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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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제임스가 19세기 미국 페미니즘 운동가 사회에 틈입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올리브 챈설러라는 여성. 이이는 여성 자코뱅 당원, 즉 니힐리스트 과격파로 분류할 수 있다. “거센 파도에 시달리는 작은 배 같은 성격”이라고 제임스는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어떤 성격을 말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성격이 올바르거나 삐딱하거나, 진실되거나 위선적이거나, 품위가 있거나 천박하거나를 막론하고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 일단 살기위해 온갖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 문장 앞뒤로 무어라고 나오는가 하면, “낮고 기분 좋은, 교양있는 목소리는 불안해 하고 있고 그것을 숨기려 애쓰는 눈치”이며, “’수줍음 발작 증상’이 있어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조차 바라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작품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올리브 챈설리가 행한 행동이 올리브의 성격으로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 독자들은 즉각 알아차려야 하는데, 문제는 이걸 읽는 순간부터 결말까지 무려 7백 페이지 분량의 길고 장황한 세밀묘사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거다. 아마 백 명의 독자 가운데 아흔여덟 명은 챈설러의 성격을 새까맣게 잊고 있을 터. 장황하다고? 그렇다. 이이와 필적할 만한 작가는 프랑스 소설시대를 연 오노레 드 발자크, 그리고 21세기에 헨리 제임스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딴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만일 헨리 제임스가 21세기의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다면 데뷔도 하지 못했을 거란 말씀. 아, 물론 과장 좀 해서 그렇다. 지금 시대에 어떤 독자가 이렇게 장황하고 세밀한 묘사를 찾아 읽느냐고. 조금 미쳤거나 나처럼 가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백수/백조 아니면.

  작품의 시대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이니 18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남부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의 쓴 맛을 보고 돌아온 미시시피 출신의 매력적인 변호사 베이질 랜섬이 보스턴에 사는 먼 친척 올리브 첸설러를 찾아온다. 멋진 용모와 아름다운 눈, 고상한 느낌의 두상에 곧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전체적으로 다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 나는 남자. 가뜩이나 인구가 적은데 노예까지 전부 해방되어 거의 황폐해진 남부를 떠나 뉴욕에서 변호사로 새 삶을 찾고자 하는 인물이다. 베이질이 올리브에게 편지를 했고, 올리브가 이애 답장을 하자 뉴욕 가는 김에 보스턴 친척에게 들른 것. 여기까지 보면 베이질과 올리브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기겠구나 싶지만 베이질이 좋아하는 여성상으로 말하자면 올리브하고는 아예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고 정치문제에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는 여성”이며 “사사로이 살아가고 수동적이며 반대인 것에 무감해서 공공의 일은 더 강인한 성gender”인 남자한테 맡기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다. 그러니 여성 자코뱅 당원하고 맞기를 바라면 완전히 오산일 수밖에. 엉뚱하게도 베이질 선생에게 눈독을 들이는 여성은 남편이 죽고 수년간 유럽에서 체류한 경험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속물이자 아들 하나 딸린 과부이며 올리브의 언니인 아델라인 여사. 아델라인이 마침 뉴욕에 살며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하지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골몰하면서 한 달 전부터 방문차 와 있던 거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 제임스가 주인공 올리브 첸설러의 성격을 위에 쓴 것처럼 간단하게 몇 줄 끼적였을 따름이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 올리브의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지극한 소명은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부르주아, 미혼, 독신이며 사교에 능한 “진짜 노처녀”가 이 여자의 본질이고 운명 그 자체라고 작가는 웅변한다. 뼛속까지 독신주의자인 올리브는 헨리 제임스가 확 말해버리지 않아서 그렇지 상당한 정도로 레즈비언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진짜 노처녀”의 뜻이 늙은 처녀일까, 아니면 처녀가 아니라는(No) 말일까? 하여간 레즈비언 성향이라 했으니 상대가 있어야 할 터. 이제부터 소개해 올리겠다.


  부모와 딸 하나로 구성된 테런트 가족이 있다. 외동딸 버리나 테런트가 위에서 말한 올리브의 상대역. 19세기 소설의 여자 주인공답게 무척 젊고, 날씬하고 예쁘다. 십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나라의 서쪽에서는 일류 연설가로 소문이 날 정도로 신선하고 시적인 연설을 자랑한다. 좀 웃기는 것이 “자신이 하는 연설이 아니라 ‘부름받아’ 하는 연설”이라고 주장한다는 거. 실제로 교양있고 고상한 청중 앞에서 더욱 수월하게 연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부름받아’ 하는 연설이 말이 좋아 부름을 받는 것이지 혹시 누군가의 주장을 받아써서 기가 막히게 윤색을 한 다음에 타고난 말재주로 청중들에게 쏟아 붓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팍 든다. 버리나는… 자꾸 ‘버리나’ ‘버리나’ 하다가 진짜로 책 속에서 “버릴 것은 다 버린 버리나는” 이 비슷한 말이 나오자 나는 미칠 거 같았는데, 하여간 버리나는 모든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여성의 해방에 공감하고 추종하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자신의 연설이 내부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영감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이질 랜섬은 버리나의 여성 해방에 대한 공감, 추종, 관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버리나의 아버지 셀라 태런트 씨는 한 마디로 사기꾼이다. 젊은 시절에 방문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어떻게 왕년에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배운 집안의 따님을 꼬드겨 결혼에 성공해 버리나를 낳고 키웠다. 그동안 자신은 최면술을 배워 최면을 걸어 질환을 치료하는 최면술 치료사로 활동하고 자기 이름 앞에 스스로 닥터를 붙여 “닥터 테런트”로 활약하고 있다. 잘 사는 건 아니지만 먹고 사는 데 큰 불편은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근근이라도 살아가면 문제가 없을 텐데 진짜 부르주아로 살고 싶은 허망한 희망사항이 스스로를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다는 걸 아마 본인은 몰랐을 걸? 베이질 랜섬은 한눈에 닥터 테런트를 보고 떠돌아다니며 한탕 잡아보려는 역겨운 부류라고 단정한다. 거짓말쟁이에 교활하고 속물이며 비열한으로 가히 최하위의 인물이라 저런 딸이 있다는 것이 짜증나고 당황스러운 사실일 정도라니 뭐 말 다했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딸한테마저 더없이 사랑스럽고 속세를 초월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사기꾼 무리 같은 인상을 받았다. 뭔가 전시품 같고 공연단에 속한 것 같고, 항상 가스등 불빛 속에 사는 사람 같은 분위기.

