 야키치가 1934년에 마이덴 마을에 1만평의 땅을 산다. 그는 도쿄 인근의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간사이 상선 오사카 본사에서 오래 근무해 34년에 전무이사, 38년에 사장을 역임한 후 39년에 은퇴를 하고 곧바로 마이덴 마을로 내려와 과수원 등을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야키치한테는 아들만 셋 있었는데, 첫째가 서른여덟 살 먹은 겐스케요, 둘째가 료스케이며 막내가 유스케이다. 첫째는 천식으로 징집 면제 판정을 받아 아버지 집에 빌붙어 살고 있다. 입 터는 재주만 있는 한량이라 게으르기가 짝이 없다. 그것도 능력이다. 게으르면서 어째저째 잘 먹고 사는 거. 셋째는 시베리아에서 아직 귀국을 하지 않았다고만 해, 전쟁중에 징집당해 아직 안 온 것인지, 회사에서 그쪽으로 출장을 보낸 것인지 끝날 때까지 헷갈리는데, 아마 일하러 간 거 같다.

  둘째 료스케가 에쓰코의 죽은 남편이다. 죽고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장티푸스. 결혼생활 내내 아내에게 SM을 비롯한 갖은 방법의 잠자리 방식을 교육시킨 것도 모자라 혼외 수많은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아내가 보는 앞에서 상대 여자의 사진을 죽 늘어놓기도 하는 등, 이를테면 건장하고 정력 좋은 변태다. 근데 죽었다. 사는 내내 며칠 간의 신혼여행 기간을 빼고 세상의 모든 방법으로 에쓰코로 하여금 질투와 고통만 안기다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도쿄에서 혼자 살기가 팍팍했는지 에쓰코는 오사카 마이덴의 시아버지 야키치 집으로 들어왔다. 남편 죽고 3년 탈상도 하지 않아서, 홀아비 시아버지가 큰아들 내외, 막내 며느리와 아이들이 사는 집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시댁에 들어가게 되면 시아버지의 잠자리 당번도 해야 될 것임을 눈치로 알았으면서도. 시아버지는 이제 늙어 수면모자를 쓰고 잔다. 에쓰코와 한 이부자리에서. 수면모자를 쓰지 않는 날도 있는데, 그날은 손가락으로 며느리를 더듬다가, 가능하면 위로 올라가는 날이다.

  아무리 아들이 죽었다고 해도 좀 이상하지? 일본인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일본인도 이건 이상한 일이다. 이상하다기보다 돼먹지 못한 일에 더 가깝다. 미시마 유키오 쓰는 게 다 그렇다.

  마이덴 집에는 소작인 가족과 과수원을 돌보는 정원사이자 일꾼이 세 명 있었는데, 전쟁 말기에 일꾼 셋 다 징집을 당해, 야키치는 히로시마에서 갓 소학교를 졸업한 소년 사부로를 데려왔다. 이 사부로가 집에 오게 된 내력이 작품 초기에 나온다. 그럼 다 끝났다. 에쓰코는 과부, 소년 사부로는 이제 나이가 차 열여덟 살의 건장한 청년. 아직 에쓰코가 시아버지의 잠자리 당번이란 건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서른 살이 넘어 농익은 여성과 열여덟 살의 청년이 나왔는데, 제목이 <사랑의 갈증>이라면 에쓰코-사부로의 러브라인 혹은 애증의 관계가 이야기 줄거리가 될 것임을 딱 눈치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에쓰코가 오사카 한큐 백화점에서 사온 양말 두 켤레가 사부로한테 주려고 산 거였다.


  열여덟 살 사부로한테 과부 부인 에쓰코는 자신이 언감생심 상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해도 안 되는 인물. 하지만 에쓰코는 자기 혼자 열라 사부로를 짝사랑하면서 마치 사부로 역시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오인하기 위해 애쓴다. 사부로는 평소 자기를 좋아하는 눈치를 주던 하녀 미오와 잤고, 미오는 임신했다. 에쓰코는 남편 료스케와 살 때처럼 질투의 불이 붙는다.

