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사람들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64
패트릭 화이트 지음, 이종욱 옮김 / 범우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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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대산세계문학총서 165~166번, 패트릭 화이트의 장편소설 <전차를 모는 사람들>을 정말 인상 깊게 읽고, 시중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작품집 《불타버린 사람들》도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은 2008년에 나온 중판. 초판은 화이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1973년 11월 1일에 나왔다. 아시다시피 노벨 문학상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 몇 주가 더 지나야 한림원에서 작가에게 직접 전화를 해 수상소식을 알려준다. 상 받을 작가가 잠을 자고 있든지, 샤워 중이든지 전혀 신경 안 쓰고 무조건 스톡홀름 기준으로 업무시간에 전화 건다.

  1970년대의 별로 바람직하지 않던 우리나라 문화적 환경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은 요새말로 블루 오션 취급을 받아, 문학상 발표가 나자마자 각 출판사들은 수상 작가의 책을 경쟁적으로 서둘러 출간함으로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별 지랄들을 다 했다. 이 책,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64번에 자리한 《불타버린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금속활자 시대에 내가 좋아한 출판사였던 비상하는 독수리, 범우사 역시 1973년 가을1에 기대하지 않았던 패트릭 화이트가 문학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화이트가 1964년에 출판한 작품집 《불타버린 사람들The Burnt One》을 허겁지겁 얻어와 외대 대학원 아프리카지역 연구학과에서 공부한, 또는 공부하고 있는 이종욱에게 번역을 의뢰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건 당연히 납기였겠지. 세상에. 번역에도 납기가 있다니. 그땐 그런 시대였다. 아마 저작권이고 뭐고 그딴 것들도 신경쓰지 않았을 거다. 남한이 북한보다도 못 살았던 시기2니까 뭐.

  그런데, 이거 참, 얘기하기도 민망한데, 원래 패트릭 화이트가 쓴 《불타버린 사람들》은 모두 11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던 책이지만 열한 편을 다 번역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고 이종욱은 고백한다. 그리하여 중편 분량인 <말라죽은 장미>, <차 한잔>, <유쾌한 영혼>, <고양이를 길러서는 안 되는 여인>, 이렇게 네 편은 번역서에서 빠졌으며, 분명히 “지워지지 않는 활자”로 말하기를, “차후에 보완할 예정”이라고 했음에도, 사내가 이렇게 얘기했으면 못 먹어도 질러봐야 하는 게 당연하거늘, 내가 읽은 “같은 책의 중판”에도 어찌하여 똑 같은 서문을, 부끄럽지도 않은지, “ctrl + v”하고 자빠졌느냐, 하는 거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뭐라고 보태느냐, 그대로 서문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다.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말로 옮기기에 만만치 않은 화이트의 작품을 서둘러 번역하느라고 졸역이 군데군데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부끄럽다.”


  어떠셔? 욕 안나오셔?3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세상에나. 단편을 번역하는 것이 장편보다 훨씬 더 어렵고, 단편에 비하면 시 번역하는 게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종욱한테는 거꾸로였나 보다. 좋다,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우리말로 옮기기 만만치 않은 화이트라니. 어떤 외국 작가가 우리말로 옮기기에 편한데? 있으면 두 명만 대보셔. 하지만 무엇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건 역자 자신이 졸역이 군데군데 있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책을 찍는데 동의를 했다는 거다. 부끄러울 짓을 왜 해? 미치신 거 아니심?

  범우사도 똑 같…거나 더하다. 35년만에 중판을 내면서 그래 초판 서문까지 그대로 베껴? 그럼 초판에 빼먹은 네 편을 중판엔 보완을 해야 할 거 아닌가 말이지. 이종욱이 이젠 늙어 힘들면 다른 역자한테 부탁을 해서라도. 아마 못했을 거다. 35년 세월 동안 세상이 바뀌어 엄중해진 저작권 법 때문에 새로 네 편을 번역하려면, 특정시기 이전 번역물의 복사 말고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렇게 콕 집어 얘기하면 범우사 입장에서 내가 얼마나 얄미울까?


