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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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원전부터 고리대금업에 관한 한 세계 어떤 인종보다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부유한 은행가였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는 걸 보고 즉시 러시아를 탈출, 핀란드를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당시 러시아제국의 영토에 살다가 그곳을 탈출한 유대인 가운데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 유럽에 정착한 이들이다. 차라리 팔레스타인이나 미국, 아니면 라틴 아메리카를 선택하지 하필이면 서유럽에 정착해 그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지. 물론 당시에 알았나, 몰랐겠지.

  파리로 온 이렌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을 다니며 글을 쓰다가, 1926년 스물세 살 때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했다. 엡스타인. 유대인 성씨다. 이렌의 아버지처럼 은행가였단다. 1929년에 맏딸 데니스를 낳은 건 좋았는데, 1937년, 이미 전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팽배할 시점에 얼른 남북 아메리카 아무 곳이나 팔레스타인으로 뜨지 않고 둘째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건 뭐람. 이 시점이 사실상 거의 마지막으로 유럽을 탈출할 수 있었던 기회였을 텐데. 아마 그때도 프랑스 정부가 옙스타인 가족에게 프랑스 국적 부여요청을 거부하고 있었을 걸? (맞다! 1938년에 국적 요구가 정식으로 거부당했다.) 1년 후인 1938년 독일 전역에서는 독일인들에 의한 유대인 린치 사건인 “수정의 밤”이 벌어지고, 또다시 1년이 지나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1940년 6월 23일, 군복을 입은 아돌프 히틀러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근사한 사진 한 장을 박으며, 이렌과 미셸 엡스타인의 인생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실제로 이렌 네미롭스키는 유대교를 버리고 천주교로 개종을 하며, 스스로 유대인과 거리를 둔 듯한 글을 기고하는 등의 행위를 했음에도 프랑스인이 되는 것에 실패하고, 1942년 프랑스 비시 정부의 경찰에 의하여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이 아니라 발진티푸스로 죽는다. 남편 미셸 엡스타인은 파리 함락과 동시에 은행에서 해고당하고 아내 이렌이 죽은 몇 달 후 아우슈비츠에서 가스를 마시고 죽는다. 두 딸이 살아남아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엄마의 작품을 1990년대 후반에 소개하는데, 남긴 것이 엄마의 일기인 줄 알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니, 참.


  이 책은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표작은 당연히 1929년에 발표한 <무도회>. 조금 헛갈리는데, 1929년에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각색한 영화 대본으로 먼저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1930년에 영화 <데이비드 골더>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연극으로도 만들어 히트를 친 모양이다. 29년에 출판사 사장이 도대체 이 작품을 누가 쓴 것인지 몰라 신문광고까지 했지만 정작 이렌 네미롭스키는 첫아이 데니스를 낳기 위해 산과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고. 그라셋 출판사는 겨우 스물여섯 살의 여성이 이렇게 강력한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다.

  <무도회>가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없다. 파리의 은행 문 앞에 푸른 제복을 입고 서서 고객이 들어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였다가, 고용주의 눈에 띄어 직원이 되었던 알프레드 캉프 씨. 그는 상사의 타자수로 일하던 로진 양과 연애를 해, 둘 사이에 외동딸 앙투아네트가 태어나기 바로 전 북통같이 부른 배에 웨딩드레스를 입힌 채 결혼을 했다. 이들은 파리의 허름한 파바르 가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캉프 씨가 다른 건 몰라도 돈복이 있는 건 확실해서, 2년 전인 1926년에 프랑화와 영국 파운드화가 널뛰기를 하는 걸 유심히 눈 여겨 보더니 자기 전 재산을 몰빵, 대박, 대박 중에서도 초대박을 쳤고, 원래 되는 인간은 하는 일 족족 되는 게 보통이어서, 이어지는 투기성 투자도 더블, 더블-더블의 연속상영, 남은 생애 동안 아내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비단신에 흙 한 번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우뚝 서게 됐다. 근데 결혼한 지 14년에 딸 앙투아네트 하나밖에 없는 걸 보니 우뚝 세운 건 돈 하나밖에 없었던 모양이지?

