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녀 창비세계문학 37
쿠라하시 유미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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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감각적인 문장의 나열과 구성. 일본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것 같은 섬세한 묘사가 매우 유혹적인 작품. 그러나......

 윽, 비위 상해. 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원래 근친간의 섹스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구름 위의 신전에 거하는 유피테르와 유노 등 신족에게만 허여됐던, 지고로 신성하여 인간은 흉내 낼 수 없는 행위였다. 기독교의 신에 의하여 박멸된 북유럽 신화에서도 주신主神과 인간 사이의 남매 지크문트와 지크린데의 결혼도 주신 보탄의 아내이자 혼인의 여신 프리카에 의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그런 성스런 행위를 감행한 소녀 ‘미키’를 성소녀聖少女라고 쿠라하시는 주장하고 있는 건데, 아무리 작가의 문장이 매혹적이고 스토리가 기발해도 아, 난 싫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다 읽었다. 이런 내가 나도 싫다.
 이 주제를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진짜로 잘 쓴 소설이겠다. 이런 소설도 필요하고 더구나 쿠라하시 정도의 필력이라면 심지어 기념할 만하기도 하다. 근데 하필이면 왜 내가 읽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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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또는 마지막 이유 대산세계문학총서 82
알프레트 안더쉬 지음, 강여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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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 동 아프리카 케냐 밑에 있는 나라 탄자니아의 한 주州 또는 해당 주의 주도州都.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느냐 하면, 등장인물 가운데 열여섯 살 먹은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어부, 그러나 왕년에 공산주의자였고, 지금, 1937년 현재 나치에 완전하게 장악된 독일에서 유대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핍박을 받아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다하우 수용소 등지에서 고문 받아 죽거나 굶어죽거나, 아니면 별 이유도 없이 시비 걸려 얻어터져 죽는 걸 하도 많이 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많은 아내 때문에 숨죽여 살고 있는 성실한 성격의 어선 선장, 크누트센 씨의 조수로 있는데, 이제 자기 딴엔 다 큰 거 같아 소년 특유의 로망, 북해나 대서양 혹은 인도양 등 광활한 바다 건너 잔지바르, 보르네오, 서인도제도 등을 건넌방 가듯 항해하는 꿈, 이름하여 호연지기를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면서 세상을 향한 건강한 꿈을 꾸는 소년, 즉 독일의 건강한 미래를 상징할 수도 있는 젊은이의 로망을 작품의 제목으로 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디트란 이름의 아름다운 유대인 아가씨. 성경에서 나오는 유디트처럼 일찍이 몸종 하나 데리고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진영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그를 유인, 단칼에 모가지를 뎅겅 잘라 들고 온 용감무쌍한 캐릭터가 아니라, 독일 내 예절과 공손, 겸손, 미덕, 아름다움 등을 상징하는 여성으로, 함부르크로 추정되는 도시에서 스웨덴으로 도망가라는 어머니를 차마 홀로 두고 떠날 수 없어 엄마 말을 듣지 않자, 용감한 엄마가 딸 앞에서 독약을 먹고 죽는 바람에 모친의 유지를 받아 밀항을 위해 북해를 마주한 코딱지만 한 어촌이자 엄마 젊은 시절 잠깐 놀러와 본 적 있는 레리크에 도착. 과연 스웨덴으로의 밀항이 가능할까?
 목사 헬란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두 다리를 몽땅 잘리는 부상을 입어 의족을 단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이어가다가, 당뇨가 진행되는 바람에 절단 부위에 심각한 부종이 발생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한 인물. 당뇨 합병증으로 더 자를 다리도 남아있지 않아 이젠 대퇴골에 이은 내장기관의 감염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 근데 정작 그의 가장 큰 근심은 나치에 의하여 퇴폐미술로 찍혀버린 조각가가 만든 <책 읽는 수도사>를 교회에서 몰수하겠다는 친위대의 강제 요청이다. 명색이 목사라 수도사 조각상을 끔찍한 범죄 집단인 나치에 넘겨줄 수는 없고, 그렇지 않다면 붙잡혀 악랄한 고문 끝에 생을 끝내야하는 진퇴양난의 지경을 맞는다. 그리하여 배를 가지고 있는 믿음직한, 그러나 사상적으로 종교를 절대 믿지 않는 동네 빨갱이 크누트센 선장에게 조각상을 가지고 스웨덴 교회에 전달해주기를 부탁한다. 이 과정에 자기가 믿는 신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도저히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는 인간에게 관심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고 확신하는 단계로 치닫는, 몸과 마음과 정치적 상황이 모두 벼랑 끝에 서있는 단계에 이른다.
 이 <책 읽는 수도사>가 어떤 목각품이냐고? 한 번 보시라.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가로 찍힌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책 읽는 사람>.

