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4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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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 전 독후감을 쓴 베르타 폰 주트너의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오스트리아 인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쟁부터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즉 보불전쟁까지 전쟁의 참상을 민간인 여자의 눈으로, 그러나 가문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백작 집안 19세기 여인의 시선으로 그려놓았었다. 폰 주트너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젊은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한 감상적感傷的인 여인이 끔찍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당대엔 여성의 미덕으로 가르치기도 했던, 졸도까지 해가며 전쟁 자체를 반대하기 위해 세계만방에 당장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웅변한 반면, 에른스트 윙어는 스스로가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자신이 스스로 겪은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인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윙거가 용감한 독일 군인이었을 뿐이란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사병으로 참전하다가 첫 휴가를 나와 아버지의 권요로 사관 교육을 받고 소위, 즉 장교로 전쟁을 끝까지 치룬 말 그대로 뼈 속까지 군인이다. 윙거에게 우군은 독일군이고 적군은 주로 영국군인데 프랑스군, 스코틀랜드군, 인도군, 심지어 뉴질랜드 군인까지 아우른다. 윙거는 애초부터 폰 주트너 여사와 달리 전쟁이 옳은지 부당한지, 정의로운지 불의로 가득 찬 짓인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군인으로 참전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군인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이건 주트너의 <무기를…>에서도 주인공 마르타 알트하우스의 진지하고 정의롭고 진심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군인 남편 프리드리히 폰 틸링 남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찬성을 하건 반대를 하건, 옳건 그르건 간에 일단 참전을 하면 자신의 본분을 다해 조건 없이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 근데, 어쨌든, 윙거는 명예니 뭐니 따지지 않고 오직 군인으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경험담, 즉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죽음, 고통과 비명, 휴식과 훈장 등으로 도배가 된 책을 다 읽은 것은 ① 돈 주고 산 것이 아까워서, ② 1차 세계대전의 특징인 전장의 변화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즉 초기 참호전塹壕戰 중기 이후 무기의 발달로 인한 기계전으로 본격적인 대량 살상전에 흥미를 느껴서, ③ 인류 최초의 독가스전(난 독일만 가스를 사용한 줄 알았더니 이 책 읽어보니까 영국이 이 방면으로는 선구자였네, 윙거가 독일군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에 관해 좀 알고 싶어서, ④ 전쟁 중 기계와 포탄보다 더 인명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즉 싸우는 걸 보다 못한 지구가 에라 이 염병할 놈들, 하며 선물해준 천형이 궁금해서 등등이었다. 전쟁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지구상에서 허용되면 안 된다. 위 ②번 사항에서 보면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대량 살상이 가능하고, 심지어 한 도시를 완전한 폐허로 만드는 것도 벌써 100년 전부터 가능했다. 이제는 100년 전 도시보다 수천 배는 더 커진 도시와 인구를 단 한 번, 손가락 하나로 버튼을 누름으로써 가능하게 된 시대이며, 일단 폐허 상태가 되면 영구히 복원 불가능한 환경으로 지구는 진화했다. 아, 이건 제일 나중에 얘기할 건데 너무 미리 썼다.
 하여간 윙거는 자신이 경험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전장에서 무참하게 벌어진 참상을 전하는데 형용사를 굉장하다고 할 정도로 생략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런 식. “상사의 머리는 육체와 분리됐고, 로돌프 상병의 창자가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딱 보이는 만큼만 서술한다. 스스로 무수하게 총에 관통당하고, 포탄 파편이 박혔으며, 유산탄알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는 윙거는 놀랄 정도로 무덤덤하게 그냥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읽고 전장을 상상하며 전쟁의 끔찍함을 체험하는 건 그리하여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혹시 별점이 있으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겠지만, 이 책, 그리고 폰 주트너 여사의 <무리를 내려놓으라>를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만점을 받는가. 그건 오직 하나. 앞으로 지구상에서 전쟁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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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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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고 번역하다니! 책의 표지에 굵지 않은 나무 두 그루 서있고, 가지에 두견이 앉았는데, 바로 그 옆,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가 종從으로 쓰여 있다. 한자 사이의 일본어가 전부 조사 “の”라 그냥 한시 읽듯 그림이 그려지지만 정작 그걸 한글로 바꿔보라면 어찌 역자 송태욱처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 했을 수 있을까. 이쯤 돼야 외국 시를 번역하는 거다. 그래도 (독자가)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감상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일본이 외국문학을 수입하면서 벌써 100년 전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번역에 공을 들였는지 이 책에서 조금 나온다. 대학생, 졸업생, 대단한 실력의 영어교사 등이 모여 한 문장, “Pity's akin to love.”를 어떤 일본어로 바꿔야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장면(127쪽). 주인공과 가장 친한 친구 요지로란 인물 왈, “가엾다는 것은 반했다는 것이니라.”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지청구를 듣는다. “안 돼, 안 돼, 졸렬하기 짝이 없군.” 109년 전의 일본 문과대학에서는 이런 사소한 문장 하나를 두고 올바른 번역을 위해 토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의 옆가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소개한 맛보기다.

