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 환상하는 여자들 2
브랜다 로사노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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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시티에서 1981년에 출생한 브렌다 로사노는 사립 가톨릭 학교인 이베로 아메리카나 대학과 미국의 뉴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소설가, 에세이스트,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2024년에 발표한 <나비처럼 꿈꾸다>를 포함해 네 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집 한 권을 출간했다. <마녀들:Brujas>은 2020년 출간 작품. 2014년에 나온 <Cuaderno Ideal: 완벽한 공책>은 <Loop>라는 영어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해 2019년 펜 번역문학상을 받았다.


  <마녀들>은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이 작품을 끌어간다. 홀수 챕터의 화자는 산펠리페에서 사는 치유사이자 샤먼인 펠리시아나, 짝수 챕터의 화자는 조에.

  멕시코의 저 오지 가운데서도 오지인 산펠리페에서 비둘기, 즉 ‘팔로마’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에 칼이 꽂힌 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멕시코시티의 신문사 기자 조에는 평소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살인과 폭력, 강간을 다룬 뉴스라든가 사무실에서 듣는 성차별적 농담 같은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는데, 젠더 폭력에 대한 분노가 솟구쳐 이를 취재, 기사를 쓰기로 결심한다. 더하여 그곳에 사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언어의 치유자”이자 “생존하는 가장 유명한 치유자”인 펠리시아나도 만나고 싶어한다. 산펠리페 산골까지 전세계 예술가, 영화인, 작가, 가수, 음악가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영혼의 구원자. 그리하여 조에는 펠리시아나를 직접 만나게 되며 세 번에 걸친 ‘치유의 의식’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선언한다. 이 이야기는 팔로마 피살에 관한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펠리시아나와 팔로마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펠리시아나는 깊은 산골 산후안데로스라고스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펠리스베르토까지 대를 잇는 남자들은 모두 산맥에 이름이 난 치유자들이었다. 낮에는 성실한 일꾼이었으며 밤에는 유명한 치유자였던 아버지는 그러나 펠리시아나의 동생 프란시스카가 걷기도 전에 갑자기 닥친 폐렴으로 삶을 접었다. 당시 펠리시아나 본인도 자신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사촌 가스파르한테 치유의 능력이 있으며, 평소에 백부인 펠리시아나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방법을 전수받아 본격적인 치유사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다. 가스파르, 문제의 가스파르는 ‘무셰’의 성 정체성을 지녔다. 각주에 따르면 무셰는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이들과,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으며 동성애자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게이와 트랜스젠더를 합한 개념으로 보면 될 듯하다. 이런 가스파르를 할아버지는 ‘새: 동성연애자’를 뜻하는 “파하로”라고 불렀는데, 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파하로’보다는 더 부르기 쉽고 친근하게 비둘기, 즉 “팔로마”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이렇게 가스파르는 성전환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팔로마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또다른 주인공 조에는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여성에 대한 살인과 폭력, 그리고 강간에 치를 떨어 팔로마 살인사건을 취재하려 했다가, 피해자가 남성과 결혼상태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남성의 성염색체와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였으니. 그리하여 팔로마 살해사건은 조에의 초점에서 벗어나고 오직 펠리시아나의 치유와 샤먼으로의 능력,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집중한다. 물론 이런 상황의 변화에 따른 갈등은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

  펠리시아나가 세상에 나왔을 때 어머니는 열세 살, 아버지는 열여섯 살 정도였다. 정확하게 펠리시아나는 몇 살인지, 몇 년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동생 프란시스카는 몇 년 후에 출생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며 언니와 조카들에게 음식을 해주고, 농사와 잠업을 포함해 집안살림 전부를 다스린다. 펠리시아나는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선량한 남자 니카노르와 결혼해 아니세타, 아폴로니아, 아파리시오, 세 아이를 낳아 키운다. 남편 니카노르는 내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왔을 때는 거의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있었고, 술 취하면 늘 폭력을 휘둘렀으며, 그렇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이 무렵 산펠리페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이름난 치유사 가스파르는 이름을 팔로마로 바꾸어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치유자의 일을 그만 두었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치유의 능력이 사라지거나 잃게 되는 건 아니다. 그저 팔로마 본인이 생각하기에 남자와 밤을 보내는 거와 치유의 일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그렇게 세상이 어차피 끝나는 거라면, 자기는 남자들과 밤을 즐기는 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브렌다 로사노의 데뷔작 제목이기도 하다. <전부 아니면 전무: Todo nada>. 

