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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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진작 좀 읽을 것을. 10년 전 만해도 일생의 로망이 한국산 SUV를 운전해 장안(지금의 시안)을 출발해서 감숙성甘肅省간쑤성을 지나고 사막 한 가운데 윈깡석불과 위구르 자치구역을 통과해 키르기스스탄과 가자흐스탄 고원, 늑대와 고산표범이 배회하는 광활한 고원지대까지 질주해보는 것이었다. 아니면 울란바토르를 출발해 고비사막을 관통하여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것도 염두에 두었었는데 이건 고비사막에서 바라보는 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 혹해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럽 문명, 주로 기독교 성당과 봉건시대 왕들과 귀족의 성으로 축약하는 유럽문명에 관해서는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대신 스무살 무렵부터 내 희망사항은 궁극적으로 눈 닫는 곳까지 이어지는 사막을 지나, 드넓은 초원이 지평선을 채우는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언덕배기에 오르는 것이었다. 젊어서는 걸어서, 조금 나이 먹어서는 카라반에 동행해서, 더 나이 들어는 SUV 차량을 운전해서, 이젠 꿈에서나마. 그리하여 지금 생각해보니 4월 14일 독후감 올린 단편집 산월기에서도 <이릉>을 제일 재미나게 읽었을 것이고 <둔황>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생각 안 하고 단번에 읽어버렸을 것이다. 나한테는 <둔황>이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작, 단, 나 한 명을 위해 쓴, 말 그대로 '나홀로 명작'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행위의 마지막 목표점은 감상하는 자의 쾌락에 바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한 쾌락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둔황>이 명작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통일 중국 역사상 가장 약골이었던 북송시대. 어려서부터 동네 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조행덕이란 32세의 장정이 과거급제를 목표로 황제의 궁궐이 있던 개봉(지금 이름: 카이펑)에 와 과거를 봤는데 1차 합격, 2차 합격 이렇게 n차 합격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형식적으로 치루는 면접시험을 대기하는 도중에 이 패 죽일 게으름뱅이 놈이 바위그늘에 앉아 그만 깜박 잠이 들어 면접시험을 치루지 못해 낙방을 해버리고 말았다. 문화와 과학수준은 세계 최고였지만 무력을 키우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한 송. 나라의 수도 개봉, 카이펑은 지금 (한반도보다 낮은 위도에 위치한)중국의 하남성(허난성)에 있는 바, 당나라까지 수도 장안과 원나라 이후 수도 북경을 생각해보면 개봉에 도읍을 정한 송나라는 처음부터 북쪽 오랑캐의 시도 때도 없는 침공에 맞서 대차게 대처하기보단 오랑캐의 침공을 어떻게 좀 무마하는 수준에서 처리하려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5호 16국 시대의 무차별한 칼싸움에 넌더리가 난 때문이기도 하겠다 싶기도 하고. 하여간 이러한 때 과거 낙방한 조행덕이 개봉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모종의 사건을 우연히 보고 (역사는 중대한 우연이 매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법이라서) 단박에 장안 서쪽 저 사막 멀리 새로이 탕구르 족이 세운 서하西夏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겠다고 결심을 해버린다. 명색이 장편소설의 주인공이니 마음 먹은대로 진짜 서하로 가긴 갔지만 가자마자 서하의 포로가 되어 포로 한족으로 결성된 군대에 들어가게 된다.

 자, 여기까지.

