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돌 창비시선 331
송진권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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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진권은 처녀시집을 내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뼛골에 박힌 선연함을 어떻게 다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 내 시들이 소를 몰고 어둑발 내리는 길을 걸어 / 느지감치 집에 돌아와 저녁상에 앉은 아이의 얼굴 같기를”
 시집 제일 뒤편 <시인의 말> 부분이다. 2011년 뻐꾸기 울음 분분한 초여름에 옥천에서 썼다고 밝히는데, 옥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 뭐? 육영수?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얇은 책 전체를 한 번 읽어보면, 시집을 상재한 21세기, 아직도 주변엔 이런 촌놈 시인이 있다는 것에 먼저 감격하고, 이미 생을 마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시가 많다는 걸 발견하며, 세계를 제패한 그놈의 충청도 사투리, 오지게도 썼다고 학을 뗀다. 옥천 출신 시인. 자기도 알게 모르게 동향의 거인 정지용을 일종의 표식돌로 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다른 고장 출신 시인들 평균보다는 더 많이 정지용을 읽고 외우고, 똑같이 써보고 뭐 그랬겠지. 이런 행위를 다 합쳐 우리는 그걸 ‘영향을 받다’라고 한다. 그래서 처녀시집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시의 제목이 <딸레>. 이 시는 정지용이 쓴 제목의 것을 읽어보지 않았으면 감상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 다행히 난 정지용 전집이 있어 시를 찾아 읽어……보는 대신(요새 세상에 누가 복잡한 책장 뒤져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을 걸 찾겠어!) 간편하게 인터넷 검색해서 먼저 봤다.



 딸레

   정지용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앵도 나무 밑에서
 우리는 늘 셋동무.


 딸레는 잘못하다
 눈이 멀어 나갔네.


 눈먼 딸레 찾으러 갔다 오니,
 쬐그만 아주머니 마자
 누가 다려 갔네.


 방을 혼자 흔들다
 나는 싫여 울었다.


 

 시는 구두점 하나도 중요한 장르. 인터넷에 떠도는 숱한 시들이 정확한지 믿을 수 없어, 결국 책꽂이에서 책 막 빼내고 기어이 저 뒤쪽에 숨은 <정지용 전집> 꺼내 확인했다. 역시 인터넷 자료들, 전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 띄어쓰기하고 구두점에 오류. 다시 고쳐 썼다. 

 

 

 정지용의 <딸레>는 이렇다. 먼저 ‘딸레’라는 이름이 참. 이런 것도 공명이다. 앵도, 즉 앵두를 딸래, 라는 듯한 발음의 이름. 하여간 그런데 어찌어찌하여 눈이 멀어 나와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세 명으로 이룬 동무 가운데 사라졌고, 딸레가 어디 갔나 싶어 내가 찾으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또 쬐그만 아주머니까지 없어져, 이제 혼자가 된 나는 그게 싫어 울었다는 시. 이 정지용의 <딸레>는 송진권에 의해 이렇게 변주된다.


 

 딸레 


 송진권


 앵두나무 아래서
 딸레를 데리고 가자
 쬐그만 아주머니는 두고 가자
 바구니에 담아둔 앵두는 뒤엎고
 물크러지기 시작한 앵두는 흔들어 떨구고
 앵두나무 그늘도 흩어버리자
 바늘로 딸레 눈을 찌르고
 딸레를 안고 어르며
 머리를 빗겨주고
 곱게 화장을 시켜 내 각시를 삼자
 방울을 흔들면
 딸레는 노래하고 춤을 추고
 딸레는 눈이 먼 채 밥을 짓고
 딸레는 눈이 먼 채 빨래를 하고
 그래그래 착하지
 딸레는 얼굴도 곱고
 딸레는 마음도 이쁘고
 딸레는 이제 집에도 못 가고 어떡하나 어떡하나 (후략)



