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고의 숲 열린책들 세계문학 92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사고’의 뜻이 무엇인가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 책의 87쪽에 “자아의 신화적인 이상理想”이란 말이 나온다. 작중 주인공 스티븐의 아버지는 밀교 또는 심령에 심취하여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 비밀스런 숲 근처 산장(요즘 표현으로 주거 형태 독립빌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에서 이미 영국 땅에선 멸종해버린 멧돼지의 신화적 생존형태에 관심을 두다가 자신이 정말 신화에서나 나올듯한 직립보행 하는 거대한 멧돼지가 돼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아를 신화적인 이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낸 경우. 물론 인간이었을 때의 감정과 지성 등등을 가지고는 있으나 숲에서 살기에, 또는 숲을 지배하기에 적절한 형태로 변화된 상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신화적 이상의 한 형태, 그게 사람이었건, 건축물이건, 아니면 작은 부족이건 간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던 적이 있을 거란 믿은, 바람 같은 것이 어떤 형태로 실화實化되어 실제로 특정 인물, 건축물, 작은 부족이 신비한 태초의 능력을 가진 숲 속에 생겨난 경우, 이것도 미사고라 칭한다. 또, 영화를 통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자아의 신화적 변형’으로 “아바타” 역시 미사고의 하나. 세 가지 미사고의 예를 들었지만 내가 파악하지 못한 책 속의 다른 미사고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혹시 이 책을 읽을 요량이면 다른 미사고를 발견해내는 것도 재미있겠다.
 책의 숨은 주인공이자 가문의 아버지인 조지 헉슬리가 드디어 산장 바로 옆에서 시작하는 크지 않은 숲 안에 있는 미사고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친구인 에드워드 윈-존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재미있는 환상소설 <미사고의 숲>은 시작한다. 편지 속에 신화시대에나 있었던 듯한 부족 ‘샤미가’의 일원인 ‘생의 이야기꾼’을 통해 알게 된 쌍둥이 자매에 관한 이야기, 전설, 신화 등을 소개하며 ‘후르파스나’ 즉 ‘까마귀들이 키운 소녀’란 뜻의 아기, 앞으로 400쪽에 걸쳐 이게 어떤 의미인지 밝히게 될 기본적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 즉 ‘후르파스나’가 우리(그들)가 알고 있는 바, ‘귀네스’ 전설의 원형이라 굳게 믿는 조지 헉슬리. 여기까지 읽으면서 아직은 그리하여 ‘귀네스’란 이름의 미사고가 등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 귀네스가 아서 왕의 비이자 란셀롯의 연인을 뜻할 지도 모르겠다고만 여겼을 뿐. 근데 진짜 귀네스가 나오는 거 아냐 글쎄!
 연구에 몰두하느라 자기한테 아들이 둘 있는지 어떤지,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들들이 참전을 하는지 마는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한테 마음이 상한 둘째 아들 스티븐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그냥 프랑스에 눌러 있었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영국의 산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형 크리스찬과는 계속적인 편지 왕래가 있어서 그가 귀네스란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막상 산장에 도착하니 그녀는 없다. 그냥 가버렸단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더 광적으로 숲의 비밀을 찾는데 골몰하는 형. 그는 아버지의 (일부가 찢어진)일기 같은 자료를 미리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수월하게 숲의 장막을 여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생 혼자 집에 두고 숲으로 사라져버리는데, 아이고 이걸 어째, 귀네스가 동생 스티브 앞에 등장하고 만다. 이쯤 되면 정말로 아서 왕의 전설과 비슷하다. 왕의 비이지만 왕의 신하하고 바람피우는 여자. 저 훗날 리미니의 란체오토 말라테스타 공의 비妃 프란체스카가 시동생 파올로하고 불륜을 맺을 때(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지옥편> 참조) 매개가 되는 스토리로 등장하게 된, 귀네비어. 