  오직 사랑에만 갈증이 타는 에쓰코는 사부로한테 미오를 사랑하는지 수없이 물어보고 물어본다. 사랑한다면 결혼시키려고? 천만의 말씀.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시키려 한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짝이 될 여자가 예전의 자신처럼 질투와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내라고. 사부로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냥 옆에 미오가 있어서 저절로 몸을 만지게 되고, 몸을 만진 김에 함께 자서,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를 가졌으니, 그저 주인이 결혼을 하라면 하겠다는 것뿐이다. 다만 히로시마에 있는 어머니가 허락한다면.

  문제는 에쓰코가 시아버지 야키치의 주례로 둘을 결혼시키기로 했건만, 사부로와 미오가 (가을이 되어) 감 수확을 하다 둘이 그렇게나 재미있게 장난을 하는 걸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다. 자기 생각에 둘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저리 친하게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사부로는 열여덟 살. 여전히 몸과 마음의 엔트로피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청춘 남녀가 감나무 위에서 장난을 치는 것 가지고 사랑, 사랑, 그리고 또 사랑, 사랑타령을 하는 것으로 오해한 거였다. 조현병 환자, 쉽게 말해 미친년이 틀림없는 것처럼 보이는 에쓰코는 진심으로 미오의 불행을 위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사부로가 다른 아가씨를 사랑하는데 그 상대라니 얼마나 열폭하겠는가는 알겠지만, 자신의 상태가 사랑이란 현상을 지극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건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은 비록 애정이 전혀 없는 시아버지 야키치의 잠자리 애완이면서도 불 같은 질투를 퍼부어, 사부로가 1년에 며칠씩 갖는 정기휴가를 내어 어머니에게 결혼승낙을 받으러 가는 며칠 사이에, 직접, 단칼에, 임신해 몸 속에 아이가 있는 여자애를 내쫓아 버린다.


  스기모토 집안의 누구도 불쌍한 미오한테 관심이 없다. 그저 단호하게 애를 밴 여자애를 쫓아낸 에쓰코의 결단에 놀랄 뿐. 사부로는 어머니한테 결혼 승낙을 얻지 못하고 혼자 돌아와서, 집안의 셋째 며느리를 통해 이야기 전말을 들었음에도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았거든.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거든. 사부로 이 개자식은 미오가 사랑은커녕 어여쁘지 않았으면서도 그냥 한 거다. 당연히 그걸로 끝이다. 애가 생겼건 말건. 임신중단을 하거나 말거나, 낳거나 말거나, 자기 아이를 밴 여자가 쫓겨나던 말던. 사부로 또는 이 청년 비슷한 하인 계급한테 사랑이란 것이 살면서 무슨 필요가 있는 지 잘 모르겠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에도 사부로 같은 안면몰수를 어찌 볼 것인지. 작품을 읽으면서, 에잇, 괜히 나 혼자 미오가 불쌍해, 읽어가며 속이 상하고, 마음이 복잡하고 가슴이 미어져, 아이쿠, 이 드런 이야기를 계속 읽을까, 여기서 그냥 때려 치울까, 마구 망설였다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워낙 생겨 처먹은 것이 군국주의 꼴보수 부르주아라 그렇다 쳐도,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 한 명, 독자 중에서 누구 하나 미오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걸 알고, 세상 참. 뭐 그랬다는 거다. 왜 그랬을까? 이들 눈에 미오는 무식하고, 못생기고, 철저하게 무산자, 프롤레타리아이고, 남의 집 드난살이 하는 신세라 아무 감정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마님과 마당쇠의 사랑 이야기에 귀싸대기만 얻어 터지는 배역을 맡아도, 그냥 우연히 사부로 옆에 있는 여자라 한 번 했던 것뿐이라고, 그렇다고 애를 배고 마는 칠칠치 못한 년이라서, 아무렇게 대해도 괜찮을 하잘것없는 인간, 그 중에서 특히, 재수 없이 애를 밴 여성이라서? 그래서 그렇게 해도 될 거 같아서 말이지? 계급은 철폐되어야 한다. 책임 없이 한 여자를 임신시킨 건장하고 잘 생긴 무산자 계급 피고용인이자 천한 하인 청년과 조금 나은 복지를 위하여 시아버지하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붙어먹고 사는 미모의 부르주아 과부 장년 여성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계급은 철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미혼부인 동시에 강간미수범과 잠재적 살인범의 탐미적 사랑을 위하여 계급이 철폐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 이 개 같은 커플에 의하여, 성적 농락을 당해 아이를 뱄고, 그나마 생활의 방편인 식모라는 직장에서 추호의 잘못도 없이 쫓겨난, 세상이 뒤집혀도 의지가지 한 군데가 없는 하녀이자 식모이고, 못생기고, 무식하고, 가난한 어린 약자이면서 애까지 밴 미혼모, 여성, 미오를 위해 계급은 철폐되어야 한다. 늙은 남성이자 법적 시아버지와 30대 성인 여자가 대놓고, 자발적으로 그러나 사랑 없이 붙어먹는 건 언짢지만, 십대 미성년자 남성을 향한 장년 여성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러나 당연히,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안타깝다고? 뭐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겠지. 그렇겠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적인 문장이 너무 많은 것을 가리고 있다.

