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시선 347
김중일 지음 / 창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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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 공대를 졸업하고 단국대 문예창작과에서 박사를 받은 것으로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다. 2008년에 쓴 어느 블로그 글에서 단국대 공학부를 졸업했고,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200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가문비냉장고>가 당선해 등단했다고 써 있으나 나는 블로그 글을 별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1977년생 김중일이 1996년에 단국대 공학부를 졸업했다니 이때 나이 만 19세. 이게 사실이면 적어도 이 양반, 영재 아냐? 하여간 블로그에 이렇게 나와 있다니까 글쎄. 근데 문예창작과 박사학위는 얻은 거 같다. 지금 광주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있는 걸 봐서. 우리나라가 학위 없으면 강사도 하기 힘든 학벌 국가잖아. 아무튼 잘 했다. 시만 써서 어디 목구멍에 풀칠이나 제대로 하느냐는 말이지. 교수 명함 가진 시인이 시인 모임에 나가면 술 마시던 보통의 시인들이 전부 일어난다잖아. 술값 낼 교수님 오셨다고. 그 “교수 시인”이 쓴 시에서 읽었다.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하긴 요즘에 갤러리아 백화점 옥상에서 돌 던지면 시인 아니면 화가가 맞는 세상이긴 하다.


김중일


  나는 김중일의 시가 어떻고 저떻다, 라는 말을 할 재주도, 능력도, 시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냥 읽은 소감, 느낌을 얘기할 뿐이다. 이 시집은 그저께 읽었다. 그런데 시인 김중일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읽은 소감, 느낌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히 읽었고, 읽는 중에 자주 지루했으며, 시가 대체로 길었다, 정도. 물론 짧은 시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거.



  기념일



  우리가 함께 매일매일 무수히 구부렸던

  숫자들을 모두 도로 감쪽같이 펴놓아야지


  물고기처럼 평생 물거품과 키스해야지   (p.97 전문)



  짧아서 좋지? 어차피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쓴 시인 줄 모를 텐데 길게 쓰면 길게 쓸수록 독자는 미로에 더 깊숙이 빠질 것 같으니. 1연에서 ‘숫자’가 어떤 날짜를 가리킨다는 건 알겠다. 뜸하지만 간혹 시집 읽은 눈치로. 그러나 ‘기념일’이 구부렸던 걸 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빨랫줄처럼 이어지는 날짜들 가운데 하루를 접어서 구부려 그 날을 기념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 그걸 다시 편다면, 혹시 기념일이 귀찮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2연에서 평생 물거품과 키스하는 물고기라는 말은 도통 이해불가. 당연히 현대시가 독자에게 무슨 이해를 바라는 바도 아니고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시집 속에 부제를 “흥얼거림으로의 떠듦”이라 붙인 <아스트롤라베>라는 시가 있다. ‘아스트롤라베’는 고대, 중세 시대 때 사용하던 천문관측기구를 말한다. 이 시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어제보다 한 마디쯤 더 작곡된 오늘 밤의 음계

  그 속에 귀속된 마당의 파란 대문은 도돌이표처럼 부유하는 밤의 음표인 우리를 되풀이해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집 속에서, 조금씩 쇠락해가는 개집 속에서 하룻밤 묵은 사막여우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하늘은 해변으로 떠밀려온 부패한 해산물처럼 꾸물거렸다. 새들이 철퍼덕철퍼덕 날갯짓하며, 하늘로 하늘로 노 저으며 까마득히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환절기의 새들은 야간비행에 있어서만큼은 대열 속에서 합심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서 날고 있는 자신을 낳은 이가 가장 위협적인 암초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주 드물게는 집고양이가 그 새들을 잡기도 했다.   (부분. p.13)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오늘 밤이 어제보다 한 마디쯤 더 작곡한 음계라니 시의 서정이나 감정이 아닌 음악, 음률로? 그럴 각오를 하고 읽으면 또 음률적으로 그럴듯하다. 물론 그럴 경우엔 “있어서만큼은”이라는 여섯 글자 단어가 위험하지만. 같은 여섯 글자 단어라고 해도 “철퍼덕철퍼덕”은 세 글자 단어인 “철퍼덕”을 연이어 사용해 충분히 음률적이다. 그거 하나 빼면 음악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은 왜지? 틀림없이 무슨 메시지를 담은 시 같다. 그게 뭔지 몰라서 문제지만. 이 시에서 야간비행하는 환절기의 새들이 나오는 것처럼 시인은 새, 사막여우, 낙타 같은 척추동물을 자주 등장시킨다. <새들의 직업>이라는 시도 있다. 거기에서:



  동생(同生)이 죽었다.

  동생은 죽어 지금 내 발목에 그림자 대신 매달려 있다. 동생은 나름 허공에 질질 끌며 땅속을 걷는다. 땅 속을 걷다보면 태어날 자들과 죽은 자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내년에 피고 질 꽃들을 미리 꺾을 수 있을까.

  동생이 죽었다.

  움직이는 하늘의 파오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듯, 동생의 곡두가 슬픔과 권태의 바깥에서 긴 칼날을 막사 안으로 푹푹 찔러넣듯, 까마득한 하늘 저 멀리 뾰족한 철새떼가 무수히 박혔다 사라졌다.

