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릿 1 비꽃 세계 고전문학 27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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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번째 쓰는 찰스 디킨스 독후감. 언제부터 “이제 더 이상 디킨스는 읽지 않아야겠다.”라고 다짐을 했는지도 잊었다. 전형적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물 작가. 뻔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신파극이라고 폄훼 하지만 신기하기도 하지, 그러면서도 책방 선반을 뒤적거리다 아직 읽지 않은 디킨스의 책을 발견하기만 하면 주책없이 책을 향해 돌진하다가 멈추고, 다시 돌진하다가 또다시 멈추면서, 그러나 결국은, 꼭 보자마자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읽게 되는 작가. 이쯤 되면 참,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역자 김옥수는 출판사, 주로 비꽃 출판사에서 디킨스를 번역 출간했는데 내가 김옥수 번역을 읽은 건 <골동품 상점>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이이는 소설 번역 외에도 <한글을 알면 영어가 산다>라는 제목의 “번역 방법론”까지 출간한 전문 번역가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선 이렇게 자부심이 넘치는 역자의 번역을 읽는 건 사실 쉽지 않다. 읽다가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의문을 표하기도 어렵다. 이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개 이런 역자들이 사납거든. 이게 심한 표현이라면, 조금 순화해서 다시 말해, “좀 까칠하거든.” 근데 비꽃 출판사, 참 마음에 드는 게 교정 하나는 잘 본다. 저번에 읽은 <골동품 상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런데 적어도 눈에 번하게 뵈는 오탈자가 거의 없다. 잘못 알고 쓰는 단어는 좀 있는데 굳이 그걸 문제삼지는 않겠다. 예컨데 마음 속에 꽁하게 작정을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건 “똬리를 틀다”고 하지만 김옥수는 “꽈리를 틀다”로 표현했고, 교정 과정에서도 그게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정도 가지고 까탈을 부리면 그건 정말 나쁜 독자일 거 같다. 역자도 출판사도 이 정도면 참 애쓴 수준이다. 뭐 약간의 불만은, 그래 그래 있었다, 없었으면 그게 사람이냐, 하느님이지. 하여간 앞으로도 김옥수의 디킨스가 시장에 나오면 또 읽어볼 테니 열심히 번역해 내놓기 바란다. 이젠 얼마든지 비싸게 받아도 좋다. 도서관에다 희망도서 신청할 예정이니까.


  <작은 도릿>은 2부로 되어 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무대는 디킨스의 작품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채무자 교도소. 교도소 이름은 “마셜씨 교도소”다. 첫 장면은 그러나 1826년 여름,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고약한 교도소 내 어두운 감방 안. 두 명의 재소자. 한 명은 저 뒤에 가서 참나, 그래도 과학의 세기인 19세기인데 어이없게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생을 마감할 예정인 부녀자 살인자 리고. 다른 한 명은 이탈리아 출신의 밀수 혐의로 붙잡혀 온 선량한 천성을 지닌 (영어식 표기로 하면) 존 밥티스트 카벨레토. 이 두 명은 작품 속에 세 번 정도 마주치는데 처음과 두 번째는 부유한 과부 바롱노 부인과 결혼해 절벽 꼭대기에서 슬쩍 밀어 마치 추락사한 것처럼 꾸미는데 성공해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 흉악하지만 자칭 신사 리고 라니에 블랑두아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고, 세번째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선다. 물론 작품상 더 중요한 배역은 여전히 리고 블랑두아지만. 이들이 작품에 출연해서 다른 인물들과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만드는 건 마지막을 불과 몇 페이지 안 남기고 불에 태워져 몽땅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간다. 좀 어처구니없게시리. 그래도 어디 디킨스 작품 속에 이런 경우가 뭐 하나 둘인가. 노력은 가상하되 헛되구나 인생들이여.

  마지막 장면은 음, 조심해서 이야기해야지 안 그러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겠구나, 그렇다, 알려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하여튼 런던 근교에 있는 마셜씨 교도소에서 누군가 출소하는 장면이다. 교도소에서 시작해 교도소로 끝나는 이야기.


​  돈을 차입해서 그걸 갚지 못하면 누군가가 대신 갚아주거나 형사 고발을 당할 경우 이에 합당한 일정기간 동안 교도소 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민사 책임은 남아 있지만 교도소까지 다녀왔는데 누가 돈을 갚나, 어차피 사기꾼으로 찍히고 난 다음인 걸. 이때 채무자는 민사법원 재판장에게 진심으로 뉘우치는 표정을 하고 “돈이 생기는 즉시 이 채무부터 갚겠습니다. 아무쪼록 선처해주시기 앙망하나이다.”라고 약간 궁상을 떨면 자상한 재판장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답할 것이다. “그래라.” 이건 우리나라나 영국이나 같다.

  영국에서는 그게 소액이라면 채무자 교도소로 보내, 소액이니까, 채무를 갚을 때까지 그곳에 구류를 시켰던 모양이다. 19세기 초까지. 실제로 디킨스의 아버지 존 디킨스 선생께서 마셜 교도소에 일차 왕림하셨던 적이 있어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독후감에서 내가 한 번 썼듯이, 당시의 가난이 찰스 디킨스의 PTSD로 작용해 작가를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걸 작품에 솔직히 드러내면서 조금씩 치유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작품이 시작하기 20여 년 전, 얼굴은 잘 생겼지만 나약하고 수줍음이 많고 매우 상냥한 반면 무기력한 중년 신사가 웬만큼 큰 금융범죄도 아닌 푼돈에 얽매어 마셜 교도소에, 혼자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얌전하지만 무기력한 부인과, 아들 팁, 딸 페니, 그리고 부인의 배 속에 또 다른 딸을 하나 싣고, 몇 주만 있으면 나갈 수 있을 거라 예상한 채 입소한다. 그러나 부인은 교도소 안에서 추저분하고 입냄새나고 거칠고 술에 취한 전직 선상 의사가 도와주는 가운데 작품의 주인공인 막내딸 에이미를 출산한다. 이 아기, 스물두 살이 되어서도 작은 몸매에 가냘픈 체격, 그러나 건강한 체력과 놀라운 생활력에 착하디 착한 심성까지 하느님 우편에 앉을 자격이 넘쳐흐르는 주인공으로 “작은 도릿”이라 불릴 아기다. 자라서 여덟 살이 되자 어머니는 몸이 약해져 어렸을 시절 유모를 보러 갔다가 그길로 숟가락을 놓고 만다. 조금 더 자라 춤 선생에게 언니 페니를 소개해 춤을 배우게 하고, 오빠는 여기저기 취직을 시키면서 자신은 삯바느질 멀티 잡을 해가며 아버지를 부양하는 효녀 중의 효녀로 큰다. 뭐 19세기엔 다 그랬다.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하고 생활력까지 강하면 생기기도 어여쁜 거. 이 사이에 기본적으로 신사계급이었던 도릿 씨는 교도소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경받을 수 있는 후덕한 인품을 가진 수감자, 책에선 “학생”이라고 칭하는데, 학생들의 아버지, 그리하여 마셜씨 교도소 아버지라 부르며 시도 때도 없이 학생들 또는 자식들의 고민도 들어주고, 알현을 허락하기도 하며, 사과 한 알, 담배 한 개비, 육 펜스짜리 동전 몇 개 같은 것들을 공물로 챙긴다. 슬쩍 자신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받는 건 더욱 좋아한다는 것을, 슬쩍, 너무 슬쩍이라서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밝혀가면서 말이지.