 변주도 변주 나름이지, 지용의 간결한 시를 풀어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좀 섬뜩하다. 딸레를 내 각시를 삼기 위해 쬐그만 아주머니를 두고 가서, 혹시 나 싫어 도망갈까 바늘로 눈을 콕 찔러 눈을 멀게 한다니, 나 이런 참혹한 우화가 어딨어. 있다, 있어. 손자 하나하고 같이 저 산골 화전 가꾸며 살던 노파가, 이제 손자가 다 커서 암내 나는 아가씨한테 가려고 날 버릴까 두려워져 손자 눈을 후벼 앞을 못 보게 만든, 박상륭의 책 <열명길> 가운데 한 편. 그러나 송진권의 우화는 ‘내’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래서 둘이는 아들 낳고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더래 / 하는 이야기의 끝처럼 살았으면 싶었지만 / 아무 날 아무 때 어딘가로 나갔다 돌아오니 / 딸레도 없고 아이들도 없고 / 옛날의 앵두나무 아래로 가니 / 앵두나무는 베어지고 / 쬐그만 아주머니도 누가 데려갔는지 없고 / 앵두나무 아래서 / 방물 혼자 흔들다 나는 울었다”가 돼버리고 만다.


 정지용의 깔끔하고 아름다운 시를 이렇게 만들었다. 결과가 좋든 싫든 간에 하여간. 이걸 만약 정지용의 시를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감상이 되겠느냐 말이지. 그래서,
 “* 정지용 「딸레」 변용.”
 간단하게 각주를 달고 말 것이 아니라,
 “* 정지용 「딸레」를 먼저 보지 않고 시를 읽으면 독자는 오리무중일 걸?”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
 자, 송진권의 <딸레>는 위, 아래 다 합쳐 전문을 다 옮긴 셈이니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으면 정지용 먼저, 이어서 송진권의 <딸레>를 한 번 더 구경하시압. 근데 많은 시 가운데 하필 이 시 <딸레>를 제일 앞에다 소개했을까? 하긴 뭐, 시인 마음이긴 하지만.


 이 시집 가운데 불만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시 <산골 엽서> 중에서 두 번째 노래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를 들겠다. 읽어보자.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


 종일 들일하고 들어온 늙은이 둘
 하나는 밥을 안치고
 하나는 쇠죽을 끓인다
 찬장엔 사기대접
 파리똥 앉은 백열등
 켜켜 그을음 묻은 서까래
 밤송이 막아놓은 쥐구멍
 이 정지에서 일곱이나 되는 것들이
 밥을 먹고 몸을 키워 대처로 나갔다고
 김나는 더운 쇠죽 구유에 부어주며
 욕봤다 욕봤다
 짐승 먼저 먹이고
 사람이 먹어야 한다고
 상추쌈 싸 공손히 입으로 가져가는 두 늙은이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
 노는 쌀방개 등허리에
 반짝 모이는 달빛 별빛


 짧은 노래의 제목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는 박목월 「사행시(四行詩) 한 수(首)」에서 따왔다고 각주가 달려있다. 일단 시인이 남의 시에서 제목이 됐건 부분이 됐건 이리 자주 따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무엇보다 노래를 다시 읽어보시라. 종일 들일 하고 집에 들어와 밥 짓고 쇠죽 끓여 짐승들 먹인 다음 크게 상추쌈 싸 먹는, 복도 많지, 이(齒牙) 좋은 두 늙은이, 이 늙은이들하고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하고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지? 나는 모르겠다. 두 늙은이가 쌀방개 등허리에서 반짝이는, 할매는 달빛, 할배는 별빛, 이런 거야? 안다, 알아. 늦도록 들에 나갔다가 돌아와 밥짓고 쇠죽 끓여 소 먹인 다음에 상추쌈으로 저녁 먹은 할매 할배들, 그리하여 이제 밤이 된 풍경을 그렸다는 거. 여기서 쌀방개가 뭔지 아셔? 그냥 ‘방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친절하게 얘기하면 예전 논에서 흔하게 보던 물방개. 검은 연미복을 쪽 빼입은 ‘통통한’ 검은 신사 같은 곤충, 기억나시지? 짙은 연미복처럼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는 등허리, 위의 달빛 별빛이 두 이 좋은 늙은이라서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 안에서 노는 쌀방개 운운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이 목월의 시집을 읽다보니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이란 기막힌 구절이 머리에 팍, 박혀서 자기 시 어딘가에 써먹고 싶은 마음이 과했다, 라는 생각은 왜 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절창이잖은가. ‘우렁이가 핥고 가는 더운 논물’이라니. 그래서 박목월이지, 박목월. 맞아, 다음번엔 목월 한 번 읽어야겠다!


