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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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에 모시페그가 쓴 <아일린>을 꽤 재미있게 읽어서 곧바로 <내 휴식과 이완의 해>도 읽으려 했다가, 독자 평이 하도 좋지 않아 안 읽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어라, 도서관 개가실에 책이 꽂혀 있어서, 그래, 세월이 꽤 흘렀으니 이제 한 번 읽어봐도 괜찮겠다 싶어 책을 폈다가 에그머니, 폭삭 망해버린 책. 독자 평점이 높은 베스트셀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왕왕 있어도, 이를 5별망작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독자 평점이 아주 낮은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없다, 이건 진리 비슷하네.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이렇게 말한다.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일 년간 동면에 들기로 계획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차갑고 신랄한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고,

  책 속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① 오래 전에 지나간 것과 ② 요즘 지나가고 있는, 겪고 있는 것이 있으니, ①은 유소년 시절에 각자 자기일 때문에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표현해주지 않은 부모이고, ②는 나를 버리고 자기 또래 여성과 결혼을 모색하고 있는 나이 많고 구강성교에 환장한 (‘나’의 입장에서)애인 또는 (상대인 트레버 의견으로)섹스 파트너다.

  무정한 부모는 둘 다 죽었다. 죽으면서 지금 ‘나’가 살고 있는 뉴욕 이스트 84번가 고급 아파트와 뉴욕 주 북부의 옛집, 그리고 주식과 채권 등의 동산을 남겨, 옛집에서 들어오는 집세, 아버지의 옛 재정관리자가 아직도 관리하고 있는 투자금에 대한 이익배당과 이자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통장에 꽂혀, 아이비 리그 가운데 한 학교인 컬럼비아 대학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나’는 노동할 필요가 전혀 없으면서, 내가 벌지도 않은 돈으로 진짜 명품 옷과 속옷, 신발, 기타 악세서리까지 완비하고, 심지어 사놓고 상표도 떼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할 정도인데, 원래 되는 인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되는 법이라, 모델 같은 미모까지 완비해서, 숱한 사람들이 ‘나’를 숭배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있다. 참고로 지금 스물여섯 살이다. ‘나’가 대학 4학년 때 법적으로 확립된 고아 신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 없던 부모가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늘 느끼고 있는 과거의 한 페이지로 등장한다. 가정폭력, 학대 이런 거? 없었다.

  애인 트레버. 물론 윌리엄만큼은 늙지 않았다. 이이를 설명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체위와 기교의 종류를 이야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점잖은 우리는 이쯤에서 말을 말자.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많은 아저씨로, 하도 젊은 여성하고만 잠자리를 해서 그런지 이제 자기와 동갑, 갑장인 여성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육갑을 떨어 ‘나’와 그만 만나자면서 이별 기념으로 여태 ‘나’가 즐겼던 비디오 재생기 대신 DVD 플레이어를 선물하고 떠난다.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 가면 정말로 그 여자와 결혼한다.

  26세의 ‘나’는 돈이 많다. 동산, 부동산 다 많다. 그런데도 취직을 했다. 버그도프스와 바니스와 이스트빌리지의 최고급 빈티지 부티크에서 쇼핑한 경탄스러운 의상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배경이 ‘나’의 무지막지한 직업적 자산이 되어 웨스트 21번가에 있는 ‘순수미술’ 갤러리 중 하나인 더키트의 직원자리를 손쉽게 얻었다. ‘나’의 보스 너태샤가 ‘나’에게 바라는 건 패션 캔디. 아방가르드한 옷을 입고 갤러리의 책상에 앉아 관객 누가 질문을 해도 잘 모르는 척하는 일을 하며 연봉 2만 2천 달러를 받았다. 그깟 연봉은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놀면 뭐해. 그러다가 창고에서 잠들어버리는 일이 습관이 됐다. 중국계 핑시의 전시회가 있었다. 개들의 박제를 놓은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근데 유럽 출장 간 너태샤가 전화를 걸어 ‘나’를 해고해버렸다. ‘나’는 짐을 챙겨 나가려 하다가, 어차피 오늘까지니까 할 일이 남았다면서 밤까지, 다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기 전에 개1과 개2 사이에다 똥을 누고, 닦은 휴지를 개3의 입에 물려놓고 나왔다. 너태샤가 욕을 욕을 했겠지만 고소를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완전한 맨정신은 아니었다. 정말 맨정신이었으면 진짜 도라이게? ‘나’는 뉴욕에서 아주 드물게 찾을 수 있는 나쁜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을 만나 진정제를 처방 받아 많은 양을 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내 휴식과 이완의 해>도 잠에서 깨, 24시간 영업하는 잡화점 ‘보데가’에 가서 대용량 커피 두 잔을 사, 한 잔은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원샷으로 마셔버리고, 두번째 잔은 TV로 영화를 보며 동물 모양 크래커와 함께, 트라조돈, 앰비언, 넴뷰탈을 먹은 후 천천히 잘 때까지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트라조돈. 수면 유도제. 앰비언. 진정제. 넴뷰탈. 진정제이면서 약물을 이용한 사형집행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약물을 처방해주는 의사가 닥터 거북이, 터틀이다. 택시 사고로 목에 발포고무로 만든 보조기를 달고 있고, 뚱뚱한 얼룩고양이를 안고 있는 나이든 여자.

  ‘나’는 닥터 터틀에게 호소한다. 6개월간 잘 자지 못했다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 절망과 불안을 느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욕구를 막아줄 뭔가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PTSD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진정제가 필요하다고.

  닥터 터틀은 말한다.

  “일단은 리튬과 할돌을 먼저 받아 가요. 치료를 처음부터 요란하게 시작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나중에 좀 별난 약을 써볼 필요가 있을 때도 보험사가 놀라지 않거든요.”