  그러나, 진심으로 이야기하는데, 내가 범우사 사장이고 이 책을 중판까지 찍을 정도로 아꼈다면, 새롭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정식으로 출판하는 쪽을 선택했을 거 같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이이가 쓴 장편소설, 분명히 부담이 되는 분량이긴 해도, <전차를 모는 사람들>를 읽어보면 넉넉히 짐작하실 수 있다. 지금 알라딘을 검색해봐도 아직까지 독후감 올라온 건 내가 쓴 거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인상 깊었던 책이다. 이 작품집 《불타버린 사람들》은 <전차를…>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고드볼드 부인과 같거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집중 관찰한 작품들로 채웠는데, 물론 11편 가운데 7편만 실려 있지만, 이때 52세였던 패트릭 화이트의 시선이 어찌 이렇게 감각적이고 쓸쓸하고 애잔하면서도 따뜻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삶에서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동성애자로 살면서도 동성애 해방운동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저 조용한 삶을 유지하는 편을 선택한 천성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섯 편의 단편과 하나의 중편 가운데 나이 든 부부가 다른 나이든 부부의 집에 정찬을 하러 가서 초청한 부부의 취미였던 새 울음 소리 녹음을 듣는 과정에서 그만 행복한 부부의 기초가 삐긋거리는 장면을 우연히 듣게 되는 <달밤의 할미새>와, 고물상을 하는 가족이 쓰레기장으로 소풍을 가 결코 이혼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부부싸움을 하고, 쓰레기장 옆 공동묘지엔 평생 분방하게 살다 간 자그마한 여인의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고물상 집 장남과 고인의 조카딸이 이 사이에 자그마하지만 예쁘기도 한 사랑을 만드는, 또는 시작하거나 배우는 내용의 중편 <쓰레기장에서>를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이 책의 초판이 모르긴 해도 내려쓰기를 했던 금속활자 시대의 것이었고, 그걸 그대로, 단 한 번의 추가 교정도 하지 않은 듯하게, 그대로 복사해서 책을 만들어 여기저기 눈에 거슬리는 철자법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그것”이라 쓰지 않고 구태여 “그 것”을 고집하는 거. 정말 한 시절 도약하는 독수리4, 범우사를 좋아하는 출판사로 꼽았었는데, 이제 더 이상은 미련을 두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까 말까, 거 참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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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73년은 아직 특정 출판사를 좋아할 단계는 아니었다. 출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월간지 '소년중앙'을 막 떼고, 이제 겨우 '학원'을 읽어볼까 생각했던 소년 시절. 불과 몇 달 후 단번에 집구석 거덜이 나서 학원은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2.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X년 우리나라 남자들 가운데 유일한 내 라이벌 신성일이 역사상 거의 최초로 일본 로케를 떠났다. 이때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동무’들을 술집에선가 어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신성일더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라가 가난한 주제에 간나들이 무슨 영화를 찍으러 일본까지 오고 그래?”
  3. 이렇게 말하니까 “치키치키차카차카쵸코쵸코촉!”의 저팔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라디오 전성기 땐 아마 이런 손오공 주문이 유행했을 걸? “우랑바티바라움 무따라까빠따라까 쁘라냐!”
  4. 도약하는 독수리는 범우사라는 회사가 독수리 스타일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회사 로고가 그랬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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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0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범우사는 걸드문트가 얄밉겠지만 일을 하라! ㅋㅋㅋㅋ

Falstaff 2022-09-23 11:45   좋아요 2 | URL
ㅋㅋㅋ 바로 그게 제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레이스 2022-09-23 0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젠 저도 범우사 책에 손이 안가네요.^^

Falstaff 2022-09-23 11:46   좋아요 1 | URL
저는 애써서 좀 읽어보려 하는 축입니다만 자꾸 이러면 재미 없어요. ^^;;;

잠자냥 2022-09-23 08: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단 범우사는 표지 디자이너도 없는 거 같아요…;; 요즘 나오는 책들도 음….

Falstaff 2022-09-23 11:47   좋아요 2 | URL
요즘 책은 더 정이 안 가서 말입죠. 에휴. 디자인에 돈 쓰기 싫고, 번역료에도 쓰기 싫으면, 문 닫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_-

stella.K 2022-09-23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각주가 더 재밌네요.ㅎㅎㅎ
예전에 삼중당 대 범우사였는데 다 한 시절의 유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잘 나가는 출판사도 앞으로 2, 30년 후에도 지금의 명성을 유지할지는
아무도 모르죠. 좀 안타깝네요.
작년에 임헌영 선생님 인터뷰 자서전을 읽으니 윤형두 사장 대단했더군요.
지금은 정말 초라해졌죠. 경영을 혁신해야할 것 같은데...
그래도 요근래 새로운 책도 간간히 나오고 뭔가 달라질 기미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골드문트님의 전차를 모는... 리뷰 읽고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짐작하시겠지만 저도 사 놓은 책이 많아서...요.ㅠ

Falstaff 2022-09-23 16:50   좋아요 2 | URL
앗, 그렇습니까! ㅋㅋㅋ 각주를 가끔 달 생각입니다. 다음주에도 하나 있답니다. ㅋㅋ
정말 삼중당, 범우사, 아직도 건재한 을유, 여기에 망한 정음사까지 대단한 출판사였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아까운 바가 작지 않습니다. 에휴....
요새 나오는 범우사 책들 검색해보니까 거의 예전에 찍었던 거 같더라고요. 번역물은 저작권 물지 않는 것 위주고요.
<전차를 모는 기수들>은 분량이 끔찍하고 가격도 이에 비례해서 함부로 추천하기는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주로 도서관을 이용하십사, 하는 편입니다. 새털 같은 날들인데 사 놓은 책 먼저 읽으시고 천천히 시작하셔요. ^^

바람돌이 2022-09-23 17: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범우사는 표지가 너무 구려요. 까치보다 더해요.
그나마 까치출판사는 아무도 안내는 양질의 책으로 승부수를 던지는데,
범우사는 좀 어정쩡한 느낌이에요.
그런데 진짜 35년만에 중판을 찍으면서 그대로 내는건..... 안타깝네요.

