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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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이름 하나만 딱 보고 고르는 책 가운데 유진 오닐이 있다. 오닐의 책은 하여간 눈에 보이는 족족 읽어 치운다. 물론 그렇다고 오닐을 일부러 검색해서 안 읽어본 오닐 어디 숨었나, 뒤지는 수준은 아니고 온라인이나 도서관이나, 현금 주고 사지는 않는 동네 책방에서나 눈에 띄기만 하면 읽는다. 이 책도 우연히 눈에 띄었고, 곧바로 도서신청을 해서 빌려 읽었다.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Mourning Becomes Electra》라니 당연히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을 현대식으로 리메이크 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짐작이 맞았다. 아이스퀼로스의 삼부작에는 오레스테스를 주축으로 해 아가멤논의 도착해 그날로 목욕하다가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아가멤논>, 오레스테스가 친모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친모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쪼개 죽이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오레스테스가 운명의 여신들에게 쫓기다가 아테나의 설득으로 복수의 여신이 복수를 포기하는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아가멤논 가문(아트레우스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류를 넘어서 신화 시대까지 아울러 가장 심한 콩가루 집안으로 세상의 온갖 명예와 부귀와 엉망진창의 가족관계와 죽음과 복수 같은 구토유발 요인을 소중하게 간직한 대단한 집안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숱하게 많은 작가, 화가, 극작가, 시인 나부랭이들이 아가멤논 가문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작품을 만들거나 작품 속에 인용해왔다. 어떤 것들이 있나, 한 번 정리해보려 했으나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내가 미술 쪽에 많이 약해서 양심상 그러면 안 되지 싶다.

  오레스테스 중심의 아이스퀼로스 삼부작과 달리 유진 오닐의 삼부작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는 무대를 트로이 전쟁에서 확 끌어올려 1865년 미국의 남부 분리독립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며, 장소는 그랜트 장군의 직속부대에서 활약한 육군 준장 에즈마 매넌 장군의 저택이다. 아가멤논 당대와 아들 오레스테스네 집구석의 엽기만발한 칼부림도 막장이지만 아가멤논 윗대의 야단법석이 훨씬 더 막강하다. 그러나 유진 오닐은 현명하게도, 마치 아이스퀼로스처럼, 아가멤논의 윗대에 관해서는 극과 관련이 있는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신화상에선 아이기스토스, 드라마에선 애덤 브랜트.

  전직 판사이자 시장, 현직 육군 준장 에즈마 매넌의 아버지 에이브 매넌 씨는 캐나다 출신의 간호사 마리 브란톰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마리와의 연애에 성공한 건 에이브의 동생 데이비드 매넌이었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애덤 브랜트.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교조적으로 엄숙한 기독교가 판치던 곳이 미국 동부였던 바, 장자 에이브와 매넌 가문은 (당시엔 하녀 급이었던)한갓 간호사 따위와 연애를 해 아이까지 퍼질러 낳은 데이비드를 파문해버렸고, 그의 상속분은 거의 헐값으로 몰수해버렸다. 세월이 흘러 이제 애덤 브랜트는 세상 멋진 사내가 되었으며, 에이브의 아들, 그러니까 데이비드의 조카이자 애덤의 사촌형이 운영하는 선박회사 소속 플라잉 트레이즈 호의 선장으로 근무하면서 사촌형수인 크리스틴을 유혹하는 데 성공해 틈틈이 뉴욕의 호텔에서 한 시절 당할 여인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크리스틴과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만들고는 했다. 아이스퀼로스의 극작품에서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처럼.

  애덤 브랜트는 다분히 캐나다 간호사 출신 천한 계급의 어머니를 욕보인 매넌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사촌 형수를 특정해 유혹한 것으로 진정으로 원하던 복수의 끝은 형수를 매개로 사촌형과 결투 끝에 그의 숨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벌써 세상은 19세기의 미국. 결투라니, 어림도 없다. 대신 이들의 딸인 라비니아한테도 껄떡거리기 시작하는데, 라비니아야말로 저 신화시대의 엘렉트라가 환생한 인물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어 애덤의 유혹은 말 그대로 이도 들어가지 않는다. 뭐 이런 스토리다. 크리스틴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남편(이 될) 에즈마 메넌을 사랑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지긋지긋한 시댁식구들과 시댁 가문의 엄격한 격식, 냉정한 몸가짐 등등에 넌덜이가 나, 시媤 자가 들어가는 모든 것, 시금치 뿐만이 아니라, 시모노세키, 시오노 나나미, 시오도어 루즈벨트도 싫어했는데, 어쨌거나 그러면서도 딸 라비니아와 아들 오린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때 뿐, 이젠 남편 에즈마의 살갗이 닿는 것도 징글징글하다. 대신 빈자리를 애덤 브랜트로 메우고 있는 건데, 아이고, 그냥 이혼을 해버리지, 그냥 참고 살다보니 신화적인 비극이 19세기 미국땅에서도 벌어지고 마는 걸 크리스틴은 몰랐었지.

  작품은 전쟁이 끝나고 메넌 장군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 시작한다. 라비니아는 엄마가 브랜트와 뉴욕에서 만나 키스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새나오는 신음소리까지 이미 들어버린 상태. 엄마도 현장을 들켜버렸으니 라비니아한테 이실직고해야 했고, 아빠에 대한 라비니아의 비정상적인 애정을 알고 있는 크리스틴은 저것이 아빠한테 다 일러바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에서는 욕탕에서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아가멤논의 얼굴 위에 어두운 천을 씌운 다음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직접 도끼로 머리통을 쪼개 죽이는 반면, 이미 과학의 시대에 접어든 미국에서는 정부 애덤 브랜트가 준비해준 화학의 힘을 이용해 심장병 약이라고 구라를 치고는 독약을 장군의 목구멍으로 넘겨버린다. 신음을 하는 장군, 문 밖에서 엿듣던 라비니아가 문을 왈칵 열어젖히고 방으로 들어오자 아빠는 두번째 손가락으로 엄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저년이 한 짓이야! 약 때문이 아니야!”

  어떠셔? 정말 《오레스테이아 삼부작》하고 비슷하다.


​  그럼 신화에서 오레스테스 역을 맡은 이 콩가루 집안의 아들 오린은? 가문도 좀 문제다. 전쟁이 터져 시장major를 하던 아버지는 장군 계급장을 달고 전장으로 떠났는데 아들 오린은 정말로 참전하기 싫었다. 그러나 엄격한 누나 라비니아는 엄마 크리스틴이 아들 오린을 자기보다 천배는 더 사랑하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문의 명예와 영광의 지속을 위하여 입대할 것을 강권해 소위 계급장을 달고 참전을 하기는 한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겁이 났지만 여차하면 자신이 지금 겁내고 있다는 것이 뽀록 날까봐, 그래서 가문의 명예에 스크래치가 갈까봐 오히려 더욱 위험한 작전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도가 심해지자 거의 미치는 수준에 임박해 아무도 돌진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악을 쓰며 돌격 앞으로, 약진을 전개하고, 그걸 바라보던 동료 비슷한 미친 놈들도 함께 으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용맹하게 돌격을 감행해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건만, 행운이 언제나 있는 건 아니라서 머리통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아직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가, 아버지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후에 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정작 오레스테스로 읽고 오린으로 발음하는 이 아들은 머리의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니라 전쟁 중에 숱하게 겪은 비참한 상황의 기억에 의한 고통, 즉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끔찍하게 시달리고 있다. 그것이 간혹 공격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비정상적 사고로 나타나기도 해 오린만 등장하면 얘가 무슨 짓을 할지 독자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다.