  동생이 죽었다.

  동생은 구름이란 보풀만 가득 핀 허공을 걸치고 있다가, 한 떼의 새들에 의해 허공과 함께 기워져버렸다. 어제로 벗겨져버렸다.  (부분. P.25~26)



  시 속에 나오는 ‘파오’는 이동형 주거 천막인 게르. 곡두는 허깨비, 허상, 헛것을 뜻한다.

  동생은 아우를 말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아우를 칭하는 ‘동생’을 한자어로 쓰면 同生이 맞다. 이 시에서 ‘동생’은 나하고 같이(同) 태어난(生) 것. 그래서 흔하게 이야기하는 ‘내 속의 또다른 나’일 수도 있고, 시 속에서 말한대로 그림자처럼 나한테 매달린 ‘무엇’일 수도 있다. 특히 ‘그림자’의 서양적/유럽적 해석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자보다 훨씬 중요한 매개변수로 작동한다. 그게 죽어, 없어져… 그게 뭐, 어떻게 됐는데? 모르겠다. 내년에 피고 질 꽃을 미리 꺾을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가 난데없이 어제로 벗겨져 버렸으니, 동생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거꾸로 흐른다기 보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 더 적당하다. 당연히 이 의견은 평론가 조강석의 해설을 읽으면서 배운 거다.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힘이 센 역사(力士)를 말한다. 얼마나 늙었느냐 하면 “늙은 아들이 방금 집안에 남은 마지막 명부(冥府)행 티켓을 훔쳐 달아났다”니까 한 마디로 겁나게 늙었다. 그러니까 말은 역사(力士)라고 하더라도 늙은 내력을 봐서 역사history로 봐도 무방하다. 아우가 아닌 동색(同生)을 보듯. 이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모든 의혹에도 아랑곳없이 피곤한 역사는 오늘도 검은 그림자를 벨벳망또처럼 질질 끌며 방으로 돌아옵니다. 백열여덟해 동안 이 전설적인 역사가 아직 한번도 내던지지 못한 게 있다면, 유일하게 역사의 무거운 그림자뿐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

  역사는 제 그림자의 긴 지퍼를 열고, 침낭같이 목관같이 어둡고 아늑한 그 속으로 들어가 몸을 눕힌다. 이봐 친구,


  나는 할 말이 없으니 부탁인데 이제 그만 그 달 좀 치워줘

  내 그림자와 함께 안전하게 사라질 수 있도록    (부분 p.76~77)



  이 시에서 등장하는 그림자. 118년 동안 힘센 역사가 단 한 번도 던져버리지 못한 유일한 것. 자기 자신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결국 늙은 力士 또는 歷史는 그렇게 시체 처리용 검은 비닐 속으로 들어가 지퍼를 올린다. 지금 여러분은 이렇게 또 한 히스토리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계십니다.

  김중일의 그림자는 <외과의사 늘의 긴 그림자>로 가면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자 이야기만 나온다. 의사의 이름이 “늘.” 물론 중의적이다. 언제나와 같은 의미로 늘을 생각해도 괜찮을 듯.



  늘 그도 사실 자신의 대책 없는 환자들처럼, 평생 태양의 발등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태양과 같은 속도로만 매일 아등바등 걷는다면 감쪽같이 제 그림자를 숨길 수 있다고 믿었지. 구름의 문양으로, 각양각색 병들어가는 걸 숨길 수 있다고 믿었지.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예방법. 늘의 동공과 하늘의 달은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빛을 발한다. 마지막 단추가 풀리듯 달이 구름 속으로 스며든다.   (부분. P.122)



  그만 쓰자. 독후감이 너무 길다. 한 마디만 보태자면, 김중일의 시는 불면이고, 밤이며, 죽음이라는 것. 그만 쓰고 시도 이제 그만 읽을까? 대체로 우리 현대시,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는 전제로, 너무 어둡고 무겁고 우울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내 수준으로는 너무 어렵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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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8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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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신이치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마키노 신이치 지음, 김명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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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책이 도서관에서 눈에 들어왔다 하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선택을 한다.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찍은 날이 2015년 내 생일날. 그때 가격으로 2만2천원을 정가로 매겼다. 이후 펜데믹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눈먼 돈이 국토를 뒤덮어 한 순간에 인플레이션이 휩쓸고 간 지금도 2만원이 넘는 책이 나오면 일단 경계를 하고 들춰보기 시작하거늘 단편 여섯 작품을 싣고 본문이 달랑 240쪽에 불과한 2015년 책값이 2만2천원에, 다른 출판사하고는 달리 할인도 5%밖에 해주지 않아 현금 2만9백원을 줘야 읽어볼 수 있던 책. 저번에 이렇게 얘기했더니 행인 한 명이 지나가다가 “책을 가격으로만 생각하느냐.”고 한 말씀 주셨다. 책도 상품인 한에 가격은 언제나 중요하다. 나는 땅을 밟고 사는 생활인이지 구름 위에서 넥타르를 마시고 사는 고결한 인격이 아니다. 그리하여 《마키노 신이치 단편집》도 오랜만에 일본 소설 서가를 뒤지다가 눈에 띄어 얼른 고르고 봤다. 지만지에서 찍은 작품들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니까 품질에 관한 기대는 별로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 1896년에 가나가와 현, 오다와라 시의 오다와라 가문의 오랜 저택/고택에서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키노 신이치는 일본 사소설을 많이 쓴 작가로 책 《마키노 신이치 단편집》에서도 자기 부모를 비롯해 신상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데, 그것으로 유추해보면 아버지 대에 거의 모든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두 내외가 하고 싶은 건 모두, 자유분방하게 다 해본, 전적으로 작품을 그대로 믿어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밝히는 전제로 말하자면, 막장 부부였던 모양이다.

