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삶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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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를 눈 여겨 보면 거의 모든 작가가 1961년 이전에 죽었다. 즉 지적재산권과 관계없이 번역서를 낼 수 있는 작품만 골랐다는 건데, 거 참 신기하지, 그래도 좋은 작품이 시리즈 곳곳에 숨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아직도 소개하지 않은 오래 묵은 작가들은 시장성을 확보하지 못할 작품을 주로 생산했기 때문이라 작품 역시 별볼일 없을 거라 여길 수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경탄을 거듭할 만한 걸작이나 적어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 작품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 이야말로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확률이 별로 없을 터이니까.

  1892년생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데 올리베이라 Graciliano Ramos de Oliveira는 브라질 알라고아스주 케브랑굴루에서 태어났는데, 이때만 해도 부모는 이 아기가 16남매의 맏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우리나라에서도 10남매 이상 출산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은 몰라도 젊은 시절까지 종종 들어 익숙했어도, 아오, 열여섯은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어 이 많은 아이가 과연 한 여성이 낳은 동복의 남매인가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런 것까지 찾지는 못했다. 만일 그렇다면 하무스의 어머니 마리아 아멜리아의 생애는 임신, 출산, 그리고 수유라는 사이클만 계속 돌았을 것이고, 어쩌면 수유 과정은 생략할 수 있게 유모를 쓸 수 있는 중산계급이었을 것이다. 브라질 북동부에서 낳고 어린 시절을 보낸 하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 때부터 가명으로 잡지에 기사를 싣기도 하고 소네트 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잠깐 리우데자네이루에 살기도 했지만 스물세 살 때 아버지가 사는 팔메이라 도스 인디오스로 가서 말뚝을 박았다. 스물셋에 결혼한 하무스는 부모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식력을 이어받아 출산 후유증으로 삶을 접는 첫 아내와의 짧은 결혼생활 동안 네 명의 자녀를, 두번째 결혼에서도 네 명의 자녀를 낳는 동안, 팔메이라 도스 인디오스의 시장을 지냈고, 아쉽게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2년만에 사임을 하긴 했어도 어쨌든 그랬다는 건데, 시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곳에 머물기가 좀 남세스러웠던지 서른여덟 살인 1930년에 마세이오로 주민등록을 옮겨 6년 세월을 보낸다.

  마세이오에서 소설책 두 권을 출간하는 한편, 정치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1935년엔 공산주의 봉기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하나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 듯. 하여간 이 시점이 이 양반의 문학적 전성기로 대표작을 발표하니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메마른 삶>이다. 이후 공산당에 입당하고, 유럽과 소련(과 그 부속 국가들), 같은 언어를 쓰는 포르투갈 같은 곳을 유람하는 등 잘 먹고 잘 살다가 1953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으니, 당시로 봐선 호상이다, 호상.


  이이의 정치적 위치는 애초부터 공산주의나 공산주의 비슷하게 지극한 왼쪽이었다. 그리하여 이이의 작품 속 주인공 역시 주로 자기가 거의 평생을 보냈던 브라질 북동부 황야지대의 헐벗고 굶주린 문맹의 하층계급 남성이라 한다. <메마른 삶> 역시 마찬가지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의 주인공들은 복잡하고 미묘한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욕, 여성혐오, 불륜 같은 주제를 단골로 채택하고 있단다. 얼핏 당대 식민지 조선의 카프 진영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정말로 읽어보면 카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리얼리즘이다. 볼셰비키 전통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기보다 오히려 훗날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찬란하게 비추어줄 환상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토착적 공산주의” 또는 말로만 좌익문학 아닐까 싶은데, 또다시 비겁하게 한 마디 보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의 일천한 감상으로 말해서, 이건 덜 익은 리얼리즘 때문이 아니겠는가 싶다.

  <메마른 삶>은 파비아누와 비토리아 어멈 부부, 이들의 두 아들과 (고래라는 뜻을 가진)’발레이아’라는 이름의 강아지, 그리고 앵무새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브라질 북동부의 건조한 내륙지역 세르탕에 최악의 가뭄이 들어 이른바 한발 피난을 가고 있다. 비토리아 어멈은 작은 아이를 들쳐 업고, 머리엔 양철 트렁크를 인 채, 어려서부터 소몰이꾼을 하느라 늘 말을 타고 있어서 오다리로 굳어진 작은 체구의 남편 파비아누를 따라가고 있다. 파비아누 역시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잡낭을 어깨에 사선으로 둘러멘 채 허리춤엔 끈으로 물통과 (부싯돌로 불을 붙여 격발시키는) 수발총을 매달고 있다. 황야에서 수발총 없이 산다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법. 하늘엔 죽었거나 죽어가는 짐승의 눈알을 쪼는 독수리떼가 큰 원을 그리며 떠 있고, 물 한 모금도 차마 벌컥벌컥 마실 수 없는 지극한 갈증과, 결코 이에 못지 않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어제 밤엔 비토리아 어멈이 힘들게 머리에 이고 온 새장 속 앵무새의 목을 비틀고 말았다. 애완 앵무새를 잡아먹었다고? 그렇다. 사흘 굶어 남의 담장 안 넘으면 보살이라잖은가. 그럼 강아지 발레이아는? 안 알려드린다.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상황. 이 정도로 브라질 북동부를 휩쓴 한발에 거의 절망할 무렵, 벌판 저 너머로 마치 그리스도의 손길 같은 검은 먹구름, 이른바 은총이랄 수도 있는 비구름이 몰려올 때, 파비아누 가족은 텅 빈 농장에 무단으로 들어가 남의 집에서 그나마 이슬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갑자기 누리는 쏟아지는 폭우에 바싹 말라붙은 강바닥은 둔덕을 넘치게 흘렀으며 사방에 바싹 마른 풀과 덤불과 관목이 한 순간에 오색 꽃들과 함께 활짝 피어난 건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한 온갖 양서류, 파충류들의 짝을 찾는 울음이 가족들의 귀청을 메울 지경이었다. 파비아누는 결심한다.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도착할 농장의 주인한테,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를 것을.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정말로 농장주가 왔으며, 몇 번의 의례적인 거절 끝에 파비아누를 농장의 소몰이꾼으로 채용해, 이 집 가장은 전처럼 하늘 같은 말을 타고, 가죽 장화와 안장과 가죽 바지를 걸친 근사한, 당연히 작은 아들의 눈에만 근사한 잘 나가는 가우초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 욕심에는 끝이 없는 법. 비토리아 어멈은 가죽 시트가 깔리 침대를 원한다. 지금 부부가 자는 나무 침대는 한 가운데 볼록, 옹이가 박여있어 부부는 한 가운데 옹이를 깔고 눕지 않기 위해 서로 정 반대의 구석에서 몸을 굽힌 채 자고 있으며, 각기 차지하는 면적으로는 결코 셋째 아이를 만들기 위한 작업도 구상할 수 없다. 가죽 침대는 세탕가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던 제분소 주인 토마스 씨가 쓰던 것을 본 적이 있다. 부자면서도 이상하게 예의도 발라서 마을 사람들 모두 토마스 씨에게는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을 했던 것처럼 파비아누 역시 평소 사람을 멀리하고 오직 동물하고만 잘 지냈음에도 토마스 씨의 말엔 고분고분하게 따랐었다. 당연히 파비아누를 비롯한 동네사람들은 토마스 씨의 겸손이 정말로 인격에서 우러나온 겸손인지, 아니면 주민들을 부리기 위한 배운 자들의 고도로 단련된 수법인지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토마스 씨 역시 이제 막 끝난 한발 때문에 제분소도 할 일이 없어 길거리에 나 앉는 수준의 몰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토리아 어멈의 머리 속에 남은 건 토마스 씨의 가죽 시트 침대. 어멈이 가진 로망 중의 로망.