  뭐 이것까지 이야기해도 괜찮을 듯하다. 1부 마지막으로 가면, 마치 우리나라 만화가 이상무의 작품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 독고탁처럼 어린 시절 잃어버린 재벌 아버지가 등장하는 대신, 난데없이 후손 없이 죽은 영주의 법정 상속인이 도릿 선생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바람에 이제 최하 23년의 교도소 생활을 마감하고 지긋지긋한 송곳이 꽂힌 담장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때 그런 사실을 밝히는데 일등 공신으로, 자신의 집에 삯바느질을 다니던 작은 도릿 때문에 가까워지게 된 클레넘 선생과 주택임대인의 하수인 팽수 등에게 무진장한 친절을 베풀어(은혜를 알면 당연하지!) 자신을 위해 지출한 금액에다 이자까지 보태 다 되돌려주고는, 인연을 끊는다. 쉬운 얘기로 안면 몰수. 귀족 신분의 대부르주아가 젠트리계급이나 평민과 가까이 지내면 가오에 심하게 스크래치가 갈 듯하니까. 뭐 도릿 선생만 그러하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 우리가 참자.


​  그럼 클레넘은? 부모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건 완벽하게 고결한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시킨 어머니의 냉혹한 교육으로 더욱 승화 발전하여 우울하고 심각한 성향을 지니게 됐고, 당연히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고아로 어린 시절부터 성질 나쁜 삼촌(클레넘의 종조부) 아래로 들어가 사업을 배웠다가, 착한 여인과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삼촌이 어머니를 소개하면서 일주일 후에 이 아가씨와 결혼해라, 안 그러면 집에서 나가라, 하는 바람에 혼인을 하고 애인과 이별을 한 거라나 뭐 그렇다. 이렇게 정 없이 살고, 그걸 넘어서 서방이 미우면 자식 새끼까지 미운 게 인지상정이라서 어머니는 더욱 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엄하게 키운 모양이다.

  클레넘 가문은 상인이다. 중개 무역을 하고, 상대는 주로 중국이었다. 부부 사이가 거의 극적으로 험악하고, 강단이 워낙 세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배우자가 여편이라서 아내는 런던 저택에 머물며 영국 내 사업을 진행하고, 남편은 중국 현지에서 중국 시장을 관리하기로 했다. 뭐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아들이 기숙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너도 꼴 보기 싫어, 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아들도 멀고 먼 중국으로 보냈다. 이제 아들이 마흔 살이 되고, 남편이 빨리 떠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세상을 등질 때 아들에게 뭐라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내에겐 편지를 쓰려 했지만 쓸 힘도 없어서, 그저 회중시계 하나만 네 엄마 가져다 줘라, 하는 유언을 끝으로 중국 객지에서 한 많은 세상을 놔버렸다. 그렇게 해 20년이 훌쩍 넘어 런던에 도착한 것. 오는 길 마르세유 항에 도착하기 전에 전염병 때문에 집단 체류를 한 적이 있었고, 여기서 어울린 선한 영국 가정이 미글스 선생 댁이다. 스무 살이 넘은 페트 양을 은근히 연모하기도 했지만 잘생긴 귀족 헨리 가우언을 사랑하는 걸 알고 얼른 포기해버리면서 자신의 나이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마흔. 젊은 아가씨와 연애하기는 너무 늙었지. 그러나 디킨스 깨나 읽은 독자들은 안다. 디킨스 시절에 스무 살 정도의 나이 차이는 껌도 아닌 걸.

  하여간 삯바느질 스페셜리스트 작은 도릿을 통해 도릿 가정과 친하게 지내게 된 클레넘은 자기 가족, 자신이 앞으로 헌신하게 될 기술자와의 동업, 도릿 가족을 위한 오지랖 때문에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쁜 세월을 보내면서, 동시에, 다시 한번 옛사랑 플로라와 조우하는데, 가녀린 첫사랑은 이제 큰 키의 거구에다가 극단의 수다쟁이로 변모해 세월의 손톱에 대한 경의를 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린다.

  디킨스답게 복잡한 구조와 다양한 에피소드가 한 상 잘 차려져 있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앞에서 얘기한대로 난데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로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피시식, 김 샌다. 뭐 그래도 재미있다. 썩어도 준치고 김이 새도 디킨스 아닌가 말야.


​  * 진짜로 읽어보실 분은 각오하시라. 1권 640쪽, 2권은 흉내만 낸 역자해설과 후기 합쳐서 591쪽. 합하면 1,231쪽. 사실 못 견딜 분량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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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18 1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디킨스의 소설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제 디킨스하면 골드님 생각 나던데.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분량이 만만치 않네요.
전 이번에 토 할배의 부활을 다시 읽었는데
읽는데 한 달 넘게 걸린 것 같아요.
너무 오래 걸려 이런 장편은 안 읽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읽고 나니까 좋긴 하더라구요.
그나저나 디킨스는 또 언제 읽어볼까요?ㅠ

Falstaff 2023-03-18 13:54   좋아요 1 | URL
알라딘 앱은 불편해요. 댓글을 쓸 수 없어서 나중에야 이렇게 답변을 드립니다.
디킨스, 정말 읽을 때마다 좀 그런데 정작 눈에 띄면 또 안 읽을 수 없더라고요.
저도 징글징글합니다. ㅋㅋㅋㅋ
톨백작 부활은 두 권짜리 아닌가요? 전쟁과 평화에 비하면 양호하지요 뭐. ^^
디킨스는요, 도서관 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한 번 읽고 또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잠자냥 2023-03-18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만 읽는다더니! ㅋㅋㅋㅋ

Falstaff 2023-03-18 18:04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사는 게 다 그렇지요.

coolcat329 2023-03-18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보니 당시 독자가 디킨스 파와 새커리 파로 나뉘었다던데 골드문트님은 누구 파신지요?
저는 디킨스 소설 딱 하나만 읽어봐서 선택할 능력이 없네요. ㅎㅎ
새커리는 주로 중산층 이상 계급들이 읽었는데 디킨스 읽는 사람들을 무시했다네요. 두 도시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다 있는데 올해 저도 디킨스를 꼭 읽어보렵니다.

