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형상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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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1973년 정월 초하루,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한 산부인과에서 쇠똥을 허옇게 뒤집어썼으면서도 입엔 은수저를 물고 세상으로 빠져나온다. 부모가 욕심이 많아 어려서 총명탕을 먹였는지 공부도 잘 해, 누구나 콜롬비아 국립대학에 갈 줄 알았지만 워낙 집안에 좋은 연줄이 많아 그들의 영향권 밖에서 지내보고 싶은 마음에 국립대 말고 사립 로사리오 대학 법학과에 진학한다. 후안의 부모, 속 깨나 썩었는데, 지도급 인사들의 자제가 주로 다니던 국립대도 그런 경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립대, 특히 로사리오 대학은 1990년대 초반 당시 가장 적극적인 반정부 시위를 펼치던 곳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행여 후안이 반정부 시위에 그것도 수뇌부로 가담하기라도 하면 집안 망신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이지. 그러나 걱정도 팔자. 당시 콜롬비아는 정치 투쟁 말고도 마약 왕들끼리, 마약 왕들과 정부군과의 사이에 무자비한 전쟁과 테러리즘 때문에 도처에 범죄가 횡행하고, 심지어 대낮에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함부로 기관총을 다니던 중원 고수들의 활극 시기였다. 법 공부도 잘하지만 일찍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의 라틴 문학과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영문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학문에 관한 비슷한 깊이만큼 겁도 많아서, 한 해 수백명이 테러를 당해 죽어가는 콜롬비아에 정이 똑 떨어져 (스페인이라면 그나마 조금 이해라도 하겠는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공부하니 이게 웬 돈지랄인지. 하여간 무려 16년 세월을 유럽에서 보낸 2012년,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고 훨씬 안전해진 조국으로 돌아와 여태 살면서 작품활동에 전념을 기울이고 있다. 위 내용은 이이의 전작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의 독후감에 이미 올린 것을 참고해 다시 쓴 거다.


  음모론에 관한 소설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독후감을 쓰다가 여차하면 작금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비교할까봐 조심스럽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쓰는 독후감이기 때문에, 특히 우리나라처럼 잘 드는 과도로 토막 낸 사과 같이 딱, 반이 갈려 서로가 서로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마당에 여차하면 양쪽 다로부터 욕이나 푸짐하게 얻어 걸리기 십상이라서, 욕이란 건 될 수 있으면 안 먹고 사는 편이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최대한 정치판과 비교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니 읽는 분께서도 애초 이해하실 마음을 잡숫고 보시면 좋겠다. 하긴 이 땅의 거대 정당 두 개가 다 거기서 거기지, 좌우가 어딨고 진보-보수가 어딨니? 어디 가서 특정 정당을 진보니 좌파니 하지 마시라. 쪽팔려 돌아가시겠다. 두 거대 정당의 차별점은 그냥 1찍, 2찍, 지지 정당만 다를 뿐이다. 한쪽이 하는 짓이라고는 수구 골통 짓이고, 다른 쪽이 하는 짓이라곤 데마고기 뿐이니, 그냥 그렇게들 계속 살아라. 괜히 남 독후감 쓴 거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  무지하게 장황하다. 나는 이이가 쓴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었다. 물론 지금은 보고타 북쪽 250킬로미터에 있던, 당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어린이들의 꿈과 환상을 위해 지은 개인 동물원 “얌마라”를 탈출한 1.5톤 무게의 흑진주색 하마와 마지막 장면 정도만 기억한다. <추락하는…>에 비하면 <폐허의 형상>은 장황하고 장황하다. 본문만 670페이지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4백쪽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폐허의 형상>은 콜롬비아 근현대사에 있었던 무수한 테러 사건 가운데 두 장면을 특정해 상세묘사 한다.

  한 명은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정식 이름은 라파엘 빅토르 제논 우리베 우리베. ‘우리베’를 연달아 두 번 쓴 걸 보니까 부모가 친척 관계였던 것 아닐까 싶다. 1859년생으로 일찍이 콜롬비아 내전 당시 최후의 전쟁으로 일컫는 마지막 “천일전쟁”에 참여했다가 패전을 한 인물로 내전 종식 후 콜롬비아의 좌파 자유진영인 자유당 대표를 지내다가, 책에 등장하는 젊은 변호사 안솔라가 법정에서 끝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결국 두 명의 목수, 헤수스 카르바할과 오비힐도 갈라르사가 누구의 사주도 없이 휘두른 손도끼에 정수리를 얻어맞아 1914년 10월 15일, 백주 대낮에 절명하고 만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때가 1914년. 유럽에서는 세계대전을 시작해 기관총이 난사하는데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전군 돌격’을 외친 마지막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야만의 시대. 목수 두 명이 독단적으로,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장군이 자유당을 말아먹고 있으며 조만간에 그들 같은 소규모 수공업자를 전부 굶겨 죽일 거라고 확신에 차 벌건 대낮에 유명인사 가운데 유명인사인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의 정수리를 도끼로 쪼갤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근처에 운집했던 군중들에 의해 린치를 당하기 전에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로 곧바로 들어가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4년을 보낸다. 이 사이에 미주알이 째지게 가난했던 이들 가족은 건물주가 되고, 금고 아래 깔린 현금이 위에서 누르는 현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하수인에 불과했을 것. 