  정식 가우초가 된 파비아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흑백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카브라’ 가운데 한 명. 검게 그을린 붉은 피부와 파란 눈, 붉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남의 땅에 살며 가축을 돌보고 울타리를 수선하는 일꾼이자 짐승 가운데 한 마리일 뿐이다. 이제 주머니에 돈이 생기자 읍내에 나가 이나시우 씨가 경영하는 선술집에 가서 원래 독해야하지만 물을 탄 게 틀림없는 카샤사 한 잔에 취하고, 작은 체구에 보잘것없는 완력을 지닌 노란 군복을 입은 군인의 권유로 도박을 하다 몽땅 털린 다음, 이 군인의 군화 뒤꿈치가 자기 샌들을 밟아버리는 수모를 겪는 것도 모자라 마체테 칼날로 가슴과 등을 두드려 맞은 채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죽여버리겠어, 복수를 하고야 말 거야. 각오를 했음에도 정작 아무 목격자도 없을 벌판에서 노란 군복 군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자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한 파비아누. 결국 ‘카브라’이자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한 파비아누와 가족들은, 브라질 북동부 세탕가에 다시 한번 극한의 한발이 닥치자, 이해할 수 없는 농장주의 셈법에 따른 빚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또다시 비토리아 어멈은 머리에 양철 트렁크를 이고, 어깨에 사선으로 잡낭과 물통과 수발총을 매단 남편을 따라 밤길 황야로 나선다. 지난번과 다른 건 더 이상 아이를 들쳐 메지 않아도 좋을 만큼 컸다는 것하고, 이제 오직 사람 네 명만 길을 나섰다는 것.

  이렇게 세월은 가고, 한발은 다시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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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07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내용을 보면 분노의 포도가 생각날까요?

˝세월은 가고, 한발은 오고˝
분명 뒤에 남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역경은 또 올 것이란 느낌을 받았거든요!

Falstaff 2024-11-07 17:28   좋아요 1 | URL
넵. 포도를 연상할 수 있겠습니다.
(아휴... 댓글 쓰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ㅎㅎ)
스타인벡이 딱 꼽은 오클라호마 피난민은 백인(백인! 과거의 소지주!!)인데 반해 이 책에서 파비아누 일가는 흑백 가운데 검은 피부에 가까운 혼혈에, 일자무식, 완벽하게 무산자 계급이거든요. 아무래도 좀 차이가 있더랍니다. 아이쿠, 이걸 어떻게 말로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4-11-07 17:59   좋아요 1 | URL
ㅎㅎ

다섯 2024-11-07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 가난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수많은 파비아누와 비토리아 어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부족하지만 소유를 나누고, 기도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11-07 17:29   좋아요 0 | URL
옙. 고맙습니다.

hnine 2024-11-07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습니다만, 저렇게 상세한 작가 정보는 어떻게 다 조사하시는지요. 이 작품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작품 못지 않게 작가 연구를 깊게 하시는 것 같아요.

Falstaff 2024-11-07 17: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뭐 작가에 대해 파는 건 아니고요, 간혹 작가의 삶이 얼마나 작품 속에 틈입해 있는지 그걸 포착하는 것도 재미 있더군요. 저는 주로 위키피디아를 인용합니다만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자료는 아무래도 책 뒤에 붙은 연표고요. 이 연표라는 게 재미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ㅎㅎㅎ

yamoo 2024-11-07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가 지적재산권과 관계없이 번역서를 낼 수 있는 작품만 골랐다는 거에...좀 얍실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왜 이런 시리즈를 구태여...--::

그나저나 뽈님의 세계문학 독서 행보는 정말 어마무시하네요!! 읽는 속도도 속도이려니와, 독후감 생산도 어마무시하네요!! 뽈님 덕분에 희한한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ㅎㅎ
저는 항상 뽈님의 별5 문학을 예의주시하고 있거든요~~~ 요건 4대라 패쑤~~^^

Falstaff 2024-11-07 17:32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야무 님 말씀이라 당연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으쓱으쓱. ㅋㅋ
 
포이즌우드 바이블
바버라 킹솔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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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버라 킹솔버는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변주한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로 알게 되었다. 크게 어필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진지하게 쓰는 작가로 이이의 책을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 싶었던 찰라, 이 책이 눈에 띄어 읽었다. 보자마자 읽기 시작하지 못하고 관심도서 리스트에 올려놓기만 하다가 몇 달이 더 지나 읽은 건, 원문만 662쪽에 달하고 지문이 빽빽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아내, 작은 아이, 이렇게 세 명의 회원증을 가지고 한 달에 아홉 권 희망도서 신청을 하면, 이 책들을 읽는 날들을 빼고 관심도서를 읽어야 해, 두꺼운 책은 시간 관리상 선뜻 집어들지 못한다. 그러다 기어이 읽었다.

  진작 읽을 것을.

  제목에 ‘바이블’이 들어 있으니 각 부의 제목이 창세기, 요한게시록, 사사기, 벨과 뱀, 출애굽기, 삼동자의 노래, 나무 속의 눈으로 되어 있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이 가운데 5권 ‘출애굽기’가 623쪽에 끝나니까 6권과 7권은 에필로그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읽으면서 거의 유일하게 가지게 된 불만은, 적지 않은 분량의 ‘출애굽기’는 따로 한 권의 책이나 2부로 다루었으면 더 좋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뭐 그렇다는 거다. 작품을 읽는 게 독자의 권리이듯, 쓰는 건 작가의 권리이니 말을 더 보탤 이유도 없다.