  전형적인 졸부. 이집 부모만큼 허세, 허영 덩어리로 과시하기 좋아하고, 크게 소리쳐 위압하기 좋아하는 인종을 우리도 많이 봤을 걸? 단시간에 급속도로 돈이 쏟아져 천민자본주의 시절을 충분히 경험했고, 어쩌면 아직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지 모르니까 말이지. 알프레드 캉프는 금융업 권위자답게 부르주아 사회의 일원으로 도장이 박히기 원하고, 로진 캉프는 하층계급 출신이라 주로 공, 후, 백, 자, 남작과 그 부인들과의 교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 그리하여 의기투합한 부부는 무지막지한 돈을 들여 크게 무도회를 열기로 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자기네 집 안에 있는 걸 몰랐다. 열네 살 먹어 사춘기를 맞은 딸 앙투아네트. 평소 부모한테 별 애정은커녕 제대로 된 관심도 못 받은 채 사춘기를 맞아 특유의 반항심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웬수. 그리하여 2백명을 예상한 큰 규모의 무도회에 한 바탕 거친 바람이 몰아치니, 그건 알려드릴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마지막 네 번째 읽은 <그날 밤>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스무 살에 만나서 이제 마흔다섯. 서로 사랑했지만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부부. 둘 다 격렬한 성격에 질투심으로 가득했고, 상대방에 대해 체념하거나 부드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 이들이 어떻게 지냈겠어, 25년 간을. 치열하게 싸우고나서 열정적이고 감미로운 화해로 끝나곤 하는 폭풍우의 연속이었겠지. 세월이 흘러 한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던 여자는 화장을 해도 깊은 주름이나 씁쓸한 표정을 가릴 수 없었다. 애지중지했지만 원하지는 않았던 딸을 느지막이 낳은 다음엔 몸도 무거워지고 틀어져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젊어 보였다. 이들은 프랑스에 정착하지 못해 모로코로 떠났고, 건축가였던 남자는 나이가 든 후에야 행운이 따라 이제 거의 부자가 됐다. 그러나 이 순간, 남자는 젊은 애인과 함께 달아나버렸고, 모로코에서 혼자 살 수 없었던 여자는 딸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상트르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선생으로 일하는 동생 곁에서 살기 위해 눈까지 내리는 작은 역에서 내렸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하고,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딸이 화자인 ‘나’이다.

  여자의 동생, 그러니까 ‘나’의 이모 알베르트의 집에 도착하니 마을 우체국의 직원인 블랑슈 아주머니, 다른 곳에서 역시 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알베르트 이모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와 있는 마르셀 아주머니가 맞아 주었다. 12월 23일이었다.

  알베르트 이모는 여태 독신이다. 홀로 고독하지만 행복하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여인 앞에서 자신의 고통, 사랑의 잘못된 결과와 ‘나’일 수밖에 없는 잘못된 과실에 대하여 호소하는 엄마.

  결론은? 절대 밝히지 않겠다. 읽어가면서 그렇게 끝나겠지, 기대한 대로 되지만, 정말 그런 결말을 맞을 때, 독자는 복잡한 심정이 될 수도 있다. 멋진 단편이다. 오래 기억에 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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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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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을 읽고 꽤 시간이… 지났나? 이제 보니 딱 2년 됐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아리스토파네스는 당대의 가장 적극적인 보수파 진영에서도 제일 앞에 섰던 인물이다. 보수? 보수적으로 생활하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한 번도 보수 쪽에 가깝다고 여겨본 적 없는 말로만 진보인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보수파 대장이었다고 하니까 그냥 이 대목에서 젓가락 놓고/던지고 싶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만 더 들어 보시라. 아리스토파네스의 반대편에 섰던 인간들은 당시 스파르타와 대가리 터지게 싸우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계속 하자, 아테네가 초토화되고 벌판이 황폐하여 살기가 아무리 퍽퍽해지더라도 아테네의 가오가 있지 어떻게 저 깡촌놈들 스파르타한테 아홉 마리의 황소 털 가운데 한 오라기라 하더라도 양보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침을 튀던 주전파인 클레온,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가 보기에) 아테네의 청년들을 모아 주둥이질만 열심이고, 늙은이 주제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진짜로 참전했다가 적들이 쳐들어오는 순간 사방에 먼지가 자욱한 틈을 타 과감하게 뒤로 돌아 돌격한 소크라테스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고 브레히트의 책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건데 하여간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젊은이들을 교언영색한 궤변론자이자 호전적인 늙은이라고 생각해 무지하게 싫어했다. 그리고 한 명 더. 그리스 신화 혹은 전설이나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을 자기 마음대로, 허무맹랑하게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영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비극을 만든, 만들었다고 생각한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들을 극혐했다.

  아무리 위대한 문명을 누렸다지만 당장 도시가 망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들의 현 상태, 좀 잘난 척해서 말하자면 SWAT 분석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 싸우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당시엔 진보였으며, 아리스토파네스처럼 당장 도시가 처한 꼬라지를 제대로 이해해서 조금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화평 조약을 맺자고 주장했던 진영이 보수였다. 만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내가 오독한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면, 불행하게 21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5세기에 살고 있는 소위 지식인은 보수가 옳았을까, 진보가 옳았을까? 당연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스파르타가 우여곡절 끝에 이기기는 한다. 결과 아테네는 거의 폐허만 남고, 스파르트 역시 얻을 게 없어 쪽박을 차게 되어 옆에서 구경만 하던 테베가 그리스 연방의 짱을 먹게 된다. 궁금하다. 당신은 보수를 택했을까, 진보를 택했을까?

  아리스토파네스는 깡다구도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가 클레온, 2022년 말에 타계한 천병희 선생은 이자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한 챕터의 대상이 아니라 페리클레스 편의 조연급으로 나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명을 확실히 짧게 해주었을 거 같은 인물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궤변론자로 단정한 소크라테스는 이미 플라톤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으뜸인 자였으며, 에우리피데스 역시 그리스 비극의 마지막 영광스러운 꽃을 피운 작가였다. 그러면 뭐해.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들 모두 자기가 쓴 희극작품에 “실명”으로 등장시켜 만인의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에선 클레온과 소크라테스가 혼이 나더니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에선 에우리피데스의 가오에 숱한 스크래치가 간다. 그러니 이이 강단이 보통이겠느냐고. 그렇다는 얘기다. 심지어 오늘 소개할 작품 속에 에우리피데스가 괜히 등장해 창피 당하는 작품을 고르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다섯 편 가운데 제일 앞에 실린 <뤼시스트라테>를 소개한다.