  작품의 주석을 보면, 마키노의 아버지 마키노 히사오는 잠깐 소학교 교사 일을 하다가 아들이 태어난 지 일곱 달이 되었을 때 난데없이 미국행 배에 올라 9년 동안 놀고 돌아온다. 히사오는 명목상 보스턴 유학생이라 이때 클래스메이트도 당연히 있었다. 후에 클래스 메이트는 결혼을 해 F라는 딸을 낳았고, 이 F는 하사오의 아들 신이치와 계속 편지 왕래를 비롯한 우정을 이어간다. 피가 끓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 마키노 히사오가 미국 땅에서 9년 동안 수절을 했다는 건 믿지 못한다고 쳐도, 그가 N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이에 혼혈의 혼외자식을 두었다고 마키노는 여러 작품에서 떠들어 대지만, 일본의 전문가, 평론가들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구라라고 결정을 봤단다. 소설이 원래 적절할 구라를 치는 장르니까 독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 주자. 보스턴에 9년 동안 있던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일본의 규중에 박혀 있게 된 엄마는 밤마다 바느질만 하다가 바늘로 애꿎은 허벅지만 찌르며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긴긴 밤을 세웠을까? 물론 190X년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소학교 선생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허벅지를 건사하는 방향으로 선택했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다.

  세이신淸親이란 남자가 있었다. ‘고향 저택에 상주하는 머슴 같은 존재’라고 각주에 달렸지만 머슴보다는 윗길리고 집사한테는 처지는 정도의 지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를 어머니는 애인으로 선택하는데, 이게 정말인지 구라인지는 여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세이신이 맞건 아니건 간에 어머니는 틀림없이 한 명 이상의 애인, 한 명일 수도 있다는 얘기니까 놀랄 필요는 없고, 누군가가 있었다는 건 맞는 거 같다.

  마키노 할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아이 하나 만들어놓고 미국에 가서 몇 년이 흐르도록 소식 몇 자 없지, 며느리는 소학교 교사한다고 만날 밖으로 돌아치며 틀림없이 연애를 하고 있는 푼수지, 불쌍한 손자는 에휴, 할 수 없이 내가 맡아 키울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여 어린 마키오에게 온갖 정성을 바쳐 날이 갈수록 나약한 어리광쟁이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9년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자기가 보스턴에서 벌인 난봉질은 모르쇠하고, 아내의 바람기는 조금 눈치를 챘는지 결코 좋은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대신 ‘오초’라는 이름의 가이샤 출신을 첩으로 들여 살림을 차린다. 그래도 정실 아내를 전혀 모르쇠할 순 없는 법, 귀국 4년만에 마키노에게 누이동생을 하나 만들어준다.

  이렇게 ‘바람직한 가족 관계’ 속에서 살면서 마키노도 점점 나이를 먹어 어느새 스물다섯 살이 됐고, 이제 저 옛날 흥부의 큰아들이 흥부한테 말했듯이, “아버지, 아버지, 부랄 밑이 근질근질하니 장가 보내주!” 할 수 있는 때가 되자 그냥 미모의 열여덟 살 먹은 아가씨 스즈끼 세스한테 연애를 걸어 안다리후리기를 시도, 자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 히데오英雄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부모는 부모랍시고, 혼전 임신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를 하다가, 자기 손자가 세상에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끝까지 반대하노? 결혼시키고 말았다.

  마키노 집안에서 보면 낙혼이라 낙심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집안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옛 이야기. 마키노 가문도 이미 쇠락할 만큼 쇠락한 상태. 스즈끼 가문은 재산은 물론이고 교육수준, 집안환경 같은 게 형편없다. 게다가 우리의 작가 마키노 신이치는 어려서부터 다른 건 몰라도 부부 관계, 부부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은 모르겠고, 부부 사이라 해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호에 익숙한 인간이라 현대 일본의 젊은이 사이에서 창궐하고 있는 질병 가운데 하나인 매독 바이러스를 어디서 수집해 와, 아내의 생식기 전반에서 배양하는 일도 벌어진다.

  한 집안의 가장 마키노를 생각하면, 노동의 능력, 노동에 적응할 적응력을 아예 갖추지 못한 룸펜 인텔리겐치아. 열라 소설 같은 글을 써서 얼마라도 생기면 절대로 가정을 위해 내놓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과 환락을 위해 당장 써버리고 늘 궁상맞은 가난을 선택하는 인간. 늙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아주 내놓고 옛 하인 세이신과 살림을 차려, 주로 돈 문제로 고향에 내려가 세이신과 다툼이라도 있으면 늙은 세이신에게 엎어치기를 당해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돌아와 두어서너달 고향쪽으론 오줌도 안 누는 치졸한 인간이다.