Falstaff 2022-09-23 19:02   좋아요 2 | URL
ㅎㅎㅎ 까치도 참 오랜만에 듣는 출판사군요. 거긴 주로 레프트 사회과학 서적과 철학 책을 찍지 않았나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굳이 레프트라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말입죠. ㅋㅋㅋ
요즘 까치는 표지 디자인이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아닌가요? ^^;;

바람돌이 2022-09-25 12:16   좋아요 1 | URL
아직 까치출판사 표지 괜찮은거 못봣어요. ㅎㅎ
특히 역사쪽으로는 학술서적들을 많이 번역해줘서 좋은 출판사인데 극악할 정도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촘촘한 편집으로도 유명해요. ㅎㅎ

Falstaff 2022-09-25 17:34   좋아요 1 | URL
지금 검색해보니 정말 그렇군요. 표지 ㅋㅋㅋㅋ
까치 같은 출판사가 돈을 좀 벌어야 하는데 제가 기여해주지 못해 미안한 바가 작지 않군요. ㅜㅜ

바람돌이 2022-09-25 19:12   좋아요 1 | URL
옛날이 많이 사 제껴서 저희집에는 많습니다. 요즘은 공부를 안해서 없군요. ㅠㅠ
 
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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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객관식 문제 하나 풀어보시라.


  문제)  당신은 오늘 출근하면서, 또는 쇼핑 몰에서 한 명의 잘생긴 이성을 봤다. “봤을 뿐”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폰 번호 딸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오늘 출근 길에, 또는 쇼핑 몰에서 당신이, 만났다기 보다 스치고 지난 이성의 모습을 “2백자 원고지 50장 이상”으로 가장 충실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다음 중 누구일까?


  ① 찰스 디킨스

  ② 오노레 드 발자크

  ③ 빅토르 위고

  ④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⑤ 헨리 제임스


  답은 없다. 각자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정답인데, 나라면 ②번 오노레 드 발자크를 고르겠다. 나머지 인간들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서 발자크와 함께 제안을 한 것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세묘사에 관해서는 발자크가 끝장을 본다. 이 책도 ‘미쉬’라는 사나이의 생김새를 상세 묘사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새 세기가 열리고 겨우 3년이 지난 1803년 11월 15일 오후 네 시. 샹파뉴 지방 오브 현의 공드르빌 영지의 관리자이며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첫 장면에선 초록 단추가 달린 초록색 즈크천으로 만든 사냥복 윗도리와 같은 천의 바지를 입고, 정성을 들여 소총을 손질하고 있다. 그런데 보아하니 능란한 사냥꾼은 아닌 듯하다. 사냥에 필요한 기타 도구들이 보이지도 않고 총기도 필요 이상으로 육중한 모습이다. 이어서 미쉬의 생김새를 발자크스럽게 유장하게 그리다가 두 가지의 인상적인 코멘트를 한다. 만일 작가가 묘사한 미쉬의 모습 전부를 그대로 여기에 적어놓는다면, 그게 하도 길고, 자세하고, 장황해서, 적어도 절반의 서재 친구가 ‘친구 취소’ 버튼을 클릭하시리라 믿어 딱 두 개만 소개해보자면 이러하다.

  1.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

  2. 고장에 퍼진 미쉬의 별명은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였다.

  소설책 좀 읽는 독자들은 위 두 가지 문장만 탁 읽어도, 아하, 이자가 악행만 저지르다 비명에 가겠구나, 하고 짐작할 것이다. 짐작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키가 작고 뚱뚱하며 냉정한 성격임에도 원숭이처럼 거칠고 민첩한데다, 하얀 얼굴에 붉게 충혈된 자국이 있는 노란 눈동자의 사나이 미쉬는, 보잘것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고아 신세가 됐는데, 공드르빌 영지의 드 시뮈즈 노후작의 며느님이 거두어 보살피다가,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와 글 읽기와 쓰기, 셈법을 가르치다가, 나이가 차니 공드르빌 소유지의 관리자로 승격을 시켜주었다. 1789년에 프랑스에서는 귀족 부르주아에겐 지옥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고, 공드르빌 성château도 시민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게 된다. 이어 1790년, 노후작의 아들 내외는 쌍둥이 아들을 서둘러 국외로 망명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체포 당해 참수형에 처해지는데, 이때 미쉬는 영지의 관리인 자격으로 단두대 곁에서 목 두 개가 육체에서 분리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다.

  같은 지역 주민들이 미쉬를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인 가롯 유다로 여기는 건, 기묘한 방식으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생김새와 언변에도 이유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1789년 이후, 특히 산악당 자코뱅 일파에 의한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3년 이후에는 미쉬 자신이 마치 공드르빌 땅의 주인이나 다름없이 행동을 한 것에 있다. 여기에 근동에서 보기 힘들 막강한 위력을 지닌 소총도 가지고 있지, 시간만 나면 아예 내놓고 그 총을 분해, 수입(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 조립을 반복하고 있어서 국가에 의하여 몰수당한 드 시뮈즈 후작의 영지를 새롭게 구입한 마리옹조차 미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마 해고하고 다른 이를 관리인 자리에 앉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치기는커녕 미쉬에게 연 3천 리브르의 급여를 보장하고 여기에 따로 매매이익을 분배해주기로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으니, 어느 정도의 악명인지는 아시겠지?