  가스파르 혹은 팔로마가 치유사 일을 그만두자 외눈박이 타데오가 자신은 눈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안 보이는 눈으로 사람들의 미래를 볼 수 있다고 거짓 치유사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펠리시아나가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 미국의 기업가로부터 집을 선물 받을 때 그것이 배가 아파 그녀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 넣을 예정이기도 하다.

  어릴 때 생의 마지막 즈음에 도달한 아버지는 펠리시아나를 데리고 평소에 팔로마가 채집하던 버섯과 약초가 자라는 언덕으로 데려가 보여주면서 이야기했다.

  “펠리시아나, 바로 여기 이곳에 책이 있단다. 우리 것이 아닌 오직 너의 것이란다. 어느 날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야.”

  펠리시아나가 과부가 되자, 어머니는 또 말했다.

  “딸아, 고개를 들어라. 어미처럼 일하거라. 세상 모든 여자처럼 열심히 일하거라. 세상 모든 여자처럼 앞으로 나아가거라. 아래로 내려가지 말아라. 중간도 절대로 안 된다. 나처럼 위를 지키거라. 앞으로 나아 가거라.”

  선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남편 니카노르가 죽은 후에 팔로마, 가스파르는 내게 치유의 길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나를 찾아오렴. 언어와 책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 지 알려줄 테니.”

  팔로마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사람의 미래를 봐주고, 사랑에 관한 조언을 잘 해주었다. 그가 펠리시아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펠리시아나의 “언어”가 치유자라는 것. 그녀가 “책”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 모든 사람은 자신의 책이 있고, 자신의 언어가 있다. 자기 책에 어떤 언어가 쓰여 있어서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위와 성격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펠리시아나는 바로 그 사람의 책갈피에서 문제의 언어를 꺼내는 것으로 치유를 한다. 상대는 수십 년을 살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던, 어쩌면 생존을 위한 필사의 방어기재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못하게 했던 언어를 끄집어 내 아픈 자를 치유한다는 것인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프로이트 식 신경정신 치료 방법과 비슷한 것 같다.


  작가 브렌다 로사노는 놀랄 만한 치유사이자 샤먼 펠리시아나가 육체적 고통은 혈통을 타고 내려온 치유능력으로 약초와 버섯 처방을 포함한 의식으로 해소하고, 정신적 고통은 “언어”와 “책”으로 치유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정신적 고통까지 치유함으로써 펠리시아나는 단순한 치유사의 범주를 넘어선 “샤먼”의 단계에 이른다.

  그러면, 장소가 멕시코의 화산지대가 아니라 거대도시 멕시코시티였다면 누가 치유사이자 샤먼이 될 것인가? 브렌다 로사노는 한 작품에 여러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른 주인공 조에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샤먼의 기질 또는 특별한 “직감”이 있어서, 여성에게는 자기 안에 조금은 마녀 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러나 더 크게, 언어와 책의 주인, 즉 문학이라는 것이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정신적)치유는 언어를 통해 이룬다고 로사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주어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정말 문학이라는 장르가 현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을까? 새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다른 주인공 조에의 이야기는? 직접 읽으시기 바라며 이쯤에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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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16 0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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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이문구,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화요일. 클로디 윈징게르, <내 식탁 위의 개>
목요일. 제이슨 르쿨락, <히든 픽처스>
금요일. 장 폴 사르트르, <더러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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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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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르노네의 <끈>을 읽고 한 달 만에 다시 스타르노네를 읽었다. <끈>을 읽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다. <끈>이 앞부분에서 내 취향 상 시새푸새 했다가 뒤로 갈수록 매력이 폭발하는 바람에, 어 이거 봐라 싶은 묘한 당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끈>과 마찬가지로 <트릭>도 가족 간 다양하게 상처를 주는 방법을 소개한다. 일찍이 캐빈 윌슨은 <신경 좀 꺼줄래>에서 부모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애들을 망치는 인간이라고 설파한 적 있고, 파나마에서 태어난 바람둥이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도 그의 작품집 《모든 행복한 가족들》에서 참으로 다양하게 서로 상처를 주는 가족들의 모습을 조망한 적 있다. 유독 우리나라 작품 속에서 일상적으로 묘사하는 가정폭력 말고도 그렇다는 거다. <끈>의 끈은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연인의 품으로 떠난 아버지와 소원한 아이들이 공유하는 신발 끈 묶는 유별난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만, <트릭>에서는 ‘가족’이란 끈,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하고, 대부분 그게 또 어쩔 수 없게 유지하게 되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적 유대,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은근하고 친절한 폭력에 대해 쓰고 있다. 하여간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이름을 들어본 지 겨우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이 나폴리 작가를 당분간은 주목할 듯하다. 세상에서 제일 단순해 보이는 가족이라는, 참으로 복잡한 인간관계, 이것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사건을 이이처럼 맛나게 쓰는 작가도 흔하지 않다.