  이 희극의 배경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이다. 구체적인 전황 같은 건 소개하지 않겠다. 혹시 알고 싶으신 분은 투퀴디데스가 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말고 현대 미국인 사학자 도널드 케이건이 쓴 동명의 전쟁사를 읽어 보시는 편이 낫다. 그것도 훨씬 낫다. 그것보다는 이제 전쟁의 국면이 변해 스파르타가 난데없이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 아테네는 비록 오늘 내일로 도시가 망가지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빠지게 됐고, 이를 눈치 챈 동맹국들도 슬금슬금 아직껏 맺고 있던 인연의 줄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클레온 일당들은 이래봬도 우리가 아네나이여, 왜들 이려, 하면서 아무리 큰 위험을 당하더라도 굴복할 수 없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바란다, 주접을 떨고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뤼시스트라테>를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막바지에 다른 기원전 411년에 썼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431년에 발발하여 10년 동안 대가리 터지게 싸우다가 BC421년부터 8년간 휴전한다. 그러니까 기원전 411년이면 두 도시가 쉬는 새 바나나 먹고, 탄수화물 먹고, 단백질 음료 마시고 원기회복해 다시 싸우기 시작해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스파르타보다 육군은 좀 처지지만 해군이 더 막강하다고 오판해 시칠리아로 짓쳐들어갔다가 쌍코피를 흘릴 때였다. 그러니 육군은 원래 안 돼, 해군도 깨져, 이제 아리스토파네스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평화조약을 맺고 싶었을 터. 그는 이 판국에 절묘한 풍자를 해버리니, 그리스 남자들은 전부 전쟁에 환장을 한 미친 것들인 반면, 여성들이 정신을 차려 하루속히 평화조약을 체결해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했다. 근데 특히 전쟁 중에 여성이 무슨 힘이 있어서 평화조약을 맺게 만드나 그래?


  주인공 뤼시스트라테는 사고의 폭이 대단히 넓은 여인이다. 이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그리스의 모든 남자들이 거덜이 날 것이며, 모든 여자들은 과부가 될 거 같다.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고, 가게에는 팔고 살 물건도 없으며 팔고 살 사람도 없을 거 같다. 그리하여 조속히 평화조약을 맺어 합당한 보상금을 서로 주고받아 전쟁을 끝내야 마땅한데, 남자들은 이미 맛이 가서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이걸 어쩐다?

  전쟁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이다. 돈이 있어야 무기를 사고, 갑옷을 사고, 방패도 만든다. 돈이 있어야 병사를 먹이고, 입히고, 재울 텐트를 산다. 그래서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테네, 아테나이의 돈줄을 말리는 일. 이걸 위하여 파르테논 신전에 적립해둔 전쟁 기금을 못 쓰게 하는 것. 그리고 남자들의 참전을 막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남편, 남친과의 교접을 거부하는 섹스 스트라이크였다. 하나 더. 신전 속의 전쟁기금과 섹스 스트라이크는 아테나이 한 군데서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뤼시스트라테의 행위는 영락없이 매국적인 일이 될 터. 이를 제대로 아는 뤼시스트라테는 스파르타와 테베의 여성 대표를 초청하여 자신의 뜻을 설명하고, 몇 날 며칠 동시에 신전을 점령하고 남편/남친을 침대 위에 못 올라오게 한다고 합의한다. 그쪽 도시에서도 남자들은 여전히 전쟁을 하자고 난리중이니까.

  그래도 순서가 있어서, 뤼시스트라테는 먼저 아테나이의 여성들에게 맹세를 시킨다. 이들이 신 앞에서 포도주를 들고 행하는 맹세는 동양에서 흔히 하는 약속과 다르다. 맹세를 어기면 죽음이나 죽음보다 지독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결의다. 뤼시스트라테는 맹세를 강요하고 여인들은 기꺼이 이 말을 반복해 외침으로 맹세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자는 어느 누구도…

  꼿꼿이 세우고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집에서 나는 숫처녀처럼 지내겠습니다.

  샤프란 색 가운을 입고 화장을 한 채

  남편이 나를 몹시 열망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결코 자진해서 내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싫다는데도 그이가 완력으로 강요한다면…

  나는 재미없게 해주고 요분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천장을 향하여 다리도 들지 않겠습니다.

  나는 치즈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엉덩이를 들고 웅크리지도 않겠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리스 고전 희극에서는 대개 그렇다고 하는 바와 같이 커다란 음경이 덜렁거리는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음란한 말만 주고받는다.