  닥터는 전문가였다. 약물 전문가이면서 보험사를 이마 치고, 뒤통수도 치는 선수. 그리하여 닥터 터틀의 약물 처방과, 처방받은 약물의 임의 과용, 오용, 혼용이 시작되면서 작품은 노골적인 목불인견, 눈 뜨고 볼 수 없는 차원으로 접어든다.  진정제, 수면유도제, 안정제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수준에 도달한 ‘나’는, 세상에 ‘나’만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불행, 부모와 트레버의 애정 부족으로 점점 망가져, 빨래하기 귀찮아 더러워지고 뻣뻣해진 팬티는 그냥 버리고, 샤워는 잘 해야 일 주일에 한 번하고, 눈썹 뽑기, 탈색, 제모는 생략하고, 보습제, 각질제거제도 중단한다.

  게다가 ‘동면’에 들어가서 잠을 자는 “내 휴식과 이완의 해”가 2000년 6월에 시작하니까, “해year”라 했으니 2001년 6월에 동면이 끝나면, ‘나’를 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2001년 9월 11일, 무역협회 건물 테러 사건이다.

  도대체 뭐야? 뭘 주장하는 거야? 난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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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4-07-22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랑 비슷한 반응이에요.
전 예전에
“Things are alive. She is beautiful. 이라고 되뇌이는 주인공의 마지막 몇 문장을 읽으면서는 여지껏 (그래 이건 과거의 일이고, 소설이고, 이렇게 씁쓸한 코메디로 쓰는게 이 작가의 스타일이야 라지만!) 재미있게 읽었지만! ....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고 말았다. 영어책으로 읽었으니 영어욕.
WTF “ 이라고 했거등요.

Falstaff 2024-07-23 08:11   좋아요 1 | URL
어제 오랜만에 과음을 해서 꽐라.... 지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흑흑흑....
아이, 이 책을 갖고 무슨 코메디 운운.... 그냥 돈 많은 젊은이가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이야기예요. ㅎㅎㅎ
 
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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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에 국립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 군사학부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빅토르 올레키예비치 펠레빈은 아버지가 권했는지 모스크바 에너지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음에도 학업을 때려 치우고 글쓰기에 몰입한다. 이 시기가 우연히 소비에트 각지에 우뚝 솟아 위용을 과시하던 레닌의 동상이, 목에 굵은 밧줄이 걸린 채 콘크리트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뎅거덩, 떨어지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는 모스크바에서도 양철 상자에 동전을 넣기만 하면 와당탕, 소음을 내며 양철 자판기에서 펩시콜라(P)가 쏟아져 내리던 때, 대마초 연기와 코카인을 코로 흡입하느라 코 점막이 거덜이 난 청년들이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파는)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 마시면서 당연히 러시아 말로 “피즈테츠(P)”라고 가장 더러운 욕을 하던 P-세대의 시절이었다. 1989년에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발표해 작가로 데뷔한 펠레빈은 1992년,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아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첫 장편소설 <오몬 라>를 발표하는데, 이 범죄형 얼굴을 한 거구의 사나이가 발표하는 소설은 이후 나오는 족족 러시아 판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니, 아무래도 대학 또는 전공 선택은 초장에 헛발인 거 같지?

  나도 이이가 쓴 작품은 <P 세대>와 <스너프>를 읽어봤다. <P 세대>는 앞에서 잠깐 소개한 시절의 시대극이고 <스너프>는 한 3천년이 지난 시점을 무대로 해서 (글을 쓰던) 지금 시대의 문제점을 풍자한 SF 소설이었는데, 내가 읽기로는, 내 취향이 SF 보다 아무래도 시대극을 좋아해서 그런지 <P 세대>를 재미있게 읽었다. 역시 SF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뇌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하고, 소비하는 만큼의 효용을 보장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 국한하면 그렇다는 거다. 아무쪼록 SF 팬들께서는 이 말 읽고 열 내지 마시라. 그러면 장편 데뷔작인 <오몬 라>는? SF다. 1992년 발표해서 93년에 브론조바야 울리츠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직 옛 소비에트 연방에 맺힌 아쉬움과 아픔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때라서 소비에트 시절의 말도 안 되는 냉전 상태를 제대로 비틀고 있기도 하다. SF라도 현실 비판이나 풍자를 품고 있으면 독자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법이다.


  마트베이 크리보마조프 씨는 평생 모스크바 경찰로 근무했다. 아들 오비르와 오몬을 낳은 아내는 그만 일찍 세상을 접는 바람에 아이들을 동생한테 보내고 평생 다시 결혼하는 일 없이 홀아비로 살았다. 큰 아이 이름 ‘오비르’를 우리말로 하면 “외국인 비자 등록부”라는 뜻이고, 작은 아이 ‘오몬’은 크리보마조프 씨의 바람대로 자신을 이어 경찰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경찰 특수부대”라는 이름을 주었다. 불행하게 오비르는 열한 살 때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으며, 더욱 상심한 크리보마조프 씨는 거의 하루 종일 보드카와 맥주에 절여져 다 낡은 소파에 기대 앉아 세월만 죽이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원래 이이의 진실한 꿈은 모스크바 근교에 작은 밭뙈기를 장만해 비트와 오이 따위를 기르면서 말년을 평화롭게 보내는 거였는데, 꿈이 쉽게 이루어지면 꿈이 아니라서 그냥 꿈만 꾸었다.

  작품의 주인공 오몬 마트베예비치 크리보마조프는 어려서, 유소년 시절 동네 작은 놀이터에 창문이 두 개 달린 장난감집을 기억한다. 이 장난감집이 오래 돼 망가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이것을 다시 리모델링했고, 그게 어린 오몬이 보기엔 비행기처럼 보여, 안에 들어가 유소년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이 설원의 상공을 나는 비행기 안에 있다는 식으로 설정하고는, 조국의 상공을 침범하는 유럽, 미국의 전투기와의 교전 같은 걸 상상하기를 즐겼다. 조국의 하늘은 내가 지킨다! 그게 오몬의 인격을 발아시킨 이후 처음으로 비행물체 조종사의 꿈을 키운 계기였다.