  화자 ‘나’의 이름은 다니엘레 말라리코. 일흔다섯 살의 화가이다. 삽화가로 더 이름이 났다. 사내 셋이 모여 있을 때 그들 주변에 잭 나이프를 하나 던져주면 삼십 분 안에 신기하게도 세 명이 다 죽고 마는 도시, 나폴리에서 낳고 자랐다 (표절이다. 책에는 안 나온다. 로사노의 작품 <마녀들>에 나오는 장면이다. 잭나이프 말고 마체테가 오리지널이다). 증조부 때부터 살던 집을 물려 받았다. 노름꾼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일해서 받은 돈을 ‘나’가 기억하기에 거의 매달 몇 분 안에 몽땅 잃고 ‘독특한’ 방법으로 가족에게 ‘독특한’ 분위기를 전파했다. 어릴 때부터 거의 천재 소리를 듣던 ‘나’는 사춘기를 맞이하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것”의 목록이 차례로 지워지기 시작하다가 잘 하는 것이 거의 몽땅 사라질 때쯤 독립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제 마흔 살이 된 딸 베타는 여전히 나폴리에서 사는 것에 만족해, 베타가 결혼하기도 전에 ‘나’가 물려받은 부모의 집에서 애인 사베리오와 함께 살게 했고, 명의도 옮겨주어 이제는 딸의 집이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부모의 집으로 가는 게 마땅하지 않다.

   ‘나’는 몸이 좋지 않다. 일흔다섯의 나이. 거기다 순환계에 문제가 생겨 몇 주 전에 심각하진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수술을 받았다. 혈액 관련 수치가 낮아 뇌에 피가 공급이 덜 되는지 병실의 벽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고 작은 사람들의 머리가 스멀스멀 솟아나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이건 작품의 중간 뒤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와 다분히 중의적이기도 하다. 이때 의사들이 즉각 수혈을 해주어 증상이 없어졌고 퇴원도 할 수 있었다. 입원, 수술, 회복, 퇴원 기간에 나폴리에서 사는 딸과 사위는 한 번도 병원을 찾은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거다. 수술했다고 꼭 자식이 와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그런 거 바라지는 않는다. 오면 좋기는, 위안이 되기는 하겠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다.

  딸 베타한테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수술을 받고 몇 주 후에. 11월 20일에 남편과 칼리아리에서 열리는 수학학회에 참석하는 동안 나폴리 자기 집에 와서 아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나는 밀라노로 이사와 산 지 20년이 넘은 홀아비다. 이제는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어색하다. 게다가 불과 몇 주 전에 심각하기까지 하지는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수술을 받은 노인이다. 더구나 부모한테 물려받은 집은 지긋지긋해서 그 공간으로 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딸 베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베타는 대들겠지. 꽃노래도 삼세번인데 그만 하라고. 그래서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 지금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들어갈 삽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가 꼭 가야 하겠니?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출장이예요, 아빠. 저는 모두 발언을 맡았고 그이는 이튿날 오후에 발표해야 해요. 그 정도 소설 삽화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아직 시간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11월 20일까지 작업을 못 끝내시면 여기 와서 작업을 계속 하세요. 마리오는 어른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니까요.

  손자 마리오는 네 살이다. 네 살에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아이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딸 베타는 ‘나’를 원망했다. 내가 아버지로서도, 할아버지로서도 무심했다고. ‘나’는 졌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 터이니까. 11월 20일은 한 달 남았다. 1주일 전에 도착하겠다고 말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다시 출혈을 했고, 의사가 크게 문제는 없어도 한 주일 후에 다시 보자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11월 18일, 출발 하루 전에 열차를 올랐다. 나폴리 출생의 폭력적인 유색인과 같은 객실이었다. 깜빡하고 손자 마이로의 선물 사는 걸 잊은 채로.


  누가 딸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성격은 말라 비틀어진 나무껍질처럼 까칠하지만 조금만 벗겨내면 화사하고 보드라운 속마음을 만날 수 있다고. 어디까지나 다분히 립 서비스 측면의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오랜 세월 베타는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거대한 세포, 세월 속에 닳고 닳은 세포막이 베타였다. 이에 비해 사위 사베리오 카주리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격으로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스타일이다. 훤칠하고 우아한 베타와는 어울리지도 않고, ‘나’가 객관적으로 보기에, 물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도무지 격이 다른 인물인데 어떻게 부부가 됐는지 아쉽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베리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베타가 말하기를,

  “아빠! 전 정말로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베타가 응접실에서 잠시 사라진 순간, 사베리오도 장인에게 하소연을 한다.