  베이질 랜섬이 미스 첸설러 집에서 특별하지 않은 저녁식사를 한 다음에 올리브, 아델라인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가진 몇몇 친구들이 금욕주의자 미스 버즈아이의 집 연설회에 동참하며 올리브-버리나-베이질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미스 버즈아이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이제는 나이가 많아 현역에서는 거의 은퇴를 한 상태였다. 이날 공식적인 연설자는 여성해방운동의 위대한 주창자로 알려진 퍼린더 여사였다. 255쪽에 가면 퍼린더 여사의 여성해방에 관한 입장이 “역설적”으로 나오는 바, 소개하면:

  “그들이(올리브와 버린다) 여성의 역사적 불행에 역점을 두는 데 반해, 퍼린더 여사는 그런 일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역사에 관한 지식조차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여사는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시작된 듯, 여성이 불행한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여성의 권리를 요구했다.”

  작품 속에서 퍼린더 여사는 적극적으로 연설을 하지 않는다. 위대한 페미니즘 주창자의 연설을 헨리 제임스도 “창작”하기엔 버거웠던 것 같다.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올리브와 버린다는 여사의 연설에 그리 큰 공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퍼린더 여사가 연설 비슷하게 하고, 이어서 버린다가 연단에 올라 열정적인 웅변을 한다. 당연히 청중들은 열광을 하며 올리브는 이 모습에 반해 그 자리에서 당장 올리브를 후원하기로 결심해버렸다. 그러나 베이질 랜섬은 연설 말고 연설의 내용을 꼼꼼하게 들었다. 이후 랜섬은 버린다의 연설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연설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했고, 토론 분야와 개혁의 대의에서 그녀의 존재가 갖는 중요성도 판별했다. 그녀의 연설은 그 자체로는 기껏해야 ‘학교’ 토론회에서 머리 좋은 소녀가 암기해서 낭송하는 재치 있는 에세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논지가 얄팍하고 횡설수설인 데다 일반론의 범벅에 불과한데, 단지 버레지 부인 집의 베일에 씌운 램프 불빛을 받아 그럴듯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p.418)

  그리하여 결국 버리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유창하게 재치있는 말을 늘어놓는 삼류 장광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럴듯하게 꾸미는 협잡 같은 것에 대한) 수요는 요즘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귀가 얇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좋아하는 우둔한 대중, 그의 조국의 계몽된 민주주의는 그러한 헛소리를 얼마든지 삼켜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가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중략)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평생 풍족하게 살 만한 재산을 마련하게 될 터였다.” (p.500)

  이렇게 아버지 닥터 테러트의 꿈을 달성하게 해줄 착한 딸? 에이,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


  나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가 읽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읽기에 헨리 제임스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활발하게 논의를 진전시켰지만 작품은 페미니즘 적이 아니다, 오히려 반 페미니즘 입장에 가깝다,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19세기 중후반 시절의 생각을 21세기 초반에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 즉 시대를 감안하면 페미니즘이 맞기는 하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아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헨리 제임스가 페미니즘을 정말로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비꼰 것인지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고 싶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나는 내놓고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은 믿지 않는 족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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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20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 책 샀는데요, 폴스타프 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다른 분의 리뷰를 먼저 보고 이 책을 사긴 했는데 ‘헨리 제임스가 페미니스트를?‘ 의심이 들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폴스타프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반페미니즘 소설일 거라는 쪽으로 확실히 기우네요.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24-05-20 14:32   좋아요 0 | URL
옙. 다락방 님의 리뷰,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아닌 거 같아서... 전문가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4-05-22 10:52   좋아요 0 | URL
전문가 다락방 기다린다...ㅋㅋㅋㅋㅋ

건수하 2024-05-20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린다, 버레지 부인 ..은 의도하신 유머인가요? ㅎㅎ

‘보스턴 결혼‘ 이 이 책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던데,
이 소설이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헨리 제임스 소설 저는 폴스타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장황한 묘사 때문에 못 읽겠더라고요. <나사의 회전> 겨우 읽고 그 뒤로는 안 읽습니다...


다락방님이 읽어보신다니 저도 그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

Falstaff 2024-05-20 20:0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본문에 나옵니다. 읽을 때부터 버리나, 버리나 좀 우스웠는데 ˝버릴 것을 다 버린 버리나˝ 나오자마자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ㅋㅋㅋㅋ
헨리 제임스는 정말 묘사가 느므느므 디테일하고 장황해서 함부로 추천하기 쉽지 않은 작가인데 우짜 눈에 띄면 그냥 못 넘어가는 매력도 있어서 거 참, 애증의 작가입니다. ^^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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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게 촌스러운, 윌라 캐더의 저 오랜 시절, 누추해서 아름다운 것들. 포스트 모던 시절이어서 더 영묘한 한 세기 전의 삶의 이야기. 트롯은 시간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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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5-20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는데 벌써 다 읽으셨군요^^

Falstaff 2024-05-20 20:10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읏쌰, 시작하셔요! ^^
 
Mazeppa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
김안(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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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안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하대와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과정 재학의 가방끈을 가지고 있고, 2004년 《현대시》에 시를 발표하여 등단했고, 《현대시》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인스턴트” 동인으로 활동중이라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기는 한데, 자료의 현재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잡지 《현대시》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현대시학》, 《현대시선》 그리고 《현대시문학》이란 잡지는 있다. 시집을 읽어보면 이번 학기 강사로 뛰는 일이 조금 줄어들 거 같은 먹고 살 궁리를 하는 것 보니까 《현대시》 편집장이 아니라 대학의 강사나 전임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근데 독자가 시만 읽으면 되지 뭔 프라이버시까지.