  여태까지 읽은 그리스 작품들은 올림포스에서 신주 넥타르를 홀짝거리는 별의 별 신들과 그들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자손, 즉 영웅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신과 영웅과 왕들의 리그. 그게 그리스 비극이었던 반면, 위에서 뤼시스트라테의 맹세에서 보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무대를 올림포스 신전과 왕궁, 영웅들의 전쟁터에서 난잡하게 보이는 인간세상으로 끌어내렸다. 비록 등장인물은 여전히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차용해 자신이 하고 싶은 대사를 만들지만 보다 사실적인 목적과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정말로 펠레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여성들에 의한 섹스 스트라이크가 있었겠느냐만, 이런 풍자와 냉소를 가득 담을 수 있었다는 것만 가지고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내게 특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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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9-27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이렌 네미롭스키, 《무도회》
화요일. 에이미 헴플, 《사는 이유》
목요일. 콜슨 화이트헤드, <제1 구역>
금요일. 레이철 커크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슈니츨러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8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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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2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레오폴트슈타츠에서 출생한 유대계 (단편)소설가 겸 극작가. 그리고 놀랍게도 의사다. 1885년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종합병원에서 의사의 길을 갔으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돈 잘 버는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러려면 미쳤다고 힘든 의학공부를 했는지 참. 하긴 자기가 싫으면 평양 감사도 안 한다니 다 지 팔자이긴 하다.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죄로 의학을 공부했지만 넘쳐흐르는 창작의 기질을 감추지 못해 나름대로 불행했던 작가. 그러나 유대인이 1931년에 죽었으면, 그것도 오스트리아에서 그랬다면, 아이고, 그것 하나 가지고도 복 받았던 거 아니야? 이이가 서쪽 스위스 건너의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친 인상주의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와 동갑인데, 그래서 그런지 작품의 내용도 슬쩍 드뷔시의 주제와 비슷하게 다분히 성적이다. 요즘 한자어로 性的이라 쓰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그래서 굳이 번역해드리자면, sexual 하다는 뜻. 정말? 그렇다. 내가 처음 읽은 슈니츨러가 《라이겐》이었는데, 줄줄이 짝을 바꾸면서 추는 무도곡을 일컫는 단어이지만 동시에 줄줄이 엮이는 열 쌍의 성적 대상에 관한 소설이었다. 워째? 좀 혹 하셔?


  이번에 민음사에서 낸 《슈니츨러 작품선》에는 세 편의 단편과 두 편의 노벨레 혹은 중편소설을 실었다. 두 중편은 내가 그동안 틈틈이 어떤 책을 읽을까 나름대로 뇌를 쓴 <엘제 양> 또는 <엘제 아씨>와 <꿈의 노벨레>라서 하마터면 두 권의 책을 살 뻔했는데, 물론 두서너 해 전에 그랬다는 말이고 은퇴 이후엔 책을 거의 사지 않아 고려 대상이 되지도 않았지만, 그게 한 권의 책에 모두 들어 있어서 비록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더라도 그간 기다려온 것이 참 보람찼다. 살다 보니 별 게 다 보람차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거의 모든 작품이 이성 사이의 야릇한 끌림과, 흠흠, 독자의 이해를 바라는 바, 꼴림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슈니츨러의 비엔나 의과대학 6년 선배이기도 하고 더구나 같은 유대인인 지기스문트슐로모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우연히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어 발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프로이트도 슈니츨러의 작품을 읽고 깊이 공감하여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형제의 의를 갖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나, 어쨌다나?

  읽어 보시라. 다섯 작품 모두 주제는 섹스와 죽음이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제일 궁금하고, 무엇보다 유혹적인 주제가 섹스와 죽음이기는 하다. 이 둘에 비하면 어느 주제가 있어서 발꿈치에나 따라 오겠느냐고. 게다가 일찌감치 섹스와 죽음에 관한 한 흥미롭게 천착한 슈니츨러이니 말이지.

  다 재미있다. 그간 <엘제 양>과 <꿈의 노벨레>를 과하게 기대했는지는 모르기는 하다. 그래서 읽은 다음 팍, 느낀 건, 재미는 있으나 낡았다는 거. 당시에는 프로이트 박사가 의형제를 맺자고 할 정도로 (말이 그렇다는 거다, 설마 믿지는 않으실 테지?) 센세이셔널했겠지만, 그럴 수도 있었겠으나,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진심인데, 나도 아쉬웠다.

  독후감을 더 써서 괜히 고 슈니츨러(편히 쉬기를…)의 영혼에 불편을 안겨주지 말고 이쯤에서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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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26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로 혹 안하는데요?ㅎㅎ
역시 슈니츨러는 우리나라에선 벼로 대우를 못 받는가 봅니다. 저는 읽는다면 죽은 자는 말이없다 정도만 읽어야할 것 같네요. ㅋ

Falstaff 2024-09-26 16:43   좋아요 1 | URL
에휴... 독일(어권 소설)의 낭만주의 끝장을 보는 거 같아서 말입죠. ㅋㅋㅋ

coolcat329 2024-09-2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슈니츨러 딱 두 편 읽어봤는데 더는 읽고 싶지 않더라구요. 말씀하신 그 ‘야릇한‘ 느낌이 별로더라구요. 낡은 느낌! 도 동감입니다.