  또다른 한 명은 1948년 4월 9일에 애매한 나치주의자이자 장미십자회에 심취한 청년 후안 로아 시에라가 역시 백주 대낮, 만인 환시리에 인파가 붐비는 보고타 거리 한 복판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걸어가던 콜롬비아 좌파 정당의 기수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 작중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라디오 DJ이자 법의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법학 전공자이자 심각한 수준의 불건전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모습이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받는 악마와 비슷한 카를로스 엘리에세르 카스바요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가브리엘 마르케스에 의하면 아주 근접한 위치에 있었던 옷을 잘 입은 신사 차림의 남자가 그 자리에서 즉각 군중들에게 가이탄을 쏜 범인을 지목하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대장 가이탄에게 네 발의 총알을 발사한 범인 시에라는 근처 약국으로 도망을 해, 약사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내렸지만 구두닦이를 비롯한 유난히 험한 성격의 군중들이 셔터를 부수기 시작하자 어차피 문을 열 수밖에 없는 약사가 다시 셔터를 올린다. 밖으로 끌려 나온 저격범을 향한 구두닦이들의 구두통에 의한 두부 가격과 철제 의자로의 폭행으로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고, 드디어 숨이 넘어갔음에도 군중들은 시에라를 발가벗겨 포장도로로 질질 끌고 가 대통령 궁에 벗겨버린 옷으로 마치 십자가에 묶인 누구처럼 매달아버리려고 했으나 대통령 경호대원들의 사격과 추격, 이어서 시민들을 향한 대량 학살로 진행되고 만다. 시민 가운데 몇 명은 시에라를 절대 죽이면 안 된다는 것, 살려서 법정에 올려야 범행을 사주한 진짜 세력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흥분한 군중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반대쪽에선 서둘러 저격범의 입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최초로 군중을 선동한 이를 두고 “회색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영국 공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고 책을 통해 진술한다. 물론 마르케스는 그를 직접 보지 못했다.


​  총명하지만 극단적인 집착 증세를 보이는 심야 라디오 DJ 카를로스 카스바요는 가이탄 암살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한다. 이것은 “사물의 진실을 읽는 법”을 찾는 여정이어서 이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도 모두 가이탄 저격과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알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 비행기 한 대에 무너져버리는 건물은 전부 개소리고 사실은 미국 내부에서 꾸민 일이라는 것. 누구든 현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는 법이라서 미국 정부가 하고 싶은 전쟁을 정말로 하기 위하여 민간인 3천명을 희생시켰다는 거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매릴린 먼로의 죽음 사이에도 공통점이 분명하게 있다는데 어떤 공통점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중요하고 충격적인 사건일수록 거대한 조직은 베일에 가린 채로 행위를 직접 저지른 인물의 입을 영원히 막는다는 건데, 과거에는 분명히 맞는 의견이었을지언정 SNS가 발달하고 익명의 의견이 자유롭고도 무책임하게 살포되는 현재 시점에서도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런 음모론을 작가는 펼쳐서 옹호하거나, 알려서 오히려 야유한다.

  작가와 작중 등장인물이 천착하는 것은 두번째, 1948년 4월 9일에 있었던 호르헤 가이탄 암살 사건과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 집단의 정체. 그리하여 <폐허의 형상>은 중증 편집증 환자라고 볼 수 있는 카를로스 카스바요가 지금은 가이탄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옛집에 오전 11시에 잠입해 마지막 관객까지 다 퇴장한 후, 너클더스터를 낀 손으로 유리를 파손해, 가이탄이 피격을 당했을 당시 입고 있어서 네 개의 구멍이 뚫린 정장 한 벌을 훔치려 한 절도 미수로 체포된 모습을 작가 자신,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가 TV를 통해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  장편소설은 특성상 다양한 에피소드를 거느린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찬란히 빛을 발해 작품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경우도 있다. <전쟁과 평화>의 폴로네이즈 장면을 에피소드의 대표로 꼽는 것은 나 한 명인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 이 책 <폐허의 형상>은 그러나 그게 좀 심했다. 만일 바스케스가 콜롬비아 근현대사에서 음모설을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동등하게 비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그건 작가 마음이니까 내가 뭐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장황하다. 너무 장황하다. 예를 들어 ‘나’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가 카를로스 카스바요와 알게 지내는 과정, 그와 함께 가이탄의 저격에 관하여 작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타당성을 위한 여정, 카스바요를 소개한 인물과의 인연이 생긴 사연, 심지어 전작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에서 이야기했던 것의 재탕, 삼탕까지, 장황해도 너무 장황하다. 작품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1914년 10월 15일의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저격 사건은 심지어 2백쪽을 넘겨 묘사를 하고 있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문장 사이의 넘김이 매끄러워 읽는데 무리는 없지만 지금 읽고 있는 에피소드가 스토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책의 초반을 지날 때부터 이런 생각을 쉼없이 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데엔 동의. 그러나 나는 권하지 않겠다. 읽고 싶으면 읽으시라. 말리지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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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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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변발을 하고 다니던 만주족 영재 출신.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이른 나이에 죽는 바람에 완전히 자기 실력 하나 가지고 북경사범을 졸업해 19세에 소학교 교장, 25세부터 5년 동안 런던 대학의 강사로 체류하다가 귀국해 교수를 하며 창작에 힘을 쏟은 전기전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이의 작품으로는 런던 생활의 경험으로 쓴 소설 <마씨 부자>, 중원눙의 각색을 통해 읽은 희곡 <낙타 상자>밖에 없어서 라오서의 작품들이 어떻다,라고 이야기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다만 라오서의 한살이를 돌아보면 우여곡절이 많기도 많은 세월을 살았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는 와중에 청말(淸末)의 혼돈기를 거쳐 청조가 막을 내린다. 이어 위안스카이가 잠깐 위세를 떨치다가 일본이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국민당이 득세를 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틈을 노려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점점 세를 불리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합작을 해 일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 아는 것처럼 국민당은 공산당에 축출당해 대만 섬으로 유배당하고 만다. 어쨌건 간에 안정을 찾은 중국 땅의 대학애서 선생을 하며 창작활동만으로 한 평생 마감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문화혁명의 바람을 거세게 맞아 1967년에 늙은 몸을 호수(태평호)에 던져 우여곡절의 대단원을 마친 인물. 중국 현대문학 주머니 속의 송곳. 마치 다이허우잉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같다.

