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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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가 서른여덟 살에 발표한 작품. “필립 로스의 통렬한 정치 풍자극”이라는 시원한 광고글을 달았다. <포트노이의 불평> 이후 2년 만인 1971년.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낙태를 인간생명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연설을 한다. 낙태 반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구별 꼴 보수들의 전매특허 레퍼토리. TV를 통해서…는 아니고 하여튼 닉슨의 이 연설을 들었든지 읽은 로스는, 이 더러운 공화당원, 이 말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올리브 시리즈”의 한 작품에서 여사님의 두번째 남편(이 될 인간)을 본 소감으로 올리브가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인데, 하여튼 공화당 꼴 보수의 수장이 헛소리 한 번 더 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고, 때마침 베트남 미라이 지역에서 있었던 22명의 민간인 학살 주인공, 미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에 대한 감형조치를 걸고 넘어지기로 작정을 했다. 로스가 원래 글발이 워낙 막강해서 불과 몇 달 만에 휘리릭 일필휘지를 날린 것이 바로 <우리 패거리>. 딱 이 두 가지만 가지고는 글감이 차지 않아 1970년에 발생했던 두 가지 사건을 더 했다. 하나는 미국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진지를 구축한 베트콩의 공격하기 위한 캄보디아 폭격, 다른 하나는 “5∙4학살”이라고도 부르는 5월 4일의 켄트 주립대학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네 명이 사망하고 아홉 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첫 장면을 로스는 누가 봐도 리처드 닉슨임이 틀림없는 1971년 현재의 대통령 트릭 E. 딕슨, 애칭 트리키와 국민의 대화를 서재극, 레제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었다.

  트리키는 단연코 낙태를 반대한다. 왈,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포함해서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개인적으로” 믿는다고 공표한다. 이거 참. 3일 전에 읽은 울리츠카야의 <쿠코츠키의 경우>를 보면, 소비에트 연방에선 쿠코츠키 박사가 1940년대에 낙태의 자유를 허용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여성이 불법 낙태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고 심각한 사회적 손실도 초래할 것임을 주장하기 시작해 50년대 중반이든가, 법으로 허용했건만, 소위 “자유진영”의 지도자인 1971년의 미국 대통령이 거 참 안타깝기 한량이 없네. 새삼스레 책을 다시 뒤져보며 정확하게 어떻게 썼는지 확인해볼 정성은 없지만, 트리키 딕슨은 애당초 낙태할 일을 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말하기도 해서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때 매스컴은 국민들의 관심을, 1968년에 있었던 베트남 미아이 민간인 학살 당시 윌리엄 캘리 중위가 스물두 명의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일 때, 피 학살자 가운데 임신중인 여성이 있었다면, 배 속의 태아 인권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시킨다. 국민이나 트리키의 인식 속에선 “민간인 학살” 개념은 다음으로 하고 임신한 여성의 학살도 아니고, 오직 태아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 꼴. 어떻게 대통령이 피 학살자 가운데 임신한 여성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은 안 하지. 그렇게 보고받지 않았을 뿐. 캘리 중위가 여성이 임신을 한 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배가 부른 여성이 있었다고 해도 전투의 와중에 임신을 해서 배가 나왔는지, 잘 먹어 살이 쪄서 배가 나왔는지 어떻게 아느냐,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자꾸 산으로 가버린다.

  이러다가 결정적으로 한 방 꽝. 197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을 것이고, 이제 다음 대선의 대세는 민주당으로 기울고 있어서, 그냥 내버려두면 대선필패가 분명하니, 공화당 득표를 늘이기 위해, 지금 트리키가 태아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까지 들먹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긴 한데, 공화당 득표율 때문이 아니라, 흑인의 힘, 여성의 힘을 주장하는 민주당 입장에서도 사회적 약자가 틀림없는 태아의 힘은 어떻게 하느냐, 세포에 불과해도 생명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며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다. 1971년부터 미국 헌법은 기존의 21세 이상에게 주어졌던 투표권을 18세로 하향하는 바람에 민주당 지지층이 늘어나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공화당의 전략이라는 빈틈없는 슈르드Shrewd 기자의 분석이 그랬다. 하여튼 딕슨은 태아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태아들을 위해 성취한 모든 일이 향후 언젠가 종족이나 신념이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태아가 되는 세상에 기여하기만 바란다면서, 자기한테 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아마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걸?


