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3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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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 스미스의 “계절 4부작” 가운데 세번째 작품. 나만 그런 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대개 1부 <가울>을 읽은 독자들이 경끼(‘경기’가 맞는 말인 건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기’ 보다는 ‘경끼’라고 쓰는 게 여러모로 의사전달이 잘 된다. 그리하여 ‘경끼’)를 해서 이이의 계절 4부작 연달아 읽기를 사부작(의태어) 즈려밟고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 나도 <가을> 읽고 경끼했다. ‘경끼’에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뭐가 있다? 맞아, 이 다음엔 토사곽란이다. 경끼는 어떻게 하고 넘어갔다 쳐도 토사곽란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럼에도 언젠가는 스미스의 계절 4부작을 다시 읽게 될 줄은 짐작했지만서도, 쉽게 <겨울>을 뽑아 들지 아니하게 되어, 세월만 4년 가까이 흘려보냈던 거였다. 그래 <겨울>을 읽어보니까 어라, 생각보다 수월하고 재미있고, 앨리 스미스 특유의 말장난이 재치 만땅이어서 곧바로 <봄>까지 읽었다. 그래도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앨리 스미스 초기 작품들보다는 아무래도 재미가 좀 덜하긴 하다.

  이렇게 쓰고 여태 쓴 걸 다시 읽어보니, 염병이나, 이걸 쓴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헛갈려서 좀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개인이자 자연인으로 인간의 뇌활동이 야기하는 특정인의 일탈에 관한 (초기 작품 속)이야기가, 계절 4부작처럼 전 세계적 정치, 환경, 위험과 위협, 난민문제 같은 거대 담론보다 훨씬 내 흥미를 돋구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글이라는 것이 한 번 길을 정하고 나면 다시 옛길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앨리 스미스는 이제 더욱 본격적으로 소설 속에 다양한 정치를 탐색할 것 같다. 흠. 앞으로 이이의 작품을 선택할 때는 더 조심해야겠군.


  대개 예술 장르에서 “봄”이라는 건 희망과 생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근데 이 스미스의 <봄>은 종이에 인쇄해 놓기도 끔찍한 차별과 독선과 악의적인 혐오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한 번 읽어보자.

  “이제 우리는 사실 따위는 원치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건 어리둥절함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반복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반복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권력을 쥔 자들이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그녀는 배에 뜨거운 칼이 꽂혀 비틀릴 것이라고, 또는 당신 목을 매달 밧줄을 가져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원의원들이 반대 당 위원들에게 자살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다른 권력자들을 가리켜 토막을 쳐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이게 작품의 첫 페이지인 13쪽 전문이다. 이런 문장들이 문단을 바꾸지도 않으면서 더욱 강화된다.

  “우리는 고문 같은 이미지들을 원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접근해야 하고, 우리가 접근해 백인 아닌 누구에게든 린치라는 걸 행사할 수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연중무휴로 흑인/여성 국회의원, 아니 공적 위치에서 우리가 싫어하는 어떤 일이든 하는 모든 여성, 아니 공적 위치에서 우리 맘에 들지 않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강간 위협과 살해 위협을 하길 원한다.”

  아오, 나는 이 첫 챕터에 정나미가 똑 떨어져버렸다. 근데 앨리 스미스가 이 책 <봄>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룰 정치현상이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이나 독재와 학정 지역에서 대서양과 지중해를 거쳐 영국으로 흘러든 난민의 정당하지 않은 강제 수용이라, 물론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이지만 이렇게 미리 말해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격노를 원한다. 분개를 원한다. 가장 격앙된 어휘를 원한다. 반유대주의자는 좋고 나치는 훌륭하며 소아 성애증 환자라면 정말로 최고다. 변태 외국인 불법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본능적인 반응을 원한다. 우리는 어린이이주자 연령 검사, 국민 98퍼센트가 추방 요구, 이주 행렬을 막기 위한 무장 항공기, 얼마나 더 수용해야 한단 말인가, 빗장을 닫아 걸고 아내를 감추어라를 원한다.”


