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이채원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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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뜀박질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원시적이라서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아니,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계 운동성의 기초. 문명을 이루어 살며 그러다보니 어떤 일에도 숨이 꼴깍 넘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만족하는 속성을 지닌 인간들의 한 결실, 나도 읽어봤는데, 헤로도토스의 <역사>.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 인들을 물리쳤다는 낭보를 전한 메신저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아테네에 입성하여, “만장하신 시민 여러분, 아테네 군대가 이겼구만이라!” 딱 한 마디하고 숨넘어가 죽어버린 걸 기념하여 백리 길 달리기 시합이 벌어졌다가, 20세기 들어 백리 길을 딱 42,195 미터로 정한 뜀박질 경기.
 이 달리기 시합, 백리 길을 쉬지 않고 달리는 자체가 워낙 힘들어 죽음과 거의 유사한 경험을 잠깐이라도 하지 않고는 마칠 수 없다고 하여, 너무나 자주 인생길, 재수 없게 세상에 나오게 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해 모진 세상살이 꾸역꾸역 살아내는 인간의 일생과 유사하다고 숱한 인간들이 그렇게 얘기했는바, 하여간 가져다 붙이긴 잘도 붙인다. 내가 생각하는 마라톤의 미덕은, 단 한 발자국도 자신이 직접 찍지 않으면 결코 백리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우스운 진리. 하여간 인생은 잘 살아야 한다. 여기서 ‘잘 산다’는 건 일차원적으로 생각해서 좀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지적 양식과 철학의 고양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즉 삶이, 사회 전체가 먹고 살기 나아져야 한다는 의미. 그래야 마라톤처럼 죽을 고생을 해가며 운동하는 사람도 생기고 만날 야근하면서 번 돈 들여 비싼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끊어 땀 뻘뻘 흘리며 근육 키우는 인간도 생기는 것이지, 지금부터 멀리도 아니고 60년 전만 생각해보라,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뜀박질을 하고, 힘들여 죽어라 뛰면서 이게 인생살이니 뭐니 할 여유가 있었겠는지. 그리하여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라톤, 진짜로 이렇게 뛰다가 세상 하직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마라톤이란 뜀박질 운동을, 42,195 미터 다 완주하면 인생에 대한 철학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찍지는 않을 거 같다는 점.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 보면, 글쎄 모르긴 몰라도, 뛰는 운동, 극한 운동을 하는 도중에 인체 내부 어느 분비샘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물질이 퐁퐁 솟아나, 그게 마치 일종의 성적 오르가즘 비슷한 기능을 해서 자꾸 뛰게 되는 것이고, 그런 희열을 느낀 극소수의 사람이 마라톤에 관해, 완주한 다음의 오르가즘을 아름다운 수사로 만들어 널리 알리면, 결코 42,195 미터를 달리지 못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홀랑 속아 넘어가는 거 같다는 뜻이다.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 가운데 하나. 특히 드런 인생살이 중에 정말 드럽고 드런 인생의 교차로를 만나는 걸 계기로, 소설의 ‘나’처럼 마라톤을 시작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마라톤, 뜀박질을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현명한 방법일 수 있을 터. 홧김에 서방질 하는 우리네 조상님들의 지극히 현명한 방법보다도 훨씬 바람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앞 문장에서 ‘드럽다’는 맞춤법에 어긋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람. 어감이 ‘더럽다’보다 좋아서 일부러 선택해 그렇게 썼음).
 그래. 결혼 십년 차 여자인 ‘나’. 난소 결함으로 인한 불임증 판정. 늙고 병들어 수발해야 하는 시어머니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 다른 통로에 살며, 남편이 먼저 마라톤을 시작. 남편새끼가 첫 번째 42,195 미터 뛴 날이 하필이면 내 생일이었는데, 그 새낀 그날 다른 여자하고 잤음. 근데 문제는 새끼가 칠칠맞아서 마라톤 완주를 통해 받은 힘을 그 여자 몸속에 홀랑 쏟았다는 걸 내가 알게 만들었음. 그리하여 그날부터 나는 존나 뛰게 됨. 그날 시작해서 나도 잘난 남편새끼처럼 마라톤 완주한 날까지의 기록. 이걸로 끝.
