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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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해 마렝고 전투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푸치니 작 <토스카> 2막에서 철없는 카바라도시가 공국의 늑대 스카르피아 앞에서 목청껏 불렀던 Vittoria! Vittoria! 바로 그 장면), 이어서 1805년 이번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며, 1809년에도 다시 바그람에 가서 오스트리아를 깨박내고 말아 이를 대개 나폴레옹 3대 승전이라 칭한다. 난 제목만 보고 나폴레옹이 2대 1로 싸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쌍코피나게 했던 전투가 벌어진 지역, 아우스터리츠를 생각했다. 글을 쓴 사람이 전에 읽은 <토성의 고리>의 작가 W G 제발트, <토성....>이 하도 기막힌 기행문으로 만든 소설이라 이번엔 제발트가 아우스터리츠 지역을 산보, 도보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걸 써놓았겠다 싶었다. 그럴 수 있겠지? 근데 아니다. 사람 이름이다. 사람 이름이 아우스터리츠라면 참 희한하긴 희한한 이름이다. 유대인이란다.

 <토성....>을 읽을 때까지, 난 작가 배수아가 쓴 제발트 이야기를 떠들어보며 스스로 제발터리안이라고 칭하는 신인류들이 많다는 얘기를 보고,나, 말러리안, 바그네리안 비슷한 종의 인간들이겠지, 코웃음치고 그랬는데, 이번에 아주 제대로 화들짝 놀라, 이래서 제발트, 제발트 하는 모양이구나, 실감을 했다.

 

(출처 : 구글 검색하다 젤 맘에 든 거)


 보시라. 제발트인데 왼쪽 눈꼬리는 아래로 쳐졌으면서 왼쪽 입매는 위로 솟아있는 모습이 뇌졸중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잘 생긴 외모에 지적이고 생각 자체도 고매하고 조금은 고리타분한, 그래서 곁에서 보기에 좋거나 옆집 이웃으로 살기에도 좋지만 같이 살려면 골치 깨나 아플 그럴 인종으로 보이며, <아우스터리츠>를 쓰기에 아주 적절한 모습이다. 내가 젤 싫어하는 게 외모를 보고 사람 판단하는 건데, 이렇게, 하이고, 여기서 '이렇게' 다음에 '잘 쓴'이라고 이어가고 싶지만 이런 대단한 텍스트에 나같은 시중잡배에다가 아마추어 독자가 잘 썼네 아니네 왈가왈부하기가 애초에 송구스러울 정도의 글을 만든 사람은 얼굴도 한 번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맞지? 그래서 사진 한 번 올려봤다. 내가 제발트 실물 사진을 본 소감은, 책이 좋으니 아무 이유 없이 사람도 존경스러 보인다.

 내가 지금 터무니 없이 한 인간과 작품을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21세기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 작가가 있으며, 깊은 사색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21세기 역시 살 만하다.

 난 좋은 책일수록 책의 내용이나 기타 여러가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 책에 관한 독후감을 쓰면서 여태까지 내가 얘기한 것이라곤 제발트 찬가 말고는 하나도 없다. 책에 관심이 있는 분, 주저하지 마시고 이 책을 선택하시라. 감동은 작가와 독자의 코드가 맞아야 하는 일. 그래서 당연하게 당신의 감동까지 내가 책임지지는 않는다.

 나? 난 저 영감한테, 취.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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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1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전 요즘 제발트 <공중전과 문학> 읽고 있어요. ㅎㅎ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다음에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7-02-10 09:47   좋아요 0 | URL
옙, 잠자냥 님도 좋아하실 거라 믿습니다. ㅎㅎㅎ

아수라 2017-02-1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토성의 고리는 읽어봤고 아우스터리츠는 안 봤는데요. 지금 당장 딱 한가지를 선택하려고 하거든요^^;
아우스터리츠를 살까요.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를 살까요? 호랑이 리뷰도 맘에 들어서 눈여겨 두고 있거든요^^