  그러다가 갑자기 장면은 1970년의 켄트 주립대학 학살로 전환한다.

  베트남 참전 상이군인들이 의사당 앞에서 훈장을 반납하며 반전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켄트 주립대학 대신 참전 상이군인과 보이스카우트, 이글스카우트들이 중심이 되어 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걸로 조금 바꾸었다. 대통령은 열을 잔뜩 받았는데, 그건 미국의 보이스카우트가 TV 카메라를 향해 트릭 E. 딕슨이 섹스를 좋아한다고 고함을 쳤기 때문이다. 아내가 TV를 보다가 이 말을 믿게 되면 어쩌지? 내 자식들이 듣는다면? 유권자들은! 여태 내가 주장한 태아의 권리장전은 “태아가 태어나는 절차에 찬성한다는 프리마 파키에가 아니야!” 즉 자신은 한 번도 섹스를 찬양하거나 좋아한다는 어떠한 시그널을 보낸 적이 없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래서 억울해 미치는 트리키. 시위자들의 피켓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색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라 / 거기가 어울린다 / 음경에 권력을? 절대 안 돼! / 억압 – 사랑하거나 그대로 두거나!”

  이걸 어떻게 한다? 대학 4년 동안 미식축구부의 후보선수 생활을 했던 대통령은 실제로 경기에 뛰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십 여 년 전에 입었던 유니폼이 여전히 흠 하나 없이 깨끗한데, 지하 벙커에 미식축구 유니폼에 헬멧, 국부보호대까지 착용하고 그의 조언자들을 불러 심야 토론을 벌인다. 이 철없는 데모군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치 코치, 마음 코치, 법률 코치, 군사 코치 등으로 구성된 브레인 캐비닛은 결국 실탄 조준 발사를 결정한다. 독자는 이미 알았다. 켄트 주립대학에서 총 맞아 네 명 죽고, 아홉 명 다쳤으니까, 여기서도 그래야 할 걸? 맞다, 그렇게 됐다.

  그리하여 딕슨은 대 국민 연설을 하건만 겨우 보이스카우트 네 명? 그래서 뭐 어쨌는데. 사회질서 붕괴에 따른 크나큰 손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여? 그잖여?

  지금 이 단락을 길게 쓰지 않았다. 이 장면은 필립 로스가 <미국의 목가>를 비롯해 앞으로 몇 번 더 작품에서 상세하게 묘사를 할 사건이기도 하고, 점점 뒷부분으로 가고 있어서 책 읽어볼 분에게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딕슨 암살. 마틴 루서 킹 목사나 존 F. 카리스마 전 대통령처럼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깔끔한 모습이 아니라, 홀딱 벗은 상태에서 물이 가득 찬 주머니에 몸을 잔뜩 오그린 태아 자세로. 이렇게 다시 처음에 이야기했던 태아의 권리, 태아 생명의 존엄성으로 트리키 자신이 회귀하는 것.

  여기에서 나는 로스에게 한 번 더 실망하고 만다. 엄연히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대통령을 희화화 한 거 가지고 시비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개인”을 아무리 작품 속이라 해도 이리 가볍게 살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작품을 쓰라고. 맞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나는 마땅하지 않았다. 이 전에도 나는 이미 과한 폭소를 터뜨렸다. 풍자도 풍자 나름. 이 책을 관통하는 로스 표 풍자와 웃음은 처음부터 폭력적이다. 나는 이 작품보다는 덜 경박하게 웃고 싶다. 같은 진보 작가이지만 필립 로스만큼은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미국인, 커트 보니것 정도의 것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로스의 희극적 작품 전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딱 <우리 패거리>만 가지고 말하자면, 보니것에 비해 너무 통속적이다.

  통렬한 정치 풍자극?