 여태 까탈을 잡기만 했는데, 사실 지금 시절에 이처럼 시골스럽게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송진권을 발견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동시에, 조만간 이이의 뒤를 이어 (교과서 시 해석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을 빈다면) 토속적 이미지를 이야기로 만들면서 뛰어난 시적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 쓰는 시인이 또 언제 등장해 맥을 잇겠는지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시는 너무 현대화, 도시화, 삭막한 비통과 감상의 과잉분비 또는 배설, 또는 추상 이미지, 기호학적 해석 유발 등으로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느닷없이 읽어본 송진권이 반갑지 않았겠는가. 그의 데뷔 시 전문을 옮기면서 독후감을 끝낸다.



 절골
 못골 5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길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꺼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이 잔뜩 으등그러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눈이 풀풀 날리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거튼 함박눈이 눈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릎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워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디 기분이 참 쵸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까지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그치고 못독 얼음 갈라지는 소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지나온 자리만 밟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런단 죽겄다 싶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라네 한 걸음 띠다 꾸벅 또 한 걸을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른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도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 걸음씩 들어갔다네 눈은 퍼붓는디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런 여자가 웂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른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 거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눔아 거가 워디라고 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거튼 눈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 나가겄냐 뒈질 줄 모르구 워딜 가는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본께 둥구나무에 쌓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러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시상이 왼통 훤헌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강생이거치 집으루 내달렸는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둥구나무 저치 가믄서는 절해가매 아이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헌다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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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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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암살자>를 재미나게 읽어 애트우드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은 것이 바로 <시녀 이야기>. <눈먼…>에서 애트우드는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힘과 재력을 포함한 가정 내 모든 권력을 쥔 남성에 의한 행해진 성폭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번에 읽은 <시녀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발발한 길리아드 내전, 대통령 즉위식을 기해 군부에 의하여 벌어진 집권층 학살과 이어진 쿠데타 및 오랜 독재와 경찰국가 체제를 가정한 의사 역사소설이다.
 길리아드는 미합중국 해체 후 북아메리카 동쪽에 자리 잡은 나라. 이 국가에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란 글에서, “길리어드에는 진정으로 독창적이거나 토착적인 것은 없”고 “그들의 탁월함(주: 지금은 이 단어를 ‘탁월성’보다는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합성>에서 발휘”된다고 작가 스스로 얘기했듯이(514쪽), 인류 역사상 안 좋은 쪽으로 모범이 된 몇 개의 정부를 샘플로 만들어냈을 것이다. 길리어드 수뇌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정통 프로테스탄이 아닌, 가톨릭과 침례교를 포함한 모든 이교도를 탄압하여 길리아드는 바야흐로 내전상태에 처해있고, 유대인들에겐 민영화한 운송회사를 이용하여 즉시 길리어드를 떠나게 함으로서 보트 피플로 밀려난 유대인을 과밀하게 싣고 가던 여객선 한 척은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모든 윤리규범은 교조적 기독교 경전에 맞게 시행되어야하므로 국민들은 자신의 재산과 인격과 지위에 따라 적절한 계급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 남자들에겐 사령관, 수호자, 천사, 눈 등의 호칭이 붙어 지휘자, 군인, 스파이 등의 직업이 주어지고, 여자들은 아내, 아주머니, 하녀, 시녀 등의 계급으로 구별한다. 여자들은 모든 사회활동을 금하며 오직 후대를 생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때맞춰 무능한 길리아드 정권은 환경파괴물질을 과감하게 투기하는 동시에, 방사능과 핵폐기물 등 인류에게 최악의 상태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악을 모든 방법으로 완벽하게 배출하여 아메리카를 접한 대서양 인근에 서식하는 어종의 씨를 말리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이제 ‘시녀’가 어떤 계급인지 설명을 해야겠다. 우리말로 ‘씨받이’. 최고위 계급인 ‘아내’는 당연히 남편의 지위에 의하여 자리를 점하게 되는데, 아내가 직접 출산을 할 수도 있고, 출산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다른 여인에게 대신 맡기고 자신은 낳은 아이만 취함으로 자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아이를 낳아주는 여자를 ‘시녀handmaid'라고 했다. 아이를 낳고, 한 한 달가량 모유를 먹인 다음에 아이의 양부모에게 꾸벅 절을 하면 곧바로 다음 가정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서 또 임신, 출산, 수유. 즉, 아이 낳는 기계, 다리 달린 자궁 정도의 위치다. 이들은 국가권력과 현 체제에 안주하는 시민들, 예컨대 아내, 아주머니, 하녀 등에 의하여 철저하게 감시당하는 삶을 산다. 남이 알아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대화도 할 수 없으며, 조금의 사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비관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집단 구성원으로 늘 감시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계급 이탈의 기도도 가혹하게 처벌 받는다. 그런데,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이 시녀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계급으로 누굴 꼽았는가 하면, 시녀를 둘 수 있는 지배층에서 봉사하는 아주머니 계급. 즉 수석 하녀를 꼽았다. 탁월한 선택. 동서고금을 통해 알 수 있듯, 가장 가혹하게 탄압을 받는 계급을 가장 효과적으로 조종했던 건 동족 중 바로 위 계급이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반장이 그랬고, 일본 식민지 조선에서 순사들이 그랬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것들 가운데 특히 씨받이, 시녀들에 초점을 맞춰 글을 썼을 뿐이지 진짜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 가혹한 권력이 어떻게까지 비인간화할 수 있을까, 하는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씨받이 이야기이니 당연히 유사이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기 전부터 특히 덩치와 완력으로 우위에 있던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남성인간에 의해 지속된 유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20세기와 21세기 와서 겨우 몇 십 년 조금 반성하는 시늉하면서 이제 서로 동등하다거니, 그건 그거고 이제부터 서로 잘 살자느니 어떻거니 함부로 얘기하려는 생각 없다. 하여간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한 독재 또는 통제체제에 의한 인간의 말살로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230쪽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는 남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말. 뒤에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다 권력이란 얘기는 도무지 무슨 주장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거릿 애트우드가 처음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구속, 억압, 폭력을 주제로 이 소설을 쓰기로 이렇게 작정을 했었는지는, 아주 몰랐던 건 아니고, 설마 이런 거대 서사에 피해자로 인구의 절반만 해당하게 구상했겠나 싶었던 거다. 이제 실토하자. 독후감 제일 앞자리에 이이가 쓴 <눈먼 암살자>의 대강의 내용을 두었던 건 <시녀 이야기> 역시 근본적으로 <눈먼 암살자>와 같은 부류로 읽어야 함을 비치기 위해서였다.