  유진 오닐의 극작품을 보면 가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참 할 말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와 라비니아, 어머니와 오린, 나중엔 라비니아와 오린 사이의 애정이 예사 가족들 사이에서 따사로운 눈길로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딸이 어머니를,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누나의 애인을, 누나가 동생의 애인을 질투할 정도의 사랑이 흔하게 모습을 드러내 당혹스럽다. 뭐 이 작품만 그런 게 아니긴 하다.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도 그렇고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도 조금 그런 기미가 보인다. 내 생각엔 오닐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지 않고, 오닐이 젊은 시절, 청소년 시절부터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극에 깊은 관심을 두어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그리스의 (특히) 비극 요소를 심어두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전을 읽어두면 이런 것이 편하다. 후에 고전을 인용하거나 변용하거나 리메이크한 작품을 읽을 때 전혀 무리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유진 오닐이니까 이런 대작을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바꾸어 공연시간이 무려 다섯 시간이 넘는 작품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듯하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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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4-18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유진 오닐은 작가 이름만 보고 무조건 읽습니다. 유진 오닐은 자기 가족사를 작품속에 변용해서 투영해 넣는 솜씨가 일품인 거 같아요. 결국 대부분이 본인과 본인 가족의 이야기다 보니 울림도 좀 남다른 거 같고... 하여간 기막힌 작가입니다.
그나저나 최근에 지만지에서 유진 오닐 단막극선이 출간되었는데, 역시 가격이 사악해서 도서관에 신청했는데 신청이 안 되더라고요....?
관리자에게 문의하라고만 뜨고....... -_-; 쳇 제 돈 주고 사봐야 할 거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3-04-18 12:34   좋아요 2 | URL
진짜 가격 너무 사악해요 페이지 수도 많지도 않구만.. ㅜㅜ 전 이 가격이길래 600 쪽은 넘는 줄 알았네요ㅠㅠ

Falstaff 2023-04-18 13:13   좋아요 1 | URL
오닐 작품은 읽기 전에 ˝이번엔 어떤 가족이 등장하나?˝ 호기심이 팍팍 듭니다.
ㅎㅎㅎ 울 동네 도서관은 착해서 사달라면 거절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출간 5년 안에만 신청하면요.
요정님. 도서관 가세요. 진짜 좋아요.

꼬마요정 2023-04-18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어요!! 아트레우스 가문은 모든 막장의 원형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 천재인 듯!! 담아갑니다^^

Falstaff 2023-04-18 13:14   좋아요 1 | URL
옙. 당시 그리스 사람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었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stella.K 2023-04-18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다섯 시간요? 엄청나네요.
실제로 공연되기는 어렵겠네요. 그냥 소설로 쓰지...
몇년 전 도 선생님 작품인가? 우리나라에서 공연됐다고 하던데
그게 6시간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장시간 공연을 즐길 줄 아는 문화가 됐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때 이후로 또 했다는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습니다.
리뷰 사악하고 재밌게 쓰셨네요. ㅎㅎ

Falstaff 2023-04-18 15:49   좋아요 1 | URL
몇주 전에 독후감 쓴 <리먼 트릴로지>도 다섯 시간을 훌쩍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공연도 했고요.
도저히 연극으로는 공연하지 못할 것 같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저는 관람하지 않았는데요, 누가 조시마 장로 역을 해서 대사를 할 지는 무척 궁금했습니다. 정동환이 했더군요. 이순재의 말에 의하면 발음이 제일 좋아서라던데, 수긍이 가더랍니다.
별 거 아닌데 독후감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3-04-19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으셔서 이런 작품도 즐기실 수 있으시니 부럽습니다.
희곡 좋아하시는 골드문트님은 지만지 드라마 정말 너무 좋으실 거 같아요.
도서관에 주문해서 보면 되니 비싸도 상관없구요 ㅎㅎ

Falstaff 2023-04-19 16:21   좋아요 1 | URL
에구, 부럽긴요. 대신 전 백수잖아요. 쿨캣 님도 시간 많은 시절이 올 겁니다. 될 수 있으면 늦게 오기 바라겠습니다. ㅎㅎㅎ
지만지 드라마 좋아요. 비싸서 좋아요. ㅋㅋㅋ 다른 사람들 비싸서 망설일 때 많이 읽고 허풍떠는 재미도 있답니다. 너무 솔직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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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안드리치 단편집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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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 안드리치 팬을 자임하는 내 눈에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이 띄었으니 어찌 안 읽고 넘어갈 수 있나. 그리하여 득달같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꼬박 한 달을 기다린 끝에 기쁨을 억누르며 드디어 첫 장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런. 이거, 읽은 책이다. 물론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이라는 제목은 아니다.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2001년에 초판을 찍은 《아스카와 늑대》라는 책이었다. 역자 김지향金志香의 진짜 도장이 찍힌 책이다. 여전히 내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 있(거나 방바닥부터 대책없이 쌓은 책 탑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한 번 찾아보고 있으면 사진도 올리고, 못 찾으면 그냥 두겠다. 세상에 이런 일이. 책값은 비싸지만 믿고 읽었던 출판사가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였건만. 책 뒤에 보면 초판 1쇄 펴낸 날이 2009년 4월, 지금 표지를 하고 가격을 조금 내린 개정판 펴낸 날이 2021년 10월. 흠. 말도 안 돼. 초판 1쇄는 연극과인간에서 찍은 2001년 5월이다. 이렇게 써야 올바르다.

  거참. 만일 이거 돈 주고 샀다면 스팀 좀 뿜을 뻔했다. 도서관에서 구입한 것, 즉 시민들 세금으로 산 거라고 열을 받지 않은 건 아닌데 그래도 직접 내 돈 주고 산 거보다는 아무래도 덜 돈다. 세상 인심이 다 그렇지 뭐.

  2019년에 나는 이 책의 진짜 초판본 《아스카와 늑대》를 읽고 쓴 독후감을 이렇게 끝맺었었다.

  “표지가 귀엽게 생겼다고 동화 읽는 기분으로 골랐다가는 골로 가는 책. 주의 바람.”