 

 

 


 이 외딴 어촌 레리크에 지독하게 평범한 외모와 입성과 행동거지를 갖고 있는 공산당 핵심, 일찍이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유학한 전력까지 갖춘 그레고어.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난 후 흑해 주변에서 백군과의 전쟁에도 참여한 투사이지만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연인이 정치투쟁으로 죽임을 당했고, 나치에 의하여 뿌리까지 잘린 독일 내 공산주의 운동에 숨이 막히는 상태. 공산당원에게 가장 유용한 접선 장소로 교회당을 선택하여 크누트센 선장을 만났으나 서로 번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행동을 할 것이며 무슨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 그러다가 <책 읽는 수도사> 조각상이 눈에 띄고 목사와 유대인 유디트 아가씨와 조각상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그레고어. 이 공산당 핵심세포는 한 유대인과 기독교를 위해 과연 행동과 전략을 마련할까?
 이런 이야기. 총 여섯 명의 등장인물을 소개했다. 소년, 크누트센 선장, 유디트, 헬란더 목사, 그레고어, 책 읽는 수도사. 책의 주제는 도망치는 일이다. 소년은 지루하고 염증 나는 작은 어촌 레리크에서 대양으로, 크누트센 선장은 현재의 질서에서 숨죽여 살아남아 어떻게 해서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래를 기다리기 위하여, 유대인 유디트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독일을 떠나기 위하여, 목사는 이젠 기대해볼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손과 관심으로부터, 그레고어 역시 완전한 불모지 독일 내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벗어나기 위하여, 책 읽는 수도사는 기어이 자신을 유폐시키거나 폐기시키기 위해 눈알이 벌건 나치의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치 치하의 독일은 내일의 희망(소년)도, 미덕과 예의(유디트)도, 종교(헬란더 목사)도, 평온한 삶(크누트센 선장)도, 평등(그레고어)도, 지식 또는 지식의 유지(조각상)도 모두 독일로부터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올해 들어 나치 치하의 독일을 그린 소설을 많이 읽는다. 왜 젊은 시절엔 이런 책을 읽을 수 없었을까? <잔지바르…>도 1957년 작품이다. 세월이 이리 많이 흐른 다음에야 번역이 되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거다. 1957년부터 참 오랜 세월, 이리 좋은 작품을 단 한 가지 이유, 공산주의자가 선한 역을 한다는 진짜 별 거 아닌 이유로 국민의 읽을 권리를 모른 척해온 대한민국의 입법부와 행정부. 참으로 딱하다. 그들 때문에 나 역시 나치 치하의 독일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집단최면에 걸려 나치에 동조하고 열광한 줄로 오해해왔다. 심지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1970년대와 80년대엔 금서였을 정도. 알고 보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 독재에 저항하고, 투쟁하고, 그래서 고문 받고 수용소에 갇혀 거의 짐승 수준의 고통을 받다가 유대인처럼, 유대인들과 함께 죽어갔다. 그걸 왜 몰랐을까. 미국과 유럽의 1차대전 전승국들이 독일 히틀러 집단의 전비확장을 눈감아 준 이유도 여태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지.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전집이 좋은 것이, <잔지바르…>가 190쪽 정도라 웬만하면 이것만으로 한 권의 책을 내겠는데, 아무래도 한 권의 책으로는 마땅하지 않겠는지 안더쉬의 단편집 <프로비던스에서의 나의 실종 - 9편의 이야기>를 통째로 뒤에 붙여 기어이 400쪽을 넘겼다. <프로비던스…>는 1968년부터 1971년 사이에 쓴 9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데, 우연인지 처음부터 구성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서로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아니, 분명히 조금씩 연결고리가 있는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안더쉬가 47그룹, 우라질 47그룹의 멤버이기도 하다던데, 내가 아는 어느 47그룹 멤버들(물론 귄터 그라스도 포함해서)보다 참 글이 좋다. 공산당 전력이 있어 프롤레타리아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간결한 서술을 사용해서 그런가 참 쉽게 읽히고 마음에도 와 닿는 작품이다. 책 뒤표지에 “독일에서는 고등학교의 독일어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현대소설을 읽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우기 휘한 모범적 작품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하는데, 읽어보시라, 그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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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2022-12-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6년에 박영사에서 최후의 이유라는 제목으로 지명렬 역, 82년에 주우에서 마지막 이유라는 제목으로 안더쉬의 두번째 장편 레드(빨강머리 여인)과 묶어서 곽복록 역, 85년에 학원사에서 곽복록 역 재간했고 대산세계문학총서는 3번째 번역입니다. 유신시절이랑 5공시절에 번역이 나왔네요. 3번째 소설 에프라임도 83년에 번역이 나왔으니 오히려 군사정권시절에 번역이 더 활발했군요.

