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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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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얘기했던 랄프 엘리슨도 똑같은 제목 Invisible Man 으로 소설을 썼다. 물론 투명인간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르다. 랄프 엘리슨은 1940년대 미국에서 흑인의 지위와 존재의 의미에 관하여 서술하며 흑인은 인간은 인간이로되 백인에겐 전혀 지위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고 따라서 아무 의미도 없는 투명인간이란 의미로 사용한 반면, 1897년에 발간한 웰즈는 물리학 가운데 광학의 경우 빛의 굴절과 반사로 인한 시각적 인식을 기초로 사람 몸에 화학적 처리를 하여 모든 빛을 그냥 통과시킬 수 있게 세포를 조작, 실제로 모든 빛을 통과하는 투명인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19세기 초반 21세의 꽃다운 아가씨 메리 셀리가 창작한 괴기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궤를 잇는다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터.

 이렇게 얘기하면, 그리고 일찌기 여러가지 만화나 영화를 통해 좀 희화화한 투명인간을 하도 많이 봐서(나만해도 최근에 본 투명인간이 숀 코넬리가 주연을 맡은 <젠틀맨 리그>이고 가장 오래된 것이 소년중앙의 만화를 통해서였다), 이 책을 뭐 그냥 그런 동화나 청소년용이라고 가비얍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천만의 말씀. 아니나 달라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소설이란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는 건 아니고, 만화나 영화를 통해서 볼 때와 다르게 활자를 읽으면서는 생각해볼 만한 것이 있다. 나하고 다른 거. 그것에 관하여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적으로 간주하는 현상. 거기다가 내가 속한 진영이 절대 다수이면? 그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동성애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거의 대부분이 이성애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아주 불쾌한 존재들이고 그들이 저지르는 사랑의 현상은 폭력적이며 더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불결한 것이며 그 존재들과 악수하는 거 하나 가지고도 동성애라는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위험스럽고도 부도덕적인, 잘못 태어난 비인간非人間이 되버리는 거다. 동성애자 말고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우리 사회로 일하러 또는 살러 온 사람들, (개인사 하나 포함시켜도 뭐라 하지 않겠지 뭐) 기업집단에서 소수의 나이 많은 직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 책 제목처럼 투명인간 취급 받는 직장인 무리, 도시빈민, 유기자녀 기타등등.

 투명인간으로 몸을 바꾸는 의사이자 물리학자 그리핀이 원래부터 성격이 좀 괴팍했지만 그렇다고 병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일반사회적 견지로 받아들여질 수준의 충동성과 남향성(문제적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 두 가지)을 가진 천재이지만 그의 모습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그리핀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위협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사람들은 투명인간을 공포스러워하여 집단적 피해망상에 빠질 수밖에 없고 드디어 집단 사냥에 나서게 된다. 처음엔 그리핀의 심성 속에 있던 작은 폭력성도 인간들에 의하여 적대적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조금씩 커지다가 원래부터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엄연히 있다는 진리에 입각해서 크레센도 크레센도 몰토 크레센도 폭력의 충동이 지수함수를 그리게 되어 스스로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로 변화하고 만다.