+++++++ <아스카와 늑대> 독후감  2019년 11월



  저 먼 먼 기억의 삽화



 출판사 “연극과 인간”은 주로 희곡을 출간하는 회사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우리나라 독자들이 잘 찾지 않지만 정말 좋은 작가, 라고 내가 생각하는 보스니아 사람 이보 안드리치의 단편소설집을 냈다. 2016년에 그해에 내가 가장 감명 깊게 공감하며 읽은 책으로 안드리치가 쓴 <드리나 강의 다리>를 꼽은 적이 있다. 2017년에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 작년엔 김태정의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그러고 보니 벌써 11월 중순, 올해도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겠다, 라고 썼는데, 왜 이야기가 난데없이 삼천포 시로 빠졌을까. 그래, <드리나 강의 다리>. 이 책을 번역한 이가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어를 가르치고 있는 수석연구원이라고 하는 김지향. <아스카와 늑대>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빨간 인주 묻힌 인지가 붙어 있고, 거기에 예쁘장한 한자어로 ‘金志香印’이라 박혀있다. 내가 비록 이이가 번역한 <드리나 강의 다리>를 2016년에 읽은 최고의 한 권으로 뽑은 적이 있지만, 안드리치의 다른 책 <저주받은 안뜰> 독후감에서는 번역한 한국어 문장의 질에 관해 아주 모질게 독설을 펼친 바 있어, 사실 이이의 또 다른 작품인 <아스카와 늑대>를 읽은 감상을 쓰기가 좀 캥기기는 한다.
 《아스카와 늑대》는 작가가 쓴 서문 격인 <어떻게 내가 문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됐을까>를 제외하면 단편소설 일곱 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 우리가 단편소설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이보 안드리치의 단편들 역시 매우 매력적이다. 특히 첫 두 작품 <파노라마>와 <서커스>를 매우 좋게 읽었다. 두 작품의 구조는 비슷하다. <파노라마>에서는 어렸던 시절의 기억으로 남은 시장통 마당에 자그마한 가두 상점을 빌려 오스트리아 사람이 파노라마,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대형 만화경쯤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구경거리를 열었고 소년 시절에 이국의 정경들을 보며 무한대, 소년 특유의 무한정의 상상력을 펼쳤던 것을 기억하며, 어느 새 순식간에 이제 나이 들어 당시의 감정을 회상하는 작품이고, <서커스> 역시 어린 시절 시장 공터에 서커스단이 와 천막을 치고 공연을 했는데 워낙 어려서 부모가 자신을 데려가줄지 아닐지, 아닐 것이 분명해 울음을 터뜨리기 바로 직전에 함께 가기로 결정을 했으며, 난생처음 서커스, 기묘하고 긴박하고 긴장되는 공연에 자지러지다가 또한 갑자기 수십 년이 흘러 당시 서커스단의 단장을 만나는 시간의 전이가 벌어진다. 글쎄, 요즘 젊은 분들이 파노라마와 서커스 구경, 그것도 옛 시절의 (파노라마는 분명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서커스를 봤을지 확실하지 않아 이 이야기에 공감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노년의 작가가 소년시절을 떠올려 상상해가며 차분하게 쓴 단편소설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물론 다른 다섯 편의 단편들도 다른 외국 소설가들의 단편들에 비해 더 친근하게 느꼈지만 그것들에 비해 <파노라마>와 <서커스>에 훨씬 공감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가격도 착해서 10% 할인 가격이 6,650원이다. 단편 한 작품에 천 원 미만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기는 하나 요새 유행하는 가격대비 성능비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거 같다.



* 표지가 귀엽게 생겼다고 동화 읽는 기분으로 골랐다가는 골로 가는 책. 주의 바람.


​ 책 찾았다. 안드리치 팬이라고 그래도 쉬운 자리에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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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15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귀여운데요? ㅎ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언제 다시 읽어도 좋죠. 평을 좋게하시니 저도 기회되면 기억했다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주말요.^^

Falstaff 2023-04-15 17:10   좋아요 1 | URL
오, 조심하세요. 알라딘 독자 서평을 보면 제가 최고의 평가를 하는 드리나 강의 다리 조차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괜히 큰 기대 하시고 읽으셨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yamoo 2023-04-15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저도 그렇습니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광팬으로서 그의 작품들이 눈에 띄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사오곤 했는데, 읽어보면 타이틀만 바꿔서 단 번역본. 빡치는 기분을 몇 번 당하니, 뭐 그려러니 합니다..ㅎㅎ

이보 안드리치...저도 나오는 족족 사려고 하는데, 번역된 작품이 별로 없네요..^^;;