Falstaff 2023-03-18 18:09   좋아요 1 | URL
저는 셰커리가 쓴 <허영의 시장>만 읽고 길기만 했지 뭐 별로네, 했었는데요, <신사 베리 린든의 회고록> 보니까, 아휴, 예사 작가가 아니더라고요. 근데 셰커리는 번역 출간한 작품이 별로 없어서 그게 아쉬워요.
일단 읽을 거리 많은 디킨스가 그런 면에서 좀 더 유리할 듯합니다.
이디스 워튼도 <환락의 집>이든가 어디서, ˝디킨스 씨와 트웨인 씨 작품엔 신사가 나오지 않아서 별로예요.˝ 요 지랄을 하잖아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3-18 23:10   좋아요 1 | URL
아 그러고 보니 <신사 베리 린든의 회고록>도 있네요. 예전에 골드문트님 리뷰 읽고 사뒀습니다. 번역된 작품 수나 명성으로나 디킨스의 승리네요~^^

Falstaff 2023-03-19 06:0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신사 베리 린든....>이 정말 신사들 이야기인가? 그건 읽어보셔야 안답니다. ^^

moonnight 2023-03-18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경하는 골드문트님^^ 디킨스 작품은 크리스마스 캐럴만 읽었답니다. 수줍-_-////// 작은 도릿은 제목도 처음 들었네용. 또 수줍-_-//////

Falstaff 2023-03-18 18:11   좋아요 2 | URL
아휴, 뭐가 수줍으세요. 저도 디킨스 성인용 소설은 쉰 살 넘어서 읽기 시작했답니다.
새털 같이 많은 날이 남았습니다. 돈이 없지 설마 시간이 없겠습니까. ㅎㅎㅎ

그레이스 2023-03-18 2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제 저도 디킨스 번역되 나올 때마다 도서관에 신청해서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똬리, 꽈리 에서 웃었습니다.
후반부에서
소공녀, 소공자 생각이!

Falstaff 2023-03-19 06:02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저는 앞으로 줄창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기로 작정했습니다. 한 달에 제 이름으로 세 권, 아내와 아이 이름으로 여섯 권, 합해서 아홉 권. 사이사이에 내돈내산 책 디밀고요. 그러다보니 사 놓고 1년 넘었는데 아직 못 읽은 책이 수두룩합니다. ^^

우끼 2023-03-18 2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단어에 예리한 감각 있으신거 넘 부러워요 ㅠㅠ 매 리뷰때마다 알차게 써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Falstaff 2023-03-19 06:03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제가 무슨 단어 감각이.... 남이 쓴 거 읽으면서 느끼는 거 말고, 자기가 직접 쓰면서 단어를 골라내는 것이 진짜 단어 감각이지요. 에구,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언제나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리옌 대산세계문학총서 177
항타고드 오손보독 지음, 한유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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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타고드 오손보독, 상당히 독특한 이름이다. 이이의 이름을 한자어로 쓰면 “항도덕 오순포도알 杭圖德 烏順包都嘎” 이라고 쓰는데, 항타고드가 성family name인지, 오손보독이 성인지 잘 모르겠고, 오순’포도알’을 ‘오손보독’이라 읽는 것도 재미있다. 마지막 알嘎자는 나도 처음 보는 글자로 ‘새소리’와 ‘깔깔웃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 글자만 보면 “까마귀가 포도알 물고 만족해서 순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이이의 이름이 희한한 이유는 몽골인이기 때문이다. 몽골은 몽골인데 고비사막 한 가운데, 내몽골 사람이고, 내몽골은 중국 내 자치지역이라 몽골의 언어를 사용해 작품 활동도 한자어가 아니라 몽골 문자로 하고 있다. 내몽골이라도 전체가 사막지대는 아니라서 농촌지역인 나이만 허쇼의 툴렌탈 솜 세친달라 가차에서 1969년에 임시교사를 하다가 솜에 있는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농사를 짓는 어머니와의 슬하 삼형제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저 참고로 알아 두시라는 뜻에서 주소지의 암호를 좀 풀어드리자면 허쇼와 솜, 가차는 각자의 행정단위를 칭하는 것으로 허쇼⊃솜⊃가차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시⊃구⊃동 비슷하게. 날 때부터 문재가 있어서 불과 열네 살에 산문을 지어 자치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발표를 하고 열다섯 살에는 시를 싣기도 한다. 그러나 저 고비사막 근방의 농촌마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따로 할 것이 있을 턱이 있나. 졸업하고 두 해 동안 농사를 짓다가 뜻한 바가 있어 내몽골과 외몽골, 즉 중국과 몽골국의 접경지역에 있는 에리옌 시로 거처를 옮겨 2년 동안 거간꾼 일을 한다.

  아리옌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주민의 1/3은 한족으로 중국에서 생산한 물품을 가지고 와 몽골인에게 팔거나 그들의 특산품을 구입해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려는 상인이고, 1/3은 외몽골 사람으로 한족과 비슷한 이유로 시에 유입해 들어온 몽골인 상인, 그리고 나머지 1/3이 한족과 외몽골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구전을 받아 돈을 버는 거간꾼이라고 하는데, 항타고드가 바로 이 일을 했다는 거다. 이 거간꾼, 한자어를 섞어 부르면 좀 더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인류를 위해 다른 말로 부르자면 중개인들의 가장 큰 자산은 돈이 아니라 언어, 중국어와 몽골어를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이들은 한족이면 한족, 몽골인이면 몽골인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기를 치고, 협박을 하고, 필요하면 린치도 가하며, 아주 간혹가다가는 정말로 생명까지 해쳐가며 인간 말종의 삶을 살고 있는데, 사실 알고보면 아직 문명화가 덜 된 것 같은, 또는 현대화가 덜 진행된 원시도시에서 흔하게 벌어지곤 했던 일이다. 여기에 공안으로 대표하는 공권력 역시 중국문화 특유의 ‘꽌시’나 체면 등을 우선하느라 사실과 정의는 다음 순번으로 밀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곳. 어디 가서 전근대적이라고 나대지 말자. 우리나라도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했다. 관리에게 봉투에 (당시 화폐로)돈 십만 원 넣어 슬쩍 밀어주면, 얼마야? 묻고, 열 갠데요? 하면 다시 이쪽으로 밀어주면서, 집에 가다가 애들한테 과자나 사 가지고 들어가, 라고 하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다.

  하여튼 항타고드는 두 해 동안 거간일을 하면서 국경도시 에리옌이라고 불리는 지옥도에서 벌어진 온갖 난장판을 다 구경하고, 그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재를 사용해 원고지를 메꾸기 시작했으니 단편 <에리옌의 남부시장에서>, 중편 <에리옌, 에리옌, 에리옌>, 그리고 장편 <에리옌>이다. 재미있는 건, 에리옌은 국경도시의 고유명사 말고 “잡색의”, “얼룩덜룩한”, “다채로운” 등의 형용사이기도 하다는데, 작중에서도 간혹 등장해 주로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난잡하고 험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나타낸다.