Falstaff 2017-02-18 08:39   좋아요 0 | URL
헉!
ㅋㅋ 대단히 곤란한 질문인데요, <호랑이...>는 스토리 <아우스터리츠>는 뭐 거시기, 이렇게 둘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아.... 고민고민.
그리고 <호랑이...>는 오프라인에서 재정가 도서로 가격이 다시 책정, 상하 두권에 10,800 원 주고 새책 사셨다는 분의 쪽지 받고, 심장병 도지는 줄 알았습니다.
한 권 추천이면 <아우스터리츠>인데요, 오프라인에서 재정가 도서 발견하시면 그것도 주저하지 마세요. ㅎㅎㅎㅎ
 
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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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참 잘 읽은 연애소설. 역시 소설의 기본은 연애소설이고, 연애소설 가운데서도 제일 매력이 있는 건 불륜이다. 아, 고정들 하셔. 난 불륜을 저질러본 적도 없고 앞으로는 신체기능 상 매우 어렵겠지만(물론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면야!),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런가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 총각들이 사랑인지 육체적 갈망인지 가늠하기 힘든 충동 때문에 야밤에 담 넘고 테라스까지 기어올라 온갖 환상적인 싯구를 읊는 것보다 세상살이 왠만큼 아는 지긋한 것들끼리 어떻게 지펴놓은 은근한 군불이 어느새 활활 타올라 뒤늦은 사랑 말고는 나머지 몽땅 다 태워버리는, 노래가사 말마따나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마소, 그런 불륜 얘기가 맘에 든다.

 모니카 마론. 그의 책은 당연히 처음 읽는 것이고 이름마저 처음 들었다. 그러나 <슬픈 짐승>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이거 말고 그의 책 중 2017년 2월 현재 발매하고 있는 유일한 다른 책 <올가의 장례식날 생긴 일>을 보관함에 담아놨고 올해 10월 정도에 읽을 거 같다. 물론 내가 잘 읽은 건 역자 김미선의 유려한 한국어 문장의 덕도 크겠지만 마론이 그려내는 사랑과 삶의 스펙트럼이 내 혼을 완전히 빼놨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슬픈 짐승>. 첫 문장을 읽을 땐, 하이고 타령 하네! 더이상 상투적일 수 없는 유치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는 걸 고백하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내가 <슬픈 짐승>에 빠져들었던 이유에 대하여 얘기해보겠다.....까지 썼는데, 완전 아마추어 독자가 책에 빠진 이유를 밝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문화창달과 시민복지에 이바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냥 감상만 적어보기로 한다. 역시 사람은 제 주제를 잘 알아야 하는 거니까.

 위 문단에서 첫 문장을 써놓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것이 현재 자신은 젊었을 때의 생각과는 달리 죽지 못하고 지금 백살이며 아직도 살아 있고 어쩌면 아흔 살일 수도 있는데 아마 백살이 맞을 거라고 하면서 누군가로부터 받는 약간의 연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는 걸 밝힌다. 내가 원래 눈치없는 아마추어 독자라서 이런 정보를 접수하자마자 주인공 '나'는 빼도박도 않고 나이가 최하 90살이라고 확정한 상태에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처음 간행 연도가 1996년. 그럼 '나'는 적어도 1906년 이전에 태어난 여자다. 맞지? 처음엔 불륜에 관한 소설이라며 왜 나이 같은 걸로 변죽을 울리느냐 하면, 사실 이건 변죽이 아니라 심각한 진실을 이야기한 것인데, 인간 혹은 작가 혹은 책의 주인공 '나'의 경우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사랑"이 들어올 수 없는 상태, 또는 치명적인 사랑이 나로부터 떠나버린 상태를, 살고는 있으되 살고 있지 않은 구십세나 백세의 노인이라 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설의 기본에 입각해 주인공은 틀림없이 1906년 이전 태생의 독일 여인이라고 가정하고 책을 읽었으니 앞부분의 매 순간 곳곳에 지뢰밭처럼 두뇌가 펑펑 터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밖에. 아, 난 아직 멀었다.

