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26
벤 오크리 지음, 장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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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누리 없이 제 사이즈의 반양장본 74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 문학과지성, 이럴 때 특히 마음에 든다. 이거 다른 출판사가 찍었으면 얄짤없이 두 권 제본이다. 보흐밀 흐라발이 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요새 장안의 종잇값을 올린다는 얘길 듣고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 주문해서 샀더니 문학동네 이 썅노무간나들, 책 뒷편 해설까지 다 합해서 144쪽, 손바닥에 탁 들어오는 작은 판형, 듬성듬성하게 편집해 글자가 있는 공간보다 없는 곳이 더 많아 종이가 아깝기까지 한 것을 정가 12,000원 때려놨다. 이게 책값이냐? 21세기엔 비단 위에다 글씨 새겨서 파냐? 요새 출판계 어렵다고? 그래서 책값 마구 올리면 되겠어? 난 니들보더 더 어려워! 잡것들아 정신차려. 팍 책 안 사고 줄창 도서관만 다닐까보다 썅. 아침부터 욕 못하는 사람더러 욕하게 만들어!

 하이고 또 이야기가 경상남도 삼천포시로 빠졌는데, 문학과지성에서 찍은 이 책도 뭐 그리 싼 편은 아니라서 해설까지 750쪽에 정가 22,000원, 구입가 19,800원. 한 번 사면 좋건 싫건 하여간 다 읽어야하는 통권이니 잘 생각해보시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네 주머니 가비야운 것들의 지혜일지라. 왜 이렇게 열을 내냐 하면, 올해 들어 읽을 책들을 지금 와장창 사고 있는 중이라 그런데, 1월 둘째 주부터, 그러니까 지난 주에 사들인 책이 100권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책 한 권 값이 아쉬워서 그런다. 내 작은 마누라 이름이 최순실이 아니잖여. 참혹한 가정경제에 돈 만원이 어딘디! 돈 얘기하니까 아침부터 사람 구질구질해지기밖에 더하는가. 이걸로 뚝 그치고 다음 문단부턴 본론으로 들어가서....

 벤 오크리는 축구 잘하는 아프리카 나라 나이지리아 출신의 똑똑한 인물로 일찌기 공부잘해 국비 장학생 자격으로 런던에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이다. 이 사람이 일찌기 19세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나이지리아의 문호 치누아 아체베의 뒤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의 조국 나이지리아에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 뻘인 치누아 아체베(가 쓴 그의 작품들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 <신의 화살> <더 이상 평안은 없다>)와 굳이 비교를 한다면, 물론 그의 조국 안에서 보는 것과는 당연히 다르겠지만, 식민/탈식민주의는 잔재밖에 남지 않았고, (서평과는 다르게 책의 내용에서)백인에 의한 수탈도 지극히 미미한 상태인 대신에 아체베도 물론 아프리카 토속의 환상, 민속, 샤머니즘 등을 사용했지만 아체베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게 토속신앙과 주술적 입장을 차용했으며, (지극히 당연하게) 탈식민 이후 극심하고 불안한 정권다툼 속에서 날이 가면 갈수록 찌그러지기만 하는 인민들의 삶과 권력에 기생해가는 인간벌레의 모습을 중요하게 그려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설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프리카 토속신앙의 하나인 혼령아이. 삶과 죽음을 자유롭게 왔다리 갔다리하는 능력이 있는 대신 가랑이 사이에 털 나기 전에 죽어야 하는 운명의 아이들을 일컫는데, 그 혼령 아이의 시각으로 무려 본문만 740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엮어나가는데, 솔직히 처음엔 좀 솔깃했다가 하도 자주 귀신과 도깨비와 중음신과 이것들의 잡탕밥이 출현해 나중엔 도무지 독자를 설득해낼 힘까지 잃어버릴 지경으로 길게 이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그건 읽는 사람이 도저히 나이지리아 정서를 갖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그게 어디 독자 잘못이야?