  유미적이며 세기말적인 자극적 소재도,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가 읽는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미 스타일이, 물이 갔음에도, 가도 많이 갔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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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5-03-10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고하셨던 대로 아주 가차없는 독후감이네요 ㅋㅋㅋ 팔스타프님 서평은 요즘 같은 세상에 너무 너무 재밌고 값집니다.ㅋㅋㅋㅋ
요즘 영화나 소설 평을 읽어보면 그럴듯한 말이지만 어디서 본듯한, 그리고 다수의 의견에서 아주 조금의 자기 의견을 곁들인 평들이 많아서 저는 한 줄을 쓰더라도 자기 생각을 쓴 글을 보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ㅋㅋㅋㅋ
필력하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분은 몇 없을 것입니다. ㅋㅋㅋㅋ
미시마 유키오 쓰는 게 다 그렇다. ----> 이 문장에서 팔스타프님이 얼마나 이 인간을 싫어하는지 느껴져서 사무실에서 혼자 푸하하하 하고 웃었습니다.
뭐 저는 아직 미시마 유키오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범인인지라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언제나 이런 독자적인 서평을 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첫째는 날씨 조금 풀렸다고 하원 길에 놀이터에서 평소보다 더 놀았더니 주말 내내 노란 콧물을 찔찔 흘렸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Falstaff 2025-03-10 15:59   좋아요 2 | URL
아직까지 제 귀싸대기 날린 분은 자냥 님 한 분이니(그건 그 냥반 취미이기도 하고요) 아주 선방했습니다. 조리돌림할 줄 알았거든요. ㅋㅋㅋㅋㅋ
그저 쇤네야 잘 읽어주셨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문학을 즐기는 독자라면 미시마의 책, 그의 문장은 읽어볼 필요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휴, 아이들이 아프면서 큰다는데 그게 헛소립니다. 안 아프고 크면 더 좋잖아요! 괴로우니까 청춘이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입니다. 안 괴로운 게 훨씬, 훨씬 더 좋을 거 같거든요.ㅋㅋㅋㅋ 오늘 낮술이 과했습니다.
번번히 진짜 별 거 없는 독후감에 좋은 얘기만 해주어 고맙습니다. ^^

2025-03-10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1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5-03-1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급 철폐! 미오 해방! 폴스타프! ㅋㅋㅋㅋㅋㅋ
그러고 보니 저도 이 작품 읽을 때 미오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급반성 모드.

Falstaff 2025-03-10 16:06   좋아요 1 | URL
ㅋㅋㅋ 반성하세욧!

꼬마요정 2025-03-10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는 쓰는 게 다 그렇다. ㅋㅋㅋㅋ
비극으로 끝날 일은 냅두고 미오를 위해 계급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말씀 적극 공감합니다!!