 비록 작가가 설정한 정치적 음모. 대통령과 요인 암살,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벌어진)군부 쿠데타, 기독교 원리주의와 유대인 추방, 학살 수준의 형벌과 특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 이런 것들이 지난 시절 히틀러 등의 파시스트와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독재정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행태를 종합한 것이고, 그도 모자라 온갖 형태의 자연파괴, 방사능 유출, 아메리카의 지역적 몰락 등, 작가 스스로 주장한 대로, 길리아드 국國을 만들기 위한 뛰어난 “합성”의 결과인데, 이 모든 합성은 결국 여성주의 소설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길리아드에서 여성은 항상 남성으로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아왔는데, 이 장면에서도 애트우드는 놀라운 인류학적 힌트를 던져 넣는다. 반정부 활동을 한 남자를 체포, 고문한 다음, 거의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서, 이 남자를 여자들한테 던져준다. 쉬운 얘기로 공개처형에 처하는 것. 처형은 자리에 모인 여성들 마음대로 행한다. 난 이 장면이 대단히 흥미롭게, 500쪽이 넘는 잘 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행동, 이마를 탁, 치면서 읽었다. 이를 ‘참여처형’이라고 한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 위대한 인류학 서적 <황금가지>를 떠오르게 하는 기막힌 번뜩임. 그러나 인류학적으론 자연스럽지만 인간적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행사이자 축제.
 참여처형은 이른바 ‘구제驅除’ 행사의 뒤풀이로 나온다. ‘구제’라는 거 자체가 공개처형이다. 책에선 세 명의 여자, 두 명의 시녀와 한 명의 아내의 얼굴에 흰 보자기를 씌우고 목에 밧줄을 맨 다음 딛고 선 나무 단을 걷어 차버리는 거. 이게 단줄 아시지? 서양의 교수형에선 한 공정이 더 있다. 페터 바이스의 명작 <저항의 미학>에서도 나온다. 목을 매단 사형수의 다리에 집행인이 매달리는 거. 그럼 목뼈부터 척추 등 관절이 우드득 소리를 내면서 탈골되어 보다 빨리 죽일 수 있단다(우드득, 탈골되는 소리가 이 책에 나오진 않는다). 이런 장면을 보며 흥분한 여성들, 그들이 상당한,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자신들도 조그만 잘못만 해도 이렇게 목매달려 죽을 게 번하니까. 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평소 자신들을 핍박해온 남성 하나를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일, 그걸 집권자들이 생각해내고 시행하는 걸, 난 이걸 생각도 못했던 거였다. 애트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양들은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유용했습니다. 평상시 극도로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는 이들 <시녀>에게도 가끔씩 맨손으로 남자를 찢어죽이는 일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게 분명합니다. 이 행사가 어찌나 인기를 얻고 활용도가 컸는지 중반기에는 정규적으로 시행되어 1년에 네 번씩 동지, 하지, 춘분, 추분에 시행되었습니다. 고대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는 다산제의 흔적을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5쪽)