  이후 모스크바 변두리에서 열린 “국민경제 달성 박람회장” 주위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거대한 전화기의 울음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바로 ‘그’가 보였으며. ‘그’는 허공에 앉은 자세로 공중에 떠서 천천히 이동했는데, ‘그’의 뒤에 호스가 달려 아마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았으며 검은색 헬멧 유리를 통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박람회장이다. 일종의 쇼를 보여주는 곳. 이때가 1960년대 말쯤이니까 미국과의 우주 개발 경쟁을 하던 시기로 우주공간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했을 터이다. 하여간 오몬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으니,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중력뿐임을 영원히 절감”하게 된 일. 이걸 조금만 더 멋있게 쓰자면, “지상에서 평화와 자유를 획득하는 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 오몬의 영혼은 하늘 저 높은 곳을 염원”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오몬은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눌 미쪽 스비리덴코를 만난다. 미쪽은 만사에 의문을 갖는 타입이지만 일단 비행사가 될 것이고, 그런 다음 달로 날아갈 것을 확신하는 소년이었다. 다행히 미쪽의 아버지 스비리덴코 씨는 크리보마조프 씨와 달리 술과 우울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양반이라, 미쪽이 7학년을 끝낼 여름에 아들과 친구를 위해 “로켓” 캠프 이용 허가증을 얻어주어 모스크바 중상급 가정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캠프에 갈 수 있었다. 캠프의 식당 안에 종이로 만든 로켓의 모형이 놓여 있었는데, 미쪽과 오몬의 궁금증은 처음엔 모형 안에 사람 모형도 들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아무도 모르지. 캠프 강사들도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거의)뭐든지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위하여 미쪽은 한밤이 되자 몰래 식당에 숨어들어 로켓 모형을 해체해버린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 모형도 들어 있는 거다! 그래서 추리하기를, 애초에 제일 먼저 사람을 만들고 의자에 앉힌 후에 조종실을 시작으로 로켓을 안에서 바깥 순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흥미로우면서도 실망스럽고, 작품으로 보면 거대한 복선이지만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힘든 문제점이 하나 있으니, 조종실에서 로켓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없다는 거였다. 로켓에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조종실 내부하고는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 이 캠프에서 미쪽과 오몬은 통행이 금지된 야밤에 이동을 했고, 로켓을 해부한 벌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는다.


  어느덧 소년 오몬과 미쪽이 클 만큼 다 커서 이제 대학을 정할 시간이 왔다. 이들은 고민도 없었다. 항공학교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정하고 다만 어느 항공학교에 가느냐만 남았던 터. 결국 마레시예프 기념 자라이스크 붉은 깃발 항공학교를 선택했다. 때를 맞추어 잡지에 이 학교와 연관된 월면月面도시 생활기사를 본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지역군사징병사무소가 발행한 영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열차를 타고 멀고 먼 자라이스크 마을에서 내리고, 다시 버스로 한참 거리에 떨어진 숲 속의 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위 본고사를 봐야 한다. 본고사는 우리나라 본고사와 달리 필기시험 점수와 별개로 진행하는 면접시험이 결정적으로 당락을 좌우한다. 면접관은 대령급 장교와 군복을 입지 않은, 나중에 별이 세 개인 중장 계급으로 밝혀지는 노인도 동석한다. 면접 초기에 오몬은 버벅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우주비행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로 로켓 캠프에서 있었던 일과, 그 결과 당해야만 했던 혹독한 군사 벌칙을 이야기하자 사복 입은 노인이 마구 홍소를 쏟아내 당당하게 합격한다.

  합격발표가 있던 날, 비로소 학교 건물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첫날 밤부터 사달이 나버렸다. 어떤 끔찍한 사건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이것도 뭔 풍자겠지만, 어쨌든지 간에 오몬과 미쪽, 두 소년은 사건에 말려들지 않고 따로 둘만 사복 노인의 호출을 받아 그를 만나러 간다. 여기서 그가 현역 중장임이 처음 밝혀진다. 그는 말한다.

  “자네들의 시험 결과를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특히 면접 결과를. (중략) 자네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까게베 제1과 부속 기밀우주학교 입학 대상으로 선발되었다. 진짜 인간이 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대신 모스크바로 갈 준비를 하도록 해라. 그곳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까게베”를 알파벳으로 쓰면 “KGB: 국가보안위원회”다. 악명높은 그곳, 맞다. 소련 국민과 외국인의 활동을 감시하던 비밀경찰.

  시절은 벌써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일 것이다. 말은 우주 경쟁이지만 이미 소비에트는 자금력과 기술력 모두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전세계가 다 알고 있었다. 소련 국민들만 빼고. 그래서 소련은 달 착륙과 차별할 생각으로 대신 유인우주선의 우주 체류를 통한 지구관찰에 역점을 둔다. 영화 <아마겟돈>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이끄는 석유시추팀들이 소련인이 관리하는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딱이다. 그럼에도 KGB는 달 탐사를 세상에 광고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같은 장소에서 경쟁하면 있는 것, 가진 것 다 뽀록이 날 터이니 달의 뒷면을 탐사한다고 발표를 했고, 우리의 오몬과 미쪽이 월 배면 탐사의 팀원으로 발탁이 된 거다. 이렇게 작품은 소비에트 시절 정부와 정부기관에 의하여 저질러졌을 지도 모르는 행위를 풍자하기 위하여 펠레빈의 뇌를 짜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오몬 라>에서 “라”는 뭐냐고? 그건 알려드리지. 오몬이 선택한 최고 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수천 년 전에 믿었던 ‘라’ (중략) 신이 매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 였을 것이다. 조종사나 우주비행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영웅들은 종종 매라고 불렸으니까. 나는 만약 내가 정말로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형상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결정해버렸다.”

