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장례식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서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울리츠카야가 뉴욕에 떴다. 뉴욕의 다 찌그러진 동네 바로 옆에 붙은 건물. 원래는 창고 건물이었으나 동네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초라한 몰골로 찌그러지던 중, 모스크바에 살다가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유럽 각지(특히 이탈리아!)를 떠돈 후 뉴욕까지 흘러 들어온 화가 알릭이 다락 창고를 개조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그나마 방과 작업실을 만들고 세 들어 살겠다고, 절차 같은 걸 귀찮아 하는 알릭이 당시엔 내용도 한 번 안 읽은 채 계약서에 서명해 들어와 살게 된 작업실 겸 집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는 않는데, 아마 월 4백달러 정액으로 울릭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조건 아니었나 싶다. 세월이 변하고 빈민들이 들끓는 우범지대 옆에 큰 문화센터 비슷한 것이 생기더니 이에 걸맞은 다른 시설도 따라 들어와 이젠 제법 유동인구가 많은 잘 나가는 상업지대의 모습을 갖춘 거였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출신의 건물주는 이 정도의 부동산이라면 아무리 디스카운트 해서 평가를 하더라도 월세 4천달러 이상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이해하지만 무한정, 집세를 내지 않는 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임차인을 쫓아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나마 집세라도 꼬박꼬박 내는가 말이지. 그래서 한 너댓 달 내지 않아, 임대인 입장에서 속으로는 웃으며 그러나 겉으로는 화난 얼굴을 하고 방을 빼 달라고 하면 분명히 울릭은 아닌데, 울릭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방금 집세를 낸 영수증을 보라고 디미니 아일랜드인이 꼭지 가 돌겠어, 안 돌겠어?

  근데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울릭이 죽어가고 있다. 제목 “행복한 장례식”의 대상이 바로 주인공 울릭이다. 니나의 남편이며,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천천히 진행되는 마비와 근손실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육체의 거의 모든 근육이 정지한 상태로, 뇌와 시청각과 언어, 그리고 아주 빈약한 소화기와 횡경막을 지탱하는 근육이 이제 마지막으로 서서히 정지하고 있다. 결국 횡경막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호흡을 못해 질식사할 것이란 게 러시아 의사지만 영어에 약해 미국에서 치루는 의사자격시험에 번번히 떨어지는 피마 그루버의 정확한 진단이다.


  독자가 작품을 빨리 이해하려면 주인공 울릭이 죽어가는 집에 대해서 미리 아는 것이 좋다. 어디까지나 울릭과 니나 부부가 살림도 하고 울릭의 그림 작업도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울릭이 여간 발이 넓은 게 아니다. 발만? 오지랖도 같이 넓어서, 일단 뉴욕에 새로 도착해 정착하지 못한 러시아 이민, 밀입국자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고, 한 시절 러시아의 위성국가나 자치국으로 새로 독립한 지역 사람들도 그들만의 민간 치료법을 들고 언제든지 몰려올 수 있으며, 러시아 지역과 관련이 없더라도 그림을 그렸다거나 카페에서 재즈를 연주하거나,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인디오 음악을 하는 사람들, 아니면 심지어 술집에서 우연히 울릭과 한잔한 기억이 있는 행인 1, 2도 언제든지 집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 그래서 아예 현관이 없다. 얇은 합판으로 칸을 나누어 작은 부엌과 손톱만한 침실을 만들었고, 널찍한 작업실엔 조명 두 개와 창문도 두 개를 냈으며, 없던 화장실과 샤워실을 만들어 썼는데,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때론 십 수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때는 한 여름이다. 1991년 경으로 보인다. 나중에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구금당해 벌써 죽임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장면을 보면, 그래, 틀림없이 1991년이 시간적 무대일 것이다. 그해 8월은 여름마다 그랬듯이 백 년만의 기록적인 폭염이 뉴욕을 덮친 해이기도 하다. 이 폭염도 당연히 매년 새롭게 경신될 예정이지만.