 책은 20세기 초, 후쿠오카 촌 동네에서 도쿄로 유학을 떠나는 소천삼사랑, ‘오가와 산시로’를 태운 열차 안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차 안에서 얼굴이 가무잡잡한 유부녀를 알게 되고, 여인의 부탁(당시가 20세기 초, 여자 혼자 여관을 잡는 건 좀 무모한 일이었던 모양이다)으로 중간 기점에서 여관을 잡아주다가 엉겁결에 목욕도 하고, 그러다가 거의 벗은 여인이 “때밀어줄까요?” 독특하고 바람직한 일본 특유의 목욕 문화적 친절에 기겁을 해서 (덜렁거리며)뛰어 나오고,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되고, 밤새 툇마루에 앉아 있기엔 모기가 하도 극성이라 엉금엉금 그녀가 모로 누어있는 모기장 안으로 기어들어가서는 이불을 톡톡 두르려 도드라지게 하여 여자와 자기 사이에 마치 전쟁의 진지인 것처럼 금을 긋고는 여자의 몸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잠만 쿨쿨 자버리는 남자. 이거 참 죽일 놈이다. 넌 그렇다 치고 옆에서 밤새 잠 한 숨 못자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인의 앙가슴을 도대체 어찌할 거나. 하여간 그리하여 다음 날, 다시 무대는 기차역. 두 남녀, 좀 서먹서먹했겠지? 여자가 남자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잘 잤으니 먼저 인사하길, “여러가지로 귀찮게 해드려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산시로의 습관적인 대꾸, “안녕히 가세요.” 근데 여자는 산시로의 얼굴을 계속 가만히 바라고보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책은 15쪽부터 시작해 335쪽까지 이어지는데 이 대사는 24쪽, 딱 열 번째 줄에서 등장한다. 이 한마디로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의 성격을 콱, 규정해버리고 만다. 여자가 말하는 ‘배짱’이란 것이 뭘까? 한 번 보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여인과 한 방, 같은 모기장 안에 자면서 손가락 한 번 까닥하지 않는 거? 일단 그렇다고 봐야한다. 여인의 남편은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 히로시마에서 군함을 만들다가, 러일전쟁을 맞아 여순(뤼순)에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대련(따롄)에 있으니 그거 참, 여자가 애초에 산시로한테 있는 줄 뻔히 알고 좀 달라는 걸, 그걸 안 주었으니 배짱이 없단 비아냥은 정말로 받아 마땅한 거 아냐? 물론 농담이다.
 당시 나이 스물 서넛의 산시로. 배짱 없는 산시로가 후쿠오카를 떠나 당시 일본인 시각에선 험하기 짝이 없어 눈 감으면 코 베갈 도쿄에 도착/정착하여 숱한 배짱 있는, 그리고 배짱 없는 인간 속에서 보낸 대략 1년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성실하기는 하지만 농촌 청년의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산시로 앞에, 도시적인 뻔뻔스러움과 특별한 친화력, 가벼운 지식으로 무장한 요지로가 등장하고, 물리학을 공부하는 동향 선배이며 국내외에 성가를 높이고 있는 노노미야 씨와 그의 여동생 요시코를 알게 되고, 요시코를 통해 또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도쿄대의 연못 근처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미네코와 친해진다. 여기에 일찍이 도쿄에 오는 3등 열차에서 만난 적이 있는 대단한 실력의 히로타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반엔 산시로가 마음에 둔 여자 미네코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린 하라구치 화백까지.