  내가 읽기엔 폭력적이고 경박한 소품이다. 그러니 1971년 작품을 이제야 번역한 거겠지. 여담이지만 로스의 바람과 달리 다음 선거에도 딕슨이 당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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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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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해럴드 배너가 소설 ‘채권‘은 왜 썼을까? 2.5류 소설가가 한 탕 해보려고?
혹시 투기의 귀재 앤드루 베벨이 자신의 신화를 지어내려고? 이렇게 생각해야 지루하게 읽은 게 위안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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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10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도 별 네 개네요? 뒤로 가면 좀 재미가 있는거죠?

Falstaff 2024-08-10 12:47   좋아요 0 | URL
재미라기보다 작가의 속셈을 조금 알아차린 기분이 든다고 할까 뭐 그렇습니다. ^^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리커버)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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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말 인가, 2022년 초에 콜슨 화이트헤드가 쓴 <니클의 아이들>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저 퓰리처 상을 받은 소설로만 알았다. 책의 띠지에 “2020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딱 박아 놓았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다가, 엉뚱하게 며칠 전 부스 타스킹을 검색하면서, 미국 문학사상 퓰리처 상을 두 번 이상 받은 소설가가 딱 네 명뿐이고, 범위를 21세기로 좁히면 콜슨 화이트헤드 밖에 없는데, 2020년 <니클의 아이들>과 2017년에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가 수상작이었다는 걸 알았다. 당연히 즉각 어느 도서관에 있나 검색해, 마침 나 다니는 동네 도서관에도 한 권 있어 다음날 곧바로 대출해서 읽었다.

  큰 줄거리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미국 아프리카계 노예에 관한 첫번째 담론이 아마 1970년대 중후반에 TV에서 방영한 드라마 <뿌리>였을 거다. 아닐 수 있지만 내 기억엔 그렇다. 고등학교 다닐 때 흑백 TV로 본 기억이 난다. 주인공 킨타쿤테. 아프리카(잠비아)에서 노예로 잡혀 배를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해 경매를 통해 팔리는 장면. 탈출했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음경과 발 가운데 어디를 자를까, 네가 결정해라, 해서 발등이 잘리는 장면. 킨타쿤테의 딸이 다른 농장에 팔려가 백인 농장주에게 겁탈을 당해 물라토를 낳고, 후손 가운데 닭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리는 치킨 조지라는 등장인물도 있고, 되는 대로 낳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킨타쿤테부터 아메리카에 도착한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통을 내려가기도 하고, 당시에 사회적으로 센세이셔널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아메리카의 흑인 노예 농장을 다룬 영화가 많이 수입된 시기도 있었다. 주로 작품성은 별개로 하고, 농장주에 의한 강간과, 여주인의 요구에 응했다가 발각나는 바람에 처형당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노예 같은 B급 영화도 있었다. 지금은 알렉시 헤일리의 장편소설 <뿌리>를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42번, 43번 두 권으로 읽을 수 있다.


