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대받은 여자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평점 :
.
<위기의 여자>를 떠올리게 만든 장편소설. 그러면 남편의 외도가 나오겠네? <초대받은 여자>에서 주인공 프랑수아즈 미켈과 피에르 라브루스 커플은 면사포 입고 교회에서 식 올린 정식 부부가 아니라 보부아르-사르트르처럼 “계약결혼”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서 이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여자>에서 남편 모리스가 바람을 피운 것과 “유사하게”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힌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피에르는 초대받은 여자 그자비에르 파제스 양을 커플 사이에 끼워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준다. <위기의 여자>도 그렇고 <초대받은 여자>도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는 남자가 외도를 하고, 그로 인해 여성이 고통을 받는다.
<초대받은 여자>를 읽고나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이에 있었던 다른 여성들을 검색해봤더니 천일야화 같은 일이 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보부아르는 1929년에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는데 차석이었고, 당시 수석은 사르트르가 했단다. 물론 전부터 눈이 맞았겠지만 이 해, 1929년에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시작해, 서로의 연애에 관여하지 않고 정직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2년 단위의 계약을 갱신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여간 이래서 보부아르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교직 기간에 적어도 세 명의 제자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첫번째 상대가 러시아 출신 당년 18세의 올가 코사키예비치. 보부아르는 올가와의 관계를 계약의 의거하여 거짓 없이 사르트르에게 보고했고, 사르트르 또한 올가에게 애정이 가는지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올가 코사키예비치가 보기에 이거 뭐 복잡하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거 같아서(짐작이다) 거절을 하니, 사르트르는 꿩 대신 닭이었을까, 올가의 동생 완다 코사키예비치와 관계를 맺어버린다. 하여간 보부아르는 적어도 세 건에 달하는 제자와의 동성애 때문에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사르트르는 올가가 결혼하기 전까지, 완다는 사르트르 자신이 죽기 전까지 후원자로 있었다. 그러니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이 계약 부부 사이에 올가와 완다 코사키예비치 자매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보부아르가 허리 아래쪽으로 ‘추악’한 것이 자유 연애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제자에게 직위를 이용해 관계를 맺었다는 것도 있고, 게다가 상대 올가는 혁명 후에 조국을 탈출한 러시아 출신, 두번째 동성애인인 비앙카 비넨벨트도 폴란드 출신이었으며 세번째로 교직에서 쫓겨나게 된 결정적 계기인 나탈리 소로킨은 가난한 이혼/이주가정의 딸로 다방면으로 사회적 약자를 직위와 돈으로 착취한 거였다. 나탈리 소로킨의 어머니한테 고발당한 것이 1941년이니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인데, 보부아르는 이때 가난한 동성의 고등학생 제자 성착취 해야지, 레지스탕스 일 해야지, 철학공부 해야지, 작품 써야지, 와, 정말 철인이었다, 철인. 실제로도 매사에, 다양하게 성실하고 부지런해 ‘비버’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어쨌거나 교직에서 추방당한 보부아르는 올가와 완다를 한 사람으로 축약해 계약 부부로 보이는 커플 사이로 초대한 것으로 상정해서 쓴 장편소설이 <초대받은 여자>이다. 만일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지 않았다면,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수아즈가 어린 그자비에르를 기어이 자기 품에 두고 무한정으로 후원하는 이유를 끝내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끝까지 책을 읽고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프랑수아즈-피에르 커플에 얹혀 살면서도 그렇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게 까탈을 부릴 수 있었겠지. 이런 작품이야말로 본문 시작하기 전에 역자 서문 같은 거 붙여주면 좋았을 뻔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자비에르가 하도 프랑수아즈의 속을 썩이길래 그냥 후원을 끊고 고향인 루앙으로 보내 버리면 깨끗할 것을 왜 저리도 지지리 궁상일까, 당대의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이자, 철학박사들은 다 저래야 하는 모양이지? 내 속창아리 썩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호메로스가 저 위대한 <일리아드>에서 사용한 방법,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부터 불쑥 시작하는 인 메디아스 레스 in medias res를 보부아르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써먹어 버렸……다?
극장의 작업실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새벽 두시. 프랑수아즈는 소설가를 겸하는 극작가이다. 이이는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시저>를 각색하고 있다. 아침에 도착할 극단 연출가이자 주인공 시저를 연기할 피에르에게 대본을 건네야 한다. 프랑수아즈가 손으로 작성하면 대기하고 있는 제르베르가 타이프 한다. 제르베르. 젊은 조연출자. 아름다운 청년이지만 눈 밑 그늘 때문에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인다. 처음 소개할 때 젊은 청년이란 말 없이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인다.” 라고 해서 한 서른 중반 정도의 (1930년대 말 시점으로) 중년 남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예쁜 여성보다 더 속눈썹이 길고 부드러운 머리결의 미남 청년이다. 프랑수아즈의 마음 속엔 어느 새 풋풋한 사랑의 마음도 샘솟지만 피에르를 죽자사자 사랑하기 때문에 새파랗게 젊은 청년을 마음 속에 들여놓은 빈 터가 없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작품 초장에 이리 초를 쳐 놨으니 저 뒤로 가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나겠군. 허벅지 탁! 그렇다. 한다. 피에르 네까짓 것이 하는데 나라고 못해? 뭐 이렇게 홧김에 서방질 식은 아니지만. 명색이 지식인이고 장안에 이름이 떠르르한 작가가 설마. 설마? 그리고, 큰 기대 마시라. 하나도 안 야하다.