  여태 내가 위키피디아 보고 마리노 신이치의 바이오를 옮긴 건 줄 아시나? 아니다. 책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소설 내용을 순서없이 와그르르르 적어 놓았을 뿐이다. 이게 가능한 건, 일본의 사소설이니까. 내가 정말 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가에서 하필이면 이 책을 잡아 뺐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마키노의 문장이 좋아 우리나라 이상李箱도 그가 고향집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목을 매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경악을 해 그해 9월에 빛나는 작품 <날개>를 썼으며, 날자, 날자, 에라 쓰펄 날고 말자 싶어서 10월엔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갔다가 다음 해 4월에 폐결핵이 도져 자기도 기꺼이 마키노의 뒤를 따랐다는 건데… 1930년대에 이렇게 촌스런 문장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경배할 수준이었나 싶다.


  “낮에는 야산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하고, 밤에는 길거리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유쾌한 무협담을 나누자. 나는 ‘사유의 사유’를 거듭하며 감람산을 꿈꾸는 철학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디오게네스의 나무통을 굴리고 있는 시인을 경멸하고, 통일을 위한 통일로 연신 무미건조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물리학도와 절교하고는, 유쾌하게 모자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낯선 야행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통쾌했다.” (<엘리베이터와 달빛>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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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17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300페이지 안 되는 책도 만8천원하는 것도 많더군요. 그만한 값을하면이야 그냥 봐준다 하지만 못 미치면 억울하죠. 말씀마따나 생활인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상이 요절해서 그렇지 마키노 신이치 좋다고 쭟아갔으면 클 날뻔했네요.

Falstaff 2024-10-17 20:28   좋아요 1 | URL
책값이 넘 올랐어요. 책값을 비롯해서 물가가 너무 올랐어요. 연금생활자는 밋치겠습니다. ㅋㅋㅋㅋ 절대 미치지 않을 거 같아서 웃음만....
(이하 생략)
 
맹인 악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지음,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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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생몰이 1853~1921, 주요 작품은 1886년 결혼하고 10년간에 집중해 있다. 폴타바에서 출생한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인 아버지는 당시 시각으로는 놀라운 정도로 뇌물을 받지 않는 정직한 지방판사였으며, 어머니 에벨리나 스코레비츠는 폴란드 출신으로, 코롤렌코가 어렸을 때는 도무지 자신이 어느 족속/종족에 속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제일 먼저 정식으로 배운 언어가 엄마의 모국어인 폴란드였는데, 1863년 폴란드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 선택에 대한 강요로 러시아 국적 및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866년, 코롤렌코가 겨우 열세 살일 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대학에 다니다 혁명 사상을 가진 젊은이가 (당)할 수 있는 많은 일을 다 (당)하고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 언론인, 인권운동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주의자”로 이름을 높인 이다. 진짜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면 아이고, 일단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앞으로 작품(집)이 나온다 해도 또 읽지는 않을 거 같으니 굳이 이이의 바이오를 더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아빠가 뇌물을 받지 않아 당대 시각으로는 마치 돈키호테 같은 희한한 지방 판사였다는 거, 엄마 이름이 ‘에벨리나’였다는 것을 밝힌 건, 청렴한 지방판사 아빠는 <나쁜 패거리>의 일찍 홀아비가 된 정의로운 지방판사가 등장하며, 엄마는 이 책의 타이틀 롤인 <맹인 악사>에서 폴란드 귀족 출신 토지 관리인의 딸이자 여주인공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작가의 사생활이 작품 속에 슬쩍 나오는 걸 발견하는 게 은근히 재미있지 않으신가? 나는 그런데. 뭐 그렇다는 얘기다.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초상.  일리야 레핀 그림


  읽기에 괜찮은 단편소설 셋과 타이틀 롤 중편소설 하나를 실은 작품집이다. 중단편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조금 위험하다. 그래도 이 책에 실린 <맹인 악사>는 178쪽에 이르며,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구 판형의 편집을 감안하면 웬만한 요즘 한국 장편소설 이상의 분량이라 줄거리 소개에 부담이 크지 않다.


  우크라이나 남서 지방의 부유한 지주 포펠스키 씨 집안 일이다. 작품은 포펠스키 씨의 젊은 아내 안나 미하일로브나 포펠스카야의 출산 장면부터 시작한다. 산고를 치르고 있다. 초산이라 독한 고통 끝에 사내 아이를 낳는데, 엄마는 진통 후의 나른함이 아니라 유난히 그악스러운 울음을 우는 아기가 걱정이다. 저 작은 것이 저렇게 힘들게 우는 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라는 본능적인 두려움. 물론 독자는 이미 짐작을 한다. 제목이 ‘맹인 악사’이니 아이는 맹인으로 출생해 훗날 악사,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게 맞다. 아이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시신경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그게 서러워 유난히 울부짖듯 울었을 것이라고 엄마는 평생 생각했겠지.