  노예의 탈출 이야기를 다시 읽은 건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였으니 <뿌리>를 드라마로 보고 참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이다. 이 <빌러비드>는 여자 노예가 농장을 탈출해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하다가, 이 책 읽고 벌써 10년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소수의 선량한 백인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한 흑인 노예의 이야기였다.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이 선량한 도움을 주는 백인들이 개입해 노예해방을 승인한 주까지 탈주노예들을 이동시키는 일종의 시스템을 다룬 작품이다. 화이트헤드는 어려서 나이든 흑인들로부터 노예의 탈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러면서 19세기 당시에 노예들을 특정지역까지 안전하게 수송하는 지하철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있어서, 열차가 서는 비밀 역에까지 가면 탈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이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다가 철이 들면서 탈출노예들에게 도움을 주는 소수의 백인을 포함한 사람들을 비유했던 걸 알고 화딱지가 나서, 정말로 지하철도가 있다고 가정을 하고 이 책을 쓰기로 작정했단다. 당시에 미국 전역에서 탈출 노예들을 일정기간 안전하게 데리고 있던 “역장”들과 이들을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시키는 “기관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었다고 한다. <빌러비드>에도 그런 의미에서 역장과 기관사가 등장했던 거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를 모리슨과 차별할 수 있는 것은, 모리슨이 생명을 걸고 탈출에 성공한 노예, 해방전쟁을 통해 자유를 얻은 아프리카인들을 그린 반면에, 나도 이번 독서를 통해 처음 알았는데, 화이트헤드의 책이 내게 완전히 달랐던 점은, 농장을 탈출하고 다른 주state로 이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래서 이후엔 다른 자유 흑인들과 같은 신분으로 나머지 고단한 생을 살았겠거니 했으나, 전혀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한 개인의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사유재산을 중요시하는 뼈속까지 자본주의 국가인 아메리카는 비록 노예제 철폐를 승인한 주나 도시로 도망을 했다 해도 탈출 노예를 잡아둔 상태에서 농장주가 소유권을 주장하면 거의 이의 없이 소유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정말 목숨을 걸고 탈출에 성공했다고 믿는 아프리카인들은 그러나 도착한 자유도시에서 선량하다고 믿은 백인에게 흑인 인구의 과잉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은근히 단종수술 압력을 받기도 하고, 도시의 분위기가 점점 흑인 탄압 쪽으로 흘러 더 이상 도시에서 버틸 수 없는 처지에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상상하기 힘든 잔혹한 폭력성을 띠는 노예사냥꾼들의 추적이었다. 이들은 탈출 노예를 잡아 별 탈 없이, 여기서 말하는 ‘탈이 없다’라 하는 건 그저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이거나, 주인이 허락했다면 몸통이 붙어 있지 않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형태를 지니기만 하면 되는 머리통 상태였는데, 하여간 탈 없이 “집으로” 귀가시키는 걸 목적으로 했다.

  당연히 이 책에서도 다시 잡혀온 탈출 노예의 처형장면이 나온다. 빅 앤서니라는 이름의 건장한 노예가 랜들 농장을 탈출해 몇 주 동안 늪지대에 숨어 있다가 잡혀왔다. 이날 목수들은 밤을 새워 특수한 형태의 차꼬를 제작하느라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지면 관계상 차꼬의 상세 모습은 생략. 아침에 농장 저택 앞마당의 빽빽한 잔디밭 위에 차꼬를 설치하고 첫째 날에 빅 앤서니를 단단히 잡아맨 채 그대로 하루를 보낸다. 둘째 날 애틀랜타와 서배너에서 지체 높은 신사 숙녀 여러분이 영국에서 온 외신 기자와 함께 도착했다. 잔디밭에 성대하게 식탁을 차려놓고 거북이 수프와 특급 양고기를 최고급 와인을 곁들여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노예 관리인은 아홉 가닥으로 된 가죽 채찍으로 쉴 새 없이 빅 앤서니의 등을 채찍질했다. 셋째 날엔 모든 노예들, 대 농장 북쪽의 90명, 남쪽 85명을 다 잔디밭에 집합시키고, 신사 숙녀 여러분과 영국의 외신 기자가 우아한 차림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빅 앤서니에게 기름을 바르더니 불에 굽기 시작한다. 대기에 기름과 피부 타는 냄새가 번지기 시작하지만 빅 앤서니는 얼굴만 심각하게 찌푸릴 뿐,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첫날 노예의 음경을 잘라 입에 쑤셔 넣고 입술을 꿰매 버려 소리를 내지 못했던 거였다. 빅 앤서니는 차꼬와 함께 연기를 피워 올리며 까맣게 타들어갔다. 아무도 구토하지 않았고,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으며, 울지도 못했다. 눈물 한 방울도.

  대농장의 주인 테런스 랜들은 노예 한 명 빅 앤서니의 노동력보다 나머지 175 ‘마리’의 노예들에게 탈출의 무모함을 알리고 경각심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거다.