  아닐 걸? 시도 있는 집 자제들이 써야지 먹고 살기 빡빡한데 시인입네 해서 이름이 나 먹고 살만 하려면 겨드랑 간질간질, 간질여주는 시인지 낙서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기성품을 풀빵처럼 팍팍 찍어내는 생산업자가 되어야지, 생전 돈 안 되는 모스부호만 타전하고 앉았으면 그거 참 정말 깝깝하거든. 이럴 때 종종 시가 궁상스러워지고, 비키니 옷장엔 형제, 가족 같은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리는 거고 막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다행히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서, 간혹 시인들은 밥 말고 칼로리 보충을 위하여 소주병 깨나 장하게 비워버리는 경향도 보인다. 한 시절 저 창한 젊음의 리비도가 뿜뿜 뿜어져나오던 정의의 시절에는 이 몸이 이래봬도 시 쓰는 인간이다, 어딘지 모르게 폼도 좀 나고 그랬던 거 같은데, 말 그대로 그랬던 거 같은, 아 옛날이여, 그냥 추억일 뿐,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꾸준히 장복했던 돼지고기와 소곱창과 뺄 수 없는 라스트 코스인 볶음밥까지 홀랑 다 긁어먹을 때까지 입에 달고 다닌 소주잔 때문에 빽빽한 내장지방과, 손톱으로 긁으면 손톱 밑에 허옇게 굳은 기름 끼는 지방간을 보유하게 됐을 거란 말이지. 이런 것들이 시에 다 나오거든. 그러니까 다른 종목도 그렇지만 특히 시를 쓰려면 좀 있는 집구석 자제들이나 쓰란 거다. 아이고, 제발. 누구처럼? 안 알려줌.


  시집 《Mazeppa》.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했다. 나도 몰랐는데, 실제 인물 표기는 Mazepa라고 적고, 바이런, 에밀 베르네, 리스트, 차이콥스키 등 예술가가 예술로 표현한 작품에서는 ‘p’를 하나 더 보태서 Mazeppa라고 쓴단다. 나, 이거 확인하려고, 난봉꾼에 알코올 중독자 장애인 바이런의 책은 집에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고, 베르네는 인터넷 검색, 리스트와 차이콥스키는 정말로 CD 뒤져봤다는 거 아냐? 시인은 절대 가르쳐주지 않겠지만, 위키피디아에 적힌 내용이 맞다면 김안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대족장, 헤트만Hetman 본인이 아니라 일단의 예술가가 형상화한 작품 속 인물을 읽고, 보고, 듣고 그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빗대서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시집의 표제시 <Mazeppa>를 이해하기 위하여 마제파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좀 알아두는 게 좋다.

  바이런, 베르네, 리스트 등이 차용한 젊은 시절의 에피소드: 1663년, 마제파가 스물네 살 때, 볼히니아 마을에서 이웃의 아내 팔보브스카와 모텔 대실을 해 한참 즐기고 있다가 그만 팔보브스키 씨한테 장렬하게 현장 급습을 당했다. 머리에 뿔이 돋아 잔뜩 열을 받은 팔보브스키 씨는 이반 마제파를 홀라당 벗겨 말등에 하늘을 보게 똑바로 눕힌 다음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려 질주하게 만들었다. 말의 힘이 보통인가 말이지. 뛰면서 말의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마제파의 몸을 묶은 밧줄이 피부를 파고 들어 마제파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는데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라서 다행스럽게 말은 집에 도착해 목숨을 건졌다. 이때 하도 피를 많이 흘리고 피부가 터져 부모도 고깃덩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젊은 시절 마제파가 포로로 잡아 배반 혐의로 폴란드 왕에게 넘긴 얀 크리조스톰 파섹이 전한 말로 푸시킨을 비롯한 많은 작가가 작품으로 각색했지만, 원수지간에 만든 말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한단다.


<Mazeppa>  Vernet, 1826


  차이콥스키가 차용한 늙은 시절의 에피소드: 예순아홉/일흔 살, 노년의 마제파. 아내 한나 폴로베츠가 죽고 벌써 5년째 밤마다 꽉 움켜쥔 채 잠을 자다가 드디어 한 아가씨와 연애를 시작한다. 다만 불행하게도 상대가 우크라이나의 대지주 코추베이의 딸 마리아로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다. 간혹 권력지향의 여성도 있고, 노인을 좋아하는 성적 취향도 있으니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마제파가 코추베이의 집을 방문해 잔치를 하는데, 여기서 정식으로 청혼을 한다. 어이, 친구 코추베이. 마리아와 나는 사랑하는 사이라네. 장인,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시게. 코추베이가 들으니 도대체 말이 안 되거든. 그래서 반대, 반대, 결사반대. 이렇게 대들다가 급기야 마제파가 허공을 향해 권총 한 발 발사, 꽝. 그리고는 잽싸게 마리아를 호주머니에 넣고 자기 본영으로 날라 버린다. 코추베이가 열 받아 모든 농노와 친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지만 산채로 잡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본인도 처형을 당한다. 이걸 본 마리아는 홀랑 미쳐버리고, 마제파도 때마침 쳐들어온 스웨덴 러시아 연합군에게 패해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했다가 이듬해 일흔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럼 김안의 마제파는? 젊은 시절 홀랑 벗고 말 위에 묶여 피투성이가 된 마제파라는 데 만원 건다. 그러니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 어떻겠어? 처참, 참혹 무인지경이다.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새로 추가될 약의 이름을 생각한다.

  약의 개수만큼 손가락을 접는다.

  남겨진 손가락을 귀에 넣고 전진시킨다.

  전진,

  희망과 삶의 전진.

  (중략)

  선생님, 무엇 하나 지탱할 수 없는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습니다만……

  듣는다,

   변명을 시작하기 위한 음소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약물의 이름을.  (<Mazeppa> 부분. P.10~11)


  두 번째 줄에 등장하는 “약의 이름”은 <피붙이>라는 시에서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가스피란, 뉴옥시탐, 그리고 도네페질. 가스피란은 속쓰림, 구역, 구토 방지제. 뉴옥시탄은 혈관성 인지장애 증상 개선. 도네페질은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 이걸 먹는 사람이 누구?