 소세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오니, 바로 노동하지 않고 공부하거나 예술만 하는 돈 있는 집안의 젊은이들. 딱 둘만 꼽으면 산시로와 요지로. 요지로는 관계의 지속, 심화를 위하여 친한 친구 산시로에게 30엔을 빌려 절대로 갚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요지로 생각으로는 자기가 돈을 갚게 되면 오히려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질 것이란 우려가 있어서. 대책 없이 요지로에게 30엔을 꿔준 산시로는 하숙비를 내지 못하게 되는 곤란을 피하기 위해 미네코로부터 30엔을 빈다. 배짱 있는 요지로는 산시로에게 꾼 돈을 그냥 꿀꺽하고 마는데, 시골 출신의 배짱 없는 산시로는 홀어머니에게 부탁해 시골 수준으로 말하자면 근 1년 양식에 해당하는 30엔을 받아 기어이 미네코에게 돈을 갚으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마는 건, 더 이상 조잘대는 주둥이를 건사하지 않으면 책의 내용을 송두리째 일러드리게 되기 때문. 얼핏 보면 참으로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 요지로의 어디로 뛸지 모르는 개구리 식 뜀박질이 아슬아슬하고, 산시로의 사는 방법이 답답해 가슴이 컥 막히기도 하지만, 사이에 그 둘을 절충해줄 아무런 쿠션도 소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소세키다운 작품. 디테일한 성격 묘사와 인물들 간 서로 부딪는 사소한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찾아낸다. 소소한 재미가 참 그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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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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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민음의 시 101
김경후 지음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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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딱 보고, 남잔 줄 알았다. 시집 읽는 내내 그랬다가 후반부 가서 혹시 여자 아냐? 싶어 책 맨 뒤에 작가 약력 보니까 이화여자대학 독문과 나왔다. 그 학교가 남자한텐 학생 자격을 주지 않고(여태!), 찌질하게 그걸 남녀불평등이라고 고소한 남자가 있었는데 법원은 학교의 판단이 적법하다고 인정했으니까 틀림없이 김경후는 여자일 것이라고 결론 냈다. 이 책,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가 김경후의 처녀시집. ‘처녀시집’이라고 해서 김경후 시집의 처녀막이 찢어졌다고 주장하는 시인 김영승의 발상은, 영어로 말해서 그로테스크하다. 하, 그로테스크, 이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입 안에서 뱅뱅 돌긴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거다. Grotesque. 그러다가 시집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시가 실려 있어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그로테스크한 동화


염산비 검게 내리는 하늘
관들이 떠다닌다
가끔 흔들리는 뚜껑 떨어지고
썩은 나무관은
오래된 시체를 놓쳐버린다
쏟아지는 살과 얼굴을
꼬챙이에 꽂는 아이들
숲에선 그 살로 밀주 담그고
술 마신 사람들의 휘파람 소리
뱀을 불러모은다
따뜻한 눈과 입 속을 파고드는 뱀
위와 대장을 꽉 물어
항문 밖으로 끌어낸다
구불대는 내장은 아직 취해 있다
껍질만 남은 사람 속으로
어느새 모여든 나방들
잔뜩 알 낳고 낄낄거린다
새로 태어나는 나방은
죽은 사람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오래지 않아
하얀 주름 구더기가
거죽과 내장 나방 뒤덮는다
이즈음 걸죽해지는 시체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소녀들 강가에서
까마귀 알을 품거나 관을 짜고 있다  (전문. 90~91쪽)


 어떠셔? 읽을 만한가? 시집에 실려 있는 많은 시가 그로테스크하다. 그래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적응하기 어렵다는 건 전적으로 내 취향이고 기호이고 하여간 그런데, 이 시집에 관해서 좀 더 힌트를 드리자면, 위 전문을 써놓은 <그로테스크한 동화>는 그나마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시라는 거. 시집에 나오는 모든 시가 그렇듯, 이 시도 내려쓰기 할 때 앞에 적어도 한 칸 띄어쓰는 일반적 관습을 무시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권한으로 분명한 오독誤讀을 하자면, 한 줄 한 줄을 각기 새로 시작하지 않고 시인이 속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연속한 걸, 다만 문자로 쓴 것이다, 라고 오해해주기 바라서 원고지의 첫 칸부터 채워나간 것은 아닌가싶다.