 

 어떻든, 난 애트우드가 이 거대서사를 여성주의 문학을 위해 사용한 것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없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다.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것이지 그게 옳고 그르고 따지는 건 독자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소설에 대해 느끼는 것은, 이미 있어왔던 사실이나,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가능한 문학적 실제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여성주의 소설을 써도 괜찮을 텐데(마치 <눈먼 암살자>처럼. 얼마나 잘 쓴 여성주의 소설인가), 있지도 않은 디스토피아의 미래, 2045년 이전의 어느 시대 북아메리카에 가능하지 않은 길리아드 국가를 건설해 굳이 또다시 여성을 생식기계 상태로 만들어서,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고 주장해야 했는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가상 역사라면 원조 여성주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전에 여성주의 소설에 관해 비슷한 독후감 썼다가 코피난 적 있다. 자주 얘기했듯이 난 논쟁을 싫어한다. 혹시 생각이 다른 분 계시면 미리 말씀드린다.
 당신 의견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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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열린책들 세계문학 92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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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고’의 뜻이 무엇인가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 책의 87쪽에 “자아의 신화적인 이상理想”이란 말이 나온다. 작중 주인공 스티븐의 아버지는 밀교 또는 심령에 심취하여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 비밀스런 숲 근처 산장(요즘 표현으로 주거 형태 독립빌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에서 이미 영국 땅에선 멸종해버린 멧돼지의 신화적 생존형태에 관심을 두다가 자신이 정말 신화에서나 나올듯한 직립보행 하는 거대한 멧돼지가 돼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아를 신화적인 이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낸 경우. 물론 인간이었을 때의 감정과 지성 등등을 가지고는 있으나 숲에서 살기에, 또는 숲을 지배하기에 적절한 형태로 변화된 상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신화적 이상의 한 형태, 그게 사람이었건, 건축물이건, 아니면 작은 부족이건 간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던 적이 있을 거란 믿은, 바람 같은 것이 어떤 형태로 실화實化되어 실제로 특정 인물, 건축물, 작은 부족이 신비한 태초의 능력을 가진 숲 속에 생겨난 경우, 이것도 미사고라 칭한다. 또, 영화를 통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자아의 신화적 변형’으로 “아바타” 역시 미사고의 하나. 세 가지 미사고의 예를 들었지만 내가 파악하지 못한 책 속의 다른 미사고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혹시 이 책을 읽을 요량이면 다른 미사고를 발견해내는 것도 재미있겠다.
 책의 숨은 주인공이자 가문의 아버지인 조지 헉슬리가 드디어 산장 바로 옆에서 시작하는 크지 않은 숲 안에 있는 미사고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친구인 에드워드 윈-존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재미있는 환상소설 <미사고의 숲>은 시작한다. 편지 속에 신화시대에나 있었던 듯한 부족 ‘샤미가’의 일원인 ‘생의 이야기꾼’을 통해 알게 된 쌍둥이 자매에 관한 이야기, 전설, 신화 등을 소개하며 ‘후르파스나’ 즉 ‘까마귀들이 키운 소녀’란 뜻의 아기, 앞으로 400쪽에 걸쳐 이게 어떤 의미인지 밝히게 될 기본적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 즉 ‘후르파스나’가 우리(그들)가 알고 있는 바, ‘귀네스’ 전설의 원형이라 굳게 믿는 조지 헉슬리. 여기까지 읽으면서 아직은 그리하여 ‘귀네스’란 이름의 미사고가 등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 귀네스가 아서 왕의 비이자 란셀롯의 연인을 뜻할 지도 모르겠다고만 여겼을 뿐. 근데 진짜 귀네스가 나오는 거 아냐 글쎄!