  불행하게 이 집의 에어컨이 고장났다. 뉴욕은 대서양에 면해서 여름엔 남풍에 실린 바다 습기가 유입되어 장마가 끝난 한반도처럼 습기 높은 무더위가 대기를 짓눌러 사람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즉, 대단한 열기와 극에 달한 습기, 이 두 조건이 러시아 태생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에겐 놀라운 경험일 수밖에. 그래서 작품은 “열기가 대단했고 습기는 극에 달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울릭은 당연히 새 에어컨을 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곧 죽을 거 같으니까. 그래도 선한 친구가 있어 책의 중간쯤 에어컨과 실외기를 짊어지고 오는데, 전문가들도 설치를 위해 둘이 작업하건만 잘났다고 혼자 와서 몇 시간 동안 고생고생하며 러시아 식으로 끙끙대다가 설치하지 못한다. 이 불볕더위에 가장 고생하는 사람이, 당연히 주인공은 아니지만, 제일 먼저 등장한다. 퉁퉁한 체형의 발렌티나. 예쁘장하게 통통한 얼굴을 가져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받는 여성이다. 모스크바에 살 때 게이 미국인이 와서 친하게 지냈다가 발렌티나의 매혹적인 모습에 넘어가 최초로 여성과 한 번 하게 된 게이의 고향이 뉴욕이었던 것. 발렌티나도 당시에 처녀의 몸을 처음 개방한 것으로, 둘은 가지가지 첫 경험을 기념하기 위하여 발렌티나의 가족과 친척을 모아 결혼식을 올린다. 먼저 미국인이 뉴욕으로 출발하고, 이제 됐다고, 오라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발렌티나가 무턱대고 뉴욕에 와 전화를 걸고,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게이 남편은 캘리포니아로 도망쳐버렸다. 어쨌거나 탈 게이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말은 통하지 않지만 어엿하고 어여쁘고, 통통한 발렌티나가 며느리라니, 시부모 마음이 흡족했겠지?

  그건 벌써 몇 년 전 이야기고, 이제 발렌티나는 지금은 빈민가까지는 아니지만 하여간 이 동네에 살면서 더욱 살이 쪘는데 특히 유방이 그랬다. 발랴는 귀찮아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8월엔 어쩔 수 없었다. 큰 유방을 풀어놓으면 더위에 가슴 밑이 눌려 살이 짓무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당연히 무료로, 알릭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지냈다.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출연한다. 그걸 다 소개할 수 없어서 제일 먼저 등장한 발랴만 간략하게 언급한다. 다른 이들은 생략한다.


  그리고 사실상의 주인공 이리나. 어린 시절 모스크바에서 서커스 생활을 할 때부터 알릭을 알고 지냈다. 그러다가 제법 대가리가 커지고, 다리 사이에 거뭇한 털이 돋을 즈음, 알릭하고 손잡고 며칠 동안 페테르부르크로 도망갔다. 이때 서커스 연습에 빠졌다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할아버지의 뜻을 어겨 이틀은 석달이 됐고, 이때 한 청소년 소설작가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를 알게 된 알릭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귀싸대기를 날려 사실상 관계는 끝이 났다. 그래도 2년을 더 버텼다. 미국에 도착해 처음에는 낮엔 센트럴 공원에서 서커스에서 주로 하던 묘기 버스킹으로 돈을 벌고, 생각을 바꾸어 밤엔 미국 교육과정을 밟다가, 제법 돈이 생기자 캘리포니아로 넘어간 후 반대로 낮엔 로스쿨을 다니고 밤에 서커스로 돈을 벌어 저작권 전공 변호사가 된다. 이 사이에 다시 동쪽으로 와 결혼도 했고, 딸 마이카(영어로 하면 “티셔츠”)도 낳고 나름 즐겁게 살기도 했는데, 많은 미국 부부가 그랬듯이 짝 갈라져 이혼해버리고 말았다. 돌싱이었을 때 하루는 신문을 보니 알릭이 개인전을 한다기에 LA에서 뉴욕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마이카와 함께 알릭을 보게 됐다. 근데 이상한 자폐형태로 자기 갑옷 속에 박혀 있는 듯, 세상의 모든 어른을 경멸하는 마이카가 알릭하고는, 신기도 하지, 별의 별 장난도 다 치고 말도 쾌활하게, 웃으면서, 때로는 화딱지도 내 가면서 하는 거다. 놀랠 놋자네.