 김경후의 시가 전부 이리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며칠 전 기형도를 이야기하면서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感傷의 암호’가 싫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김경후의 처녀시집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해 들지 않는 놀이터


난 이곳에서 태어났다
모래알갱이를 씹어먹고 모래무덤을 덮고
살았다 녹슨 철봉 냄새가 나는 입
끊어진 그네줄 같은 팔다리
아무도 이곳에 놀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겨울
사람들이 찾아와 봄을 보여주겠다며
앞에 빌딩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녀간 겨울 내내
난 얼어붙은 모래밭을 걸어다녔지만
내 발자국은 없었다 
(후략)


 예로 든 <해 들지 않는 놀이터>가 가장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암호가 많은 작품이라 고른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시작한 다음에 처음으로 눈에 뜨인 그래도 평이한 시라서 옮긴 것일 뿐이다.
 여기에 보탤 것은, 언어의 불통 혹은 역류에 대한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독후감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시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 특정한 행위나 생각이나 현상, 또는 감정에 관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있다면 지극한 개인적 입장에서만, 지구인 가운데 글을 쓴 오직 한 명 또는 극소수만 뜻을 알아챌 난수표. 이것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이 더해진다는 것. 그래서 “구멍을 뚫고 네 잠 속에서 나와버렸다 이제 그곳에 담배꽁초가 던져지고 네 몽정의 전 과정은 생방송 뉴스로 진행된다” (<잠> 9쪽)고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이해하기 어렵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도 그로테스크해서) 읽기 짜증나고 간혹 혐오감까지 나게 만드는데, 이왕 그러려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같이 좀 경쾌하기라도 하지, 참 감상하기에 난감하게 만든다. 그간 시하고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적응하기 쉽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시인 김경후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김경후와 그의 애독자에게 미안하다. 난 이 시집을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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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47
에밀리오 살가리 지음, 유향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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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르는 방법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재미있게 읽은 책 속의 등장인물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선택하는 거다. 이 책 역시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주인공 얌보가 열광을 했던 책이라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른 것이다. 이 책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 : 이하 “산도칸”>이 에코의 그 책을 읽고 선택한 마지막 작품이다. 속이 다 후련하다. 어찌됐건 이제 <로아나…>로부터 해방이니까.
 근데 이 책은 선택하는 데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로아나…>에는 늙은 얌보가 등장해 젊은 얌보도 아닌 어린 얌보를 회상하는 장면이 아주 길게 나오고, 그때 어린 얌보가 열광했던 책이 바로 <산도칸>이었던 거다. 어린 얌보가 자기만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말레이시아 해를 무대로 무도한 해적질을 일삼은 가공의 폭력범 산도칸의 모험과 싸움과 전쟁과 사랑을 흉내 냈던 것을, 거의 50년 이상이 흘러 늙은 얌보가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산도칸>이 있다는 건 벌써부터 알았던 터이며, 여러 경로로 그건 인생살이 오래 산 인간들은 별로 읽을 만하지 않다는 얘기도 벌써부터 들어왔기에 일찍이 목록에서 제외시켜온 책이었던 걸, 잠깐 미쳤었나봐, 잊었던 거였지 뭔가. 살다보면, 책 좀 읽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본문만 418 쪽. 굳은 마음으로 딱 절반 209쪽까지 읽고 도저히 더 이상 읽어줄 수 없어 그냥 때려치웠다. 뭐 이딴 책을 내고 그래, 라고 출판사 열린책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장르를 불문하고 재미있을 거 같다하면, 말을 조금 바꿔 할 경우, 좀 팔릴 거 같다하면 별 생각 없이 시리즈에 포함시키는데 이게 가끔 대단한 매력이 되기도 하고 <산도칸>처럼 똥 밟기도 하고 그런 거니까. 다 그런 거지 뭐.