희곡 <찻집>은 195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바로 위 단락에서 이야기했던 ‘서구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는 청나라 말기’가 1막, 아직 청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펄 벅의 <대지> 2부에서처럼 중국 전역에서 군벌들이 일어나 함부로 백성들을 갈취하던 시기가 2막, 미국과 담합한 부패한 국민당 세력이 권력을 잡고 일본군/공산당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가 3막으로 되어 있다. 장소는 베이징의 ‘유태裕泰’ 찻집이다. 처음엔 주인공이랄 수 있는 왕이발이, 부친이 숨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새롭게 가업을 이어받아 베이징의 대표적 찻집 네 군데 가운데 하나인 유태 찻집을 크게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던 시절이다. 그러나 세월이 그걸 내버려두지 않아서 2막과 3막으로 갈수록 점점 쇠락해간다.

1막에서 왕이발이 가업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은근한 야심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서태후와 서태후에 기생하는 환관무리 등의 수구적 탄압으로 중국은 날마다 한발씩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담사동의 개혁(또는 유신)마저 실패해 백성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굶주린 백성들은 특히 딸이라면 부잣집이나 세력가의 처첩으로 팔아 가족의 수를 줄여 남은 가족들이나마 배를 곯지 않게 하고 딸이라도 밥술 깨나 먹을 수 있도록 혈연 끊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길거리마다 거지들이 득시글거렸다. 베이징 거리는 완력 쓰는 왈패들과 이들을 고용하는 관리나 부자들이 장악했으며, 이들의 정점에 작품에서 서태후의 환관 방태감龐太監으로 대표하는 고위인사가 있었다.

2막과 3막도 마찬가지다. 권력과 부는 물리적 힘을 가진 깡패와 경찰(비슷한 공권력), 군인들에게 집중되고 백성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데 중간계급인 찻집주인 왕이발은 쉼없이 뇌물과 명목상 보호비를 질러주어야 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이런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백성은 인민으로 변화하기 위한 태동도 시작하지 못했다. 대개 이런 가난과 굶주림과 불평등과 극심한 차별은 서서히 끓어오르다가 드디어 비등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작지 않은 규모로 끓어 넘치거나 ‘민란’ 이나 ‘반역’ 또는 ‘혁명’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당시 중국에서는 특별한 환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바로 외세의 간섭 또는 침략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찻집>을 민족주의적 작품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청말부터 공화국 수립 전 시기까지 중간계급의 생활 터전인 유태찻집을 무대로 한 것부터 거의 모든 계급이 한 장소에서 만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고 봐야한다. 그리하여 다른 장소였다면 쉽게 표현하지 못했을 당시 중국의 많은 계급/계층의 등장인물이 서로의 입장에서 짧지 않은 험한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비단 중국 뿐이었겠는가.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아시아 거의 모든 국가가 비슷한 처지로 몰려 밖으로 유럽 열강의 대책 없는 침공과 안으로 무너져가는 왕국의 헐벗은 시절을 견뎌야 했을 터이니.

책을 넘기면 실제 공연하는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자오쥐인과 샤춘의 공동연출한 1989년 북경인민예술극원 공연 사진 두 장, 린쟈오화 연출의 1999년 북경인민예술극원 2세대 공연, 그리고 멍징후이 연출의 포스트모던 버전. 멍징후이는 연출도 하지만 극작가이기도 해서 희곡 <떠돌이 개 두 마리>와 슈프레히코어 희곡작품 <워 아이 XXX>을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떻게 이 작품을 “포스트모던”하게 연출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 중국의 현대 극연출은 주로 유럽의 공연물에서 볼 수 있는 무대의 해체 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대폭 손질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책에 실린 멍징후이의 무대 사진은 마치 외계 행성의 비탈지고 건조한 조형물 같이 보이는데 실제 공연을 찍은 것이라 어둡게 촬영되어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작품도 중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리얼리즘 자체인데 그것을 모던도 아니고 포스트모던 하게, 라니 말이지.

큰 규모의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도 수십년에 걸쳐 있고, 등장인물 역시 각 계급을 망라해야 하니까 상당히 많은 편이다.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를 갖고 있다는 건 쉽게 공연하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임에도 역자 해설에 따르면 <찻집>은 1958년 초연부터 2021년까지 720회 이상 공연했는데, 이게 전회, 전석 매진이었다고 하니 중국인에게 이 작품이 갖는 위상과 공감능력을 단박에 짐작하게 만든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엔 라오서의 모든 작품을 공연할 수 없었을 터, 그 기간을 빼고 감안한다면 작품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이런 극작품이 있을까? 이건 독자, 그리고 소수일 수밖에 없는 연극 애호가의 힘과 애정만 가지고는 만들 수 없다. 한 종족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나오기 위하여는 일종의 캠페인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캠페인을 좋아하지 않는 인종으로 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거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드라마를 꼭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게 그렇다면 우리의 으뜸가는 극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정말로 어려운 질문을 한다면, 극단적으로 사적인 감정이라는 전제 아래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나 천승세의 <만선> 정도를 후보작 가운데 하나로 추천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 연극이 부럽다. 끊임없이 애정을 갖을 수 있는 드라마가 있고, 그것의 리비전 연출한 작품 역시 계속 출현하는 환경. 그러고도 연출가, 희곡작가가 배곯지 않고 오히려 나라 밖으로 활발하게 진출해 다시 새롭게 각색해 공연할 수 있는 저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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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10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 말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말도 안 되는 출연료를 받고
무대에 서는 연극인들도 많더라구요. 물론 잘 되서 TV에도 나가고
영화에도 진출하면 좋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무대 한 번 서 보겠다고... 눈물 겹죠.
쭝국이 배곯지 않고 예술활동하는 건 정말 부러운 일이긴 한데
대신 당에 충성해야 하는 프로파간다가 있긴 하겠죠.