Falstaff 2024-09-26 17:41   좋아요 1 | URL
알라딘 접속에 문제가.... ㅎㅎㅎ
슈니츨러를 독일 소설의 모더니즘으로 보기엔 무리고, 그러면 천생 낭만주의? 자연주의? 하여간 무슨 주의일 텐데요, 우짯든지간에 동시대 다른 나라 작품하고 비하면 (이렇게 말하다가 돌 맞는 지 모르겠지만 말씀입죠) 좀, 아니, 많이 후져요.

moonnight 2024-09-26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이겐을 분명 읽었으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네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ㅎㅎ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기는 하겠지만 이럴거면 뭐하러 읽나 회의감도 드는..ㅠㅠ;;

Falstaff 2024-09-27 05:38   좋아요 1 | URL
아휴, 뭐 그런 책이 어디 한두 권이겠습니까.
역경을 헤치고 끝까지 기억에 남는 책을 명작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ㅎㅎㅎ
 
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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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에 출간한 토니 모리슨의 데뷔작. 토니 모리슨은 첫 작품부터 이랬구나, 놀라웠구나, 훗날 거장이라는 칭호를 받을 작가는 처음부터 발자취가 남다르구나.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대목은 1993년판에 처음 실렸다는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남들의 멸시에 대한 저항이나 그것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배척을 정당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초래되는 훨씬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결과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지독한 자기비하의 피해자가 결국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이 되어, 자신을 거듭거듭 욕보이게 될 적敵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아를 가지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자존감의 종말은 금방,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무관심한 부모와 무시하는 어른, 자체의 언어와 법과 이미지로 절망을 강화하는 세상에 어린 나이라는 취약성이 더해지면 파멸로 이르는 길은 확정적이다.” (p.8)


  따라서 이 책은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으로 이미 빠져든 성인과 자존감이 말라버린 어린 아이에 관한 비극적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피지 않았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 우리, ‘나’와 언니 클로디아는 “금잔화가 자라지 않은 까닭이 페콜라가 자기 아버지의 애를 가져서라고 생각했다.” 책은 금잔화가 피지 않은 1941년으로 시작하고, 왜 금잔화가 피지 않았는지, 그게 어떤 은유의 호박amber 속 단어인지 밝히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리고 나는 작품을 시작하면서 위에서 말한 “난폭한 성향으로 이미 빠져든 성인”이 페콜라의 아버지인 촐리 브리드러브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존감이 말라버린 어린 아이”가 페콜라임은 작가 서문에서 일찌감치 읽었지만.


  오하이오주 로레인. 브로드웨이와 서티피프스 스트리트 교차로 남동쪽 모퉁이에 버려진 가게가 있다. 한때는 피자가게, 전에는 헝가리 제빵사가 운영하는 빵집, 이전엔 부동산 사무실, 그 이전엔 집시들의 작전기지였으며, 더 이전에는 브리드러브 가족이 얼기설기 벽을 만들어 침실에 침대 세 개를 놓고 살았다. 14세 아들 새미와 11세 딸 페콜라가 작은 침대를 하나씩 차지했고, 브리드러브 부부가 더블침대에서 자녀들이 잠든 것으로 알았으나 혹시라도 깨울까 싶어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악착같이 신음을 참으며 부부생활을 했다. 가난한 흑인이라서 그곳에서 살았고 스스로 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눌러 앉았다.

  대대로 가난했고 가난해서 둔해졌다. 가난이 딱히 별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추함은 별났다. 꼼꼼히 뜯어보면 딱히 추한 구석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가족 모두 추하게 보였다. 그들 스스로도 마찬가지로 그러리라, 추하리라, 추하게 보이리라 하는 확신에서 추함은 시작했으므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방탕이었으며, 하찮은 것들이나 약한 것을 향한 폭력뿐이었다.

  이미 짐승 무리에 합류한 것으로 여기고 본인도 그렇게 믿는 아버지 촐리 브리드러브에게 아내란 그가 끔찍이 혐오하면서 동시에 손을 대 상처 입힐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수시로 폭력을 가하며 싸웠고 작품 속에서도 장면이 나오지만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 부부에게 남은 건 오직 하나, 유별나게 들어맞는 속궁합.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없는 법. 촐리의 알코올 의존은 갈수록 심해갔고, 자기가 봐도 더 이상 어떻게 개선이 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고, 그럴 의지도 생기지 않는 인생이 갸륵하여, 어느 날 역시 술에 잔뜩 취한 늙은 개 촐리 브리드러브는 자기 집에 불을 싸지르고 아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렇게 브리드러브 가족은 나앉게 됐다. 내쫓기면 어딘가 갈 곳이 있으나 나앉는다는 건 무엇의 끝, 종말을 뜻한다. 가사도우미를 하는 엄마는 고용인의 집에 머물고, 새미는 다른 가족과 지내게 됐고, 페콜라는 흑인 연대(라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집에서 지내게 했으며, 늙은 개 촐리는 당연히 교도소로 주민등록을 옮긴다.

  이런 집이고, 이런 아버지이고, 이런 엄마에 페콜라. 자존이란 단어는 다른 행성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단어. 늙은 개라고 같은 아프리카계 사람들한테도 멸칭을 당하는 아버지 촐리 브리드러브 씨, 그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자존의 나락 속에서 약한 것들을 향한 폭력성을 키웠을까? 당신이 생각하는 과정, 그것이 맞다.


