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수의 값 : 잎이와 EP 사이 - 백승연 희곡 반올림 42
백승연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백승연은)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즈음해서 처음 써 본 희곡이 덜컥 연세춘추 오화섭 문학상에 당선되는 바람에 그때부터 글 동네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방송국, 영화판, 신문사, 잡지사,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리며 잡다한 글쓰기를 계속하다 본격적으로 문학에 입문한 지는 얼마 안 됐다.”라고 하는데, 이게 언제 업데이트한 정보인지 모르겠다. 환갑이 넘은 작가이니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꽤 됐다.”라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2005년 '마로니에 전국 여성 백일장'에서 아동문학 부문 장원을 한 적이 있다. 책방에 작품을 검색해보면 단행본 두 권, 공저 한 권이 뜬다. 청소년과 아동문학에 전념하는 거 같다.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졸업을 앞두고 한 번 써본 희곡을 투고했는데 이게 학보사 주최이긴 하지만 문학상을 받았으면, 그거 참, 고민했겠다. 비록 학창시절 내내 문과대학을 기웃거리며 보냈다고 해도 졸업 후 직업 선택 같은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 거 같다. 속내야 모르겠지만 이이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야 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니까 사회의 첫발은 문학이 아니었을 듯. 그래도 언젠가는, 하면서 계속 꿈을 키웠겠지. 그러다가 2007년에 동화 <한눈팔기 대장, 지우>를 출간하고, 청소년용 단편소설 <잎이와 EP 사이>를 출판사에 투고했다가, 출판사로부터 장편이나 본격적인 단편으로 다시 써보라고 권유를 받았다 한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2018년이 되었을 때야 백승연은 그걸 희곡으로 만든 <함수의 값: 잎이와 EP 사이>를 세상에 보였으니 세월도 무심하지 극작가는 어느새 54세가 되었구나. 또 6년의 세월이 더 흐른 다음에 한 독자의 눈에 띄어 읽혔다.


  책가게의 작가소개 끝 무렵에 “요즘은 희곡과 돌, 나무, 새 그리고 또다시 수학에 눈을 반짝이며 지내고 있다.”라고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요즘엔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모양이지만, 방정식이 나오고 미지수 x, y, z가 새로이 등장하는데, 이 알파벳들이 그동안 끝도 없이 고생시키던 덧셈과 뺄셈, 곱셈의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은혜로운 혜택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수학적으로 날 샌 거다. 그때부터 수학은 실질적인 삶과 영영 이별을 하고 누가누가 더 머리가 좋은 지 단기필마의 검법을 다루기 시작한다. 나이 쉰이 넘어 다시 수학이라는 두뇌경연의 무대에 뛰어들다니 놀랍기도 하다. 작가가 취미로 수학을 하는지 무슨 사연이 있어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에는 취미생활로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간이 저 17세기 프랑스 사람 피에르 드 페르마.

  책의 제목으로 “함수의 값”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극 중에 수학 강의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함수가 수학의 정밀함이라는 이상세계를 설명하는 데 가장 수월하다고 여긴 듯하다. 주인공인 고등학생 윤이수가 이 수학의 이상세계, 오직 딱 하나, 순정한 한 점, 딱 한 곳 말고는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벼랑 끝 속에 살고 있다. 수학 말고는 다른 것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아이. 당연히 이수의 지난 시간 속에 여러 일이 있어서 지금의 이수가 생겼을 것이고, 작품은 그것을 쫓는다. 네 살 무렵 이수가 아닌 은표라는 이름이었을 때, 자기가 만든 레고 블록 성 속에 자그마한 초록 인형을 한 인격체 삼아, 이름을 ‘잎이’라고 했다. 은표의 어린 시절에 아주 드물게 친절했던 놀이교구선생은 ‘잎이’를 알파벳으로 EP라고 하자고 한 적이 있어서 함수의 값이 잎이와 EP 사이가 되었을까? 하여간 그렇다. 혼자 레고 블록 성 속의 잎이와 놀던 때, 옆방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 지금 당장 도장 찍고 나가! 돌이킬 수 없는 부부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엄마는 나이는 좀 들었지만 돈은 무지하게 많은 남자와 얽혀 재혼을 했고, 은표도 새로이 윤이수가 되었으며, 수학특기생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최고 명문의 자립형사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자사고의 여학생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이트 강서인. 이 아이는 시골에서 기차 타고 올라온 이른바 ‘사배자.’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검색해보니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등록금 비싸기로 악명이 높고, 그렇다고 돈만 많아서 들어갈 수도 없는 자사고이지만 나름대로 사회에 어필하기 위해 소수 학생을 사배자 전형으로 뽑기도 하는 모양이다. 서인이 이 줄을 타고 입학했으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온갖 학원을 섭렵하고,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게 됐으니 이게 경쟁이 되겠어? 입학하기 전에 기숙사 입소할 때부터 잔뜩 주눅이 든 상태인데, 같은 방 아이는 오직 수학만 풀고 있으니 점입가경이었겠지. 이 자사고라는 곳이, 나는 말로만 들어봤는데,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학생들 본인이나 극을 달리는 엄마들의 치마바람. 나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아 모르지만 <스카이 캐슬>이란 거 있었다고? 이 속에도 당연히 소외자들이 있을 터, 이들이 바로 이수와 서인이다.

  이수는 그렇다고 치고, 시골에서는 동네 신동이었지만 자사고에 들어와보니 이건 애초에 어디다 대 볼 수도 없이 처지는 수준. 그러나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과 동네 희망의 상징인 서인은 이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비집고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고, 갈등은 애초에 처음부터 둘의 관계가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으니 피할 수도 없었을 것. 세상 모든 일이 시작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는 법이라 퇴로를 확보하는 게 삶의 지혜이겠지만 아직 미숙한 청소년이니 기대할 수 없겠지. 그리하여 사건이 터진다.