  “마음 편한 날이 없고 행복하지 않아요. 제 인생은 쓰디쓴 독과 다름이 없다고요.”

  이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네 살짜리 손자 마리오. 아직까지는 순하고, 당연히 착하고 선하다. 아마도 딸 부부에게 집을 통째로 거저 준 아버지한테 넓고 편한 방을 주지 않을까, 김치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나’에게 베타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손자 마리오와 같은 방을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게 어색한 ‘나’에게.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남의 집인 것을. ‘나’의 가방을 들고 베타가 사라지자 이게 웬 일, 마리오는 오히려 안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가족이란 지옥 속에는 아이들도 있는 법이지.

  ‘나’가 척 보니까, 딸 내외가 학회에 참석하는 진짜 이유는 아이가 없는 데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 놓고 싸우기 위해서인 것 같다. 2년을 연애하고 12년간 이 집에서 동거한 다음에 결혼하고 이제 결혼 5년차. 사위는 나한테 하소연한다. 베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베타네 학교 수학과 학과장으로 부임했는데, 베타가 그이한테 푹 빠져버렸단다. 뛰어난 수학자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의 실세라니까 얼핏 보기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베타는 ‘나’의 딸. ‘나’는 당연히 베타 역성을 들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베타가 주장하는 건, 사베리오가 있지도 않은 일을 오해하고 있어서 부부와 마리오, 그리고 집안 전체의 균형을 망가뜨리고 있단다. 아, 여자들은 왜 그럴까? ‘나’가 알고 있는 단 두 명의 여자. 베타와 죽은 아내 아다. 아다도 몇 번 나를 배신했다. (‘나’말고 다른)육체에 관심이 있어서 일 수도 있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눈 먼 몸부림일 수도 있었겠지. 소모적인 일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못 보는 척 외면하는 무례한 유령이 존재하는 법이기도 하고.

  이런 부모에 대한 마리오의 평가. 아빠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서 하다못해 자기가 항상 도와주어야 하고, 엄마는 신경질쟁이로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뭐든 혼자서 빨리 끝내버리는 독불장군이자 집안의 대장이다. 그러고 보니, ‘나’가 집에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가 그동안 수 없이 여러 번 선물한 크고 작은 ‘나’의 그림은 아무 데도 걸려 있지 않다. 에이, 상관없지 뭐. 그러나 사실은 상관 있다. 그까짓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그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사는 거다.


  오늘은 변죽만 올리기로 했다. 이제 부부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칼리아리로 떠나고, 집에는 일흔다섯 살 먹고, 몇 주 전에 수술을 받아 쇠약하며, 기한 내에 헨리 제임스의 소설 <밝은 모퉁이 집>의 삽화를 마쳐야 한다. 네 살짜리 마리오는 어린이 집에 갔다 오면 할아버지 말라리코 화백에게 지하철 타러 가자고 졸라대기도 하고, 딸 베타가 엄금한 바 있는 TV 만화영화를 거의 최대치 음역대로 보면서 네 살 먹은 아이답게 끊임없이 같이 놀아줄 것을 요구한다. 사위 사베리노는 집을 오직 하나의 용도인 편의성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수리를 해, 우리나라처럼 알루미늄 새시를 설치하지 않은 발코니에 나갔다가 문이라도 닫히면 누군가가 열어주기 전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방범용이다. 응접실에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설치물이 허벅지와 옆구리를 갑자기 부딪히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소파도 잘못된 장소에 놓인 것 같다.

  이렇게 노인과 아이, 둘 만의 장소와 시간. 이들은 생각보다 잘 지내기도 하고, 생각만큼 재미있는 놀이를 하기도 하고, 생각한 것보다 안 좋은 사건을 만들기도 하고, 당연히 진짜로 생명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시간을 만들기도 한다. 노인과 아이 사이도 마찬가지로 늘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옥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 있는 관계. 그게 바로 가족이다.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하고, 어쩔 수 없게 유지하게 되는 게마인샤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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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1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족으로 얽혀서 오래 살다보면 참 볼꼴 안 볼꼴 다 보고 살게 마련이죠.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고.
그래도 없으면 안 되는 게 가족이고 보면 참 뭐라 형언할 길이...ㅎㅎ
이 책 한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4-08-15 13:42   좋아요 1 | URL
정말 어려운 게 가족.... 인생입니다. 흑흑...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맹인 가수 이용복이 노래한 번안가요 가사였습니다. ^^