 벤 오크리는 본문은 아니고 책 어딘가에서 이제 더 이상 리얼리즘만 가지고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쓰기 힘들기 때문에 토속신앙적, 말이 좋아 토속신앙적이지 쉽게 얘기해서 미신적, 그리고 환상적, 몽환적, 다른 얘기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첨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언급에 대하여, 그가 사는 곳에서 한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아시아 변방의 한 독자로서 하고잪은 말이 있다면, 충분히 그의 말에 동의하고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지만 그럴 거면 나이지리아 안에서만 책 팔아먹지 그랬어? 그래도 이 책이 내가 신뢰하는 몇 안되는 문학상인 맨부커 상을 1991년에 받아먹었는 바 잉글랜드 사람들이 아프리카 토속신앙에 매료되는 걸 보니 혹시 축구 잘하는 인간들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거 아닌가싶기도 했다. 물론 잠시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 여기서 넘겨짚는 것이 특기인 내 생각을 굳이 밝혀보라고 말씀하셔서 하는 얘긴데, 혹시 영국사람들이 자기들이 수십년간 식민지배했던 나이지리아한테 자꾸 뭔가 캥기는 게 있어서 괜히 더 친한 척 하느라, 아 다 이해해, 너네들 하는 거 충분하게 이해하는데 다만 요구사항은 들어줄 수 없어, 이런 척하느라고 그런 거 아냐? 식민 모국 애들은 식민지 사람들의 애로사항은 절대 알 수 없는 거거든.

 여태 내가 줄줄이 헛소리만 늘어놓은 거 같지만 사실 할 얘기는 다 했다. 이 책이 한 혼령 아이의 시선으로 써 있다는 거. 혼령 아이가 어떤 애를 얘기한다는 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아이의 시선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식민 후 극도의 혼란기에 인민들이 이리 치고 저리 치는 모습, 와중에 빌붙어 삶을 누리는 기생충들에 관해 쓴 소설이라고. 아, 이만하면 얘기 다 해준 거 아냐? 으떠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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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1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요즘 문학동네/창비/민음사 등등 한 두번 뒷통수 당한 게 아니에요. ㅠㅠ 특히 문학동네... 서점에 안 나가고 인터넷으로 주문했다가 흐라발 책처럼 황당한 책 받았던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런 책은 문고본으로 만들어서 5천원 정도 하면 딱일 텐데. 에효... 그나저나 와, 1월에만 100권을 사셨다고요! 부럽습니다!!! 저는 이리저리 머리쥐어짜서 겨우 5만원어치 사고도 좋아라 하고 있었는데 ㅋㅋㅋ 폴스타프님 책장 구경해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언제 한번 사진이라도.. 굽신굽신) 이 책도 보관함에 일단 넣어둡니다!

Falstaff 2017-01-17 12:40   좋아요 0 | URL
그죠, 그죠, 그죠?
지난 주에 열받아 아주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 창비에서 나온 아모스 오즈의 <숲의 가족> 받고 욕 딥다 해줬는데 참 나... 정말 도서관 이용하는 수가 있는 줄 짜식들이 알기나 할지 모르겠어요.(100% 농담 비슷: 똑똑한 사람 가운데 출판업계에서 장기근속하는 사람 못봤음!)
1년에 두번 정도 책을 많이 사는데 이번엔 1월이 걸렸네요. 작년엔 2월이었는데요. 한 대여섯달 읽을 요량으로 사는 겁니다. 자꾸 책방 기웃거리기 싫어서요. ㅎㅎㅎ
책장은 별거 없어요. 책 좀 많은 인간들이 늘 그렇듯 무지하게 지저분하고 정리정돈 안 되어있고 뭐 그래요. 먼지도 많고 그리 좋은 취미는 아닌 듯합니다. ㅠㅠ
 