형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자신의 아내라고 한다. 만일 그 주장대로라면, 시동생하고 사랑하게 되는 귀네스. 이탈리아의 리미니에선 같은 경우에 형 란체오토가 동생 파올로를 뎅거덩, 잘라 죽여 연놈을 곧바로 지옥으로 보냈지만, 아서 왕은 그러지 않고 자신이 애벌론 섬으로 사라지는(죽음의 길을 가는) 결말을 택했다. 이 사건을 서기전 2000년쯤으로 여기는 작가 로버트 홀드스톡, 이이는 귀네스와 스티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미사고들이 사는 숲은 자신의 자기장 비슷한 것으로 나름대로 방어막을 쳐서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있지만, 방어막이란 건 언제나 뚫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곳을 지배하려는 이방인이 들어오고야 마는데, 그게 누구일까. 거의 평생을 바쳐 숲의 비밀, 신화나 전설(myth), 거거다가 이미지(imago)를 합친 미사고mythago, 이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할 수 있는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없애고자 한다. 그러나 방어막을 친 스스로의 힘으로 막아내지 못하는 위험인물은 언제나 있는 것이니 그게 누구?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에 보면 영국인들은 숲과 숲의 정령 속에 많은 전설과 신화를 담아놓은 듯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윈저가의 즐거운 아낙네들> 속 자정의 숲속 장면과 <템페스트>를 자주 떠올리곤 했다. 또 난데없이 일본 작가가 산속 깊숙한 곳에서 벌이는 으스스한 이야기들, 즉 이즈미 쿄카의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와 엮여, 혹시 이게 섬나라 사람들의 공통점 아냐? 섬나라니까 당연히 안개도 많고 대체로 습하고, 거기다 산악지역이면 대체로 대륙의 산악지대에 비해 으스스한 느낌이 훨씬 강할 거 아닌가. 그래서 비슷하게 으슥한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재밌다. 도대체 사람의 상상력으로 안 되는 게 뭔지 모르겠다.

 


 * 예전에 어떤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지 혹시 모르겠다. 열린책들의 표지, 루소가 그린 밀림 장면이 영락없이 남미나 아프리카인 것 같아 누가 추천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고르지는 않은 거 같다. 사놓고 오래 뒀다 읽으면 이런 경우도 생긴다.


 * 중세 독일지역의 기사계급,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서울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밤새 경계근무를 하는 군터와 하겐. 이름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책이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 있는데 찾아 확인해볼 생각을 하니까 감당이 되지 않는다. 하여간 두 기사가 성루에 서서 장검을 발아래 콱 찍어놓고 밤을 꼴딱 새워 깜깜한 밤의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이 먼저 그려진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책의 3/4부분에 우리의 주인공 스티븐이 귀네스를 찾아 숲에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한 무리의 미사고가 나타난다. 5~7세기에 브리튼으로 넘어온 게르만들이다. 이들 가운데 남자 대장 하나가 스티븐과 동행인을 잠자게 하고 자기는 땅바닥에 장검을 콱 박아놓은 다음 벌떡 서서 밤새 뻗치기 보초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귀네스도 그렇고, 게르만인의 뻗치기도 그렇고, 세상에 모방 아닌 창조가 어디 있어, 한 마디 하는 거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긴 편지 열린책들 세계문학 170
마리아마 바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서간체 소설이다. 모두 스물일곱 편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 보낸 사람 라마툴라이. 세네갈의 이슬람교도 여성. 자녀 열한 명의 어머니. 이 여인이 과부가 된 시점에 아이사투란 수신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려서부터 친구인 아이사투가 내일 세네갈에 도착하는 날까지 스물일곱 편의 편지를 쓰는 형식. 사실은 편지글이라도 라마툴라이가 계속 아이사투에게 보낸 진짜 편지들이 아니라, 세상 살면서 참 어렵고 힘들다고 여길 때마다 한 통씩 편지글을, 노트에 써놓았던 것이다.