Blue 2024-08-15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끈을 재미있게 읽고 이 책을 바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는데 조만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4-08-15 13:42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 2021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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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 아홉 편을 실은 책. 그리스 비극을 거칠게 구분하면, ① 오이디푸스 왕, ② 트로이 전쟁, 그리고③ 그리스 신화를 그렸거나, 위의 세 가지를 주축으로 하되 내용을 각색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끈 것도 기존의 트로이 전쟁과 다르게 해석한 두 작품이었다. 제일 앞에 실은 <헬레네>와 두번째 이야기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다섯 번째 작품 <오레스테스>은 각색은 되어 있지만 원래 이야기하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는 20세기에 들어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가 한 번 더 원래 이야기와 많이 상충하는 허구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대본가 휴고 폰 호프만스탈이 <이집트의 헬레나>를 써서 이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오페라로 만들기도 했다. 나는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를 이번에 처음 읽어봤다. 반면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통해 헬레네가 이집트로 간 내역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에우리피데스를 읽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작품 간의 내용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어떤 버전이 진짜인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원래 이야기로 말하자면, 십년 간이나 그리스 군대를 애먹이던 트로이 성을 함락한 침략자들은 불쌍한 늙은 왕 프리아모스를 필두로 그의 아들들을 몽땅 도륙하고, 늙은 왕비 헤카베를 포함해 죽은 영웅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까지 몽땅 전리품이란 명목의 노예 또는 첩으로 끌고 갔다. 특히 헥토르의 어린 아들들까지 남자들은 전부, 혹시라도 훗날을 도모하지 않을까 싶어 높은 성벽 위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향해 패대기 쳐버렸고.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우스로 출연하는 영화 <트로이>에선 파리스가 아이네이스와 함께 트로이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건만, 천만의 말씀, 파리스 역시 점령군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이 모든 전쟁의 막을 열게 한 헬레네도 옛 남편, 아니, 호적에 아직 남편으로 이름이 올라있는 메넬라오스한테 잡혀 스파르타로 돌아가, 일반 상식 관점으로 보면 웃기게도, 기운 센 천하장사 메넬라오스와 사이좋게 다시 한번 깨를 볶는다. 자기 형 아가멤논은 늘 정확한 예언을 하고도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불행한 예언자 카산드라(알렉산드라)를 데리고 귀환했지만 첫날 발가벗고 목욕탕 욕조에 누웠다가 부정한 미모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한테 칼 맞아 죽는다. 아가멤논이 아내한테 죽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제일 좋아했던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출전 당시 희생 제단에 올렸던 일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이 두 가지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버린다. 왜? 늘 같은 이야기만 하면 청자는 뻔하게 알고 있는 걸 한 번 더 듣는 일밖에 안 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사람이다. 원작의 빈 틈을 자기가 어떻게 각색을 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그게 원작의 비의를 콕 집어냈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파리스가 헬레네를 꼬드겨서 배에 싣고 트로이로 향할 때, 도둑과 나그네와 상인의 신인 헤르메스가 진짜 헬레네를 아무도 모르게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이집트 프로테우스 왕의 궁전으로 옮겨 그곳에서 남편 메넬라오스를 기다리게 해준다. 파리스가 배에 태워 프뤼기아 땅으로 데려간 것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아니라 헤르메스가 마법을 써서 만든 헬레네의 환영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헬라스와 프뤼기아 사람들은 허수아비 헬레네를 위해 수만명의 목숨을 걸고 죽고 죽였던 거다.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죽이고 헬레네의 환영을 되찾아 배에 싣고 귀국하다가 마치 오뒷세이아처럼 길을 잃고 무려 7년 동안 바다 위를 헤매다가, 결정적인 태풍을 만나 거지꼴을 한 채 이집트 해변에 도착했으니, 이때 배에 타고 있던 사람으로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허상), 텔라몬의 아들이자 살라미스 섬의 왕 테우크로스 그리고 몇 명 남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전쟁을 10년 했고, 방랑도 7년을 했으니 도합 17년을 기다린 헬레네. 17년 동안 이집트에서는 정의롭고 신망 높은 프로테우스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테오클뤼메노스가 왕위를 이었다. 어진 임금 사후는 대개 욕정에 눈이 먼 차기 임금이 자리를 잇는 것이 서양 비극의 전통이다. 테오클뤼메노스는 왕자 시절에 세젤예 헬레네에게 청혼을 했다가 아버지한테 얻어 터진 적이 있었는데 이제 왕이 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 이를 견디다 못한 헬레네는 연극 목적상 궁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선왕의 무덤에 지푸라기를 깔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왕의 청혼을 생까고 있었다. 아무리 왕이라도 지 아버지 무덤에 와서 아버지 말을 거역한 채 헬레네를 억지로 취할 수는 없는 법이라서. 이때 메넬라오스의 배가 이집트 해변에 도착하고 흔히 쓰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거지꼴을 한 메넬라오스가 등장하니, 연극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주어야 마땅하게, 이집트 땅을 밟자마자 헬레네를 발견, 무려 17년 만에 부부 상봉하는 장면. 눈물이 앞을 가리겠지? 천만의 말씀. 메넬라오스는 분명히 트로이에서 헬레네를 배에 싣고 왔는데 여기 또 헬레네가 있거든. 어리둥절. 갑분싸. 눈 앞에 아내가 보이자마자 헬레네의 환영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걸 조금 후에 알게 된다. 웃기지? 아무리 기원전 5세기 작품이라고 해도 너무 황당하다. 이후로 꾀를 내서 이집트를 떠나는 것만 남았다. 굳이 스토리를 이야기할 필요 없을 듯.