  가족의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아기의 외삼촌 막심 미하일로비치, 그리고 아기. 이렇게 네 명이다. 아버지 포펠스키 씨는 우크라이나 남서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착실하고 근면한 농촌 지주이다. 선량하고 친절하고 일꾼들 잘 보살피고, 취미로는 물레방아를 만들거나 다시 개조하는 걸 좋아한다. 쉬운 얘기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란 얘기다. 아무리 건드려도 성내지 않는 온화한 남성. 그러니 맹인 아들 하나만 딱 낳고 다시는 아이를 만들지도 않았지. 근데 우크라이나 물방앗간은 우리와는 달리 남녀상열지사가 생기지 않는 곳인 모양이다, 그지? 엄마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비슷하게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는 헌신적 엄마. 그런데 문제는 외삼촌 막심이다.

  외삼촌 막심은 키예프와 키예프의 가장 험한 동네인 시장에서 제일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쳤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그리고 코사크족. 근데 생각을 조금 바꿔보자. 이 동네 출신 가운데 유명한 작가가 몇 있다. 그 가운데 러시아 문학에 가장 큰 자취를 이룬 니콜라이 고골. <타라스 불바>를 봐도 그렇고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를 읽어도 그렇고, 이 근동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악마적 폭력성을 (아니겠지, 아니겠지만 휘까닥 바꿔 생각해보면) 약한 미덕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듯도 하다. 하여간 지역의 대표 어깨로 활약해 장바닥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 가지고도 주민들에게 무한 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막심은, 당연히 젊은 시절에 그랬다는 건데, 어느 날,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큰 포부를 펼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리발디와 한 패를 이루어 대 오스트리아 전쟁에 투신했다. 거대한 몸집과 대단한 완력을 쏟아내는 막심이 가리발디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 지는 안 보고도 알 수 있겠지. 그러다가, 한 번은 장창을 꼬나들고, 19세기지만 소총의 연발 사격 속도가 부실해 백병전이 전투를 가름하던 때라 정말 말 위에서 긴 창을 휘두르던 시기인데,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꾀바른 오스트리아 군사 하나가 말의 발모가지를 타격하는 바람에 적진 한 가운데에서 낙마를 했고, 이걸 그냥 둘 오스트리아 군사들이 아니어서 자근자근 짓밟아주었고, 조금 시간이 흘러 이탈리아 독립군이 구출을 해 목숨보전을 했으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며, 왼손도 이젠 그냥 시늉으로만 달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어떡해? 남의 나라인데. 다시 우크라이나로 와 키예프의 집구석에 들어가기엔 보는 눈이 성가셔, 마침 매제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여동생 안나의 집에 쳐들어가 함께 살고 있었던 거다.

  이제 장애로 인해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늙은 전사는 폭력성 대신 만신창이가 된 몸 속에서 뜨겁고 선량한 심장이 고동치고 덥수룩한 억센 머리털로 뒤덮인 크고 네모난 머리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사고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나이를 먹었다는 말이다. 누이 안나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맹목적인 배려를 하는 건 아이의 시각을 대체할 예민한 다른 신경기관이 발달하는 데 오히려 크게 방해할 수 있다고 조언하며 아이가 주어진 상황 아래 자신에게 허용된 (시각을 제외한)외적 인상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교육을 맡게 된다. 그리하여 막심 외삼촌은 선천적으로 맹인으로 태어난 표트르 포펠스키의 스승으로 아이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맹인 악사>는 선천적 맹인 표트르 포펠스키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해, 유년, 소년, 사춘기, 청년, 혼인 등 연대기 적 서사로 썼다. 주인공이 맹인 표트르이기 때문에 주연급 조연인 막심이 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철저하게 시간 배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은 현대 소설 중에선 아주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간을 10으로 본다면 소위 “현대” 소설은 4, 5, 6 정도, 아니면 7쯤에서 시작해 예컨데 7, 8, 3, 4, 5, 6, 1, 2, 9, 10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섞는 것이 일반이라 이 작품처럼 1, 2, 3… 9, 10 같은 나열은 진짜 오랜만에 읽는다. 아마도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작품에서는 읽었던 것 같다.

  <맹인 악사>는 1886년에 발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작가 블라디미르 코롤렌코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선배 작가들보다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나는데, 나는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읽으려 노력해도 그들을 능가하기는커녕 비슷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투르게네프야 러시아 토종이라기보다 유럽을 모방한 측면이 강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물론 더 앞으로 나가면 고골은 확실하게 러시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을 썼고, 이런 면에서 코를렌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히려 선배 세대 작가들보다 코롤렌코의 스타일은 전혀 진화하지 못한 것으로 읽었다. 하긴, 선배들의 그림자가 워낙 크고 깊기는 하다.