  전에 읽은 2022년작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보다 무려 24년 전인 1998년에 발표했으니 완전히 다른 작품인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지 않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바버라 킹솔버의 부모 버지니아와 웬델 킹솔버 두 양반 모두 의료와 공중보건 업계에 종사했다. 그리하여 <… 코퍼헤드> 등장인물들의 약물 오남용 사례를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부모는 바버라가 일곱 살이던 1962년에 신생 아프리카 독립국에 대한 “연민과 호기심” 때문에 콩고에 꽂혀, 바버라를 데리고 콩고(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레오폴드빌(현재 킨샤사)에 가서 의료봉사를 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건 가슴에 꽤나 깊이 각인되는 법. 이후 30년 가까이 흐른 20세기 말, 바버라는 1960년 콩고의 독립 전후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소설 <포이즌우드 바이블>을 쓴다.

  한 가족을 등장시키는 작품이 있으면 비록 진짜 경험은 아니지만 혹시 이게 작가의 가족을 모델로 쓴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래서 바버라는 본문 앞에 붙인 서문을 통해 “내가 이 작품의 내레이터로 만들어낸 부모와 모든 면에서 다르다는 점에 (작가의 진짜 부모가) 다르다는 점에 특히 감사를 드린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버린다. 사실 이런 말은 안 해도 되는데.


  젊은 시절부터 침례교 전도사로 미대륙 방방곡곡을 다니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던 청년 네이선 프라이스가 미시시피주 잭슨의 작은 마을 낙수비 카운티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면 원피스를 입었어도 행복에 겨운 열일곱 살의 올리애너를 만났다. 올리애너의 눈에도 잘생긴 데다가 매사에 자신만만한 젊은 목사의 붉은 머리가 마음에 폭 들어온 건 물론이다. 이렇게 연애를 시작한 젊은 커플은 1941년 가을에 결혼을 하고 깨를 볶기 시작했건만 여전히 참기름이 졸졸 샐 무렵인 12월에 일본 제국군대가 진주만을 공습해버린다. 그리하여 대단한 무력을 보유한 미국의 젊은이들은 마치 며칠간 MT라도 다녀오는 심정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태평양으로, 유럽으로 출전하기 시작했고, 네이선 프라이스도 자연스레 이들의 대열 가운데 들어간다. 당연히 군종병으로. 그러나 어떤 여유였을까? 물론 하느님의 뜻이겠지. 네이선은 애초 약속했던 군종병이 아니라 전투원으로 배치되어 필리핀의 한 섬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의 집중포격을 당했으며, 이 와중에 머리에 파편이 박혀 우왕좌왕하다가 일본군의 돼지우리에서 하룻밤동안 까무러쳐 있었다. 다음날 백퍼센트 운이 좋아, 다른 말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해변에 도착해 벌판을 비틀거리는 걸 미군 초계정이 발견, 구조될 수 있었다.

  이후 야전병원에 들어갔고, 쾌활하게 신혼의 아내 올리애너에게 편지도 보내는 등 정상 상태를 보이지만 문제는 같이 상륙한 병력의 적지 않은 병사들이 죽었고, 부상자를 포함한 많은 동료들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악명 높았던 “(포로수용소까지)죽음의 행진”을 하는 동안 포로 전원이 질병과 구타와 기아로 죽거나 살해당했다. 동료 병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상세하게 알게 된 네이선 프라이스는 퍼플 하트 훈장을 가슴에 단 채 석 달만에 제대하고 다시 침례교 목사로 돌아와 이제는 거의 완벽한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일체의 타협과 양보를 불허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itself. 일종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일 수 있겠지.

  네이선이 얼마나 독실한지. 그는 백일 만에 다시 만난 젊디젊은 아내와 더블 침대에 올라도 품에 안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이 원하는 바가 아닌 걸? 저수지에 물이 자꾸 흘러 들어오면 넘치는 걸? 그리하여 가끔, 저수지가 넘칠 때만 아주 가끔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고, 그때마다 주님이 주신 놀라운 생식력으로 맏딸 레이철, 일란성 딸 쌍둥이 리아와 에이다, 그리고 막내딸 루스 메이를 낳는다. 아이들 엄마 올리애너가 생각하기에도 네 명의 딸은 그들의 동침 회수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아이들이었다 하니, 뭐 알만 하지?

  맏이, 눈부신 금발의 어여쁘기만 한 돌머리 레이철은 자기 몸 꾸미고, 예쁜 얼굴을 더 곱게 치장하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일란성 쌍둥이 레이와 에이다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영재로 판명이 나는 바람에 1학년짜리가 4학년 과정을 듣는 놀라운 두뇌를 보이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자 얘네들 아빠인 네이선 프라이스는 딸들을 대학교육까지 시키는 건 천하의 바보짓이라고 여긴다. 둘 가운데 에이다는 세상에 나오기 전, 태중에서부터 뇌의 절반이 없어 반신불수의 몸으로 나와 말도 어눌하게 밖에 할 수 없어 스스로 말하기를 중단해버렸다. 같은 영재이며 쌍둥이 언니 레아는 레아 대로 엄마 뱃속에서 자기가 에이다의 것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에이다가 장애아가 되었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가진 채 남은 길고 긴 삶을 살아야 할 팔자이다. 막내 루스 메이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어린 시절이라 ‘포유류 진화의 결과’ 라고 할 수 있는 엄마의 가장 큰 애정을 받으며 산다. 물론 그렇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중요한 출연자이자 화자인 에이다의 중요한 사고 가운데 하나가 누가 엄마의 선택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별볼일 없는 침례교 목사인 네이선 프라이스는 검은 대륙 가운데서도 가장 검은 대륙이며 일찍이 폴란드 출신 영국 작가로부터 “어둠의 심연”이라는 별칭을 얻은 벨기에령 콩고에 들어가 식인 습성이 남아 있을 정도의 야만과 잡신들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의 복된 말씀을 전하겠다는 불타는 소명의식에 함몰, “여호와께서는 주의 자비로운 천사들, 신성한 사자들의 모습으로 롯의 죄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섬을 찾아”간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래서 갔다. 조지아주 베들레헴에서 케이크믹서기를 들고 아내와 네 딸들과 함께. 선교 기간은 1년으로 딱 정했다. 1년의 시간은, 만일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들이 완전히 미칠 수 없는, 어느 정도만 미칠 수 있는 기간이라서. 그만큼 오지이며 험지라는 뜻이겠지. 전임 선교사 파울스 형제는 6년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집안 일을 해주는 마마 타타바와 앵무새 므두셀라만 남기고 홀연히 밀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미국의 선교 재단은 후임으로 반드시 가족 전부가 이주해 선교사의 심신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게 해야 하며 1년이란 선교 기간도 말뚝을 박아 버렸던 거다. 이해하시겠지?