 송나라의 경제를 결정적으로 거덜이 나게 한 서하와의 7년 전쟁. 이 와중에 인텔리겐챠 조행덕이란 인물이 사막을 건너 서하까지 기어가 과연 어떤 일을 했을까. 전투에만 나섰다 하면 죽기살기로 전투에 임하지만 원래부터 문관 지망생의 약골이라 언제나 전투 도중에 까무러쳐 말과 몸을 묶은 끈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목숨을 부지했던 조행덕. 역시 그의 진가는 붓을 통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저 야만과 불모의 땅, 사막의 도시 서하에서 붓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한 자루 붓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 현대, 20세기에 와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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왑샷 가문 몰락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3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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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왑샷 가문 연대기>를 읽어보신 분은 치버의 <왑샷 가문 몰락기>를 그냥 건너뛰기 힘들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만큼 재미나는 연작 장편. <....몰락기>에선 <...연대기>의 주인공 리앤더가 한편으론 난데없이 엉뚱하고 한편으론 낭만적이다 싶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 그의 늙은 여동생 오노라 왑샷이 조그마한 시골 바닷가 세인트보톨프스의 막강한 유지로 등장한다. 저 대서양 건너 영국의 록스포드에 살았던 빌로우스 여사, 시도 때도 없이 충실한 하녀 플로오오오오오렌스! 를 외치면서 동네 경찰서장, 주임목사, 학교 교장, 상인연합회장 등의 의견을 여지없이 묵살해버렸던 빌로우스 여사와 무지 비슷한 캘릭터라고 생각하시면 오차 없을 듯. 하여간 세인트보톨프스의 레이디 오노라 왑샷한테는 조카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죽은 리앤더의 아들들로 일찌기 왑샷 여사께서 둘 다 대처로 나가 반드시 성공해 금의환향하라는 엄명을 때려놓은 상태. 그래서 큰 조카 모지스는 도시로, 작은 조카 코벌리는 핵폭탄(을 은유하는 극한 냉전시대의 가공할 만한 무기)을 연구하는 사막 근처 기지에 직장을 얻어 생활을 하는데, 제목이 '몰락기'라고 했으니 궁극적으로 둘이 인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망가뜨리느냐 하는 데 촛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결론을 말하면 왑샷 가문은 말 그대로 산산히 부서져버린다. 정말? 아니, 천만의 말씀. 생물학적으로 몰락이라고 함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단어인데, 오노라 여사는 뭐 그렇다고 쳐도 조카 둘 다 어쨌든 자신의 Y염색체를 이어나가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사회적으론 모지스의 경우, ………… '작가 치버와 비슷하게' 라고 그의 망가지는 과정에 관해 몇 줄 썼다가 지웠다. 사실 이 재미있는 소설의 제목이 '몰락기'라고 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오노라의 두 조카가 망가지는지 성공을 하는지 내색도 하지 않고 시침 뚝 떼고 독후감을 쓰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그건 일찌감치 글렀다. 하지만 어떻게 망가지는지에 관해서는 '양심상' 여기다 밝힐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오노라 왑샷 여사의 몰락에 관해선 뭐, 이 정도야.

 그녀는 난데없이 탈세의 죄목으로 인생이 끝날 위기에 처한다. 옛날 여성 오노라는 많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 가볍지 아니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걸, 당연히 이해는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비슷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돈을 받는 게, 내가 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뭐 어때서? 이 의미가 아니라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도무지 진짜로 실행할 생각은 못하는 딱 그런 세대의 대표선수였다는 의미. 그리하여 동네에 같이 늙어가는 지방판사의 조언을 듣고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니 바로 해외도피. 그러나 다 늙은 할머니가 홀로 해외도피를 한 들 그게 맘먹은 대로 쉽나? 이제는 바닷가의 쓰러져가는 집에서 유령으로 출몰하는데 만족하는 그이의 동생 리앤더 왑샷을 만나러 가는 길 말고는 남지 않게 된다.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리앤더의 유령. 모잽이 수영으로 저 먼 바다로 헤엄쳐간 리앤더는 자신이 살던 집에 가끔 출몰해서 아들 둘이 똑같은 지분을 갖고 있는, 한땐 제법 규모도 크고 가격도 만만치 않던 집의 월세값 혹은 집값을 뚝! 떨어뜨리기만 한다. 유령출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둘째 아들 코벌리가 하루는 영 터무니 없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옛 고향을 한 번 들렀다가 우연히 옛집에서 하루밤 잠을 자러 들렀는데, 왑샷가문이 뭔 햄릿 가문인 거 처럼 코벌리의 아버지가 쿵쿵쿵 마루장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코벌리 앞에 우뚝 섰다가 또 쿵쿵 걸어가지만, 확실한 건 코벌리는 죽었다 깨도 햄릿이 아니라서 아버지의 유령을 보자마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쳐버렸다는 얘기.