번역이 없던 단편집과 묶어내서 오늘날 독자들에게 깔끔한 새번역으로 찾아온 의의는 크지만 대한민국 입법부가 금서로 묶어놓은 적은 없습니다. 시장성이 문제였을뿐이죠.

Falstaff 2022-12-09 15:1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알지 못하고 그랬거니, 짐작으로 쓴 거였군요. 그저 책방 재고 여부만 가지고 판단했으니 제가 잘못한 겁니다.
전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잘 팔리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좋은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상속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7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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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게도 주인공이 네안데르탈인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점은, 골딩이 서문 대신 써놓은 허버트 조지 웰스가 쓴 《세계사 대계》의 일부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심각하게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반상식 적的 지식에 입각해 책을 읽게 되고, 그 결과 나처럼 오리무중에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문 대신 써놓은 조지 웰스의 글이 뭔가 보자.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털이 과다하게 많고 추하며 아래로 처진 이마와 돌출한 눈썹과 유인원 같은 목과 작은 키 때문에 추하거나 역겹고 낯선 모습을 띠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인간의 부상을 조사한 해리 존스턴 경은 자신의 저서 『시각과 검토』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활한 뇌, 느릿한 걸음걸이, 털로 덮인 몸, 튼튼한 이빨 그리고 식인종의 성향을 지닌 고릴라와 유사한 괴물들에 대한 어렴풋한 인종적 기억이 민담에 등장하는 거인의 기원일 수 있다…….”

 