  이 문제와 연관된 등장인물이 브리터니 홀, 브릿과 교복 차림의 열두 살짜리 이주 유색인 소녀 플로렌스. 브릿은 <겨울>에서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라고 소개한 바 있는 SA4A, <봄>에서는 HO, 즉 내무부 대행으로 여러 곳에서 산하 IRC(이민자 추방 센터)를 운영하는 SA4A 산하 가운데 한 곳, 런던 근교 소재 IRC에서 DCO(수감자 유치 관리관)으로 근무하는 젊은 여성이다. 플로렌스는 엄마하고 영국까지 도착했지만 엄마(가물가물. 밀항 중 익사?)를 포함한 가족, 친지, 친구 등 모든 사생활을 알리지 않은 밀입국자로 현재 위탁가정에서 살고 있다. 나이가 들어 열여덟 살이 되면 영국인으로 살아도 된다는 허가를 얻든지 어느 곳이 됐든지 간에 추방 처분을 당해야 하는데, 적어도 이 책에서 열두 살의 플로렌스가 모든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을 가지고 노는 걸 보면 그야말로 대천사나 악마가 환생한 걸 보는 듯하다. 플로렌스를 만나 대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꼬마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친절과 편의와, 서비스를 무.료.로, 자.진.해.서 베풀어주며, 소녀가 원하는 대로 행위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심지어 브릿이 근무하는 SA4A의 IRC에 철저한 보안을 뚫고 들어와서 소장을 만나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질문과 관계없는 대답만 얻었을 뿐이면서도 소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수용자들이 사용하는 더럽기 짝이 없는 화장실을 말끔하게, 혀로 핥아도 위생상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깨끗이 청소를 하기에 이를 정도. 이 정도면 대천사나 악마의 환생 맞지?

  이 플로렌스가 오후 근무를 하기 위해 출근하는 브릿 앞에 나타나 몇 가지 질문을 해서, 브릿은 휴대전화로 직장에 휴가처리를 한 후 함께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괴물 파충류가 산다는 네스 호수를 목표로 떠난다.

  그리고 북쪽의 한적한 플랫폼. 한 노인을 만난다.


  2018년 10월, 화요일 아침 11시 9분. 텔레비전 연출가 겸 영화감독 리처드 리스. 스코틀랜드 북부 어딘가의 기차역 플랫폼. 한 친구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에서 자신을 지우려 하는 중이다. 그냥 서 있는 남자. 이쪽은 물론이고 반대편 플랫폼에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리처드 말고는. 열차는 자잘한 사고가 있어 연착 중이다. 그의 휴대전화는 커피가 반쯤 남은 뚜껑 닫힌 커피 텀블러에 담겨 런던 유스턴 로드의 프레타망제 식당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든지, 벌써 쓰레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다.

  죽은 친구의 이름은 패디. 리처드보다 열일곱 살이 많은 퍼트리샤 힐. 리처드가 처음 일자리를 얻은 것이 조감독의 조수였다. 이때 한 영화작업이 패디의 대본 작품이었다고. 벌써 거의 50년 전. 여태 패디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초콜릿 한 조각에 난 잇자국의 흑백 이미지가 떠오른다. 비어트릭스 포터의 잇자국. 한 입 베어물고 내려 놓고는 헛간에 남겨 놓은 초코릿을 잊어버린 비어트릭스. 2차 세계대전 전에 생산된 초콜릿바에 남은 잇자국은 잇자국을 남긴 그녀보다 오래, 그녀가 죽은 천구백 몇 년 이후로도 수십년을 더 살아남았다. 리처드가 보기에 패디의 기억은 천재급이다. 리처드와 함께 열일곱 편의 영화 작업을 했으며 이 가운데 대표작으로 <고통의 바다>와 <앤디 호프눙>이 가장 유명하다. <앤디 호프눙>은 베토벤의 성악곡 “An die Hoffnung 희망에 부쳐”를 사람 이름인 줄 알아 An die가 Andy로 바뀐 일이다. 반은 영국인, 반은 독일인이라 양쪽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야 했던 활촉처럼 예리한 여자. 진정한 희망이란 사실 희망의 부재란 것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An die Hoffnung> 대본을 4주만에,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하는 창의력이 풍부한 작품을 4주만에 써내려간 사람. 필생의 친구이자 단 한 번 연인이었던 동료.

  리처드는 그래서 무너졌다.

  스코틀랜드 북쪽, 자기도 어딘인지 모르는 시골역의 플랫홈에 서서, 이제 연착이 풀려 객차가 도착하면 슬쩍 객차 아래로 들어가 거대한 무게에 몸이 깔려 산산이 부서지기로 결심을 한 남자, 19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반의 유명한 스타 텔레비전 연출자이자 영화 감독 리처드 리스.