  그리하여 콩고의 레오폴드빌 공항에서 내리니까 현지 선교의 책임자 언더다운 목사와 부인이 가족에게 모기장을 선물했고, 다시 더러운 복장을 한 이벤 액셀루트 기장이 모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킬랑가 마을에 당도한 가족. 첫날 원주민들이 염소를 잡아 털도 다 뽑지 않은 고기를 구워 만찬을 베풀어주었지만 딸들은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역겨운 것이었으며, 물로 나중엔 구경도 하지 못할 진수성찬이 될 터이지만, 삼키지 않으면 맞을 줄 알라는, 태어나서 한 번도 얻어맞은 경험이 없는 엄마한테 이런 협박까지 받은 네 딸들. 당연히 아빠한테는 여차하면 줘 터지길 밥 먹듯 해지만 말이지. 이후 이 기독교 원리주의에 입각한 광신적 침례교 목사와 킬랑가 마을 주민들, 그리고 가족과의 갈등은 모두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갈 것이니 굳이 이 자리에서 소개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렇게 흘러간다. 다만 1년 후, 콩고는 벨기에에서 독립해, 콩고 안의 모든 백인들이 살 길을 찾아 콩고 탈출을 감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광신적 원리주의자인 네이선 프라이스 목사만 결코 오지 않을 후임 선교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킬랑가 마을을 지키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목사와 가족들에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기는 한다. 뭐 소설이니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크게 봐서 에필로그일 수도 있는 적지 않은 분량의 5권 출애굽기. 그걸 꼭 썼어야 했을까? 바버라 킹솔버가 뭔데 남의 나라 독립 후의 상황을 소설로 쓰느냐는 말이지. 콩고민주공화국의 문제는 그들에게 넘겨주거나, 철저하게 그들의 시각으로 쓰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백인, 그리고 콩고에 가해를 입힌 미국인의 입장에서 뭔가 할 말이 있었겠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을. 하긴 자신이, 조국이 평생 가해만 해봤지 당해본 적이 없으니 그런 걸 알기 힘들었을 거다.

  적어도 2부로 만들어 출애굽기, 즉 가족이 콩고를 탈출한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한 권으로 편집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 지도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저 앞에서 얘기했듯, 그건 철저하게 작가의 권리니까 독자인 나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이유도 없고, 권리도 없다.

  좋은 책인데 품절이다. 출판사 RHK가 가끔 이런 얄미운 짓을 한다. 중쇄를 찍든지, 판권을 다른 출판사에 넘기든지 해야지 이런 책을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건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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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05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 같은데 품절이네요. 킹솔버 저는 최근에야 알았는데 알려지기는 꽤 오래됐네요.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개인중고에서나 팔고 알라딘 중고는 없네요. 게다가 다른 책들은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고. 쳇!
근데 가족분들 회원증 싹쓸이 하셔서 한 달에 9권을 빌리시는군요. 대단하셔요. 저는 거의 4개월치 분량입니다. ㅠ ㅋㅋ

Falstaff 2024-11-05 20:05   좋아요 1 | URL
ㅎㅎㅎ 다른 좋은 책도 많습니다. 걍 건너 뛰셔요.
옙. 한 달에 아홉 권 신간 읽으면 기분이 나쁠 수 없습지요. ㅋㅋㅋ 사서도 다 알아서 그냥 그런가 해줍니다. ^^
 
세 명의 삶 \ Q. E. D. 큐큐클래식 4
거트루드 스타인 지음, 이성옥 옮김 / 큐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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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미술품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은 1874년에 지금은 피츠버그에 속한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니에서 부르주아 유대인의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저택 부지가 10에이커에 달할 정도로 부잣집 막내딸의 성장과정이야 굳이 찾아 소개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작품 속에 계속 독일 이민자가 등장하는 걸 보니, 이 집안도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트루드가 네 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정착했고(불과 4년 동안이지만), 자녀들은 유대학교와 히브리 교회 시나고그에 다녔단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출간한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의 유대인 정체성은 전혀 또는 거의 보이지 않고 독일인 정체성만 도드라진다.

  부모가 세상을 뜨자 거트루드의 큰오빠는 동생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외가 친척과 함께 살면서 대학에 다니게 돌보아준다. 하버드 대학 부속 래드클리프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배우기도 하고, 스물세 살 때엔 매사추세츠주 해양생물학 연구소에서 발생학을 공부하기도 하다가, 래드클리프에서 지도했던 윌리엄 제임스는 스타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추천, 입학하며 이 책을 쓰게 만든 초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성을 만나게 된다.

  메이블 헤인즈와 메리 북스테이버. 이들은 동성간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거트루드 스타인이 들어가면서 졸지에 삼각관계를 만들어버린 거였다. 게이들의 삼각관계는 몇몇 소설을 읽어 어떤 식으로 발전하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지 제법 과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반면, 레즈비언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발생, 진전, 결말을 맺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아이고, 골치만 아팠다. 성을 매개로 하는 사랑에 관해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고, 가능성을 만들지도 않을 나는 젊은이들의 특권인 습식 사랑을 적극적으로 권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사랑으로 인해 좀 덜 아파했으면, 덜 아팠으면 좋겠다.


  《세 명의 삶》은 볼티모어의 브리지포트 시장 부근에서 머틸다 아가씨의 시중을 들며 사는 착한 하녀 애나, 피부색이 좀 덜 검은 멜란차, 볼티모어 살 때 역시 스타인의 하녀로 일하던 레나 레벤더의 이름을 따온 독일 아가씨 레나의 사는 모습을 중∙단편 소설로 써서, 돈 많은 집안의 막내 따님이니, 서슴없이 자비출판한 책이다. 책이 시장에 나왔을 때가 1909년. 이 가운데 <멜란차>가 중편으로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시대도 세대도 차이가 심해서 읽다가, 읽다가 멀미가 심하게 나는 바람에 중간에 때려 치웠다. 덜 검은 유색인 여성 멜란차와 남자 흑인 제프 켐벨의 관계, 이것이 스타인 자신과 메리 북스테이버의 관계를 여-남으로 바꾼 것이라고 해설에 쓰여있다.

  <Q.E.M>은 라틴어의 앞 글자 세 개를 모은 것으로 수학 정리의 증명이 끝났을 때 “증명 끝!”의 의미로 답안지 제일 마지막에 QEM! 이라고 관습적으로 쓰는 거다. 비록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Q.E.M.이라고 쓴 답안지를 제출해본 적은 없지만. 중편소설 <Q.E.M>은 《세 명의 삶》을 출간하기 6년 전인 1903년에 쓴 단편소설 세 편을 실은 소책자였지만, 거트루드 스타인의 정식 출판작품 목록에는 누락된 것으로 보아 스타인이 그저 습작으로 생각했거나, 다른 작품, 예컨데 《세 명의 삶》 가운데 <멜란차>로 다시 썼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있을까? 하여튼 그렇다. <Q.E.M>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아델. 아델이 거트루드 스타인 자신의 모습이고, 2부 헬렌이 성적으로 동정이었던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육체의 습식 쾌락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메리 북스테이버를 대신한 인물이며 (크게 기대하지 마시라, 1903년이라서 입술을 맞부딪는 키스와 포옹이 전부다,) 3부 메이블은 갑자기 스타인이 나타나 자기 연인 메리 북스테이버로 하여금 바람피우게 만들어 열을 잔뜩 받은 질투의 여신 메이블 헤인즈의 현현이다. 작가가 등장인물 아델로 등장하니 당연히 아무런 잘못도 없고, 생각 건전하며, 몸도 튼튼한데다가 돈도 무척 많아 세잔, 마티스, 피카소의 작품들도 척척 사들였을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작중 인물 헬렌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자기 품으로 달려올 줄 알았지. 하여간 작품 속에서 아델은 질투에 눈이 먼 메이블이 헬렌을 심하게 가스라이팅하는 것으로 만들어놨다.