  중국인이지만 몽골족이기도 한 항타고드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면서 스스로 아쉬워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몽골 놈이 몽골 놈에게 못되게 굴고, 나무 삽이 진흙을 못 뜬다.”는 몽골 속담이다. 내몽골이나 외몽골이나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 등쳐먹는 걸 안타깝게 생각했다는 건데, 미국 가면 한국인한테 제일 많이 사기치는 게 한국인이라면서? 다 그런 거지 뭐.


​  <에리옌>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은 나산달라이와 그의 아우 바양달라이 형제. 나산달라이 가족은 내몽골 시골에서 (항타고드의 부모처럼)병원 원무과에도 다니고 농사도 짓고 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결코 삶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1994년에 에리옌 소재 한템게르 컴퍼니의 사장으로 있는 아우 바양달라이 하나만 보고 무작정 에리옌으로 터를 옮겨왔다. 바양달라이는 하는 일마다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이제 금고 저 아래에 쌓인 백 위안 짜리 지폐가 누렇게 썩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돌 만큼 부자가 되어 남은 평생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여유있게 하고 싶은 거 해가면서 살 수 있는 처지다. 맏아들 고비는 공안의 경찰관이 되어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고, 늘씬한 키와 몸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의 외동딸 아리오나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벌써 시인으로 등단한 내몽골 가난한 농촌 출신 숨베르 씨와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 그와 함께 에리옌의 기차역에 도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막내 아들 테니게르는 친절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전형적인 부잣집 도령으로 세상에 아쉬운 것 없이 자란 티가 벅벅 나서 독자로 하여금 걱정이 들게도 만들지만 다행히 끝까지 무탈하게 배역을 마친다. 이렇게 잘 나가는 바양달라이는 작품이 시작할 때쯤엔 사업 운이 대낮에 뜬 별보다 많지 않아 하는 일마다 본전까지 다 거덜을 내는데다가, 유력인사와 마작에 맛을 들여 날마다 마작 판인데 거기서도 하는 족족 빈털터리가 된다. 그건 그거고 이 정도면 잘 나갔을 때 에리옌으로 처들어온 형네 식구들 좀 건사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조카 둘에게 일자리 하나 알선을 해준 적이 없으니 알 만하시지? 나중에 어떻게 될 팔자인지? 그려, 지금 생각하시는 것이 맞아.

  바양달라이의 형 나산달라이는 에리옌에 와서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하겠는데 그게 쉽나, 이때 아우가 형네 식구를 위해 해준 단 하나의 일이 형 나산달라이를 작은 호텔의 수위로 취직시켜준 거였다. 큰아들 만라이는 나이만 먹고 몸이 약해서 따로 하는 일 없이 늙은 아버지와 팔팔한 동생이 벌어온 돈으로 허위허식하면서 그래도 꼴에 배꼽 아래 꼬다리 달린 거 있다고 목하 열애중인데, 상대는 같은 나이만 허쇼 출신의 경박하고, 배운 거 없고, 사납고, 몸 헤프고, 놀기 좋아하고, 노인 공경하기는커녕 즐거이 쌍욕하는 걸 취미생활로 알고, 범죄에 관한 개념이 없어서 도저히 선량한 나산달라이 가족과 어울리지 않는 올라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연애는 급격하게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건 여기서 못 알려드리지. 둘째 철멍은 작품에 제일 먼저 소개되는 인물로 180cm가 넘는 장신이 신체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공부도 잘 해 중학교까지 졸업한 다음에 에리옌으로 왔는데 꿈이 있으니 돈을 벌어 그걸로 검정고시를 패스해 대학을 졸업한 다음 마이클 조던 같은 유명한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야말로 꿈 같은 꿈이었다. 매사 반듯한 청년이지만 사람이 반듯하다고 앞길까지 반듯해지면 그건 사람 사는 일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지구상에 반듯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도 없게?

  철멍은 작은 아버지가 취직자리도 하나 알아봐주지 않아 삼륜거, 바퀴 세 개 달린 자전거 운송수단을 운전하는 일을 한다. 철멍은 도시에서 이것 말고 다른 돈벌이를 도무지 구할 수가 없던 거였다. 하고 싶은 거야 자기도 거간꾼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것도 맨손 하나 가지고는 뛰어들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용 하나를 보고 동업을 제의할 만큼 호락호락한 시장도 아니었고. 철멍이 기차역에서 도착 열차를 기다리다가 때마침 열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에리옌에 도착한 사촌 여동생 아리오나, 그리고 그의 약혼자, 창백한 지식인이자 시인인 숨베르를 발견하며 이 황금, 황금도 아니고 그냥 금전만능주의의 복마전 에리옌에서의 이전투구가 시작된다.


​  몽골족이 쓴 작품이라 특별한 관심이 있어 예의 주시한 책이다.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이런 류의 작품으로 우리는 이미 채만식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쓴 <탁류>가 있지 않은가. 채만식의 반, 아니다, 반의 반에라도 미치기만 했으면 즐겁게 읽었다고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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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몽골 소설이군요. 이름, 지명이 어색한 거 빼곤 역시나 사람 사는 이야기네요 ㅎ 포도알 이름이 넘 귀엽습니다 ㅎㅎ
근데 큰 재미를 못 느끼신 거 같은데 별4개를 주셨네요.

Falstaff 2023-03-16 14:09   좋아요 2 | URL
옙. 분명히 네 개는 많고, 그렇다고 세 개를 주자니 좀 박한 거 같고, 하다가, 요즘에 너무 늦게 익힌 처세술, 좋은 게 좋다고 걍 네 개 주고 말았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세 개 반도 좀 후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몽골 소설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ㅎㅎㅎ

잠자냥 2023-03-16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 이 책 출간 당시 몽골 작품이라 관심이 갔는데 어디선가 계몽적이다, 우리나라 1920년대 농촌소설 보는 거 같다는 평을 읽고 일단 보류했거든요. 골드문트 님 리뷰 읽으니 역시 그냥 넘기기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3-16 14:13   좋아요 2 | URL
아휴, 저도 기대가 컸답니다. 게다가 작년 8월 초하루, 백수가 무려 내돈내산 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누아르 경향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만 1920년대는 아니고요, 조금 더 써서 70년대, 그니깐 유신 시절 대중소설 정도로 보시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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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처음 읽은 옌롄커는 <풍아송 風雅頌>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번역 소개한 작품은 2008년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단다. 이 책으로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서 옌롄커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작가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소설의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금한다는 5금禁의 영광을 안았으니 이 아니 아이러니인가. <인민을….>이 5금을 당한 2005년 8월, 그의 서재에서는 또 한 편 장편소설 <딩씨 마을의 꿈>의 초고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리고 11월에 책의 초판본에 실릴 “작가의 말”을 쓰지만 이 작품 역시 당국에 의하여 5금의 계관을 쓰게 된다. 판매뿐만 아니라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까지 작품에 대한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것에 대하여 “5금의 영광”이니 “5금의 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의 금지를 결정한 단체, 옌롄커의 경우엔 정부일 텐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유신이나 5공화국 정부같이 지독한 규제와 감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집체적, 전체적 집단일 경우라면, 어떠한 형태가 됐든지 간에 현재 자행되고 있는 통제와 금지의 영역에 한 발을 걸쳐놓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신이나 5공, 그리고 현재 또는 최근의 중국 정부는, 작가는 별 생각 없이 문학적 함의로 풍요로운 글을 쓴 것을, 담당하는 감독관이 읽어보고 괜히 자기 또는 자기들의 발이 저리거나, 자라 보고 놀란 눈알에 솥뚜껑이 보였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로 화들짝 놀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성급하게 금지의 딱지, 라고 생각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독자로 하여금 금지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는 일이 많았다는 거다. <딩씨 마을의 꿈>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 작품을 읽고 깜짝 놀라 5금을 때린 감독관은 두 해 전에 옌롄커가 쓴 <즐거움受活>, 우리나라엔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을 틀림없이 읽어보지 않은, 비전문가이거나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알아서 긴 속물 잡놈이었을 확률이 높다.