  그는 지옥이었고 사랑이었고 희생이었으나

  그는 무능력이었고 아집이었고 알코올이었으나

  나는 그와 비슷한

  피부 색깔과 좁은 어깨와 걸음걸이를

  가진 탓에

  그는 두려움이고 사방 창 없는 벽이고 천장이고

  가계의 첫머리였기에

  그의 신화가 죽은 화분 위에 버리는 물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피붙이> 부분. P. 26~27)


  워뗘? 암울하지? 여기까지 독자는 본다. 시인이 닮은 올림 피붙이와 “무엇 하나 지탱할 수 없는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시 쓰는 직업인의 지금을. 이러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다 지옥이다. 좋아, 시인이 한때 자기 직업이었다니까 지금은 자신이 휘두르는 언어의 팔이 검고 가느다랗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이제 시인은 말한다.


  우연히 흔들리던 바다의 수상한 노래

  그러나 내가 젊을 적 좋아했던 것은

  노래나 시조차 될 수 없었던 마음들, 혹은

  되레 그런 절대가 있다고 믿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향한,

  되레 더 절대적이었던 일갈,

  결국에는 비어 있는 미로

  그 속에서 홍매 빛깔 같던 돼지 속살이 타오르는 리듬에

  부딪는 술잔

  같은 것뿐이었으나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뒤룩뒤룩 늙었지

  이리도

  늙고 뚱뚱해져서야

  말의 해방, 말의 깊이 따위를 향하여 손 내밀다니   (<시인의 말> 부분. P.12~13)


  시인은 살아봤더니 이제는 올림 피붙이가 늘 보여주던 무능력, 아집, 알코올의 상당부분을 그저 따라한다. 다행히 그동안 조국은 조국조국 능률능률 GDP 상승상승해서 올림 피붙이 젊었을 적엔 상상도 하지 못할 푸짐한 돼지고기 구워 술잔을 비우느라 옆구리 살이 뒤룩뒤룩해지고, 즉 그냥 평범한 중년이 되고 말았다. 그것 참. 기껏 고생하고, 노력하고, 변명과 술수를 써서 평범한 사람이 됐다고 자기 입으로 해놓고도, 지랄이다. 평범하면 됐지, 그렇게 아팠다며. 그러나 독자여, 우리가 참자. 현상에 만족해 함포고복하면 그건 시인도 아니니까.

  아무리 세상이 지옥이고 지옥의 유황불에서 명줄이나마 건사하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알코올을 쏟아 붓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죽지 못하면 살아야 하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시인이 돈을 벌려면 시를 써서 좋은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게 시만 잘 쓰면 되……나? 간혹 이런 짓도 해야 하나보다.


   번번이 나는 속절없이 진지하기만 하고 쓰잘데없는 앎의 허영을 좇으니, 그것은 어쩌면 어리석어야만 들을 수 있고 울 수 있고 울며 받아 적을 수 있다는데, 내 손은 마음 없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고기나 뒤집다가 마흔이 넘었구나. 허옇고 쭈글쭈글한, 고깃덩이처럼 마음 없는 손이 되었구나. 고기 굽는 전문가인 양 붉은 입속에 고깃덩이 한 점 집어넣고 궁글리다 보니 그 역시 그들이 토해놓은 말의 겹이라서.   (<말과 고기> 부분. P.17)


  시를 읽고 판단해서 시집을 내게 해주고, 좋은 단어를 골라 주례사 비평을 해주는 전문가들 모셔놓고 시인은 홍매처럼 붉은 고기를 굽는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시인은 이런 일 하면 안 돼? 자존심에 스크래치 가나? 어차피 세상은 지옥이고 쉬운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마흔 살의 평범하게 늙은 시인이라니. 아, 욕하는 거 아니야. 짠해서 그랴, 짠해서. 근데 김안의 경우 원래 싹수가 좀 그랬나 보다.

  학부시절은 아닌 거 같고, 대학원 다닐 때 같은데:


  강의 준비를 마친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발이 없다. 믿음은 언제 끝날까. 늙은 선생이, 노래방에서 여학생을 껴안고 춤을 추며 몸을 쓰다듬는 장면을 본 날도 그랬다. 모두가 박수를 치고 있었고, 난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낮고 얕은 도덕들. 덜구럭거리다가, 걷다가, 전진하다가 귀를 뜯어버렸었다. 통증은 다친 부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감지한 뇌가 보내는 멈추지 않는 비상벨. 씌어진 것과 씌어져야 할 것의 거리.   (<대학 시절> 부분. P.54)


  비겁하지? 보고만 있는 자, 너희들 다 유죄다. 근데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렸다고…요? 그래서 잘 먹고 잘 사니? 이걸 보기만 하다 뒤에서, 아이고 아파. 다친 곳만 아픈 게 아냐, 엄살은 원. 이런 청춘을 누린 자가 세월이 흘러 마흔이 되면 어떻게 변할까?


  젊은 연인은 이제 보이지 않고,

  바람피우다 걸렸다는 한 어른의 낯짝을 떠올린다.

  낯짝에는 두껍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사랑은 두꺼운 것이로구나.

  너도 나도 두꺼워지는구나.

  (중략)

  두꺼워 통증 없는 것이 사랑이구나.

  그것은 이제 내가 영영 모르는 것인데,

  내 살덩이들만은 용케 알고 있는 것이로구나.

  요행히 여태 미치지 않았으니,     (<마흔> 부분. P.73)


  이젠 바람피우다 걸린 늙은이를 “한 어른의 낯짝”이라 하긴 한다. 근데 가만 보면, 내 살덩이들도 알고 있는 거다. 세월이 가면서 두꺼워지는 거, 시인도 두꺼워진 낯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고백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젠장. 대학 시절에 여학생을 껴안고 춤을 추다가 몸 더듬던 교수새끼한테, 교수님 참 낯짝도 두꺼우십니다, 했어야지, 이게 뭐냐, 이게. 나 같으면 했겠냐고? 독후감 쓰기 전에 생각해봤는데, 그랬을 거 같다. 물론 얼른 군대로 튀었겠지만. 제대하고 돌아온 새에 교수새끼 정년퇴직 했기를 바랐을, 아마 틀림없이 그랬을 터이지만 말이지.