Falstaff 2023-04-15 17:13   좋아요 0 | URL
슈니츨러도 그런 책이 있었군요! ㅎㅎㅎ
안드리치 번역은 다 읽은 거 같은데요, 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세나 유리나츠가 보스니아의 역사를 알고 싶으면 안드리치의 작품 <대신과 영사>를 읽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만 <대신과 영사>만이라도 얼른 번역해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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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삶
피에르 미숑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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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참 희한한 사람일세. 1945년 중부 프랑스 크뢰즈 지방의 샤틀뤼르마르셰에서도 촌동네인 작은 레카르 마을에서 태어난 것도 좋고, 만으로 서른아홉 살이던 1984년에 자기가 하여튼 엮여서 살아온 집안 사람들과 어릴 적 살던 동네의 존경할 만한 주정뱅이와 농투성이, 사제, 장난꾸러기 아이들에 관한 기억,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이었다면 노인들이 해주던 이야기에다 그랬을 것이라는 작가적 상상력을 보태 연작 장편소설을 쓴 것도 좋다. 작가는 그럴 권리가 있는 직업인이고, 가문에 작가가 한 명 생겼다 하면 자기들이 살아온 방식이 어떻게 해서든지 결국은 죄다 까발려지게 되는 것이, 가족 구성원 가운데 재수없게 작가가 된 식구를 거느린 가족의 숙명이니까. 미숑이 제목을 “사소한 삶”이라고 했지만 세상에 “사소한” 삶이 어디 있니? 남들 보기에 조금 사소해 보일 망정 당사자들은 즐겁기도 하고 목이 메기도 하고 정말로 목을 매달기도 했던 일상사 가운데 한 번이라도 사소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사소한 삶”은 반어법이겠지. 남 보기에 사소하지만 자기 마음 속에는 중요하기 그지없는 가족의 삶을 피에르 미숑은 천연덕스럽게 내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숑의 가족사 정도면 장소가 중부 프랑스이건 가난한 동부 튀르키예이건, 경상북도와 강원도를 접경한 남동쪽 봉화나 영양쯤 대한민국이건 흔하지는 않지만 동네에 적어도 한 집구석은 있을 법한, 그리 유별난 삶도 아닌데, 현대 프랑스에서 이름을 휘날리는 소설가인 피에르 미숑의 유별난 화려체 문장 덕에 사소하기는커녕 데뷔작 한 편으로 하여금 시작부터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걸작 A genuine masterpiece in contemporary French literature”이라고 상찬을 받았단다. 나는 이런 표현을,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지금 독후감을 쓰기 위해 위키피디아도 찾아보고, 옮긴이 윤진의 해설도 읽어보면서 알았기 망정이지, 만일 처음부터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걸작이라는 등의 말을 미리 읽었더라면, 제일 앞 장인 “앙드레 뒤푸르노의 삶”에서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이후부터 조금씩 고개를 외로 꼬았을 듯싶다. 왜냐하면, 이건 꼭 알아 두셨으면 좋겠는데, 후진 가족의 뚝뚝 떨어지는 궁상이 지겨워지는 것이 아니라, 앞 장chapter에서 감탄하며 읽었던 화려한 은유와 감각적 수사와 현학적인 차용과, 낡고 누추해서 더욱 아름다운 추억이란 조미료의 놀라운 문장들이, 아오, 지겹도록 계속되는지라, 우리 조상님이 말씀하신 대로, 꽃노래도 삼세번이라고, 질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 스테이크가, 참돔 회가 맛나더라도 삼시 세끼, 일주일에 일곱 번, 한 달에 서른 날 같은 걸 먹으면 그게 식도락이니, 고문이니? 피에르 미숑의 글이 후졌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절대로, 한 번 더 강조해서 절대로 아니다. 서양의 권위 있는 평론가 집단이 “현대 프랑스 문학의 마스터피스”, 그것도 genuine masterpiece 라고 강조했다시피 글 좋고, 꼬질꼬질해서 더욱 추억 같은 (성공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누선자극 의도도 괜찮았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 이 작품에 열광할 수 없었던 것은 첫째가 여태 이야기한 과도한 미문, 그것도 겁나게 화려한 수식과 뭐 하나 그냥 이야기하고 지나가지 않는 (조금 과장해서)탐미주의적 은유의 능선이 그걸 넘기 힘들게 했고, 둘째 이유로, 복잡한 가계도, 저 먼 옛날, 앙투안이라는 남자를 끝으로 아들을 생산해내지 못해 “대가 끊긴” 플뤼셰 가족의 한 시골 여자가 역시 시골 농부와 결혼해 외동딸 마리를 낳았고, 마리는 팔라드 라는 성姓의 남자와 결혼해 또 두 딸을 낳았는데, 맏이 카틀린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둘째 필로멘은 레카르 마을(이제야 나온다, 레카르 마을이)의 폴 무리코와 결혼해 외동딸 엘리즈를 낳는다. 이 엘리즈가 피에르 미숑이라고 읽는 화자 ‘나’의 외할머니다. 엘리즈는 펠릭스 게오동과의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외동딸인 내 어머니 앙드레를 낳고, 어머니는 에메 미숑과 결혼해 역시 맏딸 마들렌을 낳지만 마들렌은 어려서, 불과 두 살도 되지 않아 백혈병으로 숟가락 대신 젖병을 내려놓고, 이후에 다시 ‘나’, 피에르 미숑을 낳는다. 그리하여 ‘나’는 앙투안 플뤼셰(의 누이), 마리, 필로멘, 엘리즈, 앙드레, 피에르의 계보에 따라 5대 만에 처음 태어나는 아들인 셈. 엄마 앙드레의 처녀 적 이름이 앙드레 게오동이고, 에메 미숑과 결혼하며 앙드레 미숑이라는 이름이 생겨 ‘나’ 피에르 미숑을 낳았지만, 피에르가 소년들의 투견장인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마치고, 조현증 증세가 가볍지 않은 천재 극작가/연출가 앙또냉 아르또의 극단에서도 일하는 한편, 열심으로 술과 약물에 절어 있다가, 그리하여 두 여자로부터 이별을 당한 후에, 드디어 처음 발표한 소설 <사소한 삶>을 엄마는 엄마지만 ‘앙드레 미숑’이 아니라 ‘앙드레 게오동’에게 헌정했다는 것은, 피에르 미숑이 아버지를 부정했다, 엄마 앙드레 게오동의 혼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비록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인 클라라와 외젠의 사랑을 받았던 것과 그들의 친절은 기억하지만, 어려서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이유가 아니고, ‘나’ 피에르의 알코올 의존과 약물 장복이 아버지인 외눈박이 에메로부터 드러운 유전자를 내려 받았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이다. 어떠셔? 정말 아버지 쪽, 그러니까 미숑 가의 핏줄이 깨끗하지는 않지? 비단 할아버지 외젠은 사람이 부드럽고 유약하고 아내 클라라한테 찍소리 한 마디 못하고 살지만, 외눈박이 아버지로부터 알코올과 약물 의존의 유전자를 받은 거 하나만 가지고도 치가 떨렸을 거다. 내가 언젠가 이야기했다. 알코올 의존의 80%는 유전이라고.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이 술을 끊는 것이며, 스스로 알코올 의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후세의 안녕과 복지와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후손의 생산을 포기하는 걸 한 번 진지하게 생각들 해보시라고. 아버지 에메도 자신의 알코올 의존을 알아채고 처자식이 조금이나마 자유스럽게 살라는 깊은 뜻에서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건 아닌지,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난 서른아홉 살의 아들 피에르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아비가 되어 처자식을 나몰라라 했던 것이 그토록 서럽고 분해서였을까?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이 작품이 조금 유감스러웠던 둘째 이유와 셋째 이유가 호박넝쿨처럼 한꺼번에 나왔는데, 둘째가 복잡한 가계도를 너무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실명을 그대로, 족보에 관계없이 그냥 사용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남의 집구석 이야기를 과하게 듣는 마당에 족보 여하가 마구 헷갈렸기 때문이며, 셋째가 나 스스로가 비록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알코올 의존 성향이 있어서 피에르 미숑의 알코올 의존과 약물 의존에 관한 묘사가 심장을 너무 콕콕,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던 것이 이 책에 후한 점수를 매길 수 없었던 이유였다. 마지막 이유는, 사실 이걸 세번째로 넣었으면 좋겠지만 알코올 의존과 가계도를 따로 떼기 쉽지 않아 마지막에 놓았을 뿐으로, 시와 소설, 극작, 회화 같은 것들을 마구 인용해, 동아시아 독자는 마치 인용한 것을 모르는 것이 이 책을 충분하게 감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현학적 태도였다. 하지만 이런 지적질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아름다운 문장으로 일관한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함부로 이 작품을 필사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감정의 과다한 분비를 의도적으로 하는 작가들은 없다. 아니지. 내 주제에 무슨 단정을 하나, 그리하여 다시 쓰면, 없을 것으로 믿는다.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어떻게 미문을 만들어볼까 궁리하다가 드디어 그것들로 촘촘히 날줄과 씨줄을 엮어 한 장의 결 고운 비단을 만든 후, 조금 멀리서 한 마리 누에가 토해 놓은 곱디고운 실의 모음에 과다한 감정 분비물로 질척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지경 바로 앞에서 일단 정지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서 말씀입니다, 하여간 조심하고 조심해서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아름답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이런 작품이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다고 대책 없이 필사했다가 나중에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디서 써먹고는 큰 코 다칠 수 있으니. 그 정도로 문장이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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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4-13 0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제가 이거 읽다가 질려버렸지 뭡니까! 문트 님 리뷰 다시 봐도 또 절레절레 ㅋㅋㅋㅋㅋ 전 이이 책은 또 안 읽을 거 같아요. 질린다 질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4-13 18:0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 마음 이해 합니다. 저도 굳이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레이스 2023-04-13 0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삶이란 없죠.
골드문트님!
북튜버를 하심이 어떠실지, 입담도 장난 아니실듯 하여... 이 글대로 말씀하시면 정말 재밌을 겁니다.