 내 말이 맞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소설을 썼다 해도, 조상님들의 빛나는 권장성 속담인 홧김에 서방질보다 훨씬 우아하고 돈 덜 들고, 건전한 방식의 스트레스 해소로써 마라톤이지, 그게 무슨 철학은 아니잖아? 마라톤을 완주 하고난 다음 세상을 향해 “나는 인생의 영웅을 보았다. 바로 나다”라고 뻥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남원의 육모정을 출발해서 노고단까지 1박 2일 기어 올라가고, 거기서 또 열 개의 봉우리를 넘어 천왕봉에 오른 다음 대원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를 마친 이가 “난 또 한 번의 인생을 살았다.”며 구라를 푸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본인들한테는 전부 진실이겠지.
 위와 같이 좀 야박하게 썼다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개인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렇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건 존중받아야 한다. 이채원, 당신 말이 맞다. 근데 마라톤 백 번 완주하면 드런 인생살이의 문제가 좀 풀리긴 할까? 날 버린 그 새낀 다시 돌아오고, 늘 수발해야 하는 시어민 얼른 꼴깍 죽어주고, 불임 대신 잘 생긴 아이 하나 입양해 천만다행으로 속 안 썩이는 건 물론, 얌전하고 건강하고 공부 잘 하는 모범 청소년으로 자라줄까? 암,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된다면, 그게 아니라도, (당연히)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하나 없어서 생긴 속상한 마음, 말짱, 요새 말로 힐링 비슷하게라도 된다면 백 번 아니라 천 번은 못 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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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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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를 쓴 작가인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선택해 읽다가, 문득 정신 차려 책장을 올려다보니 <그것이……>를 쓴 사람은 토마스 브루시히, 잉고 슐체가 썼고 내가 읽어본 장편은 <새로운 인생>. 즉, 완전 착각. <아담과 에블린>은 <새로운 인생>을 쓴 3년 후 발표한 작품으로 이 부분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라는 구절이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헷갈리게 했던 바와 같이, “<그것이……>와 아주 비슷하게” 동서 독일의 1989년 통일 시기에 동독 인민들의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두 주인공, 아담과 에블린, 아담은 다들 아실 것이고 ‘에블린’은 ‘이브’를 연상시키는 독일 이름이라고 하니, 저 예전에 ‘말씀’이 있어서 지구상 제일 먼저 만들어진 남자와 여자를 은유하는 두 남녀 주인공을 등장시켜, 통독 과정 당시 일반 동쪽 독일 인민들의 난감한 의식을 재미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난감한 의식이라 함은 에블린으로 대표하는 많은 동독 시민들은 서구를 동경하다가 드디어 탈동脫東에 성공한 사람을 대표하고, 아담은 굳이 체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꼭 바꿔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해 그냥 동쪽에 머물고 싶으나 사랑하는 에블린이 꼭 동쪽에서 살아야하다니 차마 그녀와 떨어질 수 없어 어영부영 서쪽에 살게 된 인물을 대표한다. 그래서 어쨌거나 동쪽에서 낳고 자라고, 그 정도면 잘 체제에 적응하여 어렵지 않게 살았던 인간들이 처음으로 자본주의 가치관과 체제로 탈출하게 되어 아담과 이브, 즉 아담과 에블린으로 불리울 수 있게 되는 것.