 연구에 몰두하느라 자기한테 아들이 둘 있는지 어떤지,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들들이 참전을 하는지 마는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한테 마음이 상한 둘째 아들 스티븐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그냥 프랑스에 눌러 있었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영국의 산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형 크리스찬과는 계속적인 편지 왕래가 있어서 그가 귀네스란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막상 산장에 도착하니 그녀는 없다. 그냥 가버렸단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더 광적으로 숲의 비밀을 찾는데 골몰하는 형. 그는 아버지의 (일부가 찢어진)일기 같은 자료를 미리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수월하게 숲의 장막을 여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생 혼자 집에 두고 숲으로 사라져버리는데, 아이고 이걸 어째, 귀네스가 동생 스티브 앞에 등장하고 만다. 이쯤 되면 정말로 아서 왕의 전설과 비슷하다. 왕의 비이지만 왕의 신하하고 바람피우는 여자. 저 훗날 리미니의 란체오토 말라테스타 공의 비妃 프란체스카가 시동생 파올로하고 불륜을 맺을 때(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지옥편> 참조) 매개가 되는 스토리로 등장하게 된, 귀네비어. 형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자신의 아내라고 한다. 만일 그 주장대로라면, 시동생하고 사랑하게 되는 귀네스. 이탈리아의 리미니에선 같은 경우에 형 란체오토가 동생 파올로를 뎅거덩, 잘라 죽여 연놈을 곧바로 지옥으로 보냈지만, 아서 왕은 그러지 않고 자신이 애벌론 섬으로 사라지는(죽음의 길을 가는) 결말을 택했다. 이 사건을 서기전 2000년쯤으로 여기는 작가 로버트 홀드스톡, 이이는 귀네스와 스티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미사고들이 사는 숲은 자신의 자기장 비슷한 것으로 나름대로 방어막을 쳐서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있지만, 방어막이란 건 언제나 뚫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곳을 지배하려는 이방인이 들어오고야 마는데, 그게 누구일까. 거의 평생을 바쳐 숲의 비밀, 신화나 전설(myth), 거거다가 이미지(imago)를 합친 미사고mythago, 이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할 수 있는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없애고자 한다. 그러나 방어막을 친 스스로의 힘으로 막아내지 못하는 위험인물은 언제나 있는 것이니 그게 누구?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에 보면 영국인들은 숲과 숲의 정령 속에 많은 전설과 신화를 담아놓은 듯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윈저가의 즐거운 아낙네들> 속 자정의 숲속 장면과 <템페스트>를 자주 떠올리곤 했다. 또 난데없이 일본 작가가 산속 깊숙한 곳에서 벌이는 으스스한 이야기들, 즉 이즈미 쿄카의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와 엮여, 혹시 이게 섬나라 사람들의 공통점 아냐? 섬나라니까 당연히 안개도 많고 대체로 습하고, 거기다 산악지역이면 대체로 대륙의 산악지대에 비해 으스스한 느낌이 훨씬 강할 거 아닌가. 그래서 비슷하게 으슥한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재밌다. 도대체 사람의 상상력으로 안 되는 게 뭔지 모르겠다.

 


 * 예전에 어떤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지 혹시 모르겠다. 열린책들의 표지, 루소가 그린 밀림 장면이 영락없이 남미나 아프리카인 것 같아 누가 추천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고르지는 않은 거 같다. 사놓고 오래 뒀다 읽으면 이런 경우도 생긴다.