  헬렌은 무지하게 엄한 법관 아버지를 두어 용돈도 많이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페라를 즐기고 메이블과 몇 달 동안 유럽여행을 가고 하는 걸 보고 아델은 메이블이 오페라 관람비는 껌이고, 유럽 여행에 드는 거액의 돈으로 헬렌의 코를 뀄다고 여기는데, 하여간 20세기 초 부르주아 딸들이 이런 허영과 사치와 사랑을 겪으면서 고통스럽다고, 젊음의 아픔을 지나고 있다고 앙탈부리는 걸 읽어주어야겠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것도 애매모호한 추상명사 만을 사용해 끝없이 말다툼을 벌이는 걸 말이지.

  등장인물(들)도 자신들이 거의 1만 명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경제적인 혜택을 받는 특별한 계급인 줄 인식하고 있다. 메이블과 헬렌이 함께, 아마도 메이블이 여행경비 일체를 헬렌에게 꾸어 주었다는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유럽으로 여행을 간 것이 아델은 아니꼽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

  “쳇. 당장 빵과 버터가 없어서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고상한 영향력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당장 빵과 버터가 없어 쫄쫄 굶는 사람들이 있는 줄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헬렌이 부모님과 어정쩡하게나마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헬렌에게 필요한 건 빵이 아니라 버터일지도 몰라. 메이블은 빵과 버터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기꺼이 제공하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줄 수가 없어. 아, 이런. 버터도 못 발라주는 관계라니. 나처럼 비겁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도 이따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순간들이 있었잖아.” (p.363)

  법원장의 딸도 빵과 버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빵과 버터 주기를 거절한다면? 1899년, 스물다섯 살의 스타인은 “여성을 위한 대학교육의 가치”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평균적인 중산층 여성은 남성 친척, 남편, 아버지 또는 형제의 지원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경제적 의존은 여성으로 하여금 과다하게 섹스를 하게 만듭니다. 남성의 비정상적인 성욕에 적응하는 것, 먼저 인간이고 다음에 여성이어야 하는 존재가, 언제나 여성인 존재로 변하는 것입니다.” (위키피디아)

  혹시 헬렌도 자신한테 필요한 “빵과 버터”를 얻기 위해 메이블과 헬렌에게 과도한 섹스를 바쳤던 거였나? 헬렌에겐 한 수저의 버터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아이고, 하여간 읽기는 했는데, 앞에서 말했듯, 온통 추상명사만 나열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의 말장난이 하도 속을 뒤집어놔서 책 읽은 다음에 애먼 쐬주나 한 병 깠다. (아이 씨, 오늘 왜 이래. 내가 써놓고 무슨 이야기인지 나도 모르겠네.)


  이후 파리에 정착한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집에 “스타인 살롱”을 만들어 당대의 화가, 작가들의 아지트로 꾸몄으니 단골로 와서 공짜 술과 음료를 즐겼던 잡것들의 명단을 들면, 피카소, 헤밍웨이, 게츠비, 아니, 핏제럴드, 싱클레어 루이스, 파운드, 게빈 윌리엄스, 손튼 와일더, 셔우드 앤더슨, 시릴 로스, 기욤 아폴리네르 등등 이름만 나열해도 1박2일은 걸릴 거 같아서 그만 쓴다.

  근데 널리 이름이 난 정통 유대인인 거트루드 스타인이 2차세계대전 당시에 파리에서… 나치의 손에.... 안 죽었다. 그게 무척 신기해서 좀 알아봤더니, 프랑스 비시 괴뢰 정부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베르나르 파이가 “평생 가장 중요한 친구”라, 스타인을 끝까지 보호해 명줄을 이은 건 물론이고, 생활도 여태까지 살던 대로 그냥 살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어? 비시 정권에 봉사할 수밖에. 그리하여 페탱 원수의 길고 긴 연설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의 사역을 했을뿐더러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한다.

  “페탱의 정책이 너무나 훌륭하고 지극히 단순하며 굉장히 자연스럽고 비범하다.”

  이 영어 연설문은 당연히 미국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하긴, 일찍이 1934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도 했으니 무슨 말은 못했을까.

  이렇게 우리의 거트루드 스타인은 한 평생 아쉬운 거 1도 없이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다가 1946년 벨기에 여행을 다녀온 후에 위암이 도져 72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숟가락 놨다. 뭐 그것도 한 삶이긴 하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쉽다. 어째 애도가 안 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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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1-04 0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과지성사의 <세 인생>, 민음사에서 낸 <세 가지 인생>하고 같은 작품입니다. 역자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읽는 재미가 다를 수 있으니 이 독후감을 믿을 필요 없습니다.

건수하 2024-11-04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습식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11-04 09:16   좋아요 1 | URL
박완서의 기고문에서 ˝건조한 사랑˝이 얼마나 재미 없는지에 관해 쓴 것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것을 저도 모르게 조금 변형했던 거 같네요.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coolcat329 2024-11-04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글을 이른 아침에 남기셔서 늘 아침에 제일 처음 읽게 되는데 아까 읽다가 쐬주 까셨다는 부분에서 빵 터졌습니다.
저는 습식사랑이라는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폴님이 지어낸 말이군요 ㅎㅎ

Falstaff 2024-11-04 15:31   좋아요 2 | URL
ㅋㅋㅋ 새벽에 쐬주 깠는 지 아셨나봅니다. ㅋㅋㅋ 근데 가끔 그렇게도 합니다. 은퇴하니까 좋은 것 가운데 하나가 시간 개념이 그리 필요하지 않은 점이라서 간혹 맛난 음식이 새벽에 눈에 띄면 걍 쐬주 깝니다. ㅋㅋㅋㅋ
˝습식 사랑˝ 이게 그래도 인상 깊은 말이었나 봅니다. 으쓱으쓱! ㅋㅋㅋㅋ 이거 제가 젤 먼저 쓴 단어 맞습니다. ㅋㅋㅋㅋ
아이쿠... 낮술에 취한 폴 올림.
 