  드디어 열차가 도착했다. 리처드는 영국법에 의하여 강력하게 금지된 행위, 철도 레일로 내려가 몸을 굽혀 생각보다 좁은 열차 하부에 몸을 뉜다. 조금만 참으면 되리라. 거대해도 너무나 거대한 무게가 아주 짧은 순간의 고통,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고통의 순간을 지나면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리처드. 바로 이 순간.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섬찟함. 얼른 고개를 돌리는 찰라 열차의 강철 부품에 이마가 부딪혔지만 순식간에 솟구친 아드레날린 때문에 아픈 지도 모르고 눈길을 돌리니 아주, 아주 천연스러운 얼굴로 플랫폼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은 소녀가 말한다.

  “정말이지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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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4-28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녀가 플로렌스, 북쪽의 한 노인이 리처드???인거죠?
저도 가을에 강력하게 막혀 안 나가기로 했네요^^

Falstaff 2025-04-28 16:38   좋아요 0 | URL
옙, 맞습니다. 이런 댓글 나오기 기다렸는데 은하수 님께서 ㅎㅎㅎ
두 명이 만나는 것이 결론이 아니고요, 이래서 한 고비 넘어간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몽땅 모른 척 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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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두 줄 만들었습니다. 내일 버릴 겁니다. 

  이번에는, 이 작자가 미쳤나, 싶은 책들도 좀 보인다,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올가 토카르추크 <태고의 시간들>, 움베르토 에코가 쓴 <푸코의 진자>를 버리다니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라고요?황석영의 <객지>와 <장산곳 매>는 다른 전집류에 다 실려 있어서. 양선형의 <감상소설>은 많이 고민, 책장에 여유가 좀 있더라도 내치지는 않았을 터인데요. 모옌도 있고, 리영희 슨상님도 계시고 친애하는 김향숙 씨의 <겨울의 빛>도 끼었는데, 윽, 정세랑과 가즈오 이시구로, 코맥 매카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한테 이시구로와 매카시는 단지 시간 문제였습니다. 저는 두 양반을 정세랑, 김향숙, 리영희 선생, 모옌과 비교도 하지 않습니다. 뭐 제 마음인 것을요.

  케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전집>은, 이제 보니까 1권만 읽고 별로 재미가 없어서 걍 처박아 둔 모양입니다. 띠지가 아직도 둘러 있으면 틀림없이 건들지 않은 거니까요. 이 책이 있었군요. 안 읽은 책. 크크크크....

  <세일즈 맨의 죽음>은 민음사에서 나온 다른 책이 있어서 금속활자본을 지하로 보냈고요, 레일라 슬리마니, 오르한 파묵의 책도 이번에 끼었네요. 파묵의 빨강머리는 요새 친애하는 이웃께서 읽고, 별로다, 해서? 후후...

  시모의 <릴라는 말한다>는 망설였습니다. 에이모 토울스는 다른 분 생각은 모르겠고 제가 읽기엔 별로라는 수준을 넘어 <모스크바의 신사>를 우연하게 잘 쓴 거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들게 했으니 당연히 여기 들어야지요.

  김애란과 김숨은 저도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강경애는 두 번 읽을 거 같지 않고요.

  <컬러 퍼플>이 후지다고요? 아닙니다. 제가 원래 소설가가 번역한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장이 너무 좋아서, 어색할 만큼 기가 막혀서 원작이 훼손된 느낌이 강하거든요.

  <마이 퍼니 발렌타인>은 왜 버릴까요? 너무 야해서? 그건 아닌데... 잘 모르겠습니다. 뒷발에 채인 거 같습니다. 야하면 좋잖아요, 안 그래요?


​  오른쪽 줄 맨 위에 Advanced Learner's Dictionary는 손때 묻은 겁니다. 저 영어 못해요. 특히 중딩 때 한 선생이 미우면 과목 자체가 하기 싫어지지 않습니까? 저한테는 지방 국립대 나온 영어 선생이 그랬습니다. 이후 정신차리고 영어공부 졸라 했는데 성적은 전혀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당연하지요. 과목 자체가 싫으면서도 오직 점수/석차 올리려고 공부하는 게 이게 발전이 있었겠습니까. 수업시간에 자기 실력이면 설대는 걍 갔을 거란 얘기만 줄창 하던 인간. 그 선생이 제 인생 최고의 허들이었습니다. 이 영영사전도 손때가 겁나 묻었습니다만 제 영어는 거기가 거기더라고요. 뭐 인생이 다 그런 것이지요 ㅋㅋㅋㅋㅋㅋ. 애들 볶지 마세요. 안 시켜도 할 놈은 다 하고, 시켜도 안 할 놈은 다 안 합니다. 대신 다른 거 잘 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더라고요. 하다못해 부모한테 대드는 거라도. (아이고, 진짜로 말하건데, 이건 우리 집구석 얘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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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26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책 아까워서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돼요 돼요...ㅋㅋ