  한 가지 더 드 시뮈즈 후작에 관해 말하자면, 1790년에 시민들에 의하여 체포당해 아르시의 트루아 혁명법정이 사형을 선고했을 때, 당시 법정을 주재한 사람이 누군고 하니, “고대의 조각상 같은 몸매에 깊은 상념에 잠긴 푸른 눈의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지만 음울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한” 여인이자 미쉬의 아내로 그와의 사이에 열 살 난 프랑수아를 생산한 여성의 아버지, 쉬운 얘기로 미쉬의 장인이다. 피혁제조인 출신 장인이 보기에, 무려 1만 프랑의 재산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큰 영지를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미쉬에게 자기 딸을 결혼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장인 자신은 바뵈프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을 피하기 위해 자살해버리지만, 미쉬가 어려서부터 큰 은혜를 입은 드 시뮈즈 후작 부부의 목을 딴 사람이 장인이고, 자신은 당시 단두대 옆에 서 있었으며, 이후 후작의 영지를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좋은 평판은 아예 날 샌 거였을 수밖에. 그러나 1만 프랑이 넘는 재산이라니.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순식간에 오브 현의 아르시에선 미쉬가 서민들 가운데 재산가이자 애국자라는 명성도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다. 역시 프랑스에서도 인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 측정의 도구는 돈이었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 1799년이 되어 나폴레옹이 쿠데타에 성공한 시점엔 어느덧 야금야금 사들인 미쉬의 토지 가치가 10만 프랑에 육박했으니, 이는 매년 받는 급여와 이윤이 6천 프랑에 이르렀고, 마르트가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과 장인한테 받은 상속분으로 이루어진 합법적인 재산이었다. 하지만 유다의 명성은 더욱 굳건해져 잔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작가가 보기에도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 같은 것이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읽힌다. 여기에 나폴레옹에 의한 제정과 왕정복고에 이은 공화정과 다시 왕정 때까지 살아남을 시민 말랭이 등장해 마리옹으로부터 공드르빌 영지를 백만 프랑에 구입한다. 땅 매매에 관한 소문을 들은 미쉬는 득달같이 마리옹에게 달려가 자기가 사겠다고, 말랭처럼 은화 백만이 아니라 금화 8십만으로 사겠으니 넘기라고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금화 8십만? 그게 어디서 나서? 미쉬가 직접 말한다. “그건 알 거 없어. 그러나 안 팔면 머리통을 날려버릴 거야.”


  미쉬의 이웃에 있는 생시뉴 성. 1790년에 공드르빌 성을 함락시킨 시민들이 생시뉴 성에까지 몰려왔을 때, 성 안엔 시민들을 피해 공드르빌 성의 드 시뮈즈 후작 부부가 미리 보낸 쌍둥이 형제가 사촌 누이이자 고아인 드 생시뉴 양 남매와 함께 있었다. 이때 겨우 열두 살이었던 드 생시뉴 양은 시민들의 협박을 무시하고 오빠들에게 싸울 것을 독려해, 스스로 총탄을 장전하고 화약을 날라 오는 등 대단한 활약을 해, 저항군은 열한 명의 시민을 죽이고 끝끝내 성을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 오빠는 독일로 망명을 가 전투 중 전사를 해버려 본인이 직접 여백작으로 작위를 이어가게 된다. 이곳으로 몸을 피했던 쌍둥이 오빠들 역시 후에 라인강을 넘어 망명을 했다가, 나폴레옹을 척살하고 부르봉 왕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조직의 일원으로 귀국, 생시뉴 성에 잠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것이 작품의 커다란 분기점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 아버지를 단두대에서 몸과 머리를 분리시키게 한 인간을 장인으로 둔 남자, 여태껏 자신의 집안 영토를 마치 자기의 개인 땅인 양 아무 거리낌 없이 활보하며 사냥을 즐기고, 나무를 베고, 건물을 리모델링 해서 자신의 살림집으로 삼고 있는 미쉬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뻔하다. 딱 이럴 때, 공드르빌의 영지를 금화 8십만에 사들이는 걸 거절당한 미쉬는, 새로운 땅 주인 말랭이 아르시의 이름난 공증인 그레뱅과 사방으로 넓은 벌판이라 누가 접근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언덕 위의 한 그루 나무 아래에서 드 시뮈즈 후작 가문의 쌍둥이 형제가 프랑스에 잠입해 오브 현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었는데 자기는 어떤 줄에 서야 유리할 것인지를 상의했다. 이때 나무 위에서 정말로 말랭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총을 겨누고 있던 미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말랭 따위를 죽일 시간조차 없다는 절박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예전에 모셨던 영지의 적법한 주인이지만, 자신이 금화 8십만으로 사려고 하는 땅의 원래 주인이기도 한 쌍둥이 형제의 등장에 온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미쉬. 이 유다 같은 외모의 남자가 과연 무슨 짓을 벌이기에 소설작법 8장 1절. ‘소설 속의 불운한 예언은 언제나 틀림없이 들어맞는다’에 의거해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의 여로를 걷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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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9-20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6쪽의 각주 109에 역자가 썼듯 딱 하나의 명백한 오류가 매우 아쉽다.

그레이스 2022-09-20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발자크...
계속 주행중이시군요!