 라마툴라이의 착한 맏딸 ‘다바’에겐 예쁘게 생기고 깜찍한 외모, 그러나 가난한 집의 딸 ‘비느투’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한테 한 늙은이가 차에 태워 좋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엄청나게 비싼 기성복을 사 입혀 비까번쩍한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있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절을 계산하면1960년대 말 가량? 이때부터 다바는 엄마 라마툴라이에게 비누트한테 생긴 일들, 문제의 ‘주책스런 늙은이’가 거의 전적으로 돈의 힘으로 비누트와 비누트의 부모, 조부모에게 환심을 사려하는 걸 생방송 진행을 해주곤 했다. 좋은 집을 사주고, 회교도들의 평생소원인 성지순례도 당연히 보내주는 건 물론이며, 매달 넉넉한 생활비까지 보태준다고 약속했다나. 원조교제의 원조 격이니까 그랬겠지. 평소 여권신장에 관심이 높았던 라마툴라이도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곧잘 들어주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원의 승려와, 시아주버니와, 편지의 수신인 아이사투의 전남편, 이렇게 세 명이 찾아와 말을 이리저리 빙빙 돌리더니, 오늘 아침에 당신 남편이 새장가를 갔다고,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이 비누트라고 하더란다. 그때부터 비누트의 강짜가 시작되고, 남편은 한 번도 마라툴라이와 열한 명의 아이들을 보러오지도 않은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생활비 한 푼 보태지 않기 시작한 거였다. 그 새 둘째 아내 비누트는 색깔 다른 두 대의 승용차에다 친정 엄마 아빠 모시고 다카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온갖 사치를 다 부려댔으니 속으로 얼마나 열불이 뻗쳤을까.
 왜 마라툴라이가 아이사투에게 이렇게 길고 긴 편지글을 썼느냐 하면, 아이사투는 마라툴라이와 다르게, 그리고 이 소설의 작가 마리아마 베와 같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남편의 중혼을 참지 않고 이혼해버리면서 네 명의 아이들을 스스로 양육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작가 마리아마 베는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데리고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해버렸다. 구글 검색). 아이사투는 귀금속세공업자의 딸로 하늘같은 신분인 왕족의 후예와의 결혼에 성공하여, 신분차이에 열 받은 시어머니가 애초부터 아들의 중혼을 염두에 두고 열린 사고방식과 세상을 대하는 옳은 방법 등을 가진 양순한 처녀를 두 번째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다가 결혼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식 중혼을 참지 않고 이혼을 감행, 곧바로 학업을 이어나가 지금은 재미 세네갈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엘리트이자 부유한 계급으로 지내고 있다.
 작가는 친한 두 친구의 환경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하여, 중혼을 인내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세네갈 내 이슬람 여성과, 이혼을 감행함으로서 보다 확실한 자아를 찾아낸 여성을 등장시켜 성적 자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구도를 취했다. 아주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스토리는 소개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여기서 멈추지만, 세상일이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에도 나름대로 길은 있다. 열한 명의 아이가 아직은 다 크지 않아, 마라툴라이의 어머니로서의 곤고함과 차별이 앞으로 어디까지 뻗칠지 전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마라툴라이의 입을 빌린 작가 마리아마 베는 이렇게 얘기한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가 상대에게 진정으로 다정할 수만 있다면! 상대 속에 융화되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상대의 성공과 실패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상대의 결점을 세는 대신 장점들을 높이 산다면!” (16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손톱을 너무 바짝 깎았다. 왼쪽 세 번째 손톱이라 자판 두드리기가 편치 않다. 세상이 그런 거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보다 당장 자판 두드리기 힘들게 손톱 바짝 깎은 손가락이 더 아픈 것.
 10년 전 여름이던가, 내가 좋아하는 공선옥의 추천사를 보고 <침이 고인다>를 읽은 것이 첫 번째 김애란. 지금 보니까 외모도 공선옥하고 비슷한 것 같고 뭐 그렇다. 읽은 지 하도 오래라 그때의 감상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아주 인상 깊었던 작품이 없었다는 뜻? 그것도 좀 있지!) 약간 야하고 뭐 재미나고 그랬던 거 같은데, 두 번째 읽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은 전혀 그렇지 않다(요샌 단편집 제목과 같은 단편이 단편집 안에 수록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 책에선 단 한 작품도 읽으며 내게 미소조차 짓지 않게 만들었다.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겨우,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공통적으로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이 핫따, 먼 훗날인줄 알았더니 겨우 코앞이었던, 죽음.
