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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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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가 서른여덟 살에 발표한 작품. “필립 로스의 통렬한 정치 풍자극”이라는 시원한 광고글을 달았다. <포트노이의 불평> 이후 2년 만인 1971년.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낙태를 인간생명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연설을 한다. 낙태 반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구별 꼴 보수들의 전매특허 레퍼토리. TV를 통해서…는 아니고 하여튼 닉슨의 이 연설을 들었든지 읽은 로스는, 이 더러운 공화당원, 이 말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올리브 시리즈”의 한 작품에서 여사님의 두번째 남편(이 될 인간)을 본 소감으로 올리브가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인데, 하여튼 공화당 꼴 보수의 수장이 헛소리 한 번 더 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고, 때마침 베트남 미라이 지역에서 있었던 22명의 민간인 학살 주인공, 미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에 대한 감형조치를 걸고 넘어지기로 작정을 했다. 로스가 원래 글발이 워낙 막강해서 불과 몇 달 만에 휘리릭 일필휘지를 날린 것이 바로 <우리 패거리>. 딱 이 두 가지만 가지고는 글감이 차지 않아 1970년에 발생했던 두 가지 사건을 더 했다. 하나는 미국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진지를 구축한 베트콩의 공격하기 위한 캄보디아 폭격, 다른 하나는 “5∙4학살”이라고도 부르는 5월 4일의 켄트 주립대학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네 명이 사망하고 아홉 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첫 장면을 로스는 누가 봐도 리처드 닉슨임이 틀림없는 1971년 현재의 대통령 트릭 E. 딕슨, 애칭 트리키와 국민의 대화를 서재극, 레제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었다.
트리키는 단연코 낙태를 반대한다. 왈,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포함해서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개인적으로” 믿는다고 공표한다. 이거 참. 3일 전에 읽은 울리츠카야의 <쿠코츠키의 경우>를 보면, 소비에트 연방에선 쿠코츠키 박사가 1940년대에 낙태의 자유를 허용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여성이 불법 낙태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고 심각한 사회적 손실도 초래할 것임을 주장하기 시작해 50년대 중반이든가, 법으로 허용했건만, 소위 “자유진영”의 지도자인 1971년의 미국 대통령이 거 참 안타깝기 한량이 없네. 새삼스레 책을 다시 뒤져보며 정확하게 어떻게 썼는지 확인해볼 정성은 없지만, 트리키 딕슨은 애당초 낙태할 일을 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말하기도 해서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때 매스컴은 국민들의 관심을, 1968년에 있었던 베트남 미아이 민간인 학살 당시 윌리엄 캘리 중위가 스물두 명의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일 때, 피 학살자 가운데 임신중인 여성이 있었다면, 배 속의 태아 인권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시킨다. 국민이나 트리키의 인식 속에선 “민간인 학살” 개념은 다음으로 하고 임신한 여성의 학살도 아니고, 오직 태아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 꼴. 어떻게 대통령이 피 학살자 가운데 임신한 여성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은 안 하지. 그렇게 보고받지 않았을 뿐. 캘리 중위가 여성이 임신을 한 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배가 부른 여성이 있었다고 해도 전투의 와중에 임신을 해서 배가 나왔는지, 잘 먹어 살이 쪄서 배가 나왔는지 어떻게 아느냐,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자꾸 산으로 가버린다.
이러다가 결정적으로 한 방 꽝. 197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을 것이고, 이제 다음 대선의 대세는 민주당으로 기울고 있어서, 그냥 내버려두면 대선필패가 분명하니, 공화당 득표를 늘이기 위해, 지금 트리키가 태아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까지 들먹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긴 한데, 공화당 득표율 때문이 아니라, 흑인의 힘, 여성의 힘을 주장하는 민주당 입장에서도 사회적 약자가 틀림없는 태아의 힘은 어떻게 하느냐, 세포에 불과해도 생명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며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다. 1971년부터 미국 헌법은 기존의 21세 이상에게 주어졌던 투표권을 18세로 하향하는 바람에 민주당 지지층이 늘어나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공화당의 전략이라는 빈틈없는 슈르드Shrewd 기자의 분석이 그랬다. 하여튼 딕슨은 태아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태아들을 위해 성취한 모든 일이 향후 언젠가 종족이나 신념이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태아가 되는 세상에 기여하기만 바란다면서, 자기한테 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아마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걸?