  <레닌의 키스>는 버러우 산맥의 품 속에 있는 작은 서우훠 마을이라는 유토피아 적 장소를 기초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 말 그대로 서우훠, 受活, 즐거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네의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장애인이다. 장애 대신 각기 특별한 재주 한 가지씩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딩씨 마을의 꿈>에서도 얼토당토않는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딩씨촌, 한자어로 쓰면 정장(丁莊)으로 고무래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 딩씨촌에 있는 딩좡 초등학교가 바로 유토피아다.

  여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이스라엘 삼국지 가운데 창세기. 형제들에게 밉보여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곳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술과 떡을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술 관원장이 출소해 뒤숭숭해 하는 파라오의 꿈을 요셉으로 하여금 해몽하게 만들어주는데, 옌롄커는 그들의 꾼 꿈의 네 번의 꿈의 내용으로만 한 페이지 분량으로 제1권을 구성했다. 책의 본문을 다 읽은 후에 다시 1권을 꿈 네 편을 읽으면, 45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장편소설이 이 네 편의 꿈 이야기와 해몽처럼 풀어져 나갔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어떤 해몽인지 구약성서 창세기를 읽어봐야 한다. <딩씨…> 읽기 전에 될 수 있으면 창세기를, 그것도 귀찮으면 요셉의 이야기만 발췌되어 있는 위키피디아라도 검색한 후에 읽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초장부터 사방이 피투성이다. 잔혹하다고? 그건 아니고, 딩씨 마을로 가는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마을 사람들이 피를 팔아 닦은 시멘트 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관리들이 딩씨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닦은 길로 생각했건만, 알고 보면 <허삼관 매혈기>처럼 주민들이 각자 피를 팔아서, 어려운 말로 하자면 매혈賣血을 해 번 돈 가운데 조금씩 갹출해서 도로를 닦았다는 뜻이다. 중국의 행정단위가 촌-향-현-성 뭐 이런 식으로 되는데, 전작 <레닌의 키스>에선 해방 조국이 국민들에게 쇠, 철물을 만들어 바치라는 강력한 요구를 자행한 바 있는 반면에 <딩씨…>에선 국민들의 진짜 피를, 약하지 않은 가격으로 사겠으니, 어려운 얘기로 매혈買血 하겠으니 피 파는(賣血) 일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관리들을 닦달했던 모양이다. 혹은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완고한 딩씨 마을 사람들이 어딜 생명 같은 피를 팔 수 있을까? 그리하여 현의 교육국장은 딩씨 마을을 세 번째 방문한 자리에서 촌장 리싼런을 해고해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대표적 빈농들의 마을 샹양촌 견학을 시킨다.

  딩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궁상벽지의 가난한 동네 샹양촌에 들어서보니 집마다 희디 흰 타일로 벽을 해 붙인 붉은 벽돌의 이층집에, 번드르르한 마을의 포장도로에다, 입성까지 자신들과 달리 쪽 빼 입은 것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됐느냐고 물어보니, 아줌마나 아저씨나 하시는 말씀이 피를 팔아서 그렇다고, 옷소매를 쓱 걷어 깨알 같이 주사바늘 자국이 난 팔뚝을 보여주는 거였다. 이 다음날부터 딩씨 마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만 16세 이상 50세까지 신체 건강한 남녀들이 홰나무 아래 임시로 친 텐트 안이나 밖에 누워 피를 뽑기 시작했고, 집마다 살림살이에 윤택이 나고, 너도나도 맛난 돼지고기 가브리살을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고, 쪄서 먹기 시작했던 거였다. 한 번 이리 여유 있는 생활을 맛보자 이젠 그만둘 수 없어 마을사람 팔뚝마다 샹양촌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깨 꽃이 피었지만 이젠 관에 의한 매혈소는 철수해 다른 고장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딱 이럴 때, 글 깨나 읽어 식자 연하지만 신식공부를 한 건 아니어서 학교에서 종치는 일을 하던 딩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큰아들 딩후이(이름이 빛날 휘輝)가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하더니 현으로 달려가 보나마나 누가 쓴 적 있는 중고 주삿바늘과 주사기, 알코올 솜, 피 담는 병 등을 사와 사설 “딩가 채혈소”를 차려 비닐봉지 하나 5백씨씨에 시세보다 높은 80위안으로 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딩후이가 바보는 아니라서 80위안은 분명 좋은 값이기는 한데, 봉지를 살살 돌려가며 피를 채우면 7백씨씨도, 악착같이 채우면 8백씨씨도 무난히 들어간다는 걸 당연히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뭐든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싸게 팔거나, 싸게 사거나, 원가를 낮추는 거다. 세 번째 것을 위해 딩후이는 세 명을 찌른 다음에야 주삿바늘을 알코올 솜으로 한 번 닦았는데, 문제는 아뿔싸, 이게 위에서 얘기했듯 (하지만 책에선 기척도 나지 않는다만) 시내 병원에서 이미 사용한 내력이 있는 주사기요 주삿바늘이었다는 것. 어쨌거나 딩후이는 이 일로 해서 많은 돈을 벌어 어여쁜 아가씨를 골라 장가 들어 아들 샤오창(小强)과 딸 잉즈(英子)를 낳았다. 이럭저럭 흐른 세월이 십 년. 딩씨 마을엔 한 명 두 명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이게 딩씨촌만 그런 것도 아니라 향 내 거의 모든 촌도 마찬가지, 현 내 거의 모든 현도 마찬가지, 성 내 모든 현도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성도, 현도, 향도의 시내에 거주하는 도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별로 없었던 바, 어느덧 이 열병의 정식 명칭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이며 짧게 “에이즈”라고 부르는 병인 것을 알았다. 걸리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천형. 어쩌면 인류가 이 병으로 해서 멸종을 당할 수도 있다니, 아이고, 이걸 어쩌나. 그리하여 누군가 딩후이의 집에 독물인지 독약인지 아니면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는 방귀를 뀌었는지, 집에서 기르는 닭이 죽어나가고, 개가 죽어나가고, 돼지가 죽어나가더니, 급기야 현명하고 선한 딩씨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유일한 혈손 딩샤오창이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거품을 물고 죽어버린다. 누군가가 복수를 했다고 짐작만 할 뿐. 그래서 학교 담장 아래 묻힌 딩샤오창, 이 아이의 유령이 작품의 화자가 된다.