Falstaff 2025-04-26 21:22   좋아요 0 | URL
이왕 벌어진 일, 확 해버리는 게 낫잖습니까. 저도 마음이 좋지는 않답니다. ㅎㅎㅎ

망고 2025-04-26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아까워요ㅠㅠ 버린다고 내놓으면 누군가 새주인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ㅠㅠ

Falstaff 2025-04-27 06:02   좋아요 1 | URL
아내가 당근에 내놓으면 가져갈 사람 있다고 하네요. 일단 현관에 내놓기만 해야겠습니다.

hnine 2025-04-26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버리는 거 잘 해요^^ 비워야 또 채울수 있지요.

Falstaff 2025-04-27 06: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미련하게 짊어지고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

우끼 2025-04-26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태고의 시간들과 푸코의 진자.. 업어오고 싶네요 ㅠㅠㅠ
양선형 소설이 망설여질정도로 좋나요??

Falstaff 2025-04-27 06:05   좋아요 0 | URL
양선형, 읽은 지 오래라 다른 누구와 기억이 헛갈렸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헛갈려도 그걸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면 버려도 괜찮을 거 같지 않으셔요? ㅎㅎㅎ

꼬마요정 2025-04-26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들의 자리를 다른 어떤 책이 차지하게 될 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ㅎㅎㅎ

Falstaff 2025-04-27 06:05   좋아요 0 | URL
이젠 책 안 살거라, 책장에 숨 쉴 공간이 생기는 거에 만족합니다. 수제 책장이라서 가로목이 막 휘어져요. ㅜㅜ

건수하 2025-04-2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스터튼 전집 저도 1권 읽고 그 다음부터 재미없어서 안 읽었어요 ^^ 그래도 가지고는 있는데…

Falstaff 2025-04-27 15:45   좋아요 1 | URL
앗, 이런 댓글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ㅋㅋㅋㅋ

2025-04-27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27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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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는 잠들고 더봄 중국문학 전집 12
거페이 지음, 유소영 옮김 / 더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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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페이의 “강남 3부작” 가운데 <복사꽃 그대 얼굴>에 이은 2부. 무대는 전작 푸지의 상급 현인 메이청현縣. 거페이가 장시성江西省 사람이라 혹시 푸지普濟가 파양호 남쪽에 있는 푸저우抚州시市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1부 <복사꽃 그대 얼굴>의 주인공 루슈미의 아들 탄궁다譚功達, 우리말 발음으로 담공달 씨가 2부 <산하는 잠들고>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40여 년 전 메이청 현 서쪽 산간 평지에 있는 정원이 딸린 영국식 호화스러운 건물이지만 당시에 현의 감옥으로 쓰던 곳에서 슈미 여사가 1년 6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이때 옥 속에서 몸을 풀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이가 오늘날의 담공달 씨, 지금은 마흔살이 훌쩍 넘은 진짜, 진짜 모태솔로, 즉 숫총각이면서 노총각인 메이청 현장이며, 후에 현위원회 서기를 겸임하는 탄궁다 선생이다. 경자년 한여름인 7월3일생. 경자년? 1900년생, 노베첸토. 근데 문제가 있다. 책에 틀림없이 루슈미 여사가 경자년에 탄궁다를 낳았으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바람에 옥졸 메이스광이 데려가서 뱃사공 부자父子 탄수이진과 탄쓰에게 주었고, 이들은 아이를 탄쓰의 아들이라 생각하며 키웠다. 맞다. 그랬다. 그러다 탄쓰가 청나라 군인한테 죽임을 당해 할아버지 혼자 키우게 됐고, 아이가 여섯 살일 적에 어느 하루 길을 잃어 거리를 헤매는 것을 역시 자손이 없는 메이스광 선생이 포구에서 발견해 키우면서 정을 함빡 쏟았다. 아이를 잃은 탄 할아버지가 눈물바람을 하며 온갖 곳을 찾아다녀 드디어 아이를 발견해, 이 아이를 놓고 소송까지 갈 뻔한 것을, 그러면 탄 씨 성을 주어 탄 가문의 대를 잇되, 양육은 메이 집안에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아이는 그날로 탄위안바오가 되었다가 위안바오元寶라는 이름이 지극히 봉건적이라서 큰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 훗날 위안바오 스스로 궁다功達로 개명을 했고 이름이 좋아서 그랬는지 메이청 현장까지 올랐다. 그런데, 뒤에 또 보면 구체적으로 아라비아 숫자까지 써서 1912년생이라고 딱 적어 놓았으니 경자 1900년 노베첸토가 아니라 1912년 임자생이 맞다.