  독후감이 길어져 쓰고 싶었던 거 하나는 간단하게 쓰려다 말았다. 시가 쉽고 좋은데 좀 과하게 우중충한 거 같지 않아? 이렇게 얘기하면 웃겠지. 그래도 보태 말해보자. 여태 잔뜩 포복했으면 시인에게 이제 남은 건 각개 약진이다. 이젠 좀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좀 웃었으면. 이렇게 말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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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17 0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은 우연히 영어 소설만:
월요일. 헨리 제임스, <보스턴 사람들>
수요일. 에이모 토울스, <링컨 하이웨이>
금요일. 마거릿 애트우드, 《숲속의 늙은 아이들》

은하수 2024-05-17 0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웃고 싶네요.
시 읽으며 좀 속 시원해지고 싶기도요. 비겁한 남자인게 평범한 거라 말하는거 같아 씁쓸합니다.
그래도 별넷이네요^^

Falstaff 2024-05-17 06:47   좋아요 1 | URL
요즘 젊은 축들이 쓴 시 가운데 시와 시어가 어렵지 않으면 무조건 별 하나 더 주기로 했습니다. 읽을 수 있는 시를 써준 것만 가지고도 감지덕지더라고요. ㅋㅋㅋ

2024-05-17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7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7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8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05-17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인 시집 아무는 밤 읽었어요 ㅋㅋ그치만 인상깊지 않았는지 다 까먹었나 봐요 ㅋㅋㅋ 책소개에 이제는 본명을 병용하나 보네요 ㅋㅋ

Falstaff 2024-05-17 17:13   좋아요 1 | URL
넵. 저도 인상깊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탁 읽으면 뭘 주장하는지 알 수 있는 것 하나 가지고도 ㅎㅎㅎ
(몽땅 제 생각입니다.) 이 양반 이름이 ˝김명인˝이었겠지만 김명인이란 이름으로 워낙 똑 부러지는 시인이 있어서 자기가 소위 예명을 지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뭐, 아니면 말고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5-17 23:39   좋아요 1 | URL
와따 제가 요즘 이문구 소설 읽는데 오늘 저녁에 좀 읽고 앞표지로 또르르 돌아가다 맨앞에 소설집 제목 유래인 서문? 프롤로그? 페이지에서 그 김명인을 발견했네요.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김명인의 시 ‘의자’에서

아주 아다리가 딱딱 맞네요 ㅋㅋㅋ

Falstaff 2024-05-18 06:02   좋아요 1 | URL
김명인은 저 젊은 시절부터 좋아했던 시인이니 아마 여든살 쯤 됐을 겁니다. ㅋㅋㅋ
 
사냥꾼의 수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3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종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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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스물다섯 편을 실은 작품집. 투르게네프가 1818년 러시아 중부 오룔 지방의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1836년까지 모스크바 대학과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1838년에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했다. 이때 나이가 스무 살. 베를린에서 스탄케비치, 바쿠닌 등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1841년에 귀국했으니까 스물세 살이었다. 내가 왜 시기를 따지는가 하면, 투르게네프가 이 책을 낸 시점이 1852년이고, 단편집의 첫 작품인 <호리와 칼리니치>를 발표한 때가 1847년, 작가가 스물아홉 살이었는데, 책의 뒤편에 23번으로 실린 <산송장>의 등장인물 과거 어머니 집에서 일하던 어여뻤던 하녀 루케리야가 생을 접는 시점이 스물여덟 혹은 아홉이고, 화자보다 여섯 살이 더 많다고 했으니 이 시점에서 투르게네프의 나이가 스물둘이나 셋이어야 하지만 이때 그는 베를린에 체류중이었거나 막 러시아에 도착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고향 오룔에서 늘 사냥이나 다니는/다녔던 룸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쪼잔하게 이런 극히 사소한 일 가지고 시비하는 거 아니다. 작품의 무대가 작가의 고향인 오룔 지방의 스파스코예 마을을 중심으로 주로 이 근동에서 사냥을 다니며, 물론 근동이라고 해도 우리 기준으로 근동이 아니라 땅 넓은 러시아 식 근동이라 보통 한 100베르스타, 그러니까 110킬로미터 정도 떨어졌으면 이웃으로 생각하는 근동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경험했거나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말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맞나, 궁금했을 뿐이다. 당연히 작가는 소설, 픽션, 즉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으니 그렇거나 아니거나는 독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투르게네프의 바이오그래피를 보면 아버지가 방탕과 도박으로 타락한 육군 대령 출신인 반면, 어머니는 수많은 농노를 거느린 전제군주적 대지주여서 그런지, 작품집에 등장하는 많은 지주들이 군 장교 출신의 무능력한 남자 지주거나, 폭군 비슷한 옹고집 스타일의 지독한 권위의식에 절은 여지주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투르게네프가 19세기 러시아 국민 가운데 천 분의 일에 해당하는 귀족 부르주아 대지주의 아들로 훌륭한 교육과 복지를 누렸더라도 이런 부모, 방탕과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버지에 전제군주적 어머니하고 살았으면 내상은 많이 입었을 거 같기는 하다. 농노 계급과 비교하면 배부른 엄살이라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귀천과 관계없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잖아? 게다가 베를린에서 교류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작품 속 루시 백성들은 지주와 마름과 관리인과 경찰 등의 공무원에게 끝없이 수탈을 당하는 참혹한 상황을 수시로 당한다. 사실이 그랬으니 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작품(들)의 화자 ‘나’이며 독자가 투르게네프 본인이라 생각하는 인물은 19세기 현재, 1840년을 조금 지난 시기의 루시 백성들이 당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알리기만 하지 뭐 하나 똑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긴 여기서 한 발작만 더 나가면 당시의 로마노프 왕조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겠지만. 실제로 이 책이 아니더라도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의 대부분을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보내다 1883년에 예순넷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숨을 거둔다. 그런데 평소에 투르게네프를 좋아하지 않았거나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살던 도스토옙스키, 그의 <악령>에 나오는 투르게네프의 대역(또는 빗댄 인물)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를 감안하면, 정부의 탄압도 있었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훨씬 숙성한 서유럽으로 “스스로” 도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투르게네프 비호감이던 내 생각일 뿐이다. 괜히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왜 투르게네프 비호감분자였느냐 하면,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루진>에서 잘 생기기만 했지 하는 일마다 배배 꼬이고 능력도 없는 러시아 인물 루진이 난데없이 프랑스 혁명 당시 바리케이트 위에서 폼나게 샤브르를 휘두르며 혁명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참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투르게네프인 <첫사랑>은 워낙 소싯적에 읽어 아무 기억도 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은 왜 유명작품인지 잘 모르겠던 차에 <루진>은 참 난데없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작품집 《사냥꾼의 수기》를 읽어보니 사람들이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 하는 게 이해가 가더라고. 진보적 러시아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늘 독한 착취에 시달려 거칠어진 가운데도 루시의 농민들은 늘 신을 공경하고, 순박하고, 남을 가여이 여기는 선량한 반면, 귀족이나 부르주아 지주들 가운데 선한 인간들은 오직 가문이 쫄딱 망해 거덜이 난 족속뿐이다. 농민과 천민, 하인, 그리고 몰락한 지주를 향한 화자의 시선 역시 선량한 건 당연한데 그거야 뭐 작품이 원래 화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니 누가 자기 자신한테 독한 인간, 악한 인간이라 하겠어? 다 그런 것이지. 이렇게 뻔한 결론은 19세기에는 당연한 거겠지만 거기까지 끌고 가는 방식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조금은 촌스럽다고 해도, 여전히 섬세하고, 무엇보다 “수려하다.” 또한 곳곳에 숨어있는 반어나 위트도 반짝이는데, 이건 여태 내가 투르게네프를 졸면서 읽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발견한 작가의 다른 면모였다. 예를 들어 15번 작품 <타티야나 보리소브나와 그 조카>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 그리 부자가 아닌 여지주 타티야나 보리소브나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지주 마님들이 흔히 앓는 병에도 거의 전염되지 않아서 그녀를 바라보노라면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일년 내내 벽촌에만 사는 여성이 남의 험담도 하지 않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한다든가 하며 지나치게 격식을 따지지도 않고, 쉬이 흥분하지도 않고, 갑갑해하지도 않고, 호기심에서 호들갑떨지도 않는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p.335)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면 감흥이 별로 없을 수 있지만 위에 따온 문장은 당시 러시아의 시골 귀족, 비단 여지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숱한 별 볼일 없는 남자 지주들도 포함해 대부분의 지주, 이 가운데서 사실은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며 잔뜩 폼만 잡았던 소지주들을 은근히 흉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지. 가난한 남자 지주 가운데 그나마 심성이 바르고 불의에 대하여 타협을 모르는 인간은 이렇게 그려 놓는다. 21번 작품 <체르톱하노프와 네도퓨스킨>의 서론 부분이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빨갛고 뾰족한 들창코에 기다란 콧수염은 붉은색인데 머리는 금발인 왜소한 체구의 사내를 머릿속에 그려보시라. (중략) 얼굴, 시선, 목소리,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이 낯선 사내의 모든 것에는 광기어린 대담함과 어디서도 보지 못한 터무니없는 오만함이 숨쉬고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푸른색 눈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여기저기 산만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흘겨보기도 했다.” (p.494)