 문제는, 조지(핫따, 거 이름도 참. 자꾸 ‘조지’, ‘조지’ 그러니까 우습네그려!) 웰스가 《세계사 대계》를 쓴 것이 1920년(네이버 지식백과). 골딩이 <상속자들>을 쓴 시점이 1955년. 그러니까 웰스의 1920년 저작물을 1950년대 초에 인용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네안데르탈인은 큰 키(성인남성 평균 1.65미터.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동아시아 한반도에 살던 종의 성인 수컷 평균 신장이 1.65미터를 넘기까지는 예수가 죽고 근 2,000년 더 필요했다.)에 큰 골격, 큰 비강과 추위를 극복하는 놀라운 체력, 불을 다루고 석회암 동굴 벽에 들소를 비롯한 채색화까지 그린 사람 속屬의 한 종이다. 따라서 이 서문을 읽지 않고 그냥 상식에 입각해 책을 읽으면 자주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은 사냥을 하거나 다른 육식동물이 잡은 먹이를 약탈하는 포식자였으며, 포식자의 입장에서 당연하게 호모 사피엔스와 조우하여 그들을 죽일 기회가 있으면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의 시체를 먹었을 것이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가장 큰 이유가 호모 사피엔스들이 사냥해 먹어치웠기 때문이란 기사를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인터넷 신문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골딩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소설이라는 <상속자들>에 출연하는 네안데르탈인, 로크, 파, 라이쿠, 말, 늙은 여자, 하, 닐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평화주의자들로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생전 처음 보는 호모 사피엔스 무리들에게 큰 호감을 지닌다. 물론 결과는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긴 하지만.
 이 책이 골딩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인 <파리대왕>에서 골딩은 소년들을 오스트레일리아 주변이라고 추정되는 외딴 무인도에 떨어뜨림으로 해서 인간종이 갖고 있는 권력과 지배 등의 속성을 까발려, 처녀작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하자면 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리상태’ 정도, 이미 익숙한 내용을,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인간 종으로의 소년들 무리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방점을 찍은 것이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소설 <상속자들>이 나오는데, 이 작품도 전작 <파리대왕>과 지독하게 닮아있다. <상속자들>에서 등장하는 것 역시 아직 문명을 완비한 인간 종으로 발전하기 전 원시 상태의 호모 사피엔스와 인간 종과 가장 유사한 사람 속屬 네안데르탈인을 등장시켜 호모 사피엔스, 그러니까 현대인의 아주 깊은 곳, 원시적 유전자 속의 잔인함과 폭력, 지배 인자들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 읽기가 좀 불편한 건, 내가 알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많이 다른 특색, 1920년대 지식으로 만든 야만족, 히말라야나 알프스의 사스콰치안 닮은 털 많고 큰 원숭이 정도로 그들을 묘사해 놓은 것에서 시작한다. 책 속의 그들은 여차하면 사슴이나 “다람쥐처럼 팔다리를 모두 사용하며 뛰어가”고(240쪽), 단순히 가시덤불을 휘두르며 돌(칼)을 ‘던짐’으로 하이에나를 퇴치하고 하이에나가 사냥한 사슴고기를 탈취(58쪽)한다. 실제의 그들은 완전한 직립보행과 무리사냥을 했고, 돌칼을 나무 장대 끝에 매달아 창으로 쓸 줄 알았다. 이건 21세기 인류라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1955년에 발표한 소설에선 그렇지 않았던 거 같다. 더 심각한 과학적 오류가 맨 처음부터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시대적 한계이니 그만하고, 다만 그것 때문에 책 읽는 독자의 오해가 발생한다는 정도만 꼽아 놓겠다.
 또 하나는 번역의 문제. 번역에 관해 말을 아끼고 싶다. 분명히 역자 안지현은 원작에 충실하게 될 수 있으면 원문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의사소통 방식이 짧은 대화와 암시에 이은 텔레파시. 텔레파시라고 해봐야 서울 부산처럼 떨어진 곳에서 의사소통을 정확하게 하는 수준은 아니고, 집단 사냥하는 무리들이 예를 들어 들개 같은 종들이 사냥을 하면서, 나는 직진, 너는 우회하여 가젤을 몰고 와, 그럼 3번, 네가 지칠 때까지 쫓고 이어서 4번, 그 다음에 내가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하는 식의 텔레파시. 물론 그것보다 훨씬 높은 단계이긴 하지만 진짜 그림을 펼쳐놓고 ‘이런 식이다’라고 할 수는 없는 정도란 뜻이다. 작가는 자기 모국어로 이런 의사소통 방식을 자유자재로 써놓았겠으나, 역자는 그걸 이방의 언어로 바꾸면서 뜻이 훼손당하지 않아야 하니 고생을 좀 했겠다, 싶긴 하다. 그러나 안지현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책 좀 읽는 수준의 독자 나는, 책의 많은 부분을 안개 속에 두고 책을 덮고 말았다. 그리하여 비록 270쪽에 불과한 얇은 분량이지만, 읽는 자체가 많이 까다롭고 같은 문장을 몇 번 읽어야 해독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저자 혹은 역자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는 뜻이다. 독자가 읽기에 모호한 서술이 지속되면 그건 독자 책임인가? 아니면 저자나 역자의 책임인가.
 물론 책을 다 읽으면 어떤 내용인지, 작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뒤에 나오는 작품해설을 읽어보면, 아 그랬구나, 딱 알아채고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볼 수도 있다. 근데 이 모든 것을 감안하여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난 이후 윌리엄 골딩의 책은 더 이상 찾지 않겠다고 작정해버리고 말았다. 저역자와 독자의 책 속에서의 의사 불통. 그 위력은 이런 것이다. 그게 저자 혹은 역자 또는 독자, 누구의 책임이 됐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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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1-0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책 읽어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뒀는데 그냥 패스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7-11-07 10:04   좋아요 1 | URL
전 이상하게도 골딩의 책 읽으면 골이 딩,해집니다. ㅠㅠ

syo 2017-11-0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읽는 내내 다층적으로 난감한 책이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데, 오냐 그게 골딩 너의 의도라면 나도 안 되겠다- 하면서 덮었습니다....