Falstaff 2022-09-20 13: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도 뵈는 족족 읽어 치우는 증세가 있습니다. 여간해서 고쳐지지가 않는군요. ㅜㅜ

잠자냥 2022-09-20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일단 2번하고 5번이요... 리뷰는 책 다 읽고 다시 읽으려고 실눈 뜨고 스킵 ㅋㅋㅋㅋ
아, 최근에 이 책으로 땡스 투 120원? 받지 않으셨나요? 그거 저예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9-20 13:57   좋아요 3 | URL
옙. 발자크와 제임스는 말 할 필요가 없습죠. 디킨스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ㅋㅋㅋ
줄거리요? 뭐 2백년 전에 쓴 거니까....는 아니고요, ㅋㅋㅋㅋ 아무리 읽으셔도 스포 거리는 아예 하나도 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아이고, 그게 잠자냥 님이셨구먼요. 크.... 고맙습니다. 백수한테 120원이 얼만데요!!!

stella.K 2022-09-20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요즘 사람들 고전들을 안 읽죠.
옛날이야 영화를 맘대로 봤겠습니까? 그래서 자세한 묘사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장면전환이 얼마나 빠른데요.
저 다섯 사람은 가히 묘사에 있어서 악마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독자야 어떻든 작가는 묘사를 잘해겠죠.
그래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까요? ㅋ

Falstaff 2022-09-20 19:18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요즘이야 고전이 아니더라도 재미난 게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예시를 든 다섯 사람들을 젊은이들은 TMI 라고들 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2-09-21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굴에 죽음의 낙인 찍히고 유다같은 남자가 주인공이라니 발자크의 묘사가 얼마나 굉장한지 저의 구매욕을 자극하네요. 존경하는 골드문트님! 추가 120원은 저입니다. 원래 땡투 발설 안 했는데 다들 하시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한게 좋네유~^^

Falstaff 2022-09-21 15:16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 땡투 고맙습니다.
예수의 열세 번째 남자의 진짜 정체, 아주 예상 밖일 겁니다. ㅎㅎㅎ 개봉박두!
 
톨레도의 유대 여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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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이후 처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책 구입 요청도 내가 했다. 좋은 책을 너무 비싸게 받으면 빌려 읽을 수밖에. 포이히트방거의 후기 장편들은 분량도 대단하지만 거 참, 이야기 꾸려나가는 게 진짜 일류다, 일류. <고야, 또는 인식의 혹독한 길>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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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18 0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격보고 진짜 깜놀했습니다. ㅎㅎ 저도 어제 지만지 책 한권샀는데 두께보고 가격보고 계속 번갈아봤어요. 뭐 이리 비싸 하면서.....ㅠ.ㅠ

Falstaff 2022-09-18 08:21   좋아요 2 | URL
옙. 지만지 책이 너무 비싸요.
번역 좋고, 다른 회사에 비해 오탈자 별로 없고, 종이질 좋고, 제본상태 좋고, 뭐 이런 것들은 다 인정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비싸야지 너무 비싸면 되겠습니까. -_-;;
근데 더 속상한 것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도 좋은 작품들을 어떻게 그리 잘 골라내서 출간하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겁니다. 안 읽기도 쉽지 않아요!!

그레이스 2022-09-21 0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야...
관심 갑니다
지만지는 책값을 좀 고려해줬으면 좋겠어요
두께와 가격때문에 멈칫하게 돼요^^

Falstaff 2022-09-21 10:15   좋아요 2 | URL
전 본격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젠 백수잖아요? ㅋㅋㅋㅋ
 
월장석 동서 미스터리 북스 8
월키 콜린즈 지음, 강봉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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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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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는 읽지만 그리 좋아하지 않는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을, 어라, 이것 봐라, 무척 재미있게 읽고나서, 앞 뒤 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윌키 콜린스의 또다른 대표작 <월장석>을 샀었다. 윌키 콜린스의 간략한 바이오그래피는 <흰 옷을…>에서 짧게 이야기한 바 있다. 그때 <흰 옷을…>과 <월장석>으로 제법 재산을 불리자 곧 아편 중독에 빠졌다는 말을 했던 바, <월장석>을 읽어보니 콜린스의 아편 복용은 토머스 드 퀸시가 쓴 <어떤 영국 아편쟁이의 고백>을 읽고 그걸 모방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으며, 아편 복용에 따른 일시적 망각 증세를 <월장석>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는 말을 덧붙이겠다. 그러나 독후감에선 어느 장면에 누가, 어떤 방식으로 아편을 복용했는지는 독자의 재미를 위해,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

  정말로 월장석이란 보석이 있다. 루비나 다이아몬드처럼 비싼 돌멩이는 아니지만 진주와 더불어 6월의 탄생석으로 고귀와 순결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 속의 ‘월장석’은 보석 분류상 월장석, 문스톤Moon stone이 아니라, 황색을 띄는 불순물이 섞인 탄소 덩어리, 즉, 19세기 중반에 런던의 보석상들이 약 4만 파운드의 가치를 책정한 바 있는 인도산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4만 파운드. 감이 안 잡히시지? 난 친절한 남자니까 현재가치로 계산해드리겠다. 연 4퍼센트의 이자율로 가정한다. 당시가 1849년이니까, 계산식은 이렇다.