Falstaff 2023-04-13 18:10   좋아요 1 | URL
아휴, 저는 입담 별로 없어요. 발음도 좋지 못합니다. ㅎㅎㅎ
이 페이퍼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구 써버린 겁니다. 그리하여, 물론 그러실 리는 없지만, 조금만 꼼꼼하게 읽어보시면 말이 안되는 문장, 소위 비문이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고칠까 말까 하다가 독후감을 한 방에 쓴 증거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내버려 둔 것입지요.
재미나게 읽어주신 거 같아서 기쁘네요. ^^

stella.K 2023-04-13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들수록 소설 읽는 게 자신없어 지더라구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게 맞나? 자꾸 의심하게되고
되돌아 다시 읽어야할 것 같고.
이책은 읽을 자신이 없어지네요.
문장 좋은 작가들 부럽던데.
몇년 전에 노르웨이 작가가 <나의 투쟁>인가 4권짜리
나왔잖아요. 1권의 반을 읽다가 접은 아픈 기억이 나네요. ㅋㅋ

Falstaff 2023-04-13 18:15   좋아요 1 | URL
그까짓 소설 읽는 거에 무슨 자신이고 뭐고가 있어요? ㅎㅎㅎ 걍 읽고, 뭐 그런 것이지요. ㅎㅎㅎ 너무 심각하십니다.
<나의 투쟁>은 아이고... 저도 한겨레든가 하여튼 신문매체의 평가가 하도 화려하기에 무려 내돈내산했다가 1권 초장에 키 크고 험악하게 생긴 아빠가 수퍼마켓에서 아이들 어깨를 쥐고 앞뒤로 흔드는 것까지 읽고, 도무지 더 읽어줄 수 없어서 확, 방바닥에 팽개친 게 생각나네요. 근데 그게 뭐 어떻습니까. 걍 팍팍 읽으셔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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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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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버나드 맬러머드는 미국의 소설가로 솔 벨로우, 조지프 헬러(아니, 이이도?), 필립 로스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20세기 미국 유대 작가로 불린다고, 위키피디아는 설명하고 있다. 위에서 조지프 헬러를 거론할 때 왜 “아니, 이이도?”라고 의문을 표했는가 하면, 유대인 가운데 전쟁에 참가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헬러는 1942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공군에 입대해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이 되어 당시의 경험을 밑천 삼아 명작 블랙 코미디 수준의 반전소설 <캐치-22>를 쓴 작가. 맬러머드는 1914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된 진주만 폭격이 일어났던 1941년엔 스물일곱, 사실상 참전을 목적으로 미국의 젊은이들이 입대하기 시작했던 1942년엔 스물일고여덟. 대학 학부를 졸업했으니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 존 밀러 대위처럼 장교로 입대해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에 이이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토마스 하디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따고, 194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눈치 받았겠다고? 눈치 주는 거 모르는 척하는데 도가 튼 종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란 거 모르셔? 그래, 그래. 유대족이 아닌 백인 가운데서도 그랬던 인간이 있지. 스토너라고. 1차 세계대전이었지만. 갑자기 웬 스토너? 생각날 때마다 그가 미워서 그런다.

  맬러머드의 주요 작품은, 나는 운동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안 봤지만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인공을 한 영화의 동명 원작이자 데뷔작인 <더 내츄럴>. 1984년 작품 출간 이후 31년만에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세를 탄 작품이다. 그러나 실제로 맬러머드가 소설을 써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즉 전업작가로 성공할 떡잎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두번째 작품인 <점원>이 전미도서상 최종심까지 올라갔을 때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58년 개의 해에 단편소설집 《마술통》으로 기어이 전미도서상을 받는다. 불과 8년 후엔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를 그린 <The Fixer: 수선공>으로 두 번째 전미도서상과 미국작가들의 꿈인 퓰리처 상을 받았으니 대단한 성가를 누렸을 텐데, 설마 유대인들이 이리저리 밀어줘서, 소위 문화계 내의 유대 마피아들이 여기저기에서 압력을 넣은 결과는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자. 의심해봐야 증거도 없고 괜히 정신건강에만 좋지 않다. (내가 왜 이리 심통을 부리느냐 하면, <점원>이 정말 전미도서상이라는 큰 상의 심사에서 최종심까지 올라갈 만큼 대단한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우리나라의 누가 말했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유대인 엄마 아빠한테 물총 잘 맞는 것도 실력이긴 실력이겠다. 꽤 오랫동안 노벨 문학상을 줄 때에도 특정 작품에 대해 심사를 했던 적이 있다. 어디선가 이이가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였다가 미역국 먹은 적도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도무지 어디서 본 것인지 찾지 못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튼 노벨상 못 받았다. <점원>은 전미도서상 수상엔 실패했지만 미국 문화계 유대인협회에서 주는 ‘전미유대종족문학상’은 받았다고 한다. 그래, 이 정도면 양해해주지. 흠.


​  작품의 무대는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 빈민가라고 하면 너무 험악할 거 같아서 그렇게 쓰기는 조금 무리다. 이 동네에 60세 노인 모리스 보버 씨가 있어 한 자리에서 21년 동안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다. 아침 여섯 시에 병에 든 우유 박스와 빵을 들여놓고, 이름은 모르지만 폴란드에서 온, 할머니까지는 아니고 나이 든 여자에게 3페니어치 빵을 파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밤 열 시까지 꼬박 계산대 뒤에 서서, 정말 하루 종일 그렇게 서 있으면 하지정맥류로 인한 관상동맥 이상으로 벌써 세상을 떴을 터이니, 오전의 상당한 시간 동안은 유대여인인 아내 ‘이다’가 가게를 좀 봐주는 식으로 일주일에 7일을 쉼없이 열고 있었다. 식료품점이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길 건너에 독일 이민자가,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고 하필 독일에서 온 이민자가 최신식 식료품점을 내는 바람에 이젠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고 있어서 혹시 등장할지도 모를 멍청하고 불쌍한 인간에게 이 감옥살이 itself를 헐값에라도 팔아버리고 싶어한다. 가게 말고 위층에 방이 있어 푸소 가족에게 세를 주었는데, 하다못해 이 푸소 가족들마저 길 건너에서 식품을 사고는 혹시 모리스가 볼까, 들킬까 싶어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드나들 정도니 뭐 말은 다 한 거다. 모리스와 이다 사이에는 맏딸 헬렌이 있고, 아래로 에프라임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과거시제니까 당연히 아들은 병들어 죽었다. 그러나 부모 마음에는 크고 크고 또 큰 상처로만 아직도 살아있다.