  맞다. 19세기 중엽의 소설답게 위 두 인물처럼 심성이 올바른 작은 지주들은 거의 언제나 불행한 방향으로만 죽자사자 질주한다. 안 그러면 안 되냐고? 당연히 안 되지. 악당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건 옛이야기나 희극에서 나오는 것이고, 저 멀리 희랍시대부터 제대로 된 비극은 거의 언제나 선한 사람의 끝이 좋지 않은 것이었거든. 안티고네도, 코딜리아도, 데스데모나도 다 그렇잖은가 말이지.

  단편소설 스물다섯 편 거의 전부에 일종의 전형이 있다. 먼저 시기가 나온다. 구체적으로 몇 월이라고 밝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계절에 따른 숲과 강변과 습지와 목초지, 농지, 벌판의 광경을 위에서 말한 섬세한 시각으로 그린 다음에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피관찰자 혹은 이야기를 담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의 외모를 묘사하고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을 될 만한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그리하여 투르게네프의 사냥꾼 시리즈 25편은 모두 “교과서적인” 단편으로 꼽을 만해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본문만 64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분량과 관계없이 술술 잘 읽히는 미덕도 가지고 있다. 책의 제목이 《사냥꾼의 수기》, 여기서 말하는 “사냥꾼”은 표트르 페트로비치라는 이름의 화자 ‘나’이지만 투르게네프 자신이라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다. 이이가 거의 대부분 사냥꾼 복장을 하고, 총을 들고, 개와 충실한 사냥 전용 하인 예르몰라이와 함께 일대를 누비며 만나는 사람들의 일화로 꾸며져 있다. 거대한 대륙의 나라 러시아답게 광활한 풍광이 일품이며 참 다양한 족속들을 구경하는 것도 별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투르게네프를 읽었다,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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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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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세상>의 경우, 책을 읽은 독자가 독후감을 쓰는 것은 자유지만, 그걸 다른 독자, 후에 이 책을 읽을 사람이 볼 수 있게 공개하는 건 신중해야 마땅하다. 르메트르는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대중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이이의 작품을 “소위” 문학성 운운하기에는 좀 그렇고, 거의 전적으로 재미있어서 선택할 터인데, 독후감을 쓰면서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조심스러워야겠다. <식스 센스>를 먼저 본 인간이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래”, 하는 것하고 같은 수준의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전개부가 끝나갈 즈음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숱한 뒤집기 또는 되치기 같은 건, 독자가 읽어가면서 혹시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저렇게 될 것이 분명해, 추리하다가 맞추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재미를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독후감을 쓸까? 이 책이 르메트르의 다섯 번째 독후감이니 작가소개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오르부아르> 3부작이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끝나고, 이제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이후 30년을 다룰 새로운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강조해봤자 몇 줄 되지도 않는다.

  좋다. 이렇게 하자. 이 책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정착한, 몇 천만 프랑의 부르주아 프랑스인 펠티에 가족 이야기이니,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 까지의 펠티에 씨 부부와 3남 1녀를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다.