 * 중세 독일지역의 기사계급,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서울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밤새 경계근무를 하는 군터와 하겐. 이름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책이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 있는데 찾아 확인해볼 생각을 하니까 감당이 되지 않는다. 하여간 두 기사가 성루에 서서 장검을 발아래 콱 찍어놓고 밤을 꼴딱 새워 깜깜한 밤의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이 먼저 그려진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책의 3/4부분에 우리의 주인공 스티븐이 귀네스를 찾아 숲에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한 무리의 미사고가 나타난다. 5~7세기에 브리튼으로 넘어온 게르만들이다. 이들 가운데 남자 대장 하나가 스티븐과 동행인을 잠자게 하고 자기는 땅바닥에 장검을 콱 박아놓은 다음 벌떡 서서 밤새 뻗치기 보초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귀네스도 그렇고, 게르만인의 뻗치기도 그렇고, 세상에 모방 아닌 창조가 어디 있어, 한 마디 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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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긴 편지 열린책들 세계문학 170
마리아마 바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서간체 소설이다. 모두 스물일곱 편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 보낸 사람 라마툴라이. 세네갈의 이슬람교도 여성. 자녀 열한 명의 어머니. 이 여인이 과부가 된 시점에 아이사투란 수신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려서부터 친구인 아이사투가 내일 세네갈에 도착하는 날까지 스물일곱 편의 편지를 쓰는 형식. 사실은 편지글이라도 라마툴라이가 계속 아이사투에게 보낸 진짜 편지들이 아니라, 세상 살면서 참 어렵고 힘들다고 여길 때마다 한 통씩 편지글을, 노트에 써놓았던 것이다.
 라마툴라이의 착한 맏딸 ‘다바’에겐 예쁘게 생기고 깜찍한 외모, 그러나 가난한 집의 딸 ‘비느투’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한테 한 늙은이가 차에 태워 좋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엄청나게 비싼 기성복을 사 입혀 비까번쩍한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있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절을 계산하면1960년대 말 가량? 이때부터 다바는 엄마 라마툴라이에게 비누트한테 생긴 일들, 문제의 ‘주책스런 늙은이’가 거의 전적으로 돈의 힘으로 비누트와 비누트의 부모, 조부모에게 환심을 사려하는 걸 생방송 진행을 해주곤 했다. 좋은 집을 사주고, 회교도들의 평생소원인 성지순례도 당연히 보내주는 건 물론이며, 매달 넉넉한 생활비까지 보태준다고 약속했다나. 원조교제의 원조 격이니까 그랬겠지. 평소 여권신장에 관심이 높았던 라마툴라이도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곧잘 들어주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원의 승려와, 시아주버니와, 편지의 수신인 아이사투의 전남편, 이렇게 세 명이 찾아와 말을 이리저리 빙빙 돌리더니, 오늘 아침에 당신 남편이 새장가를 갔다고,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이 비누트라고 하더란다. 그때부터 비누트의 강짜가 시작되고, 남편은 한 번도 마라툴라이와 열한 명의 아이들을 보러오지도 않은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생활비 한 푼 보태지 않기 시작한 거였다. 그 새 둘째 아내 비누트는 색깔 다른 두 대의 승용차에다 친정 엄마 아빠 모시고 다카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온갖 사치를 다 부려댔으니 속으로 얼마나 열불이 뻗쳤을까.
 왜 마라툴라이가 아이사투에게 이렇게 길고 긴 편지글을 썼느냐 하면, 아이사투는 마라툴라이와 다르게, 그리고 이 소설의 작가 마리아마 베와 같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남편의 중혼을 참지 않고 이혼해버리면서 네 명의 아이들을 스스로 양육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작가 마리아마 베는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데리고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해버렸다. 구글 검색). 아이사투는 귀금속세공업자의 딸로 하늘같은 신분인 왕족의 후예와의 결혼에 성공하여, 신분차이에 열 받은 시어머니가 애초부터 아들의 중혼을 염두에 두고 열린 사고방식과 세상을 대하는 옳은 방법 등을 가진 양순한 처녀를 두 번째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다가 결혼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식 중혼을 참지 않고 이혼을 감행, 곧바로 학업을 이어나가 지금은 재미 세네갈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엘리트이자 부유한 계급으로 지내고 있다.