  무대는 앞에 말한 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대를 둘로 나누어 한편은 과거, 한편은 현재. 과거와 현재를 통과하는 곳에 교복 상의가 있어서 과거를 갈 때는 재킷을 입고, 현재로 올 때는 벗어 흰 티셔츠 차림이 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로이 다니는 인물 ‘잎이.’ 잎이는 주인공 이수의 페르소나로 생각하면 된다.

  희곡을 읽을 때 흥미를 돋우는 것은, 독자마다 다 자기만의 무대를 만들 수 있다는 점. 나도 마찬가지다. 실제 무대에서는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머리 속에서는 내 마음대로다. 1층과 2층으로 나눌 수도 있고, 해변과 바닷속으로 가를 수도 있고, 지구별과 트리팔마도어 행성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상해가며 작품을 읽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 분량이 현재보다 과하게 많은 거 아냐? 만약 진짜 무대에 올려 무대를 반으로 나누면 한쪽에 앉은 관객들은 목 좀 아프겠는 걸?

  그럴 수밖에. 많은 문제들이, 주로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더 그런 거 같은데, 과거 속에 숨겨져 있으니 현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옛 일을 추적하는 장면이 더 많겠지. 내가 만약 진짜 무대의 연출자라면 어떻게 처리할까? 조명 색깔을 바꾸어 형광등이면 현재, 백열등이면 과거, 뭐 이런 식도 괜찮을 거 같고, 극작가 지문대로 교복 재킷을 입으면 과거, 흰 티셔츠면 현재, 이것만 가지고도 좋을 거 같다. 그럼 과거와 현재 어느 경우라도 무대 전체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나만의 무대 꾸미기. 그럴 듯하지 않으셔? 그럴 듯하면, 당신도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나? 다만 오직 대학입학과 좋은 직장, 고수익 또는 고 연봉을 위한 스펙 쌓는 모습을, 그것도 젊디젊은 청소년들이 그러는 꼴을 보는 게,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안타깝고, 불쌍하고, 그 학생들의 어미 아비들이 역겹고 그랬다. 그냥 살라고 하면 안 되나? 내가 내 새끼들한테 이 자사고 학생들의 부모처럼 해주지 못해서 그런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레오폴트 페루츠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다가 서고트족 왕가에 의하여 무어족이 축출당할 때 한꺼번에 쫓겨난 유대인을 일컫는 세파르딤 유대인(리온 포이히트방거 작 <톨레도의 유대여인>, 살만 루슈디 작 <2년 8개월 28일 밤> 참조) 집안으로 18세기 초∙중엽부터 보헤미아 근방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성공한 섬유 사업가였다니까 부르주아 집안이라고 봐도 괜찮을 듯하다. 집에서는 보헤미아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했다니, 자신들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종교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는 유대인이 항용 그러했듯이.

  공부하고 담을 쌓은 페루츠는 부자 아빠 덕에 프라하에서 최고로 좋고 비싼 학교를 다녔으나 제국 및 왕립 독일 문법학교 등에서 장렬하게 퇴학을 당해 마투라, 프랑스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바칼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했다. 흠. 인간적이어서 좋군. 이후 가족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해, 아버지는 여전히 직물사업을 하면서 페루츠는 에르저조크 라이너 김나지움, 지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역시 졸업하는 데 실패해 몇 년간 아빠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젊은이가 놀 수는 없어 군대에 자원 입대했고, 일정 복무기간을 마치면 시험을 거쳐 예비역 장교가 될 수 있었는데 여기서도 또 떨어져 그냥 사병으로 의가사제대를 하고 만다.

  1906년에 비엔나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지만 앞에서 얘기한대로 입학자격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청강생 신분이었다. 음. 점점 더 인간적이군. 좋아, 좋아. 수학과 경제학을 이수하고 비엔나 공과대학으로 옮겨 확률, 통계, 보험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해, 계리사 자격증을 땄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보험회사에서의 계리 업무가 소설가로 이름을 내기 전 그의 공식 직업이었다. 이때 일한 곳이 트리에스테에 있는 게네랄리 그룹으로, 페루츠의 1년 후배, 카프카가 일했던 바로 그 회사이다. 페루츠는 보험수학을 통해 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던지 이후 괄목상대할 진척을 보여 역시 수학자이자 소설가인 로베르트 무질과 수학에 관한 심도 깊은 교통도 있었다. 음. 고목에 꽃도 피는군. 레오폴트 페루츠는 자기 소설을 발표하면서 대수방정식으로 유명한 레오 뭐시기의 이름을 가져와 레오폴트 대신 ‘레오’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판의 날의 거장>은 1923년 작품으로 그의 전성기 시절에 출간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어, 페루츠의 신간이 나왔다는 출판사 알림을 받자마자 곧바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읽었다. 역시 레오 페루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레오 페루츠는 아뿔싸, 히틀러가 집권하고,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버리자 팔레스타인으로 가버리면서 유럽, 당시 시각으로 보면 세계의 문화권에서 사라져버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지만 이미 명성은 사라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20세기 말부터 다시 레오 페루츠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21세기 들어 우리도 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게 된 것.