 이러한 투쟁과 절망과 파멸의 전경이 책에 다 나와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른 방면으로도 볼 수 있는데, 난 이 방법이 매우 마음에 들지도 않거니와 참 재수없는 감상이라고 여기는데, 그건, 내 몸이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아무런 도덕적 조심성 없이 행동할 수 있고, 거의 대부분 완전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며, 이런 것들을 다 합쳐 무한 자유를 보장하는 선망의 눈길이다. 난 안다. 누군가는 이런 시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걸. 그러나 당부하노니, 그렇게 살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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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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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제임스가 <한 여자의 초상>에서는 주인공 이사벨 아처가 부자한테 시집간 이모 잘 둔 덕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덜커덕 7만 달러, 2017년 현재 한국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51억원을 멋쟁이 이모부한테 상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잘생긴 거 빼고 완전히 별 볼일 없는 남자 만나 굴곡을 겪는 이야기를 하더니, <아메리칸>에서는 크리스토퍼 뉴만이란 서민 출신의 미국인을 등장시켜 30대 중반에 세계적인 밀리어네어로 성공하고선 더 이상 돈벌이에 염증을 느껴 유럽일주에 나서 구대륙의 귀족들 알기를 갑순이 코딱지처럼 한다는 설정을 만들어놨다. 직설적인 내 감상을 먼저 얘기하자면, 오직 <한 여자의 일생>과 <아메리칸>에 국한한 헨리 제임스는 진짜 밥맛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가 ① 자신은 개뿔도 한 일 없으면서 물총 한 번 잘 맞아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여 세상 어려운지 모르고 평생을 사는 거 ② 우리나라 독고탁 처럼 어느날 잃어버린 아버지(또는 친척)이 돌아와 거금의 유산을 상속해줘 한 순간 떼부자가 되거나 생각도 않던 신분상승을 이루는 거 ③ 물론 자신의 굉장한 노력을 수반했겠지만 전혀 가능하지 않은 행운을 등에 업어 이른 나이에 주체할 수 없이 돈을 벌거나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력을 틀어쥐는 거, 뭐 이런 건데 그럼 내가 헨리 제임스의 두 작품을 밥맛이라고 하는 걸 이해하실 수 있을 터. 게다가 <아메리칸>의 주인공, 우연히 이름이 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같은 크리스토퍼 뉴만이란 작자가 유럽에 가서 오직 교양있고 품위있고 잘 생긴 수준은 되고, 거기다가 상당한 계급의 아가씨를 골라 장가들기로 하다가 친구 마누라 소개로 그런 여자를 발견해 온갖 방해를 무릅쓰면서 결혼을 향해 돌진하는 이야기. 참 미친다. 연애소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백만장자 미국인의 돈지랄로 시작하는 500쪽을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관통하는 건 돈의 위력과 유럽 귀족계급의 권위의 극한대립이다. 제임스의 세월은 당연히 부르주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테니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선수이자 주인공인 뉴만은 원래부터가 직선적이고 정의파에다가 일체 꾸밈없으며 사해평화와 만민평등(물론 일본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지만) 의식에 충만한 의리의 돌쇠이고, 800년 귀족 벨가드 가문은 폐쇄와 권위주의와 가식과 부정과 비노동과 기타등등의 악덕을 총칭하게 만들었다.

 신구 세력, 아메리카와 유럽의 충돌을 뉴만이란 작자 장가드는 일화로 조망하는 제임스의 솜씨야 일단 탁월하다고 아니할 수 없으나 나 읽기에 재수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쉼없이 펼쳐지는 뉴만의 돈지랄이 나중엔 진짜 하품나고 한심하고 짜증난다. 소위 자수성가한 인간이 돈지랄을 해? 그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 다 아시지? 특급호텔 일반실에 묵는 록펠러와 로열 스위트에서 자빠져 자는 록펠러의 아들 이야기. 그게 진실이여.

 다른 얘기 하지말고 책 <아메리칸> 이야기나 하라고? 절대 못한다. 연애소설의 스토리에 관해선 셋 중 하나. 온갖 역경을 뚫고 결혼에 성공해서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거하고, 결국 큐피드의 화살이 비껴나가 눈물이 앞을 가려 에이 썅 이따위 세상 더 살아 뭐하나 부둥켜 안고 물에 빠져 죽는 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만 간직한채 남은 세월 꿋꿋하게 살아가는 거. 근데 그거 가르쳐드리면 책은 뭐하러 읽어? 그러니 못 가르쳐드리지. 이해 해주셔.

 하나 더. 역자 최경도. 앗싸 웃겼어. 요즘에 伊藤博文을 '이등박문'이라고 읽는 사람 있으셔? '이토 히로부미'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이 책에서 악역을 맡은 귀족 집구석 '벨가드'가家를 진짜 '벨가드'라고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꼭 이등박문이라고 써놓은 걸 읽은 거 같은 느낌. 처음부터 그랬는데 소설 속에서 뉴만하고 좋은 벨가드가 오페라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출연진에 절리나라고 있는 거다. 절리나. 절리나. 이게 누구? 일단 아래 링크한 거 들어보셔.

 

 

 노래가사가 처음부터 이렇거든. Batti, batti o bel Masetto. La tua povera Zerlina 정말로 Zerlina가 '절리나'도 들리세요? 난 암만 들어도 '체를리나'라고 들리는데. 이거 말고도 여러군데 있는데 대표로 하나만 꼽아본 거다.

 이거 읽고 에밀 졸라의 명작 <제르미날: Germinal>을 '저미날'로 쓴 교양인이 한 명 있었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지 뭐야. 흐흐흐....

 


 

* 링크한 유툽은 동영상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으나 암만해도 노래 예쁘게 부르는 루치아 폽이 훨씬 좋아서 위의 것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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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0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등박문 ㅋㅋㅋ 그 악명 높은 민음사 판 <나사의 회전>을 번역한 사람이군요! ㅋㅋㅋ

Falstaff 2017-01-06 08:24   좋아요 0 | URL
아, 그래서 제가 민음사 <나사의 회전>을 그리 재미없게 읽었군요! 벤자민 브리튼이 만든 으스스한 오페라를 먼저 보고 얼른 사서 읽었더니 이거 참, 원작이 훨씬 재미 없는 거예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3-17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으려고 하다가 댓글들 보고 안 읽기로 했습니다. 나사의 회전 악명이 높은데 같은 번역자인지 몰랐네요.