 첫 작품 <입동>은 두 번의 유산 끝에 인공수정으로 얻은 아이가 유치원(또는 어린이집) 통학버스에 깔려 죽고, 두 번째 <노찬성과 에반>에선 찬성의 아빠가 갓길을 따라 걷다가 화물차에 치어 죽은데다가 스포일러(특히 단편소설에서 스포일러란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 소치라서)가 염려되어 정확하게 적진 않겠지만 막바지에 동거인 중에 한 명이라 추정되는 또 다른 죽음까지 겹쳐지고, 네 번째 작품이자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침묵의 미래>는 수많은 소수 민족의 언어를 학살하고, 다섯 번째 작 <풍경의 쓸모> 역시 스포일러 관계상 상세하게 적을 수 없는 한 인물의 죽음이 달려있으며, 여섯 번째 작 <가리는 손>엔 건장한 중학생의 이단 옆차기에 맞아 죽고마는 폐지 줍는 노인이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열무김치를 담고 있는 시간에 날 버리고 먼저 가버린 남편님이 배경으로 깔린다. 딱 한 작품, 세 번째로 수록한 <건너편>이 유일하게 죽음과 거리를 둔 단편으로 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 가운데서도 마음에 제일 들었다.
 10년 전에 읽은 <침이 고인다>도 글 가운데 야한 장면이 나오고 재치 있게 재미난 묘사가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지 결코 글의 내용이 밝은 경향은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역시 가물가물 오래전이라 믿지는 마시고), 이번 <바깥은 여름>은 좀 심했다.
 김애란의 글? 어이, 왜 이러셔. 대한민국에서 비까번쩍하기로 유명한 문학상이란 문학상은 거의 수집할 정도의 글발을 자랑하는 작가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이이가 글 속에 죽음을 등장시켜 살아남은 자가 우울하기도 하고,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하여간 깊은 상실에 빠져 있는 상태를 대단히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근데 좀 심한 거 아냐? 물론 출판사에서 죽음을 테마로 김애란에게 이와 유사한 소재를 다룬 단편만 골라 책을 엮어보자고 했을 수도 있지만, 한 권이 통째로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건너편>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는 건 비단 죽음을 소재로 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 편, 실패나 소외나 죽음이나 상실에 빠진 삶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유일한 것이서다. 물론 일곱 편을 따로 떼어 무게를 단다면 내 감상이 턱도 없이 잘못된 것이겠지만, 한 자리에 앉아 근 여섯 시간을 바쳐 한 방에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도 동의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죽음. 누구나가 죽고 궁극적으로 죽음이 문학의 대상물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는 난 누군가가 죽음을 노골적으로 콕 집어서 만지작거리면 읽어내기가 좀 난감하고 불편하다.

 여전히 내 왼손 가운데 손톱이 더 신경 쓰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 을유세계문학전집 89
유리 트리포노프 지음, 서선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리포노프의 작품은 이 <노인> 말고 예전에 경희대학 출판부에서 찍은 <교환>이란 얇은 책 말고는 없는데 그것도 아쉽게 절판이다. 트리포노프는 <노인>을 1978년에 발표를 하고 3년 후인 1981년에 세상을 떠나 이 작품이 그의 유작이 된다고 하는데, 1925년생이니 만 53세에 완성한 소설이다. 겨우 만 53세에 두 남녀 노인(들)의 신체적 노쇠와 남자 노인의 상태를 이리 잘 묘사했단 뜻이다. 거참. 정작 본인은 56세밖에 살지 못해 노인이란 세월을 겪어보지도 않을 운명이었음을, 이땐 몰랐을 거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책의 주인공 파벨 예브그라포비치(‘창비’나 ‘열린책들’에서 찍었으면 모르긴 몰라도 “빠벨 옙끄라뽀비치”라고 썼기 십상이다), 인생의 황혼을 만나 나이 50이 훌쩍 넘어도 아직까지 철딱서니 없는 아들과 아들놈의 전처와 지금 처, 딸과 사위, 이렇게 좁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식솔들한테 새로운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당의 주택보급위원회에 신청도 좀 하고 힘도 쓰라고 날이면 날마다 독촉을 받으면서, 틈틈이 미하일 숄로호프가 일찍이 대작으로 완성한 <고요한 돈강> 시절의 위대한 카자흐 영웅 세르게이 키릴로비치 미굴린이 1919년에 독자적으로 백군 데니킨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간 사건을 심각하게 조사 연구하고 있던 노인이다. 