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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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러스데어 그레이, 이이가 누군가? 20세기의 이름난 작품 <라나크>를 쓴 바로 그이다. 적지 않은 독자가 이이의 이름과 명작 <라나크>가 귀에 선 것은, 작가와 작품이 다분히 장르문학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8년여 전 <라나크>를 읽었는데, 읽은 당시엔 마음에 콕 박혀 있었지만 내용 거의 대부분은 휘발되어 버리고 그때 “인상적으로 읽었다”는 감상만 남았다. 당시 적지 않은 문제작을 골라 출간하지만 현금의 흐름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싹 폐간을 시키고는 했던 [뿔>에서 책이 나온 것부터 불운했다. 게다가 네 권짜리 길고 긴 분량도 독자에게 쉽지 않은 허들이기도 했을 터이고.

  난데없이 앨러스데어 그레이를 읽은 계기는 최근에 읽은 앨리 스미스의 <아트풀> 속에서 스미스가 같은 스코틀랜드 작가 그레이를 거론하길래, 그렇지, 그가 있었지, 무릎을 탁 치면서 냅다 검색을 해봤더니 <라나크> 말고 딱 한 권이 시장에 나왔으며, 더 기분 좋은 것이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도 있더라는 거였다. 그걸 어떻게 참나 그래. 후딱 집어와 읽을 수밖에. 이런 기분 다들 아시지?


  작품의 내력을 한 번 보자.

  엘스퍼스 킹이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글래스고 지역역사박물관 피플스팰리스에 그녀의 팀원으로 열성적인 직원 마이클 도널리라고 있었다. 1990년 어느 하루, 도널리가 글래스고 거리를 걷다가 쓰레기 처리를 당하기 위해 대기중이던 구식 문서 보관함을 발견했고, 언제나 구식 문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법이라, 이 속에서 커다란 문서 다발을 찾았다. 그렇지만 문서 일체가 변호사 사무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널리는 변호사를 만나 문서의 개봉을 요청하나, 변호사는 변호사의 의무조항을 거론하며, 의뢰인이 요구한 조건, 1974년 이후에 자기 후손들만 열람하라는 내용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손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절대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소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고하기를 만일 피플스팰리스 직원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문서 일부를 가져가든지 하다못해 읽어보기만 해도 절도죄로 고소할 것이니 애초 마음을 먹지 말란다. 여기서 포기하면 소설이 안 되는 법. 도널리는 과감하게 가장 중요한 서류 일부를 주머니 속에 꿍친다.

  서류는 20세기 초반 연도의 편지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여의사 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쓴 편지와 그녀의 문서. 문서는 여사의 남편인 아치볼드 맥켄들리스가 쓴 일종의 소설책 한 권이다. 빅토리아 맥켄들리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가 수년간 운영했던 빈민 계급 여성을 위한 산과와 소아과 중심의 의료재단을 지을 수 있게 자신의 전재산을 물려준 고드윈 벡스터 씨 덕에 갑자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 의사 아치볼드 맥켄들리스가, 자기한테 있는 줄도 몰랐던 글 나부랑이를 쓰는 잔재주로 소일하더니 아내, 즉 자신을 포함한 주변사람들을 심하게 왜곡할 뿐인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맨켄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잘나가는 스코틀랜드 화가한테 삽화까지 의뢰해 딱 한 권을 만들었다는 거다.

  아치볼드가 빅토리아의 두번째 남편인 건 맞다. 첫 남편 오브리 다 라 폴 블레싱턴 대장이자 준남작이 자기 머리통에 권총을 쏘아 죽은 후에 전남편의 거대한 재산을 갖고 아치볼드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연모하지만 스스로는 위대한 의사 아버지 콜린 벡스터 경에게 유전으로 물려받은 매독이 깊어 청혼은커녕 피부 접촉마저 사양하는 특출한 의사, 고드윈 벡스터의 집에서 살기는 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오해도 좀 받기도 했지만 그게 뭐? 나만 떳떳하면 되는 거 아냐? 하여간 빅토리아가 벡스터의 집에서 특출한 의사 벡스터가 보기엔 ‘그저 그런 외과의 아치볼드’라면 까다로운 전남편하고 살면서 겪은 온갖 치사한 광경은 안 보겠거니 하고 혼인한 바 있다. 남편상喪과 재혼 사이에 물론 사기꾼 변호사이자 재주 없는 도박꾼인 던컨 웨더본과 불장난 깨나 해본 바 있기는 하지만.

  이런 내용의 편지와 소설을 손에 넣은 지역역사박물관의 학예사 마이클 도널리는 고민 끝에 문서를 가지고 당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필력이 높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고, 잠깐 박물관에서 일을 하기도 한 작가 앨리스데어 그레이에게 원고 검토를 부탁한다. 흥미를 느낀 그레이는, 편지와 원고를 훑어보더니, 원고가 인쇄되어 마땅한 걸작이라는 도널리의 견해에 적극 동의하면서, 자신이 편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맥켄들리스의 원본을 가능한 한 그대로 현대어, 현대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완수한다. 결과, 책은 ①앨리스데어 그레이가 쓴 서문, ②아치볼드 맥켄들리스의 소설, ③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손주 또는 증손주에게 보내는 편지, ④다시 편집자 그레이가 붙인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클 도널리와 작가 그레이가 ‘걸작’이라고 동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치볼드가 쓴 소설에서 평범하게 키가 큰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불쑥 솟은 정도의 신장과 보통 사람 세 명을 합한 정도의 덩치와, 거의 정육면체 형태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메스와 봉합침을 섬세하게 다루는 천재적 외과의 고드윈 벡스터의 생명 이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아치볼드의 소설에 의하면, 서로 호감을 나누어 친해진 후 처음 고드윈의 집에 가서 기함을 하게 놀랐던 것은, 두 마리의 토끼 몹시와 플롭시를 보았을 때였다. 몹시는 절반부터 머리쪽이 완전한 검정색, 플롭시는 거꾸로 절반부터 머리쪽이 완전한 순백색. 흑백의 털이 경계를 지은곳을 유심이 보니까, 섬세한 줄이 그어 있다. 몹시는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덜 발달한 거 같고, 플롭시는 하체에 비해 상체가 좀 빈약하다. 척 보면 알지. 두 마리를 반으로 잘라 교체해 붙인 거다. 이쯤 되면 뭘 생각할 수 있지? 이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는 아치볼드 맥켄들리스보다 90년 전에 태어난 메리 셀리의 역작 <프랑켄슈타인>. 한 세기 가깝게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창조물은 그때보다 월등하게 진화했어야지.