  서아프리카의 밀림지역에서 건강하고 예쁘게 생긴 아자리라는 소녀가 다호메이 족에게 붙잡히고 만다. 유리구슬과 럼주 몇 병에 여러 차례 팔리면서 베냉의 우이다 항에 도착한 아자리는 여기서 노예운반선을 타고 아메리카로 길고 긴 항해를 한다. 아메리카에 도착해 다시 몇 번의 경매를 거쳐 조지아의 노예시장에 도착한 아자리는 조지아 주의 렌들가家가 소유한 대농장에 귀속되어 본격적인 노예생활로 접어든다. 세 번 결혼을 했다. 첫 남편은 옥수수 위스키에 탐닉해 취하기만 하면 아자리에게 주먹질을 하다가 조금 후에 플로리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갔다. 아자리는 아쉬운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두번째 남편은 남쪽 농장에서 온 다정한 청년이었지만 콜레라에 걸려 죽고 말았다. 마지막 남편은 꿀을 훔쳐 귀가 잘렸다. 아이 다섯을 출산한 아자리는 당연히 자식 복도 없어서, 두 아이는 고열로 죽었고, 사내 아이는 날붙이를 만지다가 베는 바람에 파상풍에 걸려 먼저 갔다. 막내는 작업반장이 일하는 속도가 늦다고 두드려 패 죽였다. 결국 열 살을 넘긴 유일한 아이는 메이블 하나만 남았는데, 메이블로 말하자면, 랜들 대농장 역사상 유일하게 탈출에 성공한 전설적인 노예이며, 작품의 주인공인 코라의 엄마다. 2미터가 넘는 우람한 체격의 잔혹한 노예사냥꾼 리지웨이의 말에 따르면 지독한 메이블은 북쪽으로 끝까지 올라가 캐나다에 도착하는 바람에 아무리 리지웨이가 끈질기더라도 잡아올 수 없었고, 그의 경력에 유일한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 엄마에 그 딸.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코라의 탈출기다. 코라가 처음부터 탈출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탈출을 시도해 몇 주 동안 조지아 주 습지에 숨어 있다가 독사, 악어, 재규어, 독충에 당하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거나, 이 정도면 다행인데,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와 형편없이 채찍질을 당하고, 온갖 고문도 다 겪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버지니아의 마음씨 좋은 늙은 과부가 운영하는 작은 농장에서 즐겁게 노예생활을 하다가, 과부가 죽는 바람에 조지아까지 팔려온,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시저’가 지하철도 이야기를 하자 깔끔하게 거절한다. 코라가 왜 시저를 믿어야 하나? 끄나풀인지 어떻게 알고. 정말 손잡고 튀었다가 시저의 한 마디에 잡히고 말면, 한 방에 코라만 훅 가는 거니까. 그러나 빅 앤서니의 처형 며칠 후, 시저는 다시 한 번 코라에게 지하 열차를 타러 가자고 권하고, 이제 드디어 코라는 결심을 하고 만다. 이렇게 탈주를 시작한 코라, 이 아이는 불과 며칠 후 대단히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밤에 멧돼지 사냥을 나온 백인을 만나 진짜로 죽기 살기로 결투를 벌이다가 열네 살 소년의 머리통을 돌로 쳐 죽여버린다. 백인 소년을 잔혹하게 때려 죽인 흑인 탈출 노예. 이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도주길이 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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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09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필립 로스, <우리 패거리>
화요일.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목요일.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트릭>
금요일. 브렌다 로사노, <마녀들>

hnine 2024-08-0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저도 읽은 책이라 반가웠어요. 그새 표지도 바뀌었군요.
저도 이 책 읽으며 어릴 때 TV에서도 방영되었고 아버지께서 1, 2권 두 권으로 나온 책도 가지고 있으셨던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를 떠올렸답니다. (그런데 뿌리 주인공 이름이 쿤타킨테 아니었던가요? )

Falstaff 2024-08-09 16: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쿤타 킨테가 맞습니다.
아참,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구간으로 읽었는데요, 독후감 올리면서 제목이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업로드 했나 봅니다. 빌려 읽은 티를 낸 건지 참, 저도 어이가 없네요. ^^;;

stella.K 2024-08-09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이름이 헷갈리긴 하죠. 과연 쿤타킨테인가 킨타쿤테인가? ㅋㅋㅋ
저도 어렸을 때 뿌리 보고 음악은 웅장한데 내용은 충격적이었죠. 나중에 세 권짜리로 나온 책을 샀는데 읽는덴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2천년대 초에 다시 새로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처음 보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다시 보려니까 못 보겠더군요. 잔인한 장면도 그렇고 형만한 아우없는 것 같고. 이책 읽어보고 싶긴하네요.