파벨이 한 잡지에 미굴린에 대한 글 또는 논문을 발표한 것을 5년이나 지나서 발견한 옛 친구이자 파벨의 첫사랑이자 영웅 미굴린의 두 번째 아내였던 아샤, 즉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네스테렌코가 읽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1970년대의 파벨은, 그리고 많은 노년세대들은 그들의 자식세대와 거의 완전한 불통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리하여 옆집에 사는 사별한 아내 바냐의 절친한 친구 폴리나는 말로는 영웅의 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공립양로원에 불과한 기관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하는 걸 보고, 그래도 자식들하고 같이 살거나 살아주는 것이 노인들의 의무 또는 즐거움, 그것도 아니면 관례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냥 보통 노인이다. 그렇게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파벨에게 첫사랑이자 자신이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재판과정에 참여하기도 한 미굴린이란 한 영웅의 두 번째 아내이기도 한 아샤의 편지를 받고, 그것도 대단한 흥미와 관심을 표명하며 동시에 옛 시절의 소년다운 사랑을 듬뿍 담은 정다운 글을 받고는 다시, 당시 1919년 10월에 있었던 미굴린의 이상 상황에 대한 길고 긴 상념에 빠진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카자흐 지방의 반혁명과 동러시아에서 옛 귀족을 중심으로 한 백군 저항세력에 오랜 고통을 겪은 소비에트 내 작가들은, 이 시기가 아주 중요한 작품의 소재였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카자흐 지방의 내란은 역시 앞에서 얘기한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 압도적이고 총체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고, 동러시아 백군의 반혁명투쟁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로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고요한 돈 강>의 일부인 한 명의 영웅의 행위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노인들의 기억에 완전 의존하는 왜곡된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즉, 아샤의 기억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아 있어서 여러 가지 객관적 사실은 아예 관심이 없거나 기억 자체가 삭제된 상태로 파벨에게 전달을 할 수 있는 반면, 파벨은 그간 숱한 자료를 다 갖고 있어 아샤가 하는 말의 특정 부분만 골라 다시 사건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자, 벌써 얘기 다 한 거 같다. ① 파벨 또래 1970년대 모스크바 노인들은 젊은 세대들과 거의 불가능한 의사소통의 벽 안쪽에서 마치 게토처럼 폐쇄되어 있는 상태였고, ② 아샤로 인해 5년 만에 다시 파벨의 관심과 자료의 재정리에 착수한 그의 작업에, 노인들 특유의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실만 추려서 기억하는 능력이 더해진 새로운 아샤의 증언을 확보하였으나 전에는 많고 넘쳤던 시간이 이젠 지극히 한정된 길이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 따라서 ①과 ②의 해소가 소설의 결말이 되겠다고 지금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①번 문제가 어떤 수순에 의하여 해소되는지는 절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고, ②번 문제는 과연 딱 그 하나의 것만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또 누군가의 한 부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는 완전 소거된 불완전한 기억일 수도 있을지, 만일 그렇다면 그게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쳐주지 않겠다.
 이렇게 써 놓으니까, 일반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한 사건을 전개하는 형식의 소설이라고 말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읽기론 그랬다. 마치 대학에 입학해 학교 도서관에 가니까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소설 쓰는 사람은 뭘 먹고 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워했다가, 제대하여 복학해 다시 도서관에 가니까 이젠 광주항쟁 없었으면 또 소설가들은 어떻게 재료를 구할 수 있었을까 신기해한 거처럼. 그래서 특별하게 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하기는 그렇고, 카자흐 기병의 용맹한 전투를 필두로 하는 고요한 돈 강 유역에서 펼쳐지는 로망을 꼭 한 번쯤 경험해보시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선 역시 <고요한 돈 강>을 읽어보시리라, 이거 한 편이면 너무 충분히 만족하시리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시간이 부족하고 정성이 모자라고 또는 그놈의 귀차니즘이 몰려온다면 비록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고골이 쓴 <타라스 불바>로 대신하시는 것도 뭐 무난하겠지.