 나는, 내가 꼭 남자라서가 아니라 아담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는데(어쩌다 그렇게 됐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은 저절로 아담의 시각에서 읽었을 거라고 믿는다), 동쪽 독일에서 아담의 직업은 여성의류 재봉사. 일단 외국어로 표기해야 더 좋게 들린다는 몽매한 21세기 대한민국 언어의 흐름을 좇아 얘기하자면 여성 의류 디자이너로, 자신이 (주로 중년의 돈 많은) 여인들의 세련된 옷을 디자인해서 지어준 다음에 자신의 ‘작품’을 입힌 채로 사진 한 방을 찍어 보관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으며, 뭐 상황이 피할 수 없게 진전될 경우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작품을 몸에 걸친 여인들로부터 직접 만든 작품을 홀딱 벗게 만드는 신공을 가지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어느 날 릴리라는 이름의 나이 들고 포동포동한 중년 여인에게 자신이 지은 옷을 입히면서 옷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산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실크 브래지어를 벗어 맨몸에 작품을 걸치게 한 다음, 원래 계획은 비록 그렇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손가락들이 작품의 아래, 즉 곧바로 맞닿게 되어 있는 릴리의 피부 위를 적극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으며, 기대와는 달리 그리하여 벌어졌을 파노라마는 과감하게 생략한 채, 다음 장면으로 포동포동한 릴리는 욕실에서 비누거품 잔뜩 뒤집어 쓴 욕조 속에, 아담은 벌거벗은 채로 작업실에 서있는 순간, 동거인 에블린이 난데없이 그들의 동거가옥에 쳐들어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에블린은 스물 한 살의 똑똑한 여성. 그러나 아쉽게도 동쪽 독일이 요구하는 체제와 법률에 대한 순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한 대학생이 되었다가, 엉뚱하고 흥미 없는 전공을 공부하느니 차라리 다니지 않음만 못하다는 현명한 결론을 내린 것까진 좋았지만 지능지수 높은 아가씨가 기껏해야 슈퍼마켓 계산원을 하고 있었으니 평소 자기가 사는 꼴에 지극히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어느 날 불쑥 자기 꼴이 너무 한심스러워 한 바탕 벌컥 성을 내며 그것도 직장이라고 아 썅, 낼부터 안 나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대성일갈한 다음 내연남의 위안이라도 받을까싶어 벌컥 현관문을 열어 젖혔더니, 욕실 문을 훤하게 열어놓은 피둥피둥한 아줌마가 비누거품을 뒤집어 쓴 채 욕조에 앉아 있고 내연남은 벌거벗은 채로 장롱 옆에 숨어 있더란 말이다. 아이고, 내 더 이상 이놈의 공산당 치하에선 살 수가 없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그길로 짐을 싸서 사촌이라 일컫는 나이많은 서독 남자 미하엘을 따라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거쳐 친구네 집으로 내빼버리고 만다.
 비록 육체가 원하고 본능이 원해 나이 많고 피둥피둥한 아줌마의 몸을 탐냈을지언정 죽으나 사나 에블린을 사랑해마지않는 아담은 그길로 만든지 28년이 넘은 똥차를 끌고 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만나고 드디어 아담이 원하지 않았던 서독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해버리고 마는데, 하이고.
 문제는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 선택과 그에 따른 실행 또는 모험담이 이 책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비록 동쪽의 많은 인민들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동쪽은 동쪽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안분하던 인물이 아무 대책 없이 서쪽으로 넘어와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돈과 부적응, 뭐든지 과잉으로 공급되는 자본주의적 질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건 날 때부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일 수도 있고 뭐 그런데, 예를 들면, 자본주의 세계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자마자 생긴 스물한 살 에블린의 태내에 막 생긴 생명이 과연 아담의 아이인지, 아니면 사촌이라고 주장하던 미하엘의 아이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으면서 그냥 아담과 계속 살기로 해버리고, 그리하여 지속시키기로 한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며, 동독에선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일지라도 서쪽으로 넘어오니 시민 대다수가 간편한 기성복만 사 입기 때문에 주어진 일거리라고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옷 수선, 그것도 파트타임 말고는 구할 수도 없는 비극.
 아,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다. 차라리 원문을 그대로 다 배껴 쓸 걸 그랬나? 반성한다.