  즉 오몬 마트베예비치 크리보마조프는 자신의 가문 크리보마조프를 버리고 대신 자신이 선택한 최고의 신인 ‘라’의 가문으로 이적해버릴 결심을 해버린 거다. 미리 알려드리는 이유는, 이게 아니면 작품의 결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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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19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오테사 모시페그, <내 휴식과 이완의 해>
화요일.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여행자>
목요일. 김희선, <삼척, 불멸>
금요일. 베르톨트 브레히트, 《채신없는 할머니》

건수하 2024-07-19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F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뇌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하고, 소비하는 만큼의 효용을 보장하지 않는다.

명언인데요 ㅎㅎ SF 팬들은 이 말 오히려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

오몬 라 예전에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다시 나왔나봐요.. 가 아니라 예전에 나온 책 맞네요. 엄청 재밌어보입니다!

Falstaff 2024-07-19 07:37   좋아요 0 | URL
이 책이 2012년, 12년 전에 나온 겁니다. 기억하고 계신 책 맞을 것 같네요. ^^
뇌 에너지 많이 써가며 다행히 즐겁게 읽었답니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3
츠쯔졘 지음, 김윤진 옮김 / 들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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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츠쯔젠. 작품집 《가장 짧은 낮》을 읽고 불과 두 달 만에 세번째 츠쯔젠으로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을 읽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작가. 《가장 짧은 낮》의 독후감을 쓸 때 벌써 <어얼구나…>가 지금 절판이지만 도서관에 있으니 꼭 읽어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근데 조금 수정. 2011년에 우리나라 초간된 <어얼구나…>는 아직 팔고 있고, 같은 출판사에서 2018년에 중판으로 낸 책이 절판이다. 난 지금도 팔고 있는 초판을 읽었다.

  전에 읽은 두 권의 츠쯔젠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작가의 고향인 헤이룽성을 무대로 한다. 작가가 북부 다싱안링, 대흥안령 산맥에서 출생했으며, 열일곱 살 때까지 살았다고 하니까 어린 시절엔 그곳의 여러 소수민족과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자기 또래의 여자 아이들하고 그 시절 특유의 우정을 위해 팔뚝에 연비를 찍었을 지도. 연비? 연비燃臂가 뭔 줄 아시나? 주로 여자 아이들이, 너하고 나하고 죽을 때까지 우리 우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바늘로 팔뚝에 먹물 점을 찍는 일이다. 원래는 중들이 계를 받으면서 팔뚝에 불을 놓아 뜸을 떠 이를 기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변형된 채 민간으로 유입한 풍습이다.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첫 애인 묘옥이 길산을 기념하기 위하여 뒤편 어깨에 길吉자 문신을 새기며 ‘연비’라고 칭했다.

  츠쯔젠이 마흔한 살이던 2005년에 다싱안링 산맥의 소수부족 가운데 하나인 어원커족을 탐방할 기회가 있어, 이 부족의 최근 백년을 작품에 담은 것이 바로 <어얼구나…>이다. 21세기의 다싱안링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개발되어 있어서 산맥을 관통하는 도로가 생기고, 산림은 벌목을 통해 살뜰하게 파괴되었으며, 따라서 산맥 안의 숱한 동식물은 개체수가 말도 못할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백년 전, 백년 전은커녕 오십년 전만 해도 그곳엔 나무빽빽할 삼森이 어울리는 식물군과 삼森 속의 다양한, 포유류까지 아우르는 원시생명체들이 가득한 생명의 보고였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혁명과 말로만 혁명(문혁)이었던 시절이 지나 개혁개방의 시대가 도래하자마자 소수민족을 포함한 산맥의 생명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열 받지 마시라. 자본주의가 다 그런 거라고? 아닐 걸?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다.


  다싱안링 산맥의 소수부족, 어원커 족의 백년사라고 했으니, 자신들 만의 언어는 있되 문자가 없는 부족의 역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지난 시절을 이야기해줄 화자, 백년 가까이 산 사람일 터. 아무래도 유전자 자체가 남자보다 오래 살게 디자인된,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90대에 진입한 할머니가 하루 날 잡아 이야기한 내용이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할머니 ‘나’는 ‘우리 부족’ 마지막 추장의 아내이다.

  잠깐 교통정리. 어원커족은 씨족의 이름이다. 씨족은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씨족을 총괄하는 인물이 있는지,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고, 각각의 부족 지도자를 이 책에서 추장이라 칭한다. “옮긴이의 말”에 어얼구나 시내 북쪽으로 약 30킬로미터 거리에 ‘옹기라트’라는 내몽고 부락이 있어서, 이곳에만 몽고족, 다우르족, 오르죤족, 어원커족, 러스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는데, 이들을 전부 각각의 씨족으로 보면 될 듯하다.

  화자 ‘나’의 어머니(어니)는 다마라, 아버지(아마)는 린커. 언니 례나가 있었다. 당연히 ‘나’ 빼고 다 죽었다. 말이 백년 역사이지, 백년 전 제일 좋은/좋았던 시절에 성인 열명 남짓의 작은 부족의 백년 역사이니 무슨 거창한 정치, 경제가 있겠나. 그저 살아온 이야기일 뿐. 그래도 여러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비슷비슷하지만 전부 다르고, 개성 넘치고,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사랑하면서도 증오해온 한 세기가 어찌 중요하지 않으랴. 이들 부족은 네 가정으로 만들어졌다. 화자의 부모인 다마라-린커, 그리고 마리야-하세, 이푸린-쿤더, 나제스카-이완. 린커의 친형이니까 ‘나’의 큰아버지이자 씨족의 무당인 니두, 하세의 아버지 다시.

  다시는 늑대를 맨손으로 때려 죽이고, 다른 늑대, 다시가 때려 죽인 늑대의 새끼한테 한쪽 다리를 잃은 다음부터 사람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마리야와 하세 부부는 부족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워낙 산골이라 해 떨어지면 할 거라고는 아이 만드는 일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시아버지 다시가 다시 늑대와 리턴매치를 벌여 복수혈전 끝에 드런 세상 하직한 다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아들이 커서 장가들 때가 되니 마음씨 좋고 얌전하기만 한 엄마 마리야가 그만 악녀 수준으로 변해버린다.