Falstaff 2025-03-10 16:07   좋아요 1 | URL
아휴, 고맙습니다. ㅎㅎ
 
오향거리
찬 쉐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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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찬쉐 다섯 권을 다 읽었다. 한 권은 읽지 않은 상태로 두는 것이 좋다는 주의라서 여태 서고를 지날 때마다 못 본 척 슬쩍 지나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어 들었다. 중국의 선봉파 기수답게 찬쉐는 쉽지 않다. 그 가운데 <오향거리>가 제일 읽기 힘들지 않았나 싶다. 나는 다행히 다른 작품을 모두 읽어 <오향거리>에서 묘사하고 있는 오향가五香街가 어떤 커뮤니티를 말하는지 그나마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있었다”가 아니라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쓴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오향거리가 애초 찬쉐가 묘사한 찬쉐의 오향거리는 아닐지언정 내가 ‘독자인 나’를 이해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10리, 4킬로미터로 뻗은 직선 스트리트인 오향거리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의 집합인지 기회가 생겨 찬쉐에게 직접 묻는다 해도, 아마 찬쉐는 “거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특유의 눈웃음을 지을 뿐 절대로 자신의 오향거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 같다. 이것도 그냥 짐작이다. 짐작이라는 전제로 조금 덧붙이자면, 이 오향거리는 바야흐로 21세기에 접어든 새 중화인민공화국일 수도 있고, 유사이래 처음으로 내놓고 혼외 연애를 즐기기 시작한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집단일 수도 있으며,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할 것 같으면, 찬쉐가 속한 중국 현대 문학 종사자, 조금 범위를 넓히면 중국 현대 예술 종사자들의 커뮤니티일 수도 있다.

  찬쉐의 작품 중에서 1990년 작인 <오향거리>, 2005년의 <마지막 연인> 그리고 2013년 <신세기 러브 스토리>를 “욕망의 철학 3부작”이라 한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욕망”의 범주에만 가두어 두기에는 2022년 작 <격정세계>의 충격이 컸다. 직업이 소설가이니 당연하겠지만 <격정세계>에서 찬쉐는 중국의 아방가르드 현대문학, 현대소설에 대한 관심을 작가 특유의 격정적인 사랑과 재미있게 버무려냈다. 나도 <격정세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오향거리>를 읽으며, 이건 중국의 현대문학판에서 전위적 작품을 쓰기 시작한 사람과 당시 전위문학을 접하게 된 동료 문학인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고 마음먹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이 ‘전위문학 v.s. 문학판 사람들’의 반응 현상을 찬쉐니까, ‘격정적인 사랑’의 형태로 바꾸어 과감하게 유부녀, 유부남의 사랑에 관한 거리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을까, 찬쉐가 책을 써놓고 모른 척하듯이 나도 여차하면 “아니면 말고” 할 거라는 전제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책을 열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국어판 서문”의 한 구절이었다. 읽어보자.

  “제 첫번째 장편소설이지만 열정이 밑받침되었기에 개방적 시선과 세련된 기교, 거침없는 생각을 드러내고 풍부한 유머와 해학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웃기지?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이 작가 시점이기 때문이다. 찬쉐는 한국어 서문마저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 예술가, 그러나 오향거리 사람들한테는 그저 ‘속기사’로 불리기만 하는 자칭 천재인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말한 것이다. 짧은 한국어 서문을 찬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저는 제가 미래형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서 미래의 이상적 삶, 유토피아의 경지를 주장했고요. 저는 우리 인류가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아직은 실현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하소연하며 항상 다른 쪽에서 갈망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니까. 소설가한테 미래의 이상적 삶이라는 건 결국 문학적 삶을 뜻하는 것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경지는 미래형 작가, 미래파가 지향하는 문학/예술의 형태인데,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 말하기는 좀 껄적지근하니 “다른 쪽에서 갈망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가이자 문학인이자 사람들한테 ‘하찮은’ 속기사라 불리는 ‘나’와 같지만 어딜, 작가는 작중 소설가라기보다 작은 견과류 가게에서 누에콩, 땅콩, 해바리기 씨를 튀기거나 볶아서 파는 X여사와 더 가깝다. 그렇다고 찬쉐가 X여사처럼 다른 집 유부남하고 바람을 피웠다는 말은 아니고. 어때? 불륜이라니까 혹하지? 좀 자세하게 알아보자.