  <심판의 날의 거장>은 <스웨덴 기사>처럼 환상소설이다. 환상문학이라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1923년식. 그러니까 역자 신동호의 해설 속 주장처럼 추리, 서스펜스, 공포, 범죄, 스릴러 적인 요소를 충분히 담고 있는 고전적 의미에서 환상소설이다. 한편 오히려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행했던 붐 문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붐문학보다 추리와 공포, 스릴러 측면이 강해 격조 있는 대중문학으로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을 환상문학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제목 “심판의 날의 거장”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과정, 그를 심판의 날의 거장이 되게 만든 아주 오래된 일에서 시작한다. 피에로 디 코시모의 제자로 1520년경 피렌체의 유명한 거장. 화가. 조반시모네 키기. 이 사람은 성모 칠고(7苦) 세라핌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다른 그림은 그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오로지 ‘심판의 날’만 그린 인물이다. 추리와 스릴러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작품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쉬운데, 그러나 이야기는 1909년 가을, 9월 26일부터 시작한다.

  작품의 화자 ‘나’이자 주인공인 고트프리트 아달베르트 폰 요슈 운트 클레텐펠트 남작, 간단히 요슈 남작은 이날 왕립극장의 대배우 오이겐 비쇼프 저택의 피아노삼중주 연주회 멤버로, 비록 비쇼프의 처남 펠릭스의 대타이기는 하지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주인공이면 80퍼센트는 감수성 예민하거나 착한 사람이고, 20퍼센트는 천하의 악당이다. 그러면 ‘나’ 요슈 남작은 어떨까? 러일전쟁에 출전한 러시아 장교 출신의 엔지니어, 막강한 추리력을 가진 발데마르 졸그루프가 급하게 귀족 클럽에 가서 요슈 남작의 인물됨을 알아본 결과, 문예애호가도, 유미주의자도 아니고, 사람들이 이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존경심과 증오가 뒤얽힌 독특한 어조로 말하며, 몇몇 스캔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단적으로 ‘훌륭한 악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1인칭 소설에서 주인공 ‘나’가 하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요슈 남작은 전에 ‘디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연애를 했다. 아주 애틋하게. 결혼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는 어리석은 맹세 정도는 한 상태였고, 딱 이때 요슈 남작에게 왕국은 약 1년에 걸쳐 해외에서 해야 할 업무를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가 1년을 소모한 요슈 남작. 몰랐을 거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여인은 갑자기 텅 빈 상태, 몰아닥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하여 다른 남자를 만났고 급속도로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결혼까지 해버렸던 것을. 다 그런 거다. 디나는 무죄다. 남자 군대 간 사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자는 전부 무죄다. 그러나 요슈 남작은 아직도 디나를 사랑한다. 깊이 깊이. 그리하여 디나한테 3초 이상 눈길을 주는 모든 남자에게 참으로 애처로운 질투를 느끼고 있다. 이 디나가 9월 26일 오이겐 비쇼프 살롱에서 피아노 삼중주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저택의 주인이자 왕립극장의 히어로이지만 하필이면 전 재산을 맡긴 베르크슈타인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곧 동반 파산할 운명인 오이겐 비쇼프의 아내 디나 비쇼프이다. 베르크슈타인 은행의 파산은 오늘 아침 신문이 벌써 보도를 해버렸으니 이 집구석 분위기가 어떻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랄까, 오이겐은 아직 모르는 눈치다.

  훌륭한 악당 요슈 남작은 이날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의도하지 않은 실수 두 개를 저지른다. 둘 다 나이든 대배우 오이겐 비쇼프에 대해서 저질렀다. 두 번 다 말로 그랬다. 하나는 지나가듯이 오이겐에게 “불쌍한 자 같으니. 아껴서 모은 몇 푼을 잃었나보군.”이라 해서 디나를 기겁하게 했으며, 아직 은행 파산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당사자 비쇼프한테, 두 번째로 “오늘 신문을 읽었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처남 펠릭스가 열을 팍팍 받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주목.

  연주가 끝나고 이런저런 대화 끝에 오이겐 비쇼프가 한 젊은 해군 장교의 이야기 하나를 시작한다.

  이 장교는 독특한 자기 집안 일을 해결하고자 몇 달 휴가를 내고 귀가했다. 화가이자 아카데미 학생이며 탁월한 재능을 가진 남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형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빈에 있는 동생의 하숙에 가서 동생과 완전히 같은 동선을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난 후 어느 날 밤에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하고 11시에 저녁 식사로 차가운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녀한테 이야기를 했다. 15분 후에 식사 전에 블랙커피를 문 앞 테이블에 가져다 놓은 하녀가 얼마 후 다시 가보니 커피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여태 테이블 위에서 식어 있었다. 이때 방 안에서 극적인 비명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란 하녀는 급하게 내려가 주인을 불러 문을 부수고 들어갔고, 젊은 장교는 30초 전에 창문에서 뛰어내려 역시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책상에는 아직 불붙은 담배만 타고 있었으며, 유서 같이 남긴 글 한 장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한 단어, 연필 심이 부러질 정도로 힘들게 휘갈긴 “끔찍해”만 흐트러져 있고.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집주인 오이겐 비쇼프와 그의 아내 디나 비쇼프, 처남 펠릭스, 첼로를 연주한 의사, 훗날 자기가 연구한 세균에 감염되어 죽을 운명인 병리학자 고르스키 박사, 러시아 장교 출신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 그리고 화자 ‘나’ 요슈 남작은, 얼마 후 공연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왕>의 타이틀 롤을 연기할 오이겐에게 장면을 한 번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엔 고사하던 오이겐은 고르스키 박사가 셰익스피어 대사를 줄줄 읊으니까 은근히 시샘을 했든지 그렇게 하겠다고,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배역을 연구하고 대사를 외우는 금단의 장소인 별채로 가서, 의상을 갈아 입을 줄 알았더니, 에그머니, 조금 후 두 발의 총성이 들렸고, 한 발은 벽에 박혔으며, 다른 한 발은 오이겐 비쇼프의 관자놀이를 관통해버렸다. 오이겐 비쇼프마저 유서도 없이, 유언 한 마디 없이 그냥 자살해버린 것.