  식료품점이 장사가 얼마나 안 되는지, 유대인들이 자식 교육 하나에는 정말 열심인 거 아시지? 똑똑하고 문학에 관심이 지대한 헬렌을 대학에 보내려고,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보려 노력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댈 수 없어서 헬렌은 비서 자리를 얻어 취직을 했고, 야간대학에 1년을 다녔지만 주경야독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서 너무 힘들어 때려치우고 말았다. 여기까지면 그래도 없는 집안이 다 그렇지, 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이 집구석은 장사가 안 되도 너무 안 돼, 헬렌이 받은 봉급의 거의 대부분을 (‘가게’ 말고)가계에 보태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소설에서나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같은 유대인이자 좀 멍청한 친구 줄리어스 카프는 어떻게 하다가 주류 영업권을 따고, 잘 사는 친척이 종자돈을 대주는 바람에 가난한 동네에 주류판매점을 개업해 대박이 난 인물이다. 가난한 동네가 술은 더 많이 팔리는 건 뉴욕이나 런던이나 춘천이나 마찬가지다. 돈이 많아지면서 저절로 똑똑해지기 시작한 카프 사장은 어느 날 밤, 가게 맞은 편 도로에 불 꺼진 승용차가 서 있는 걸 보고 일찌감치 문을 닫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애초에 영업이 잘 되는 주류판매점을 털려고 했던 두 명의 권총강도는 꿩 대신 닭이라고 카프네 말고 가뜩이나 장사 안 돼 돈이 떨어지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날이 헬렌의 봉급날이라서 봉급 받은 대부분을 가지고 있던 모리스 씨네 식료품점에 쳐들어와 돈을 다 털어가고, 그것밖에 없냐고, 더 내놓으라고 협박하다가 급기야 권총으로 쏴 죽이지는 않고, 권총 손잡이로 모리스의 이마를 후려쳐 까무러치게 만들어버린다. 이때 때린 놈은 동네 전담 경찰의 아들 워드 미노그, 폭행을 말리다가 졸도하기 일보직전의 모리스에게 물 한 컵을 떠다 준 놈은, 흠.

  그해의 11월의 화요일. 동네에 한 젊은 남자가 등장한다. 검은 턱수염, 낡은 갈색 모자, 갈라진 에나멜 구두와 해졌지만 검정 롱코트를 입은 남자는 며칠 동안 모리스 씨네 식료품점을 관찰하는 것 같다. 프랭크 알파인이라는 이탈리아 계로 부모가 없어서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누이가 가리발리 부인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그건 거짓이라고 실토한다. 그가 어떻게 해서 식료품점에 들어오고, 척 보니까 돈 한 푼 없는 걸 알아챈 모리스 씨는 (없는 자들에게는 언제나처럼)차와 빵 같은 걸 먹여 보내고 그랬는데, 어느날 밤 글쎄 지하실에서 뭔 소리가 나길래 집안에 하나 있는 남자라고, 몽둥이를 든 채 지하실 문을 열고 불을 비춰보니 이 추운 날에 거기에 프랭크가 잠들어 있는 거였다. 프랭크는 이때 자신의 신상에 관해 전부 털어놓고 급여는 없어도 좋으니 그저 먹여주고 지하실에서라도 잠만 재워주면 자기가 점원으로 일해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군식구 하나를 더 들일 수 없는 모리스 보버 씨. 거절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프랭크는 오히려 더 열심으로 가게를 청소하고, 물건을 받고, 모리스 씨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친절로 손님들을 맞은 결과, 놀랍게도 놀라운 매출을 올리고 만다. 와우. 근데 모리스 씨, 이때는 몰랐다. 나중에는 눈치를 챘지만.

  프랭크 알파인이 가게에 쳐들어온 권총 강도 가운데 물 한 잔을 떠온 강도였으며 갑자기 올라간 매출은 당시 자기 몫으로 워드 미노그가 프랭크한테 준 돈의 전부였다. 프랭크, 얘 정체가 뭐야? 회개한 검은 양? 좀 웃긴다.


​  이 작품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 유대성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나는 한 집단으로의 유대인이란 종족이 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 그들의 정체성과 폐쇄성, 그리고 종교에 관해서는 특히 관심이 없다. 작품의 말미에 랍비 하나가 나와 누가 유대인인가, 하는 문제를 설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게 뭐? 나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훅, 읽고 지나쳤다. 그건 이 작품이 나온 1950년대에나 중요한 것이지 지금에 와서 유대인인지 아닌지 뭐가 중요한가 말이지. 소설 속에 모리스의 딸 헬렌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니 틀림없이 연애하는 장면도 나온다. 헬렌을 둘러싸고 부모, 이웃 간에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혼인을 해야 하고, 유대인이 아닌 족속들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것도 줄창 나오지만 그래서 뭐?


​  말이 나온 김에 하나 정확하게 하자. 역자 이동신. 나이도 좀 있는 거 같은데 헷갈린 모양이다. 위에 모리스와 이다 보버 부부 사이에 큰 딸, 효녀 중의 효녀 헬렌이 있다. 헬렌의 연애담도 당연히 등장한다. 그리하여 한 장면이 나온다.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은 씬이다. 어쨌든 이제 막 결합을 하려는 순간, 헬렌의 입에서 욕설이 터진다.

  “잠시 후, 그녀가 소리질렀다. ‘개자식 ᅳ 포경도 안 한 개자식!’” (p.249)

  헬렌도 유대인이니까 여기서 말하는 건 상대가 할례를 안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포경도 안 한”은 “포경(수술)도 안 한”의 뜻이란 건 안다. 하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저자, 역자는 일반 독자하고 똑같이 쓰면 안 된다. 포경은 包莖, 감쌀 포, 줄기 경. 줄기를 감싸고 있는 것, 인간종의 수컷에서 줄기를 감싸고 있는 건 뭐 다들 아시는 것과 같이 소위 “조껍데기”다. 그러니 “포경도 안 하다”는 줄기를 감싸지도 않은 것, 즉 할례를 했다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의미와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니 틀린 번역이다. 우리도 알고 쓰자. 대신 “할례도 안 하다” 또는 “포경수술도 안 하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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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1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대남에겐 중요하군요 ㅋㅋㅋ 안한 걸 햇다하면 안돼죠 ㅋㅋㅋㅋ

Falstaff 2023-04-11 09:35   좋아요 0 | URL
남자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녀한테 까고 안 까고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레마르크가 쓴 <그늘진 낙원>에선 1940년대 스페인의 진보적 유대남들은 안 까기도 했던 걸로 나오더군요.

- 2023-04-11 11:14   좋아요 0 | URL
엥 근데 저 궁금한데 유대인 할례랑 우리나라 포경수술도 관련이 있나요? 식민잔재인가… (찾아볼게요!!)