  거페이가 좀 헛갈린 듯. 왜 사소한 거 가지고 목숨 거냐고 하실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자 주인공이자 메이청현장 탄궁다의 비서이며 서로 마음, 순전히 마음으로만 깊고 깊은 사랑을 하게 되는 야오페이페이姚佩佩가 등장하면 좀 복잡해져서 그렇다. 야오페이페이는 상하이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다. 해방이 되어, 즉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페이페이의 아버지는 자본가로 낙인이 찍혀 어느날 늦은 오후에 야오페이페이를 데리고 나가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을 정도로 사준 다음날 총살형을 당한다. 이날 아침 페이페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자기를 품에 꼭 안아주던 엄마는 딸을 학교에 보낸 사이에 집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리고. 졸지에 고아가 된 신세의 페이페이. 이때 메이청 현에서 소학교 교사와 아이 없이 결혼생활을 하던 고모가 득달같이 올라와, 사실은 친척 가운데 누구보다 먼저 집에 남은 가구나 패물 같은 재산을 거머쥐려 했건만 벌써 다른 친척들이 다 들고 가고 애먼 야오페이페이가 홀로 덩그러니 남아, 눈물을 머금고 데려다 키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거다. 몇 해 갖은 구박을 해가며 하여튼 함께 살기는 했다. 그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까짓 것을 키워봤자 도무지 보탬이 될 거 같지 않아 그냥 쫓아내 버렸고 갈 곳 없는 페이페이는 뒷골목 목욕탕 카운터에서 셈가지 파는 일을 했다. 좋게 말해서 박스오피스에 앉았다. 벌거벗은 남자 전용 목욕탕에서. 한겨울에 탄 현장이 과거의 혁명 동지이자 훗날 처절한 배신자가 될 바이팅위와 함께 공동목욕탕에 갔을 때 성질 겁나게 까칠한 소녀 야오페이페이를 눈 여겨 봤다가 나중에 현사무소 사환을 거쳐 비서까지 올렸던 거다.

  전혀 여성으로 볼 마음도 없었던 탄궁다 현장이 무심결에 낙서를 한다.

  1961 – 1938 = 23

  1938 – 1912 = 26

  27 – 23 = 4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61년. 1938년생 야오페이페이, 본명 야오페이쥔姚佩菊, 가슴에 국화를 단 아가씨 나이가 스물셋, 23세. 1912년생인 자신, 탄궁다와의 나이 차이가 26년이란 거다. 마지막 27 – 23 = 4는 안 알려줌. 그런데 정말로 탄궁다의 마음에 페이페이가 여자로 들어오지 않은 건 맞다. 앞부분에도 이런 뺄셈 낙서가 나오는데 탄궁다는 자신이 의식도 하지 않고 그저 이런 숫자 더하기, 빼기를 쓰는 습관이 있다. 당연히 스스로 의식은 하지 못하지만 저 무의식 중에 무겁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겠다. 그러나 탄궁다는 애초에 여자를 파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동성애 혹은 발기부전 증세가 있거나 애초 성불구도 아니다. 저 천하의 배신자 바이팅위가 자기의 어리디어린 조카딸을 소개해 결혼하기 바로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뒤편에 가면 아이 하나 딸린 가난한 극성스런 과부가 덮치는 바람에 결혼까지 해버려 아이도 하나 낳는다. 죽으나 사나 사랑은 오직 하나 야오페이페이를 향하지만 과부와 살림을 합칠 때까지 그런 줄도 몰랐다.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 인구가 워낙 많잖아.