  X여사와 남편, 이들 사이의 여섯 살 먹은 아들 샤오바오는 외지인이다. 가족이 오향거리로 흘러 들어오기 전엔 폐품을 주워 팔아 호구지책을 삼았다고 말하지만 X의 남편의 친구가 가족들 몰래 방에 들어가 서류를 들여다보니 전직 ‘기관 간부’였다고 해서 주민들의 불안이 고조된 일이 있었다. 선량한 주민한테 전에 국가를 위해 일하고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은 관리였다는데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이 가족에게는 틀림없이 일부러 전에 기관 간부였다는 것을 숨겨야 하는 놀랄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라고 반은 경외, 반은 경계하는 중국 대중의 마음. 이해 가시지?

  근데 웃긴 건, 어느 날부터 X여사는 사물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보긴 봤다. 거울을 통해서. 거울? 이런 동요가 있었지? “왼손을 앞에 놓고, 오른손을 앞에 놓고 (가사를 잊었다) …” 거울을 통해 보면 내가 아무리 왼손을 들어도 거울 속 나는 절대로 왼손을 올리지 않는다. 뭔가 왜곡된 상image이다. 이 왜곡한 사물과 사람들을 비치는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다가 결국 눈에 동자가 없어진 X여사. X여사의 남편은 한술 더 떠, 아내에게 현미경을 사 준다. 이제 X여사는 현미경을 통해 뭔가를 보는 것에 취미를 단단히 붙였다. 견과류 가게에서 X여사는 결코 사람들의 눈과 맞추지 않는다. 손님의 머리통 위나 발 아래를 향하게 하고 누에콩 볶을 것을 팔거나 그것도 좀 그러면 아예 창문을 통해 팔만 내밀고 땅콩을 주고 현금을 받는다.

  이 장면이 작품의 앞쪽에 나오는데, 처음 읽을 때는 도대체 이것이 어떤 현상의 메타포인지 헷갈리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다가 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을 중국 현대문학판에서 전위적 작가를 연상한 것이라면, 전위 작가 또는 작품이 사물과 사람을 보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겠지? 작가의 방식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향과 굴절율과 망막현상과 같다면 어떻게 전위 문학이나 예술을 만들 수 있겠나. X여사는 애초부터 보는 방식이 오향거리 모든 사람과 달랐다는 거다. 여기에 주민들은 중요한 사건을 덧붙인다.

  X여사의 불륜. 상대는 오래도록 건전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던 Q선생. 오향거리 사람 답게 정력 왕성하고 친절하고 상냥해서 만점 남편으로 손색이 없었다가, X여사의 뇌쇄적 외모에 홀랑 빠져 으슥한 창고 건물에서 “문화 여가 활동”을 했다고 딱 찍힌 인물이다. 혹시 모른다. 어쩌면 제일 먼저 거리에 있는 약방 할아범 집의 2층에서 몸의 2층을 쌓았는 지도. 이들의 행태를 놓고 오향거리의 인텔리 A박사, B여사, C교수 등은 토론회를 열어 둘의 “문화 여가 생활”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었을 지에 대한 격렬한 주장을 만장하신 오향거리 주민들을 초빙한 강당에서 펴기도 한다. 거리의 모든 사람은 X여사와 Q선생의 불륜에 쏟아졌지만, X여사는 여전히 견과류 가게에서 해바라기 씨를 파는 반면에 Q선생은 직장에서도 억지로 떨려나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진 것을 보고, 훗날 Q선생 대신 P씨, O씨, N씨 등을 만들어 낸다. 사실 X여사와 Q선생 사이에 정말로 “문화 여가 활동”이 있었는지 아무도 확인한 바 없고, 새카만 밤에 두 유부남녀가 단둘이 음침한 곳에 사소한 터치라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일이 없다.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일 뿐.


