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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장석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8
월키 콜린즈 지음, 강봉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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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읽지만 그리 좋아하지 않는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을, 어라, 이것 봐라, 무척 재미있게 읽고나서, 앞 뒤 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윌키 콜린스의 또다른 대표작 <월장석>을 샀었다. 윌키 콜린스의 간략한 바이오그래피는 <흰 옷을…>에서 짧게 이야기한 바 있다. 그때 <흰 옷을…>과 <월장석>으로 제법 재산을 불리자 곧 아편 중독에 빠졌다는 말을 했던 바, <월장석>을 읽어보니 콜린스의 아편 복용은 토머스 드 퀸시가 쓴 <어떤 영국 아편쟁이의 고백>을 읽고 그걸 모방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으며, 아편 복용에 따른 일시적 망각 증세를 <월장석>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는 말을 덧붙이겠다. 그러나 독후감에선 어느 장면에 누가, 어떤 방식으로 아편을 복용했는지는 독자의 재미를 위해,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
정말로 월장석이란 보석이 있다. 루비나 다이아몬드처럼 비싼 돌멩이는 아니지만 진주와 더불어 6월의 탄생석으로 고귀와 순결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 속의 ‘월장석’은 보석 분류상 월장석, 문스톤Moon stone이 아니라, 황색을 띄는 불순물이 섞인 탄소 덩어리, 즉, 19세기 중반에 런던의 보석상들이 약 4만 파운드의 가치를 책정한 바 있는 인도산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4만 파운드. 감이 안 잡히시지? 난 친절한 남자니까 현재가치로 계산해드리겠다. 연 4퍼센트의 이자율로 가정한다. 당시가 1849년이니까, 계산식은 이렇다.
40,000파운드 * {(1 + 4%)^(2022년-1849년)} * 1,604원/파운드 = 567억 6천만원.
어떠셔? 경끼 나지? 요즘 로또 1등 당첨되면 상금이 많아야 20억. 세금 33퍼센트 제하면 13억 4천만원. 메피스토펠레스한테 영혼을 판 대가로 300일, 꼬박 42주 동안 연속해 1등을 먹어야 이 돈을 한 번 구경이라도 할 수 있다. 나는 절대, 567억 6천만월 말고 5,676억원을 준다고 해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인간에 따라 완전범죄만 보장된다면, 심지어 완전범죄가 아니어서 평생을 체포의 두려움과 죄의식 속에 살아야 하더라도 살인마저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유혹적인 돈이다. 작품 속에서도 당연히 이 다이아몬드를 손에 얻기 위해 살인은 등장한다. 돌멩이 하나 팔면 강남의 아파트를 약 서른 채, 또는 좋은 상가 건물 한 동을 구입해 누군가의 꿈처럼 “강남 건물주”, 즉 “현대판 봉건 지주”로 군림할 수 있다. 그 인간이 누구냐고? 에이, 아시면서 왜 그려?
어느새 이야기는 사천시 삼천포항으로 빠지고 말았다. 반성한다.
작품 속의 월장석, 황색 다이아몬드에 관해 더 알아보자. 약 2억이던가 3억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많고 많은 신 가운데 “네 개의 손을 가진 신” 역시 하나 둘이 아니라서 어떤 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678쪽에 따르면 “달의 신” 역할도 한다니까 죽음의 신 ‘칼리’일 것 같은 신상의 이마에 박혀 있던 보석이었다. 밤에 보면 달이 차오르고 기울어짐에 따라 광택도 변한다는 전설이 있어서 이를 ‘달의 보석’ 즉 Moon stone이라 했고, 이걸 일본 사람들이 소설책 제목을 만들면서 같은 이름의 보석이 있음에도 그냥 ‘월장석月長石’이라 해버렸다. 어쨌든 작가 윌키 콜린스는 이 월장석에 대하여 “달의 영향을 받는다지만 보석으로는 품격이 떨어지는 반투명한 돌”(p.12)이라 했으니 이는 가공하지 않은 원석 상태라는 뜻이렸다.