  알릭도 그새 결혼했다. 니나라는 이름의 러시아에서 온 백치 같은 여성. 이리나가 보기에는 거의 지적장애 가깝게 어리석고, 병적으로 게으르고 단정치 못한데 어떻게 알릭이 이 여자를 견뎌왔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알릭-니나 커플 주변의 다른 친구들처럼 이들과 함께 시간을 하다 보니, 니나는 자신의 끝없는 무력감으로 주변인들, 특히 남자들에게 높은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여기에 덜커덕 걸린 것이지. 니나는 현대 의학이 포기한 알릭을 살리기 위하여 벨라루스에서 친척의 병을 고치고자 동유럽 특산의 온갖 약초를 몰래 갖고 들어온 노파 마리아 그르나찌예브나에게 민간 치료약을 구하고 조언을 받는다. 러시아 정교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극한까지 충동과 변덕, 공상을 몰고가는 경향이 있는 니나는 그래서 유대인이기도 한 알릭에게 정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기 권하고, 선한 마음에 그리 하는 줄 이해하는 알릭은, 랍비와도 협의해보는 조건에서 이를 승낙한다. 이렇게 뉴욕의 한 찌그러진 화가의 작업실에서 서로 적대적일 것 같은 종교의 지역 대장끼리 안면을 트게 되는 별난 일까지 생기는데 거 참.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 당연히 알릭이 죽지 뭐. 그래야 행복한 장례식이 열릴 테니까. 장례식이 끝나고 고인을 추도하기 위해 작업실에 모인 많은 사람들. 핏줄, 즉 친척은 아내 니나를 빼고 한 명도 없고 전부 미국에 와서 새로 사귄 무수한 인물들이 총망라하고 있는 가운데 작품은 마지막 희극의 커튼을 열어젖힌다. 나는 이 장면을 예전에 신문기사를 통해 읽은 적 있다. 우리나라의 실제 장례식에서 생긴 일이었다. 나도 죽으면 내 장례식에서 써먹어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뭔지 알려드리고 싶지만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라 그럴 수 없는 게 아쉽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이 작품 보다 한 길 위라서, 울리츠카야가 재미있게 쓰긴 했지만 내게 미소 이상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다 그런 거지. 누가 써먹기 전에 터뜨려야 한다니까.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7-29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민자들의 가난한 삶이 그려지네요.
장례식! 저는 아프리카 미국인들의 장례행렬이 먼저 생각나요. 이 행복한 장례식은 막이 오른채 끝나나보네요.

Falstaff 2024-07-29 07:38   좋아요 1 | URL
장례식 진행합니다. 러시아 정교 신부와 유대교 랍비가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도 하는 즐거운 난장판이 벌어지지요. 재미있습니다.
 
삶과 운명 1 창비세계문학 98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 다섯이 마땅하다. 다만 아직 번역 출판하지 않은 전작이 있어 앞에 진행된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후속편을 읽게 되어 고생이 막심하다. 별점 하나 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가뜩이나 등장인물이 신도림 트랜스퍼의 승객만큼 많거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4-07-28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죽죽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번역의 문제인가 생각했는데
전작의 내용을 몰라서 그럴수도 있겠어요^^

Falstaff 2024-07-28 15:39   좋아요 2 | URL
제 경우 두 가지가 컸습니다. 하나가 전작을 안 읽어 예상 외의 주요 인물이 난데없이 퍽퍽 등장해서고요, 두 번째가... 하도 많은 사람이 나오는데 이번엔 이름도 비슷하고 게다가 창비 특유의 외국어 표기법 때문에 더 헷갈리더랍니다. ㅎㅎㅎㅎ
이 책 말고 요즘 아우어바흐의 명작 <미메시스>를 읽고 있거든요. 번역이 무려 김우창과 유종호, 이 양반들 까려면 이민 갈 각오해야 할 정도의 명사들인데, 이이들 번역보다 우리말 문장이 읽기 좋던 걸요. ㅋㅋㅋ

coolcat329 2024-07-28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 책 사야지...했는데 전작을 먼저 읽어야 하는군요.