- 2023-04-11 11:19   좋아요 0 | URL
헐 ㅋㅋㅋ 남한만 하네요 ㅋㅋ 미군정기 유행템이었대요 ㅋㅋㅋㅋㅋ 요즘엔 안한대요… 갑자기 식민지 분단국가 남성들이 짠해지네요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4-11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 진짜 마지막 대목은 왜 이렇게 웃깁니까? 유대인에겐 중요하군요. 그럼 진짜 비유대인과연해하기 힘들겠네요. 유대인이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하는 힘이 종교만은 아니군요. 할례 즉 포경수술이(뭐 이것도 종교에서 기인한거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

Falstaff 2023-04-11 11:46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이거 TMI 인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밝히겠습니다.
저는 스물여섯 살에 제가 직장 다녀서 번 돈으로 병원가서 시술을 했습니다만,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할 거 같아요. 마치 새 세상을 만난 것처럼 뽀송뽀송한 세계를 경험한다니까요. 유대인들, 아랍인들이 다 머리가 있어서....ㅋㅋㅋ
붕대 감은 채로 직장 점심시간에 족구하다가 축구공에 맞아 실밥이 터져 붕대가 시뻘개졌을지언정 아문 다음엔 까짓 것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당연히 종교하고는 관계 없습니다.

- 2023-04-11 12: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뒷부분 사정도 아는데 골드문트님 ㅋㅋㅋ 죄송해요 ㅋㅋ 기억력이 좋아서 ㅋㅋㅋ

Falstaff 2023-04-11 12:25   좋아요 0 | URL
저 뒷부분에 뭐가 있는지 저도 모르는데요. 뒷부분이라면 치질 얘기 같습니다만. ㅎㅎ
그게 아니라면 저도 궁금하니 공개하셔도 좋습니다. 전 치핵, 치루 같은 거 말고, 치열이 조금 있어서 술이 좀 과하면 다음 날 약간 째집니다. 그거 얘기 같군요.

- 2023-04-11 12:35   좋아요 0 | URL
네 뜻하지 않았지만 앞뒤사정과 히스토리를 알게되어 … 많이 걸으실테니, 술 좀만 드시구요!!!!

바람돌이 2023-04-11 15:2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족구하다 공에 맞고도 잘 아물어서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제가 아들이 없어서 교훈을 들려줄수 없음이 슬플따름입니다. ㅎㅎ

blanca 2023-04-11 13: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연히 유대인들 핍박 받은 역사에 대하여 증언적 문학을 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만, 그 정체정 자체와 특권적 현재 위치를 적절히 타협하여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 있어요. 과거를 이용하면서 현재적 특권을 공고히 하는 거잖아요. 골드문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Falstaff 2023-04-11 14:59   좋아요 0 | URL
과거의 피해가 지금의 특권으로 되는 현상, 그게 또 미움/증오로 변이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동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oolcat329 2023-04-11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몰랐던 사실을 알았습니다. 뭐든지 대충 알 것이 아니라 한문의 뜻을 정확히 알고 사용해야겠어요.

유대인이 전쟁에 참전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군요. 그러고 보니 저의 인생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연합군이 히틀러 술창고 발견했는데, 극중 실존 인물이었던 한 유대인 장교가 히틀러 한정판 코냑을 가져와 나중에 손자 성인식 때 썼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ㅎㅎ

근데 조지프 헬러의 <캐치 22> 읽다 포기 했는데 다시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2차대전 참전한 유대인이라니 또 흥미가 가네요.

Falstaff 2023-04-11 21:00   좋아요 1 | URL
유대인들이 유럽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은 진짜 이유가 저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원주민들은 만날 전쟁터에 나가서 죽고 다치고 그랬는데 유대족들은 시내에 머물면서 부자가 되기도 했거든요. 비록 얼마 벌지 못했다고 쳐도,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나간 사람들한텐 정말 아니꼽게 보였을 겁니다.
저는 이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걸 거론하는 사람은 포이히트방거 말고는 찾을 수 없었답니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살고 죽는 거 아니겠어요. 거기서 살짝 빠져나가니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캐치 22는 사실 좀 거칠지요. 그것만 극복하면 정말 잘 쓴 반전문학이라고 생각한답니다. ^^

coolcat329 2023-04-11 21:39   좋아요 1 | URL
아! <미국의 목가>의 시모어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해병대를 들어간 게 이해가 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이 군입대를 멀리하는 현실에서 유대인이 아닌 진정한 미국인으로 거듭나려면 군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포이히트방거 <고야...>말고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3-04-12 06:25   좋아요 1 | URL
아, <미국의 목가>. 읽어본지 오래라 기억을 못했습니다. ㅎㅎㅎ
유대인들은 유대인들과 여호와를 위한 전쟁이 아니면 그저 못 본 척 했을 겁니다. 뭐 다 그런 것이지 그이들이 그리 특출난 것도 아닙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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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예항 / 짐승들의 유희 대산세계문학총서 182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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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70년대 초반에 집에 있던 <금각사>를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읽어봤고, 쉰 넘어서 <가면의 고백>을 읽었는데 그게 다였다. 무엇 때문에 극우 골통 군국주의자가 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던 거다. 미시마 유키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1960년대 초반, 책의 뒷면에 쓰인 걸 그대로 인용한다면 “작가적 역량이 절정에 오른” 시기에 쓴 작품임에도, 미시마는 적어도 반 세기 정도 발달장애가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탐미주의적, 예술지상주의적이고 만일 그게 아니라면 청소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차일디시, 좋아 좋아 영어 말고 예스럽게 얘기하자면, 구상유취한 정서를 미시마 특유의 미문으로 그려내고 있다. 만일 조선이었던 시절의 김동인이 자신의 전성기에 이런 작품을 썼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세삼창이라도 해줄 수 있지만 1960년대, 며칠 뒤면 김승옥이 <생명연습>을 발표할 시점에 이렇게 발랄 엽기적 소설을 쓰는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오후의 예항>은 발표한 뒤에 곧바로 영역하여 영미권에서 절찬리에 읽혔다고도 한다. 독자들이야 죄 없다. 미시마의 미문은, 내용이 어떻고 주장하는 바가 저떻더라도 문장 하나만 가지고 충분하게 매료시킬 수 있을 터이니. 물론 이 독자들의 범위에서 나는 좀 빼주라.