 짧은 소설이라 그나마 좋은 얘기로 '불륜'이고 미국드라마 과학수사대CSI 식으로 얘기하자면 '치정'이 내용이란 거 말고는 스토리에 관해서 더 소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몇가지 책을 읽는 힌트만 살짝, 힌트래봐야 진짜 노인이 주인공인줄 알았던 아마추어가 내놓는 힌트에 불과하지만 하여간 그런 걸 좀 얘기하자면, 나를 둘러싼 터무니없는 조건 때문에 불가능했던 소망이 정작 가능해지자 그 소망을 이루고싶은 간절함이 사라지는 모습. 스코틀랜드 경계에 로마 황제가 세웠던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독일을 베를린 장벽으로 대신하는 분단상황과 분단 해소 후 사람들 간에 얽히고 설킨 애정관계 인간관계 가족관계 기타등등의 관계, 관계, 관계들. 만일 1970년 쯤에 갑자기 대한민국이 평화통일이 되었다면 남으로 내려와 (북으로 올라가) 새로 혼인을 하여 가족을 이룬 자들 간의 관계, 관계, 관계, 그 혼란함. 이런 것들 다 숙고해봄직하지만(마치 출판사 책소개에 나온 거처럼) 그러나 두 남녀의 불륜에만 촛점을 맞추어 나름대로 아름답지만 끔찍한 연애를 보는 것도 에이그, 짜리리리 하다.

 참고하실 건, 죽여주는 베드 씬 같은 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기대 애초 접으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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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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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의 이야기.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사람의 진짜 아버지. 그가 필멸의 인간답게 어느날 지상에서 숨을 거두고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아버지, 그의 일생에 관한 글을 써보려 작심한다. 그리하여 에르노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임을 자각하여 오직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정을 모아볼 것"이라고 글의 방향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객관적으로 한 발자국 가량 떨어져 바라보는 일,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쓰는 일은 에르노의 잇단 멋진 말마따나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을 그대로 원고지 위에 옮겨놓는 일이겠다. (인용은 전부 21쪽)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했던 그대로 글을 썼다. 그래서 글이 건조하고 맛이 없겠거니 생각하면 천만의 오해. 여기서 눈부신 건조한 문장들이 기막히게 나열되는 환상을 보게된다. 건조한 문장들과 묘사가 절묘한 수열을 만들면 어떤 화려한 수식보다 사람의 가슴을 정곡으로 찔러대는 뜨거운 총알이 된다. 독자들은 그걸 느낄 수 있을 터. 편집을 아주 넉넉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100쪽을 겨우 넘는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책을 내려놓은 때 푸,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공감을 당신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런데 말씀이다.

 우리나라 소설 가운데도 이 정도 작품들은 많잖아? 게다가 부모에 관한 감성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발생한 이후 한 번도 쉬지않고 계속된 것이고 일천한 한국소설문학에서도 특히 많은데, 물론 에르노의 문장이나 소설 전체가 후지다는 얘긴 눈꼽만큼도 아니며 오히려 나도 그녀가 쓴 이 책에 큰 매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에르노의 다른 작품 몇개와 함께 묶어 책을 내는 것이 독자를 위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이 문학사를 바꿀 만큼 혹은 독자들로 하여금 눈알이 휘까닥 뒤집어질 만큼 명문이라면 얘긴 다르지만, 일반적인 주제에 (솔까!)일반적인 내용으로 오직 감성충만의 드라이한 문장의 소설을 딱 하나만 싣고 정가 10,800원을 때리면 너무 하지 않은가 말이다. 출판사 매출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인세가 달러로 나간다는 것도 생각좀 해주라. 그 인세를 한국의 가난한 작가가 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지. 이런 책은, 물론 좋은 책이란 점엔 동의하지만, 문고판으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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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0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작품을 한 권으로 묶어서 내야 한다는 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단순한 열정>도 100페이지 조금 넘어가는데 가격이 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_- (말이 좋아 100쪽이지 사실 편집만 빽빽하게 하면 그 절반으로 줄지도;;)