  디나와 펠릭스는 단박에 요슈 남작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며 증거로 요슈 남작만 쓰는 영국제 담배 파이프를 내미는데, 요슈 남작은 절대로 그것을 오이겐에게 주지 않았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우리의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 그가 과연 이 의문의 죽음을 해결할까? 재미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라. 진짜 재미난 부분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고, 심지어 소개하지도 않았다. 소개했나? 해놓고 모른 척인가?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 2025-01-1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궁금하긴 합니다. ㅎㅎ

Falstaff 2025-01-13 18:40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읽어보시면 좋겠군요. ㅎㅎ
 
생사의 장 세계문학의 숲 11
샤오홍 지음, 이현정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

  <생사의 장>은 2018년 여름에 샤오홍의 새까만 후배 극작가 티엔친신(田沁鑫)의 희곡<생사장生死場>으로 읽었다. “낳고 살고 죽는 마당.” 재미도 있어서 읽자마자 곧바로 도서관 검색해 관심도서 등록하고, 그땐 퇴직 전이라 그러고 말았다가, 이제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 세월이 닥쳐 정말 읽어보려고 하니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건만 책이 낡아서 차일피일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단편집 《가족이 아닌 사람》을 읽어봤지만 흥미유발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이 책 읽기를 오래 머뭇거리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오늘 진짜로 읽기를 끝낸 순간 드는 마음은, 진작 읽어볼 것을.


  책을 열면 서문이 나온다. 이렇게 시작한다.

  “4년 전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월에 나와 처, 아이는 상하이 자베이(閘北)의 전화 속에서 피난으로 혹은 죽음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화자 ‘나’도 상하이의 영국인 조계지로 피난을 가 비교적 안전하게 중국-일본 전투 시기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썼는데, 이게 “서문”이란 챕터로 중편소설 <생사의 장>을 시작하는 걸로 오해해 본격 감상 무드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소설의 원고가 내 책상에 도착한 것은 올 봄이었다.”

  흠. 좋아. 화자는 남자 가장으로 소설가가 직업인 사람이고, 누가 원고를 주어 소개한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로군. 이렇게 읽어갔는데, 아뿔싸, 이건 말 그대로 서문, 샤오홍의 본문이 나오기 전 앞에 붙인 서문introduction이었던 거다. 좋다. 계속 읽었다. 드디어 서문이 끝나고 이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헉, 루쉰이다. 1935년 11월에 써주었단다. 샤오홍이 1934년에 탈고하고 35년에 루쉰이 도와주어 출간할 수 있었던 작품으로, 샤오홍의 대표작품이 되었다고. 저 내몽고 지역인 하얼빈 근동 지주집에서 낳았지만 여자아이라는 것 때문에 대강 키워 싸가지 없는 청년한테 시집보내 인생 망가뜨리고, 일본에 유학해 거기서 공부한 공산주의에 경도된 상태로 돌아와 글을 쓰는 한편 나름대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작가.

  대표작인 <생사의 장>은 샤오홍(蕭紅)의 고향인 중국 동북지방에 크지 않은 강이 인접한 농촌마을을 무대로 작은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다루고 있다. 작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덩치가 작은 종족을 말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중국에서도 동북 사람들 덩치가 제일 크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가진 거 없는 서민, 소작인, 약자를 일컫는다.

  대강 둘러봐도 집 앞에 백양나무가 있는 꾀죄죄한 집에 사는 절름발이 농부 얼리반과 머리 속에 볼트 너트가 한 개 정도 빠져서 도대체 원한 같은 걸 품지 못하고 생각이 우왕좌왕하며 돼지소리 같은 목소리를 지닌 곰보댁 부부. 이들 사이에 나서 전봇대 보고 고무래정丁자도 모르는 아들 오다리 가족. 소 기르고 농사 짓는데 만족하지 못해 시내 나가서 발전적인 일을 해 볼 요량으로 아들과 함께 작은 닭장을 일컫는 ‘어리’ 장사를 시작했다가 나중엔 재고만 쌓는 자오싼. 자오싼의 아내이기는 하지만 전남편이 하도 두드려 패는 바람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가출을 해 다른 남자하고 살다가 살기가 하도 팍팍해 이번엔 자기 몸만 빠져나와 3혼 중인 아내 왕씨 아줌마. 자오 집안의 아들 핑얼은 진짜 아들이 아니고 이른바 개구멍받이 같아 보이는 사생아라서 어린 말과 늙은 어미 말 사이의 교류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주댁 둘째 아들 나리가 소작료를 올려 받으려 하자, 자오싼은 동네에서 (좋은 쪽으로) 왈짜라고 볼 수 있는 리칭산을 비롯, 젊은 축 몇몇과 함께 낫을 시퍼렇게 갈아 지주댁을 습격하려는 모의를 하기도 한다. 이를 알게 된 왕씨 아줌마는 세번째 남편한테 어디서 구했는지 구식이긴 하지만 소총 한 자루를 내주기도 하는데, 이거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 개 발의 편자. 자잘한 좀도둑이 들자 배나무 몽둥이로 종아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좀도둑의 다리가 몽당, 하고 부러져 버렸다. 이 바람에 시내 유치장에 들어간 것을 지주댁 둘째, 웬수 같은 둘째 도련님이 힘을 써 풀어내고, 집에 있는 황소를 팔아 반은 합의금으로 쓰고, 반은 둘째 도련님이 활동비로 쓴 걸 갚아줬다. 풀려나오자 마자 자오싼 선생의 몸과 눈에서 독기도 함께 스르르 풀어져 늙어 죽을 때까지 젊은 시절 낫과 총을 들었다 놓은 추억만 곱씹으며 사는 인생으로 변한다. 뭐 그렇게 사는 거지 세상 사람들 전부 혁명가일 수 있나?