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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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전에 창비에서 나온 그의 <암고양이>를 비록 짧디 짧은 소설일지라도 무지하게 지겹게 읽어서 이번에 <여명>을 한 번 더 읽음으로, 다시는 이 여자의 소설은 가까이 하지 않겠다, 라거나, 그래도 콜레트의 이름이 가히 허명이 아니니 눈에 띄는 족족 읽어줘야겠다, 라는 결정을 보려 읽었는데, 콜레트를 비롯한 서술자의 섬세한 감각과 기분의 좌우, 심상의 움직임,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심리적 줄다리기, 기타 등등 하여간 스토리 라인은 거의(전혀) 없고 심리적 묘사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짧은 외국 소설의 경우, 그걸 번역한 국어로 읽으려면 ① 번역자의 감각 ② 읽을 당시 독자의 컨디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콜레트의 소설들이 눈에 띄면 적어도 하나 정도 더 읽고나서 또 그의 작품들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굳혔을 뿐이다, 라고 쓰면, 아쭈, 꼭 내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거 같다.

 그렇다고 물론 다른 소설이 뭐 또 있나, 궁금해 인터넷 책방을 여기저기 뒤질 정도의 매력까진 아니다. 하지만 더욱 솔직히 얘기해서 <여명>을 매우 독특한 소설로 읽었다. 얼핏 봐서 작가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걸 우린 역자 주석을 통해 당시 그가 만난 인물들의 정보, 그와의 관계 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콜레트가 쓰고 있는 말을 믿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지만 사실을 알고보면, 이럴 때 '몽땅'이란 말을 쓸 수 없는 건 적어도 상황이나 등장인물의 실명 같은 건 적어도 다 사실이기 때문인데, '거의' 다 새빨간 거짓말, 그러나 법적으로 허용되는 소설적 거짓말, 우리가 흔히는 이야기하는 허구를 통해서, 소설문학이 신화, 전설, 영웅, 왕가, 귀족, 역사, 집단, 개인의 스토리를 거쳐 드디어 아무런 내용이 없어도 훌륭한 소설작품이 될 시점에 이르러, 나로하여금 충분히 콜레트의 필력에 갈채하게 만든다. 더구나 콜레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도니 콜레트는 그의 사랑을 구현하는 데 있어 오직 하나만 중요하게 여기는 개인주의자인 것이 기뻤다. 자신의 감정.

 그래, 니미, 사랑을 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 말고 뭘 더 따지는가. 지위, 재산, 학력, 나이 차, 국적, 종교, 직업, 성별. 이것을 다 극복하고 연인이 되고 동거인이 되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 잘못 가운데 하나인 결혼을 통해 배우자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고통을 교환하는 거, 그게 사랑이지 뭐 별건가. 왜 이러셔, 다들 해보셨잖아.

 콜레트 식 사랑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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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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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책 읽었으면 꼭 독후감 써야 하는 것이, 써 버릇해야 하는 것이, 여태까지 이 책을 사놓고 책꽂이에 꽂아둔 다음 읽지도 않고 마치 읽은 듯한 느낌으로 근 육칠년 세월 묵혔다고 생각했다가, 그것도 친애하는 서재친구 잠자냥 님이 쓴 서평을 보고도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크게 반성을 한 후, 진짜로 읽겠다고 큰 마음 먹고 책을 딱 펼치는데, 새 책 사서 첫장을 넘기는 그 기분 아시지? 특히 열린책들 양장본 같은 경우 딱딱한 첫장이 삐거덕 거리면서 넘어가는 기분, 이렇게 얘기하면 꼭 변태 같겠지만 마치 세상의 첫날 드디어 불 끄고 더듬더듬 거리면서 살짝 공간을 넓히는 그런 기분, 뭐? 진짜 변태라고? 중요한 얘기하는 순간이니 그딴 건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첫문장을 딱 읽었는데, "일이 끝나고 급료로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에 갔다." 어, 이거. 읽은 거다. 그러니 여지껏 사놓고 읽지 않았다고 반성했던 건 전부 헛지랄이었다. 내가 원래 책을 얌전하게 읽는 습관이라 완벽하게 새 책인줄 알았다. 한 번 벌렸던 양장본의 하드커버도 꽉 끼는 책장 속에 오래 두면 다시 처음처럼 꼭 다물어지는 모양이다. 거 사람의 가랑이하고는 좀 다르네. (이쯤에서 난 변태성에 관한 번민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메모 형식의 아주 짧은 자국으로라도 독후감을 써야 하는 거다. 이런 지랄 하지 않게. 뭐 하긴 이래서 좋은 책 한 번 더 읽는 것이긴 하다.