Falstaff 2024-07-28 15:38   좋아요 1 | URL
문제는, 소위 ˝전작˝이 아직 번역, 출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_-;;
 
채신없는 할머니 부클래식 Boo Classics 90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미란 옮김 / 부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책의 원래 제목은 <Kalendergeshichten: 달력이야기>이다. 책을 선택하기 전에 ‘달력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익살극, 우화, 일화 같은 서사적인 작은 형식들을 포함한단다. 17, 18세기 독일에서 민간인들이 사용하는 달력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농민계층의 유일한 읽을 거리였다고 역사 후기에 나와있다. 역자 김미란은 “찬송가와 성경을 제외하고”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지금도 성경과 찬송가 값이 다른 책값과 비교하면 잠실롯데월드타워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건만 17세기, 18세기에 일반인, 농민들이 가정에 한 권씩 장만해놓고 읽을 수 있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다. “달력 이야기”가 나와 있는 소설작품도 몇 편 읽어본 적 있어서, 만일 원제가 그랬다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대출을 할 것인지 그냥 말 것인지 따져봤을 텐데, 어쨌든 브레히트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딱 고른 책이다.

  열일곱 편이 실려 있다. 위에 쓴 것처럼 익살극도 있고, 우화도 있고, 일화도 있고, 브레히트가 쓴 시도 있다. 마지막에 실린 <코이너 씨 이야기>는 원래 121편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가운데 39편만 골라 실었다. 이 가운데 표제작이며 제일 앞에 소개한 <채신없는 할머니>가 단연 돋보였다. 지금 시각으로 봐도 참 쿨한 할머니의 말년 2년 동안의 생활을 소개한 일화. 브레히트가 자신의 할머니 탄생 백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9년에 써서 1949년에 출간한 《달력이야기》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브레히트의 할머니 카톨리네 브레히트 여사의 진짜 삶하고는 일치하지 않지만 할머니한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데 어떤 작품이냐 하면:


  할머니는 일흔두 살에 과부가 됐다. 할아버지는 바덴 주의 작은 도시에서 두세 명의 조수를 두고 석판 인쇄업을 했고, 할머니는 인쇄공과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했다. 일곱 명의 자녀를 출산했지만 둘은 어려서 죽고, 빈약한 생활비로 다섯 아이를 키워야 했다. 다섯 가운데 딸 둘은 미국으로 갔고, 아들 둘은 독일 안에 있기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 나갔고, 막내아들만 몸이 허약해 작은 도시에 그대로 남아 아버지에 이어 인쇄공이 되었다. 역시 부모한테 배워 막내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리는 가장으로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어쨌든 일곱 명의 자녀와 인쇄공들이 함께 살던 큰 집에 혼자 살기로 했다. 막내아들이 작은 집에서 대가족을 거느리기가 좁고, 불편하고, 번거로워 부모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으면 했지만, 어머니는 안면 몰수하고, 천만의 말씀을,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이나 같이 먹는 선으로 칼같이 선을 그었다. 자식들은 이제 벌이가 없는 어머니가 어떻게 살까 싶어서 작은 금액을 갹출해 매달 생활비를 보내기로 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형들 보다는 자주 어머니를 찾는 막내도 용돈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라이프 스타일이 확 바뀌었다. 그래서 “채신없다”는 형용사를 제목에 붙이긴 했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음식점에 가서 외식을 하고, 당시엔 거의 부랑배들의 집합소로 여기던 영화극장에 수시로 드나들고, 중년남자인 구두수선공의 작업실에도 드나들었는데 그곳은 가난하고 소문도 좋지 않은 좁은 골목에 있으며 일자리 없는 여종업원들이나 수공업자 청년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곳으로 평판이 안 좋았다. 게다가 대형마차를 빌려 유원지에 소풍을 가고, 기차를 타고 K시에 있는 경마장까지 출입을 한단다. 이게 막내아들, 화자의 막내 삼촌이 형들에게 고자질한 것을 옆에서 들은 내용인데, 막냇삼촌이 열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경마장이 있는 K시에 갈 때마다 정신지체가 있는 어린 여자애 하나와 함께 다니면서, 그 여자애에게 모자도 사주고, 모자 위에 장미꽃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딸한테는 견진성사를 받을 때 입을 드레스 한 벌이 없는데 말이다.

  훗날 화자가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두 번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한 번은 딸, 아내, 어머니로, 또 한 번은 완전히 자유로운 독신여성 B 부인으로. 영유아 시절을 빼고 첫번째 인생으로 대략 육십 년이 걸렸고, 두 번째는 겨우 이 년이 넘지 않았다.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자식 손주들 다 모른 척하고 오직 자신 하나를 위해 즐긴 인생. 그는 말한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속박의 삶을 살다가 짧은 세월의 자유를 맛보고 인생이라는 빵의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다 드시고 가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영어 알파벳으로 P.S.라고 적고, 이어서 “돌아가실 때는 그 처녀(소녀시절의 정신지체아)가 옆에 있었다. 할머니는 일흔네 살이었다.”고 써야겠다.