  엄마하고 둘이만 사는 진즈는 조막만한 자기네 밭에 토마토를 키우는 처녀(였던 젊은 여성). 동네에 청예라는 멋진 이름의 청년이 있었는데 삼촌인 푸파와 함께 살았다. 푸파 삼촌이 젊은 시절에 물고기 잡는 일을 했다가 마침 눈에 쏙 들어오는 아가씨가 있어서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아가씨 손목을 잡아 끌어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만리장성을 쌓았고, 이게 처음 벽돌 한 장 올려놓는 일이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일도 아니어서 몇 번 또 얼렀더니 중국인의 위대한 번식력은 숨길 수 없었던지 그만 아가씨 배가 볼록 튀어나오기 시작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숙모는 집에서 엄마한테 실컷 두드려 맞은 다음에 급하게 매파를 넣어 푸파한테 시집을 온 것. 그땐 푸파 청년이 늘 살가울지 알았겠지.

  청예의 숙모가 청예에게 말한다. 내 짐작에 그 처녀가 아이를 뱄을 거 같은데? 처녀한테 장가들려면 시간이 없어. 서둘러. 시집을 오면 그 처녀도 변할 거야. 안색도 어두워지고 너도 그애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될 거야. 때리고 욕하게 될 걸!

  아니나다를까, 청예는 진즈가 시집온지 넉 달 만에 낳은 딸 작은 진즈가 하루종일 빽빽거리며 울기만 한다고 집어 던져 모진 세상 그만 살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서방새끼를 견디지 못한 진즈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 하지만 누가 먹여살려? 진즈는 하얼빈으로 나가 삯바느질을 하다가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인 몸을 팔기도 하며 1위안을 마련해 얼른 돌아오지만, 돈을 본 엄마는 하루가 지나자 다시 서둘러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돈을 더 벌어오라고 한다. 인생이 다 그렇다. 우라질.


  20세기 초반의 중국 동북지역하면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폐 페스트의 창궐.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주 괴뢰국의 탄생. 폐 페스트가 먼저다. 이쪽 동네에 샤오홍의 새까만 후배 작가가 있어서 내가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츠쯔젠. 이이가 쓴 장편소설 <백설 까마귀>가 폐 페스트의 창궐과 이에 대항해 싸우는 하얼빈 시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이얼구나 강의 오른쪽> 뒷부분에 대 일본 전쟁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눈이 더 번쩍 띄었을 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 그랬을 걸?

  샤오홍의 이 촌동네에서도 폐 페스트가 창궐해 하얼빈에서 무릎까지 오는 긴 흰 옷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쓴 외국 사람이 동네에 일차 왕림을 해 사람들에게 주사 치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벌써 병에 걸려 강력한 항생제를 주사해도 겨우 살똥말똥한 아이들한테 결코 주사를 맞추려 하지 않는 주민들. 엉겁결에 붙들려 주사를 맞고 역병을 피해 어떻게 이렇게 재수없을 수 있을까 한숨을 쉬지만 결국 그래서 역병을 피한 사람들 이야기. 하여간 이 동네에서도 숱한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래서 지주가 소작인들한테 허용한 소작인들을 위한 땅, 공동묘지에 사이좋게 묻힌다. 비록 들개가 어슬렁거리면서 시신을 파내 오도독뽀도독 뼈 채 갉아 먹어버리기는 하지만서도.

  이런 와중에 봄이 오면 개구리, 두꺼비, 남생이 같은 양서류, 포유류부터 시작해 돼지, 암소, 개, 고양이 그리고 사람까지 줄줄이 새끼를 낳기 시작한다. 역병이 들어 죽어 묻히는 동시에 악을, 악을 쓰며 낳아 놓으면 또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영아사망율로 눈물바람을 하고. 그래서 낳고, 살고, 죽는 마당, 제목이 생사의 장이 되는 것이겠지.

  여기서 끝나면 말도 안 한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는 무력단체가 비 온 다음 날 죽순 돋듯 생기는데, 이게 진짜 저항군인지, 비적단인지, 저항군이면 혁명군인지, 민국군인지 우매한 백성들은 구별도 못하고 그냥 들어가 버리고, 하여간 누군가와 싸우다 죽어버리고, 그렇게 죽은 청년들의 어머니는 너 없는 세상, 내가 살아서 뭐하리, 진득하고 쓰디쓴 독을 먹고 명을 재촉한다.

  하여간 눈물이 앞을 가리는 참상. 그땐 다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샤오홍도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생사의 장이라 한 거겠지. 이이는 천생 단편작가이다. 이 중편 정도의 소설 <생사의 장>도 단편 분량의 에피소드가 연속적으로 펼쳐져 읽기에 수월하고 절대분량도 많지 않다. 하루 뚝, 하면 책 다 읽고 독후감도 쓰고 쐬주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독후감 다 썼으니 나도 이제 나가서 돼지 가브리살에 쐬주 한잔 해야지.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5-01-10 0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레오 페루츠, <심판의 날의 거장>
화요일. 백승연, <함수의 값: 잎이와 EP 사이>
목요일. 힐러리 맨틀, <시체들을 끌어내라>
금요일.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표범>
 