 근데 이런 비극성을 잉고 슐체는, 그의 첫 작품 <새로운 인생>은 순전히 잉고 슐체란 이름이 근사해서 사 읽었는데, 이 책은 작가의 이름하고는 관계없이, 그는 이 작품을 산뜻한 희극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지극히 마음에 들었다. 비장하지 않은 비극. 숨어있는 웃음의 코드로 오히려 강화되는 비극성. 여기서 말하는 비극성은 뭐 킹 리어나 데스데모나 혹은 오필리어의 비극이 아니고 굳이 비교하자면 경쾌한 비극인데, 이걸 경쾌한 비극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거 역시 작가 잉고 슐체의 독특하게 발랄한 시선이 굳건하게 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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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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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0년 민음사가 주관하는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오늘의 작가상’이 어떤 상인가.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 강석경의 <숲속의 방> 등, 가히 당해 연도 빛나던 작품들을 골라 어제도 아니고 바로 오늘의 작가라고 계관을 씌워주던 상이다. 물론 나 소싯적에 그랬다는 말. 요새는 넘겨듣기론 민음사에서 낸 책만 아니라 모든 출판사에서 나온 모든 책을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는데 그것도 민음사의 돌아간 사주 박맹호 선생 아니면 힘들었을 결정이었겠다.
 하여간 그런 상을 받았다고 하니 요샌 오늘의 작가상 수준이 얼마나 되나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써놓고 다시 읽어봐도 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긴 하지만 하여간) 오랜만에 듣는 상, 그동안 밥상, 술상, 찻상, 개근상밖에 받아본 적 없어 오늘의 작가상이란 이름도 새삼 멋있기도 해서 한 번 골라 읽어봤다. 물론 이왕 상 탄지 7년이나 된 책을, 우라질 도서정가제 때문에 비싼 책값 다 내고 읽기 뭐해서 중고책 골라 읽어봤다.
 220쪽 조금 넘는데,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어쨌든 반나절이면 다 읽는다. 소감? 이거 읽은 독자들은 딱 두 패로 나뉘겠다. 찬반양론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작. 나? 당연히 찬성 쪽. 이 책 <제리>만 보고 말한다면 이런 작가의 등장을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입장. 왜? 어떤 소설보다 더 야한 베드 씬 장면이 등장해서. 이건 물론 농담이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이 낯설고, (낯설어서)불편하고, (낯설고 불편해서)급기야 불쾌한 단계를 넘어, 양쪽 관자놀이 상단 10cm(‘십센찌’라고 굳이 발음할 필요는 없고) 부근에 악마의 뿔이 돋을 만할 때에 이르면, 스물아홉 살배기 작가 김혜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태까지 모든 낯설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도발적인 모든 표현을 통해 인간, 그중에서도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젊은이들의 고독과 소외와 그리움을 넘는 갈망이란 걸 깨닫게 된다. 너를 향한 갈망. 또는 우리를 향한, 너와 내가 우리가 되고 싶은 갈망. 어떻게 이걸 소설행위로 표현해야 할까. 김혜나는 섹스로 이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그래서 지독한 수준의 성애묘사가 바로 그 자리에 필요했었으리라. 작중 주인공 ‘나’가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섹스가 나에게 준 건 까마득한 벼랑위에 선 듯한 오르가즘이 아니라 언제나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관계의 유지 및 새로운 관계의 생성을 위해 섹스는 언제나 필요했던 것이었다.
 21세, 22세, 많아봤자 25세 가량의 젊은 여성들. 인천 소재 2년제 대학의 야간부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부모한테 용돈을 받고, 모자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충을 해가며 남자 도우미를 불러 노래바, 노래방의 ‘방’을 ‘바Bar’로 바꾼 결과 유흥음식점으로 바뀌어버린 노래바에서 질탕하게 때려 노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젊은 것들을 봤나, 하는 것이 처음에 든 솔직한 감정. 외롭다, 힘들다, 난 패배자다, 하는 그들의 정서를 정말로 한심하고, 우울하고, 세상모르고, 어이없게 받아드리는 기성세대, 즉 내 마음 속의 것들이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진정으로 마음 짠하고, 속상하고, 공감해서 내게 기대 마음껏 눈물을 쏟을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고 싶게 되는 과정이 이 책을 읽는 일이다.