두번째 씬은 프랑수아즈와 그자비에르. 루앙에서 파리로 올라온 그자비에르는 제르베르와 비슷한 젊은 또래의 여성으로 아랍풍의 카페에 앉아 있다. <초대받은 여자>는 파리 좌안을 무대로 한다. 이게 아마 일반적으로 지도를 그릴 때 센 강의 왼쪽 편에 있는 동네를 칭하는 걸로 알고 있다. 다양한 문화생활 공간과 대학, 카페, 술집, 댄스홀 등 인텔리겐치아들이 서로서로 잘난 척하기에 여념이 없는 지성의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곳. 이 카페에 둘이 앉아 아무런 설명 없이 프랑수아즈가 루앙 촌년 그자비에르에게 파리에 머물면서 속기 타이핑이라도 배우기만 하면 자기가 일자리를 알아줄 수 있으니 머물러 있으라고 권유한다. 이 시점부터 끝날 때까지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대체 30대 프랑수아즈와 20대 그자비에르가 무슨 관계일까? 그자비에르는 싫단다. 손재주가 없어 속기도 타이프도 못 배울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 프랑수아즈는 자기한테 신세지기 싫어 핑계대는 거라 생각하지만 곧 밝혀지니 오산이다. 그자비에르는 애초부터, 이왕 프랑수아즈와 살며 구차하게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저는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게 없어요.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하나요?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면 안 살면 그만이예요. 독자 입장에서 더 가관인 것은 입고, 자고, 먹고, 술과 담배, 춤 등의 기호와 취미, 이동, 생리현상, 기타 등등에 필요한 모든 돈이 프랑수아즈의 계좌에서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전혀 부족함 없이 향유한다. 게다가 사람 관계에서도, 혼자 누구를 독점하면 마음이 놓이지만 살면서 재미있는 대상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족속이다. 독점하기 위하여 지독하게 질투를 부리며, 모든 사고 방식이 오직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너무 독한 평가 아니냐고? 천만에. 읽어 보시라. 이게 독한 건지 아닌지.
드디어 날이 밝고,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피에르는 곧바로 극장으로 온다. 그는 극장의 분장실에서 먹고 산다. 물론 거의 프랑수아즈가 살고 있는 호텔방에서 잠을 자지만. 나이트 가운 차림으로 분장실에서 쉬고 있는 피에르에게 프랑수아즈는 그자비에르 문제를 상의한다. 그 아이는 도통 내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아. 피에르는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법한 난처한 상황 속에서 순수한 미래를 발견해 자기만의 방식대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기도 하는 잘난 척 대마왕이다. 그가 해법을 일러주기를, 그자비에르에게 들어가는 자금은 프랑수아즈가 빌려주는 것이니 후에 직업을 갖게 되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말하라 한다. 그래서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가 사는 호텔의 아래층 방에서 살게 된다.
프랑수아즈와 피에르. 피에르가 말하기를 당신과 나, “우리”는 하나이며 함께가 아닌 우리는 우리라고 할 수 없는, 우리말로 일심동체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 엑스터시를 체험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것뿐이라고. 그러나, 피에르는 심드렁하게 그자비에르를 면담하고 한 방에 눈이 홱, 돌아간다. 한 번 봤더니 정말 예쁘거든. 그러다 프랑수아즈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둘만 카페에 가서 오랜 시간동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입술에 가볍게, 마치 새 부리로 쪼듯 키스도 나누고 돌아와, 프랑수아즈에게 자신들의 계약에 의거해 솔직하게 선언한다. 프랑수아즈,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됐어.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밖에 모르는 소시오패스 젊은 처자 그자비에르가 이들 사이에 정식으로 들어앉아 세 명의 앞에는 본격적으로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당연히 프랑수아즈도 사람이니 아무리 계약에 있더라도 질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그건 피에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약 부부는 싸움이라기보다 다툼을 하는데 역시 많이 배운 시대의 석학들은 싸울 때도 말이 참 근사하다.
“당신은 눈치조차 못 챈 거군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사랑을 몹시 소중히 여긴 나머지 시간을 초월하고 수명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그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는 곳에 보관해 왔을 테니까. 그런 당신에겐 이따금 우리 사랑을 떠올리며 만족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그러다 보니 변해 버린 우리 사랑의 실체를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거라고요.”
거참. 부부싸움도 열라 형이상학적이다.
“그렇지만 당신으로 가득 찬 순간들, 그게 바로 내 인생을 이루고 있어요. 만일 그 순간들이 비어 있다면, 그것들이 하나의 충만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당신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과 함께 충만한 순간들을 수없이 맛보고 있음을 모르겠소? 마치 내가 무신경한 잡놈이라도 된다는 듯 당신은 말하는군.”
어이, 피에르. 또는 사르트르, 당신, 잡놈 맞아!
작품은 프랑수아즈라고 읽는 보부아르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그러니 어쩌겠어?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결말의 딱 한 장면만 빼고 프랑수아즈는 천사 자체다. 적어도 피에르가 그자비에르와 (눈치로 봐서) 깊어지기 전까지 우리가 아는 계약이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정절을 지키고, 그자비에르의 모든 비용을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아이가 자신에게 가하는 질투와 멸시와 정신적 학대에 이르는 가해를 견뎌내며, 프랑수아즈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기가 무슨 현현한 신인줄 오해하고 사는 피에르가 가하는 가스라이팅도 기껍게 다 받아들인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도 그래서 아주 가끔은 그자비에르와 피에르가 필요 이상으로 나쁜 배역을 맡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도 든다는 말이다.
근데 우습게도 이거, 명백하게 실존주의 소설이다. 현재 실존하는 것의 중요함. 결국 결론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어떻게 끝나냐고? 에이, 참. 안 알려드리는 거 뻔히 아시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