  거페이의 “강남 3부작”은 유토피아, 이백의 싯귀마따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근데 이게 말처럼 되는 거야? 아니, 세상에 한 곳이라도 있기는 있는 건가? 말 그대로 별유천지이건만 비인간, 인간은 빼놓고 얘기하자니 말이지. 1부 <복사꽃 그대 얼굴>에서도 다양한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몇 사람들이 발버둥을 친다. 슈미의 아버지 루칸 선생부터 시작해서, 진품인줄 알고 살았던 한유의 가짜 그림 <도원도> 이야기. 그리고 슈미 엄마의 혼외 연인이자 혁명가인 장자위안 역시 혁명을 통해 새 세상을 추구했으니 그게 바로 유토피아 아니겠느냐, 하는 것. 슈미 역시 흘러흘러 화자서라는 호숫가 마을의, 척 보면 유토피아와 가장 흡사한 공동체, 그러나 도둑 소굴까지 들어갔던 거다. 그러나 별유천지비인간인줄 알았던 화자서에서도 피와 살이 튀는 살인과 권력투쟁과 슈미를 향한 성폭행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참담할 수가.

  평생을 유토피아 건설에 정신을 쏟은 슈미의 아들 탄궁다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마오 홍군에 들어가 혁명전쟁에 투신하다 이제 메이청현의 현장으로 부임한 탄궁다는 메이청현을 중국에서 가장 복된 땅으로 만들기 위하여 ①푸지 호수에 댐을 만들어 전기를 생산해 메이청현과 푸지에 광명을 가져오려 하며, ② 장강과 연결한 수로를 건설해 유통의 편리함과 더불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도 모자라 ③ 중국인의 최애 식품인 돼지 사육의 부산물인 분뇨에서 메탄가스를 농축해 연료와 기타 생산공장 운영에 사용하려 한다. 당연히 세가지 중점사업은 현민들과 현사무소 주요 간부들의 저항을 받으며, 심지어 작은 규모의 폭동까지 일어나고, 그걸 구경하다가 떠밀려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죽는 사람까지 생긴다. 이때 죽은 남자의 아내, 과부가 훗날 마흔살이 훌쩍 넘은 탄궁다의 동정을 수거해서 기어이 남편으로 삼는다니까.

  그러나 엄마 슈미에 이어 유토피아 건설로 자기 나이 드는 지도 모르고 사업에 몰두한 탄궁다를 기다리는 것은 예전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전우, 탄 현장의 직속 부하들의 배반, 그에 따른 추락뿐이었다. 자신은 몰락하고, 비서인 야오페이페이는 모실 상사가 몰락을 한 와중에도 현에서 성省으로, 당원이 되어 영전을 하려다가 인생이 삐그덕, 탄 전 현장보다 더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1부에서 슈미를 다시 보는 것처럼.

  탄궁다는 베이징에 있는 은인이 힘을 써주어 성 일대를 관찰하는 직을 얻어 길을 떠나 작은 마을에 도착하는데, 에그머니, 그곳이 예전에 슈미 엄마가 자신을 임신했던 화자서. 슈미 엄마 시절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이상적인 마을, 이상향, 별유천지비인간이 실체화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다. 애초에 무릉도원은 비인간, 인간이 없어야 가능하다고. 탄궁다는 자신이 본 이상적 공산주의가 실현되는 곳, 화자서의 본질을 알아낸다. 당연히 비극이지 뭐.

  재미있다. <복사꽃 그대 얼굴>만큼은 아니지만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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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25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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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2
페터 플람 지음, 이창남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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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터 플람은 구글 검색해도 별로 알아낼 것이 없다. 189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 본명은 에리히 모스 Erich Mosse. 작가보다는 의사가 더 어울리는 직업이다. 1926년에 데뷔작인 <나?>를 발간한 이후 두 편의 작품을 더 쓰면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다. 1933년 역시 유대인인 마리안느와 파리로, 34년에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정신과 의사로 정착했다. 책 앞날개를 보면 이이의 환자로 윌리엄 포크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진 오닐의 늙은 사위)찰리 채플린 등이 있었단다. 그렇다고 나머지 생을 의사로만 산 건 아니고, 열심히 작품생활을 한 것도 아니지만 작가로도 산 것 같은데, 존경하는 우리나라의 장용학 선생은 나이 들어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되자,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글도 쓰지 못하는데 무슨 작가라고 부르느냐고, 창피하다고 했던 데 반하여, 플람은 1959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펜클럽 회의에도 참석한 모양이다. 뭐 고향 방문단의 의미였겠지.