 워낙 짧은 소설이라 이 정도의 스토리 및 책 읽은 소감이면 충분하리라 믿는다. 더 이상은 아무리 궁리해도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 김혜나의 책들을 검색해보면 극과 극의 평이 달리는데, 하나 정도 더 읽어볼 예정. 일단 이 책은 내 마음에 딱 들었으며, 그리하여 아직 민음사에서 매년 주는 ‘오늘의 작가상’에 대한 신뢰도 연장되었음을 널리 고한다. (어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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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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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소설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서 스웨덴 말 “Flickan som lekte med elden”을 구글 번역기에 돌려봤더니 “화재로 놀고 있던 소녀”란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다시 스웨덴어→영어로 해보니까 “The girl who was playing with the fire". 뭐 하여간 그렇다는 말이다.
 라르손 본인이 기자 출신의 작가라, 이 책, 밀레니엄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는 ‘밀레니엄’이란 월간지의 선하고 독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겪는 스릴러 범죄에 대한 소설인데, 재미난 것이, 이 작자가 세계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야하는 스웨덴에서 열라 기자생활을 해도 별 볼일이 없을 거 같으니, 나중에 늙어서 좀 여유롭게 살아볼까 싶어 40대 후반 들어 이 범죄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한 가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있나? 모두 열편의 시리즈를 구상하고 열라 써나가고 있던 도중, 나이 50에 이르러, 세 편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채, 정작 책이 나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등극해 자신의 통장에 숨 막힐 듯한 현금이 쌓이는 건 구경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 하직하고 만다. 노후 대비하려다 아주 일찍 세상 떴다. 그게 인생이다.
 하여간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어보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잘 쓴 대중소설’이라 시리즈를 몽땅 독파하리라 마음먹어 읽어보게 됐다.
 전작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고생을 죽도록 했던 150센티미터, 가냘픈 체격의 아가씨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고생 끝에 잭팟 또는 로또가 터져 죽어 호적이 없어진 악인의 돈 30억 크로나, 우리나라 돈으로 4,200 억 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삥칠(삥치다: 은어, 속어. 나쁜 꾀로 금품을 얻거나 만만한 인간을 협박해 금품을 빼앗다) 수 있어서 졸지에 백만장자로 등극한 다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돈 많으니 행복하겠다, 싶지? 천만의 말씀. 여태까지 내내 거렁뱅이로 살아와 정작 돈이 넘치게 많아도 폼 나게 쓸 줄을 모른다. 부유하고 가방끈 긴 인간들과 어울리는 대화도 할 줄 모르고, 마음에 드는 펜타하우스 한 채 사려고 해도 복덕방 늙은이는 쳐다보지도 않아 결국 해외 대리인을 통할 수밖에 없는걸. 근데 이런 거 가지고는 소설을 쓸 수 없다. 더구나 완벽한 대중소설임에야. 그리하여 작가 라르손이 머리를 짜내 이 가냘픈 아가씨를 둘러싼 범국가적 범죄행위를 하나 장만하니, 살란데르 아가씨의 지문이 묻은 권총으로 세 명의 대갈통이 박살나버리고 만다. 어릴 적부터 문제아의 최상급으로 등록되어 있던 아가씨의 지문은 당연히 정부당국에 의해 보관되어 있었고, 화려한 전력이 뒷받침되어 살란데르는 단박에 제 1의 용의자로 등극하고 만다. 그.러.나. 살란데르 아가씨는 엄마하고 살던 자신의 아파트는 친구한테 줘버리고 가명으로 위에서 말한 200평짜리 펜타하우스에 입주해 살고 있으니 그걸 어떻게 찾아.
 여기까지 스토리는 책 소개에 다 나온다.