  집집마다 에이즈 환자가 있으니 전염확률도 높고 주민들의 불안감도 높아져 가고, 길가엔 개새끼 한 마리,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을뿐더러 한 시절 피 파는 걸 거부하다가 촌장 자리에서 쫓겨난 리싼런까지 열병에 감염되어버리자, 딩수이양은 이 병을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아들 딩후이의 잘못을 보충할 겸하여, 에이즈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교사들이 모두 도망가 빈 학교가 된 딩좡초등학교로 에이즈 환자들을 불러모아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레닌의 키스>에서 나오는 바러우 산맥의 서우훠 마을처럼, <풍아송>에서 양커가 찾던 곳처럼 유토피아가 열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저 먼 시절, 3천년 전 애굽의 파라오가 꾼 꿈의 첫 번째 장면, “강에서 올라온 아름답고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갈대밭에서 풀을 뜯는 모습”이 피를 팔아 이룬 함포고복의 시절이었다면 이제 독자의 눈에는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암소가 이 살진 암소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장면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이 기근의 시절, 순간의 유토피아, 그게 얼마나, 어떻게 갈 것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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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14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읽은 책. ㅎㅎ 내내 못읽은 책 리뷰만 보다가 읽은 책 리뷰를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요. ㅎㅎ

Falstaff 2023-03-14 18:42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습니까!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저도 읽은 책 나오면 더 반갑고 그래요!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첫 옌렌커도 이 책이었는데 옌렌커는 디스토피아 전문가 같아요… 그렇지만 저의 최애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최강 막장 마을스토리는 작렬지…(제가 시아버지 복상사…를 독후감에 써서인지 블로그 유입 검색어에 자꾸 시아버지의 육욕…이 연관되고 있습니다…)레닌의 키스도 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3-14 21:2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저도 최고 검색어가 ˝형수 시동생 브래지어˝랍니다. ㅋㅋㅋㅋㅋ 웃지만 웃는 게 아니죠?
옌롄커가 괘씸한 건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시침 뚝 떼고 한 가운데에 유토피아를 슬쩍 흘린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래 못 가기는 하지만 말입죠. <레닌의 키스>가 딱 그짝입니다. 전 이이의 스토리가 과하게 드세서 읽을 때마다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럼에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3-14 21:4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저 그래서 저 검색어 쳐봤게요 안 쳐봤게요? ㅋㅋㅋ네이버 갔다 여기 아니네 하고 다음에 가서 아, 알라딘 망할까 봐 피난처 두는 게 나만은 아니구나 하고 알라딘 망하면 여기서 리뷰봐아지 하고 이웃추가 하고 왔어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3-14 21: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이고, 못 말리는 열반인 님. 그렇다고 정말 검색을 해보십니까.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3-14 21:5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렇고 알라딘이 암만해도 책방이라서 서재가 종종 위태위태 하잖아요. 예전에 올린 글이 한 순간에 싹 날라가버린 적도 있고 해서 보험을 들어놓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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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여선의 <레가토>는 생각지도 않게, 나를 쓸쓸하게 했다. 그리고 33년 동안 틈만 나면 도리질을 하게했던 그것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채근했다. 주인공 조준환의 말대로 그 "개 같고, 씨발 좆같아" 하나도 아름답지 아니했던 청춘의 골방을. 그렇구나. 그때 그들처럼 나도 청춘이었구나. 눈부시기는커녕 누군가가 세차게 오줌을 갈긴 개골창에 빠져 흠뻑 젖어있었던 불멸의 황금시대. 어느 때보다도 엿같았던 황금시대 말이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어느 종교에 의해 파문당한 듯한 고립감. 그것보다 더 크게 심장을 저미는 무감각의 통증. 나보다 먼저 화장장의 화염으로 불태워버리고 만 33년 전의 수치스러움. 결코 추억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오랜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인공 박인하가 눈에 밟혀서.
 그들은 세월이 흘러 야당 국회의원이었다가 물을 갈아타 빛나는 여당의 중견 의원이 됐고, 피라미드 업체의 더블 다이아몬드가 됐으며 조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임원으로 휴일마다 라운딩을 했고, 대학에서 학과장 쯤의 타이틀을 후광처럼 둘렀는데, 삼십 여년 전의 원죄를 홀로 뒤집어 쓴 것 같은 나는 아직까지 그들을 즐거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임에 좀 나오라는 권유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여전히 콧방귀를 뿜어댄다. 다시 조준환의 말대로 "개같고 씨발 좆같은" 눈부셨던 때의 좌표를 조금씩 망각해 나가는 게 인생이 아니라는 고집은 나를 외롭게 한다. 볼셰비키는 무너졌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선 인민들이 굻어죽어간다. 좌표는 바뀌는 것이지 버리는 게 아니다, 개새끼들아. <레가토>의 주둥이만 산 등장인물 새끼들아. 작가 권여선, 너를 포함해서.
 
 다시 책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고난 다음 숙고해본다.
 이거? 속이 빤하게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삶을 걸어간다기 보다, 작가의 구성에 따라 이미 정해진 길을 따르는 게 눈에 훤하다. 읽는 동안은 몰랐다. 내 시절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날 몰두하게 해 그들이 또각또각 발자국을 찍어가는 포장도로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니 내 또래의 독자들은 재미나게 읽을 수 있으리라.
 후배들은 이것들로 인해 천하에 못나고 기만적인 선배들의 모습을 안개 속에 넣고 환상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난..... 더 이상 이런 글은 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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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12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십 년 전에 이 소설이 골드문트님의 ‘하나도 아름답지 아니했던 청춘‘ 시절을 떠오르게 했나보네요. 글에서 분노와 절망이 느껴집니다.😥

Falstaff 2023-03-12 18:18   좋아요 2 | URL
아오, 아오.... 이러면 안 되는데... 십 년 전에 쓴, 뭐 독후감이랄 것도 없고 그냥 책을 읽고 끼적인 건데요, 왜 오늘 올렸을꼬... 아휴 쐬주 두 병 까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지금 읽어보니까. 이걸 왜 올렸을꼬.... 왜 올렸을꼬.... 아 씨... 뭐 그렇습니다. ㅠㅠ

stella.K 2023-03-12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주인공 땜에 잠을 못 주무시다닛!
글은 이리 쓰셔도 골드님의 소설 사랑이 느껴집니다.^^

Falstaff 2023-03-12 21:35   좋아요 0 | URL
에이, 그 때, 그러니까 한 십 년 전 쯤에 그랬다는 거지요 뭐. ㅋㅋ

다락방 2023-03-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좋아하는 작가에 권여선을 올리진 않는데요, 그런데 권여선 소설 읽으면 특히 더 소주 땡기지 않나요? 아마 골드문트 님 그래서 이 리뷰 올리신 거 아닐까요? 소주 두 병 때문에…..