 물론 이 책 <노인>도 수작이다. 이 점을 말하지 않고 독후감을 마감할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니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4
E. L. 닥터로 지음, 정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린글래스33라고 하는 개새끼, 너 기억나?”
 “…… 그리고 마까르시라고 하는 그 사악한 늙은이……”
 “…… 그 작자들은 공산주의자들 모두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았다고 난 확신해……”

 

 33 미국의 공산주의자로 소련에 미국의 원자폭탄 정보를 건넨 스파이 혐의로 아내와 함께 처형당했다

 

 

 위는 후안 마르세의 소설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377~378 쪽에 나오는 대사와 각주다. 첫 문장에서 나오는 그린글래스의 각주(33)는 매우 잘못된 정보다. ①“소련에 미국의 원폭 정보를 건넨 스파이 혐의”, 즉 스파이 활동을 해서 기소, 재판 사형집행을 받은 것이 아니라, ② “스파이 활동을 하기로 불법으로 공모했다는 혐의로 기소”, 재판, 처형됐으며, ③ 죽은 사람은 책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에서처럼 다비드 그린글래스가 아니고 ④ 그의 누나와 매형인 에델 그린글래스 로젠버그와 줄리어스 로젠버그다. 우리나라 유명 출판사의 엉터리 각주가 어제 오늘이 아니니 새삼스레 침 튀지 않겠지만, 좀 주의해서 각주 달아라, 창비!
 위 네 가지 사실을 소설적 시각으로 각색하여 죽은 로젠버그 부부를 책에서는 폴과 로셸 아이작슨 부부로 바꿨고, 그린글래스는 완전히 가공인물, 그러나 아이작슨 부부의 가까운 이웃인 치과의사 나이 많은 셀리그 민디시로 했다. 로젠버그 부부에겐 마이클과 로버트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니엘 서>에선 다니엘과 수전으로 변형시켰다(상세 내용은 책의 해설 450쪽). 그래서 책의 제목을 구약성경의 <다니엘 서 Book of Daniel>이면서도 죽은 자들의 아들 다니엘의 경험과 독백, 그리고 아들의 입장에서 당연히 했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의 재구성 등이 가능하며 서로 연계가 되게끔 구성했다.
 책은 1971년에 나왔는데, 진짜 책을 쓴 것은 1969년부터 70년 정도 됐을 터이니, 사실상 60년대 미국소설 및/또는 미국문화, 정서 같은 걸 다 아울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쓰는 중에 미국 역사상 가장 컸던 대중 집회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이 있었고, 그 전 1967년에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학생, 지식인, 사회주의자 등의 진보주의자, 인종과 젠더 해방론자, 히피, 저널리스트들이 징집영장을 펜타곤에 반납하기 위해 집결하여 시위하고 행진하다가 조국의 경찰로부터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노먼 메일러, <밤의 군대들> 참조).
 로젠버그, 책에서 아이작슨 부부의 처형과 펜타곤 진격 사건과의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 로젠버그의 실제 아들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행동했는지 진실은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아이작슨 부부의 아들 다니엘이 부모가 처형된 후 동생 수전과 함께 괜찮은 변호사 르윈 씨의 집에 양자 양녀로 입양되어 잘 교육을 받으며 성인이 된 후 참한 아가씨 필리스와 결혼, 독립해 아들을 하나 둔 상태에서, 수전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전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살을 실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수전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면서 다니엘은 친부모가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고 거의 만나지도 못하다가 처형당한 사실이 수전의 인생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자각하면서 드디어 십 몇 년 전의 사건을 재구성하게 된다. 그 와중에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실제로 로젠버그 부부가 그랬듯이 작중 아이작슨 부부 역시 공산당원으로 설정했다)의 아메리카 침공을 극히 혐오했거나 두려워한 미국이 해당 사건에 모종의 음모를 깔아두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에서 스스로도 사회주의 또는 평화주의, 심지어 히피상태로 변해가며 문제의 1967년 펜타곤 진격의 앞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음모론 적 소설로 볼 수도 있겠다. 2차 세계대전은 세계만방에 미국의 힘, 특별히 전쟁 수행능력과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를 과시한 중요한 기회였으며 이후 미국은 (약간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를 포함해서) 자신의 뜻대로 세계적 질서가 만들어지기를 바랐으며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지구 유일의 경찰국가로 존재하기를 원했던 거 같다. 그러나 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가장 강력한 상대국이 있었으니 바로 소비에트 연방. 소련이 위협이 되기는 하지만 40년대 까지는 유일하게 거대 살상무기인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며 남태평양의 작은 군도 하나 정도는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원자폭탄 시험발사장으로 거덜을 낼 수도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만들었다.