  1881년 2월에 글래스고를 흐르는 클라이드 강에서 임신 9개월에 가까운 임산부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경찰 공의인 고드윈 벡스터가 검시해 익사한 25세가량, 신장 177cm가량, 암갈색 곱슬머리 등으로 판결하고 시신 공시를 하지만 연고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뜸들이지 않고 그냥 말해버리면, 시신을 시체공시소에서 일주일간 연고자를 기다리다가 파묻어야 하는데 고드윈이 슬쩍 시신을 빼돌려 파크 서비스 18번지, 자신의 저택 지하실로 옮긴다. 일단 배를 갈라 9개월에 육박하는 이미 죽은 아이를 꺼내고, 모녀의 두피를 절개한 후 작고 예리한 칼로 두개골을 절단한 다음, 태아의 뇌를 적출해 이미 비워놓은 어미의 머리 속으로 옮겨 각종 신경을 섬세하게 연결하고, 찌리릭,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러했듯이 시신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든, 생명의 묘약을 먹였든, 마법의 플루가루를 뿌렸든 간에 한 생명을 다시 만들어 냈고, 정신연령 0세, 육체연령 25세의 벨라라고 이름짓는다. 벨라 벡스터의 탄생. 이러면 한 서른 살 먹은 고드윈 벡스터가 ‘오빠’는 아니지? 차라리 ‘아빠’가 맞는 거지?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거구와 놀라운 완력과 낯가림을 심하게 타고 내성적인 고드윈 벡스터는 벨라 벡스터를 열라 사랑만 할 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외로움이 깊어지면 손빨래만 겁나 해댄다. 세상에 둘도 없이 불쌍한 캐릭터.

  벨라 벡스터로 말하자면 뇌연령이 0세. 하지만 육신과 교통하지 못하면 뇌가 아니라서 다른 소아의 뇌보다 훨씬 빠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자제를 모르는 단계. 반면에 스물다섯 살이고 이미 자살하기 전에 전남편의 손길을 받은 육체, 뇌가 모르는 남자의 몸을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남자가 마음에 좀 들면 가리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고 싶어하는 단계. 어쩌겠어? 아빠 고드윈은 자기가 직접 가르치기는 뭐하니까 동료 의사로 하여금 완벽한 피임방법을 숙지하고 이행할 수 있게 조처해준다. 벨라 앞에 나타나 가장 먼저 청혼을 한 남자가 바로 아치볼드 맥켄들리스. 시골의 작은 지주가 심심풀이로 하녀와 장난쳐 만들어낸 사생아. 은행을 절대로 믿지 않았던 엄마가 죽을 당시 아치볼드에게 침대 밑에 평생 모은 돈이 있으니 뭐가 될래? 하고 물었던 엄마. 의사나 되어보련다고 대답하니 피식 웃고 죽은 엄마. 아빠는 적어도 아치한테 모른 척하지는 않아 미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죽을 때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유산을 남겨 줬거든.

  하여간 아치볼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벨라, 고딕소설의 주인공답게 177cm 장신인 벨라는, 6주 후에 결혼하기로 해놓고 변호사 던컨 웨더본과 야반도주해 유럽 각지를 떠돌기도 하고, 웨더본의 재산이 거덜나 홀로 파리에 남아 유곽에서 몸을 팔기도 하고, 귀국해 결혼을 하려 하니, 성당에 쳐들어온 전남편 블레싱턴 장군이 자신과 벨라 벡스터라 불리는 여인, 빅토리아 블레싱턴 부인과의 혼인을 끝맺지 않은 상태이니 이 결혼을 무효라고 깽판을 치고….


  이런 소설을 (벨라)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눈뜨고 읽어주겠느냐고? 임신 9개월 상태에서 글래스고까지 와 물에 빠져 죽은 여자, 그걸 건져다가 시체공시소에 며칠 묵힌 다음 다시 살려낸 괴물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게 한 번 책으로 찍히면 평생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 그것보다 더 열을 받는 건, 뭐라고, 내가 귀국할 뱃삯을 벌기 위해 프랑스에서 몇 개월간 매춘부 일을 했지만 홀라당 다 뜯겨 발간 빈 손이 되자 결국 파리에 사는, 아빠 고드윈의 친구한테 비루하게 돈을 빌어 돌아왔다고? 비겁한 아치볼드는 혹시 모르지, 원본을 수정해달라고 했던 것인지. 하여간 말도 안 되는 딱 한 권의 책을 확 불을 싸질러버릴까 싶다가, 그게 그것도 인간이라고 아치볼드가 세상에 나왔던 유일한 흔적이라서, 그냥 버리기는 뭐하니까, 1911년 이전에 쓴 소설 비슷한 잡문을 74년 이후에 자기 직계 손주나 증손주가 있다면 읽어보고 너네들 마음대로 하라고 유언을 한 거였다.

  작품을 쓴 아치볼드는 1911년에 죽고, 이들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으나, 둘째와 셋째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즉시 입대해 솜 전투에서 죽었고, 맏이는 글래스고에서 자동차 사고로 엄마보다 먼저 갔다. 그래 1946년 뇌나이 66세, 몸나이 92세에 숨을 거둔 빅토리아 멕켄들리스 박사가 자기의 편지와 서류를 받기 바라는 손주, 증손주는 자기 세 아들이 뿌린 법 외 자식이나, 법 외 자식의 자식들이었다는 아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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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1-0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4는 아깝다. 차마 5를 얹지 못해 4에서 멈춘다.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거트루드 스타인, 《세 명의 삶 / Q.E.D.》
화요일. 바버라 킹솔버, <포이즌우드 바이블>
목요일.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메마른 삶>
금요일. 장은진, 《가벼운 점심》
 
미래의 하양 걷는사람 시인선 101
안현미 지음 / 걷는사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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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보니 안현미의 시집을 세 권째 읽는다. 《곰곰》과 《이별의 재구성》에 이어 《미래의 하양》까지.

  드디어 안현미, 아현동에서 탈출했다. 뭐 탈출은 벌써 했겠지. 형제 같은 바퀴벌레 떼가 비키니 옷장 바닥을 점령한 채 그들과 한 방에 살았던 궁상스러운 시절에서. 순대국밥 먹으러 가면 주인 아줌마가 혼자 왔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고마웠던 외로운 시절에서. 세월이 가면 먹고 사는 건 좀 필 수 있어도 외로운 건 결코 좋아지지 않는 것인데 시인은 그것도 좀 나아졌을까? 《미래의 하양》 속에서 시인은 그동안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때려치우고 시 작업에 몰두하기도 작정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생각했던 것처럼 돌아가면 그건 세상 사는 일이 아니지. 시는 잘 써지지 않고, 실업급여를 받아도 밥상 위의 반찬은 여전하고, 한강 상류 북한강, 북한강 상류 동강, 동강 지류 주천강, 주천강 옆댕이에서 살며 탁구 좀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가계도


  아버지는 술을 물처럼 마시고

  어머니는 물을 술처럼 마셨다   (전문. P.51)



  이런 가계도의 핵심인 부모 모두 세상 하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엄헬레나 여사한테 헌정하는데, 혹시 몰라, 시인의 엄마 이름이 엄헬레나인지도. 왜냐고? 이런 시를 보아 그렇다는 거지 뭐.