그러다가 갑자기 장면은 1970년의 켄트 주립대학 학살로 전환한다.
베트남 참전 상이군인들이 의사당 앞에서 훈장을 반납하며 반전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켄트 주립대학 대신 참전 상이군인과 보이스카우트, 이글스카우트들이 중심이 되어 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걸로 조금 바꾸었다. 대통령은 열을 잔뜩 받았는데, 그건 미국의 보이스카우트가 TV 카메라를 향해 트릭 E. 딕슨이 섹스를 좋아한다고 고함을 쳤기 때문이다. 아내가 TV를 보다가 이 말을 믿게 되면 어쩌지? 내 자식들이 듣는다면? 유권자들은! 여태 내가 주장한 태아의 권리장전은 “태아가 태어나는 절차에 찬성한다는 프리마 파키에가 아니야!” 즉 자신은 한 번도 섹스를 찬양하거나 좋아한다는 어떠한 시그널을 보낸 적이 없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래서 억울해 미치는 트리키. 시위자들의 피켓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색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라 / 거기가 어울린다 / 음경에 권력을? 절대 안 돼! / 억압 – 사랑하거나 그대로 두거나!”
이걸 어떻게 한다? 대학 4년 동안 미식축구부의 후보선수 생활을 했던 대통령은 실제로 경기에 뛰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십 여 년 전에 입었던 유니폼이 여전히 흠 하나 없이 깨끗한데, 지하 벙커에 미식축구 유니폼에 헬멧, 국부보호대까지 착용하고 그의 조언자들을 불러 심야 토론을 벌인다. 이 철없는 데모군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치 코치, 마음 코치, 법률 코치, 군사 코치 등으로 구성된 브레인 캐비닛은 결국 실탄 조준 발사를 결정한다. 독자는 이미 알았다. 켄트 주립대학에서 총 맞아 네 명 죽고, 아홉 명 다쳤으니까, 여기서도 그래야 할 걸? 맞다, 그렇게 됐다.
그리하여 딕슨은 대 국민 연설을 하건만 겨우 보이스카우트 네 명? 그래서 뭐 어쨌는데. 사회질서 붕괴에 따른 크나큰 손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여? 그잖여?
지금 이 단락을 길게 쓰지 않았다. 이 장면은 필립 로스가 <미국의 목가>를 비롯해 앞으로 몇 번 더 작품에서 상세하게 묘사를 할 사건이기도 하고, 점점 뒷부분으로 가고 있어서 책 읽어볼 분에게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딕슨 암살. 마틴 루서 킹 목사나 존 F. 카리스마 전 대통령처럼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깔끔한 모습이 아니라, 홀딱 벗은 상태에서 물이 가득 찬 주머니에 몸을 잔뜩 오그린 태아 자세로. 이렇게 다시 처음에 이야기했던 태아의 권리, 태아 생명의 존엄성으로 트리키 자신이 회귀하는 것.
여기에서 나는 로스에게 한 번 더 실망하고 만다. 엄연히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대통령을 희화화 한 거 가지고 시비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개인”을 아무리 작품 속이라 해도 이리 가볍게 살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작품을 쓰라고. 맞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나는 마땅하지 않았다. 이 전에도 나는 이미 과한 폭소를 터뜨렸다. 풍자도 풍자 나름. 이 책을 관통하는 로스 표 풍자와 웃음은 처음부터 폭력적이다. 나는 이 작품보다는 덜 경박하게 웃고 싶다. 같은 진보 작가이지만 필립 로스만큼은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미국인, 커트 보니것 정도의 것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로스의 희극적 작품 전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딱 <우리 패거리>만 가지고 말하자면, 보니것에 비해 너무 통속적이다.
통렬한 정치 풍자극?
내가 읽기엔 폭력적이고 경박한 소품이다. 그러니 1971년 작품을 이제야 번역한 거겠지. 여담이지만 로스의 바람과 달리 다음 선거에도 딕슨이 당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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