Falstaff 2023-01-10 17: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중국인으로 그나마 제대로 폼 잡고 살면서 당의 명령...까지는 아니고 당이 바라는 바를 어기면 뭐 여차 없을 거 같습니다.
거기서 ˝조금˝ 비껴가는 사람들이 연예, 예술, 스포츠 기타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예컨데 박/전 시대 때 소위 3S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늘진 낙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경호, 박상배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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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마르크는 1898년 독일 오스나브뤼크의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 Erich Paul Remark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 레마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제본해 가족들을 부양하는 아버지 페터 프란츠 레마르크 씨를 경원하는 대신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친밀한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나중에 작가가 됐을 때 자신의 가운데 이름을 원래 파울에서 마리아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성마저 대표작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발표할 때부터 Remark를 Remarque로 고쳐버렸다. 비록 독일 태생이지만 조상이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 같다. 이 조숙한 소년은 열네 살에 벌써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을 섭렵했다고 하고, 자료마다 조금 다른데, 책의 연보엔 열여섯 살 때, 인터넷 자료엔 열여덟 살 때인 1917년 6월에 징집되어 서부전선으로 배치되었다가 부상을 입어 야전병원에 입원, 다시 배치 후 곧바로 종전을 맞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레마르크가 십대 시절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으며, 당시의 경험으로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남겨 위대한 반전 문학을 전승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개선문>을 보태 소위 ‘3대 레마르크’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거칠게 구분을 하면, <서부전선…>, <사랑할 때와…> 등 실제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전장battlefield소설과 <개선문>, <리스본의 밤> 같은 망명문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그늘진 낙원: Schatten im Paradies>도 망명문학이며, 레마르크 가운데 내가 처음 읽은 미국, 특히 뉴욕을 무대로 하는 이주민들의 정처 없는 이방인 신세를 그린 작품이다. 레마르크는 서른한 살이던 1929년에 <서부전선…>를 발표하여 당시 기준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31년에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귀로>를 간행해 거의 권력을 쥐려고 하는 국가사회주의 당으로부터 반전작가라고, 지금은 본받을 만하지만 당시로 보면 반역자에 가까운 호칭을 얻게 된다. 1932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마자 레마르크는 어쩔 수 없이 스위스로 망명의 길을 떠나고, 1939년에는 독일로부터 국적마저 몰수당한다.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의 무국적자 레마르크는, 하도 많은 이주 피난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인심이 야박해진 스위스에서 전쟁 터지기 바로 직전 미국으로 다시 망명을 떠난다. 레마르크는 순서대로 아들-딸-아들-딸 형제 가운데 셋째로 형은 어려서 죽었고, 누나도 당시에 망명을 한 것 같다. 문제는 여동생 엘프리데. 동생은 평범한 재단사로 일하다가 반전 발언을 했다는 죄명으로 1943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된다. 게다가 국가의 적인 반전작가 레마르크의 동생인 것이 알려져 결국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는다.

나치의 문화 탄압이라면 소위 말하는 “퇴폐예술”을 빼놓을 수 없다. 원래는 나치 집권시절인 1930년대 초중반부터 1945년까지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더니즘 예술을 일컬었지만 급속도로 반anti애국주의 적이고 친유대 적이며, 기타 나치의 사상과 어긋난 예술작업을 통틀어 “퇴폐”라는 멸칭으로 뒤집어 씌운 것이다. 유대인이 아닌 문학가 쪽에서는 좌파 예술인이라 찍힌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선두로, 독일 반전주의 문학의 첨병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엔 다분히 국가주의자이었을지라도 이후 친유대 경향을 보였다는 죄목으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토마스 만도 포함한다. 이들의 책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보듯 광장에 산처럼 책을 쌓아놓고 불을 싸질러버리는 야만도 서슴지 않았다. 기원전도 아니고 무려 기독 탄생력 2천 년이 가까워올 때. 이때 불탄 많은 책 가운데 베를린 책방에서 수거해온 <서부전선 이상없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늘진 낙원>의 주인공 ‘나’는 유대인이 아닌 기자 출신의 독일인으로 나치와 뜻을 달리하는 것이 들통이 나 독일의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탈출해 스위스로 월경을 했지만, 정당한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나중에 생각해보면 호텔 같은 감방에서 몇 달을 갇혀 지내다가 벨기에로 추방당한다. 벨기에 역시 나치의 강한 영향권 안에 있어 정부기관에 잡히기만 하면 큰 위험을 당해야 했는데, 브뤼셀 박물관장의 호의에 힘입어 박물관 내 창이 없는 지하에서 2년을 버텨야 했다. ‘나’는 직원 모두 퇴근한 밤에만 지상으로 나와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 중국의 은, 주, 한나라 청동 제품을 비롯해 서양의 온갖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확장한다. 2년 후 ‘나’는 브뤼셀을 빠져나와 프랑스 국경을 넘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프랑스 수용소에 수용되고 브뤼셀 박물관장은 ‘나’를 은닉해준 혐의로 체포되어 책이 끝날 때까지 안위를 모르게 된다. 죽었다고 보는 게 마땅하리라. 프랑스 수용소에서도 극적으로 탈출한 ‘나’는 리스본 또는 마르세유를 통해 이미 1933년에 죽은 로버트 로스라는 사람의 여권을 갖고 미국행 상선에 올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정착할 수 없어 엘리스 섬에 구속되었다가 3개월 한도로 뉴욕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다. 3개월. 이후 ‘나’는 전시 중인 유럽을 제외한 어느 나라를 향해 미국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서 <그늘진 낙원>은 시작한다.