  그러면 세페리스-호프만스탈로 이어지는 <이집트의 헬레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세페리스의 헬레네는 잘 몰라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세페리스는 호프만스탈이 아니라 오히려 에우리피데스와 더 가깝다. 이래서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거다. 서울 안 가본 놈이 가본 놈하고 서울 얘기하다 싸우면 안 가 본 놈이 이긴다잖는가 말이지. 에우리피데스-세페리스 vs. 호프만슈탈. 이런 구도가 옳다.

  호프만스탈의 이야기에서는 메넬라오스가 파리스를 죽이고 실물 세젤예 헬레네를 배에 싣고 출항한다. 귀국하는 도중에 제우스의 동생이자 바다의 큰 신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영웅 테세우스를 낳은 아이트라가 매넬라오스의 속셈을 눈치챈다. 스파르타로 돌아가 같이 사는 대신 헬레네를 죽여버릴 생각이란 것을. 여신 아이트라는 헬레네를 가여이 여겨 폭풍을 일으키고, 배가 난파하여 부부는 이집트 땅에 도착한다. 아이트라가 이들 앞에 나타나 시치미 뚝 떼고 두 팔을 벌린 채, 웰컴 투 이집트, 환영을 하지만 메넬라오스는 여전히 파리스를 처단한 바로 그 칼로 헬레네의 어여쁜 목을 뎅겅 잘라버릴 생각을 도무지 멈추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러다가 정말로 칼을 쳐들려 하자 여신은 요정들을 불러 칼부림을 멈추게 하고, 요정들은 마법을 써서 메넬라오스로 하여금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며 파리스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어서 헬레네에게도 물약을 먹여 과거를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든다.

  요정들이 퇴장하자 제 정신으로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드디어 자기가 헬레네와 파리스 둘 다 죽였다고 믿는데, 다시 아이트라 여신이 와서 헬레네한테 먹였던 물약을 마시게 해 과거를 몽땅 잊게 만든다. 메넬라오스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헬레네를 파리스로부터 구출해냈다고 믿고, 잠에서 깬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와 다시 결합한다. 이들은 아이트라에게 자신들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2막에 들어서 갑자기 난데없이 사막의 베두인이 나타나 세젤예 헬레네에게 퐁당 반해버려 사랑에 빠지고 이를 파리스로 착각한 메넬라오스가 그를 뎅거덩 두 쪽을 내버린 후 진정으로 헬레네를 사랑하게 되어 우짜구저짜구 막 이런 내용이다.

  결론은, 트로이 전쟁, <일리아드>가 괜히 고전 명작이 아니란 말씀. 비록 <일리아드>에는 이런 후일담이 나오지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하게 된 이야기는, 많고 많은 것들 가운데 제일 근사하고 그럴듯한 것으로 결정되는 거 아닐까 싶다. 헬레네 이야기도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 에우리피데스가 됐건, 호프만스탈이 됐건 간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보편적이고 재미있었다.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것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면이 꽉 차서 아무래도 당신이 직접 읽어보셔야겠는데, 그것도 이하동문,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가 제일 그럴듯하고 재미있다는 것만 덧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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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8-13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피게네이아와 파이드라가 제일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아마도 라신으로 다시 읽어서 더 그런듯요
연말에 다시 읽을 계획입니다