  이것에 비견해 재미있는 소품이 열다섯 번째로 실린 <부상당한 소크라테스>인데, 진짜로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해 발바닥에 부상을 입은 소크라테스가 전쟁영웅이 된 기가 막힌 사연이다. 근데 둘 다 소개하면 김이 빠질 거 같아서 오늘은 생략한다.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4-07-26 0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행복한 장례식>
화요일. 옌롄커, 《연 월 일》
목요일. 부스 타킹턴, <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금요일. 오노레 드 발자크, <골동품 진열실>

그레이스 2024-07-29 07:23   좋아요 1 | URL
<골동품 진열실> 발자크 군요!^^-------

Falstaff 2024-07-29 07:36   좋아요 1 | URL
넵. ㅎㅎㅎ <골동품 진열실>에도 라스티냐크 출연합니다!
 
삼척, 불멸 위픽
김희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는, 안 된 이야기지만 절대 돈 주고 사지 않는다. 꼴랑 단편 하나 싣고 단행본입네, 하는 것도 웃기고, 66쪽에 10퍼센트 할인가 11.700원도 아깝지만 사실은 나라도 아마존 원시림을 지켜 지구 영속에 이바지하고 싶어서라고 구라 풀고 싶어서다. 근데 이 시리즈를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어차피 도서관에 왔으니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은 거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가 김희선 팬이다. SF를 별로 읽지 않아도 그렇다. 어쩌다 보니 이게 여섯 번째 읽는 김희선의 책이다.

  처음엔 외계인과 UFO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영혼의 전이 또는 이동을 통한 특정 인간의 영속성을 모색하더니, <속초, 불멸>은 진정한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병이 깊은 아버지 김기홍씨가 죽기 몇 시간 전에 맏이인 딸을 불러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부녀가 평소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굳세게 필름식 사진관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아침부터 사진관 암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동네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게에 돌아와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신 후에 다시 암실에서 작업을 하는 무미건조한 일을 무려 40년이 넘게 지속했다. 이것 외에는 오직 하나의 취미를 즐겼을 뿐인데, 바로 비디오 테이프로 SF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별로 애틋한 정이 없는 딸이 보기에 아버지가 하도 SF 비디오만 봐서 영화와 자신의 실제 삶을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매니아를 넘어 편집이랄까, 집착 수준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작가는 결론을 독자에게 맡길 것이다.

  이 “우주의 비밀”이 뭘까? 나는 앞 문단에서 “진정한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을 털었다.

  김기홍 씨는 주장하기를, 삼척이란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가방끈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 화자 ‘나’는 삼척이라는 지명이 “상상 속 장소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삼단논법으로 가설을 세우고 논거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방정식이나 갖가지 수식을 써서 도시가 없음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삼척이라는 곳에 자신이 가서 무엇을 본다고 해도 그건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고집한다. 누군가의 비디오 아트일 수도 있고, 가상 무대일 수도 있고, 심지어 홀로그램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평소 SF 영화를 즐겼다고 하니 당연히 비디오 아트나 가삼 무대나 홀로그램을 만든 존재는 베데스타 행성에서 UFO를 타고 도착한 외계인일 확률이 대단히 높겠지만 작가는 끝까지 입을 봉한다.


  작품 이야기는 거의 다 한 거다. 아버지가 죽고 어느 날 인터넷에 ‘삼척’을 조회했고, 이게 알고리즘에 영향을 주었는지 유튜브 추천영상에 조회수 302회의 <삼척, 불멸>이란 동영상이 올라와 클릭해 봤더니 동해안 바닷가에 삼척이라는 도시를 만드는 설치미술에 관한 거였다. 삼척을 만들고, 우리에게 삼척이라는 환영을 심어주고, 견고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세계에 삼척이라는 틈을 끼워 넣는 작업. 그걸 왜 하필 ‘삼척’이라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발음하기 좋아서.

  한 남자가 자다가 꿈에 나비를 보았다며? 이 남자가 잠에서 깨더니 그랬다며?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삼척이라는 곳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데 모두 삼척이 있다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걸 누가 알아? 삼척이란 장소만 대상이 아니다. 매릴린 먼로라는 미국의 여배우가 정말로 있었어?