 이런 소개는 정말 밉상. 특히 범죄소설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을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건 진짜 바람직하지 않다.
 전작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자주 보였던 엽기 변태와 학대 및 고문 같은 씬은 이 책에선 나오지 않고, 조금 순화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매그넘 총을 인간의 대가리를 향해 쏘고, 총알을 맞은 인간 대가리의 모습을 묘사가 등장하는 정도. 전기톱을 이용해 사체를 분리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 같은 것이 제일 지독한 묘사인데, 전작하고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다.
 이 시리즈의 책을 읽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바르가스 요사는 “난 일말의 부끄럼 없이 말한다. 환상적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되게 웃기다. 부끄럼 없이 말하다니. 그냥 환상적이라고 하면 어디 덧나? 이게 뭔 말씀이냐 하면, 노벨상 수상자가 대중 소설을 읽고 환상적이란 소감을 달면 그게, 기본적으로는, 부끄러운 행위라는 거다. 대중 소설을 읽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제발 하나만 부탁하자. 웃긴 얘기는 가려서 하라고.
 백문이 불여일견. 무척 재밌는 책. 시간 죽이기 위한 최고, 최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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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1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사서 읽으셨군요.
이 시리즈 2쇄부터는 반양장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때를 노려보는 중입니다.
인테넷으로 사도 만 7천원이라 좀 비싸더군요.
하긴 반양장이라고 해도 가격 차이 별로 안 나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중고샵 판매 때까지 기다려 보든가.ㅋ

Falstaff 2017-09-12 14:57   좋아요 0 | URL
반양장이라도 얘기하신대로 그리 차이나지 않을 겁니다. 한 만5천원 하겠군요.
하여간 그노무 우라질 도서정가제 때문에 여러가지로 코피나는 21세깁니다. ㅠㅠ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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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작가이긴 하지만 오히려 바로 유명세 때문에 정작 읽어보기를 차일피일하게 된 소설가. 이런 기분 아시지? 3년 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차일피일은 괜히 했네. 얼른 읽어볼 것을. 그러면서 한 구석으론, 책을 번역한 이윤기 선생이, ①내가 알기론 이태리 말을 한국말로 옮겨 책을 낼 만큼의 이태리어 실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②번역하는 분이 한국말로 글을 과하게 잘 쓰는 사람일 경우 오히려 원본을 손상시키는 위험을 잘 알고 있어서 이윤기 번역서를 피하다보니 두 번째로 읽은 책이 <푸코의 진자>가 아닌 이태리어→한국어, 즉 직역과 동시에 적어도 진지한 번역인 것처럼 읽힌 <바우돌리노>가 됐으며, 세 번째 역시 직역(인줄 알았는데 암만해도 아닌 것 같음), 그리고 (다 읽고 조심스레 결론을 내려보니)공을 많이 들여 번역작업에 임한 것이 틀림없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됐다. <푸코의 진자>를 다음에 읽으려고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로아나....>의 주석에 <푸코의 진자>와 겹치는 부분을 상세하게 콕 집어놔서 혹시 두 작품 사이에 뭔 관계가 있나 싶어서이지만, 솔직히 이윤기 번역이란 게 좀 맘에 걸린다. 아울러 그동안 외국 시의 번역은 반역이란 투철한 인식 아래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외국 번역시집 한 권은 꼭 읽어보려 한다. 누구냐 하면, 랭보. 에코가 진짜 시인이라고 은근히 강조했기 때문에. 아시다시피 난 책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책에 관심이 무지 많아서. 또 있다. 에드몽 로스탕이 쓴 <시라노>. 동명의 오페라가 원작의 거의 모든 걸 다 포함하고 있어서 마치 읽어본 듯한데 <로아나....>의 뒷부분이 온통 시라노와 로잔느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깔려 있어 마음 고쳐먹고 한 번 읽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밀리오 살가리가 쓴 <산도칸-몸프라쳄의 호랑이들>도. 이건 화자 ‘나’ 잠바티스타 보도니, 애칭으로 얌보의 유년시절에 감동을 받아 평생에 걸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소개한다. 위스망스의 소설 하나가 더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절판이다.