Falstaff 2024-08-14 07:16   좋아요 1 | URL
저도 파이드라... 영화도 재미있잖아요.
연말에 또 읽으실 거라고요? 아휴, 진짜 찐팬이시군요! ㅎㅎ
 
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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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가 서른여덟 살에 발표한 작품. “필립 로스의 통렬한 정치 풍자극”이라는 시원한 광고글을 달았다. <포트노이의 불평> 이후 2년 만인 1971년.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낙태를 인간생명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연설을 한다. 낙태 반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구별 꼴 보수들의 전매특허 레퍼토리. TV를 통해서…는 아니고 하여튼 닉슨의 이 연설을 들었든지 읽은 로스는, 이 더러운 공화당원, 이 말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올리브 시리즈”의 한 작품에서 여사님의 두번째 남편(이 될 인간)을 본 소감으로 올리브가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인데, 하여튼 공화당 꼴 보수의 수장이 헛소리 한 번 더 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고, 때마침 베트남 미라이 지역에서 있었던 22명의 민간인 학살 주인공, 미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에 대한 감형조치를 걸고 넘어지기로 작정을 했다. 로스가 원래 글발이 워낙 막강해서 불과 몇 달 만에 휘리릭 일필휘지를 날린 것이 바로 <우리 패거리>. 딱 이 두 가지만 가지고는 글감이 차지 않아 1970년에 발생했던 두 가지 사건을 더 했다. 하나는 미국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진지를 구축한 베트콩의 공격하기 위한 캄보디아 폭격, 다른 하나는 “5∙4학살”이라고도 부르는 5월 4일의 켄트 주립대학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네 명이 사망하고 아홉 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첫 장면을 로스는 누가 봐도 리처드 닉슨임이 틀림없는 1971년 현재의 대통령 트릭 E. 딕슨, 애칭 트리키와 국민의 대화를 서재극, 레제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었다.

  트리키는 단연코 낙태를 반대한다. 왈,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포함해서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개인적으로” 믿는다고 공표한다. 이거 참. 3일 전에 읽은 울리츠카야의 <쿠코츠키의 경우>를 보면, 소비에트 연방에선 쿠코츠키 박사가 1940년대에 낙태의 자유를 허용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여성이 불법 낙태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고 심각한 사회적 손실도 초래할 것임을 주장하기 시작해 50년대 중반이든가, 법으로 허용했건만, 소위 “자유진영”의 지도자인 1971년의 미국 대통령이 거 참 안타깝기 한량이 없네. 새삼스레 책을 다시 뒤져보며 정확하게 어떻게 썼는지 확인해볼 정성은 없지만, 트리키 딕슨은 애당초 낙태할 일을 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말하기도 해서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때 매스컴은 국민들의 관심을, 1968년에 있었던 베트남 미아이 민간인 학살 당시 윌리엄 캘리 중위가 스물두 명의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일 때, 피 학살자 가운데 임신중인 여성이 있었다면, 배 속의 태아 인권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시킨다. 국민이나 트리키의 인식 속에선 “민간인 학살” 개념은 다음으로 하고 임신한 여성의 학살도 아니고, 오직 태아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 꼴. 어떻게 대통령이 피 학살자 가운데 임신한 여성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은 안 하지. 그렇게 보고받지 않았을 뿐. 캘리 중위가 여성이 임신을 한 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배가 부른 여성이 있었다고 해도 전투의 와중에 임신을 해서 배가 나왔는지, 잘 먹어 살이 쪄서 배가 나왔는지 어떻게 아느냐,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자꾸 산으로 가버린다.

  이러다가 결정적으로 한 방 꽝. 197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을 것이고, 이제 다음 대선의 대세는 민주당으로 기울고 있어서, 그냥 내버려두면 대선필패가 분명하니, 공화당 득표를 늘이기 위해, 지금 트리키가 태아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까지 들먹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긴 한데, 공화당 득표율 때문이 아니라, 흑인의 힘, 여성의 힘을 주장하는 민주당 입장에서도 사회적 약자가 틀림없는 태아의 힘은 어떻게 하느냐, 세포에 불과해도 생명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며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다. 1971년부터 미국 헌법은 기존의 21세 이상에게 주어졌던 투표권을 18세로 하향하는 바람에 민주당 지지층이 늘어나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공화당의 전략이라는 빈틈없는 슈르드Shrewd 기자의 분석이 그랬다. 하여튼 딕슨은 태아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태아들을 위해 성취한 모든 일이 향후 언젠가 종족이나 신념이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태아가 되는 세상에 기여하기만 바란다면서, 자기한테 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아마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걸?