 책 속의 주인공 산도칸. 영국 군대에 의하여 부모 형제가 학살당해 가상의 나라를 뺐기고 피신한 그는 회교도의 미덕인 복수를 하기 위해 용감무쌍한 해적이 된 인물. 당연히 큰 키에 잘 생기고 피부색 조금 까무잡잡하고 용기 있고 힘 무지 세고, 돌격형 인물, 즉 앞 뒤 생각 안 하는 단순무식형 인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 포르투갈 사람 야네스의 현명하고, 유머있고, 재치까지 있으며 좌우 상황판단 빠른 조언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벌써 백여 번은 죽었어야 하는 주인공이다. 작가 에밀리오 살가리가 이탈리아 사람이어서 당연히 이탈리아 언어로 책을 썼기 때문에 규격적이고 엄격한 영국인 장군 삼촌 아래서 자란 ‘라부안의 진주’라고 불리는 여주인공 마리안나는 엄마가 이탈리아, 아버지가 영국인인데 조실부모하여 삼촌에 의탁, 말레이시아까지 흘러든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사랑은 흔히 초상화 한 번 보고 맛이 가게 반하는 거 등등 아주 우습게 사랑에 빠지는데 여기서도 진짜로 묘사를 했듯이 단도 하나 가지고 말레이 범을 때려잡는 우리의 영웅 산도칸은 라부안의 진주라 불리는 여성이 매우 아름답고 노랑대가리에 파란 눈알을 하고 있다는 말만 듣는 것으로 여자를 좋아할까 말까 심각하게 궁리하고 급기야 수십 명의 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기어이 여자를 만나, 마리아나 눈앞에서 <수호전>에 나오는 송나라 무송武松처럼 범을 때려죽임을 계기로 사랑을 얻고 만다. 아주 전형적인 소년 소설의 주인공들 아니냐.
 무수한 사상자를 낸 전투에서 오직 하나 살아남는 거, 산도칸을 포위한 수십 명의 영국 정규군을 유유히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하는 건 말 그대로 껌이고, 무시무시한 태풍을 뚫고 항해하는 그런 이야기,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반 까지만 읽고 진도를 더 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고, 딱 반 지점에 와서 책 덮었다.
 당신의 정신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면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신중하게 생각하여 선택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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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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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드라마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프랑코 알파노가 작곡한 오페라 <베르주라크의 시라노 Cyrano de Bergerac>가 충분히 재미있었고 그 정도의 대본이라면 더 이상 재미있는 극작이 거의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 역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으면서 마지막 1/4 부분은 온통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를 해놓아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원작 안에 있다, 라고 판단했다. 그래 정말로 읽어보니 그랬다. 있었다.
 오페라 대본을 쓴 앙리 캐Henri Cain는 확실히 원작의 핵심 부분을 정확하게 포착, 축약하여 대본을 만들었으나, 무대에서 관현악 음악을 배경으로 노래해야 하는 전달 상 시간의 한계로 인해 디테일을 몽땅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뭐 <시라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오페라 대본이 마찬가지기는 하다. 근데, 오페라를 충분히 만족하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본의 원본인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읽어보니,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이 작품은 반드시 원본도 읽어봐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의 작품 <로아나…>에서 쉴 새 없이 <시라노>를 언급할 만큼의 울림이 있었다.
 일단 스토리 먼저 소개.
 가스코뉴 지방 출신의 카데(귀족의 장자가 아닌 아들이 병졸부터 하급사관까지의 계급으로 복무하던 병사)들로 된 군대의 기사 시라노. 하늘은 시라노에게 튼튼한 육체와 민첩한 반사 신경, 둘을 합해서 선천적 결투와 싸움의 능력을 허여했다. 동시에 놀라운 시적 재주와 그 비슷한 예술적 정열까지 몽땅 주었으나, 공평하게도 어마어마한 코를 얼굴의 한 가운데다 배치함으로써 지독하게 못생겼다는 평판을 얻게 했다. 원래 저 희랍시대부터 신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랬듯이. 그래서 시라노 하는 일이란 무턱대고 정의파, 용맹과감, 우스운 시적 찬가 등인데 무대가 17세기 초반이라 이런 과한 낭만적 시도는 숱하게 적들을 만들어놓고 만다. 이 기운 센 천하장사, 부르고뉴 성곽에서 (과장이 있겠지만) 무려 백 명을 단기필마로 거꾸러뜨리고 마는 검술의 신공을 자랑할 정도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수준.
 아무리 못생겨도 한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서 동네 최고의 미녀이자 사촌동생인 록산을 사랑하는데, 하늘이 선물한 시적 능력을 총동원해 근사하고 근사한 연애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할 찰나, 아, 록산이 먼저 자신의 짝사랑을 고백하며, 금발의 돌대가리 미남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부대로 전입했으니 잘 봐달라고 하는 거다. 자신이 못생겼음을 잘 알고 있는 시라노는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고, 알았다고 잘 봐주겠다고 약속을 해버린다. 크리스티앙에게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달라는 록산의 부탁을 전하자, 생기기만 잘 생겼지 싸움도 못하고 시적 재주도 없는 크리스티앙이 기겁을 하자 시라노는 기꺼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건네주고, 앞으로 크리스티앙의 외모와 자신의 문학적 소양으로 록산을 대하기로 결정을 한다. 물론 록산은 전부 크리스티앙의 재능으로 오해하고.