  이들 외 다른 출연진으로 45세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과부도 있고, X여사 남편의 친구, 스물아홉 살 먹었다고 주장하는 X여사의 여동생, 오래 침대생활을 한 28세의 절름발이 여성, 얼굴이 천산만수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거리의 주민답게 정력 하나는 왕성한 의지가지 없는 독거 노파, X여사를 추앙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쩌다가 독거노파의 침대 파트너가 되어버리는 석탄회사 노동자 총각 등등. 이들 전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오향거리의 시류가 X여사와 Q선생의 혼외 정사를 근거 없이 확정하고, 물론 과거에도 어찌 이런 일이 없었겠느냐마는 X여사와 Q선생처럼, 특히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X여사처럼 불륜을 내놓고 저지르고 사실을 부인하려 하지도 않는 경우가 처음이라, X여사를 독소가 온몸에 침투해 만들 몰인정하고 적의에 가득한 괴물, 즉 일종의 타도 대상으로 여겼다. 그럴 수 있지. 특히 오향거리가 그동안 비교적 폐쇄된 지역이었다면 더욱.

  이런 곳에서 X여사처럼 특별하게 이상한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고, 그간 금기였던 혼외정사의 시인, 사실 X여사가 정말 시인할 것이 있었는 지는 다음으로 하고,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가지고도, 굴러온 돌 X여사와 이젠 투명인간처럼 되어버린 Q선생 때문에 곧 오향거리가 폭망할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결국 X여사의 남편과 아들 샤오바오는 작품 끝부분에 가면 어디론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가정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도 거의 폐품 취급을 받아 곧 쫓겨날 거 같은 Q선생이 다시 그나마 정상을 회복해 직장에 복귀하자(Q선생의 사모님은 벌써 친정으로 내뺀 뒤다), 거리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로망일지도 모르는 X여사의 불륜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하여 정말 그러한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로 치고 새로이 P선생, O선생 등을 만들어냈던 거다.

  그러나? 세상은 전위가 발전시킨다. 어느새 X여사에게 미래파라는 조류潮流의 계관이 씌워지고, 그저 얼굴마담 역할에 그치기는 하지만 X여사는 오향거리의 대표로 추대받아 경쾌한 걸음으로 오향거리 대로에서 내일을 향해 발을 딛는데, 그래도 뭔가 조금 더 남았겠지? 그렇겠지?


  쉽지 않은 책이다. 중반에 속기사, 천재 작가로 등장하는 ‘나’의 X여사에 대한 짧은 기록을 끝으로 독후감을 접는다.


  “X여사, 있는 듯 없는 듯한 이 인물은 우리의 역사에 수없이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녀가 실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행위는 절대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 인물의 존재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우듬지는 거대하나 뿌리는 얕아 살짝 흔들기만 해도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 거목처럼 말이다. 확실한 점은 그런 환상이나 영원한 안개, 구름만이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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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3-07 0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미시마 유키오, <사랑의 갈증>
화요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목요일. 이강백, <황색여관>
금요일. 엘리자베스 보웬, <한낮의 열기>

케이 2025-03-07 11:28   좋아요 1 | URL
미시마 유키오 책 평이 너무 궁금합니다. <사랑의 갈증> 한번 읽어 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두긴 했거든요. ㅋㅋㅋ 감상문 올려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려요!

Falstaff 2025-03-07 16:00   좋아요 1 | URL
저도 미시마 책 독후감이 걱정입니다. 벌써 써 놓았는데 그것 참... ㅎㅎㅎ
뭐 정 안 되면 귀싸대기 한 대 맞는 것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5-03-10 14:23   좋아요 0 | URL
찰싹!

그레이스 2025-03-07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격정세계 읽고 오향거리는 못읽고 같은 분위기면 못읽겠다 싶었는데,,, 좋긴한데,,, 뭔가,,,
이건 좀 다른가요?
사놓은 책이라.

