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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ㅣ 창비시선 313
이정록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아, 씨. 거참 독후감 쓰기 힘드네. 한 20분 가까이 쓴 거 몽땅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 시집 읽었다고 ‘시작한다’가 ‘시작詩作’을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이래봬도 내가 주제꼴은 안다. 내가 시를 쓰면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꼴값을 한다고.
이정록. 이 사람의 시집을 읽다가, 정말로, 한 치 거짓 없이 말 하건데, 눈알이 확 뒤집어지면서 앞에 환한 광명이 비추는 것이, 아하, 대한민국의 시에 건강한 알통이 사라져버린 것이 그간 몇 해이던가, 육모방망이로 뒤통수 언저리를 한 방 얻어터진 듯한 느낌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시 읽어보는 게 얼마만이냐! 이성부 이후 처음 아닌가 싶어 얼른 이성부를 검색해봤더니, 오호라, 5년 전에 이미 드런 세상을 떴다.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물론 이성부와 이정록의 시작법은 상당히 다르다. 그냥 알통이 닮았다는 것 뿐.
시집은 모두 4부로 되어 있다. 내 읽기로, 각 부마다 처음 나오는 시가 이 책의 대표 시들이다. 먼저 1부의 첫 번째 시 한 번 읽어보자.
붉은 마침표
그래, 잘 견디고 있다
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
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
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
그쪽 노을빛 우듬지와
이쪽 소나무의 햇살 꼭지를 길게 이으면 하늘이 된다
그 하늘길로, 내 마음 뜨거운 덩어리가 타고 넘는다
송진으로 봉한 맷돌편지는 석양만이 풀어 읽으리라
아느냐?
단 한 줄의 문장, 수평선의 붉은 떨림을
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것을 (전문. 10쪽)
시가 쉽다. 시를 해체해서 이해해야할 만큼의 은유도 아니고, 감정의 분비도 없고, 그냥 노골적 은근함으로 그리움과 서로 하나됨을 노래하고 있다. 거기다가 무척 건강하다. 요새 숱하게 읽은 감상의 과잉분비, 주체 못하는 은유, 이해할 수 없는 상징은 없다. 첫 번째 시부터 마음에 탁, 들었다.
위에서 얘기했다. 각 부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시들이 제일 좋거나 재미있다고. 이어서 2부의 첫 시를 읽어보자. 진짜로 읽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해야 한다. 자칫하면 턱이 내려앉을 수도 있으니까. 준비하시고,
작명의 즐거움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싸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전문. 31~32쪽)
이 시를 읽는 도중에 사무실의 숱한 선남선녀가 대책 없이 웃어젖히며 눈물까지 질금거리는 나를 보고 지들끼리 한 마디 했다. “부장님 왜 지랄이셔? 약 먹었대?” 그러거나 말거나 이쯤에서 난 이정록이란 인간이 뭐하는 인종인지 궁금해져 책 앞날개에 있는 그의 사진을 째려봤다. 이크. 걸리면 빗맞아도 한 방에 가겠구나. 1964년 홍성 생이라는데 책 읽어보면 그중에서도 돈자랑 힘자랑 하지 말라는 광천이 고향일 거 같다. 하이고 입조심 해야지. 어딘가 좀 미진해 네이버 검색했더니, 작은 아이 졸업한 고등학교 한문교사란다. 현직이. 재빨리 아이한테 문자 보내서 너 이정록 선생이라고 있었느냐, 했더니 대답이, 아버님, 전 이과생이라 모르겠습니다.
다시 시를 보시라. 교사 이정록은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을 학생들한테 제시해보라고 했을 거다. 이런 주제면 고딩들 좋아 죽는 수준이겠지. 그래서 별의 별 것이 다 나온다. 그걸 칠판에 적은 다음에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었건, 아니면 쪽지에 써서 내라고 했건 간에 그중에서 선생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들만 골라 주욱 나열해놓고, 여기다 자기가 생각했던 이름 세 개,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보태 시를 만든 거다. 시 쓰기, 참 쉽죠? 그렇다. 쓰기 쉽고 읽기는 더 쉬운 시. 이게 진짜 아냐?
2부로 말할 거 같으면, 이 시집 총 4부 가운데 입심이, 정말 대단한 부분이다. 처음부터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개불장화로 시작해 이어서 시인의 어머니가 풀어놓는 충청도 사투리 걸쭉한 입담이, ………, 허, 말을 말아야지 어떻게 그걸 다시 문자로 옮겨.
이어서 3부엔 이미 돌아간 아버지의 여러 모습, 여류 작가가 쓴 책에서 그동안 너무도 흔하게 봐왔던 무능력하고 폭력적이고 심지어 패륜에 가까운 ‘이기적인 가장’과 달리 큰 그릇과 넉넉한 마음이 여유로운 농촌형 아버지상과 시인의 고향 혹은 퇴색해가는 농어촌의 풍경을 그려낸다. 4부에 접어들면 “내 일만으로도 죽을 지경이라고 엄살 피울 때”에서 “족진 머리처럼 나는 뒷전인 채 피붙이들 때문에 먹먹”(<멱> 101쪽)하게 성장한, 즉, 누군가의 슬하膝下에서 어느덧 누군가의 어미아비가 된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나이 먹는다고 일컫는다. 시집 한 권에서 독자는 낳고 엄마의 급성 유방염으로 고름젖을 빨며 자라고, 콘돔을 보며 ‘물안새’라고 일컬을 줄도 알게 되면서 벌써 엄니, 아버지의 옛 모습을 추억하는데 뒤 돌아보니 어느새 자기 무릎 아래에 새끼들이 올망졸망한 거다. 한 인생이 얇은 시집 한 권에 다 들어 있는 거.
발문을 이 시대의 수다꾼 한창훈이 썼다. 이이가 이문구의 뒤를 잇는 입담의 세자라고 그의 20대 때 내가 일찍이 선언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공감이 가는, 공감, 절대공감, 동감, 절대동감인 대목이 있어 도저히 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어서 짧게나마 인용한다.
“이를테면 시인 직업도 국가자격증이 있고 자격증 취득 시험을 면접으로 본다 치자.
아니, 면접 오면서 소주병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어딨어요? 술병은 입구 우산꽂이 같은 곳에 두고 들어오세요. 아무리 해장이라도 그렇지, 국가행정 알기를 원…… 저기요, 초상났어요? 그만 좀 우세요. 화장실 거기 있으니 콧물 좀 닦으시고요. 으이그, 다른 곳으로 얼른 전근해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그래. 그리고요 제발 면접관 앞에서 피 좀 토하지 마세요. 화장실 옆에 따로 각혈실이 마련되어 있으니 거기를 이용해주시구요. 피 토하면 곧바로 자격증 준다는 말은 브로커들이 하는 소립니다. 속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