 그리하여 어느 달 없이 깜깜한 밤, 록산의 발코니에 걸쳐놓은 사다리 아래서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를 흉내 낸 시라노가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고, 이에 감격한 록산이 껌벅 넘어갔으나, 정작 사다리를 타고 올라 키스로 불태우는 인간은 크리스티앙. 사다리 아래서 그 꼴을 봐야했을 시라노의 복장은 어땠을까. 쓰라린 심정이야 말로 해서 뭐할까.
 

 이 장면, 유튜브에 있어서 따왔다. 비록 늙었지만 프라치도 도밍고. 발성에 대한 호오는 별개로 하고 하여간 노래 하나는 심금을 울린다. 즐감!

https://youtu.be/FayZ63koKJ8


 그러다 이들은 진짜 전쟁에 나가야 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시라노에게 록산이 하는 말이라니.
 “오! 그를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 무엇도 그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애써 보겠소… 하지만 약속할 수는 없소.”, “그가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러도록 노력하겠소. 하지만…”, “약속해 줘요, 그 끔찍한 포위전에서도 그를 추위에 떨게 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하겠소. 하지만…”, “결코 날 배신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물론 그러겠소! 하지만…”, “나에게 자주 편지를 쓰게 하겠다고!”, “아, 그건 분명히 약속하겠소!”
 시라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호 안에서 열라 연애편지를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써서 새벽마다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 병사들을 뚫고 록산에게 보낸다. 굶주림에 처한 병사들 앞에, 스페인 장교의 기사도 정신을 이용하며 과감하게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를 타고 도착한 록산.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시라노가 보낸 편지에 감동하여 여기까지 온 거다. 그리고 크리스티앙한테 당신이 보낸 편지가 자신의 심장을 녹여 이런 무모한 짓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록산, 사랑하는 록산느. 만일 내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사랑했을 거요?”, “그럼 얘기하면 뭐해요. 당근이지요. 당신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다시 묻겠는데 내 외모가 노트르담의 콰지모도 같이 생겼어도 날 사랑했을 거냐고.”, “아 그렇다니까 남자가 왜 자꾸 물어보고 그래요, 내 사랑! 날 감동시킨 당신의 편지들이 내 몸과 마음을 다 녹여버렸다니까.” 크리스티앙의 옆구리로 슬쩍 다가온 시라노가 마지막 편지를 그의 호주머니에 질러 넣는 것을 록산은 보지 못했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자신의 외모가 아닌 시라노의 시적 재능이란 걸 확실하게 이해한 크리스티앙은 갑자기 핑, 돌아 때마침 시작한 적들의 공세에 무모하게 돌격 앞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마지막 편지. 눈물과 크리스티앙의 피가 물든 편지. 그것이 하도 아름답고 심금을 울려 록산을 편지를 가슴에 넣은 채 수녀원에서 무려 15년 동안 크리스티앙만 생각하며 상을 치룬다.
 일주일에 한 번 씩 들러 친구로서 록산을 위로해온 시라노. 어느 날, 적들에게 통나무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상태로 수녀원을 방문해 록산과 이야기를 하던 중,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주고 읽어보라 하는데,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하다가 드디어 글자 한 자 읽지 못할 상태. 그러나 시라노는 편지를 줄줄 읽어 내려가고, 드디어, 15년 만에 록산은 편지를 진짜로 쓴 사람이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시라노였음을 알아채지만 이미 그는 록산의 앞에서 죽어간다.
 재밌겠지. 그래서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생기는 거다. 생기기만 멀쩡하지 재주라곤 하나도 없는 크리스티앙 같은 이들을 도와 연애를 하게끔 조작하는 직업이 바로 ‘시라노 연애 조작단’. 하여간 말들은 참 잘 만들어.
 오늘 스토리를 다 소개한다고? 암. 드라마는 스토리를 알고 작품을 읽어야 제 맛. <햄릿>과 <리어 왕> 스토리 다 알고 책 읽어야 더 재밌는 거. 맞지? 그래야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어떤 대사로, 어떤 모습으로 표현을 했구나!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위에서 대충 이야기한 내용을 참 재미나게 생긴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만 말한다. 정말 죽여줘.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재미난 외모. 보여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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