저 멀고 먼 11세기. 마호멧 교도의 정복자 기즈니의 마무드가 인도를 침공한다. 회교도들은 힌두사원을 습격하고 거의 모든 유산을 약탈하거나 파괴해버리는데 이 와중에 ‘달의 신상’만 남아 성스러운 도시 베나레즈로 옮겨 새 사원을 짓고 그곳에 모신다. 이때 세 바라몬 교도의 꿈에 수호신인 편조천遍照天이 나타나 월신의 이마에 박힌 다이아몬드에 영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상의 이마빡에 붙은 월장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세 명의 승려에 의해 밤낮없이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보물이며, 만일 성스러운 돌에 손을 대는 자가 있으면, 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자는 물론 보석을 물려받는 일족 모두에게 기필코 재앙이 쏟아지리라고 주술을 건다. 이미 아시지? 소설작법 8장 1절. 소설 속의 불운한 예언은 언제나 틀림없이 들어맞는다는 거.
동양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윌키 콜린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18세기에 몽골제국의 황제를 지낸 오랑제브가 다시 인도를 침탈해 ‘네 개의 손을 가진 여신’의 사원을 파괴하고 한 병사가 월장석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월신을 수호했던 세 명의 승려는 변장을 하고 보석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몇 십년이 흐른 후 신을 모독한 병사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월장석은 이때 이후 현재(19세기)의 인도 영토 안에 있던 회교도의 손을 전전하기에 이른다. 세 수호 승려 혹은 수호 승려의 승계자들은 수호신 편조천의 뜻에 따라 온갖 변천을 겪으면서 월장석을 계속 감시하며 기회를 노렸음은 물론이다. 18세기 말 인도 영토 내 이슬람국가의 왕 치포 임금이 황색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게 되고, 임금은 보석을 단검 자루에 새겨 넣어 귀중한 보물들과 함께 병기고 속에 비밀리 간직하기에 이른다.
시간은 흘러 1799년 5월 4일, 영국령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장군 베어드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셀링거패텀 궁전 습격을 결정한다. 왜 습격하는지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다. 식민지는 원래 그런 거다. 원주민한테는 숨만 이어갈 정도로 먹고 살게 해주고, 식민국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약탈해 빼앗아 가는 것.
이때 존 핸커슬이라는 장교가 있었다. 귀족 부르주아 계급이니 당연히 장교였으며 언제 제대를 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중령 계급을 달았을 때 일사병에 걸려 귀국, 대령으로 제대한 인물이다. 이 존 핸커슬이 많고 많은 영국인 병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월장석에 관한 전설을 믿고 있었다. 본래 남이 안 믿는 것을 구태여 믿기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인간으로 셀링거패텀 궁전을 침공할 때 누구보다 용감하고, 누구보다 잔인하게 쳐들어가 보물 병기고에 진입해, 병기고를 지키고 있던 인도인 세 명을 구태여 참살하고 보석이 박힌 단검을 차지했다. 물론 소설에서는 일반적으로 곧 죽어도 할 말은 다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작법 2장 5절에 나오는 바, 핸커슬의 칼에 맞은 인도인은 이 와중에도 “월장석은 너와 네 가족들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라 저주를 퍼부은 다음에야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비슷한 시기에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서 기차에 실려 드라큘라가 구태여 섬나라 영국으로 흘러 들어왔듯이 저주받은 보석인 황색 다이아몬드 월장석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섬나라 영국에 도착하게 된다.
세월은 흐른다. 어느새 50년, 정확하게는 49년이 후딱 지나 작품은 드디어 본문에 이른다. 그럼 여태까지는 뭐냐고? 그냥 프롤로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적당하다. 이게 명색이 추리소설인데 작품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어떤 힌트를 떨구어 놓았는지 그걸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간 존 핸커슬의 형제는 맏이 아더, 둘째 존, 터울을 두고 셋째 아델레이드, 넷째 게으른 캐롤라인, 막내로 가장 뛰어나게 예쁜 줄리아, 이렇게 아들 둘, 딸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더는 가문의 칭호와 재산을 상속하고, 존은 상당한 재산을 유증받아 입대했으며, 아델레이드는 공작령 상속 소송에서 패소한 국회의원 블레이크 씨와 결혼해 아들 프랭클린을 낳고 죽었다. 게으른 캐롤라인은 평민 부르주아이자 속물인 에블화이트와 결혼해 역시 외아들 고드프리 하나만 낳고 평생 게으르고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막내 아름다운 줄리아는 귀족 부르주아인 벨린더 씨와 결혼해 외동딸 레이첼을 낳고 과부가 됐다. 서양 것들은, 특히 귀족이라 불리는 붙이들은 피의 순결을 위해 근친끼리 결혼하는 것을 흠으로 여기지 않았던 바, 돈 많은 벨린더 씨 댁의 외동딸인 레이첼은 외사촌인 프랭클린의 사랑과 고드프리의 관심을 단단하게 받고 있었고, 자신 역시 프랭클린을 사랑했다.