  근데 <나?>는 꽤 괜찮다. 본문이 169페이지에 끝나는 짧은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포스트모던하다. 도대체 전간기, 특히 1920년대 북동부 유럽, 폴란드와 독일 유대인 작가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당히 스타일리시한 작품들이 많다. 폴란드의 유대인 3인방은 누구인지 아시지? 비트키예비치, 슐츠, 곰브로비치. 페터 플람이 이 3인방 수준이라고,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이의 작품도 근처까지는 간다.


  작품의 첫 문단.

  “내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죽은 이가 나의 입으로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건 내가 아니고, 들어 올려지는 팔은 나의 팔이 아니고, 하얗게 세어 버린 건 나의 머리카락이 아니며, 내가 저지른 일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이 문단을 논리 혹은 상식적으로 해석하기 위하여는, 화자가 유령이거나, 정신착란이거나, 아니면 어제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 <샤일록 작전>처럼 ‘내 속의 또다른 나’ 혹은 ‘페르소나’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① 유령은 아니다. ② 정신착란?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③ 내 속의 또다른 나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페터 플람이 정신의학 전공의 시절이었으니 ② 아니면 ③이다.

  여기서 장면 전환. 1차세계대전 당시의 대표적 격전지인 베르됭. 그곳을 눈 앞에 둔 두오몽의 무수한 시신들. ‘나’는 그곳에 있다. 뼈와 두개골과 재와 ‘나’의 이름, ‘나’의 이름은 아니지만 ‘나’의 이름이기도 한. ‘나’의 운명이 아니지만 ‘나’의 운명이기도 한.

  ‘나’의 이름은 빌헬름 베투흐Bettuch이다. 이게 웃기지만 진짜 이름. Bettuch.침대보라는 뜻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름 때문에 무지하게 놀림을 받았다. 그래도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이 이름으로 평생을 견뎠다. 조용히 감내해왔다. 그러나 빌헬름 베투흐라는 이름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918년 11월 11일. 베를린과 뮌헨에서 혁명이 일어나 전쟁이 4년만에 끝났다고 바쉬 대위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폭탄도, 죽음도, 진창도, 강제도, 법도, 무기도, 강박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와해되고,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 빌헬름 베투흐는 앞으로 뛰었다. 적군이었던 무리의 진영 쪽을 향하여. 그들도 더 이상 충을 쏘지 않을 것이라 믿고. 그렇게 도착한 지점, 한 시절 피아의 접선이었던 곳에 설치한 철조망. 그가 걸려있다. 전쟁이 끝나기 단 하루 전에 부상병을 구하기 위하여 전진했다가 적군이 쏜 총알을 맞고 철조망에 선 채로 걸린 시신. 단 하루 사이에 납탄 하나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아 버렸다. 베투흐였던 ‘나’는 그의 시신에서 회색수첩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는 내 것이다. 그의 여권이. 그의 이름과 그의 운명이. 이것으로 빌헬름 베투흐는 사라지고 한스 슈테른은 계속 삶을 살아간다.


  이제 ‘나’는 기차 일등칸에 탄 많이 배운 부유한 남자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베를린행 기차에 타서, 베를린 역에서 내리고, 벨레뷔 거리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가 말한다. 당신이 돌아왔네요. 그레테가 뭐라고 할까요?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이는 친구 보비다. 그가 말한다. 당신이 보낸 마지막 편지가 매우 기묘했어요. 죽음의 예감이랄까, 그런 소문이 났지요. 그러나 이렇게 다시 나타났으니 다 된 겁니다.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아주 좋아요. 보비가 차를 태워 집 앞에 내려준다.