내 삶의 예쁜 종아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575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2년 열 달 만에 다시 황인숙을 읽었다. 사실 이 황인숙이 혹시 그 황인숙인가 싶었지만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서가에서 뽑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뿔싸, 처음엔 잘 나가다가 중간부터, 아오, 다시 유기 들고양이 밥 주는 괭이 엄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괭이 밥 주지 말라는 동네 늙은 남자, 난닝구만 입은 영감탱이한테 이 루저, 루저, 루저, 루저야! 이런 욕밖에 할 줄 모르는 대졸 루저 시인. 자치 시에서도 유기동물한테 밥 주지 말라잖아. 그럼 주지 말아야지 뭘 잘났다고 없는 살림에 비싼 고양이 사료 사다가 평균 생존기간이 3년에 불과한 ‘야생’ 영역동물을 먹여 살리느냐고. 58년 개띠 아줌마니까 지금 예순여섯? 신춘문예 당선 시의 제목부터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였으니 시인의 고양이 사랑이야 인정하겠지만 집에서 애완으로 키우며 집사노릇 하는 거야 뭐라 하지도 않고 오히려 권장할 만하겠지만 신경 예민한 사람한테는 발정나서 새벽부터 울부짖는 야생고양이 소리에 새벽잠 설치는 인간들도 많을 터, 밥 주는 종족과 새벽잠 없는 늙은이들의 갈등은 고양이 밥 주는 순간부터 이미 담보되었던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줄창 시만 읽으면 되긴 되는데, 시를 읽을 때도 그놈의 고양이 타령을 연속으로 읽게 되니 그것도 맛이 안 나긴 한다.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이 양반의 시를 읽지 않는 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는 또 고양이 안 나오는 작품 가운데 괜찮은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 이 시집에서도 표제로 쓴 시를 한 번 읽어보자.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지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전문 p.5)



  시인은 여전히 남산 남동쪽 후암동 근방 언덕배기에 사는 모양이다. 그래 집에 가려면 오르막길을 허청허청 걸어야 하니 이게 나이 들어가면서 쉽지 않다. 이왕 오르니 위안을 해본다. 매일 이 길을 오르면 배도 들어가고, 걷는 게 무릎관절에 좋다고 하고, 발목도 가늘어지고 종아리도 통통해지겠지, 그럼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위안. 2연으로 옮겨 읽으면, 많고 많은 오르막 중에서 지름길을 꼭 오르막이다. ‘지름길’이 갖는 중의성. 더 힘들어야 몸을 쉴 수 있는 집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이름하여? 중딩 때 배우셨지? 유클리드 물리학의 운동량 보존의 법칙. 더 고생해야 더 빨리 도착한다. 근데 뭐가? 당연히 너와 나의 삶이. 그래서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 마지막 행 “마치 내 삶처럼”은 차라리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마치 내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한 마디 하고 싶어진다. 이런 기분이 아마추어의 큰 병이다. 그로 인해 간혹 화가 되기도 하는 병.

  일찍이 지난 번에 읽은 시집 《자명한 산책》에서 황인숙이 단호하게 휘두른 날선 칼이 떠오른다.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겻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자명한 산책, <강> 부분)



  하긴 뭐 두 시집 사이에 19년 세월이 있으니 어찌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황인숙이 예순네 살에 낸 이번 시집에는 나이든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자신의 주위의 사람들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이중에 재미있는 시도 있다. 친구도 아니고, 친구의 아내도 아니다. 친구하고 이혼해 다른 남자와 사는 친구의 전처를 생각하는 시인.



  친구의 엑스와이프



  친구의 엑스와이프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무척이나

  나한테나 잘해!

  친구는 입을 비죽거리겠지만

  너는 아무 때나 흔해터지게 볼 수 있고,

  네 엑스와이프는 이제

  만나기 힘들어졌지

  너 때문에!

  헤헤, 특유의 애교스러운 웃음소리 귀에 선한데

  잘 웃는데 어딘지 슬퍼 보인 얼굴 눈에 선한데

  친구 앞에선 이름도 꺼낼 수 없다

  나를 엑스친구 만들까봐서


  친구가 사랑했던 친구의 엑스와이프

  다른 사람 아내 된 지 좀 된

  친구의 엑스와이프   (전문 p.14)



  시를 다 읽은 순간 시 감상도 바로 끝나서 깔끔하긴 한데, 좀 그렇다.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가게 앞 파라솔에 맥주나 무알코올 음료를 올려놓고 그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놓은 듯하다. 생활시가 대개 이러하다. 생활시로 독자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는 함민복처럼 금호동 언덕배기에 오랜만에 올라와 오수를 빨아들이는 똥차, 그 옆을 지나가는 막 목욕탕에서 나온 처녀같이 절묘한 비유가 없이는 대개 그렇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생활시 <오늘 할 일>도 마찬가지다.



  바람, 파람, 휘파람

  변기 뚜껑 내리고 걸터앉아 멍때리다가

  문득 휘파람 불어본다

  내친김에 곡조를 붙여볼까

  잘 될까 몰라

  심호흡한 뒤 입술에 힘주고

  나오느니 웬

  봄처녀 제 오시네

  머리카락 엉켜서 바짝 마른

  욕실 바닥 내려다보며

  새 풀옷을 입으셨네

  휘와 바람이 따로 놀고

  숨 가쁘다

  휘파람, 파람, 바람

  청소부터 하자   (전문 p.15)



  좀 약하지? 애초에 화장실에 볼 일 보러 온 거 아니라 봄맞이 대청소라도 시작했을 지 모르겠다. 그래 처음부터 변기 뚜껑을 내리고 걸터앉았지. 근데 힘도 좀 딸리고 그래서 하기가 싫은 거다. 요샌 생각도 잘 되지 않아 어떻게 앉은 김에 멍때렸다. 며칠 전에 읽은 볼라뇨의 <부적>에 나오는 주인공 우루과이 시인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번쩍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래 휘파람도 불어보고, 곡조를 넣어 시인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노래 가운데 <봄처녀>를 선택했지만 그것도 노래라고 숨이 딸리는 거다. 시새푸새해져 바닥을 내려다보니 당신의 화장실하고 거의 틀림없이 바짝 마른 머리카락이 새 풀옷을 입을 것처럼 엉겨있다. 뭐 많이야 엉겨 있겠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나서야 에잇 청소부터 하자, 하고 마음 먹는 그림. 사소하고 사소한.