  40,000파운드 * {(1 + 4%)^(2022년-1849년)} * 1,604원/파운드 = 567억 6천만원.


  어떠셔? 경끼 나지? 요즘 로또 1등 당첨되면 상금이 많아야 20억. 세금 33퍼센트 제하면 13억 4천만원. 메피스토펠레스한테 영혼을 판 대가로 300일, 꼬박 42주 동안 연속해 1등을 먹어야 이 돈을 한 번 구경이라도 할 수 있다. 나는 절대, 567억 6천만월 말고 5,676억원을 준다고 해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인간에 따라 완전범죄만 보장된다면, 심지어 완전범죄가 아니어서 평생을 체포의 두려움과 죄의식 속에 살아야 하더라도 살인마저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유혹적인 돈이다. 작품 속에서도 당연히 이 다이아몬드를 손에 얻기 위해 살인은 등장한다. 돌멩이 하나 팔면 강남의 아파트를 약 서른 채, 또는 좋은 상가 건물 한 동을 구입해 누군가의 꿈처럼 “강남 건물주”, 즉 “현대판 봉건 지주”로 군림할 수 있다. 그 인간이 누구냐고? 에이, 아시면서 왜 그려?

  어느새 이야기는 사천시 삼천포항으로 빠지고 말았다. 반성한다.


  작품 속의 월장석, 황색 다이아몬드에 관해 더 알아보자. 약 2억이던가 3억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많고 많은 신 가운데 “네 개의 손을 가진 신” 역시 하나 둘이 아니라서 어떤 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678쪽에 따르면 “달의 신” 역할도 한다니까 죽음의 신 ‘칼리’일 것 같은 신상의 이마에 박혀 있던 보석이었다. 밤에 보면 달이 차오르고 기울어짐에 따라 광택도 변한다는 전설이 있어서 이를 ‘달의 보석’ 즉 Moon stone이라 했고, 이걸 일본 사람들이 소설책 제목을 만들면서 같은 이름의 보석이 있음에도 그냥 ‘월장석月長石’이라 해버렸다. 어쨌든 작가 윌키 콜린스는 이 월장석에 대하여 “달의 영향을 받는다지만 보석으로는 품격이 떨어지는 반투명한 돌”(p.12)이라 했으니 이는 가공하지 않은 원석 상태라는 뜻이렸다.

  저 멀고 먼 11세기. 마호멧 교도의 정복자 기즈니의 마무드가 인도를 침공한다. 회교도들은 힌두사원을 습격하고 거의 모든 유산을 약탈하거나 파괴해버리는데 이 와중에 ‘달의 신상’만 남아 성스러운 도시 베나레즈로 옮겨 새 사원을 짓고 그곳에 모신다. 이때 세 바라몬 교도의 꿈에 수호신인 편조천遍照天1이 나타나 월신의 이마에 박힌 다이아몬드에 영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상의 이마빡에 붙은 월장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세 명의 승려에 의해 밤낮없이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보물이며, 만일 성스러운 돌에 손을 대는 자가 있으면, 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자는 물론 보석을 물려받는 일족 모두에게 기필코 재앙이 쏟아지리라고 주술을 건다. 이미 아시지? 소설작법 8장 1절. 소설 속의 불운한 예언은 언제나 틀림없이 들어맞는다는 거.

  동양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윌키 콜린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18세기에 몽골제국의 황제2를 지낸 오랑제브가 다시 인도를 침탈해 ‘네 개의 손을 가진 여신’의 사원을 파괴하고 한 병사가 월장석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월신을 수호했던 세 명의 승려는 변장을 하고 보석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몇 십년이 흐른 후 신을 모독한 병사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월장석은 이때 이후 현재(19세기)의 인도 영토 안에 있던 회교도의 손을 전전하기에 이른다. 세 수호 승려 혹은 수호 승려의 승계자들은 수호신 편조천의 뜻에 따라 온갖 변천을 겪으면서 월장석을 계속 감시하며 기회를 노렸음은 물론이다. 18세기 말 인도 영토 내 이슬람국가3의 왕 치포 임금이 황색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게 되고, 임금은 보석을 단검 자루에 새겨 넣어 귀중한 보물들과 함께 병기고 속에 비밀리 간직하기에 이른다.

  시간은 흘러 1799년 5월 4일, 영국령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장군 베어드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셀링거패텀 궁전 습격을 결정한다. 왜 습격하는지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다. 식민지는 원래 그런 거다. 원주민한테는 숨만 이어갈 정도로 먹고 살게 해주고, 식민국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약탈해 빼앗아 가는 것.4 

  이때 존 핸커슬이라는 장교가 있었다. 귀족 부르주아 계급이니 당연히 장교였으며 언제 제대를 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중령 계급을 달았을 때 일사병에 걸려 귀국, 대령으로 제대한 인물이다. 이 존 핸커슬이 많고 많은 영국인 병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월장석에 관한 전설을 믿고 있었다. 본래 남이 안 믿는 것을 구태여 믿기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인간으로 셀링거패텀 궁전을 침공할 때 누구보다 용감하고, 누구보다 잔인하게 쳐들어가 보물 병기고에 진입해, 병기고를 지키고 있던 인도인 세 명을 구태여 참살하고 보석이 박힌 단검을 차지했다. 물론 소설에서는 일반적으로 곧 죽어도 할 말은 다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작법 2장 5절에 나오는 바, 핸커슬의 칼에 맞은 인도인은 이 와중에도 “월장석은 너와 네 가족들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라 저주를 퍼부은 다음에야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비슷한 시기에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서 기차에 실려 드라큘라가 구태여 섬나라 영국으로 흘러 들어왔듯이 저주받은 보석인 황색 다이아몬드 월장석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섬나라 영국에 도착하게 된다.