  안 보고 믿는 자가 진복자이니라.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4-07-25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픽 시리즈 궁금해서 한 권 만났는데 새 책으로는 사지 않을 것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7-25 15:20   좋아요 0 | URL
안 사게 되더라고요. 달랑 단편 하나고요, 읽으려면 두 시간도 안 걸립니다. ㅋㅋㅋ

stella.K 2024-07-25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의 간사함이 보이는군요. ㅎㅎ 저도 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리즈 돈 주고는 안 사 볼 것 같아요. 요즘같이 불경기 고물가 시대에 당장 줄이거나 아예 지출항목에 없는게 문화빈데...ㅠ
그래서 삼중당 같은 문고본이 다시 나와줘야 한다니까요. ㅎ
그래도 이리 쓰시니 귀 얇은 저는 또 좀 혹하네요.ㅎ

Falstaff 2024-07-25 15:21   좋아요 1 | URL
아오, 간사를 들켜버렸네요. 눈치도 빠르셔요. ㅋㅋㅋㅋ
삼중당 문고 같은 건 이제 영원히 안 나올 겁니다. 우리나라도 당시엔 해적판 왕국이었잖습니까. 요즘에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요. ㅎㅎㅎㅎ

하이드 2024-07-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어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보일때마다 빌려서 십여권 정도 읽었는데요, 읽다보니, 다시 읽고 싶은 책들도 있더라고요. 좋아하는 책은 사놓고 볼만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 책 안 읽는데, 책 읽는 문턱 낮춰주고, 일단 다 기본은 하는지라 소설의 매력에 익숙해지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디자인이 진짜 잘 빠졌어요. 뭐, 팔리는 책들이 없고, 책 값 많이 오른 와중에 괜찮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삼척,불명>도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4-07-26 05:36   좋아요 0 | URL
저는 편집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공간이 너무 널럴해서 글자가 몇 개 들어가지 않아 그나마 몇 페이지 안 되는 게 휙휙 넘어가더군요. 다 취향의 문제겠지요. 아무래도 제가 올드 패션이다보니 그런가 봅니다.
 
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15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난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반유대주의법인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자 1935년에 스칸디나비아로 이주했다. 3년 후인 1938년 11월 7일부터 13일까지 베를린을 필두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서기관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폼 라트만이 열일곱 살의 폴란드 유대인 헤르셸 그린스판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사건을 빌미로 ‘수정의 밤’이라 불릴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이 벌어진다. 보슈비츠 일가는 아마도 독일을 그나마 쉽게 탈출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잡았던 듯하다. 실제로 수정의 밤이 있던 1938년에는 대거 주변국으로 탈출하는 독일 지역의 유대인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인접국들이 국경 경비를 강화해 독일 탈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독일 거주 유대인들은 집단 폭행과 체포에 이은 수용소 수감의 공포에 시달리고 그렇다고 해서 국외 탈출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23세의 유대인 작가 보슈비츠는 아마도 가장 먼저 수정의 밤을 주제로 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다. 누이클라리사는 이미 스위스를 거쳐 가족 누구보다 먼저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후였다. 이렇게 작품은 1939년에 영국에서, 40년에 미국에서 출간한다. 그러나 저자 자신은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 다른 독일인과 함께 영국 내 수용소에 수감되고, 1940년에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독일인, 독일군과 함께 수용된 유대인 보슈비츠는 수용소에서 다시 당할 수밖에 없던 차별과 멸시 속에서 <여행자>를 고쳐 쓰는 작업을 하며 견뎌낸다. 이렇게 고쳐 쓴 앞부분을 어머니에게 우편으로 보냈고, 뒷부분은 자기 품에 품은 채 1942년 10월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으나, 배가 독일군 U-보트가 쏜 어뢰를 맞아 작가는 원고와 함께 침몰해버린다. 세월이 흐르고 독일의 한 출판사 편집자 페터 그라프는 <여행자>를 뒤늦게 읽고 이를 독일에서도 출간하고자 노력을 기울여 팔레스타인으로 간 누이 클라리사의 딸과 연락이 닿고, 작품의 초고가 프랑크푸르트 소재 독일국립도서관 망명 기록 문서실에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타이프로 쳐서, 유족과 합의 하에 작품을 편집해 2017년 세상에 내놓았으니, 유대인, 독일 유대인 포로, 작품 <여행자>에 어울리는 내력일 수 있을까?