 문제는 돈 많은 고서적상 얌보가 술, 담배, 여자, 과다한 독서에 따른 운동부족(누구 하나를 콕, 집어서 얘기하는 거 같다)에 따른 고혈압으로 하루 날을 잡아 까무러친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물론 뒷목 부여잡고 어어… 하면서 자빠지는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까무러쳤는데 병원에서 서서히 회복하는 광경, 완전한 오리무중에 빠져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상태와 매우 비슷한 환경. 저 멀리서 어딘가,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얘기를 하고 난 대답을 하고, 19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단이 골을 넣은 프랑스가 브라질에 3대 0으로 이겨 우승했다는 건 알고 있으나, 자신이 낼 모래 환갑인 노년의 남자고, 동갑내기 심리학자 마누라 파올라와의 사이에 결혼한 두 딸, 세 손자들이 있다는 기억은 완벽하게 소거된 상태로 깨어난다.
 거 재밌겠다. 눈 떠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아내라고 주장하면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물럭거린단 말이지. 진짜 내 눈 앞의 다 늙어버린 여자가 30년 넘게 같이 산 아내란 말인가? 그렇기는커녕 난 결혼 생활이란 것이, 여자하고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무슨 기분인지도 전혀 모르는데? 안 물어볼 수가 없었겠지. “난 괜찮은 사람이었소?” 여자는 싱긋 웃고 말한다. “대체적으로 괜찮았어요. 유혹에 약한 걸 빼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 뒤로는 젊은 주부 두 명이 세 아이를 데리고 서 있다. 자식과 손자들이라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식이라면 자라면서 속도 썩히고 그랬을 테니까 기억하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손자 손녀들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까. 근데 기억나지 않는다. 퇴원 후 집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가장 친한, 친하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왔는데도 전혀 누군지 모르겠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짓궂은 농담을 해도. “어여쁜 시빌라한테 전화해봤어?” 뭐라고? 시빌라? 그게 누구?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이 경우엔 심각하다. 여자 이름이라서. 아내가 말했었다. 유혹에는 약했다고.
 “아, 미안, 미안. 자네 고서적상점 아가씨야. 정말로 아름다운 아가씨라서 남자라면 누구라도 다 한 번 쯤 마음속에서 간음하게 만들 정도지. 흔히 자네한테 지금처럼 놀리고 그랬네.”
 아, 미치겠다. 그걸 어떻게 믿어. 가게에서 하루 종일 둘이 같이 있었다면, 거기다가 내가 천성적으로 유혹에 약했다면 과연 그리 어여쁜 아가씨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몸이 조금 좋아진 거 같아 광장 한 바퀴 산책을 하는데 약간 나이든 티가 나는 젊은 여인 반나가 와서 얌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얌보, 얌보.”하면서 “나는 너에게 두고두고 아주 멋진 추억으로 남을 거야” 하는걸 보면 분명 이건 보통 사이가 아닌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다.
 사태가 심각함을 제대로 알아챈 심리학자이자 현명한 아내. 원래부터 얌보는 대학진학 이전까지 그가 주로 살던 솔라라(지역이자 저택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시절의 기억을 싹 지우고 살던 터. 비록 아주 촌이지만 공기도 좋고 얌보의 기억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곳에서 몇 달을 보내라고 거의 강권을 하다시피 한다.
 나, 지금 독후감 쓰면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한 거다. 주인공이 원래부터 청소년 시절까지의 기억을 지우고 살았다는 거. 그럼 혈압이 터져 자빠진 다음에 후유증으로 모든 기억을 소거하기 전에도 생애 일부분에 관해선 회로가 망가져 있었다는 중요한 설정.