‘나’는 어쨌거나 미국에서 “로버트 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엘리스 섬에 억류되었을 때 만난 터키인이 뉴욕에 사는 자기 친구의 주소를 일러주었고, 3개월 기한으로 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로버트는 주소에 쓰인 ‘로이벤 호텔’로 가서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온 백계 러시아인 멜리코프를 찾는다. 멜리코프, 나이든 망명객은 미국에 도착한지 벌써 수십년이 지나 호텔에서도 주인 다음의 권위를 누리고 있지만 로버트를 비롯한 이주민들에게 친절하다. 로버트의 신세를 듣는 바로 첫날, 자기 방에 침대를 하나 더 가져다 놓아 ‘나’의 숙식을 해결해주고 보드카도 한 잔 주는 등 온갖 편의를 봐준다. 아직 영어도 서툰 ‘나’ 로버트. 그러나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언어를 빠른 속도로 익혀가며 러시아, 독일, 유대인, 프랑스를 거쳐 브루클린 액센트까지 사용하는 영어로 무장하게 되면서 뉴욕의 이주민 커뮤니티에 빠른 속도로 적응하게 된다. 당연히 사랑 이야기도 등장한다. 프랑스 태생의 망명 백계 러시아 여자 나타샤 페트로브나. 내가 아는 레마르크의 다른 작품 속에도 이 나타샤 페르로브나와 매우 비슷한 인물이 있다. <개선문>의 조앙 마두. 이 여자들의 대책없는 허무라니, 얼마나 매혹적인지. 화려한 모델로 큼지막한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로 장식한 왕관을 쓰고, 고급 모피를 둘렀지만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는 모델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나타샤 같은 작가라서 그럴까? 같은 망명 소설이라서? 아무러면 어떤가. 오히려 마치 오랜만에 마주친 것 같은 친근함이 들어 좋았는 것을.

그리고 대부분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이주민 커뮤니티. 그들은 단지 ‘유럽에서 온 이주민’이라는 것 하나로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과 차별을 두지 않고 편의를 봐준다. 일찍 미국으로 건너와 갑부가 된 독일계 유대인은 로버트에게 이주민 기준으로 치면 거금을 빌려주어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게 해주고, 파티를 열어 실컷 먹고 남은, 진짜 헝가리 여성 주방장이 요리한 굴라시를 왕창 포장해 가져가게 해주고, 서로의 직장을 알아봐준다.

이렇게 많은 이주민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니까 이들 모두, 역시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흘러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고, 나치의 눈과 손길을 피해 이주해오면서 피할 수 없었던 희생도 있었을 것이며, 작품의 맛을 더해주는 무모한 모험과 모험 과정에서 약간의 코믹한 장면이 있었던 건 당연하다. 이주민들은 몸은 미국, 세계의 수도가 될 뉴욕에 있으나 이들이 누리는 미국이라는 낙원 속에서 절대로 원주민이 될 수 없는 그림자 신세의 이주민들. 그리하여 그들이 보는 뉴욕 속 자신들은 낙원 속의 그림자, Schatten im Paradies일 수밖에. ‘나’ 로버트는 말한다.

“이게 바로 낙원이지. 당신이 좋다면 ‘그늘진 낙원’이라 부르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하지만 내겐 더욱 귀중한 모든 것과 격리된 채, 내 편으로 본다면 동면하는 낙원이지. 타의의 방관자의 낙원이야. 나타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만 얘기합시다! 밤과 별, 아직도 우리 내부에 꿈틀거리는 생의 불꽃, 과거의 기억은 그만둡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과거의 기억은 영원히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읽은 레마르크 속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이 증상은 전쟁터 속에서 전쟁에 좌절하는 인물들보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와 낯선 곳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 이방인들의 경우가 더 짙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속의 낯선 한 명. 하지만 어쩌랴. 당신이나 나나 어차피 세상 속의 낯선 한 명일 뿐인 것을. 그대, 아니라고 생각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뒤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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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07 06: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점, 네개 반이 없어서... 네개와 다섯개 사이에서 좋은 게 좋은 거란 세상의 원칙에 따라.

새파랑 2023-01-07 08: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의 별 다섯(반올림해서)은 흔하지 않으니 읽어봐야 겠습니다~!!
레마르크는 출간 순서대로 읽어봐야 겠군요~!! 낙원이라는 제목과 내용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Falstaff 2023-01-07 09:13   좋아요 2 | URL
원 제목은 ˝낙원 속의 그림자˝ 즉 낙원이 아니라 그림자에 방점이 찍힙니다.
재미있습니다만, 소위 3대 레마르크 만큼 까지 가지는 못하는 것으로.... 크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언제나 기대가 크면 실망하더라고요. ^^

그레이스 2023-01-07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마르크의 몰랐던 부분을 알려주셨네요.
자유와 안락이 주어져도 다 누릴 수 없는 것이 망명자들의 삶인 것 같아요.
많은 망명작가들의 모두 과거에 묶여 있죠.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인데도 다 다른 이야기로 읽힙니다.
레마르크 전집을 언젠가 읽어야 할텐데요
3대 레마르크 기억도 안납니다.^^;;;

Falstaff 2023-01-07 09:15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정말 예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 어떻게 그렇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새 책을 읽는 것 같은지 말입니다. 레마르크 전집도 나와 있나봅니다.
십대 시절부터 이이의 작품은 진짜 좋아했습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3-01-07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책 표지가 넘나 신기해서 어디 출판사인가 굳이 눌러봤습니다. 아아…..

Falstaff 2023-01-07 15: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책, 역자가 유명 독문학자입니다. 근데 좀 오래된 번역이라 예스런 표현이 간혹 눈에 띄더군요. 전반적으로 좋습니다. 물론 정확한 번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한 우리말이 좋다는 말씀.

- 2023-01-07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저도 10대때 읽은 책 중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미지 적(?)으로 좋아했던 작품이 개선문 예요 ㅋㅋㅋ 마두 조앙 마두, 여주가 자기 소개 하던 장면이었나? 아직도 기억 나네요 ㅋㅋ 책의 정서가 뭔가 고독하고 있어뵈는(?) 도시의 분위기 장난 없었던 거 같아요 ㅋㅋ 이렇게 레마르크 이야길 또 알고 가네요😀

잠자냥 2023-01-07 10:37   좋아요 1 | URL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읽어보아…. 캬. 십대 시절에 헤세보다 레마르크가 진리입니다.