  ‘나’의 큰아버지 니두와 아버지 린커는 다마라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암만해도 한 끗발이 약한 린커가 선수를 쳐서 옆 부족이었던 다마라의 아버지를 찾아가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래서 추장 린커가 죽을 때까지 형제는 한 자리에 앉아도 서로 못본 척, 없는 척했다. 처녀시절 다마라가 보기에 니두는 통통하니 복스러워 좋았고 린커는 민첩하고 날래서 좋아, 누가 청혼을 해도 승낙할 생각이었으니 니두도 안타깝게 된 거지 뭐.

  이푸린은 ‘나’의 친고모. 아무리 고모라도 변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못된 여자다. 물론 다 사정이 있다. 완전히 야생지역에 살다보니 어린 시절에 좀 크게 다쳐 코가 비뚤어졌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남편 쿤더 젊은 시절에 다른 부족 예쁜이한테 장가가겠다고 난리를 쳐대다가 어쩔 수 없이 이푸린한테 가게 된 것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 비슷한 사정 있는 사람이 이푸린 한 명이야?

  이완은 남자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부족의 대장장이로 실력이 뛰어나 씨족의 다른 부족 사람들도 온갖 것을 만들어달라고 몰려올 정도다. 길 가다가 팔려오는 러시아 여성 나제스카한테 한 눈에 반해 그녀를 돈 주고 사서 장가들었다. 나제스카는 당연히 노랑머리. 그리고 러시아 정교를 믿어 시도 때도 없이 십자 성호를 긋는다. 아들 지란터, 딸 나라를 낳아 키우다가 일본이 괴뢰국가 만주를 세우고 쳐들어오자 러시아 사람을 골라 죽인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아들, 딸 데리고 어얼구나 강 왼편, 즉 러시아 땅으로 도망간다. 이완은 떠난 사람이 돌아오겠느냐는 신조로 결코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군용 셰퍼드 정도는 꼬리를 들고 뱅뱅 돌려 단박에 제압하는 완력의 소유자. 이런 사람은 끝이 안 좋지? 근데 이 양반 정도면 문화혁명 지난 사람 가운데는 괜찮은 편이지 싶다.


  이 부족은 곰을 숭배한다. 재미있는 것이 곰을 사냥해서 곰 고기를 먹을 때, 곰의 눈알을 파서 나무가지에 올려놓고 먼저 혼을 떠나 보낸다. ‘나’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린커가 검은 곰을 한 마리 사냥했다. 사냥을 하면 야영지 가운데 불을 피우고 부족원 전부가 모여 고기를 굽고, 삶아 먹었는데 먹기 전에 까마귀처럼 ‘까악까악’ 한동안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래야 곰의 영혼이 지금 곰고기를 먹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까마귀라고 알 터이니.

  부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순록이다. 이들은 순록을 방목하고, 순록이 먹이를 찾으러 가는 길을 따라 이동하며 우리렁烏力楞이라는 텐트에서 산다. 우리렁은 나무 골조를 세우고 순록 가죽을 둘러 만들고 이때 천장이 뚫린 상태로 두어 우리렁 안에서 피운 불의 연기도 빠지고, 음식 냄새도 빠지게 한다. 당연히 잠을 자면서도 하늘의 별과 달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도시, 이들 눈에 도시지 우리 눈엔 두메산골 마을에 사각형으로 지은 지붕 있는 집은 무슨 상자 혹은 감옥 같아서 도저히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고 여긴다.

  순록 말고 식량으로도 쓰고, 곡식, 성냥, 총알, 옷감과 교환할 목적으로 사냥을 한다. 주로 친칠라라고 번역한 토끼 또는 설치류, 사슴, 사슴도 사슴 나름인데 말코손바닥사슴부터 시작해 각종 사슴을 망라하고, 담비, 족제비, 스라소니, 살쾡이 등등 가림이 없다. 곰과 늑대도 포함한다. 그러니 어원커 부족이 애니미즘을 떠받드는 것이 당연하다. 동물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에 다 영이 있어 이를 귀하게 여기는 습성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오히려 신선하다.

  ‘나’의 남동생 루니는 옆 부족 출신 어여쁘고 자그마한 아가씨 니하오와 혼인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씨족 무당인 니두가 세상을 뜨고 만 3년이 지나자 무당의 영이 니하오를 찾아왔다. 그래서 니두를 잇는 무당이 됐다. 무당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의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근데 이제 ‘죽어야 할,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당 입장에서 숨 넘어가는 사람을 살려달라는데 이걸 못 본 척할 도리가 없다. 그래 땅거미가 질 때 시작한 굿이 새벽까지 이어져 결국 니하오 무당이 픽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면, 죽어가는 사람의 배 속에 든 독물이 한꺼번에 왈칵 역류하여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이제 남아 있으면 안 되는 생명 하나를 빼기 위해 생명의 영은 대신 니하오의 자식 하나를 데려간다. 이런 사람 살리는 굿을 하기가 두려워 부들부들 떨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운명을 지닌 무당.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참 애달프다.


  3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화자 ‘나’의 초년, 중년, 노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야기의 중심은 다마라-‘나’-다지야나-이롄나, 이렇게 여성 4대의 행적을 좇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나’의 딸인 다지야나는 다른 인물보다 아무래도 무게가 덜하고, 손녀 이롄나가 당연히 어원커 씨족의 미래를 의미한다. 중국 최고의 학교라는 베이징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다시 다싱안링 산맥으로 돌아온 이롄나는 실제 어원커 족 인물이자 화가인 류바柳芭를 모델로 했다는데, 베이징대학-헤이룽성 귀환은 작가 츠쯔젠과 같기도 하다.