Falstaff 2017-11-07 11:55   좋아요 0 | URL
헤맨 사람이 저 하나가 아니란 게, 짓궂게도, 위안이 됩니다. ㅋㅋㅋ
 
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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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이 쓴 <바느질하는 여자>를 숨 가쁘게 읽었다. 오랜만에 읽은 아름다운 소설. 남자는 죽어도 쓰지 못하는 서늘하고 엄정한 미학. 영원히 끝나지 않는 담배씨만 한 한 땀 한 땀을 무한하게 계속해야 하는 천형의 바느질. 누비. 책을 넘겨 처음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최명희의 <혼불> 1부 도입부를 보는 것 같은 낯섦과 흥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의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서늘한 서술. 이것이 놀랍게도 첫 장부터 마지막 630쪽에까지 균일하게 깔려있다. 바늘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누비바늘에 자신의 생애와 삶을 거느라 충만과 행복과 사랑을 포기하는 세 모녀 이야기.
 1974년생 작가가 바느질과 수의를 포함한 한복과 옷감에 관하여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책에 신세를 져 잘 빚은 자기 같은 작품.
 주인공이자 바느질하는 여자인 수덕. 이이는 경주 인근의 농촌 동네에서 오직 누비옷을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성姓이 다른 딸 둘을 키워낸다. 누비바느질이 수덕이고, 수덕이 누비바느질. 큰 딸 금택이 아홉 살, 작은 딸 화순이 일곱 살 때 삼륜차의 속명이었던 ‘딸딸이’를 타고(작가가 차종을 혼동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삼륜차를 몰고 하루 종일 운전해 이삿짐을 옮길 수는 없었으리라. 차 성능이 그렇게 안 됐다는 얘기다.) 농촌 마을의 빈집이자 앞으로 세 모녀의 온 생을 바칠 ‘우물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으로 긴 이야기는 시작한다. 내성적이고 어머니에게 복종하며 바늘에 관한 집착이 심하지만 바늘은 언제나 자기로부터 빠져나가는 금택. 반면에 선천적인 손재주가 번뜩이지만 바늘과 바느질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화순. 이들을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고 있는 어머니. 어느 날, 자매가 집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아이들을 불러 자신의 작업실이자 방 자체가 어머니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방에 들여, 누비 바늘 하나씩을 건네준다.
 바늘. 바늘의 속성은 찌름이고, 찌름으로 인한 상처, 상처에서 딸려 나오는 양귀비 색 피, 이런 것들을 다 합해 싸늘한 잔인함 또는 긴장. 작은 딸 화순은 바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그냥 책상 위에다 휙 던져놓지만, 금택은 진심으로 갖고 싶었으나 함부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귀한 것이라 가슴에 ‘바늘’을 안고 자다 자신의 왼쪽 젖꼭지를 찔러 가슴에 모란꽃 한 송이를 피워버린다.
 이후 팽팽하게 이어지는 성이 다른 자매 사이의 갈등과 그걸 번히 알면서도 바라보고 있기만 하는 어머니 사이의 트라이앵글. 원래부터 세 명이 만들어가는 화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질 때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 단언하니, 김숨의 <바느질하는 여자>에서 우리는, 아니, 나는 근래 가장 아름다운 트리오, 가장 절묘한 삼중주의 투쟁과 화해와 조합과 견제와 염탐과 배려와 조화와 침잠을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숨의 주변엔 책으로 만들어 나오기 전에 꼼꼼하게 읽어줄 사람들이 없었나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시간적 배열에 관해서 일목요연하게 줄을 세우는 데 작가는 재주가, 없어도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치명적일만큼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이어서 만드는데 정말 섬세하고, 아름다운 씨줄과 날줄을 엮을 줄만 알았지, 세부각론으로 들어가면 구조가 완전히 망가지고 마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런 작가들에겐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읽어보고 앞뒤 연결에 관해 지적해주는 사람의 존재 여부가 상당히 중요하다.
 뭘 가지고 그러냐고?
 책을 읽는 내내 노트북 켜놓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메모해놨는데, 노트북을 켤 수 없었을 때를 빼고도 A4 용지로 두 장이 넘어간다. 예를 들어보자.


 제일 먼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 자매의 나이 차.

 “금택은 열 살, 화순은 여덟 살 되던 해 학교에 들어갔다. (147쪽) 한 살이 어렸지만 화순은 금택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컸다. (210쪽) 1961년 소띠생인 금택과 1962년 범띠생인 화순 자매까지 삼대에 걸친 여자들이 모여 살았다. (455쪽)
 
 “경주에는 예비고사장이 없었기 때문에 화순은 도청이 있는 대구까지 나가 예비고사를 치렀다.”(297쪽)
 → 1962년 2월생이 예비고사를 마지막으로 본 이들이다. 화순의 생일이 빨라서 예비고사를 봤다고 치면 소위 80학번. 그러나 대학 다니면서 박정희가 죽고 학살이 일어났으며 통금이 없어졌다. 즉, 아무리 늦어도 79학번은 돼야 한다. 물론 여덟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간 화순은 아무리 빨라야 81학번이라서, 예비고사도 못 치뤘겠지만.


 “그녀들 중에는 조선 말기 명성왕후가 시해되던 해에 태어난 이도 있었다. 복례한복에 옷을 맞추러 올 때마다 금택과 화순에게 갈색 일제 캐러멜을 쥐어주던 그녀는, 백 살이 코앞이라고 했다.” (81쪽)
 →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은 1895년. 그럼 이 이야기를 하는 시점은 적어도 1990년은 돼야 하는데 아쉽게도 1960년대 어느 날이다.