Falstaff 2024-08-09 16:50   좋아요 1 | URL
영상으로는 당연히 <뿌리>도 좋았지만...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가위질 겁나게 하고 개봉한 <만딩고>가 으뜸입죠. ㅋㅋㅋㅋ 흑인을 낳은 백인 농장주 부인. 으아...
 

이제 104페이지밖에 안 왔는데, 밋치겠네. 일부러 재미없게 쓴 건가? 나중에 크게 한 방 때리려고?
이런 마음까지 생김. 조금만 더 달려보자. 우짜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재미가 없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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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8-08 1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연 한방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8-08 14:41   좋아요 4 | URL
진도도 무척 안 나갑니다. 재미 없으니까 당연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도서관에서 보통 250쪽 정도 읽고 퇴근하는데, 오늘은 146쪽, 1부만 달랑 끝냈으면서도 아이고 머리 어깨 무릎이 다 저려서...
증권, 채권 같은 금융 시장 이야기. 발자크의 <사기꾼>하고 에밀 졸라의 <돈>과 <쟁탈전> 읽은 사람한테는 여간해서 재미나단 소리 못 듣지요. 게다가 원래 문장 자체가 덜 재미있는 거 같더라고요. 에휴... 왜 골랐을꼬...

Falstaff 2024-08-09 11:26   좋아요 1 | URL
윽, 스맛폰으로 아래 잠자냥님 댓글 쓰기 눌렀더니 댓글 자체가 지워졌네요. ㅜㅜ
그래서 여기다 답글.
그때 알라딘 보관함에서는 얼른 지웠거든요.근데 도서관 홈페이지 관심도서에서는 걍 냅둔 거랍니다. ㅜㅜ

댓글 지워져서 어쩌지요? 벌금 낼 수도 없고, 책 한 권 사드릴까요? ㅜㅜ

잠자냥 2024-08-09 12:1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아이고 무슨 책 한 권을 사주십니까?! 열 권은 사주셔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입니다. ㅋㅋㅋ 지워질 수도 있죠. 폴스타프는 벌로 리뷰를 더 쓰도록 하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4-08-08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잠자냥님도 지루하다고...정말 재미없고 지루한가보네요.
근데 도서관에서 250쪽...놀랐습니다.

Falstaff 2024-08-08 18:59   좋아요 0 | URL
이후는 모르겠고요, 하여튼 1부는 곤혹스러웠습니다. 분량을 뚝 떼서 절반, 2백 페이지 정도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더라니까요.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24-08-08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맥주 한 잔 하고 생각해보니..... <코스모폴리스>는 또 뭔 죄가 있어서 들먹거렸을꼬?
 
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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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리츠카야 깨나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세 보니 이 책이 다섯 번째다. 소비에트 철의 장막이 걷히기를 기다려 작품활동을 시작했던 구 소련의 40년대생 여성 작가들. 이 가운데 한 명. 내 머리 속에는 이렇게 특정한 부류의 주목할 만한 작가군이 있다. 대체로 이 작가들의 책이라면 눈에 띄는 대로 찾아 읽는다. 울리츠카야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거주지를 베를린으로 옮겨버렸다. 이이는 카자흐스탄 북쪽을 면한 바시키르 자치 공화국에서 출생한 유대인 혈통이다. 2차 세계대전을 피해 그곳으로 피난한 가정에서 출생해, 전쟁이 끝나자마자 모스크바로 돌아가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이런 내력이 주인공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코츠키의 수양딸 토마를 성인이 되어 생물학 연구소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생물학박사로 설정하는 데 보탬이 됐을 것이다. 울리츠카야는, 젊은 시절에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권고하면서 수시로 도청과 감시, 밀고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모국어라고 생각하는 러시아어를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소비에트에 남아 견뎌낸 인물이다. 그러니 소비에트 해체 전까지 작품을 발표할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속으로 얼마나 애가 탔을까? 창작은 하되 그것을 내보이지 못하는 심정 말이지.