  그러다가 갑자기 장면은 1970년의 켄트 주립대학 학살로 전환한다.

  베트남 참전 상이군인들이 의사당 앞에서 훈장을 반납하며 반전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켄트 주립대학 대신 참전 상이군인과 보이스카우트, 이글스카우트들이 중심이 되어 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걸로 조금 바꾸었다. 대통령은 열을 잔뜩 받았는데, 그건 미국의 보이스카우트가 TV 카메라를 향해 트릭 E. 딕슨이 섹스를 좋아한다고 고함을 쳤기 때문이다. 아내가 TV를 보다가 이 말을 믿게 되면 어쩌지? 내 자식들이 듣는다면? 유권자들은! 여태 내가 주장한 태아의 권리장전은 “태아가 태어나는 절차에 찬성한다는 프리마 파키에가 아니야!” 즉 자신은 한 번도 섹스를 찬양하거나 좋아한다는 어떠한 시그널을 보낸 적이 없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래서 억울해 미치는 트리키. 시위자들의 피켓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색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라 / 거기가 어울린다 / 음경에 권력을? 절대 안 돼! / 억압 – 사랑하거나 그대로 두거나!”

  이걸 어떻게 한다? 대학 4년 동안 미식축구부의 후보선수 생활을 했던 대통령은 실제로 경기에 뛰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십 여 년 전에 입었던 유니폼이 여전히 흠 하나 없이 깨끗한데, 지하 벙커에 미식축구 유니폼에 헬멧, 국부보호대까지 착용하고 그의 조언자들을 불러 심야 토론을 벌인다. 이 철없는 데모군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치 코치, 마음 코치, 법률 코치, 군사 코치 등으로 구성된 브레인 캐비닛은 결국 실탄 조준 발사를 결정한다. 독자는 이미 알았다. 켄트 주립대학에서 총 맞아 네 명 죽고, 아홉 명 다쳤으니까, 여기서도 그래야 할 걸? 맞다, 그렇게 됐다.

  그리하여 딕슨은 대 국민 연설을 하건만 겨우 보이스카우트 네 명? 그래서 뭐 어쨌는데. 사회질서 붕괴에 따른 크나큰 손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여? 그잖여?

  지금 이 단락을 길게 쓰지 않았다. 이 장면은 필립 로스가 <미국의 목가>를 비롯해 앞으로 몇 번 더 작품에서 상세하게 묘사를 할 사건이기도 하고, 점점 뒷부분으로 가고 있어서 책 읽어볼 분에게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딕슨 암살. 마틴 루서 킹 목사나 존 F. 카리스마 전 대통령처럼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깔끔한 모습이 아니라, 홀딱 벗은 상태에서 물이 가득 찬 주머니에 몸을 잔뜩 오그린 태아 자세로. 이렇게 다시 처음에 이야기했던 태아의 권리, 태아 생명의 존엄성으로 트리키 자신이 회귀하는 것.

  여기에서 나는 로스에게 한 번 더 실망하고 만다. 엄연히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대통령을 희화화 한 거 가지고 시비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개인”을 아무리 작품 속이라 해도 이리 가볍게 살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작품을 쓰라고. 맞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나는 마땅하지 않았다. 이 전에도 나는 이미 과한 폭소를 터뜨렸다. 풍자도 풍자 나름. 이 책을 관통하는 로스 표 풍자와 웃음은 처음부터 폭력적이다. 나는 이 작품보다는 덜 경박하게 웃고 싶다. 같은 진보 작가이지만 필립 로스만큼은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미국인, 커트 보니것 정도의 것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로스의 희극적 작품 전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딱 <우리 패거리>만 가지고 말하자면, 보니것에 비해 너무 통속적이다.

  통렬한 정치 풍자극?

  내가 읽기엔 폭력적이고 경박한 소품이다. 그러니 1971년 작품을 이제야 번역한 거겠지. 여담이지만 로스의 바람과 달리 다음 선거에도 딕슨이 당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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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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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해럴드 배너가 소설 ‘채권‘은 왜 썼을까? 2.5류 소설가가 한 탕 해보려고?
혹시 투기의 귀재 앤드루 베벨이 자신의 신화를 지어내려고? 이렇게 생각해야 지루하게 읽은 게 위안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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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10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도 별 네 개네요? 뒤로 가면 좀 재미가 있는거죠?

Falstaff 2024-08-10 12:47   좋아요 0 | URL
재미라기보다 작가의 속셈을 조금 알아차린 기분이 든다고 할까 뭐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