 "‘서울 사대문까지 소문난 한복집이라고 큰올케가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해서 5천 원이나 주고 맞추어 입지 않았나. 뭔 누비저고리가 북어포도 아니고 뻣뻣해서 입을 수가 있어야지.’(82쪽)
 → 시기가 60년대 말. 당시 5천 원이면 4급(요새 7급) 공무원 석 달 봉급보다 많다. 지금 돈으로 약 800만 원. 이게 손바느질도 아니고 재봉틀로 박은 누비저고리 값이라면, 오버다.


그즈음 티브이에서는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었다. (476쪽)
 → 이산가족 찾기는 1983년. 시점은 한참 후.


 열아홉 살 되던 새 서울로 올라온 (중략) 국밥집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켰다. 10원짜리 동전 같은 기름이 떠다니는 국물을 허겁지겁 떠먹으면서, (후략) (588쪽)
→ 그녀 수덕은 1941년 생. 열아홉 살 때면 1959년. 당시 10원짜리는 동전이 아니라 지전이었다.


 부령할매 첫 아이 죽어서 묻은 아기묘에 관한 이야기. 거기 갔다 온지 70년 됐다는 얘기 (p.602~605)
 → 이야기하는 시점이 1963년. 맏아들 죽은 게 70년 전이면 1893년. 부령할매 참 참 참 오래 살았다. 이제 겨우 스무살 넘은 둘째 아들이 있으니.


 그러나 무참한 심정을 금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1963년인 그해, 수덕은 스물세 살이었다. 43년 전인 그해는 파독 광부 128명이 첫 출국을 한 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첫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도 한 해로, 미국에서는 대통령 케네디가 암살을 당했다.”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했대요.’ 그녀(수덕)는 나풀나풀 흔들리는 녹원삼 너머로 향하는 눈길을 바늘로 끌어당겼다.” (600쪽)


 이것이 남수덕, 두 자매의 엄마가 녹원삼 너머의 남자와 관계를 해서 임신을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큰 딸이 1961년생이고 작은 딸이 1962년 생. 뭐 61년, 62년도 믿기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는 말이다.