Falstaff 2025-03-07 16:01   좋아요 1 | URL
에휴, 마찬가지지요 뭐. 저 같은 경우엔 <격정세계>가 훨씬 알아듣기 쉬웠습니다만. ㅎㅎ

meesum 2025-03-07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권을 나온 순서대로 읽겠다고 오향거리를 호기롭게 들었다가… 백여 페이지 읽고 덮었다가 다시 읽는데 등장인물들이 헷갈려서 처음부터 다시 읽다가 또 덮었다가… 그러는 중입니다요 ㅠㅠ

Falstaff 2025-03-08 06:07   좋아요 1 | URL
책 읽으면서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관계 정도만 메모해보셔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것보다 좀 더 많이 하고는 있지만요. ^^
 
솔뮤직 러버스 온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8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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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절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어 될성부른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골라 소개했던 적이 있다. 면면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시리즈 1번으로 200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배치한 것은 1번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미 상당한 성취를 이룬 작가를 선택했다고 쳐도, 조나단 샤프란 포어, (포어의 엑스와이프인) 니콜 크라우스, 러셀 뱅크스, 지넷 윈터슨, 잉고 슐체, 제이디 스미스, (대중소설의 백미)톰 울프, (킹즐리의 아들)마틴 에이미스, 존 맥그리거, 다니엘 켈만,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코맥 맥카시, 유디트 헤르만, 제프리 유제니디스, (역시 좋아하지 않는)가즈오 이시구로, 모옌, 모신 하미드, 나딤 아슬람 같은 작가들을 이 시리즈를 통해 만났다. 파묵과 모옌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읽은 작가의 (좋아하지 않는 두 명만 빼고)썩 괜찮은 작품이라 이제는 이들의 신작이 나왔다 하면 무조건 찾아 읽을 정도이었다. 그러니 내가 왕년의 시리즈, “모던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물론 이 가운데 괜히 읽었다, 시간이 아깝다, (전에는 거의 책을 사서 읽어서)돈이 아깝다와 비슷한 평만 얻어들을 수 있는 별볼일 없는 작품들도 간혹 끼어 있었지만. 시리즈 중에서 안 읽은 책은 눈에 띄면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이다.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집 《솔뮤직 러버스 온리》 역시 책방에서 “모던 클래식”을 검색하다가 읽지 않은 것 가운데 동네 도서관에도 있어 눈이 번쩍 띄어 단박에 대출한 책이다. 그리고… 똥 밟았다.


  1959년생 야마다 에이미는, 작가다. 더 알 필요 없고, 알 생각도 없다. 이이의 작품은 이제 읽지 않을 거라 작정했으니까. 나는 이 책을 다른 것들도 흔히 그러했듯이 그저 “모던 클래식” 가운데 한 권이라 읽은 것이다. 만일 돈 주고 사서 읽었다면 본전 생각이 나겠지만 그래도 민음사 “모던 클래식” 팀이 그동안 내 독서생활에 끼친 좋은 영향을 염두에 둔다면 타박할 생각은 없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좋은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대박일 때도 있고 폭망일 때도 있다. 다 사는 일이다. 근데 저럴 때, 나쁠 때, 폭망일 때는 굳이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연히 나하고 궁합이 맞지 않아 나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서. 하지만 이 책에 관해 과감하게 “똥 밟았다”라고 말하는 건, 야마다의 책 거의 전부 품절이나 절판 딱지가 붙어 있으며, 이 책도 복간을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수준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다.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산전수전 다 겪은 이이는 메이지 대학 4학년 때 학교를 때려치우고 뜻한 바가 있어서 도쿄의 클럽에서 서빙, 모텔 잡부 같은 일을 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학교 다니면서는 소설을 쓰지 못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공에 따라, 교수진에 따라 소설 쓸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빡빡한 경우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