Falstaff 2023-03-17 21:0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근데 이 작품은 제임스 가운데서 재미있는 축일 겁니다. 다른 역자를 함 찾아보셔요.
 
루이 랑베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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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새해들어 처음 읽은 책. 오노레 드 발자크가 쓴 <루이 랑베르>. 그의 필생에 걸친 인간극』그러니까 내가 읽은 발자크 가운데 제일 재미없는 책. <나귀가죽>에 이은 철학연구 작품이라고 문학동네가 책소개를 해놓았다. 이제 알았네, <나귀가죽>이 철학연구 작품이란 걸. 여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줄 알았지 뭐야. 근데 <루이 랑베르>는 확실하게 철학연구란 자구가 어울린다. 19세기 초반(1833년)에 출간했으니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라 함은 당연히 신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술, 과학, 그리고 천재 루이 랑베르가 소년시절에 집필할 뻔했던 '의지'등 인간의 신념에 관한 것. 그리하여 책에선 쉼없이 형이상학적 논의를 시도하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속물인 나는 언제쯤이나 허리하학이 등장하려는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도무지 발자크 같지 않음. 독일 작가들이 썼으면 딱 어울릴 텐데 말씀이야.

 19세기 초반에 벌써 이상한 전통이 세워져, 젊어서 미치지 않으면 천재가 아니어서, 루이 랑베르 역시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날이 새파란 면도칼을 꺼낸 다음, 난데없이 아랫도리를 훌렁 까더니 오른 손에 든 날이 새파란 면도칼을 번쩍 들어, 27년 동안 아랫도리에 거꾸로 매달려 흔들흔들, 이 다리에 얻어맞고 저 다리에 얻어맞기만 했던 불쌍한 놈을 싹둑 잘라버리려는 순간, 기겁을 한 삼촌이 잽싸게 달려들어 이 창백한 지식인의 허무맹랑한 거세미수를 종결짓는다. 한 마디로 제대로 미친 것.

 미치긴 미쳤는데 그냥 미치기만 하면 그게 천재가 미친 것이 아니라서, 당연히 루이는 미친 상태가 신계와 천계와 우주계 등의 인간 관념의 모든 것에 통달한 상태로 묘사를 한다. 누가? 발자크가.

 내가 읽어본 중에서 말하자면 니체가 어려운 것이, 다른 책들은 서론 본론 결론 이딴 식으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가며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짧은 단편의 잡글 비슷한 것들을 나열해갈 뿐 자신이 지금 어떤 사상을 설파하는지 별로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발자크가 미친 랑베르를 통해 니체처럼 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 니체, 니체 하는데, 정말 그 사람 좋아들 하셔? 그럼 이 책도 재밌을지 모르겠네. 난 그 양반 잘 모르겠더라고.

 당신이 나 정도의 수준이라면 읽어봤자 별 재미 없을.... 아니, 재밌을 수도 있으나 하여간 난 추천하지 않을 것!

 아.... 2017년 첫날부터 이런 책이나 읽었으니 나도 참. 독서생활의 가장 막강한 적, 술. 올핸 술 좀 줄여야겠다. 맥주, 위스키, 중국 백주, 사케 기타등등 간혹가다가 마시는 것들은 전부 간식이라 생각해서 생략하고 2016년 한 해 동안 소주만 한 400병 이상 마셔 조진 거 같은데, 올해는 과감하게 200병 아래로 줄여봐야겠다. 더 이상은 쪽팔려 못살겠다.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 분리수거 할 때마다 수십병 씩 소주병이 쏟아지니 동네 창피해서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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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0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400병에서 200병 ㅋㅋ 술도 대단하시군요. ㅋㅋ 발자크 작품 가운데 가장 재미없다는 말도, 독일 작가들이 썼다면 어울렸을 거란 말도 깊이 공감합니다!