  “그런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감정이 결핍되어 흔히 지나치게 냉정하고 지나치게 신중하게 보인다. 그들은 세속적 삶의 열정적 호소에 둔감하며 마치 아주 명백한 개인적 행복의 길을 가듯이 애처로운 본분의 길을 조용히 걸어간다. 그들은 눈 덮인 산봉우리처럼 냉랭하고 장엄하다. 일상의 비속은 그들의 발아래에 널려 있다. 심지어 중상과 험담은 마치 백조의 날개에서 진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듯 눈처럼 하얀 그들의 의복에서 굴러떨어진다….” (p.244)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출간한 독일 소설에서 볼 듯한 문장과 사유법이다. 이미 서유럽에서는 이런 경향을 졸업하고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향유하는 단계였다. 에밀 졸라가 <목로주점>을 출간하고 10년 가까이 흐른 시점이고, <제르미날>이 1년 전에 나왔으니 아쉬울 수밖에.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다음으로 하고, 오히려 같은 지역 사람인 니콜라이 고골에 비해서도 한 수 너머 접히는 구성과 문장과 스토리, 이것들을 다 합해 ‘스타일’ 아닐까 싶다. 다만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읽을 만하……지만 추천할 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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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15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시간 순서 보는 법 생각 거의 안하고 읽었는데 이런 게 있었네요. 아직 톨스토이와 도끼 옹의 책을 다 떼지 못한 저로선 일단 저 문학의 신들의 작품을 다 읽고 혹시 시간이 남으면 들춰봐야겠네요. ㅋ

Falstaff 2024-10-15 10:24   좋아요 1 | URL
시간 순서, 근데 정말 그런 거 같지 않아요? 아이고, 이거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 거 아닌가 싶어 좀 캥겼었거든요. ㅎㅎㅎ

stella.K 2024-10-15 10:29   좋아요 1 | URL
믿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4-10-16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믿고 패스!

Falstaff 2024-10-16 20: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래도 혹시 도서관에서 발견하시면 읽어보셔요!
 
과도기 - 한설야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0
한설야 지음, 서경석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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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북 작가 한설야가 1925년부터 48년까지 쓴 단편소설 17편을 실은 단편선.

  한설야가 누구야? 학교 다닐 당시에 한설야는커녕 정지용조차 정X용으로 표기해야 했던 시절이라 한설야는 정말 늦게, 아주 늦게야 알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먼저 한설야에 관해 뒤져봤다. 본명은 한병도韓秉道. 190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할 때의 ‘삼수’ 군수를 지내고 이후 차례로 의사, 광산업을 경영한 나름대로 부르주아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때도 함흥 하면 제법 큰 도시인데 수재로 이름이 났던지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당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해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동기동창이 된다. 이후 함흥고보로 전학해 1919년에 졸업을 했지만 딱 그 해가 기미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인생 처음으로 석 달 동안 소위 ‘나랏밥’을 먹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공부하다 돌아와 이것저것 하다가 마음먹은 바가 있어 1923년에 도일,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가담했다. 그러나 1923년의 도쿄라니. 당시 도쿄에 살던 조선 유학생들은 관동대지진에 이은 조선인 학살 사건에 기겁을 해 거의 대부분 귀국선에 올랐는데, 한설야, 아니지 한병도도 불과 몇 개월만에 돌아와, 그것도 유학생이라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그 날 밤>으로 등단, 만주 봉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27년에 귀국해 카프에 가입한다. 잡지 편집과 조선일보 기자 등을 하다가 카프 사건에 연루되어 1934년, 이이가 아들만 넷인데 막내 아들이 태어난 해에 전주 감옥에서 1년 동안 두번째 ‘나랏밥’을 먹었다. 만주 봉천에 살다가 귀국하는 이야기, 임신한 아내를 두고 감옥에 들어간 이야기가 이 단편집 《과도기》에 여러 번 나온다. 자식 가운데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얘기도 당연히 나온다. 1943년엔 전쟁이 세 불리하게 되자 발악을 하기 시작한 일본 경찰에 비밀 결사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세번째 ‘나랏밥’을 자시다가 1944년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엔 잠깐 상경해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좋은 요릿집에서 잘 때려 먹은 뒤에 돌아갔다. 그러니 한설야는 “월북작가”가 아니다. 애초에 생활하고 작가 활동을 북쪽에서 했다. 그냥 살뜰하게 공산주의 작가라고 보면 된다.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잘 나가다가 1962년 12월에 숙청당했다. 1963년에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춥디추운 자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가 모진 목숨 이어가다가 1976년에 숟가락 놨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복권이 되어 지금 한설야는 백골이나마 애국열사릉에서 누워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경향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가운데 한 명인 한설야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본 것이 《과도기》를 읽은 최대의 수확이다.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전부, 말 그대로 한 편도 빠짐없이 사회주의적 계몽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같은 공산주의 진영의 작가라고 해도 이기영이나 이태준, 일찍 죽은 강경애하고 비교도 못할 만큼 재미(재밋대가리) 없는 소설만 쓴 거 같다.