Falstaff 2023-03-12 21:36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제 불행의 8할은 알코올 의존 때문인 거 같습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23-03-12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술을 좋아하는 작가 그래서 인지 안녕 주정뱅이는 읽을만 했었는데요!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내용이 생각도 안나는데 씁쓸한 내용이었군요! 술 하니 생각이 나네요!

Falstaff 2023-03-12 21:37   좋아요 2 | URL
권여선이 술을 즐기는 지는 몰랐는데 정말 그렇답니까? ㅋㅋㅋㅋ 은근히 반가운 걸요!

coolcat329 2023-03-12 22: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권여선 작가 술 세더라구요. <안녕 주정뱅이> 저도 좋았어요.

Falstaff 2023-03-12 22:14   좋아요 1 | URL
으앗, 별 걸 다 아시네요. ㅋㅋㅋㅋ
한 번 초대했으면 좋겠는데 요즘 술값이 만만치 않아서리 ㅋㅋㅋㅋ
자리 한 번 마련해볼까요? ㅋㅋㅋㅋ 농담입니다. ㅋㅋㅋㅋㅋ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조셉 콘래드 지음, 원유경 옮김 / 이타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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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프 콘래드의 데뷔작. 콘래드가 1857년생이니까 서른여덟 살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 나이로 39세에 데뷔하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잉글랜드 소설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으니 영국인들이 이이의 작품에 얼마나 존경을 바치는지 알 만하다. 물론 콘래드의 전성기는 1900년을 넘기면서 시작하지만 데뷔작 역시 읽는 재미 만큼은 전성기 시절의 작품과 비교해도 별로 꿇리지 않을 듯하다. 그의 바이오그래피는 다른 작품의 독후감에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어서 곧바로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Almayer’s Folly>로 들어가자.

  먼저 지도를 보자.



  보르네오 섬의 중심에서 한시 반 방향에 위대한 판타이강이 바다에 접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당시 지명으로 삼비르이고, 강변에 꽤 큰 규모의 덜 지은 일종의 펜션 건물이 있었으니 당시 식민지배를 하던 네덜란드 군인이 이 건물을 “올마이어의 어리석음 Almayer’s Folly”라고 불렀다 한다. 보르네오에서 오른쪽 상단에 있는 큰 섬(지도에선 꼬리밖에 안 보이지만)이 필리핀 민다나오 섬이고 사이에 작은 섬 세개가 있다. 이중에 타원으로 동그라미 친 두번째 섬이 ‘술루’.

  당시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를 오가며 활발하게 향신료나 고무나무 수액, 구타페르카, 진주조개, 식용 새집, 밀랍 등의 무역이 성행했던 반면 치안이 상당히 불안해서 곳곳에 해적들이 출몰했다고 하는데, 작품 속의 ‘3일간의 사건’이 벌어지기 이십여 년 전에 말레이 족으로 구성한 가장 크고 강력한 해적이 바로 이 술루 섬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한다. 말레이 어로 지도자, 즉 큰 지역의 영주부터 한 부족의 족장이나 추장까지 몽땅 ‘라자’라고 했던 것처럼 해적단의 두목 역시 라자라고 부르며 나름대로 존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의 딸이. 추장의 딸이 열네 살 때까지, 아버지 라자가 이끄는 해적선에 올라 해적질에 작지 않은 기여를 했으니, 살 껍데기 색깔 하얀 인종들과 싸움이 붙어 죽기 살기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했는데, 이 소녀도 악착같이 백인들을 상대하다가 싸움에 질 것이 확실해지니까, 용감한 동족들처럼 백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느니 피 흘리는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차라리 상어 밥이 되겠다고 몸을 던지지도 못할 정도로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어, 다른 백인도 아니고 일명 라자-라우트, 즉 ‘바다의 왕’이라고 불리는 톰 링가드 선장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소녀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에 따르면, 선장이 말레이 족의 배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화염과 연기의 어둠 속에서 자신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고 인식했으며,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미지의 끔찍한 환경에서 시작할 노예 생활 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일찍이 술라 섬은 물론이고 근동 바닷가 섬에서 열네 살, 결혼 적령기의 처녀 가운데 자신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여인은 아무도 없으니 노예라고 해도 바다의 왕, 영웅 중의 영웅인 링가드 선장의 몸종 정도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내 자리면 더 좋고, 이런 심정이었다. 용감무쌍한 라자의 당당한 후손이 바랄 수 있는 남아있는 소망이었을 수도 있다.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반면에 링가드 선장은 열네 살 먹은 소녀가 감히 총칼을 들고 자신들과 싸웠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시체더미에서 발견한 소녀, 자신들의 손에 동족과 가족 모두 몰살당한 불쌍한 아이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수양딸을 삼아 자바 섬의 수라바야에 있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 유럽식 교육을 받게 한다. 이 링가드 선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금과 은이 무한정 쏟아지는 라틴 아메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보다도 현금이 많이 흐르던 향신료 지대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을 주도하던 인물로 당시 화폐로 재산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가장 부유한” 운송업자였다. 그리하여 선장은 소녀를 잘 교육시켜 백인과 결혼해 유럽에서 살 수 있게하여, 자비로운 하느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삶을 다 마친 후에 모든 재산을 소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임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열네 살 먹은 소녀는 세마랑 수녀원 학교의 폐쇄된 속박을 미리 알았다면 말레이 족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휘어진 환도를 꺼내 스스로의 목을 그어버렸을 거란 걸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교육이고 종교고, 언어는 즉각 익혔지만 나머지는 똑똑한 머리로 그저 흉내만 낼 뿐, 하나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토종 말레이 여자였다는 것을 링가드 선장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수양딸로 정하자마자 함께 지내지 않고 학교로 보내버린 것을.

  선장은 자신만만했다. 수양딸이 비록 피부가 까무잡잡한 유색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무한정한 재산이 언젠가는 아이에게 상속될 것을 아는 남자라면 그가 누가 됐든지 간에 결혼을 하지 않고 배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니. 그래 좀 괜찮게 생기고, 이왕이면 좀 똑똑한 백인을 물색하고 다니다가 자바 섬의 보고르 식물원 하급관리의 아들로 말레이 지역에서 가장 큰 창고업, 물류업, 그리고 돈장사를 하던 늙은 후디크 사장의 종업원 카스파 올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유럽 본토도 아니고 기껏 자바 섬에 있는 식물원 하급관리의 아들이란 하찮은 처지라도 기꺼이 사위로 선택할 만큼 올마이어의 외모가 출중했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선장은 올마이어를 남아시아 최고의 부자인 자신의 화물 관리인 겸 선장의 서기 겸 비서로 스카우트하고, 며칠 뜸을 들인 다음 자신의 수양딸과의 혼사를 꺼낸다. “지금쯤 다 큰 여인이 되었을 거야.” 그러자 곧바로 올마이어의 머리 속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 네덜란드가 있는 유럽, 이 가운데서도 자기가 살게 될 암스테르담에 지어진 환상 속의 저택이 그려져 잠시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올리브 색의 피부를 가진 말레이 족 여성과 결혼할 생각을 하니 순식간에 갑갑해졌다.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틀림없이 결혼을 한 후에도 행운의 별자리는 자기를 배반하지 않아서 고맙게도 신부가 얼른 죽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말레이 여성에 대한 수치심 정도는 가볍게 극복할 수 있었다. 올마이어는 기꺼이 오케이, 응답했다.