  세월은 흐른다. 어느새 50년, 정확하게는 49년이 후딱 지나 작품은 드디어 본문에 이른다. 그럼 여태까지는 뭐냐고? 그냥 프롤로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적당하다. 이게 명색이 추리소설인데 작품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어떤 힌트를 떨구어 놓았는지 그걸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간 존 핸커슬의 형제는 맏이 아더, 둘째 존, 터울을 두고 셋째 아델레이드, 넷째 게으른 캐롤라인, 막내로 가장 뛰어나게 예쁜 줄리아, 이렇게 아들 둘, 딸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더는 가문의 칭호와 재산을 상속하고, 존은 상당한 재산을 유증받아 입대했으며, 아델레이드는 공작령 상속 소송에서 패소한 국회의원 블레이크 씨와 결혼해 아들 프랭클린을 낳고 죽었다. 게으른 캐롤라인은 평민 부르주아이자 속물인 에블화이트와 결혼해 역시 외아들 고드프리 하나만 낳고 평생 게으르고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막내 아름다운 줄리아는 귀족 부르주아인 벨린더 씨와 결혼해 외동딸 레이첼을 낳고 과부가 됐다. 서양 것들은, 특히 귀족이라 불리는 붙이들은 피의 순결을 위해 근친끼리 결혼하는 것을 흠으로 여기지 않았던 바, 돈 많은 벨린더 씨 댁의 외동딸인 레이첼은 외사촌인 프랭클린의 사랑과 고드프리의 관심을 단단하게 받고 있었고, 자신 역시 프랭클린을 사랑했다.

  핸커슬 남매들은 모두 작은 오빠 존과 거의 의절하고 지내는데 이는 다이아몬드와 관련한 인격적 오점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2년 전인 1866년 6월 21일, 레이첼의 생일날 늙고 초췌한 모습으로 벨린더 저택에 나타났으나 동생과의 면담조차 거절당한 채 돌아가야 했다. 다음해 레이첼 생일엔 대령의 와병 소식이 들렸고, 반년 뒤엔 임종했다는 전갈이, 그가 죽으면서 동생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는 말과 함께 들려왔다. 황색 다이아몬드, 월장석을 레이첼의 다음 해 생일선물로 주겠다는 놀랍고 또 놀라운 유언까지도. 그리하여 맏언니 아델레이드의 아들 프랭클린이 직접 은행에서 인도 다이아몬드를 찾아 들고 벨린더 저택에 도착하는 것으로 파란만장한 추리소설의 막이 올라가게 되는데, 초장부터 프랭클린은 대령의 레이첼 생일선물에 관해 세가지 의혹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째.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어떤 음모의 대상이었던가.

  둘째. 그 음모는 대령의 다이아몬드와 함께 영국까지 따라왔을까?

  셋째. 대령은 다이아몬드에 대한 음모를 알고 있었는가? 그래서 레이첼을 통해 건방진 누이에게 귀찮고 위험한 유증을 일부러 남기고 간 것인가?


  이렇게 이 평온한 집은 이미 죽은 한 사내의 복수심에 의해 살아있는 악당들의 표적이 되어 인도 다이아몬드의 저주에 갑자기 침입을 당하게 되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편조천遍照天 : 한자어의 사용은 이럴 때 하는 거다. ‘편조천’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고 네이버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구글 검색해보면 제주시 조천읍 조천 농협 맞은편 경희부부한의원이 뜬다. 역자 강봉식은 1923년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생으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도대체 편조천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떠올리게/만들게 되었을까? 아니겠지만, 우리말로 바꾸기 애매한 단어라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일본 번역서에 나온 말이 마침 한자어 조어라 그대로 가져온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늘을 두루두루 비치는 신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그게 달이라면 보름달 정도. 원서에는 힌두의 비쉬누 신을 이야기했다 한다.
  2. 18세기 몽골황제 : 황제가 다스리던 몽골제국은 1368년 명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후 다시는 칭제稱帝할 수 없었다. 윌키 콜린스가 만주족의 나라 청을 몽고족의 나라 원과 헷갈렸음이 틀림없거나, 역자의 오류거나, 일본 역자의 오류를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 역자가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대로 yuji 시킨 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원문은 '무굴제국'임.
  3. 인도 영토 내 이슬람국가 :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라고 꼬집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원문은 인도 남부의 세링가파탐.
  4. 세상에 59개의 식민지를 지배하던 영국의 국왕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단 한 번도 식민지였던 나라와 국민에게 사과나 유감을 표명해본 적 없이 96세로 아주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는데 그걸 식민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국민이 꼭 애도를 표해야 하는지.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무려 5만 6천 명의 병력을 보내 5천 명에 달하는 귀한 자국의 인명을 손상시키며 우리를 지켜준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영국 국왕의 죽음을 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물론 영국 국왕 개인이 사과를 하고 싶어도 정치적 행위라 의회에서 허락을 할 턱이 없다. 단 국왕이면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의 영국을 대표하는 자라서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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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9-16 1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래서 작가가 동양사람인가 했더니 그도 아니었군요. 출판사 넘 하네요. 이거 완전 7.80년대식인데 좀 바꿀 필요도 있는데ᆢ편조천도 그렇군요. 아무튼 알아내시느라 수고 많이하셨네요. 근데 쫌 깨긴하네요.ㅋ
미스테리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재밌게 읽으셨다니 관심이 가네요. 근데 670여쪽은 점 난제긴합니다.ㅠㅋ