  이제 육십이 넘어 새로 취직할 수 있는 가망은 푸시시 날아가버렸을 시인. 자칭 백수는 백수인데, 심한 백수라서 제목을 <빈사의 백수>로 달았다. “빈사의 백조”는 1905년 미하일 포긴이 만든 짧은 독무. 이 작품의 제목만 가져왔다. 근데 분위기는 시원하다.



  남산 위에 저 서울타워

  파르라니 빛나고나

  바람 많이 불어서

  산꼭대기 공기 맑을 테다


  아, 왜 이렇게 답답하지

  맑고 푸른 저 빛의 빨대를

  확 휘어 당겨

  빨아 들이켜고 싶고나


  오늘 밤 훠이훠이

  산에 올라가볼까

  그런다고 내 속이

  뻥 뜷릴까    (전문 p.16)



  광경은 시원하건만 시인, 백수의 가슴 속은 꽉 막혔다. 그래서 공기 맑을 것이 틀림없는 산 위에나 올라볼까, 생각하는 시인 또는 백수. 여기서도 아마추어 독자는 또 마지막 두 행에 시비를 건다. 꼭 “그런다고 내 속이 뻥 뚤릴까” 즉 “그래도 내 속은 꽉 막혀 있기만 하다.”라고 말하는 거 같다. 


  이 고양이 엄마는 고양이들이 욕을 얻어먹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검정 비닐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고양이가 싸질러놓은 분변을 치우기도 한다. 나나 당신한테 드럽지 고양이 엄마들은 조금도 더럽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한밤에 동네 한바퀴 돌면 검정 비닐봉투에 가득 차고, 그걸 버리는 것도 일인데, 날마다 종량제 봉투에 담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버리기도 뭣하다. 시인을 자세히 보면 야밤에 CCTV도 켜놓고, 지금 작동중이라는 엄포성 프라스틱 경고문도 있지만 여전히 불법으로 쓰레기가 투척되어 있는 모습과 주민들의 이런 행위를 옹호하는 것 같다. 저 뒤에 가면 자기도 여기다 고양이 똥을 슬그머니 투척하고는 했으니까 당연하겠지. 잘 한다. 잘 하는 짓이다.



  그 동네 어느 심야



  고양이만 지나가도 저러더니

  택시만 지나가도 저러더니

  눈이 와도 저러는구나

  한국어로 영어로

  CCTV 작동 중이라고

  너는 가비지라고

  페널티라고

  종량제 봉투 하나 없이

  검정 봉투 노랑 봉투 찢어진 봉투

  수북수북 쌓인 제 발치 째려보면서

  전봇대 여인 낭랑한 목소리로 따박따박

  아랑곳없이 눈은 투척되고

  성능도 좋아, 여인을 지치지 않고 경고하고


  하늘이 터진 듯 눈 쏟아져 내렸다

  언젠가 눈은 그치겠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그치지 않지

  주민 승!   (전문 p.31)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수 2025-01-09 0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신 거 맞아요? 엑스시인 될까봐서를 부제로 ㅋㅋ 저도 읽은 시집들인데 생활시가 그랬었나 기억이 안나요. 저에게는 어땠나 들춰보려고요. 역시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아

Falstaff 2025-01-09 06:44   좋아요 1 | URL
예.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 같아서요.
괭이 시만 아니면 이이의 시가 좋은데, 아휴, 어쨌든 자기 좋은 시만 쓰면 그게 장땡이지요 뭐.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레이스 페일리(1922~2007)는 우크라이나 출신 사회주의자 유대인 이민 부부 굿사이드 집안의 늦둥이 막내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언어가 좀 복잡하다. 우크라이나지만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그쪽 유대인이라 당연히 이디시어도 썼으며, 사는 곳이 미국이니 영어는 저절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언어사용만 복잡한 게 아니라서, 이이의 커리어를 보면, 먼저 시인으로 시집을 출간했고, 이어서 평생 세 권의 단편집만 낸 단편소설 전문 작가이며,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지냈으니 교육자이기도 하고, 1950년대에는 반핵운동, 이후에 반베트남전, 반이라크전 등 조금 진하게 반전운동에 참여했다가 며칠이기는 하지만 철창에 갇혀 나랏밥 먹은 전력도 있다. 당연히 페미니스트로 스스로 임신중단을 경험했으며 임신중단권을 계속 주장했다. 원래 이름은 그레이스 굿사이드. 열아홉 살 때 영화 카메라맨 제스 페일리와 결혼해 노라와 대니를 낳았으나 이혼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는지 이후 굿사이드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페일리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84세에 유방암 치료를 받았지만 죽었다. 그 나이에 뭐하러 고생스럽게 치료를 받았는지.

  평생 세 권의 단편집과 몇 권의 시집만 내고도 미국예술문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단편소설을 위한 펜-멜러머드 상 등 숱하게 많은 상을 받았으니, 이만하면 작가/시인으로 한 평생 원 없이 살다 갔다고 봐도 좋겠다. 이 책의 서문 격으로 2007년에 일본에서 출간한 같은 제목의 단편집을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개글 “그레이스 페일리의 중독적인 ‘씹는 맛’”으로 시작한다. 무라카미가 뉴욕에서 열린 페일리의 낭독회에 직접 참석해서 페일리를 만난 소감 등을 쓴 것인데, 원래 미국 단편소설을 지극하게 애정하는 무라카미답게 거의 열광적으로 페일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의 영향으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극히 의식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우익 편에서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가담해왔다. 또한 두 아들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강인한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최근에는 페미니즘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p.6)

  이렇게 주장했다.