 내가 읽은 하인리히 뵐은 순서대로 세권.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책들의 특징? 농담부터 하자면,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사람이 번역했고, 대체로 책 제목 짓기에 곤란을 느끼는 듯 상당히 제목이 긴 편이다. <카탈리나...>에선 무소불위 제 4의 권력인 매스컴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성을 보며 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어릿광대..>를 읽고는 단박에 뵐의 팬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어릿광대..>에 얼마나 빠져버렸는지 이 <그리고...>는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한 처지가 됐는데 그건 이 책의 분량이 너무 얇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내렸는데 암만해도 핑계 혹은 변명 아냐? <카탈리나...> 역시 아무 독후감도 쓰지 않았지만 매스컴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아마 카프카의 <소송>과 관련하여 생각했었기 때문인 거 같아 아직 잘 기억하고 있는 반면, <그리고...>는 프레드와 아내 캐테의 가난한 생활과 그 속의 사랑, 즉, 한 마디로 궁상스런 장면이 뇌속에서 특징지워지지 않아서 그랬던 거 같다.

 다시 읽어본 <그리고...>. 새삼스레 깜놀. 본문이 230쪽 밖에 되지 않지만 읽으면서 쓸쓸함과 안타까움을 공기와 함께 내내 허파에 담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뵐의 글. 전쟁 후 자신이 이렇게 살았었을까? 그래서 곤궁과 그것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그럼에도 넘쳐흐르는 가족애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갈증하고 천천히 지쳐버리는 사랑과 가족애. 전쟁에 참전했던 자, 그것이 전쟁을 겪음으로 해서 유발되었는지 전쟁이 아니더라도 주인공 프레드 안에 이미 내재해 있었는지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혈관을 따라 흐르는 노쇠한 허무와 회의와 부적응과 무기력과 절망의 피. 도무지 보이지 않는 희망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마저 해체의 순서를 밟을 수밖에 없는 피곤의 절정 속에 프레드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10 마르크를 빌려 화주를 마시고 버튼을 당겨 핀볼 게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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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13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래서! 이미 읽으신 작품이었던 것이군요! 하하하. 맞습니다. 그래서 리뷰나 최소한 100자평이라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나저나 저도 폴스타프님과 똑같은 순서로 뵐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ㅎㅎ 왠지 반가워서 ㅋㅋㅋ 앞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운전 임무를 마치고>를 읽어볼까 합니다.

Falstaff 2017-01-16 09:09   좋아요 0 | URL
제가 이렇게 정신없이 삽니다. ㅋㅋㅋ
책세상에서도 뵐의 작품이 나왔군요. 저도 관심 갖고 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낙원의 이편 펭귄클래식 1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화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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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뭐해먹고 살까, 깊게 고민하다가 사실 할 줄 아는 것이 글 쓰는 거 뿐이라 프린스턴 다닐 때 써놓았던 잡문들을 모아 순서대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엮어보니 거 참 그럴싸한 성장소설 한 편이 되는 거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선수이자 이후 등장하는 비트세대의 아버지 격인 천재작가 피츠제랄드의 첫 장편소설이며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낙원의 이편>. 혹시 아는가, 당신 또한 글쓰기 솜씨에 있어 후대의 전범이 될, 그러나 아직 이 후진 세대엔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한 작가 지망생인지. 그러니 여태 써놓은 것들이, 당신이 지금 새삼스레 읽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어 차마 불태우지 않으면 참기 힘들 지경이라도 절대 delete 버튼 누르지 마시라. 어느날 때가 되어 그것만 엮어놓으면 군데군데 짜깁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억의 인세가 굴러들어올지. 이 외람된 독자가 당신의 행운을 진정 바라고 있음을 기억하시라.