  <쿠코츠키의 경우>는 진짜 빼박 쿠코츠키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코츠키와 그의 아내 엘레나, 엘레나가 데리고 들어온 딸 타냐, 그리고 타냐의 딸 줴냐한테 각 1부부터 4부까지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주인공은 파벨로, 상당히 짧은 분량의 4부를 시작하는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 된 후다. 쿠코츠키 가문의 내력을 보자. 이렇게 시작하니까 쿠코츠키 가문이 러시아 역사에 정말 나오는 거 같지? 아니다. 허구일 확률이 백퍼센트다.

  하여간 소설에서 말하기를, 러시아 역사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쿠코츠키는, 1698년 표트르 대제가 해부학 교수 류이쉬에게 약제사의 아들 아브데이 쿠코츠키를 제자로 받으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처음이라 했다. 전해오기를 아브데이의 조부/부친은 표트르 대제 시절 모스크바 교외의 외국인 거주지인 쿠쿠이 지방에 살았다고 하고, 거의 틀림없이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의사들이 거의 대부분 독일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이민 온 의사/약사 집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말부터 파벨 쿠코츠키의 부계 조상들은 대대로 의사를 직업으로 삼아왔다.

  파벨의 아버지 알렉세이 가브릴로비치는 전시외과, 즉 군military 의학 의사이자 교수였으며, 러일전쟁 후에 새로운 군 의학의 필요성을 수뇌부에 건의했지만 관료주의의 벽을 뚫지 못해 끝내 개선하지 못한 상태에서 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이때 화물기차를 이동식 야전병원으로 만들어 우크라이나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지만, 1917년 포병부대의 폭격으로 이동병원, 환자, 간호사들과 함께 폭사하고 만다. 가정에서는 훗날 아들 파벨이 유소년기를 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할 만큼 다감한 아버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파벨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인체 해부도를 탐독하는 것이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을 보며 겨우 열 살짜리 소년이 “죽음은 겉으로 살아있는 육신에 덮여 언제나 인간의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궁리하기도 했다. 이런 파벨을 알아본 아버지는 19세기 말 이탈리아 투린에서 사바쉬코프에 의해 출판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목록 A>를 사주기도 하고, 청동으로 만든 50배율 작은 현미경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잠깐 걱정하기를, “파벨이 머리가 너무 비상해 의사가 안 되면 어쩌지? 학자가 될 지도 모르겠어.” 진짜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이과 학생들은 의사 말고 의과학을 포함한 과학에 종사하는 학자가 되야 맞는 거 아냐? 에휴, 모르겠다. 어찌 됐던 사는 건 부르주아로 사는 게 편하고, 편한 게 좋은 거니까 똑똑한 너희들 맘대로 살아라. 근데 공부하기 힘들잖아. 그러니 의사가 되는 것보다 의사의 배우자가 되는 건 어떻겠어?

  파벨은 아버지가 전사한 1917년에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을 했지만 곧바로 혁명을 만나 아버지가 황제의 근위병 대령으로 근무했다는 출신성분 문제로 1918년에 퇴학을 당한다. 그러나 1919년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산파학과 산부인과 전공 칼린체프 교수의 청원으로 복학해 모든 열정을 공부에 쏟는다. 공산 소비에트는 1920년에 쿠코츠키 저택을 국가재산으로 귀속시키고 그들 집에 세 가구를 입주해 파벨 모자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살아야 했다. 바로 다음 해인 1921년에 어머니 에바 카지미로브나는 하급관리 출신인 젊은 남자와 재혼을 하는 바람에 파벨이 집을 나왔고, 어머니가 또 아들을 출산한 이후로 모자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변해버렸다. 당연히 어머니는 이렇게 딱 한 번 출연한 이후 작품에서 사라진다.