- 2023-01-07 10:45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개선문 분위기도 프랑스여 ㅋㅋ 이 고급스런 골계의 프랑스 고양이!!😸

Falstaff 2023-01-07 15:41   좋아요 1 | URL
아휴, 그럼요. 십대 시절에 읽은 작품들이 제일입니다, 제일. 그중에서도 레마르크와 헤세는 뭐 할 말이 읎지요. 개선문 기억 잘 안 나시면 다시 읽어보셔요.
맞아요, 사랑할 때 죽을 때, 아호, 그거 뎡말, ㅋㅋㅋㅋ 뭐라 할 말이....

stella.K 2023-01-07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범우사 21년도 판이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범우사 옛날엔 많이 봤지만 안 본지 오래되서…
레마르크 천재끕있었네요. 근데 외국도 남자한테
여성스런 이름을 쓰기도 하네요.
릴케도 그렇지 않습니까.

Falstaff 2023-01-07 15:46   좋아요 1 | URL
이거, 말만 21년 판이지 옛날 판을 그대로 찍은 거 같습니다. 표지만 달랑 바꾸고 가격 올리는 것이 소위 말하는 ˝개정판˝이잖아요. 역자가 그새 돌아갔나 그럴 겁니다. 범우사는 저도 요즘에 새 책이 나오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ㅎㅎㅎ 외국 이름에 여성스런 건 1st.name엔 없어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간 이름에 넣는 걸로... ㅎㅎ

바람돌이 2023-01-08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마르크는 대표작만 읽었는데 이런 책도 있군요. 오래전에 읽은 레마르크 책의 추억이 생각나서 좋네요. 그늘진 낙원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Falstaff 2023-01-08 18:03   좋아요 1 | URL
옙. 이 책도 괜찮습니다. 원제가 낙원 속의 그림자...인데요, 낙원은 뉴욕, 그림자가 주인공이 처한 망명자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자는 돌아갔고, 새롭게 다시 번역하기엔 세월이 많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coolcat329 2023-01-11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노 서부전선과 사랑할 때...이 두 책 생각하면 아우...ㅠㅠ
넷플릭스에서 서부전선 영화보다가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중단 상태인데 다시 시도하려구요.
올해는 개선문을 꼭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3-01-11 20:06   좋아요 0 | URL
전 서부전선, 사랑할 때, 이 두 편의 영화는 어려서부터 넘 간섭이 심해서 제대로 감상을 못했습니다. ㅠㅠ 정여사의, 편히 쉬시기를, 편견 때문에 말입죠. 왜 그러셨는지 몰라요.
개선문, 얼른 읽으셔요. ㅎㅎㅎ 별 네 개까지는 제가 보장합니다!!!

yamoo 2023-01-12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레마르크 하드커버 전집있숩니다. 오래된건데....걍 쟁여놨다가, 열린책들로 <서부전선..>봤고, 민음 세계문학으로 <사랑할때와 죽을 때> 봤습니다. 정말 끝내주는 작가라고 생각하여 전집을 읽을 생각입니다. 제일 최고로 치는 책은 <서부전선..>인데, 열린책들 판본 오타가 너무 많아서 욕하고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그럼에도 내용은 아주 아주 좋았습니다!

근데, 막 일독한 유진 오닐의 <밤으로는..>은 별로였네요. 아마도 제가 가족 얘기 나오는 작품은 별로 안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백년의 고독도 별로였고요...아마도 성향상 가족얘기는 정말 읽어도 그리 재미를 못느껴서요..^^;;

그레이스 2023-01-12 18:45   좋아요 1 | URL
빨간색 옷입은 하드커버 전집 맞나요
저도 갖고 있어요
그리고는 다른 출판사걸로 읽는거 저랑 비슷하시네요 ㅋ

Falstaff 2023-01-13 06:43   좋아요 1 | URL
오홍. 레마르크 전집이 있었군요. 빨간 색, 하드 커버... 대충 감이 잡히네요.
 
거미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요제프 로트 지음, 김희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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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던 갈리치아 지역의 소도시 브로디에서 유대인 나훔 로트의 아들로 태어난 요제프 로트는 유대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그가 1932년에 쓴 대표작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잘 묘사한 것처럼 적어도 할아버지-아버지-본인 3대 까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운명공동체 비슷하게, 오스트리아가 당연히 조국인 ‘오스트리아인’으로 생각했다. 요제프 로트가 빈 대학에서 “정상적으로”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차 세계대전에 황제군으로 참전했던 경험 덕으로, 사회가 유대인으로 요제프 로트 자신을 바라보던 시각과 관계없이, 이런 입장을 고수하게 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는 것. 로트 자신 역시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를 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그랬을 거 같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 전 유럽적인 반유대주의에서 시작한 유대인 책임론이 유독 독일-오스트리아에서 강력하게 대두되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는 단계에 이르러는 피해의식에 싸이게 된다. 급기야 1933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의 상병 출신 키 작은 아마추어 화가가 놀라운 웅변술을 무기로 권력을 잡기에 이르자,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프랑스로의 이주를 선택한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로트는 심각한 수준의 알코올 의존증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1939년에 파리 공립 자선병원에서 폐렴으로 45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이이의 대표작으로는 위에서 짧게 언급한 <라데츠키 행진곡>과 유대인으로의 삶을 그린 <욥>, 그리고 에세이 <방황하는 유대인>을 꼽는다.

<거미줄>은 위키피디아에서는 “미완성” 데뷔작이라고 했다. 다 읽고 지금 독후감을 쓰는 입장에서 이게 미완성 작품인지, 완결을 맺은 작품인지 헷갈릴 수준으로, 굳이 미완성이라고 주장한다면 다 지어 놓고 뜸만 들이지 않은 돌솥밥 정도로 이해하면 접수하기 쉽겠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제국의 소위 신분으로 참전해 하인리히 왕자가 이끄는 연대에서 복무한 20대 후반의 ‘성실하고 예의바른’ 청년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출세를 위해 온갖 악행을 벌이는 과정을 그렸다.