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완강한 보수정책과 반 소련, 반공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펴왔는데, 진짜로 미국이 그렇게 완강하고 공권력을 통 투입하면서 공산주의가 본토에 상륙할 수 있다고 믿어서 반공정책을 밀어붙였을까?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이어지는 의문. 공산주의를 미국이 혐오했던 이유는, 1917년 레닌이 소비에트를 만든 이후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유구한 전통으로 자리 잡은 독재, 공포 정치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국체로 한 미국 입장에서 두려웠을까, 아니면 정통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상륙하게 되면 기껏 만들어서 유지하며 지금 한없이 향유하고 있는 소수의 부르주아들에게 몰락을 가져오게 될까 두려웠을까. 나는 두 번째라고 본다.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유럽에서 이민 온 백인으로 채워진 (비교적)신생국. 더하기, 유럽에서 항문이 째지게 가난한 하층계급으로 살다가 이제 갑자기 떼돈을 번 일천한 전통의 부르주아들의 집단. 여기에 가세한 높은 지능의 엘리트들. 이들 소수, 극소수가 거의 모든 방면에서 미국을 유럽보다 몇 배는 더 고집스런 보수국가로 만들었다. 불과 몇 대에 걸친 지독한 노력 끝에 자수성가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극소수”의 부르주아와 엘리트들에 의한 지도체제는 국가의 정치적 권력과 언론 등을 통한 여론형성과 일반 시민들의 의식까지 수정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혹시라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에게 뺐길 수도 있다는 지극한 공포에 대항했을 것이다.
 물론 세계대전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영국과 프랑스라는 유럽의 맹주가 많은 부분을 통제해와 전후 세계처럼 스스로 전 지구적 패권을 쥘 필요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어 세계 도처에서 촉수를 뻗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파 없애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그리하여 미국 대통령을 위시한 행정부와 입법부는 그들이 한국과 베트남 등에서 벌이고 있고 벌일 예정인 전쟁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을 언제나 심각하게 고려했다. 실제로 그랬고, 원폭투하를 반대한 맥아더는 한국전쟁 중에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로젠버그 사건, 즉, 이 책에서 아이작슨 사건이 일부 조작된다. 내가 ‘일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은 권력이 의회에서 나오는 나라이기 때문. 즉, 아무리 인도적 견지에서 맞지 않더라도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선 하나의 규범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 엄연하게 존재했고 실제로 공산당이었던 아이작스 부부의 행동엔 스파이 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파이 활동을 하기로 의식적으로 또는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불법으로 공모’했을 수도 있었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했겠다는 얘기. 이 책에서도 아이작스 부부가 완전히 무죄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신뢰가 가는 것. 다만 어떤 불법행위가 있었는지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것이 책을 쓴 1971년까지 국가기밀로 구분이 되어 작가가 여전히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든지, 아니면 기소장에 구체적 불법행위의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든지 할 터인데, 어떤 경우라도 명백한 불법행위를 밝히지 않는 것은 “필연적으로” 음모론을 만들어낼 충분한 가능성을 갖는다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 문제를 파헤친 소설.
 문제는 정부권력에 의하여 부당하게 중범죄자가 돼버린 개인, 아이작슨 부부. 극소수 부르주아와 엘리트로 구성된 저 높고 높은 신들의 전당에서 조작한 공산주의에 의한 위협과 공포, 거부감들이 일반 시민 층에도 이미 충분히 전파되어, 아이작슨 부부는 독후감에서 제일 먼저 밝힌, 스페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벌써 악당, 개새끼니 사악한 늙은이니, 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아이작슨 부부, 몇 년 후 형 집행으로 전기의자에서 통구이가 되어 죽어간 부부에게 국한한 일일까? 그들의 아들과 딸의 이름으로 아직 시민들 옆에서 생존해야하는 다니엘과 수전. 20세기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전기의자에서 처형된 부모를 둔 남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부모를 경원하고, 미워하고, 무서워했던 우리에게 이 남매들의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한 시절, 미친 시절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제도상 가벼운 폭력이 남은 사람에게 던져주는 숙제. 이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책.
 조작된 음모론, 솔직히, 남 얘기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