 혹자는 <낙원의...>를 자전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피츠제랄드가 아마 44살에 알콜의존증에 이은 심장마비로 죽었는 바, 명색이 '자전'소설이라면 적어도 환갑은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 것이 겨우 24세. 에잇, 그럼 내가 위에서 말했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지. 옛 선배들은 보통 일찍 죽어서 그런지 다들 일찍 까졌다. 아아, 좋아 좋아, 좋은 말로 해, 지금보다 훨씬 조숙했다. 책의 주인공 에이머리 블레인의 7할은 스콧 피츠제랄드인 것처럼 보이고, 그 나이에 벌써 대학졸업, 1차대전 참전, 한 번의 취직과 사표, 네 번의 연애, 친구 네명의 죽음(1명은 사고사, 1명은 행방불명, 2명은 전사) 참 복잡한 세상을 살았다.

 허위의식과 사치와 방만과 게으름과 가톨릭스러움과 오만의 집합체인 언짢은 의미로써 부르주아 정신의 정수를 지닌 어머니 비어트리스(아, 이름 정말 멋있다) 블레인의 오소독스한 교육환경 하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의 주인공 에이머리는 이후 기숙학교와 프린스턴을 거치면서 책의 1부 제목이기도 한 '낭만적 에고티스트'로 성장한다. 근데 에고티스트, 이기주의자이긴 한테 낭만적 이기주의자라. 어머니로부터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을 받았기는 한데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선 (아메리카를 포함한) 서양에는 바야흐로 사회주의 혁명의식과 1차대전을 향한 모종의 불길한 활발, 개별감정의 무거움 등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냉풍과 열풍이 교차하듯 변혁기를 맞아 이기주의자이긴 하지만 어머니 비어트리스 시절과는 달리 변혁으로 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낭만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 시절에 의하여 빅토리아 시대와 시대의 정신을 옥죄고 있던 볼트는 이미 풀어져버렸던 거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에도 정신적 환절기가 닥치고 하필이면 딱 그때를 골라 청춘시절을 보내게 된 피츠제럴드와 일당들. 한편으론 불우하고 한편으론 모든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도 온갖 변화에 직접 참가하게 되지만 경험이란 것이 늘 그렇듯 겪었다 해도 남은 것도 없고 시절에 내가 남긴 것도 없으며, 오직 청춘만 소비된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걸 자각하게 된 작가 그리고 에이머리 블레인. 그들을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칭한다.

 선량하기만 하고 전적으로 자기중심적, 극단의 에고티스트였던 어머니 비어트리스로부터 동전 몇 푼만을 상속받고 이제 주머니에 겨우 24달러만 남아 스스로가 가난의 위치에 떨어졌을 때,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선수 페츠제럴드, 그가 뉴욕의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한다.

 "에이머리는 이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중략) 오 헨리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도 낭만과 연민과 사랑과 증오를 찾아냈다. 에이머리 눈에는 오로지 천박함과 육체적인 더러움과 어리석음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자책이란 것을 몰랐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감정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법이 없었다." (386쪽)

 자신이 가난으로 떨어진 다음에도 그에게 가난은 오직 천박함과 더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스스로 천박하고 더럽고 어리석게도 가난에 빠져들었음에 불구하고 그는 자책하지도 않으며, 그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감정. 진퇴양난의 갈림길에서 그는 잠시 앉아 있는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때쯤 에이머리 혹은 피츠제럴드가 이 책을 썼을 거라고.