  혈액순환계와 신경계 말단영역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던 혈관, 발생학 학자이자 의사인 젊은 파벨은, 의학과 관련이 없는 당원이 책임자로 부임한 후, 쿠코츠키 가문의 명성을 감안해 학과장으로 임명됐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발생학이면 산부인과에 가깝다. 임신 5개월차 임산부를 관찰하던 중 전이된 화려한 암을 발견한 파벨은 이후 자신에게 “내면투시능력” 특히 악성 종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능력은, 러시아 문학 특유의 신비적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과식을 하거나 섹스 후에는 이 능력이 발현되지 않거나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알고 난 후 개인적인 삶이 조금 더 건조해지고 이성과의 교제도 멀리했다. 미남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젊은 남자가 이런 삶을 산다는 게 여자 동료들 입장에서는 남자로서 결정적 결함이 있다고 쑥덕거릴 좋은 이야기거리가 될 수밖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모스크바에 있던 병원은 시베리아의 작은 B시로 이전한다. 시베리아, 하니까 저 북국의 툰드라 생각하시지? 아니다.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시베리아, 하면 우랄산맥 근처 중앙아시아 지역을 말한다. 작가 울리츠카야가 태어난 곳도 이 시베리아 지역이다. 이곳에서 파벨은 유행가 가사 같은 운명적인 여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 엘레나 게오르기예브나.

  1942년 11월, 병원의 부원장 발렌티나 이바노브나는 상당히 심각한 상태의 엘레나를 수술대 위에 눕히고 복강을 완전히 개방했다.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수술 솜씨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인 파벨을 불러 수술 참관을 시켰다. 파벨의 눈에 완전히 드러난 엘레나의 장기가 오래 전부터 보아온 것처럼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파벨의 내면투시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해, 맹장이 완전히 파열됐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으며, 고관절이 매우 연약해서 거의 부전탈구 형태로 앞으로 출산하면 위험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지만 출산 경험이 있는 자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아차렸다. 뿐만 아니라 맹장에서 흐른 고름이 장기를 침범해 자궁도 적출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부원장 발렌티나도 당연히 그의 조언에 따라 맹장과 자궁을 적출했고, 수술이 끝나서도 파벨은 두 번이나 군용 페니실린을 훔쳐 엘레나에게 주사를 놔주는 등 특별하게 돌보았다.

  엘레나는 B시의 변두리 방 한 칸짜리 낡은 오두막집에서 딸 타냐와 가정부 바실리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파벨은 이 가족을 자신이 살고 있는 병원의 정원에 있는 별관에 데리고 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아직 유부녀였다. 남편 안톤은 전쟁에 참전했지만 서로 편지 왕래도 없었다. 전쟁 전에도 부부는 본격적인 권태기에 접어들어 무미건조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든 한 집에 살게 된 파벨과 엘레나는 한 달이 지나고 군사우편 한 통을 받았으니, 안톤 이바노비치의 전사통지서. 통지서에 써 있는 내용에 따르면, 파벨과 엘레나가 처음으로 한 침대에 오른 날, 안톤이 전사했다는 거였다. 잠깐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인지라, 이들은 곧 결혼을 했고, 타냐는 양녀로 입양을 했으니 이때 파벨은 43세, 엘레나가 28세. 타냐는 두 살. 파벨이 엘레나와 동침을 했지만 그의 내면투시능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니, 엘레나는 가히 하늘이 파벨에게 점지해준 짝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시겠지? 엘레나는 자궁이 없는 여인. 파벨에게 쿠코츠키 가문의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운명이고, 능력이 비상한 사람은 특히 말조심을 하지 않는 경우가 소설작품에서 왕왕 있으니, 이들 부부에겐 시작부터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던 거다. 당연히 언젠가는 터지겠지. 그래도 타냐는 무럭무럭 자라고, 사랑을 하고, 또 아이를 낳아 줴냐를 낳겠지. 줴냐도 역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세월이 가며 앞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라지겠지.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사는 이야기.

  내가 읽기에는 2부가 힘들었다. 3부로 접어들면 왜 2부 읽기가 힘들었는지 한 순간에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2부를 다시 읽을 수는 없었다. 한 가족의 사는 이야기를 고전적 의미에서 대하소설이라고 한다면 정확하게 대하소설이다. 재미있다. 하지만 권하지 않겠다. 본문만 739쪽에 이르는 분량이 독자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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