Falstaff 2017-01-04 11:22   좋아요 0 | URL
어제 두병 반 깠습니다(둘이서 소주 다섯병). 이번 주에 한병 반 남았습죠. 1년 52주, 50주로 잡고 1주일에 소주 4병 이상 마시면 절딴입니다. ㅠㅠ
 
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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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잇! 2016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이런 엽기라니.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참 잘 쓴 소설인 거 같다(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인 거 같다'라고 함은 내가 전적으로 아마추어 독자이기 때문임을 감안하십사 하는 마음에). 근데 왜 에잇! 이냐 하면, 그래도 엽기는 엽기다. 거 있잖은가. 많고 많은 생명종 가운데 하필이면 인간종으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체득한 바람(희망), 다른 건 몰라도 주검에 대해서는 경건해지고 싶고, 사실과 달리 지금 내 앞에 놓인 주검은 살아생전 그가 실제로 저지른 죄악이나 범죄의 양과 질보다 훨씬 선량했을 거 같고, 죽은 몸체 안에 있었을 영혼이란 것이 비록 뇌의 회백질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이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차게 식은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 불멸의 삶을 시작해야할 거 같고, 그리하여 전적으로 인간의 뇌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래서 실제로는 지구 40억년 히스토리 가운데 한 번도 있지 않았던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날개를 단 천사가 보필해 날아올라야 할 거 같은 그런 바람, 기대, 희망, 선의, 심지어 당연한 믿음까지. 이 책을 읽으면 초장부터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기대, 희망, 바람, 선의, 개뼉다귀 같은 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고 만다. 실제로 죽으면 만 24시간이 되기 전에 장례지도사의 손에 의하여 비싼 에틸 알콜 대신 공업용 메틸 알콜로 전신이 닦여지고, 얼굴엔 진한 파운데이션으로 죽자마자 생기기 시작한 죽음의 반점이 지워지고,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메틸 알콜을 흠뻑 적신 솜뭉치로 단단히 메꿔야 하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전에 몸에 쌓여있던 부산물 혹은 노폐물 등 하여간 몸 밖으로 내보내기로 약속되어 있던 모든 물질을,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줄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짐 크레이스는 이 책을 통해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굳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죽은 후에 관한 모든 진실을, 아 썅, 다 까발려버린다.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초로 또는 갱년기의 부부가 자신들이 30년 전에 처음으로 성적으로 관계했던 인적 드문 해변의 풀밭으로 찾아가 대낮에 또 한 번의 섹스를 나누고자 한다. 근데 나이 먹어 쉬운 일이야? 남자는 흐물흐물 영 힘이 없고, 여자는 바짝 마르고, 그게 인생인 걸. 불쾌까지는 아니고 유쾌하지 않은 수준의 부부관계가 끝났으면 얼른 얼른 옷입고 집에 가야지, 그렇지 않고 남자는 나체로, 여자는 반나로 서로 기대 앉아 은은한 노년의 사랑을 감각하고 있는 나름대로 아름답기도 한 순간, 한 손에 그러쥐기 마춤한 화강암을 손에 든 죄의식 없는 악당 하나가 살금살금 뒤로 접근, 여자의 정수리와 얼굴을 일곱 번 강타하여 오른쪽 두개골이 화강암에 의하여 박살이 나고 허연 뇌수가 줄줄 흘러나와 곧바로 죽음에 이른다. 악당은 곧이어 남자에게 접근, 그의 가슴 부위를 수십번 화강암으로 강타해 갈비뼈와 쇄골 등이 부러져 내장기관을 마구 찔렀으나 반 시간 정도 가는 목숨을 이어가다가 이미 죽은 아내의 발목에 손을 댄 채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게 책을 들추면 거의 곧바로 나오는 장면. 아, 지금 생각하기만 해도 속이 다 니글거리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잘 쓴 소설이라고 했으니 참 성격이 좋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해야하나. 소설은 죽은 다음 두 시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시시각각 새, 쥐, 게 등 한 글자로 된 생명체에 의하여 훼손되는 걸 상세하게 설명하다가, 조금 더 부패가 진행되면 파리, 애벌레 등 시신을 파먹고 사는 생물 등을 설명하기도 하고, 시신들이 죽어 자빠질 때 하필이면 그 밑에 깔린 식물들의 생장에 관해서도, 결코 시신을 먹이로 삼지 않는 곤충이 인간 시신에 깔려서 빠져나오는 장면 까지 읽다보면 마음 좋은 당신도 이 소설의 지은이 짐 크레이스를 향해,아 이 드런 새끼, 한 바탕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을.....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독후감 중간 중간에 잘 쓴 소설이라고 주접을 떨곤 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젊지도 않은 노인 시체 썩는 거만 소설 속에 있을까? 물론 그런 거 읽으면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비위좋은 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도 충분하게 이 책을 읽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게 뭔지 지금 좀 썼다가, 아 이런 거 써놓으면 분명 스포일러라고 생각해 얼른 삭제했다. 진짜다. 우린 재수없고 불행하게 다세포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멸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 필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인간종이 멸망할 때까지 정말 온전한 필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거야? 나는 동의하지 않음. 내 새끼, 새끼의 새끼.... 뭐 이런 식으로 나와 당신은 불멸을 진행하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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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 양장본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 지음, 김규종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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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직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한 권을 낳기 위한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키의 삶은 뜨겁고 짧았다.”
이 책을 번역한 김규종은 책 표지의 뒷면에 이렇게 썼다.
일찍이 빠벨 꼬르차긴의 삶보다 더 치열한 그것은 보질 못했다. 20세기가 이제 막 그 폭풍을 열기 시작한 1904년, 우클라이나의 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창조주 오스트로프스키의 삶과 비슷하다. 다만 책에서는 소년 빠벨 꼬르차긴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80년 초. 한반도의 남쪽에서 큰 기운이 뻗어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리하여 백가쟁명, 자신의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허용되기 시작했을 때, 한반도의 북쪽에 고향을 둔 작가들한테는 그러나 조심스레 자기 문학의 시발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또한 허용되었나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적 토양이자 거름이 된 선배 작가들을 꼽으면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를 입에 담았다.
오스트로프스키? 그 사람이 누구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북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들이 감명을 받아 이미 귀밑머리 허연 늙은이가 되었을지언정 결코 잊지 못하는 한 편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 서슬 퍼런 반공의 세월 속에서 말이지.
그러나 그 작품의 내용도, 줄거리도, 하다못해 경향도 알지 못하면서 금강석의 강도로 대뇌에 박혔던 책의 제목,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누군들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 모르지 않을 터. 섭씨 천 도를 넘나드는 불길 속에서 벌겋게 달궈지고, 모루에 얹혀 쇠망치로 두드려 맞으며 깡깡깡…. 귀 속의 달팽이관을 통한 파장이 등뼈 까지도 저리게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비명을 질러야 비로소 강철은 나관중의 입을 통해 청룡언월도가 되고, 앙드레 말로의 펜을 거쳐 중국 혁명 당시 한 무정부주의자의 암살용 권총이 되며, 신경림의 노랫가락과 더불어 땅을 파는 쟁기며 호미가 되는 것.
그러니 책의 내용은 한 불굴의 투사가 징글맞게 끈질긴 시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해나가거나, 아니면 처음에는 비록 소시민적 안온함에 길들여졌던 사람이 시련을 통해 강인해지는 내용일 거라 짐작 정도는 했을 거였다.
그렇게 10년 여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혼자 흐르지는 않는 법. 인간사, 인간사들이 모인 세계사도 세월에 맞춰 유구하게 흘러가는데, 세상에나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고 그 잔해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더니 이윽고 100년을 지켜오던 볼셰비키가 끝장이 나버렸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80년대에 청춘을 비켜간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은 한 여류작가로 하여 등푸른 생선을 생산하게 만들고, 그 등푸른 생선 때문에 장안의 종잇값이 천정을 모르게 치솟기 바로 전, 비로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오스트로프스키의 유일한 작품 <강철은….>의 번역과 출판을 허용했다.
어찌 서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 읽었다, 하면 붙잡혀가는 책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갈지 모르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이 책의 한글판을 읽을 수 있다면 일숫돈도 아깝지 않았을 터. 아… 빠벨 꼬르차긴.