 이거 말고도 무지하게 많은데(PC에 메모한 것의 반의반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다 여기에 옮길 수 있겠나. 하여간 참담한 수준이다. 이 정도면 작가는, 그의 섬세한 문장 엮기 실력은 논외로 하고, 애초부터 ‘수열’을 구성하는 뇌의 발달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데, 재주 없으면 메모지에 써서 PC 옆에다 붙여놓고 소설을 쓰든지 하지 이게 뭐냔 말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봉급 받아먹고 교정, 교열하는 인간들도 도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혹시 싼 맛에 서울 마포구의 중학교 다니는 외국인 학생한테 알바시킨 거 아냐?
 정말 섬세하게 힘들여 책 쓴 김숨.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불쌍한 만큼, 자신이 쓴 거 눈알이 빠지게 퇴고하지 않는 나쁘고 나쁘고 또 나쁜데다가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서, 나쁘기 그지없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다(서재 동무님들은 아시리라. 내가 지금 얼마나 말을 순하고 예쁘게 하고 있는지). 김숨. 당신도 알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50번 넘게 다시 고쳐 썼다는 거. 당신이 톨스토이보다 더 위대한 작가는 아니잖아.
 정말 아쉬운 책이다. 김숨의 환상적이고 절묘한 형용사, 형용구, 형용절(이런 것이 있다면)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 저 까마득한 바늘 침 위 아득한 벼랑 위에 선 여인들의 비의를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하다니. 그것만 따지면 나는 이 책을 올해 발견한 가장 훌륭한 한국문학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소설은 정연해야 하는 산문. 위에 적어놓은 숱한 에러. 그것들을 무릅쓰고 이 책을 다른 이에게 추천할 수 있지는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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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에 츠바이크가 쓴 <초조한 마음>을 읽어보고 글, 스토리를 재미나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주로 전기傳記작품을 많이 쓴 츠바이크이며, 내가 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이를 읽을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유독 작품이 눈에 띄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이름은 늘 기억해두고 있던 사람. 쇼핑 중에 이이의 이름이 딱 올라와, 그것도 전기가 아니라 소설작품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골라 사서 읽었다.
 세계사에서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분야에 탁월한 성과를 낸 민족, 유대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의 최고 업적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결과물이 혹독한 고리대금업이어서 그랬나, 이 머리 좋은 종족에 대하여 한 무리의 미친 독일인들이 앞에 나서 돌이킬 수 없는 학살을 꿈꾸던 것이었다. 학살 또는 학살의 예비단계가 곧 진행되리란 걸 눈치 챈 츠바이크는 아내를 데리고 런던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가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글도 쓰고 사랑도 하고 결혼까지 한 유럽을 향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자신이 유대인이긴 하지만 건전한 오스트리아 국민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1차 세계대전에 (문서보관소에서 문서병文書兵으로)참전한 경력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오스트리아와 ‘고향’ 빈은 유대인 츠바이크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무렴. 하다못해 아인슈타인도 받아주지 않은걸 뭐. 하여간 스스로 유럽인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츠바이크, 그가 쓴 <크리스티네…> 역시 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유대인 또는 유대인의 정체성 같은 건 발견할 수 없다. 작가 스스로가 한 민족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이었다는 말이 적당하겠다.
 소설은 1926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8년이 지난 시점이다. 전쟁은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족, 일찍이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700년간 이어오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조종을 울린다. 그걸로 끝? 천만에. 전쟁은 전쟁을 백번을 해도 귀족과 대 부르주아에겐 (아들 몇 명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오히려 권력 또는 부를 강화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소부르주아 및 중산층은 아주 거덜을 내버리고, 그보다 아래인 인민들에겐 아주 적절하게 굶어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시공간인 1차 대전 종전 8년 후 오스트리아나 하인리히 뵐이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2차 대전 종전 7년 후 독일이나 서민들의 생활은 아주 정확하게 같다. 소설의 주인공 크리스티네의 집안은 빈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박제 장인인 호프레너 씨가 이끄는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크리스티네의 오빠가 전사하고, 전시에 박제를 구입할 인간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어 집안은 거덜이 나버렸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호프레너 씨가 죽은 다음엔 늙은 호프레너 여사가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바람에 심각한 다리 부종에 걸리고 말아 어느덧 스물여덟 살이 된 크리스티네가 시골의 우체국에서 하루 종일 일해 번 돈으로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강퍅한 삶을 살고 있는 상황. 여기서 소설은 시작한다. 성당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며 자신은 도시의 빈민숙소에서 대충 잠을 자면서도 처자식 부양할 돈을 벌어야하는 뵐의 소설과 정말 비슷한 분위기.