  와, 무라카미가 정말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 맞아? 유대인 정체성을 의식한 건 맞는데, 나머지는 다 틀렸다. 어떤 우익이 반핵, 반전 시위를 하고 낙태권 합법화를 주장하나? 페일리는 부모부터 사회주의자였으며, FBI는 이이를 공산주의자로 판단해 무려 30년 동안 그레이스 페일리 파일을 보관했다. 모르지, 2007년 앞뒤로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자를 우익이라고 불렀는지도. 두 아들? 49년생 노라가 대니의 누나니까 남매. 왜 유난을 떠느냐 하면, 서문에서 먼저 무라카미가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다 믿고 책을 읽었더니 읽으면서 “우익 운동가”가 이런 의견을 낼 수 있으니 미국이 참 다양한 나라이기는 한 모양이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은 게 웃겨서 그렇다. 무라카미 상, 나오기만 하면 영락없이 나를 웃겨줘. 고맙습니다.


  본문만 269쪽에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무라카미는 앞에서 인용한 서문 격의 잡문을 통해 “열성적인 독자는 그것을 소중하게 숙독하고 맛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노력하는데, 질 좋은 오징어를 씹듯이 몇 번이고 곰곰이 맛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p.8~9) 라고 주장한다. 2007년에 번역했으니 원작이 미국에서 출판되고 30년이 넘은 시점에 읽어도 여전히 그렇다는 말이다. “질 좋은 오징어 맛”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데, 나도 “씹는 맛”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질 좋은 오징어 맛”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일본산 오징어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래봤자 고릿고릿한 냄새의 오징어 조직이 이 사이에 틀림없이 박혀 있을 터. 내가 말하는 “씹는 맛”은 말 그대로 “씹는” 재미. “씹다.” 영어로 chewing. 이게 내 의견이다.

  첫번째 작품 <소망>에서 화자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다가 전남편을 만난다. 27년동안 같이 살다가 헤어진,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은 말을 하는 버릇이 있는 남자. 말들이 막힌 관을 뚫는 배관공의 와이어처럼 정말 좁다랗게 생겨서 귓속을 파고 들어 목을 타고 거의 심장 부근까지 와 닿곤 했던 쪼잔한 남자. ‘나’는 이디스 워튼이 쓴 두 권의 책 <환희의 집>과 <아이들>을 빌렸다. 50년 전에 뉴욕에서 살던 사람이 27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책. 그레이스 페일리는 카메라맨 제스 페일리와 25년을 살고 5년 별거한 후, 30년만에 이혼했다. 화자는, 그리고 작가 자신도 역시 지금 남편이든 전남편이든 한 남자하고만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도 않았고, 한 평생이란 것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으며, 그래서 그랬나? 한 남자의 됨됨이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페일리는 몰랐겠지. 전남편도 함께 사는 동안 한 여자의 됨됨이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는 걸. 그래, 그래. 결혼생활이란 건 평생을 살아도 서로 됨됨이를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냥 부비면서, 그러다가 나중엔 기대면서 사는 거야. 아니면 그냥 부비다가 끝나버리거나.

  이러다가 딱 결론에 다다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이날, 오늘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걸 발견한 후, 누가 나를 평가하려 할 때 자신은 플라타너스 나무와 달리 뭔가 절절하게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방금 빌린 책 두 권을 반납하기로 결정한다.

  원래는 <환락의 집>이 별로 재미가 없었음에도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려 했던 것이지만 그냥 때려치우고 말았다는 것. 즉, 지금까지의 것들을 그냥 씹어버린 거다. 내가 말하는 씹는 맛이란 이런 것. 무라카미는 이것을 질 좋은 오징어 맛이라 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표제작인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이었다. 주인공은 알렉산드라. 병원에 입원해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종종 들르는 작가 여사님. 아마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정도? 이이에게 애인이 생긴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가느라 탄 택시의 운전수, 데니스. 데니스는 그룹에서 보컬로 활약하기도 하고, 몇 사람이 뭉쳐 몇 명의 아이들을 공동으로 키우기도 하는 좀 별난 자유주의자이고 가끔가다가 입이 험해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진짜 작가의 아버지 아이작 굿사이드 선생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먹고 살기에도 팍팍한 와중에 의과대학을 마쳐 의사로, 배고픈 이민자에서 한 방에 미국 중산층으로 점프한 이력을 지녔다. 젊었을 때 숱한 문학작품을 읽어 그쪽으로도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때? 작가 직업의 알렉산드라 입장에서 거 참 골치 좀 아프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알렉산드라에게 딸이 지은 또는 생각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딸이 이야기를 하니, 곰곰이 듣고 있다가 자기 주장을 죽 펼치면서 이야기를 자기 말대로 고쳐보란다. 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원을 모른 척하기도 그래서 그렇게 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아이고, 저걸 어쩌나, 아무리 마흔이 넘었다고 해도 긴 장화 안 신고 (침대 위의)만리장성을 넘어가면 생기는 현상 있지? 글쎄, 있을 게 없는 거야. 그렇다고 데니스 손잡고 시청 호적계로 쪼르르 달려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 이제 정말로 아버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건데 알렉산드라는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안 알려드리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혹시 그냥 씹고 넘어가지 않을까? 혹시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벌써 반백 년 전에 쓴 단편을 모은 책이다. 무라카미가 일본어로 번역한 지도 20년 가까이 흘렀다. 여전히 이 단편들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이 번쩍 뜨이기를 바라는 건 조금 무리인 듯. 가끔 이런 작가들이 있는데, 실제보다 조금 과대 포장되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