 1980년에 한반도의 남녘에서 있었던 대단히 불행한 사건. 그 사건을 토대로 무수한 문학작품을 우리의 현대사는 만들어냈다. 홍희담의 불꽃 같은 소설 <깃발>을 떠올리며 혹시 홍희담은 지하, 그러니까 당시 언어로 말하자면 언더에서 그는 오스트로프스키를 읽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단정한 사람은 비단 하나 둘이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빠벨 꼬르차긴은 치열하다. 그리하여 빠벨 꼬르차긴에게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는 종교.

 그리고 또다시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다시 읽는다. 무릇 세월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이거늘 15년 전의 빠벨 꼬르차긴이 오늘의 그와 과연 다를 것인가.
빠벨은 그대로이지만 시정이 변했구나. 오늘 이 땅의 노동자들을 보고 빠벨은 통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헌신에 대한 보람을 얻겠는가. 타락한 노동이여, 타락한 노동자여.
그는 한반도 남쪽에 유령으로 내려와 2006년, 어떤 지양점을 가리킬 것인가. 혹시 100년 전의 자본가보다 더 탐욕스러운 노동을 보지는 않을지, 그래서 속 깊은 울음을 처음으로 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기 전에 관련된 정보의 모든 것을 차단하시기를…. 신문서평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책 표지조차 읽지 말고 곧바로 첫장을 넘기기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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