핸커슬 남매들은 모두 작은 오빠 존과 거의 의절하고 지내는데 이는 다이아몬드와 관련한 인격적 오점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2년 전인 1866년 6월 21일, 레이첼의 생일날 늙고 초췌한 모습으로 벨린더 저택에 나타났으나 동생과의 면담조차 거절당한 채 돌아가야 했다. 다음해 레이첼 생일엔 대령의 와병 소식이 들렸고, 반년 뒤엔 임종했다는 전갈이, 그가 죽으면서 동생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는 말과 함께 들려왔다. 황색 다이아몬드, 월장석을 레이첼의 다음 해 생일선물로 주겠다는 놀랍고 또 놀라운 유언까지도. 그리하여 맏언니 아델레이드의 아들 프랭클린이 직접 은행에서 인도 다이아몬드를 찾아 들고 벨린더 저택에 도착하는 것으로 파란만장한 추리소설의 막이 올라가게 되는데, 초장부터 프랭클린은 대령의 레이첼 생일선물에 관해 세가지 의혹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째.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어떤 음모의 대상이었던가.
둘째. 그 음모는 대령의 다이아몬드와 함께 영국까지 따라왔을까?
셋째. 대령은 다이아몬드에 대한 음모를 알고 있었는가? 그래서 레이첼을 통해 건방진 누이에게 귀찮고 위험한 유증을 일부러 남기고 간 것인가?
이렇게 이 평온한 집은 이미 죽은 한 사내의 복수심에 의해 살아있는 악당들의 표적이 되어 인도 다이아몬드의 저주에 갑자기 침입을 당하게 되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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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조천遍照天 : 한자어의 사용은 이럴 때 하는 거다. ‘편조천’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고 네이버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구글 검색해보면 제주시 조천읍 조천 농협 맞은편 경희부부한의원이 뜬다. 역자 강봉식은 1923년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생으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도대체 편조천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떠올리게/만들게 되었을까? 아니겠지만, 우리말로 바꾸기 애매한 단어라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일본 번역서에 나온 말이 마침 한자어 조어라 그대로 가져온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늘을 두루두루 비치는 신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그게 달이라면 보름달 정도. 원서에는 힌두의 비쉬누 신을 이야기했다 한다.
- 18세기 몽골황제 : 황제가 다스리던 몽골제국은 1368년 명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후 다시는 칭제稱帝할 수 없었다. 윌키 콜린스가 만주족의 나라 청을 몽고족의 나라 원과 헷갈렸음이 틀림없거나, 역자의 오류거나, 일본 역자의 오류를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 역자가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대로 yuji 시킨 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원문은 '무굴제국'임.
- 인도 영토 내 이슬람국가 :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라고 꼬집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원문은 인도 남부의 세링가파탐.
- 세상에 59개의 식민지를 지배하던 영국의 국왕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단 한 번도 식민지였던 나라와 국민에게 사과나 유감을 표명해본 적 없이 96세로 아주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는데 그걸 식민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국민이 꼭 애도를 표해야 하는지.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무려 5만 6천 명의 병력을 보내 5천 명에 달하는 귀한 자국의 인명을 손상시키며 우리를 지켜준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영국 국왕의 죽음을 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물론 영국 국왕 개인이 사과를 하고 싶어도 정치적 행위라 의회에서 허락을 할 턱이 없다. 단 국왕이면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의 영국을 대표하는 자라서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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