  수천만 프랑의 현금을 갖고 레바논에 도착한 루이 펠티에 씨는 식민지에서 무슨 사업을 할까, 여러가지로 궁리하다가 1920년대 초에 작은 비누 공장을 매입해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제품을 제조하고, 여러가지 비법을 개발해서 더 좋은 품질을 만들어내는 것에 자신도 몰랐던 재능이 있는 것을 알아챈 루이 펠티에 씨는 “펠티에 상회”를 만들어 1930년대에 많은 수익을 남긴다. 이후 트리폴리,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소규모 공장 몇 곳을 인수해 사세를 확장하고, 자회사의 경영은 관리자에게 위임을 하더라도 제품의 품질 감독은 본인이 직접, 모든 에너지와 재능과 자부심을 쏟아부었으니, 성공을 한 기쁨과 비누 업계의 품질에 관한 한 세계 최고급이라는 가오를 즐기는 기쁨으로 누구 못지 않은 근사한 노년을 누리고 있었다. 회장님은 품질에 전력을 다하고, 회장 사모님 앙젤 펠티에 부인 또한 회사에서 인력관리, 제품 출입고 그리고 회계를 담당했다. 펠티에 부부가 애초에 부르주아로 출발한 게 아니라 전쟁 당시 고생도 할 만큼 해본 사람들이라 특히 여사님의 구두쇠 기질이 대단했으며,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기겠지만 그걸 꼭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하는 펠티에 씨의 과한 자긍심은 3남 1녀 모두에게 가정이란 곳이 세상에서 가장 지긋지긋한 연옥이라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을 부부는 몰랐다. 하기는 이들 부부도 자식들에게 세상의 모든 부모보다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자식들도 당연히 몰랐고.

  펠티에 씨는 20세기 중반에 성공한 사업가답게 자신의 후계자로 당연히 맏아들을 지목했다. 그래서 “펠티에 상회”에서 “펠티에와 아들 상회”로 간판도 바꾸어 달고 맏이 장을 전무 자리에 꽂아 놓는다. 그런데 장이 문제다. 애초에 장은 형편없는 학생 출신이었다. 약간 살이 찌고 동작이 굼뜨지만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센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소극적인 성격에 상당히 몽상적이며 소심했다. 아버지가 바란 대로 비누 공장의 대표가 되기 위하여 화공학을 전공했으나 자신의 적성하고는 극적으로 맞지 않은 터였다. 나중에 스스로 알아차렸듯이 장은 가게를 열어 고객들에게 직접 물건을 판매하는 일이 아주 딱이었지만 이 책에 국한해 말하자면 너무 늦게 알게 된다. 만일 이 4부작이 계속 펠티에 씨 가족의 이야기라면 언젠가는 가족 구성원 모두 장의 자질을 알게 될 듯. 하여간 공장 경영과 이에 따른 상업적 결정은 도무지 장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세상에 이런 모지리가 있을까 싶게 하는 일마다 족족 깨끗하게 말아 자신다. 그리하여 큰 희망을 가졌던 아버지조차 결국 장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가업을 잇는 데 실패한 기운 센 천하장사 장 펠티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지나가던 열아홉 살 여성의 머리통을 곡괭이 자루로 힘껏 내리쳐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만들어버린다.

  장의 아내 준비에브는 우체국장의 네 딸 가운데 유일하게 예쁘지 않은 딸이었다. 워낙 예쁘게 생긴 자매들에게 눌린 바람에 외모를 가지고 유전학적 사건이라 칭해서 그렇지 결코 못생긴 여성이란 말은 아니다. 참 독특한 여성으로 베이루트의 부르주아나 미남 청년 가운데 준비에브가 공원 수풀 속에서 베풀어준 유사성행위의 은총을 못 받은 인간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장과 첫날 밤을 치룰 때까지 어엿한 처녀였다는데, 허, 그것 참, 준비에브 자체가 유전학적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으로 기적 자체… 아니었나? 준비에브는 장이 “펠티에와 아들 상회”를 이어받을 거라는 풍문을 듣고 역시 단 한 번도 여성과 접촉이 없던 장 펠티에를 자신의 아지트였던 공원의 수풀 속으로 끌어들여 멋지게 유사성행위를 시현하고 몇 달 후 결혼에 성공하지만, 후계에서 탈락하고, 장이 살인사건이 발각날까 전전긍긍하다가 부모한테 파리로 가겠다고 하자 생기발랄하게 파리로 날아가 매사 빠짐없이 남편 장을 “뚱땡이”라고 부르면서 들들 볶아 숨만 쉬는 지옥을 만들어낸다. 책이 끝날 때까지 참으로 다양한, 기적같은 악역을 도맡아 하는데, 암만해도 남편의 살인행위를, 엣다 모르겠다, 하나만 더 일러주겠다, 한 건도 아니고 두 건 혹은 모든 살인사건을 알고 있는 거 같다는 말이지. 넹? 장이 악마같은 아내 준비에브의 바가지를 견디지 못해, 자신을 경찰에 넘겨버릴까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결국 아내의 머리통을 터뜨려 죽여버릴 거라고? 난 입틀막이다.


  둘째 아들 프랑수아는 열여덟 살이었던 1941년 5월에 르장티욤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 제1 경기갑 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1차로 가출을 감행해 비시 프랑스군과 회전을 벌인다. 그러나 해방 프랑스는 같은 프랑스 국민끼리 총부리를 맞댔다는 이유로 르장티욤 장군 부대의 공적은 인정하되 조금도 훈공을 인정하지 않아 프랑수아는 전시에 흔하디 흔한 훈장 하나 없이 집에 돌아온다. 이후 이제 심심한데 공부나 좀 해볼까 싶었더니 어린 나이에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단박에 펠티에 씨의 희망, 아니면 적어도 자랑거리로 떠오른다. 바칼로레아 통과 뿐 아니라 단박에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시험에 합격을 해버렸으니 가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고등사범학교는 죽었다 깨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통학할 수 없는 법이라 프랑수아는 이번엔 합법적으로 2차 가출을 하게 된다. 당연히 작은 집을 얻을 수 있는 돈과 학비, 약간 부족한 수준일 것 같았지만 사실은 턱도 없이 모자란 생활비를 매달 집에서 지원 받는 조건으로. 그러나 1948년 3월, 매년 베이루트에서 벌이는 펠티에 가족의 집안 행사에 참석한 꼴을 보니, 그럴듯한 외모와 입성과 달리, 엄마 눈엔 손톱 사이에 낀 잉크와 불결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왜 그런고 하면, 애초에 프랑수아는 고등사범학교 시험도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한테 가장 적합한 유일한 직업이 신문기자라고 생각했던 프랑수아는 기자가 되기 위해서 굳이 고등사범에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1948년 3월에 둘째 아들은 신문사 ‘르 포퓔레르’에서 기자도 아니고, 흔한 리포터도 아니고 단지 신문의 배송작업을 했던 터라 손톱과 손가락에 묻은 40년대 질 낮은 신문잉크가 지워질 틈이 없었다. 프랑수아의 꿈은 4년 후에 일류 언론인이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되는 것이며, 가장 일하고 싶은 신문사로는 ‘르 주르날’을 꼽았다.