  이 독후감을 정말 다 읽으셨다면, 혹시 모르겠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연상했는지. 사실 그렇다. 잘 찍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느낌이다. 당연히 츠쯔젠의 담담한 문장으로 감동은 더 하다. 사실 다큐멘터리 팬인 내 입장에서는 많은 장면이 눈에 익다. 특별한 복식과 북을 쥔 채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굿 장면을 포함해서. 재미를 위하여 읽는 작품은 아니고, 한 부족의 삶, 정말 삶다운 삶을, 이제 우리는 다시는 영유할 수 없는 진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본다, 하는 마음으로 읽는 책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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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명학수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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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학수. 처음 들어보는 작가. 메이저 가운데 하나인 창비에서 첫 소설집을 냈으니 괜찮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도서관 신간도서 코너에 올라와 있는 걸 골랐다. 근데 책 앞날개에 실린 사진을 보니, 어라, 벌써 시간의 손톱이 몇 번 할퀸 듯한 사진이 실려 있다. 작가 소개도 내가 읽어본 가운데 제일 짤막하다.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군. 조선일보 신춘문예 출신인데 창비에서 책을 내? 조금 더 뒤져보니까, 경기도 동두천 출신의 1966년생이란다. 그러면 50대에 등단을 했고, 책 저 뒤편에 있는 “작가의 말”로 추측해보면 이상李箱의 레몬을 찾아 헤맨, 즉 십 년가웃의 습작시절이 있었음 직하다. 어디까지나 추측임을 전제로 말하건대, 40대에 습작 시작, 만 쉰하나에 등단, 쉰일곱에 첫번째 단편집을 낸 거다. 흠. 밥벌이는 따로 있겠군 그래. 아니면 고마우신 마나님이 벌어 먹여주어, 명선생은 1년에 5백 파운드의 가욋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었겠고.

  여기까지는 그냥 농담이다. 이제 나올 진심은, 첫번째 단편집이라 하더라도 작품 속엔 오랜 공력이 담겨있다는 거. 구태여 문장을 섬세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중의적이거나, 비유의 혼돈 속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단편답게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지 않으면서 제대로 스토리 라인을 따라 걷는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의 화법과 차이가 나서,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고만고만하지 않아 더 눈에 확 띄었는지도. 나는 즙 짜는 것, 즉 감정의 과잉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울의 골짜기는 혐오한다. 피 토하면 불쾌하고. 하필이면 내가 근래에 읽은 작품들만 그랬겠지. 시, 소설이 대개 그랬다. 희곡은? 너무 많이 벗기고, 죽여서 끔찍했다. 인생 두 번째 책 읽기에 접어든 내가 주로 다른 나라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명학수는 다르네. 좀 일찍 습작을 시작하고, 15년만 더 빨리 등단을 해서 계속 작품을 써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단편집 달랑 한 권 읽고 한 방에 이리 상찬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지만, 여덟 편이 담긴 책 안에서 <호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은하>, 이렇게 네 편이 마음에 들었다면 꽤 쏠쏠한 수확이다.

  <호수>. 그렇고 그런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콘도형 리조트에 간 작가, 화자 ‘나’. 비는 오고, 세미나에 참석하기 싫고, 밖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우산을 쓰고 가더니 잠깐 서서 ‘나’에게 말한다. “같이 쓰실래요?” 그렇게 했다. ‘나’는 이 동네에 있다고 들은 호수가에 가 매운탕에 소주 한 병 하려 했다니까, 여자는 시내에 닭백숙 잘 한다는 곳이 있어 거기 가는 길이라고 같이 가겠느냐고 한다. 그렇게 했다. 호수가 정말 이 근동에 있기나 하나? 있었단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수진은 고등학교 문예부 동창들과 십년 만에 만났다. 수진, 세영, 종수, 영민, 지연 등등과 함께 1차 하고, 2차 하고, 3차로 등단한지 3년이 된 잘 나가는 작가 기훈의 오피스텔로 갔다. 석촌호수의 오피스텔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십년 밖에 안 되는 청년이 혼자 살면, 부모를 잘 만났거나, 20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행운아다. 문제는 다들 술을 많이 마셨고, 수진이 두통이 생겨 기훈이 준 진통제를 먹었는데 오히려 더 심해져 구토도 하고 정신을 잃어 침실에 들어가 기훈의 침대 위에서 잤다는 거다. 새벽에 일어나 도망치듯 가면서 보니, 기훈은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고, 나머지 친구들은 한 명도 없다. 기훈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몰카를 찍었다는 소문이 돌던 모범생이었다. 수진은 혼돈에 빠진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대학 4학년생 커플. 5월에 지하철을 타고 서울랜드로 데이트를 가려다가 하도 가족단위 승객들이 많아 엉겁결에 과천 경마장, 요즘 말로 경마공원에서 내린다. 그냥 재미로 복승식 마권을 사서 돈을 건다. 근데 신기하지, 영주가 배팅한 말 두 마리가 1등, 2등으로 들어와 32.5배의 배당을 받는다. 물론 약간의 세금은 제하고. 말에 관한 아무런 정보와 지식 없이 아홉 마리 가운데 두 마리를 맞힐 확률은 9C2, 9!/(2!*7!), 즉 36분의 1이다. 두 번 연속 맞힐 확률은 (1/36)^2=1/1296. 세 번 연속 맞힐 확률은 (1/36)^3=1/46656. 쉽게 말해서 영주는 계속 맞힌다. 뭐가 씌운 게 확실하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계속, 계속. 그러다가 ‘나’의 형이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한 주를 쉬는데, 어떻게 되게? 읽어 보셔야지.

  <은하>. 합평 수업이라고 있다면서? “라떼”는 그런 거 없어서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여간 합평을 했다니 문과거나 문창과 재학중일 커플이 주인공들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열일곱 살 커플의 임신, 출산, 육아기가 있었다. 어느 소설가가 그걸 소설로 써서 제목을 <은하>라고 했다. 커플은 다퉜다. ‘나’는 미니홈피 내용도, 그 소설에도 관심이 없었는데 미영은 허구가 아니라 더 흥미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군대에 갔고, 미영은 강릉으로 떠나 그걸로 이별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지는 게 진리니까. 그러나 몇 년 후, 미영은 소설집 《은하》를 출간해 단박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다. 찌질한 ‘나’는 미영의 팬미팅에 졸졸 따라가서 뭔가를 물어보려 한다.