  엄헬레나



  1 9 4 2 9 1 6 – 2 0 2 4 2 1 1


  부잣집 딸로 태어나 탄광으로 시

  집온… 딸 셋을 낳은…… 실향민

  의 딸 엄…헬레나…과부는 아니었

  지만 과부 같았던… 장성 제1광업

  소 급식사이자 세탁부였던…엄…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닥

  치면…엄…헬레나……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탄광촌… 판

  잣집… 공용 변소… 닥치면 겪는

  다… 엄…헬레나… 0명의 아들과

  0명의 남편 그리고 자신도 모른

  채 엄헬레나로 죽은… 어쩌다 마

  지못해, 의무적으로 전화하면 자

  꾸 어디니이껴 묻던 엄헬레나…

  엄…헬레나… 어디니이껴… 어디

  니이껴… 어디 계시니이껴……   (전문. P.64)



  안현미가 강원도 태백 생이거든. 장성광업소가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에 있거든. 뭐 아닐 수도 있다. 생활력 강한 옆집 아줌마이거나 시인(또는 시인의 부모)와 막역한 사이라서 평소 이모라고 불렀던 사이일 수도 있지만 뭐 어쨌거나 엄마와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다. 이 시집에서 부모 말고 딱 한 명 더 출연하는 친척으로 고모도 있다. 서울 고척동에서 살아 ‘고척동 고모’라고 부르는데 정말 고모라서 안씨 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냥 ‘고모’라고 부르는 시인의 의지가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척동 고모


  그녀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고통은 공기와도 같았다 고통과 함께 밥 먹고 고통과 함께 잠들고 고통과 함께 출근했다 한 명의 남편과 네 명의 자식들마저 그녀를 떠났을 때도 고통만은 그녀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고통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파먹으며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했다 한번 물어봐요 일생 억척스럽게 살아남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는 말했다 일생 함께 울어 준 것도 웃어 준 것도 고통인데 이제는 피붙이 같다고 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여성)은 두고 가도 고통만은 함께 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문. P.58)


  지금 호적 파는 데 맛들였냐고? 아니, 아니. 이 시집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안현미 만의 독특한 어법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침 시인의 친척, 그러니까 저 위에서 인용한 “가계도”의 일원인 고척동 고모가 눈에 띄어 가져왔다. 시에 관해서 쥐뿔도 아는 게 없는 번인이…, 본인이… 굳이 이 시 <고척동 고모>를 말할 것 같으면, 시 한 자락에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시어 “고통”이 열두 번 출현한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도 반복해 등장한다. 이 시집에서 이렇게 같은 시어, 시 구절을 반복하는 것들이 세어보지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지하게 많다. 반복 ‘구절’이 이 시 <고척동 고모>에서는 리듬감 있게, 쉬운 말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횟수만큼 나와 읽는 맛을 느낄 수도 있지만, 시 ‘단어’ 그러니까 시어 “고통”은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열심히 쓰셨나 그래?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고통이 면역이 된다는 잘못된 지식 또는 진짜 육체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시인 작가들의 착각이다. 그래서 미국에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면도칼로 자기 팔뚝을 수시로 그어 고통을 감각하는 일종의 ‘고통 중독’ 현상을 겪어 웬만한 고통 정도는 느끼지도 않을 정도이지만, 그의 연인이었던 윌럼 라그나르손은 주드와 비슷한 자해를 했을 뿐인데도 무지하게, 정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말도 지껄이게 된다. 고통은 결코 면역되지 않는다. 생명유지를 위해 오히려 고통을 당할수록 더 고통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면역이 가능했다면 인류학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한 방법의 고문을 창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민감함은 더욱 배가된다. 진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딴 글을 무책임하게 썼다는 걸 독자가 몰라 경탄을 하는 지도 모른다. 물론 고척동 고모의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다양하게, 다양한 부위에서 겪었겠지만(겪고 있겠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태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았으니까 그렇게 고통과 나머지 삶도 함께 살다가 가겠다는 거야? 치사하게 “라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라떼, 이런 시는 철저하게 분쇄당했을 거다. 평생 노동자, 해고 노동자로 살았으면서 조금의 운동성도 발견할 수 없는 고모. 빼박 패배적인 관점의, 패배적인 관점일 뿐인 시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전에 읽은 안현미의 시집 《곰곰》과 《이별의 재구성》에서 이런 고척동 고모의 기색이 옅보였다고 하면 너무 오버인가? 아현동 사글세 방의 가족같던 바퀴벌레 시절의 지독한 궁상 말이지. 그때도 “나는 지금 이렇게 아파요, 배고파요, 외로워요.”라고 영탄만 했을 뿐, 이의 개선을 위한 운동성은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때는 이십대 시절. 이 시집 《… 하양》이 2024년 출간이니까 시인의 나이 52세. 그이 사이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꽃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딥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듯 밤을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마음 아닌 것도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 그건 뭐였을까요? 봄에는 직장을 잃고 가을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없는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건넙니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여 가끔 눈부셨던 그건 뭐였을까요?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진   (전문. P.19)


  여태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은 시인은 여전히 밤을 견디고 있다. 안현미의 밤은 위안과 쾌락과 치유와 쉼과 평온의 밤이 아니다. 공포와 유령과 범죄와 고독과 빈곤의 밤이다. 그걸 시인은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견딘단다. 아무리 궁상스럽던 세월이었더라도 살면서 찬란하고 눈부셨던 잠깐이 없었을 수 없겠지. 독자는 여기서 눈에 힘을 주어야 하리라. 어차피 안현미가 부호와 암호와 은유로 결판을 보는 시인은 아니니 아무리 시라도 앞뒤 문맥은 짚어 마땅하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데, 그래서 가끔 눈부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단다. 그러니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끔 눈부셨던 것.” 아오. 이건 스핑크스의 리들보다 더 풀기 어렵네 그려. 시는 별로 읽지 않는 독자인 내가 도무지 풀지 못했던 “가끔 눈부셨던 것”이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졌다네? 여기서 나는 의혹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건 시적 아름다움을 좇은 의미없는 수사일 뿐이라고.

  하여간 이제 50줄에 든 시인은 주천강변 이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가끔 탁구도 쳐 가며.


  횡성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며 가을이 다 갔지만 어떤 날은 박상륭의 열명길을 읽다 잠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가에 나가 앉아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가끔 아침부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 자작나무 잎들이 춤을 추면 읍내에 나가 술을 받아 와 대낮부터 대취했고 고라니 울음소리에 깬 밤이면 지난날 용서 빌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 오지 않는 엄마 오지 않는 아버지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러 황성 갔다 지난날 빌지 못한 죄들과 오지 않는 것들이 매일 밤 별처럼 돋아나던   (전문.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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