  셋째 아들 에티엔으로 말하자면 집안의 문제아이자 죄인이라 할 만했다. 게이였던 것. 그러나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부모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에티엔의 성적 선택을 존중해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외인부대원으로 인도차이나에서 복무중인 셋째 아들의 애인 레몽도 물론 흔쾌한 건 아니지만 인정하고, 에티엔도 레몽이 근무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지금의 베트남 사이공으로 취직해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회계사이면서 은행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에티엔이지만 인도차이나에 무대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특정 기업에 취직을 해야 가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한 장짜리 이력서를 보내본 게 덜컥 합격을 해 사이공 소재 인도차이나 외환국에서 통지가 온 것이었다. 새끼들 키워봐야 별 거 없는 이유는, 에티엔의 취직도 사실은 펠티에 씨가 인도차이나 인맥인 사이공 무역회사 르코크&다른빌 상회를 통해 다 사바사바를 해 두어 가능했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 당시의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인들 가운데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 패배자들, 변태성욕자들이 즐겨 찾는 난잡하고 음란한 것들로 가득한 땅으로 유명했지만 진짜로 가보니 이런 내용이 든 편지가 저절로 쓰어지는 곳이었다.

  “이곳은 매우 난폭한 나라야. 여기서는 모두가 제각기 킬러를 몇 명씩 두고 있는 것 같아. 쩌런에만 가면, 단 몇 피아스트르에 네가 원하는 거의 모든 사람을 없애 줄 수 있는 킬러가 널렸어.”

  이런 곳에서 사이공 북서쪽에 있는 밀림지역 히엔지앙 쪽으로 작전을 떠난다는 레몽의 마지막 편지가 오고는 영 소식이 없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의 에티엔이 고양이 조제프와 함께 도착한다.

  1948년 현재 열아홉 살이며 문학과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막내이자 외동딸인 엘렌. 몇 주만 지나면 아주 쉽게 바칼로레아 2차 시험을 가볍게 통과할 재원이기도 하다.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큰오빠 장에게는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으며, 겁나게 머리 좋은 프랑수아를 향한 존경심을 표하는 반면 막내 오빠 에티엔한테는 모종의 융합을 느끼며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 생각한다. 권위적이고 고집불통이 아버지와 모든 방면으로 막힌 사고방식을 가진 어머니를 견딜 수 없어 부모에게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불만을 엉뚱하게도 학교의 수학교사이자 사진클럽 지도교사인 로몽과 월요일 오전마다 햇빛이 환한 호텔 객실에서 동침하는 것으로 해소한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펠티에 씨는 학교에 거액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회계감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수학교사 로몽의 터무니없는 변태 행위를 발견하게 되어 학교에 쫓아내지만 엘렌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자상함과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엘렌은 아빠의 이런 면을 꿈도 꾸지 못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욕구불만을 해소할 재수없는 수학 선생 로몽도 사라진 터에 아이, 못살아, 외치다가 서둘러 트렁크를 싸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찾아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 오빠들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별 거 있나? 오빠들도 자기들 먹고 사는 것만 가지고도 미치고 팔짝 뛸 거 같은데 말이지. 세상이 그렇게 쉬우면 그건 사는 것도 아니지.

  어떠셔? 참 다양하게 복잡한 집안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불행하다고? 글쎄,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구라니까 선입견 없이 가보시면 어떨지.


  이런 상태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딱 하나, 재미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초 특급 대중소설의 꽃 <대단한 세상>은 시작한다. 확실하게 이건 식민주의적이고 유럽 백인들 위주로 쓴 오락물이다. 그러나 재미있어도 너무 재미있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재미에만 초점을 맞추고 읽자, 라고 제안한다. 거의 분명하게 내가 지금은 이 작품의 재미에 열광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 새 그런 작품이 있었지, 라는 선으로 한 단계 이상 내려갈 것임을 짐작한다. <오르부아르> 3부작이 그러했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살다가 가끔은 신나는 타임 킬링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즐겨봄이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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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5-13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재미보장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

Falstaff 2024-05-13 16:28   좋아요 1 | URL
정말 재미..는 있습니다. 간혹 하드코어 적인 (살인 또는 학살) 묘사에 진저리를 칠 수도 있지만 그런 거 없으면 또 ㅎㅎㅎ 개인 차이일 거 같더라고요. 저는 좀 힘들었습니다.

공쟝쟝 2024-05-14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잠깐 막말 죄송합니다) 르메트르 미친 거 아닌가.. 이후30년이라면.. 가만있어봐.... 50.60.70년대인가요~ ㅋㅋㅋㅋㅋ 68혁명 나오나요.......푸코 나오나요....... (퍽 !!!ㅋㅋㅋ)......
퐐선생님 혹시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읽으셨나요? 제가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이탈리아 처자들 68혁명 스쳐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뻐근.... (왜, 68좋아하게 되었지?) 지금 이미 바깔로레아 통과 어쩌고에서 그시절 나의 프랑스에 대한 로망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풀리기만 해봐라.. (드릉드릉~)

Falstaff 2024-05-14 16:19   좋아요 1 | URL
넵. 저도 그 시리즈 다 읽었습니다. ㅎㅎㅎ
이 책에서는 68년에 있었던 아주 잠깐의 꼬뮌은 나오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다음이나 다음 다음 작품에는 나올 수밖에 없을 거 같네요. 프랑수아와 엘렌 때문이라도 말이지요.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답니다. 분명히 지금 있을 거예요. 얼른 가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