 근데 여태까지 이 재미난 책의 스토리와 등장인물에 관해서만 열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짜 이 책을 재미나게 하는 건 스토리보다도 무수한 문장들과 단락에서 마구 쏟아지는 해학과 풍자와 시절의 그리움과 익살과, 코미디 속에 잠들어 있는 비극성, 이런 것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 치버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반 가량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반 정도만 제대로 잡아챘다면 기꺼이 이 책을 읽고 다른 이한테도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 진짜 이유는 스토리와 그 속에 스파이처럼 잠입해 있는 시절과 감정들을 나꿔채는 일일진대, 치버의 <왑샷 가문 몰락기>는 이런 면에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즐기기 전에 <왑샷 가문 연대기>를 먼저 경험하시는 편이 매우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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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밀라 - 미다스 세계문학 1
칭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이양준 옮김 / 미다스북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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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밀라, 라는 젊은 유부녀 바람피는 이야기. 그걸 보고 '세상'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광고하는 책장사 사장님. 흑흑흑.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세상에나 돈이 그렇게 좋니?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다른 작품 <백년보다 긴 하루>를 읽어보신 분은 딱 그거 하나 갖고 아이트마토프(아쒸, 이름이 길기도 하다. 술 덜 깨서 타이프하기도 쉽지 않은데)한테 홀딱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얼마나 <백년보다....>가 좋은지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오랜만에 시내 나갈 일이 있어서 커피 파는 중고책 가게에 습관적으로 들렀다가 만일 눈에 이 책 <자밀라>가 들어왔다면 덥썩 주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좀 과장해 말하자면 커피 한 잔 마실 동안 종업원이 보내는 무언의 사인, 손님, 커피 다 마셨으면 이젠 제발 그만 꺼져주실래요? 이 은밀한 사인을 받을 때 쯤 <자밀라>를 몽땅 읽을 수 있었을 것이고, 종업원이 보내는 무언의 사인에 대한 답례로 2층 커피 파는 중고책 가게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 책 괜히 샀고 괜히 읽었다는 후회를,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란 전제로 말하자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트마토프에 대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주는 고마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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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헤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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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 머독의 장편 데뷔작이라고 한다. 근데 난 이거 읽기 전에 <바다여, 바다여>, 정년퇴직해서 이미 늙은이가 된 교수가 첫사랑, 그녀도 늙어(늙은 서양 여인들의 특징인 것 같은) 코 밑 검은 수염이 돋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여인을 찾아 스코틀랜드 최북단의 바닷가로 이사해서 벌어지는 난장판이 딱 마음에 들어(왜 난 늙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몰라.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그렇고 <바다여...>도 그렇고 말씀이지), 이이가 쓴 <그물을 헤치고>도 꼭 읽고 말리라 작정했었다가 게을음에 관한 한 한 게을음하는 처지라 이제서야 읽게 됐다. <바다여, 바다여>와 이 책의 공통점을 굳이 얘기하자면, 여류작가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에 목 매달다가 정말 죽기 일보직전에 득도를 한다는 것.

 머독, 이 여자가 마음에 드는 건, 잉글랜드의 철학자라면 세계 철학계를 앞자리에서 이끄는 유구한 전통과 광배를 둘렀을 텐데도 (잉글랜드와 쌍벽을 겨루는 프랑스 철학의 계승자 사르트르가 개떡같은 소설 속에서마저도 오지게 잘난 척하는 걸로 일관한 것과 비교해서) 전혀 어렵지 않은 문장들과 내용으로, 그리고 넘쳐넘쳐 흐르는 농담과 해학과 익살과 심지어 허언까지를 총동원하여 쉽게 읽히는 작품을 썼다는 거. 물론 소설 읽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궁합이 다른 어떤 것보다 앞에 서는지라 이런 평가 혹은 감상은 오직 나한테만 적용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물을...>의 주인공, 중요할 땐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만 사소할 땐 도둑놈이고 사기꾼이고 거짓말장이인, 지극한 게으름뱅이이자 세계사의 발전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유일한 계급인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챠의 대표선수 제이크가 그를 둘러싼 주변인물들과 함께 런던과 파리에서 저지르는,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사랑의 뒤죽박죽, 그물처럼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크게 보면 사랑 이야기. A는 B한테 미친 듯 빠져있고, B는 C 없이 하루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으면서 A한텐 전혀 관심도 없는데, 정작 C의 모든 인생은 오직 D를 위해 있는 듯하지만 B가 자신한테 바치는 지극정성보다 아스팔트 위 푸짐한 개똥이 훨씬 중요하며, D의 뇌활동과 근육의 움직임은 자신을 머리 속에 슬어있는 이蝨하고 별로 차이나게 생각하지 않는 A를 위해서만 기능하면서도 C는 옆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감각할 수 없다. 이런 얽힘. 이게 사랑의 경우만 그래? 사랑을 한 모티프로 해서 표현을 해놓았을 뿐 거의 모든 인간사에서 이런 짝사랑의 사이클은 오늘도 당신한테도 (아 죽일년!) 그녀한테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책에선 제이크-애너-휴고-새디. 이 네명이 사분의 사박자, 즉 행진곡 풍으로, 런던이니까 영국의 대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가 작곡한 <위풍당당한 행진곡>의 속도감으로, 그러나 곳곳에 숨겨놓은 익살과 해학과 농담의 지뢰를 펑펑 터뜨려가며 서로가 서로를 향한 짝사랑의 그물같은 사이클을 펼쳐놓고 있는 가운데, 인생사에 도가 통한 철인, 마치 중국 청구땅의 풍산風山 위에서 구름 타고 노니는 신선 같은 이가 둘이나 등장해 독자로 하여금 그이들의 높은 도에 감탄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내가 여기서 어떤 풍모가 감탄할 만하더냐, 하는 건 얘기해주지 않겠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의 직업에 관해서만 짧게 말해주겠다. 이름은 팅컴 부인. 직업은 구멍가게 쥔.