  ‘나’는 올려다본다. 창문에 기댄 그녀. 빛나는 황금 갈색, 티치아노의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얼굴. 달콤함, 두려움, 고통, 동경, 사랑이 가득한 모습.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이 여인이, 아마도 그레테라고 불리는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내게 입맞춤을 한다. 나는 뜨겁고 둔중하고 몸을 꿰뚫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여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검은 털이 덥수룩한 몸체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의 개가 ‘나’의 살을 물고 흔든다. ‘나’의 피가 흘러 양말 아래로 흐른다. 여자는 나를 ‘한스’라고 부르면서 바지를 걷고 물린 상처를 동여매준다. 여기가 ‘나’의 집이고, 이 여자가 ‘나’의 아내?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왼쪽 가슴 위, 왼쪽 주머니 속의 가죽지갑. 그 안에 든 여권. 안개가 유령 같은 어스름처럼 둘러싸인 무방비한 시체의 도난당한 여권. 이것을 가진 순간, ‘나’는 침대보라는 친구들의 놀림과, 댄스홀 금발 아가씨 리젤의 키득거림에서 벗어난다. 이제 그런 곳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간단하게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인데. 그 시체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행운을 탈취했다. 초록빛 눈을 가진 개한테만 말고. 이 개만 ‘나’를 미워하고 다리에서 살점을 뜯어내 피를 흘리게 하고 ‘나’를 노려보고 거칠게 격앙한다. ‘나’는 그래서 이 개를 귀하게 다뤄야 하며, 쓰다듬어야 한다. 네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개의 이름 네로를 안다. 어디서 이름을 알았을까? 네로. 이름을 부르자 내게 덤벼들어 두 발을 ‘나’의 어깨에 딛고 물기 많은 혀로 얼굴을 핥으며 낑낑대는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를 낸다. ‘나’의 행동이 옳았다.


  심지어 ‘나’, 이제 한스 슈테른이 된 ‘나’는 집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1층에 있는 병원을 개업한다. ‘나’는 외과의이다. 다친 곳을 소독하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뼈를 잇고 깁스를 한다. 어떻게 이런 처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한스 슈테른이기 때문이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도 ‘나’의 속 상처는 그렇지 못하다. 전쟁 4년. 그동안 휴가를 받아 집에 온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작품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레테는 알 것이다. 하여간 ‘나’ 한스 슈테른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그레테는 아들을 낳았고, 당연히 ‘나’의 아들이라 주장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어도 점점 혹시 이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닐 지 모른다고, 드물게 생각하게 되고, 이것보다 조금 더 잦게 ‘나’가 없는 동안 수시로 휴가를 나온 법무관이자 지금은 베를린 검찰청의 검사로 있는 스벤 보르게스와 그레테가 연인 사이일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나’ 속의 프랑크푸르트 출신 프롤레타리아 청년 빌헬름 베투흐는 이런 질투가 한 번씩 휘몰아칠 때 참지 못해 황금 갈색의 티치아노 머리카락을 한 아름다운 그레테에게 손찌검을 하고, 곧바로 뉘우치며 사과한다.

  당연히 행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누구의 아들도 아닌 ‘나’. 빌헬름 베투흐가 한스 슈테른이 되면서 ‘나’는 한 가지를 잃었다. 배꼽. 앞 세대의 누구와도 연결하지 못한 유일한 개체. 그래서 ‘나’의 프랑크푸르트 가족 중 한 명인 누이동생 에마 베투흐는 ‘나’를 결코 알아보지 못한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의사에게 보이기 위하여 무턱대고 베를린에 와서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에마. ‘나’는 에마로 인해, 에마와 더불어 비극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하며,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정말로 ‘나’를 낳은 어머니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죽는다. 배꼽이 없으니까. 누구와도 이어지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이게 다는 아니다. 짧은 작품이니 궁금하면 직접 읽어 보시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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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2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듣도 보도 못한 작가입니다! 근데 환자들이 어마무시하군요!!ㅎㅎ
슐츠와 곰브로비치 근처에 간 작가라...
일단 첫 문장에 끌려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짧은 작품이라서 더 좋군요.
아쉽게도 별4개이지만 정신분석을 다룬 작품이라 구매해야할 각입니다.
폴스타프 님 아니면 이런 작품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알라딘 문학 리뷰 제왕 이십니다!!^^

Falstaff 2025-04-23 15:38   좋아요 0 | URL
아휴... 소쿠리 비행기 태우시면 전 멀미합니다.
이 책 괜찮습니다. 전간기 폴란드 유대인 작가까지 올리기는 여러모로 거시기하지만 일단 짧아서 부담이 없고요, 나름대로 독자들 뇌가 섞이게 만들려고 애 쓰고요, ㅎㅎ 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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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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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왜 예술일까? 밤이 새기도 전에 제일 사랑하는 동무를 세 번 배반한 늙은이의 모습은 어땠을까? 십자가 형을 받고 죽어 이제 내려와 엄마의 무릎에 뉘었어도 성 아드님은 해부학 적 예외가 가능했을까? 예술 표현의 디테일이 이 작품에서 제일 매력적이라고 나는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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