Falstaff 2017-02-08 13:39   좋아요 0 | URL
그죠, 그죠! 이건 완전히 비양심이예요. 다음 주 화요일에 올릴 문학동네 책도 똑같은 이유로 해서 저한테 욕 오지게 먹을 예정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17-02-0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메이저 출판사들이 독자의 읽기 능력을 너무나도 무시하는지 ㅠㅠ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가리지 않고 이런 비양심적인 책을 너무 많이 내고 있습니다. 문학동네가 특히 심한 듯한데...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인간이라는 직업> 이 두 책도 받아보고 황당했고, 창비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도 황당했고, 문지의 로맹 가리 <내 삶의 의미>도 열받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 온라인이 아닌 서점에서 봤다면 절대 그 가격 주고 사서 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_-

Falstaff 2017-02-08 16:23   좋아요 0 | URL
전 그래서 책의 페이지를 확인하는 편인데 가끔가다가 걍 사면 꼭 이런 일이 생기거든요. 기쁜 마음으로 택배온 거 뜯어보는 순간 기분 조지는 그 심정, 그 사람들 아마 알 겁니다. 그래도 돈 많이 남으니까 읽는 사람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막 찍어대는 거죠.
으.... 정말.....
 
1780 열하 1
임종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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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거다. 1780년이면 바야흐로 아메리카에서 미국 독립을 위한 전쟁이 극렬하게 벌어지고 있어 지구 상에 거의 처음으로 인권 및 평등, 그리고 자유 사상이 싹을 트기 시작하던 때로 5년 후면 미국이 독립을 하고 그후 4년 더 있으면 드디어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바스티유의 공고한 벽을 인민의 힘으로 무너뜨리게 되는 그런 시점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눈을 아시아로 돌려보면 명조 시절 정화의 원정 이후 굳게 문을 닫아버린 중국은 폐쇄정책으로 인하여 국가경쟁력을 스스로 묶어버렸으며 교류가 세계최정상의 문명과 문화를 누리고 있는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판단으로 오히려 공고한 만리장성을 굳건하게 보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런 모든 조치들이 자신들이 세계에서 최강이라는 오만에서 나온 것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급격하게 중국과 동아시아의 세계적 정력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아이러니. 중국으로부터 총기제작술을 받아들여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라비아 민족들을 먼저 쓸어버린 다음, 총과 대포기술과 더불어, 인류 발전 역사를 2차 함수 곡선으로 발전시킨 항해술의 발달을 기초로, 라틴 아메리카 인류의 대대적 학살과 희생을 바탕으로, 유럽이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 세계사의 영광은 동아시아에서 한 순간에 유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3세기 가량이 흘러 유럽의 여러나라가 최종적으로 중국을 침탈할 목적으로 아시아에 접근을 시도하였지만 헛된 중화의식에 빠져버린 청조는 이를 유럽이 청조에 조공을 하기 위해 알아서 설설 기는 줄로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고, 하다못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태평성대라고 곳곳에 함포고복의 격양가가 높았던 시절이다. 문명국 가운데선 가장 야만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조선엔 정조라고 불리울 젊은 왕이 등극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뜻을 세우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이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노론으로 대표하는 수구세력, 썩어자빠져 이미 멸망해 백골마저 흩어져버린 명나라를 잊지못해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에 입각해 청조를 치느니 마느니 헛소리로 날밤 까는지도 모르는 세력들을 견제하느라 자신의 친위대 양성에 힘을 쏟아 군권을 손에 쥐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와중이다.

 작가 임종욱이 딱 이 시기를 잡아,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을 북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을 등장시켜 제목도 근사하고 책 껍데기 역시 근사하며 900쪽이 넘는 화려한 디자인의 <1780 열하>를 썼으니 어찌 관심이 없을 수 있었으랴. 그리하여 일찌감치 이 책을 한 번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가, 작년 말에 기쁜 마음으로 책을 산 다음, 드디어 지난 주에 금요일에 책을 읽기 시작해 일요일 오전까지 바득바득 책을 다 읽어치웠으니 어찌 감상 한 마디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공들여 쓴 작가 임종욱은 "습작"을 자신있게 책으로 만들어, 즉 아무리 책일지라도 독자의 기대와 감동과 감동까지는 아니라면 적어도 동감을 주는 대신 자신과 출판사는 돈를 받을 '상품'으로 만들어냈으니 여기서 임종욱의 기개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독자서평을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습작이라고 표현한 독자가 한 명 있었고, 그에 대해 굳이 답글을 단 저자 임종욱은 '자신의 작업을 습작이라고 하니 민망하다'는 취지로 이야기 했다. 임종욱의 유감표현에는 동감을 한다. 나름대론 아니라고 여기겠지.