  촐리 브리드러브의 딸 페콜라. 이 아이도 일찌감치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 경멸의 눈치를 받으며 성장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예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알고 지내며 십 몇 년을 살았는데, 자기가 그런 눈치를 받는 이유는 예쁘게 생기지 못했다, 추하게 생겼다는 것 때문인 것으로 이해했다. 한 장면을 인용한다.


  “채소와 고기와 잡화를 파는 야코보프스키 가게 앞에 선다. (중략) 계산대 앞에 서서 진열된 사탕을 바라본다. 전부 메리 제인으로 사겠다고 결심한다. (중략) 그녀는 신발을 벗고 동전 세 개를 꺼낸다. 백발이 섞인 (백인) 야코보프스키 씨의 머리가 계산대 위로 쑥 올라온다. (중략) 파란 눈. 흐릿하게 내리깐 눈. (중략) 그의 시선이 서서히 그녀를 향한다.” (p.67)

  사이, 백인 야코보프스키의 흑인 차별에 관한 의식을 묘사하고 계속 이어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탕 브랜드) 메리 제인을 가리킨다. 자그마한 검은 손가락 끝으로 진열창을 꾹 누른다. 백인 어른과의 소통을, 가만히 거슬리지 않게 시도해보는 흑인 아이. (중략) 그는 메리 제인 세 묶음을 그녀 쪽으로 획 밀친다. 한 묶음에 노란 직사각형 사탕이 세 개씩 들었다. 그녀가 손을 내민다. 그는 손이 닿는 것이 꺼림칙해 주저한다. 그녀는 진열장 앞의 오른손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여 왼손의 동전을 집어줘야 할지 알지 못한다. 결국 그가 손을 뻗어 그녀 손바닥에 놓인 동전을 집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축축한 손바닥을 긁는다. 밖으로 나오자 설명할 수 없는 수치감이 페콜라에게 밀려든다.” (p.68~69)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초반의 미국. 흑인 꼬마 여자 아이가 건장한 백인 어른 남자의 가게에서 3페니를 내고 메리 제인이라는 사탕을 사는 장면이다. 백인 남자는 못생긴(것처럼 보이는) 흑인 여자 아이의 손바닥에 놓인 동전에 자기 피부를 대기가 싫다. 하지만 가게 주인이니까 당연히 사탕을 팔아야 하니 억지로, 손끝으로라도 동전을 받아 들어야 했겠지. 이게 상당히 중요한 스킨십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민 가 동네 구멍가게를 하던 사람들이 흑인한테 살해당한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거스름 돈을 그들의 손바닥에 흔쾌하게 척, 놓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톡톡 떨어뜨린 이유였다는 건 유명하다. 우리나라 이민자의 경우엔 문화 차이인데 그걸 흑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강했던 반면(백인한테도, 다른 유색인한테도 똑같이 톡톡 떨어트렸으니), 야코보프스키 씨의 경우엔 더러움 혹은 경멸해 마땅한 피부와 접촉하기 싫었던 것이 이유였으니까. 이것도 토니 모리슨이 강조하고 싶었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토니 모리슨의 아버지 조지 워포드 씨가 조지아주 카터스빌(조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고향?)에 살았을 때 KKK단에 의한 흑인 린치를 직접 목격해 백인 증오를 늘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때 사탕 메리 제인의 포장지에는 통통하고 뽀얀 얼굴색을 한 백인 여자 아이가 그려져 있었는데 누구보다 파란 눈동자를 가졌었다. 그리하여 흑백의 피부색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이로부터 경멸의 눈초리를 받고, 따돌림을 당했으며, 불친절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페콜라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결코 그러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못 생겼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며, 만약에 자기가 메리 제인의 눈동자보다 더 파란, 완벽하게 파란 눈을 가지게 되면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하는 구름 위의 공상, 애초 가능하지 않은 상상을 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토니 모리슨, 대단하다. 어제 읽은 저메이카 킨케이드와 완벽하게 반대쪽에 자리한 문장, 또박또박 정확한 단어로 정확한 문장을 군더더기 없이 사용하면서도 저 아프리카 혹은 라틴 아메리카의 주술적, 환상문학적인 분위기로 은유의 호박amber상태를 깨고, 경멸을 당하는 것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짐승의 위치로 전락하고 마는 인간상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게 데뷔작이라니. 연 이틀 동안 거장이라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여성”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올해, 위대하긴 했지만 동시에 끔찍했던 불 같은 여름의 마지막 바지를 흥미롭게 마감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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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4-09-25 0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잘 써요. 그래서 더 무섭고 슬픈 소설이에요. 마지막 챕터랑 표지 (눈동자 속 아이)랑 연결되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런데 남자 어른들 사연 풀이엔 거부감도 일었어요. 잘 써서 더 그랬을지도요.

Falstaff 2024-09-25 07:36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독자들이 주의할 점은, 나쁜 행동을 하는 어른들의 불행했던 과거 때문에 잘못 자체를 변호하면 안 된다는 것이겠습니다. 토니 모리슨, 금잔화.... 거 참.