 하여간 솔라라로 주거를 옮긴 얌보. 그는 그곳에서 열 살 가량 위인 청지기의 딸 아말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몇 달을 지내면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 시절, 또한 이탈리아 현대사의 질곡기桎梏期 한 가운데를 관통하던 시기에 있던 일을, 그의 할아버지가 수집해놓은 온갖 책, 잡지, 신문, 우표, 과자 깡통 등을 통해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로아나 여왕의 놀라운 불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대목에서 “안 알려줌!”이 나와야 하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알려드리겠다. 만화책 제목.
 당연히 이렇게 쉽게 알려드리는 이유는, 그래봤자 <로아나....>가 만화책 제목이라는 걸 백번 얘기해도 절대 이 책의 프레임 비슷한 건 생각도 못할 것이기 때문. 소설의 절반 이상은 얌보 또는 에코의 소년시대에 읽은 책과 잡지, 만화책 같은 것들에 할애하고 있다. 근데 그걸 글쎄, 거의 다 사진을 찍어 삽화 비슷하게 보여준다는 말씀. 하여간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파시스트, 물론 ‘두체’라고 칭했던 무솔리니와 그 일당들을 찬양하는 노래 가사까지 다 나오니까 할 말 없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이 소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 한다)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다 늙어 죽음의 침상에 누워 그땐 그랬고, 그때는 또 그랬지, 순간순간을 짚어가는 삽화소설일 수도 있고(삽화소설이라고 하는 게 더 비슷하겠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 순간, 우연히 조국의 불행한 현대사와 맞부딪힌 시절에 겪을 수밖에 없던 허구의 개인사를 보태 소설로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해드릴까? 글쎄.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중에서도 천수를 다 하고 돌아간 작가들의 경우에, 참 아쉽게도 마지막 작품은 전작들과 굳이 비교하면 눈썹을 휘날리는 경우가 그리 없기 때문에, 내가 읽기엔 참 좋았으나, 하여간 신중을 기해 선택하시란 사족을 달아야 나중에 핀잔을 덜 먹겠다 싶어서 말씀이야.

 읽으면서 제일 골 때리는 장면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하고 같이 자야하는 첫날 밤 침상 위에서 슬쩍 손을 대니까, 아내가 하시는 말씀이, “처음 날 알기 시작한 남자하고는 그걸 할 수 없어요.”라는 취지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 며칠 후 드디어 사랑의 행위를 마친 다음에 역시 아내가 하시는 말씀. “원 세상에,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예순 살 먹은 남편의 동정을 빼앗다니.” 아,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이게 진짜 유머 아냐? 여기에 남편께서 아내에게 화답하시는 말씀. “아예 안 하느니 늦게라도 하는 게 나은 법이죠.” 같은 장면에서 더 재미난 건, 일을 다 마친 후에 얌보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 “이제 사람들이 왜 그걸 밝히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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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9-1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세욱 님, 번역이 정확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번역에 공들인 것은 알 수 있죠.
이 ‘로아나‘의 경우, 역주에 영문판이랑, 어디 다른 걸 참고했다고 자잘하게 나오더라구요.
그 수고를 알게 되니, 괜히 트집잡고 싶었던 마음이 ‘완전 무장 해제‘ 됐었습니다.

님의 리뷰로 다시 보게 되니, 완전 반가운 마음에~^^

Falstaff 2017-09-11 13:24   좋아요 0 | URL
예. 하여간 꼼꼼하게 시간 무척 많이 들여 공들여서 번역한 티가 나더라고요.
저도 정확한 번역 여부에 관해서는 깡통입니다만 ^^;

잠자냥 2017-09-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위스망스의 소설은 <거꾸로> 인가요? 전 미셸 우엘벡 <복종> 읽다가 위스망스 <거꾸로> 읽어봐야 겠구나 하고 검색해봤더니 절판이더라고요. 다행히 알라딘 중고에서 싼 가격에 거의 새 책을 구했습니다!

Falstaff 2017-09-11 13:25   좋아요 0 | URL
지금은 중고책도 별로 없더라고요. 다시 한 번 뒤져봐야겠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