 아, 오늘은 스토리에 관해 너무 많은 말을 한 거 같다. 반성하겠다.

 하여간 재미나게 읽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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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을유세계문학전집 8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박소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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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독후감을 쓰기 겁난다. 아니 까짓 소설 하나 읽고 독후감 쓰기 겁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이고……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도 선뜻 독후감 쓰기가 꺼려지는 건 사실이다. 첫째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인생의 전반전을 통째로 사유思惟한 소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시작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미끈덩 빠져나왔으나 작가의 인생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해 동료 귀족, 인텔리겐챠, 부르주아 등과 함께 베를린으로 망명한 작가가 인생의 정수essence이자 자신의 예술의 발원지였던 광활한 러시아에 대한 진지한 송가hymn이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200쪽이 넘는 역주+해설을 첨부한 역자 박소연의 진지한 열정과 지극정성에 혹시 흠집을 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 서재를 찾는 이가 하루 열명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완전 공개하고 쓰는 것임에야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보코프의 작품은 <롤리타>와 <사형장으로의 초대> 두 개를 읽었는데, 내 독서의 역량이 심각하게 치졸하여 <사형장....>을 읽고는 작가의 러시아어 소설은 읽지 말아야겠다, 라고 섣불리 생각했던 것을 지금 반성한다. 그렇다고 지금 <재능>을 쉽게 읽힌다거나,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거나 하는, 언필칭 친절한 작가라고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본문만)500쪽도 안 되는 책을 읽느라고 꼬박 사흘을 헌납했다. 내겐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다. 한 문장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죽박죽 섞여있어 서너번 읽어야 해독이 가능한 경우가 빈번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등, 작가는 독자의 가독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다. 박소연은 이런 문장들의 수열적 배치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지. 아, 이쯤에서 밝혀야겠다. 나, 박소연과 아무 관계 없다(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번역한 책도 이것이 첫경험이다. 근데 이이의 번역이 얼마나 좋았는지 앞으로 팬이 되기로 작정했을 뿐이다.

 주인공 표도르 고두노프 체르딘체프가 망명지 베를린에서 함께 망명한 구 러시아 사람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나보코프의 주특기, 온갖 학문영역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 집단의 과거 러시아에서의 생활,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사는 이방인이 겪어야 하는 이질감과 좌절감, 옛 러시아 문학의 (애정어린)비판과 향수, 사라져버린 아버지(혹은 조국)에 관한 짙은 추억 등을 진하게 그렸다. 그게 얼마나 독자로 하여금 (읽기 지겹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로 하고) 절절한 공감을 주는지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책의 제목 '재능'은 주인공 표도르 고두노프의 재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가 쓴 2장과 3장의 체르니솁스키에 관한 비평과 아버지의 작업에 대하여 쓴 전기를 포함하여 표도르의 시 작업 등 일련의 것들을 말하는 거 같은데 원래 똑 소리 나는 걸로 이름이 있는 나보코프였던 만큼 능수능란하게 온갖 것을 뒤섞어 글, 그리고 글을 통한 인식과 의식과 추억과 미감의 만찬을 마련해놓았다.

 어느 특정 장르의 소설로 구분할 수 없는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는 책. 독서량이 좀 있는 독자에게 즐겁게 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읽다가 을유문화사 블로그 <재능> 포스트에 제보했던 내용.

 "제보합니다.
167쪽 '호기심으로 임신부를 해부하고, 어느 추운 아침에 시냇물을 건너는 짐꾼을 보고 그 골수의 상태가 궁금해 그의 종아리를 절단하라 명한 독재자 슈신이 생각났다.'
이에 대해 후주(518쪽)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중국의 폭군으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 일화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으로 알고 있습니다. 출처를 기억하고 있지 못해서 유감입니다만.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역자 박소연 선생의 번역이 상당히 공을 들인 거 같고 국어 문장도 아주 좋습니다. 저는 이런 책을 두고 '을유스럽다'라고 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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