  게다가 마지막 두 편, <모자>와 <혈로>는 가관이다. <모자>는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 장교가 북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가난한 소녀를 보며 대 파시스트 전쟁 당시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학살을 당한 자기 딸을 오버랩 시키는 작품이며, <혈로>는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님이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일본군대를 격멸시키는 영웅위인전 성격이 짙다. 하여튼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런 짓을 했으니 대부분의 부르주아 출신 문인들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숙청을 당해 골로 간 데 비하여 꽤 오래 잘 먹고 잘 살았겠지만, 나치와 일본 군부보다 더 파시스트 적 독재정권 아래 작가 생활을 하는 자체가, 말을 말자. 이게 무슨 소설이고 문학작품인가 말이지.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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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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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년 11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에리히 아우어바흐를 알게 된 첫 계기는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소설>을 통해서였다. 인상깊기는 했지만 아우어바흐라는 비교문학 학자가 있었고 그의 저서 《미메시스》가 명저라는 것만 기억했다. 나는 미치너의 <소설>을 읽고 51개월이 지난 후 튀르키예 작가 쥴퓌 리바넬리가 쓴 명작 <세레나데>를 읽는다. 이 속에서 두 주인공, 유대계 독일인 막시밀리안 바그너 교수와 이스탄불 대학의 계약직 공무원 마야 두란의 대화를 통해 《미메시스》는 꼭 읽을 책으로 구체화되어 <세레나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후 열 달이 또 지났고, 9월 중순이 되었으나 여전히 수은주가 30도 위를 맴도는 뜨거운 초가을에 이 책 읽기를 마쳤다.

  사 두기는 했지만 엄두가 선뜻 나지 않았다. 두 달 이상이 걸렸다. 목차를 보니 각 챕터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읽을 분량으로 적절하게 나뉘어 있었다. 무릎을 쳤다. 이런 책은 앉은 자리에서 단박에 읽어 치우려면 낭패를 보는 법, 시간이 생길 때마다 한 챕터씩 나누어 읽자. 그리하여 7월부터 근 두 달에 걸쳐서, 하루 가운데 가장 머리가 맑은 시간, 늦어도 새벽 다섯 시쯤 정말로 한 챕터씩, 딱 그 정도만 읽었다. 숙취가 남은 날은 책을 펴지 않았다.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가 들어도 이 책 읽기를 삼갔다. 그렇게 공을 들였다. 그렇게 공을 들일 만했다. 매서운 바람이 횡행하는 튀르키예의 겨울해변에서 파랗게 언 채 바이올린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던 늙은 유대인 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의 《미메시스》에 대한 찬사는 틀림이 없었다. 다만 서양 문학의 사실적 묘사에 관해 80년 전에 쓴 비교문학이다. 시간이 흘러 아우어바흐의 논점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그의 관점 자체가 조금은 바랬다고 해야 할듯하다. 《미메시스》보다 2,500년 전에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는 여전하건만, 정작 <오디세이>를 논한 《미메시스》는 80년만에 (영락없는 아마추어가 읽기에)조금은 빛이 바랜 것처럼 보인다니 비평의 무상함이란….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같은 세대의 혈기왕성한 유대계 독일 남성이 그러했듯이 독일 국민의 자격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에서 로망스어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29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35년 나치 정권은 그의 교수직을 박탈했고, 신변상 위험을 감지한 아우어바흐는 독일을 탈출해 튀르키예에 정착, 36년부터 이스탄불 대학의 유럽문학 학과장의 자리를 얻는다. 이후 10년간 튀르키예와 이스탄불 대학의 충분하지 못한 자료 때문에 오히려 유럽의 중요한 문학작품을 원본으로 다시 읽어야 했던 아우어바흐는 기존의 수다한 자료와 독립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던 기념비적 작업인 《미메시스》를 1946년에 발표하게 된다. 발표 다음 해인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우어바흐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예일대, 고등연구소 등의 교수를 역임한 후 1957년, 코네티컷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책을 읽는 데 가장 곤란한 점은 극도로 현학적인 우리말이었다. 우리 학계의 원로이자 이름 높은 학자인 김우창, 유종호 공동번역. 주 번역자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이어서 서문 격인 “『미메시스』 재출간에 부쳐 –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이후”, 초판 “역자 서문”을 써 책의 앞 꼭지에 달았는데, 이 두 서문은 특별한 재능을 갖은 자 가운데 특별한 교육을 받은 소수, 철학적 사유를 적은 글을 읽으며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자”가 아닌 나 같은 범부는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우창 스스로 어떻게 하면 나 정도의 범부들이 책을 읽으며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며 쓴 글 같았는데, 설마 정말 그랬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평소 학자 연하던 풍모를 조금도 감하지 않은 채 작품을 번역했을 터이다. 구름 위 아니면 적어도 올림포스에 살며 넥타르를 마시는 고귀한 학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문학작품은 거의 다 읽는 대단한 다독과 이름난 비평. 어떤 문장이기에 나 또한 유난을 떠는지 한 번 그의 (번역)문장을 인용해보자. 아래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루이제 밀러린>에 관한 글 가운데 일부분이다.