 내가 <1780 열하> 1권에서만 습작이라고 결론 낸 것들을 조금 이야기해보겠다.

 1. 프롤로그를 시작하면서 정문탁이 송지명 교수의 강연을 찾아가는 데애 대하여 무지막지 우연을 강요하고 있는 거 (45쪽)

 2.강원도 사람이 충청도 사투리 쓰는 거. "아부지, 거 정말 오랜만에 듣는 영양가 있는 소리구먼유. 어서 가서 성사시키세유."  53쪽. 아,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 잉글랜드 촌놈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에서도 미모의 여주인공 테스는 거침없이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3. 강력계 형사가 한겨울에 난데없이 양복을 벗었다가 다시 입어서 지나가는 행인이 형사의 겨드랑이에 달려있는 권총을 보게해? (144쪽)

 4. "40, 불혹(不惑)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신 아버지" 218쪽에 이렇게 나오는데, 바로 다음 페이지엔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자 조형사는 어머니와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병들고 야윈 아버지 곁에서 남편의 몸을 보살펴야 하는...." 이란다. 그럼 아버지가 스무살이 안 돼 조형사를 낳았다는 얘기. 219쪽에선 굳이 왜 아버지 얘기가 나와야 했는지 혹시 감정팔이 아냐?

 꿈 꾼 이야기가 너무나 자주 뜬다는 것 등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데, 수첩 옆에 두고 위와 같이 메모하다가 책 한 권 읽으면서 내가 뭔 지랄인가 싶어서 관뒀다.

 그리고 임종욱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나도 극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경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종욱은 예외다. 내가 아무리 나와 다른 의견도 받아들이지만 히틀러 개새끼나 스페인의 프랑코 개자식의 의견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임종욱은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정문탁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의견임에 분명한 다음 발언을 한다.

 "나는 그때(주: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있었던 원자탄 피폭) 좀 더 많은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두 발(주: 당시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로 정신을 차리기엔 일본인은 너무 교만하고 기억력이 좋지 않다. 저지른 짓은 다 잊고, 당한 일만 기억하는 아집은 뇌의 어느 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376쪽)

 이 부분을 읽고 임종욱이 순혈 아리안 족으로 독일 땅에서 태어나 1935년에서 1945년 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은 것에 진정으로 안도했고, 같은 이유로 1910년에서 1945년 까지 조선반도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 경찰에 복무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로서는 천만 다행이었으며, 1975년부터 79년까지 캄보디아의 권력층 바로 아래 행동파 책임자로 활동하지 못했던 것을 천우신조라고 여겼다. 뭐 이딴 자가 다 있는가. 20만 명의 일본인, 굳이 일본인이 아니라도 인간의 목숨이 그렇게 우습게 보인다는 거야? 그러나 더 이상 열을 내진 않겠다. 아침이라서. 나, 사람 됐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이 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비록 자신이 낸 책을 한 번 읽어보니 교정이 개판이라 백개의 단어에 육박하는 정오표를 따로 인터넷 책방에 깔아놓는 양심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것도 참 우스운 것이, 자기 책이 그렇게 소중했다면 책이 나오기 전에 교정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어야지, 다 나오고 이미 독자도 그걸 끝까지 읽었는데 그제서야 기껏 성의표시를 하고, 교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 책임이 아니라 출판사 교정 담당자 책임이다 이거지? 그것도 이해해주겠다. 책 나온 것이 기쁘고 즐겁고 우쭐하기 한량없어 더 좋은 퀄리티의 책을 발간하기 위해 교정을 본들, 틀린 단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말이다. 아주 전형적인 습작 작가의 행태.