 책의 원래 제목은 “Rausch der Verwandlung" 즉 <변신의 중독>. 그럼 이젠 ‘변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걸 이야기할 차례. 꽃다운 열여섯 살에 전쟁이 터져 스무 살에 끝났지만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크리스티네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것은 가난과 삶의 고통과, 하루 종일 일도 별로 없는 우체국에서 멍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권태와 극도의 촌스러움 밖에 없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하고 완전하게 똑같을 내일이 틀림없이 온다고 보장하는 나날들. 스물여덟 살, 어려서 소부르주아의 삶을 경험하여 빈곤하지 않은 생활이 어떻다는 정도는 태내에서부터 익숙한,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가난하고 권태로운 크리스티네에게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모가 한 명 있었다. 엄마의 동생이 젊은 시절엔 몸매 좋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백화점 여성복 코너에 옷 입어보는 모델 비슷한 직업의, 요즘 말로 일종의 연예인인데 당시만 해도 그게 손 타는 직업이었던 모양으로 무지하게 돈 많은 유부남과 아으 동동다리, 내연의 관계로 엮이고 말았단다. 클라라 이모가 또 속셈을 무지 밝아서 이 거물급 부르주아를 이혼시키고 자기가 본처 자리를 꿰찰 욕심을 품었고, 그걸 가슴 속에 품고만 있으면 어디서 티나는 것도 아니라 괜찮을 텐데 정말로 실행에 옮기는 바람에, 남편 바람피우는 걸 알지만 바늘로 애먼 자기 허벅지만 찔러가며 참고만 있던 본처께서 드디어 폭발하시어, 어느 날 호텔방에 들이닥쳐 벌거벗고 있는 두 연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아시지? 그리하여 소송까지 가게 될 찰나, 이 거물급 부르주아가 자기 위신 생각하느라 변호사를 통해 클라라 이모한테 거금을 건네면서 본부인께서 기소하기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가라고, 그럼 한 달에 얼마씩 몇 년간 더 주겠다고,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단다. 거기서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반 볼렌을 만나 자기가 받은 위자료(위자료 맞지 뭐)를 종잣돈으로 목화 중개상을 해서 무지하게 큰돈을 벌어 대 부르주아 부인으로 에스커레이팅한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클라라’이지만 혹시 유럽 출신 인간이 자기 젊었을 때 벌인 눈부신 치정행각을 알고 있을까 싶어 ‘클라라’를 ‘클레르’로 바꾸기도 했단다.
 하여간 팔자 고친 이모가 이제 나이 들어 사업은 두 아들에게 맡기고 부부동반으로 유럽여행을 즐기기 위해 스위스의 고급, 최고급, 최상의 고급 호텔에 머무르다 우연히 그동안 편지 한 번 안 했던 언니 안나 생각이 나서 스위스에 놀러 오라고 청했다. 하지만 다리 부종이 심각하고, 전쟁 후 먹을거리 변변치 않아 날로 쇠약해가는 안나는 2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저히 가지 못하겠으니 젊은 시절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 딸 크리스티네로 하여금 평생 처음으로 휴가를 즐기는 기회를 갖게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노처녀 크리스티네가 샛노란 외투를 입고 두텁고 튼튼하지만 무지막지하게 촌스러운 구두와 가난뱅이들이나 들고 다니는 모조 뿔 손잡이가 달린 우산, 고급호텔에선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도 없을 등나무로 만든 가방을 든 채 2박 3일간 악명 높은 오스트리아 3등 열차를 타고 스위스 최고급 호텔에 도착한다. 완전 촌닭 itself. 여기서 크리스티네의 변신은 시작한다. 돈 많은 이모가 마치 때맞춰 호박 마차를 타고 도착한 요술쟁이인 것처럼 그녀를 목욕시키고, 자기 옷을 빌려줘 입게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화장을 하고, 걷고 앉는 자세를 고쳐주자마자 크리스티네는 알프스 최고급 휴양지 최고급 호텔의 신데렐라로 등극한다. 원래 좋은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의 손톱이 그동안 하도 험하게 할퀴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크리스티네의 변신이 이루어지자 ‘크리스티네’라는 이름도 발음이 더욱 매끄러운 ‘크리스티아네’로 바뀌고 성姓마저 ‘호프레너’에서 이모부의 성 ‘반 볼렌’으로 바뀌더니 한술 더 떠 독일에서 온 거구의 미남 엔지니어를 거쳐 ‘폰 폴렌’, 귀족을 칭하는 전치사 ‘폰von'을 달게까지 되는 거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네덜란드 사람들 이름 앞에 붙는 ’반‘은 귀족이나 기사계급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반 고흐, 귀족 아니다. 옷이 날개고 메이크업이 광채다. 날개 달고 광채를 날리니 오스트리아 촌년이 졸지에 독일 귀족 폰 폴렌 영양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이 놀라운 변신Verwandlung!
 근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결코 동화작가가 아니라서 이리 휘황한 신데렐라의 탄생을 당연히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곧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우리의 신데렐라, 크리티네 양은 유리구두도 남기지 않고, 생쥐가 변한 백마가 끄는 호박으로 만든 마차도 아니고, 샛노란 외투와 가짜 뿔 손잡이가 달린 우산, 등나무 재질의 여행가방을 들고, 걸어서 철도 정거장에 도착해, 올 때와 마찬가지로 3등 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웬일로 줄거리를 다 이야기 하냐고? 천만의 말씀. 신데렐라로 변신한 크리스티네가 호텔에서 어떤 영화를 누리고 어떤 사랑을 받았으며,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과 육체적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뿐더러, 크리스티네에겐 어떤 방식으로 자정을 알리는 죽음의 조종이 울리는지 귀뜸도 하지 않았다. 맞지? 그거 알려드리면, 돈 주고 사서 읽은 나는 뭐야.
 더하기. 이게 끝이냐고? 하이고. 다시 화로의 재투성이 아가씨로 돌아간 우리의 신데렐라. 더할 수 없이 화려한 궁정 무도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게 비참한 현실세계. 츠바이크는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티네가 직접 보고 경험한 바와 같이 극소수는 최상급의 휴양지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행위와 재화와 문화를 소유하고, 그들의 최고급 복지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극빈자들의 무한노동과 내일을 알 수 없는 절망에서 나온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개 같은 현실은 언제나 요지부동. 전후 빈곤의 벽에 꽉 막혀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의 오스트리아 젊은이로서 크리스티네. 그가 절망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건, 바로,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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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1-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좀 끝이 급작스럽다는 느낌은 받지 않으셨나요? ㅎㅎ 츠바이크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미완성작품으로 보기도 한다더군요.

Falstaff 2017-11-03 10:52   좋아요 0 | URL
ㅎㅎ 전 과하게 친절한 에필로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제 때에 잘 끝맺었다고, ^^; 오히려 그래서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