  작품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 ‘질버만’이라는 유대식 이름만 빼고 그를 관찰해보면 어느 한 구석 아리아 인이 아닌 구석을 발견하기 어렵다. 금발, 장신과 건장한 몸, 결코 매부리를 닮지 않은 코, 파란 눈까지, 인종학에 따른 유대인의 외모적 특징을 1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살아생전 한 번도 독일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업가이자 부르주아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마른 전투, 이제르 전투, 솜 전투 등 서부전선에서 가장 악명을 떨쳤던 치열한 전투를 전부 경험했으며, 전쟁 후에는 아버지에게 5만 마르크를 빌어 사업을 시작해, 물론 절세할 수 있는 한 절세하면서, 간혹 꼭 내야 하는 세금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많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살았다. 아내 엘프리데는 당연히 전통 아리안 족이며, 아들 에두아르트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부모의 입국 허가증을 받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위협을 당하기는 하지만 재산도 있고 아직은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 시민의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믿고, 방 여섯 개짜리 현대식 아파트에 사는 입주자들도 그들과 완전히 똑같은 부류로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1938년 11월 7일 저녁 때까지는.

  이날 오후, 오토 질버만은 1차 세계대전에 함께 참전한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친구이자 자금을 대지 않은 유한책임 동업자로 동고동락한 구스타프 베커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시작한다. 질버만에게 베커는 점점 난감한 동업자가 되고 있다. 베커가 도박에 빠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돈이 있어 도박장에 드나들겠는가?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만일 도박장에서 돈을 잃는다면 틀림없이 회사의 돈을 잃는 것일 터인데, 그건 어느 의미에서 질버만 자신의 돈이다. 자금을 대지 않은 동업자는 말이 좋아 동업자이지 사실상 피고용인, 대리인의 신분 이상이 아니다. 질버만은 베커에게 이 사실을 마음 상하지 않게 이야기하려 애쓴다. 그런데 오늘 오후, 베커가 하는 말이 좀 야릇하다.

  “나는 국가사회주의자야. 내가 자네에게 사실을 숨긴 적은 한 번도 없어. 자네가 다른 유대인들처럼 진짜 유대인이었다면 나는 아마 자네의 대리인이었겠지. 동업자는 절대 하지 않았을 걸세! 나는 유대인 사회에 끼어들어 유대인 노릇하는 이방인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 없네. (중략) 내가 반유대주의자라면 이런 (질버만이 한 이야기) 명령 투를 용납하지 않았을 걸세. 안 하고말고! 아무도 나에게 명령하지 못해! 자네만 빼고 말이지. (껄걸 웃으며) 그런데 이런 자가 유대인이라니!”

  이런 말을 남기고 구스트프 베커는 출장지인 함부르크 기차를 타러 떠났다.


  자기 집이 있는 “현대식 건물”에 도착해 이웃인 고문관 쳉켈 부인을 현관 앞에서 만난다. 쳉켈 부인이 따뜻한 시선으로 질버만에게 말한다.

  “당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공정하고 현명하게 생각해야 해요.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누가 물어봤나? 왜 사업가 질버만에게 부당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하지? 아무리 사업만 아는 질버만 사장이라고 해도 눈귀가 막힌 것은 아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어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시작한 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파리에 있는 아들 에두아르트에게 부부의 입국허가를 서둘러 받으라고 독촉을 하고 있는 거다.

  집에 들어가니 손님이 와 있다. 테오 핀들러. 벌써부터 질버만에게 집을 팔라고 권하던 이다. 당연히 얼토당토않게 싼 가격을 제시하면서. 질버만이 생각하기를 자기 집의 적정한 가격은 아무리 싸게 보더라도 20만 마르크 아래로는 매길 수 없다. 유대인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헐값에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향유하고자 하는 소수의, 그러나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닌 독일인 가운데 한 명인 핀들러는 사실 별로 틀리지 않은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유대인 질버만은 그걸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질버만은 9만 마르크, 대금 중 3만 마르크는 현금, 나머지는 저당권 2순위로 지불하라고 요구한다. 핀들러는 제의에 코웃음을 치며 처음엔 그냥 인수를 해주겠다고 한다. 어차피 국경을 넘을 때 현금을 다 빼앗길 것이니 뭐하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려 하느냐면서. 그러다가 1만5천을 제안한다.