Falstaff 2022-09-16 11:12   좋아요 2 | URL
아마 이 책의 초판은 70년대 이전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엔 저작권료 내지 않고 불법 번역판을 내던 시기인데, 지금은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정 시기 이전까지 나온 번역물은 그대로 인쇄해 내는 것까지만 허용한다는 특례 때문입죠. 동서문화동판이 몇 년의 법정 다툼 끝에 권리를 보장받은 걸로 아는데, 세월도 많이 흘렀고 하니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번역을 해야지요.
재미나서 진도는 후딱후딱 나갑니다! 도서관 가세요!! ㅋㅋㅋ
저도 지금 도서관입니다. ^^

stella.K 2022-09-16 11:42   좋아요 2 | URL
이거 나중에 제가 쓴 댓글을 보니 술 먹고 댓글 달았나 당황 하셨겠어요. 좋아요도 안하고.😂 앞으로 이런 실수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
짐 도서관에 계시다니 책들이 좋아하겠어요. ㅋㅋ 좋은 시간 보내시다 가시길.^^

유부만두 2022-09-18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왕이 두르고 있던 그 많은 약탈 보석들, 특히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이야기 생각도 나는 소설이네요!!! 그리고 챨스가 사과를요?? 할 마음은 하나도 없을걸요?

Falstaff 2022-09-18 11:41   좋아요 1 | URL
찰스나 고 엘리자베스가 식민지배에 관하여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알프스의 아이거 봉우리 만큼 있다고 해도, 이게 엄연히 국제 정치에 관한 사안이라서,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기에 앞서 반드시 의회에 보고를 하고 승인 또는 적어도 동의를 받아야 할 텐데, 영국 의회가, ㅎㅎㅎㅎ 어림도 없습니다.
영국, 프랑스 같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던 것이 우리한테는 그나마 크게 다행이었습지요. 이집트 국민과 정부에서 엘리자베스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어 이집트로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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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어간다. 작가 이름 모른 채 읽은 다음에 누가 썼겠느냐 물으면, 열 명 가운데 여섯은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할 듯. 발자크 표 시대소설. 이렇게 재미난 소설을 민음사는 뭐하러 무료 제공하고 별점 구걸을 했을까. 하긴, 요새 세계문학전집 내는 거 보면 알 만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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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4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마를 좋아하는 걸드문트님!

Falstaff 2022-09-14 11:53   좋아요 1 | URL
귀신이셔요, 공쟝쟝님! ㅋㅋㅋ

- 2022-09-14 12:03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이 낭만주의적 작가와 골드문트님의 뉘앙스가 닮았어요!! (저도 뒤마 아저씨 좀 좋음..)

Falstaff 2022-09-14 13:41   좋아요 1 | URL
앗! 저하고 뒤마가... 맞습니다. 제 피부색이 조금만 더 검었어도 똑같았을 듯. ㅋㅋ

- 2022-09-14 14:39   좋아요 1 | URL
저 뒤마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데... 닮으셨다니... 제 마음대로 상상하도록 하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긴 거 말고 너낌 비슷해요. ㅋㅋㅋㅋ 역사소설 쓰게 생겼는 데 의외의 낭만주의 아재 감송 ㅋㅋㅋㅋㅋ 먹고 살아야 하니까 대중성을 놓칠 수 없었으나 쓰다 보니 대중적인 거 너무 잘써버린 그런 사람?? 상처받지 마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9-14 0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인데 재미있군요. ㅎㅎ 발자크라 주저했는데 담습니다.

Falstaff 2022-09-14 11:54   좋아요 2 | URL
처음 시작할 땐, 역시 발자크, 했다가 점점 흥미진진해갑니다!
한 인물의 성격이 극적으로 바뀌는 장면, ㅎㅎㅎ 좋더라고요.

유부만두 2022-10-11 13: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라서 주저하신다는 말 저도 동감이었어요.
걱정한 것 보다는 괜찮았....나...흠... 전 인물들 마음, 감정 그려내는 부분이 너무 투박해서 ‘사건‘ 부분을 제대로 따라가면서 즐길 수 없었어요.
너무 아저씨 소설 같...;;;

blanca 2022-09-3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이거 주문각입니다. 골드문트님 믿을게요.^^

Falstaff 2022-09-30 16:50   좋아요 0 | URL
ㅋㅋㅋ 독후감에도 썼는데요, 딱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답니다. 발자크가 퇴고하면서 놓친 게 틀림없어요.

2022-10-1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1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