독일제국 하사관 출신의 철도 세관원인 빌헬름 로제 씨는 순서대로 딸 둘과 외아들 테오도어를 낳고 죽었다. 금발의 테오도어는 성실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소년이었는데, 일찍이 명망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꿈꾸었지만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는 마음먹지 않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져 소위 계급으로 참전해 무사히 귀환한 다음이 문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의하여 거의 강제로 제대를 하게 된 테오도어는 1918년에 대학에서 법학공부를 하며 동시에 유대인 보석상 에프루시 씨 집안에 들어가 가정교사로 일해야 했다. 어머니와 누이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들이 전사했더라면 집안의 자부심을 세워줄 수도 있고, 얼마 되지 않지만 연금도 조금 받을 수 있었는데 멀쩡하게 돌아왔다고 그걸 눈치를 주었고, 아버지는 정복을 입은 예비역 소위 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나무 상자에 갇혀 땅속에 묻혀버렸다. 테오는 안으로는 자신과 가정 사이에 장벽처럼 드리워진 말없는 적대관계와, 밖으로 사회주의자와 유대인에 대해 심해지는 사회적 적대감 사이에서 자신이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활수한 에프루시 씨가 주는 가정교사 임금으로 살고 있으나, 사실 테오는 학창시절부터 유대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급우, 유대인 글라저.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늘 미소를 지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학생. 그렇지만 20분 안에 아무 오류 없이 라틴어 작문을 완성하는 재능을 아예 가지고 태어난 듯해서 테오도어에겐 늘 좌절과 열등의식만 주던 아이. 이제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인 에프루시 씨의 아들인 어린 에프루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실수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작은 에프루시. 오히려 자신의 대답이 왜 정당하 것인지 테오도어에게 설명을 하면 테오 자신이 설득을 당할 위기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여, 틀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하지 못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글라저와 에프루시 씨, 에프루시 집안,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에프루시 부인을 보면서 테오도어는 이건 분명히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모든 것은 단연코 속임수라는 것. 공화국은 유대인의 돈벌이 광장에 불과하고, 이에 대한 증거로, 전쟁 발발시마다 유대인들은 군복무 면제를 받거나, 전투수행 부적합을 사유로 야전병원, 병참기지에서 서기로 근무하면서 총 한 번 쏘지 않고 전쟁 기간을 안전하게 보낸다는 것. 물론 일찍 직업군인을 선택해 하사관으로 근무하는 병력들은 제외하지만. 하여튼 군대가 몰락한 것은 어떤 방면에서든지 적아도 한달에 두어 번 이상 공무원을 매수하려 시도하는 유대인 탓이며, 그들이 사실상 국가를 지배하며, 사회주의를 고안해 애국심을 버리고 적을 사랑하게 유도하고, 동시에 경찰력을 장악해 민족주의 조직을 탄압한다는 거였다. 또한 “시온의정서”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더 나가서 세계를 지배할 야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빌헬름 티크만, 쾨테 교수, 강사 바스텔만, 물리학자 로란츠, 인종연구가 만하임 등을 거론한다. 이런 유대인 가운데 가장 부유한 에프루시 씨는 대단한 저택에 온갖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품을 향유하지만 테오도어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귀금속은 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의 그릇 하나뿐이다. 프랑스 아미생 성에서 약탈한 것으로 엄격한 상관 크라우제 소령이 도착하기 전에 은닉해 보관해 가져온 거에 불과하다.

이런 테오도어는 특히 에프루시 씨의 두번째 아내 에프루시 부인에게 홀딱 반하면서 세속적으로 출세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자신의 가슴 속에 늘 간직해온 꿈은 눈같이 흰 백마를 타고 부대의 선두에서 행진하는 대위의 모습이었다. 수천명의 여자들이 선망하는 존재. 펄럭이는 깃발과 우레 같은 환호 속에서 여자들이 키스세례를 날리는 꿈은 질병처럼 분출해 관절과 신경, 근육 속에서 숨쉬며 혈관을 따라 흐르고 흘러 온 몸을 채우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에프루시 저택을 방문한 유대인 트레비치 박사. 테오는 트레비치 박사를 통해 하인리히 왕자와 연결이 되고, 왕자에게 하루 동안의 몸을 팔아 트레비치 박사가 소속해 있는 뮌헨의 비밀조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쉽게 말해 밀정. 이제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는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누명을 씌워 자신의 영달을 위한 희생으로 삼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잠깐 지나치게 잔혹하기도 하고, 어차피 인생 다 그게 그건데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사가saga가, 미완성 작품이라니까, 시작되려다가 만다. 배신하면 죽음으로 벌을 받고, 술에 취하는 등 실수로 비밀을 발설하면 제거되는 무시무시한 비밀 공동체 SII. 알파벳 S와 로마숫자 II로만 인식할 수 있는 복마전, 악마(魔)가 엎드려(伏) 있는 전당(殿) 역시 악마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어서, 복마전 속에서는 더 독한 배신과 비밀유출이 벌어진다는 건, 다들 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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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1-05 0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지어놓고 뜸만 들이지 않은 돌솥밥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1-05 17: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있어 하시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창비시선 367
민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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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년 갑술생 개띠 시인 민영이 여든 살 때 출간한 시집. 근데 이이가 환갑 넘어 찍은 시집 《유사를 바라보며》 와 별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해가 바뀌었으니 벌써 이 시인이 어느새 망백望百. 정말 세월이 겁난다. 외로울 땐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 눈을 감겠다는 <단장斷章>을 외웠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이 휙, 지나쳐버렸으니, 그런데도 아직 시를 쓰고 있으니 참 무서운 세월이고 무서운 시인이다. 시들은 2007년, 그의 나이 일흔다섯부터 여든까지, 칠십 대 후반의 시작詩作 모음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유사를 바라보며》와 많이 다르지 않다. 저 아득한 유년시대를 보낸 만주 간도의 화룡현, 그곳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 여자아이들, 아직도 장백산, 즉 백두산 밑으로 유연히 흐르는 해란강변 옆에 잠든 아버지.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인 어머니. 더 어린 시절 까뭇한 기억 속의 고향인 철원까지. 사내 나이 예순이나 여든이나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십 년이 지날 때까지 여전히 병든 아내의 발톱을 깎고, 저 만주 간도에서 함부로 아버지의 따귀를 갈기던 일본 순사에게 분노하고, 그곳에서 늙어갈 동무들의 주름진 얼굴을 상상한다.