* 근데 써놓고 보니까, 내가 도대체 뭘 주장한 거야? 난필증이야? 쪽팔려. 그래도 안 지우고 내비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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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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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초반에 이 책을 사두고(물론 표지는 이 그림이 아니다) 여태 읽었는줄 알았던 작품. 하, 세상에. 그냥 책꽂이에 있기만 했는데 당연히 읽었다고 치부해 둔 책이 이거 말고도 모레쯤 독후감 쓸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도 있다. 헤까닥! 도무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귀찮음을 무릅쓰고 책을 꺼내 들었더니 전혀 들춰본 자국이 없는 거다. 근데 이런 책의 공통점이, 대단히 좋은 평가를 얻는 책들이라는 점. 그리하여 진짜로 읽어보지도 않고 나도 이 훌륭한 책들을 (당연히) 읽어봤겠지, 이딴 식으로 여기고 넘기고 간 거 아닌가 싶다.


 다이 허우잉을 읽고자 하신다면 <시인의 죽음>, <사람아 아, 사람아!> 그리고 <허공의 발자국 소리>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난 결론적으로 3-1-2 순서로 읽은 셈이 됐지만 앞에 적어놓은 순서로 보는 것이 중국 현대사 최고의 격랑일 수 있는 문화혁명과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 허우잉의 글은 다분히 연애소설이고 또 그 연애와 사랑이 시대의 어려움을 오랜 세월 거쳐가며 서서히 사랑의 결정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가 긴 소설을 통해 우리 앞에 내놓는 사랑의 모습은 보석이 된다. 남루하지만 단단한 시대의식을 공감하는 지식인 남녀가 문화혁명과 그 속에서 돋아나는 허위의식, 기회주의의 역류를 힘겹게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공감과 애정을 북돋는 건강한 사랑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결코 상황과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희망과 이상적 사회주의의 내일을 확신하는 그들의 공감대는 이 책에선 인본주의(휴머니즘)이라고 말 할 것이다.

 격심한 문화혁명의 모습을 먼저 그려본다. 작가의 전작(그러나 발간은 이 작품보다 한 해 늦은 <시인의 죽음>)이나 위화의 <형제>의 장면들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야수상태에서 벌어진 인간모독. 전체주의에 절대 반대하는 공산주의에 의하여 벌어진 변태적 전체주의의 와중에서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받은 사람은 대다수의 인민들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만 존재하게 되고, 심지어 친척과 가족의 테두리에서도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 <사람아....>에서도 마찬가지. 주인공 쑨위에(이후 "쑨")은 소꼽친구이자 남편 자오져우한(이후 "자오")에게 이혼을 당한 채 모진 세월을 오직 혼자의 힘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세월, 젊은 시절에 쑨을 짝사랑했던 허징후(이후 "허")는 문화혁명 초기에 비판을 당해 혹독한 시절 동안 신분증도 없이 만리장성 노동판을 포함해 전국을 누비벼 험한 생활을 거치다가 돌아와 해방조치를 맞는다. 거칠게 말하면 쑨-자오-허 이들을 둘러싸고 20년 만에 다시 복잡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연애사건을 독자의 가슴에 한없이 호소하는 건 이들이 겪어온 문화혁명과 그 이후 시절을 만나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표변해버리는 인간들의 군상과 달리 혁명 전이나 도중이나, 혁명이 끝나고나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의지를 굳건하게 지키는 인간들의 만남이 오히려 역경을 거쳐가며 승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쑨-자오-허가 만드는 사랑의 트라이앵글의 결론에 관해선 절대 이야기할 수 없는 건 물론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것은, 다이 호우잉, 다른 건 모르겠고 그가 글 속에서 엄정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반듯한 사랑, 그건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건강하다는 것. 게다가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만들어내는 (찍어내는?) 소설에서 가끔 보이는 생경한 커플들, 그들이 누리는 사랑에 대하여 단 한 번의 회의도 없고 반성도 없으며 과거를 돌아보며 혹시 있었을 오해의 여부에 관한 심사숙고도 없는 그런 무대뽀 사랑, 그런 무대뽀 식 운동의 고양, 무대뽀를 능가하는 투쟁은 다이 허우잉의 글 속에선 없다.

 참 아쉬운 건, 그가 환갑상還甲床도 받지 못할 정도로 명이 짧았다는 거. 한 십년만 더 살았더라도 중국 현대문학에 그가 뿌린 자양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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