  “그는 그것(복도에 선명하게 떨어진 햇빛)을 사랑했다. 수줍게, 열렬히. 어째서 저런 창에서 떨어지는 햇빛이 좋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은혜롭고 아주 거룩한 느낌이었는데, 칼로 토막 살해당한 유아의 하얀 몸처럼 마디마디 잘려져 있었다.” (<짐승들의 유희> 1장. p.200)


​  “노보루는 있는 힘껏 새끼고양이를 들어 올렸다가 목재 위에 세차게 내리쳤다.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것은 멋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에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은 아직 약하게 남아 있었다. … (중략) … 노보루가 다시 잡아 올린 것, 그것이 이미 고양이가 아니었다. 반짝이는 힘이 그의 손가락 끝까지 꽉 차서, 그는 이번에는 자기의 힘이 그려내는 분명한 궤적을 따라 집어 올려 그것을 목재에 몇 번이고 내려칠 뿐이었다.” (<오후의 예항> 1부. p.65)


​  위에 인용한 문단은 19세기 자연주의 시절이나 20세기 초의 예술지상주의 혹은 세기말주의에서나 볼 수 있고 어울리는 것이지, 60년대에 이게 뭡니까. 평상시에 생각하는 게 이런 따위니까 천황, 뭐 천황? 그냥 왕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하여간 절대왕권을 위한 쿠데타 비슷하게 시도하다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할복을 해버린 것이지. 할복이나 제대로 했나? 배는 갈랐지만 숨이 넘어가지 않아 할복 도우미, 가이샤쿠가 옆에서 빨리 죽으라고 목을 쳐버렸고, 단번에 잘리지 않아 여러 번의 난도질 끝에 데굴데굴 구르던 미시마의 머리통, 이 가운데 대뇌, 큰골은 아직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어쩌면, 혹시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눈을 통해 머리통이 잘린 자신의 몸통을 아주 잠깐이라도 구경하고 가지는 않았을까? 아, 나는 “토막 살해당한 유아의 하얀 몸”이라든지 통나무에 새끼 고양이를 패대기쳐서 죽이는 장면 같은 건 아주 질색이다, 질색. 이런 장면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충분하게 살기 힘든 곳이라서.


​  시절에 맞든 맞지 않든 간에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적 뇌 놀림.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미시마 흉을 보느라 벌써 지면을 많이 써버려서 <오후의 예항>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위에서 인용한 ‘구로다 노보루 黑田登’라는 열세 살의 촉법소년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노보루가 여덟 살 때 일찌감치 차마 감지 못할 눈을 감아버리고, 어머니 구로다 후사코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일본 최고급의 수입 양품점 ‘렉스’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의 놀랄 만한 수완으로 더욱 번창시켰다.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테니스를 클럽에서 정식으로 배워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서른네 살의 아름다운 여성. 그러나 철저하게 수절하고 있는 과부라서 거의 매일 밤 모든 옷을 벗고 전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나신을 비춰보는 습관이 있다는 걸, 노부로는 우연히 서랍장에서 서랍을 모두 빼고 안에 들어가 장 때문에 가려져 있던 틈 사이로 훔쳐보면서 알아냈다. 아무리 미시마 유키오라고 해도 아들이 엄마의 사생활을 전부 관찰하게 만들 수는 없어서 틈으로 볼 수 있는 엄마 방의 범위를 한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돈 많은 미인 과부가 언젠가는 베드 씬을 한 번 벌이지 않겠느냐, 그럼 엄마의 엑스터시를 아들이 A부터 Z까지 생 라이브로 관람을 하게 만들어야겠느냐, 하는 딜레마가 있었을 터이다.

  노부로는 바다와 선박, 그리고 항해에 관한 로망이 있다. 배의 구조와 설치물에 관해서는 상당한 지식까지 가지고 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천재성까지 있을 거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소년이라서 어머니한테 배 구경을 하고 싶다고 졸랐다. 세계적인 무역항 요코하마에서 일본 최고급 양품점을 하는 유력인사인 어머니는 선박회사 전무에게 부탁을 했고, 전무는 소개장을 써주면서 화물선 라쿠요마루 선장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이틀 전, 라쿠요마루 호에 오른 모자는 마침 선장이 외출 중이라 삼십대 단단한 체력과 체격을 갖춘 스카자키 류지 이등항해사의 안내로 배 견학을 한다. 받으면 보답을 해야 하는 게 일본식이라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도 친절한 어머니인 후사코 씨는 그랜드호텔 양식당에서 류지에게 다음날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비프 스테이크를 대접한 김에 자신의 입술까지 주어버린 건 뭐 한창 때의 과부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에그머니, 열세 살 먹은 노부로가 바로 옆방에서 자는 자기 집, 자기 방, 자기 침대에까지 끌어들인 거, 이건 어쩔겨? 물론 벌써 배꼽 아래 13cm에 푸른 색 모근으로부터 검정 터럭이 촘촘하게 돋고 있는 사춘기 아들이 서랍장 속에 들어가서, 부얼부얼한 가슴 털이 아래로 쪽 이어진 곳에서 류지의 “무성한 털을 뚫고 나와 자랑스러운 듯 솟아 있는 매끈매끈한 불탑”과 엄마의 맨 다리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테지.

  사실 노부로는 밤마다 가택연금 비슷한 “자기만의 방에서의 연금” 중이다. 여섯 명으로 된 학교에서 마리 좋은 아이들의 모임이 있다. 대장이 있고, 1호부터 5호까지 있어, 노부로는 3호로 불린다. 하루는 대장이 꼬여서 한밤중에 몰래 나가 놀다가 엄마한테 제대로 들켜 이후부터 밤마다 엄마는 방문을 밖에서 잠궈버렸다. 덕분에 노부로는 서랍장 속의 비밀을 하게 되긴 했지만. 하여간 이 또래들은 매우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바, 모든 영웅적인 것을 숭배하고, 지질한 잡것들을 타도해야 할 것으로 구분한 것. 제일 먼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무리는 바로 아버지란 작자들하고 선생이란 새끼들이었다. 강한 자들에게는 경배하지만 위에 인용한 것처럼 새끼 고양이 같은 약하고 구질구질한 것들은 멸해야 마땅한 거다. 그리하여 새끼 고양이를 산 채로 통나무에다 패대기를 쳐 죽인 다음에 껍데기를 벗기고 배를 갈라 장기를 적출해 붉은 심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까지 구경하는 내내 조금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이 여섯 명의 자칭 천재들은 스스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형법 제41조, “14세가 되지 않은 자의 행위는 이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 세상이 자신들은 선한 존재, 귀엽고 아름다운 존재로 알아주는 일은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아 자신들의 특권을 한 번을 써봐야겠다고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결심하고 있으니, 이거 진짜 미시마 유키오 맞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거 말고도 읽을 책은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 내가 주제넘게 읽어라, 읽지 마라를 권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불행하게도 미시마의 탐미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재료로 만들어 이 책에 담은 두 편의 소설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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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08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토당토 않은 작가의 정치적
행태와 말로 때문에 도무지 정
이 가지 않는 작가입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작가가
추구한다는 탐미주의에 대해
서 와 닿지가 않더군요.

Falstaff 2023-04-08 14:58   좋아요 1 | URL
이 책을 낼 때까지는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도라이로 바뀌었지요. 제 생각엔, (어떤 기준인지는 몰라도) 병약했던 청소년기, 폐결핵 진단이 오진인 것을 알면서도 시침 뚝 떼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과거, 이런 것들이 점점 커져 완전히 맛이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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