  그러나 노인의 시를 읽는 일은 다른 의미에서 슬프다. 이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시인이 나이가 들면 주변의 사소한 것에도 다 정령이 깃드나 보다. 저문 강에서 삽을 씻었던 정희성도, 신춘문예 삼관왕의 문학천재 출신 오탁번도, 한 바탕 농무를 추어 창비 시선 1번을 기록한 신경림도, 세월의 부드러움, 시간이 쓰다듬은 일상 구석의 누추하고 가련한 것들, 해 저물면 도로를 굴러다니는 낙엽 속에서도 노래를 찾는가 보다. 이런 시들을 새삼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  칠십 대 후반에 쓴 민영의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에서 제일 마음을 끈 것은 본문 속에 든 것이 아니라 시집에 들어가기 전에 읽으라는, <서시序詩>였다. 전문을 소개한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꽃도 철 따라 피지 않으리라

  그리고 구름도

  嶺 넘어 오지는 않으리라


​  나 혼자 남으리라

  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

  노래를 부르리라

  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


  산마루(嶺)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기에 다시는 높은 고개 넘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겠다는 것일까. 앞 연에는 주어가 없다. 누가, 무엇이 오지 않겠다고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시는 독자마다 다 개별적인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다. 나는 그것을 시인, 민영 자신이라고 보고, 영 넘어 있는 것은 피안, 피안의 세계, 이곳인 사바의 반대편에 있는 깨달음의 장소인 죽음의 자리라고 본다. 그곳엔 꽃도 철 따라 피지 않는다는 건, 언제나 피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철, 계절이란 것이 아예 없다는 뜻일 수도 있을 터. 저 피안 너머 있는 구름 조차도 다시는 삶과 죽음의 산마루를 넘지 않는 곳에 시인은 혼자 남겠다는 다음 연. 그곳에서 노래를, 산새처럼 노래를 부르고 긴 긴 편지를 쓰겠단다. 그러니 산마루 너머 있는 것은 피안일 수도 있고 시의 세계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를 시인은 자신의 마지막 시집, 노래책이라고 여긴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달라? 제1의 목차에 둔 시에서 그는 저 오래 전에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어디로 가버린 젊은 것들을 찾고 있다.


  이 가을에


  가을이 깊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

  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고,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민다.


​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왔는지,

  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

  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념하는 일이다.


  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

  시월 상달에 이 눈부신

  서릿발 치는 푸른 날빛 속에서

  어디로 가야 만나볼 수 있단 말이냐!  (전문)


  늙은 시인을 기어이 영탄하게 만든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청년들은? 다 죽었다는 말이다. 진짜 숨을 거두었다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독자의 마음에 맡긴다. 변절도 죽음과 같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한 때는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의 “살아있는 시체들”을 숱하게 보고 있지 아니한가. 그저 시인은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말없이 떠난 젊은이들”을, 그들 만을 추념할 뿐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살아있는 시체”를 위한 공간은 없다. 늙은 시인에게 주어진 일은 오직 하나, 그들을 추념하는 것이며, 어느새 운동성은 휘발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노쇠, 닳음, 누추한 기억,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추억”이라고 부른다. 노 시인은 그것을 먹고 사는구나.

  여든이 가까운 노인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단어는 어머니. 어느 날 밤, 이 어머니가 시인의 꿈에 나왔다.


  꿈에 본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사는 이 세상

  왜 이렇게 눈부신가요?


​  새들은 새들끼리

  굴참나무 숲에서 지저귀고,

  하늘에는 새털구름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  어머니 계신 그 세상에도

  보리이삭 파랗게 패었습니까?

  저 앞 새밋들에

  실개천 한 오리 반짝이며 흘러가고,

  자운영 핀 밭둑 위에

  노랑나비 춤추며 날아갑니다.  (전문)


  그림 하나 본다. 당연히 풍경화. 들에 한 오리, 2킬로미터는 족히 반짝이면서 흘러가는 실개천의 밭둑엔 자운영이 피어 있고, 자운영이 있으니 노랑나비도 춤을 춘다. 봄이 와서 세상은 이리 눈부신데 어머니 계신 산마루 넘어도 시인이 즐기는 봄 속의 들판 같으냐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늙은 아들의 시. 전형적인 노시인의 시다. 언덕마루에 올랐을까? 아니면 그것도 쉽지 않아 TV 프로 <여섯시 내고향>을 통해 푸릇 보리이삭 팬 들을 보았을까? 아무러면 어떠랴. 시집에 이 비슷한 시들이 많다. 늙은 시인들이 내는 시집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나도 이젠 시인 민영과 작별해야 할 시간인 것 같다. 모두 아홉 권의 시집 가운데 세 권을 읽었고 가지고 있으며 두 편의 시를 외운다. 그러면 됐다. 더 바라 무엇 하겠는가. 민영에게 고맙다. 덕분에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가끔 쓴 소주 한 잔에 안주 삼아 당신의 시를 읊었고 앞으로도 자주는 아니지만 또한 그럴 터이니. 당신도 나 같은 독자가 있는 것을 조금은 위안 삼을 수 있으리라. 잘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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