  여기까지는 좋은데, 작가 자신이 클럽 서빙, 모텔 같이 주로, ‘주로’다, ‘모두’가 아니라, 주로 허리 위아래로 분방한, 이 가운데 특히 허리 아래로 분방한 사람들이 야마다의 관심 대상이었는지, 작품 목록도 <베드 타임 아이즈 Bedtime Eyes> <솔뮤직 러버스 온리 Soulmusic Lovers Only> 같이 극도로 자유분방한 청춘의 베드 타임, 침대 속 생활을 탐구한(것 같)다. 이를 일본의 비평가들은 “문학적인 것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 던지고 일상어를 자유롭게 작품 속에 끌어들인 일본 신세대 문학”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정작 작품 속 주인공들이 벗어던진 건 문학적 선입견이 아니라 브래지어와 팬티 등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눈만 맞으면 당장 서로가 서로의 팬티를 벗겨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 한 눈에 딱 봐도 당시 및/또는 현재의 선진국 도시에서의 청춘. 장소와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나이도 상관없다. 그저 눈만 맞으면 상대가 아빠의 새로운 연인이며 그래서 ‘나’의 의붓엄마가 될 예정자이거나 의붓엄마일지라도 그냥 단번에 한다. 남편과 함께 들른 클럽에서도 아직도 멋진 몸매를 가진 옛 연인을 만나도 며칠 후에 한다. 단편소설 여덟 편이 실린 작품집이지만 내용은 다 이렇다. 일본 비평가는 야마다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에 필적하는 유일한 여성 작가”라고 했으며, 이이의 작풍을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랑, 이국적 감성, 성애의 발현”으로 요약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자유로운 사랑, 이국적 감성, 그리고 무엇보다 “성애의 발현”으로 읽히려면 좀 그럴듯한 베드 씬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러면 더욱 좋았겠는데, 이미 우리나라 중학생들도 읽지 않을 정도의 시시한 베드 씬만 득실거려, 한 편에 적어도 한 씬 이상 나오니까, 모두 여덟 편이니 적어도 여덟 번 이상 나오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시시하다. 시시해도 너무 시시하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듯하다. 야마다 에이미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 시절 휙 유행을 타서 쓴 작품마다 알뜰하게 이런 저런 상을 골라 타고, 영화와 TV 극이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며, 그래서 떼돈을 벌어 한 시절을 즐겼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굳이 다시 찾아서 보거나 읽을 이유는 발견하지 못하겠다. 인기는 있었던 작가인 모양이다. 도서관 서가에도 이이의 책이 빼곡하게 놓인 걸 보더라도. 그것도 손때가 잔뜩 묻은 채로.

  근데 작가는 후기에 이런 문구를 쓴다.

  “나는 흑인을 좋아한다. 친숙하기 때문이다. 자기 멋대로이면서 상냥하고 감정을 그냥 드러내는 강렬한 자의식을 지녔고, 사랑에 탐욕적인 그들이 정말 좋다. 나는 몇 년 동안 그들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남자가 무작정 좋다. 남자를 좋아하는 그 여자는 제 멋대로 헤프게 살면서 때로 지나간 사랑의 추억을 사탕처럼 집요하게 핥으며 소설을 써서 돈을 벌고 있다.”

  음. 그러니까 책 속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일본인, 남자는 흑인으로 생각해도 되겠군. 먼저 후기를 읽어 이런 생각이 머리에 박히면, 아이쿠, 작품 속 별볼일 없는 베드 씬을 읽으면서도 거대한 뿌리를 덜렁거리는 흑인 남자를 연상해서 실제 묘사보다 더 야한 기분도 들 수 있겠다. 읽을지 말지, 선택은 당신들이 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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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3-06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고, 리뷰 내용을 보니 옛날에 읽었던 <120% Cool> 이라는 소설집이 생각나서 찾아보니 같은 작가네요. 저도 읽으며 이게 왜 인기가 좋은가 왜 그렇게 cool에 집착하는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 해방이 중요했던 시기가 있었고 이제 그 시기가 지났고 그 시기가 있어서 그 다음 시기로 가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역시 저도 이제 다시 읽고 싶지는 않네요 ^^

Falstaff 2025-03-06 15:59   좋아요 0 | URL
옙. 이미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

페크pek0501 2025-03-06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지 않는 쪽을 택하겠습니다.ㅋ 독서광이신 분의 안목을 믿으니까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Falstaff 2025-03-06 16:00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읽으실 필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페크 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ㅎㅎ

다락방 2025-03-0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싫어라. 저 오래전에 야마다 에이미 읽엇는데 한 권인가 읽고 끝낸 거 보면 별로였나 봅니다. 이건 책도 별로일 것 같지만 작가가 한 말도 영 별롭니다. -.-

Falstaff 2025-03-06 16:01   좋아요 0 | URL
더 읽고 싶게 만들지 않더군요. 특히 소설은 작가와 많이 비슷한 장르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