  이리하여 바타비아, 지금 지명으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리는데, ① 신부 입장에서 말하자면, 선장의 요구대로 그를 ‘아버지’라고 칭했지만 교육을 받은 후에 그의 노예 아니면 아내이자 조언자이자 안내자가 되리라 짐작을 해왔으나 영웅의 아내가 되는 꿈은 밟힌 쪽박처럼 깨지고 부루퉁한 백인 남자와 혐오스런 유럽풍 신부 옷을 입고 혼인이라는 것을 하게 됐으며 ② 신랑 입장에서 말하자면 혼인 서약을 하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온통, 조만간, 가까운 시일 안에 예쁜 말레이 여자를 어떻게 소리소문 없이 제거할 수 있는지를 궁리하느라 바빴다. 초장부터 이렇게 시작한 혼인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당시엔 조금 더 강한 율법으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렸다는 이유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신랑 올마이어 군의 희망이 이루어지거나 이혼이란 행운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젊은 부부는 플레시 호에다 집을 지을 목재와 가구를 싣고 보르네오 섬의 판타이 강에 집과 커다란 창고 건물을 지어 의붓아버지이자 장인 링가드 선장의 무역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했지만 여태까지 읽으신 것처럼, 사랑과 행복은 조금도 배에 싣지 못한 상태였다.


​  이들은 2년 후에 딸 니나를 낳는다. 아무리 서로 미워해도 할 건 다 하는 법이라 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어여쁜 딸을 낳긴 했는데, 둘 다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혼혈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딸이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 댓 살 정도 되자 또 링가드 선장이 나타나 이제 수양딸의 신세는 보나마나 끝난 거 같으니 대신 손녀라도 잘 키워 백인과 결혼시켜 유럽에서 살게 해야 하겠다고 니나를 억지로 빼앗다시피 해 싱가포르에 있는, 저 위에서 말한 창고업과 돈장사의 명인 후디크 씨의 관리인인 빈크 씨 댁에 맡겨 가정교육을 부탁한다. 무려 십년 동안.

  링가드 선장. 이 늙은이가 문제다. 딸을 결혼시키자마자 사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사위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스스로 찾아낸 숨은 강을 따라 섬의 내륙으로 올라가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더 큰 부자가 되려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재산을 투자할 수 밖에 없으니, 독자가 보기에도 그건 투자가 아닌 명백한 투기 행위이고, 내가 알기로 인도네시아 근방에 다이아몬드가 대규모로 묻혀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 많던 재산을 홀랑 말아먹고 애먼 올마니어 씨만 애먼 여인, 용감무쌍한 라자의 당당한 후손으로 열네 살에 직접 무기를 들고 백인들과 맞서 싸웠던 여인이 뒤집어 엎고, 깽판치고, 가구들 뽀개 난방용으로 불사르고, 영어도 할 줄 알지만 말레이 어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걸 보고 살게 된 거다.

  자신 스스로가 벌어둔 모든 재산은 영국의 보르네오 주식회사 설립 소식을 듣자마자 앞으로 영국인들이 보르네오 섬에 많이 출장올 것으로 확신해 링가드 앤드 컴퍼니 제방 근처에 당시 근동에서 가장 큰 펜션을 짓는데 다 쏟아 부어, 건물을 짓는 중에 영국이 계획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도 포기, 짓기도 전에 폐가가 되어버려 나중엔 결국 “올마이어의 어리석음”이란 옥호를 단 거고.

  이 때가, 링가드 씨에 의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진 니나가 10년 세월을 치욕과 따돌림 속에서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이 지나 이젠 완전히 여인이 된 상태다. 우리의 올마이어 씨의 소망 역시, 자기는 쥐뿔도 없으면서 섬의 내륙에 황금과 다이아몬드가 넘친다는 링가드 선장이면서 장인이기도 한 모험가의 장담을 믿고 마지막 도전을 하기 위해 자바 섬 옆의 발리에 터전을 잡은 왕가의 계승자 다인과, 삼비르의 족장 다캄바, 이렇게 두 명의 말레이 인과 힘을 합해 겁도 없이 불법적인 일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생전 처음 하게 되는데, 어떤 일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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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1 0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저 잠깐만요 골드문트폴스타프님. 여기서 끝 아니죠?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안 알랴줌 하고 그 뒤에 아무 말도 없다니….. 🥲

Falstaff 2023-03-11 07:32   좋아요 0 | URL
아, 그럼요. 이제 니나가 하이틴, 당시 시각으로 꽉찬 결혼 적령기의 아름다운 아가씨인데 어떻게 로맨스가 없겠습니까. 비록 반 유색인 반 백인의 혼혈이지만요. 그럼 누구하고 연애를 하게 될까.... 이것도 안 알려드림.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3-11 07:34   좋아요 0 | URL
책 말고요 골드문트님 글도 뭔가 총평이라던가 더 있을거 같은데.. @.@

Falstaff 2023-03-11 07:38   좋아요 3 | URL
아녀요, 없습니다.
ㅎㅎㅎ 라임이 말이죠, ˝안 알려줌.˝ 하고 끝날 경우엔 뒤에 뭐가 첨가되면 재미 없거든요. ^^

Falstaff 2023-03-11 07:40   좋아요 2 | URL
굳이 보탠다면.... 조지프 콘래드가 아니었다면 별 다섯인데, 콘래드라서 다섯 개를 주지 못했다, 정도. 표지가 넘 하이틴 소설 같다. 그래서 관심을 좀 덜 받을 거 같다, 이 수준입니다.

건수하 2023-03-11 07: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다시 올라가보니 표지가…독특(?)하네요 :)

그레이스 2023-03-11 08:55   좋아요 1 | URL
오늘은 두분 대화가 더 재밌어요^^
안 알려줌 시리즈군요 ㅋㅋ
미리 위에서 예고하시면 안될까요?

Falstaff 2023-03-11 11: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안 알려줌, 이거 미리 알려드리면 별 재미 없답니다. ^^

coolcat329 2023-03-11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중고가 엄청 많이 나와있어서 아직 여유부리며 사진 않고 있지만, 조만간 사야겠습니다. 초기작이지만 역시 훌륭하군요. 저는 안 알려줌! 이 말 나오면 더 기대하게 되더라구요. ㅋㅋㅋ

Falstaff 2023-03-11 14:56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제나처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콘래드는 처음부터 콘래드였더군요. 한 번 읽어볼 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