 작가는 친한 두 친구의 환경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하여, 중혼을 인내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세네갈 내 이슬람 여성과, 이혼을 감행함으로서 보다 확실한 자아를 찾아낸 여성을 등장시켜 성적 자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구도를 취했다. 아주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스토리는 소개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여기서 멈추지만, 세상일이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에도 나름대로 길은 있다. 열한 명의 아이가 아직은 다 크지 않아, 마라툴라이의 어머니로서의 곤고함과 차별이 앞으로 어디까지 뻗칠지 전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마라툴라이의 입을 빌린 작가 마리아마 베는 이렇게 얘기한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가 상대에게 진정으로 다정할 수만 있다면! 상대 속에 융화되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상대의 성공과 실패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상대의 결점을 세는 대신 장점들을 높이 산다면!”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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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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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톱을 너무 바짝 깎았다. 왼쪽 세 번째 손톱이라 자판 두드리기가 편치 않다. 세상이 그런 거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보다 당장 자판 두드리기 힘들게 손톱 바짝 깎은 손가락이 더 아픈 것.
 10년 전 여름이던가, 내가 좋아하는 공선옥의 추천사를 보고 <침이 고인다>를 읽은 것이 첫 번째 김애란. 지금 보니까 외모도 공선옥하고 비슷한 것 같고 뭐 그렇다. 읽은 지 하도 오래라 그때의 감상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아주 인상 깊었던 작품이 없었다는 뜻? 그것도 좀 있지!) 약간 야하고 뭐 재미나고 그랬던 거 같은데, 두 번째 읽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은 전혀 그렇지 않다(요샌 단편집 제목과 같은 단편이 단편집 안에 수록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 책에선 단 한 작품도 읽으며 내게 미소조차 짓지 않게 만들었다.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겨우,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공통적으로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이 핫따, 먼 훗날인줄 알았더니 겨우 코앞이었던, 죽음.
 첫 작품 <입동>은 두 번의 유산 끝에 인공수정으로 얻은 아이가 유치원(또는 어린이집) 통학버스에 깔려 죽고, 두 번째 <노찬성과 에반>에선 찬성의 아빠가 갓길을 따라 걷다가 화물차에 치어 죽은데다가 스포일러(특히 단편소설에서 스포일러란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 소치라서)가 염려되어 정확하게 적진 않겠지만 막바지에 동거인 중에 한 명이라 추정되는 또 다른 죽음까지 겹쳐지고, 네 번째 작품이자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침묵의 미래>는 수많은 소수 민족의 언어를 학살하고, 다섯 번째 작 <풍경의 쓸모> 역시 스포일러 관계상 상세하게 적을 수 없는 한 인물의 죽음이 달려있으며, 여섯 번째 작 <가리는 손>엔 건장한 중학생의 이단 옆차기에 맞아 죽고마는 폐지 줍는 노인이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열무김치를 담고 있는 시간에 날 버리고 먼저 가버린 남편님이 배경으로 깔린다. 딱 한 작품, 세 번째로 수록한 <건너편>이 유일하게 죽음과 거리를 둔 단편으로 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 가운데서도 마음에 제일 들었다.
 10년 전에 읽은 <침이 고인다>도 글 가운데 야한 장면이 나오고 재치 있게 재미난 묘사가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지 결코 글의 내용이 밝은 경향은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역시 가물가물 오래전이라 믿지는 마시고), 이번 <바깥은 여름>은 좀 심했다.
 김애란의 글? 어이, 왜 이러셔. 대한민국에서 비까번쩍하기로 유명한 문학상이란 문학상은 거의 수집할 정도의 글발을 자랑하는 작가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이이가 글 속에 죽음을 등장시켜 살아남은 자가 우울하기도 하고,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하여간 깊은 상실에 빠져 있는 상태를 대단히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근데 좀 심한 거 아냐? 물론 출판사에서 죽음을 테마로 김애란에게 이와 유사한 소재를 다룬 단편만 골라 책을 엮어보자고 했을 수도 있지만, 한 권이 통째로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건너편>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는 건 비단 죽음을 소재로 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 편, 실패나 소외나 죽음이나 상실에 빠진 삶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유일한 것이서다. 물론 일곱 편을 따로 떼어 무게를 단다면 내 감상이 턱도 없이 잘못된 것이겠지만, 한 자리에 앉아 근 여섯 시간을 바쳐 한 방에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도 동의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죽음. 누구나가 죽고 궁극적으로 죽음이 문학의 대상물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는 난 누군가가 죽음을 노골적으로 콕 집어서 만지작거리면 읽어내기가 좀 난감하고 불편하다.

 여전히 내 왼손 가운데 손톱이 더 신경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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