  재미있게 읽은 순서다. 당연히 읽는 사람마다 재미있는 작품이 다를 수 있고, 순서도 다를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니 내가 꼽은 작품과 순서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양해하시고 그냥 넘어가기 바란다.

  명학수. 얼른 장편도 하나 쓰기 바란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 이제 쓸 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바란다. 고목나무에 꽃이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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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7-16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쉰줄이면 백세시대에 아직 반백년 남았구만요 왜 벌써 남의 셔터 내리는 소리하세요 ㅋㅋㅋ팔백작님은 (술 줄이면 줄였으먼) 120세 까지 살 거니까 쓸 날이 쓴 날 보다 많이 남았을지도 몰라요 ㅋㅋㅋㅋ (강제로 독후감 공장 가동 연장+설비 증설로 픽션 사업까지 문어발 경영 요구)

반유행열반인 2024-07-16 10:06   좋아요 1 | URL
아 저도 이 작가 등단 소설 폴이라 불리는 명준 제목만 읽고 궁금한데 안 봄 ㅋㅋㅋ했던 게 벌서 여러해 전인데 이력 찾아보니 독특하긴 하네요 ㅋㅋㅋ 수학선생 출신이라니 팔백작님도 수학과잖아 ㅋㅋ역시 글쓰기도 이과가 문과 이긴다...쳇
1966년 경기도 동두천 출생
―성균관대 회계학과 3년 수료
―극단 ‘허리‘에서 2년간 배우 및 스태프로 활동
―학원 수학 강사로 재직

Falstaff 2024-07-16 16:52   좋아요 0 | URL
음하하하.... 읽어보니까 명 선생은 무지 젊게 살았더만요. 특히 예능은 파도타기 아녀요? 쉰 넘어 글 내놓기 시작한 사람 가운데 제대로 파도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아휴, 이런 양반 응원 안 하면 누굴 응원하겠습니까. ㅎㅎㅎㅎ

2024-07-16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16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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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는 생루아의 군사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바칼로레아를 통과, 프랑스로 날아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공부하며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이자 시인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에 집중한다. 그러다 학위논문을 때려치우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이는 작품 속 화자 디에간 라티르 파이와 매우 비슷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역대 공쿠르상 수상 작품을 검색하다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사하라 이남 지역 작가가 받은 공쿠르상이란 타이틀도 얻었는 바, 이 “최초의 사하라 이남” 이란 타이틀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인 T.C. 엘리만의 장면과 겹쳐 보이기도 해서 더 재미있었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은 세네갈 출신의 천재적 작가로 한 시절 파리의 소설판을 뒤흔든 T.C 앨리만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과정이다. 적지 않은 독자, 저널리스트, 작가가 이 작품을 문학이 사람의 삶에 어떻게 연관을 맺는가, 하는 측면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내가 읽어보고 책을 굳이 규정한다면 문학보다는 정치적인 작품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권과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교육받고, 프랑스어로 문학 작품을 쓰는 인텔리겐치아들의 딜레마에 관한 것이라고 읽었는데, 오독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가상의 인물 T.C. 엘리만. 1915년생. 아버지는 프랑스의 세네갈병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하고, 쌍둥이 삼촌과, 형사취수 관습에 의하여 삼촌과 혼인한 어머니와 지내다가,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 세네갈 내 프랑스학교를 다녔고, 워낙 출중한 실력으로 학교 신부가 강력하게 권하여 프랑스 파리로 유학해 공부하던 중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출간한다. 20대 초반의 세네갈 출신 흑인 작가 엘리만이 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파리로 유학 온 세네갈의 후배 작가(지망생)이며 화자인 디에간 라티르 파이가 보기에 “대성당이자 투기장”이었다. T.C. 엘리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이며 일찍이 사용된 적 없는 희귀한 단어를 사용해, 문학의 하늘에 단 한 번 떠오른 별이었다. 진정한 작가는 진정한 독자들 사이에서 목숨 건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어서, 진정한 독자는 항상 전쟁중이라고 주장한다. T.C. 엘리만은 고전이 아니라 세 가지 으뜸패를 가진 컬트로 존재하는데, 첫째가 알 수 없는 이니셜로 된 이름이고, 둘째가 단 한 권의 책만 남겼으며, 셋째로는 흔적 없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다는 거였다.

  1938년에 출간한 이 책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어떤 평판을 받았을까? 먼저 세네갈의 교과서에 나온 것을 보자. 이 책은 “아프리카 흑인의 걸작으로 프랑스에서 본 적 없는 책이었다. 그러나 날개를 꺾어버린 암흑 같은 문학적 사건이 터졌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에서도 어김없이 “아프리카 흑인”이 쓴 걸작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흑인 주제에”, “야만적인 식민지 출신의 야만적인 흑인” 주제에 곧잘 쓴 작품이란 의미도 숨어 있었을 지 모른다. 실제로 이 책 한 권을 내고 일체의 모습을 감춘 엘리만에게 평론가들은 “검은 랭보”라는 계관을 씌워 주기도 한다. 그러다 평론가들은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을 뜯어보고, 이 작품이 저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르네상스, 바로크, 낭만을 거쳐 현대문학까지 거의 전 세대에 걸친 걸작에서 결정적인 문장과 스토리와 플롯을 그대로 따온 완벽한 표절작품인 것을 밝혀낸다. 이 소식을 들은 해당 걸작을 생산한 문인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후손들, 작가를 찾을 수 없으니 책을 낸 출판사를 고소해 거액의 보상금과 범칙금을 물려, 출판사는 도산하고, 책 전량을 회수했으며, 모든 재고 역시 폐기해버렸다. 이렇게 1938년 말 이후부터 아무도 T.C. 엘리만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이제 흑인 천재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미개한 암흑의 아프리카라는 식민주의적 관점을 더욱 강화할 정도로 지나치게 비관적인 작품의 대표로 꼽히면서 독자와 비평가와 저널리스트와 작가들로부터 잊혀진다.