그레이스 2024-09-25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사시죠?
여기만 들어오면 읽어야할 책들이...!
토니 모리슨도 읽어야 하는데!
ㅋㅋ

Falstaff 2024-09-26 03:5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옙.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갑니다. 일곱 시간 이상 그곳에 처박혀 있으니.... 에휴.

coolcat329 2024-09-25 14: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니 모리슨 읽어야 하는데요. 주요 작품 세 권 사놓기만 하고 방치 상태입니다. 첫 작품부터 대단하다니 이 책도 사야겠습니다. 킨케이드와 정반대의 문장이라니 또 킨케이드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Falstaff 2024-09-26 03:52   좋아요 1 | URL
이크... 읽으신 후의 감상은 제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
킨케이드의 경우엔 작가와 독자가 서로 맞아야 즐길 수 있을 거 같아서 괜히 좀 캥기긴 하네요. ㅎㅎㅎ

coolcat329 2024-09-26 22:54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께 땡투하고 저도 구입했습니다!

바람돌이 2024-09-25 2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토니 모리슨 책은 러브 1권 읽고, 솔로몬의 노래는 사놓고 아직 안 읽었고... 그런데 책은 자꾸 나오고, 폴스타프님은 자꾸 좋은 책 리뷰를 쓰시고.... 저 언제 퇴직할 수 있을까요? ㅎㅎ

Falstaff 2024-09-26 03:55   좋아요 2 | URL
솔로몬 노래도 좋은데요.
퇴직하면 편하고, 조금 더 행복해지고 뭐 그렇기는 합니다. ㅎㅎㅎ 바람돌이 님은 그래도 많이 읽으시잖아요. ^^
 
미스터 포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7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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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날, 해는 평소와 같은 자리, 하늘 높이 한가운데 떠 있었고, 평소처럼 가차 없이 환히, 그림자조차 창백해지도록, 그림자조차 쉴 곳을 찾도록 빛났다. 그날 해는 평소와 같은 자리, 하늘 높이 한가운데 떠 있었으나 포터 씨는 이에 주목하지 않았으니, 그는 해가 평소와 같은 자리, 하늘 높이 한가운데 떠 있는 데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책의 시작 부분을 읽었고, 다시 읽었으며,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반복되는 단어와 묘사, 이것이 독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가장 큰 선택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반복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역자 김희진이 우리말을 능숙하게 사용해 반복하는 단어와 구절에 리듬감을 주었는지, 원래 영어 본문이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읽기엔 이 리듬을 확보한 반복이 꽤나 색달랐고,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책 읽기가 끝날 때까지 기분 좋았다. 그러나 반복,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고, 조금 전에 쓴 구절을 또다시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문장은 만연하고, 혹시 멀미를 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미리 이 점을 밝히고 시작하자.


  미스터 포터는 1922년 1월 7일에 카리브해 앤티가 섬의 세인트존스, 세인트폴 구에서 너새니얼 포터와 엘프리다 로빈슨의 아들로 태어난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이며, 최소한 스물한 명의 자식 가운데 너새니얼 포터가 인정한 열한 명의 아이들 중 막내이자 엘프리다 로빈슨이 낳은 유일한 아이이다. 살아생전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상당한 재산 전부를 다른 섬에 사는 먼 친척에게 남기고 1992년 6월 4일 일흔 살의 나이로 삶을 접었다. 70년 동안 (저메이카 킨케이드 식으로 쓰자면) 너무나 많은 고통이 포터 씨에게 따라붙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이 그를 소진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그는 남기고 갔다. 그가 남긴 고통 가운데 하나가 애니 빅토리아 리처드슨과의 사이에서 만들었지만 일곱 달 동안 웅크리고 있던 애니의 배 속의 아이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 저메이카 킨케이드라는 이름을 갖기 전의 그녀였다.

  너새니얼 포터 씨의 막내아들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꼴난 디옥시리보핵산 말고는 아무것도 받아본 적 없는 로더릭 포터 씨, 화자 ‘나’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의 아버지이며, 자기가 그러했듯이 ‘나’에게 꼴난 디옥시리보핵산 말고는 아무것도, 하다못해 흘깃 쳐다본 눈길을 빼면 한 순간도 주지 않은 ‘나’의 아버지. ‘나’가 어머니 애니 리처드슨의 배 속에서 일곱 달 째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날, 포터 씨는 시리아에서 모로코를 거쳐 앤티가 섬에 정착해 택시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슐 씨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였는데, 3백년 간 체코슬로바키아로 불리던 곳의 수도 프라하에 살다가 이젠 더 이상 그곳 근처에서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나, 부다페스트와 빈, 베를린 그리고 상하이를 거쳐 앤티가 섬에 당도한 졸탄 바이쳉거 박사를 태워 그가 구입한 집까지 태워준 날. 염병을 할 날. 프라하에서 지내던 소년시절에는 살로몬이라 불리기도 했던 바이챙거 박사는 사실 정신과 전문의였으나,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어서 전문지식 없는 치과와, 어깨너머 들은 풍월 말고는 없는 외과와, 지레짐작으로 소화제와 진통제만 처방해주는 내과 등 섬의 모든 환자의 모든 병을 전담 치료해주는 의사로 남은 생을 소비했다. 그의 장례식에 섬 주민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온 앤티가 섬 주민을 그렇게 경멸하고 증오하면서.