  “여러 시대와 사회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규범이 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그 자체의 전제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깨닫게 될 때, 그리고 그러한 전제 속에 기후나 토지와 같은 자연 조건뿐만 아니라 지적∙역사적 요인들도 포함시킬 때, 달리 말하여 사람들이 역사 동력학에 대한 감각, 역사 현상과 그 계속적인 내면의 움직임이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각각의 시대에 살아 있는 일체성이 있어서, 각 시대는 그 여러 표현 속에 스스로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한 덩어리로 나타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우치게 될 때, 드디어 사실의 의미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의 형태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의식을 받아들이고 그 이해에 필요한 자료를 전적으로 사회의 상층이나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여기에서만 유니크한 의미와 내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과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보편 타당성을 가진 것이 파악되기 때문에) 예술과 결제와 물질적, 지적인 문화와 일상적 노동 세계의 깊이에서 또 보통 사람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게 될 때, 이때에 비로소 그러한 통찰이 현재 속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현재 또한 비교될 수 없이 유니크하며, 내적인 동력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계속적인 발전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아지게 될 것이다.” (p. 585)


  나는 실러의 <루이제 밀러린>을 읽었다. 주제페 베르디가 이걸 오페라로 만든 <루이제 밀러>도 들었고, 영상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문장, 단 한 문장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위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 내가 읽기로 “통찰”이 주어다. 그럼 서술어는 뭘까? “보아지다.” 

  이제 문장을 주어, 서술어로 써 보자.


  “통찰이 보아지다.”


  이게 말입니까, 막걸립니까? “보아지다”? 천박해 보이지만 좀 웃자. ㅋㅋㅋㅋㅋ

  우리말 사전에 “보아지다”라는 단어는 없다. “보여지다”로 쓰면 어떨까?

  “통찰이 보여지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보여지다”는 피동사 ‘보이다’와 피동의 뜻인 ‘여지다’가 중복 쓰인 잘못된 단어라고 나온다. 괜히 까탈을 잡는 게 아니다. 이 양반이 영문과 교수를 했는데, 자기 학생이 영어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사디즘적으로 F학점 주기를 우습게 알던 양반이다. 그런 높은 학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다니. 그리고 “통찰이 보아지다.”를 서술하기 위한 서술절들의 난해함, 난해를 넘는 “난삽함”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나는 엄하고(엄했고) 까다롭고(까다로웠고) 높은(높았던) 학자 김우창을 이해할 수 없다.

  곧기가 대쪽같고, 추상이 매화 같은 김우창 선생과 유사한 우리말 번역, 이 가운데 하버드 김박사와 비교할 수 있는 AI가 있으니, 나는 그걸 자주 “구글 번역”이라 한다.

  그러면 번역문만 그러한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땅콩. 내가 이 책 읽기를 가장 어렵게 만든 건, 서너 번 시도하고도 책 읽기를 계속 미루게 하고야 만, 김우창이 쓴 서문 “『미메시스』 재출간에 부쳐 –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이후”이었다. 즉, 서문만 서너 번 읽고 이 책은 나한테 너무 멀리 있어, 라고 포기하게 했으며, 그 책임의 상당한 부분은 쓴 사람, 김우창에게 있다. A가 B에게 이야기하지만 B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럴 때 책임은 말하는 A에게 있나, 우둔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B에게 있나? 단연 A에게 있다. 도대체 서문이 어떠하기에 감히 일개 범부인 주제에 이렇게 떠드느냐고? 분량도 있고, 읽기에 지루할 것도 틀림이 없어 예를 들지는 않겠다. 인터넷 책방에 가시면 미리보기로 조금 맛을 볼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지금 시대에, 하여간 지난 시대에는 더 했지만, 함부로 비난을 하면 이민 갈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문화적, 학문적 권력을 쥔(쥐었던) 큰 학자 김우창의 우리말 문장 때문에 이 책을 권하지 않겠다.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야 제임스 미치너와 쥴퓌 리바넬리가 극찬할 정도의 명저로, 유럽의 가장 기념적인 작품들에 드러난 현실 묘사, 리얼리즘에 관한 뛰어난 관찰이긴 해도.

  이 독후감을 올릴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감히 내가 김우창의 글에 대고 이 따위 허튼 감상을 늘어놨다는 말이지? 하, 나이 좀 먹더니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와버렸네. 아니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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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1 0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한설야, 《과도기》
화요일.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맹인 악사》
목요일. 마키노 신이치, 《마키노 신이치 단편선》
금요일.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다음 주는.... 날로 먹겠다는 뜻?

그레이스 2024-10-16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보아지다!^^
개정판이 새옷입고 나와서 조금 읽기 편하려나 했는데,,, 바뀐게 없더라구요.
고어체에다가... 말씀하신 그 불편함을 저도 느꼈습니다.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읽을만 했는데,,,,^^

Falstaff 2024-10-16 20:42   좋아요 1 | URL
중판을 찍어도 숱한 책들이 본문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저역자는 전부 출판사 편집자한테 맡기고 편집자/교정자는 함부로 교정했다가 나중에 욕이나 한 태배기 얻어 듣지 않을까 싶어 그냥 무질르고... 하여간 에휴.... 최인훈의 <광장>은 중판 찍을 때마다 섬세한 부분을 다 다시 썼거든요. 그런 중판이 이젠 더이상 보이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젤소민아 2024-10-18 05: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반도 못 읽고 책꽂이 깊은 곳으로~~~

Falstaff 2024-10-18 07:22   좋아요 1 | URL
저처럼 하루에 한 챕터씩만 읽어보셔요. 어느새 다 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