  그러나 거의 무한대의 독서를 한 엘리만은 의도적으로 서구 문명사회가 만들어낸 무수한 걸작들을 콜라쥬 또는 짜깁기해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 다른 의미에서 문화통합적 작업을 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자신이 프랑스 국적의 “백인”이었다면 평론가,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려 그에 걸맞은 평가를 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엘리만은 어떤 변명이나 반박도 없이 그저 무대에서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유럽의 어느 작가와 비교해도 그들의 문화, 문학, 문명에 대한 이해와 습득이 뒤쳐지지 않았던 젊은 흑인을, 짧은 시간 동안 진정한 아프리카산 천재로 떠받들다가 단숨에 “표절”이라는 최악의 구렁으로 던져버린 사람들.

  그래도 프랑스 사람들, 재미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쓴 책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에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공쿠르상과 상금 10유로, 14,800원을 주었으니. “최초의 사하라 이남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나는 한 명이 더 떠올랐다.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아시아 제바르. 제바르는 심지어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일컫는) 마그레브 최초로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생을 마치면서 결국 자신이 작품을 쓰게 해준 프랑스어에 경의를 표했다. 시대가 변해 어떻게 바뀌었을 지 모르지만 제바르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올리면서 북아프리카 흑인에게 자리를 줬으니 좀 덜 까불라고 눈짓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니겠지, 설마.

  프랑스인들은 애초부터 엘리만을 작가로 보지 않고 미디어를 장식할 현상으로 보았던 거였다. 예외적인 흑인으로, 이념에 대한 전장battlefield으로. 프랑스 평론가, 저널리스트, 작가, 독자들은 아프리카 작가의 글에 대해서, 그들의 글쓰기나 창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데, 이 점은 T.C. 엘리만이나,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나, 아시아 제바르나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여전히.


  위에서 1938년 말 이후에 엘리만의 소식을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에 엘리만이 나타나 종종 들르던 카페에서 술 한 잔을 하고는 했다. 이때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근위대 대위가 프랑스 문학, 시와 소설을 매우 좋아하고, 많이 알기도 했는데,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을 출판하고 쫄딱 망한 출판사 제미니에서 근무하다가 호텔 접수원으로 옮긴 직원이 대위에게 엘리만의 책을 소개한 적이 있고, 대위가 우연히 엘리만을 만나 서로 안면을 텄다.

  이 내용은 작품 가운데 모두 네 번 나오는 “전기적 요소”라는 제목의 챕터로, T.C 엘리만의 사촌 여동생 ‘시가 D.’가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화자 디에간에게 해준 말과 자료 속,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정보 등을 근거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화자가 아닌) 작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작품 사이 사이에 첨가한 윤활유로 기능한다. 그 결과, 필요한 것보다 조금 과하게 길게 묘사한 느낌이 드는 시가 D.의 은인이자 동성의 연인인 아이티 시인을 통해 엘리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라틴아메리카 각지를 여행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엘리만이 어떤 이유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에 왔고, 몇 달, 몇 주씩 각지를 돌아다니는지 금방 눈치채게 만든다.

  화자는 마지막으로 엘리만을 정리하기 위해 결국 엘리만과 자신의 조국인 세네갈로 돌아온다. 이때 세네갈에서는 시민단체 BMS(“끝까지”라는 뜻의 결사)의 단원이었던 파티마 디오프의 분신자살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큰 규모의 대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화자 디에간과 함께 문학 동아리를 형성했던 콩고민주공화국인 무심브와도 콩고로 귀국해 모국 안에서 문학을 도모하기로 하는 등 여러 정치상황이 벌어지지만, 그것 참, 디에간(의 문학적 미래 또는 설계)와 세네갈의 정치현황과, 친구 무심브와의 결단 사이가 좀 서걱거린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서른 살의 작가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문장에 멋을 좀 많이 부린 것 같다. 작품 속에서 독자의 태도 같은 것을 몇 번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렇게 말했다가 아무래도 코피 터지지 싶기도 하다. 작가는 시가 D.의 입을 통해 작품을 “잘못 읽는 것은 죄”라고 하니까. 젊어서 그런지 작가가 좀 살벌하지? 어떻게 오독이 죄니? 독자가 오독하게 만든 작가 잘못 아냐? 뭐 “독자 만세”를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쉽고 편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 같은 걸, 굳이 어렵고 화려하게 쓰다보니 독자로 하여금 피곤하게 만든다. 그런 문장이 가끔 나온다면 아이 깜짝이야, 놀래 줄 마음이 있지만 조금 심했다. 베드 씬도 꼭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 필요한 것보다 찐하게 등장하지 않나 싶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바람직하다, 라고 할 수도 있어서 그냥 귓속말로 하고 싶기는 하지만.

  작가는 “뒤에 무엇이 남을까? 문학이다. 문학이 남았고, 영원히 문학만이 남을 것이다. 문학이 답이고 문제이고 신앙이고 치욕이고 자부심이고 삶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싶어 하건만 불과 몇 페이지 뒤에는 또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녀도 결코 백인이 될 수 없”으며 엘리만 역시 “식민지화는 피식민자들에게 황폐와 죽음과 혼돈을 심”고 “그보다 더 심한 건, 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 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것이라고 두번째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

  독후감의 앞쪽에서 내가 이 책을 정치적 작품으로 규정하고 싶어한 것은 이 두 가지 결론 가운데 피식민지 경험이 있고 지금도 사실 반식민 상태에 있는 지역의 인텔리겐치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딜레마가, 문학이라는 다소 형이상학적 논제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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