 2권 100쪽 못미쳐 난 심각하게 고민했느니, 이걸 마저 다 읽어? 말어? 습작작가의 전형적인 모습, 기본이 안 된 증거들이 끊임없이 발견되는데다가  위에서 말한 원자폭탄 이야기가 거슬르기 한이 없었지만 역시 아까운 건 책값이었다. 그래, 책값은 비교적 저렴하다. 두 권에 2만원. 그것도 아까워 끝까지 다 읽었으나, 읽자마자 곧바로 '버릴 책들'로 구분해서 책꽂이에 꽂히지도 못하고 그냥 방 구석에 옆으로 쌓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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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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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아자르, 하니깐 생각나는 것이 1978년 김만준이 노래한 가요 <모모>와 이 노래의 주인공 모모가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서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소년 모모가 아니라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온 모모라는 거. 연애하던 아가씨한테 '모모'란 별명을 지어주었더니 좋아하더란 기억. 평생 저지른 바보같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약대 다니던 그 아가씨 놓친 일인데 물론 백퍼 경제적 이유로 바보같은 일이었다는 것이지만 하여간 그 아가씬 털이 많아 무릎 아래(무릎 위에 관해선 노 코멘트) 다리털이 피부에 밀착한 나일론 스타킹 때문에 옆으로 마구 누워 있는 건 물론이고 일부는 스타킹을 뚫고 비죽 나오기도 해서 털이 많다는 의미로 '모모' 즉 우리 말로 '털털'이라고 별명을 지었다는 걸 무슨 심사인지 하루는 그녀에게 알려주었고 하마터면 그날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도 하필이면 약학과 재학중인 아가씨가 어느날 시침 뚝 떼고 극미량의 시안화칼륨을 내 소주잔 주둥이에 싸악, 발라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간혹가다가 으드득 몸을 떨기도 했다. 아, 물론 조금 과장해서 그랬다는 거다.

 당시엔 에밀 아자르가 세계적으로 문제적인 작가 로맹 가리와 동일인인지 아무도 몰랐고, 나도 여태까지 몰랐다가 어제 <가면의 생>을 표지 앞날개에 나온 연표를 보고야, 아 그새끼가 이새끼였어?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알았다. 전혀 몰랐던 쇼킹한 이야기를, 사실이 밝혀진 후 36년 반이 지나 알아채면서도 이렇게 험하게 욕한 이유는, 대한민국의 숱한 독자들이 <가면의 생>을 느므느므 좋은 작품이라고 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도무지 이 작품에 동의하지도 못하겠고 공감하지도 못하겠고 만일 문학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 성과가 무언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서이다. 이게 소설이야? 암, 소설은 소설인데 진짜 잘 쓴...., 하이고 내가 뭐라고 위대하다고 알려진 한 작가가 쓴 소설을 잘 썼네 아니네 까탈을 잡고 지랄이냐고 물으신다면 차마 어떻게 여쭈어야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쓰는 독후감이니만큼 전적으로 내 의견을 말씀드리면, 한 우울증 환자의 사색과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데에 대한 변명,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적 애로사항 같은 걸 늘어놓은 넋두리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써 갈겨놓은 거다.

 그런 의미에서 썅, 아마추어가 겁없이 주둥이를 한 번 열어보자면 이 소설은 전립선 비대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에밀 아자르가 이미 죽어버린 로맹 가리의 시체 위로 힘없는 오줌줄기를 졸졸졸졸졸졸 흘려놓은 자국이다. 방광은 터질 거 같이 부풀었는데 그만큼 비대해진 전립선 때문에 그치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게 그냥 질질 새서 흘러나오기만 하는 에밀 아자르의 가느다란 오줌줄기(漏尿)가 이미 죽어버린 스스로의 몸뚱이 위로 떨어지는 낙루를 댓 발자국 가량 떨어져 지켜보는 일, 이게 이 책을 읽는 일.

 적극적으로 비추! 이름 값에 속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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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0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모(毛毛) 푸하하하하하. ㅋㅋㅋㅋ 아침부터 터졌습니다.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마음산책 시리즈는 작품 편차가 크더라고요. 어떤 것은 좋은데, 어떤 것은 왜 읽었나 싶고. 암튼 전 로맹 가리 최고 작품은 아무래도 <자기 앞의 생>인 것 같습니다...

Falstaff 2017-02-06 10:43   좋아요 0 | URL
^^;;
제가 그렇게 살았습죠.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