  이때 56세 먹은 누이동생 힐데한테 온 전화를 받는다. 거의 십대 소년들로 구성된 돌격대원, 친위대원이 집안에 난입해 남편 귄터를 구타하고 체포해 갔다고. 아마 포로수용소로 보낸 거 같다며 거의 히스테리 상태로, 오빠도 몸 조심하고 그 사람들이 언제 자기 집에 또 올 줄 모르니 자기한테 들를 생각도 하지 말라 한다. 사태가 긴박해진 것을 느낀 질버만이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자, 핀들러의 수정 제안이 기다리고 있다. 1만5천에서 1만4천으로. 흥분한 질버만. 아니 이럴 수도 있나? 그러나 질버만을 호출하는 초인종이 긴박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이곳에도 돌격대원, 친위대원이 몰려온 거다. 핀들러가 이때 말한다. 뒷문으로 피하라고. 엘프리데는 아리아 인이니 별 문제가 없을 터, 질버만 당신만 피하면 된다고. 그러면서 한 번 더 제안을 수정한다. 1만. 질버만이 생각하는 최하 적정가 20만 마르크의 5퍼센트에 불과한 1만. 질버만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빨리 떠나십시오. 여기는 독일인인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공증 받을 때까지 당신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질버만은 그렇게 도주하고, 대신 미소를 머금고 활짝 열어준 현관문을 벌컥 밀고 들어온 돌격대와 친위대 청소년들은, 유대인의 집이니 앞에 선 핀들러가 당연히 이 집의 주인인 유대인이라고 여겨 단호한 동작으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집에서 쫓겨난 오토 질버만. 지갑에는 겨우 180마르크가 들었을 뿐이다. 책상 서랍에 훨씬 많은 돈이 있었는데 그걸 챙길 시간이 없었다.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아내 말대로 호텔에 가본들 ‘질버만’이라는 이름으로 숙박계를 쓸 수나 있을까? 아니나 달라, 혹시나 해서 가 본 호텔의 매니저 로제는 질버만을 보자 난처한 표정으로 질버만의 악수하려는 손을 거절하고 호텔리어다운 온화한 말투로 숙박을 거절한다. 선생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디로 가지? 다른 호텔 앞에서 만난 프리츠 슈타인. 슈타인 회사의 소유자였던 인물이다. 역시 집에서 도망나와 먹을 것이 없어 거리를 배회중이다. 질버만은 그에게 50마르크를 건네준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로 가지? 궁리하다 떠오른 인물 한 명. 거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20년이 넘는 우정을 닦은 친구. 구스타프 베커. 그가 있는 함부르크로 가자.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른 의문, 의문, 또 의문.

  “오늘 도대체 베커가 왜 알려주지 않았지? 뭐든 미리 아는 사람 아닌가?” 소름끼치는 의구심이 솟는다. “베커가 기회를 잡은 거야. 내가 그의 손에 있잖아. 내 재산을 전부 순식간에 빼앗을 수 있어. 베커는 나치고, 그것을 숨긴 적도 없어. (경제적)기반(현금)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하던 동료. 반평생이나 알고 지내던 사이라도 지금은 무엇이든 의심하는 시대. 흔들리면 안 돼!”


  이 유대인, 곤경에 처한 유대인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공동체에 대고 이렇게 외친다.

  “그보다 더 나쁘고, 더 멍청하고, 더 잔인한 공동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요. 선량한 소수는 사악한 다수보다 여전히 나은 법이지요.”

  오토 질버만을 포함한 당시에 희생당한 숱한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안타깝고, 그들을 애도하지만, 질버만 선생, 당신이 틀렸어. 문제는 국가사회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 언제나처럼 문제는 권력이라니까. 선생이 곤욕을 당하고 불과 십년도 되지 않아 유대인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기 시작한 폭력을 생각해봐. 지금 내 머리엔 군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소이탄이 저절로 떠올라, 당신이 당하고 있는 애타는 광경에 그렇게 깊게 감정을 몰입시킬 수 없더라고. 유대인들도 권력, 무력이 생기자마자 독일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흡사한 폭력을 구사해. 언제나 문제는 권력이라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