  그날, ‘나’를 배 안에 착상시키고 일곱 달이 지난 애니 빅토리아 리처드슨은 바이쳉거 박사를 태워주러 슐 씨의 택시를 운전하기 위하여 포터 씨가 집을 나선 직후, 70세까지 살 예정이고 그동안 내내 읽을 줄 몰랐고 쓰기를 배우지 않았던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 씨의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둔 포터 씨의 저축 전부를 들고 스스로 포터 씨로부터 버림받기로 결정을 했다. 일을 줄 몰랐으며 쓸 줄도 몰랐던 포터 씨는 결코 은행 계좌를 만들지 못해, 슐 씨의 택시를 운전하며 번 돈을 침대 매트리스 속에 모아 비록 새 차는 아닐지언정 미국에서 만든 깔끔한 포드 한 대를 구입해 자기 차로 택시 운전을 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였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1990년 작품 <루시>를 보면,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았던 애니는 포터 씨를 떠나 ‘나’ 일레인을 낳고 목수와 처음으로 결혼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다가 아들만 셋을 연달아 낳은 이후, 앤티가 섬에서 똑똑하고 공부 잘하기로 이름이 높은 ‘나’에 대한 관심을 뚝 끊어버리고 1966년, 열일곱 살의 ‘나’를 뉴욕의 부자집에 말로만 오페어, 사실상 상주 가정부로 보내 버린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배 속에 자신의 아이를 담은 채 자신을 떠난 것에 분노하지 않았듯이, 매트리스 속의 현금까지 가져간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하지 않은 포터 씨는 더운 지방 사람들이 간혹 못 믿을 정도로 너그러운 본을 떠, 그것을 깔끔하게 잊고 처음부터 다시, 차곡차곡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 슐 씨로부터 택시 회사를 인수받아 1992년 6월 4일 숨이 넘어가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묘혈에 물이 들이차 장례식 다음날 땅에 묻힐 때 상당한 재산을 남길 수 있었다. 많고 많은 자기 자식한테 한 푼도 남기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평생 사랑이 뭔지 몰랐던 남자이자 화자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포터 씨. 그 역시 잘 생긴 늙은 어부 너새니얼 포터의 최소한 스물한 번째 자식이었으며, 어린 시절 단 한 번, 어머니 앨프리다 로빈슨의 손에 이끌려 그물을 깁고 있던 생물학적 아버지 너새니얼 포터 씨 앞에 나선 적이 있었을 뿐이다. 앨프리다는 어린 아들과 살다가, 살다가, 고생스럽게 살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아이를, 너새니얼 포터 씨가 정확하게 절반의 디옥시리보핵산을 물려준 아이를 맡기려 했으나 깔끔하게 거절당하고, 그래서 어머니 앨프리다 로빈슨은 어린 로더릭 포터를 부모 없는 아이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셰퍼드 씨의 집에 들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물,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버리고 만다. 포터 씨가 자신을 바라보던 어부 아버지 너새니얼 포터 씨의 텅 빈, 고요하고 공허하기 그지없는 눈길을 기억했는지는 모르겠다. 화자 ‘나’도 포터 씨를 만난 적이 있다. 카리브해의 작은 앤티가 섬에서 마주치지 않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글씨를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포터 씨한테 나온 ‘나’는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았으니 그리하여 포터 씨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의 교장 셰퍼드 씨와 이 학교의 교사인 셰퍼드 여사는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경멸하고 미워했다. 그러니 학교를 다녔어도 글씨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겠지. 대신 셰퍼드 씨는 로더릭에게, 사실 당시에 그는 로더릭이라는 정식 이름이 아니라 그저 ‘드리키’라고 불렸는데 어쨌거나 홀 씨가 쓰던 4인용 중고차를 구입한 이후 드리키를 멍청하다고 하고, 온갖 무척추동물과 비교하고, 엄청나게 골칫거리인 무분별하게 증식하는 식물계 일군과 비교하는 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악함과 잔혹함을 발휘하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 그런 것이지. 완전히 좋은 일이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나쁜 일도 별로 없는 게 인생이지 뭐. 그걸로 한 평생 먹고 살며, 비록 다른 섬에 살던 먼 친척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었지만 그 친척이 일찌감치 죽는 바람에 결국 남의 자식들에게 가게 되는 엄청난 재산을 만들었으니.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나’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은 뉴욕에서 소설가, 수필가, 정원사, 원예작가로 성공했으며, 백인 남성과 결혼해 순서대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생산한 후 지나가버린 시간과 화해한다. 그리하여 카리브해의 섬나라 안티구아의 앤티가 섬에 있는 아버지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 씨의 무덤을 찾는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을 읽으며 이게 정말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믿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아울러 화자 ‘나’와 ‘나’의 아버지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 그의 어머니 앨프리다 로빈슨과 ‘나’의 어머니 애니 빅토리아 리처드슨의 생이 유별나게 드라마틱했다고 여기지도 말자. 20세기의 카리브해에서 살던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있어 글씨를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며, 심지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한살이가 독자들에게 유별난 감상을 주는지도 모른다. 사는 것이 다 그렇듯이, 소설을 쓰는 것 역시 다 그런 법이니까.

  아무쪼록 당신도 이 책의 문장, 아프리카계 사람들 특유의 리듬인 것도 같은 음률을 담은 “단어와 구절의 반복”이 특징적인 문장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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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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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15: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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